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5.


시간의 순환하는 미로에 대한 형상, 반드시 반시계적인 방향에서의 출발, 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역시간적인 원형에 대한 집착과 숭배를 지금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때에는 그저 불가항력적인 공포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불쌍한 희생양들을 향해서 디프원과 데이곤의 숭배자들은 한결같은 위협적인 몸짓과 저주스런 무엇인가를 외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외우는 주문을 거의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단 하나의 문장만은 그때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야! 이야! 크툴루 파타간!! 파타간!!”

그 문장과 함께 그들은 높은 음역대의 개구리 울음소리도 함께 내질렀다. 그 소리는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기 보단, 그들의 종족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수한 신호거나, 하나의 위협이라고 판단될 뿐이다. 인간의 언어로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이런 느낌만으로 표기할 수 있을 뿐이다.

아옳옳옳옳옳옳옳옳옳옳옳옳옳옳!!~~~~”

마침내 인간 포로들을 싫은 배가 폭포수가 떨어지는 정중앙부 방향에서 멈춰섰다. 데이곤의 숭배자들이 떡갈나무 섬에 인간 포로들을 내려놓았다. 인간 포로들은 모두 같이 죄수들처럼 손이 밧줄에 묶여져 줄지어져 포박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디프원과 데이곤 숭배자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 예감했지만, 그 후부터 내가 목격한 광경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폭포 속 동굴에서 무엇인가가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헤엄을 쳐서 섬을 향해 곧장 직진해오고 있었다. 그 존재가 물밖으로 튀어 나올 때 나는 하마터면 거의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 자는 데이곤 밀교의 대제사장이 틀림없었다. 머리에 쓴 보라색 왕관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 존재는 아주 천천히 떡갈나무 숲의 그늘 아래로 걸어들어 왔다. 그 존재가 골짜기에 모여든 데이곤을 숭배하는 모든 청중들을 향해서 그 흉측하고 세찬 개구리 고함을 내지르자, 모든 숭배자들이 그를 따라서 같이 합창을 하였다. 그가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자, 모든 숭배자들이 그가 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다 함께 외쳤다

이야!! 이야!! 크툴루 파타간!!”

천 여마리가 넘는 데이곤의 숭배자들이 에워싼 산골짜기에서 모든 악마의 숭배자들이 저 하늘의 불경스런 달을 칭송하고 있었다. 구름을 불러들여서 반시계 방향으로 휘돌고 있는 회오리바람의 달이 마치 화답하듯 회전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비명을 질러대고 싶어졌다. 나는 분명히 그들과는 달랐다. 나는 몸이 떨려왔다. 냉기 때문이 아닌 공포로 인해서 몸 안에서 일어나는 한기였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지만, 꿈이기 때문에 눈을 감는다고 해서 그 광경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꿈이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환기되는 일종의 언캐니였다.


절대로 비명을 질러선 안되요.”

어떤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축축하고 기름이 묻어서 끈적이는 양서류의 피부가 아닌 사람의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그 여인이 내 곁에 서있었던 것이다. 나를 저택으로 불러들여서, 네크로노미콘의 악령에 사로잡히게 한 그 큰 키의 검은 머릿결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내 왼편 옆에 서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비명을 질러선 안되요. 비명을 지르면 저들이 당신을 보게 될 거에요.”

나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이 꿈의 악몽속으로 이끌고 온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나를 도와주기 위해 조언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으시죠? 저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현상계에 존재하는 정지연이란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다른 차원에 속해있는, 정지연의 다른 자아에요. 지금은 그저 그렇게만 알아주세요.”


그 시점에서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 받아 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모든 상황들이 나의 이해력과 판단력을 넘어서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었다.

네크로노미콘의 힘이 강해지고 있어요. 별들의 위치가 1000만년 만에 다시 한 번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거든요. 잠들어 있는 고대의 악신들이 깨어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 또한 모든 것을 다 초월한 존재들이 아니에요. 그들의 의지 또한 하늘의 운행과 규칙에 어긋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죠. 네크로노미콘의 힘은 강해지고 있지만, 오늘은 악령의 존재들이 가장 힘을 덜 발휘하는 시간이기도 해요. 저 하늘의 달이 조금 있으면 그믐달이 되어 며칠 동안 보이지 않게 될 때가 그들의 힘이 가장 잠잠해지는 날들인 것이죠. 역설적으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날이기 때문에, 가장 광란적인 행위를 벌이게 되는 날이 된다는 뜻이에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호수 쪽을 바라보라고 손짓으로 가리켰다. 거대한 떡갈나무 주위를 향하여 원 모양으로 희생양들이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어 엎드려 있었다. 어떤 사람은 완전히 낙담한 듯 수풀 바닥에 머리를 파묻으려 하고 있었다.


저들은 자신들의 힘이 계속해서 유지되기를 원해요. 그래서 달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이런 희생 제의를 치루는 거에요. 크틀루 연대기를 작성한 모든 저자들이 지적하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을 거에요. 디프원들은 인육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그들이 인신 공양을 필요로 할때는 오직 데이곤을 숭배하는 제사를 치룰 때뿐이죠. 그 외에는 그들은 인간의 육체보다는 정신력에 더 관심이 있어요.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정신적으로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이에요. 이제부터 당신이 보게 될 것은 정말 끔직한 광경이에요. 생애에서 이런 광경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에요. 그래도 보셔야 해요. 그리고 절대로 비명을 지르셔서는 안되요.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어요. 알다시피 이것은 철저하게 꿈이에요. 꿈이란 것만 명심하시고 꾹 참아야 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데이곤 숭배자들의 손에는 어느덧 마체테라고 불리우는 칼과 작살과 손도끼 등등 온갖 해적용 살상 흉기들이 들려져 있었다. -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나는 데이곤 숭배자중 일부는 최종적인 단계 이전의 과정에 멈추는 일부 종족들이 있게 된다는 짐작을 갖고 있다. - 대제사장이 양 팔을 넓게 벌리며 휘두르자, 숭배자들은 그 살상 흉기들을 인간 희생양들을 향해서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광란의 공포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산골짜기를 채워갔다. 끔찍한 절규와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몸부림, 살라달라고 말하는 간절한 애원.

나는 수도 없이 눈을 감았지만, 그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칼이 희생양들의 등을 내리쳤고, 창이 사람들의 넓적다리를 찔러댔으며, 손도끼가 사람들의 손을 찍어내며 피에 물들었다. 그 모든 광경이 소름끼치는 달 아래서 벌어지는 행위였다. 나의 행위는 그저 본능적인 방어 동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공포를 이해한다는 듯이 한손은 내 왼손을 꾹 잡고 오른손으로는 내 입을 꾹 틀어막아 주었다.


이것은 그저 꿈에 불과해요. 일종의 상징적 행위에요. 저들의 육체는 현상계에선 여전히 살아있어요. 하지만 자아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되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과는 개념이 완전히 달라요. 이 곳 드림랜드의 바깥에서 저 사람들은 계속해서 인류의 일부로 계속 살아가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영혼은 완전히 소멸되 버려서 이 세계에서 디프원들의 포로가 되어서 저 사람들처럼 인간과 양서류, 어류가 혼합되어 버리는 이종 생명체가 되버리는 거예요.”

그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릿속을 스쳐가는 의문을 즉각 그녀에게 내던져야 했다.

그럼 아가씨의 정체는 도대체 뭐죠? 당신은 저들과 같은 변이 과정을 전혀 겪고 있지 않잖아요. 심지어는 저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아요. 마치 저처럼요.”

저에게는 한가지의 수호품이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꿈을 통해 이 세계에 진입한 것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드림랜드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일종의 차원문을 통해 드림랜드와 현상계를 계속 횡단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비명을 지르게 되면 이 꿈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로잡혀 버리게 되요. 그리고 저들의 희생양이 되버리는 것이죠. 당신은 네크로노미콘에게 받은 특수한 임무를 수행중이기 때문에 저들처럼 자아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인지는 저도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곳 드림랜드 바깥으로는 결코 나갈 수가 없게 되요. , 이걸 받으세요.”


그녀는 나의 한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었다. 그것은 일곱 개의 꼭짓점을 가진 칠망성의 펜던트였다. 고대 인도 문명의 문양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꼭짓점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빛으로 도금된 아주 예쁜 목걸이였다.

이 물건이 당신을 지켜줄 수 있어요. 그곳이 드림랜드이던지, 현상계이던지 말이에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호품이지 만능은 아니에요.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굳은 의지력이에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해요. 저 놈들의 제식 행위는 제의적 의미도 띄고 있긴 하지만 일종의 실험이에요. 절대로 정신을 놓쳐서는 안되요. 입을 꼭 틀어막으세요. 그리고 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비명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저들의 목적이 인간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고통에 짓눌려 비틀거리곤 있지만, 사람들에게 아직은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통을 참지 못해 수풀 바닥에서 뒹굴 거렸으며, 일부는 기어 다니고 있었다. 일어서보려 애쓰는 듯했다. 타격은 인간의 몸에 치명상을 입히는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간 부분에 집중되어져 있었다. 그런 처참한 고문을 계속 당하기 보다는 나는 차라리 죽음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고통스럽고 비참한 광경을 계속 참으면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디프원의 첫 번째 목적은 모든 인간들을 자신들과 교배시켜서 모든 인류를 저들과 똑같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어요. 당신도 러브크래프트씨의 보고서를 읽어보셔서 잘 아실 거예요. 하지만 진화 과정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각 개체마다 최종적인 완성도도 달랐어요. 또한 모든 인간을 디프원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일부분은 인간의 신체로 남겨두는 것이 저들에게도 더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저들은 새로운 방법을 실험중이에요. 지금부터 보게 된 광경은 크틀루 연대기를 작성한 지구의 그 모든 이단아들조차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광경이 될 거에요. 물론 그 많은 사람들보다 그레이트 올드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아우터 갓들의 수가 더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요.”


살육 혹은 고문을 멈춘 데이곤 숭배자들은 살상 도구들을 수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무언가 새로운 것을 꺼내오려는 듯 배를 향해 다가갔다. 그들이 배에서 갖고 오는 것은 조그마한 상자였다. 한눈에도 그것이 애완동물을 담는 상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벌써부터 나는 고양이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귀로 느낄 수가 있었다.


가장 끔찍한 광경이에요. 하지만 참으셔야 해요. 꾹 참고 지켜보셔야 해요. 네크로미콘의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참으셔야만 해요.”

고양이들은 상처 입은 인간들의 주변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고양이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피의 냄새인 듯하였다. 죽음이 풍겨오는 황홀한 향취에 도취된 모든 고양이들의 눈은 붉은색이었다. 핏빛보다 붉은, 붉은 눈의 고양이들 수십여 마리가 피의 냄새를 쫓아서 인간의 신체라는 고깃덩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이보다 더 끔직한 지옥을 본 인간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악령이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광기에 전염된 들고양이들이 인간의 육체를 걸신들린 듯이 뜯어먹고 있는 것이었다. 기력이 다한 육체들에서 자신들의 의지가 아닌 순수한 고통에 찬 비명이 골짜기 안에서 터져나왔고, 그 비명이 골짜기와 산언덕을 맴돌면서 꿈의 세상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디프원들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신들의 접촉보다는 인간에게 친숙한 생물들을 먼저 장악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인간과 직접 접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다를 매개해야 되고, 또 인간들을 해저 깊숙한 곳에 있는 그들의 도시 르뤼에까지 데려가는 것에도 엄청난 시간이 걸린 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그들이 인류와 최초로 접촉하던 때에는 개와 고양이등 인간과 친숙한 생명체들을 무척이나 혐오했지만,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선 그들의 문화속으로 침투할 필요가 철저히 있단 사실을 알게 된 후 부터는 그것들과 접촉하기 노력했어요. 저 고양이들은 물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깊지 않은 냇가나 개울물등에선 잠수도 할 수 있어요.”


나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네크로노미콘을 현대어로 번역하는 일이 끝나게 된다면 최초의 전염체로 고양이들이 선택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고양이는 인간과 친숙하지만 인간에게 포섭된 이후에도 야성의 본능을 완전히 버린 동물이 아니다. 그들은 항상 야성을 지닌채로 인류의 문명속을 배회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염력도 엄청날 것이 틀림없다. 인류사를 순식간에 전설로 만들어 버릴 사태를 고양이들이 불러온 다는 것이다.

 .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상황을 벗어난 지금의 시점에서 그때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내 나름의 추론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때의 나는 어떤 판단이나 이해를 할 수 있는 정신력도 없이 그저 공포를 감당해내기 급급했을 뿐인 미개한 한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 때 그 꿈의 악몽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리고 절대로 비명을 질러선 안 된다는 부탁을 한 번 더 내게 철저하게 당부하였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어쩜 인류의 미래, 이 지구위에서 한줌의 먼지 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이란 존재들이 최후로 귀결하게 될 종족의 미래가 어쩜 그 꿈속에서 내가 본 그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고양이들의 인간의 육체를 뜯어먹는 일이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 일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속에는 그 사태가 영겁에 가까운 시간속에 일어난 것처럼 느껴질 뿐이니까. 그러나 그 후의 사태는 단 한순간의 찰나에서 벌어진 일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그 끔찍한 부패와 훼손이 시간이 지나간 후에도 악몽이 끝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후의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 그녀는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간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네크로노미콘은 그 자체의 생명력 때문에 결국 이 세상으로 소환될 수밖에 없는 책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완성체가 되지 못하도록 만큼은 할 수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에요. 네크로노미콘에 그려진 모든 아우터 갓들과 그레이트 올드원들의 삽화를 찢어내서 불태워 버리세요. 그렇게 된다면 그 존재들이 현상계에 부활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능력 만큼은 어느 정도는 제한시키는 것이 가능해요. 당신이 읽고 있는 네크로노미콘은 철저한 원본이에요. 당신은 그레이트 올드원들의 원형과 아우터 갓들의 훼손되지 않은 본명들을 전부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책밖으로 뛰쳐나온 아우터 갓들의 실물을 보고 난 후에도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요? 네크로노미콘은 악령이 깃든 책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완전히 불태울 수는 없지만, 부분적인 기록 정도는 훼손하는 것이 가능해요. 그러니 현상계로 돌아가거든 주저없이 그 그림들을 불태우세요. 네크로노미콘의 원전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런 방법으로 이 세상을 지켜냈어요.”


그녀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하고 있을 쯤부터, 나는 그 악몽의 최종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인간 희생양들의 비명은 완전히 젖어들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더는 생명이라 부를 수 있을 힘이 완전히 소진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죽은 인간의 육체들이 삽시간에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끔직하게 손상된 신체덩어리들에서 새살점이 돋아나는 듯하더니, 부러진 신체조직들의 일부분들이 다시 조립되는 것이었다. 비록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죽은 육체들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 옆에 있는 그녀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것이 저 사악한 악마들이 바라는 인간이에요. 모든 생명과 자의식이 상실된 육체덩어리의 인간, 오직 하나의 명령과 욕망에만 복종하는 인간, 살인과 식육만이 존재의 전부인 그런 인간!”


무덤에서 송장들이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곳은 분명히 무덤은 아니었고, 단지 수풀 바닥이었다. 죽음의 상태에 들어선 인간들이 언데드적 존재로 부활하는데 걸린 시간은 채 10분이었을까. 아니다. 5분도 아니 되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그 사악한 느릅나무의 그림자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생명이 없는 육체들이 살아난 것이었다. 그 생기없는 눈의 하나를 들여다 보는 순간에 나는 결국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더는 참아낼 수 없었고 견뎌낼 수가 없었다. 나의 비명을 산골짜기 안에 있는 모든 사악한 존재들이 듣게 되었다. 모든 사악한 존재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고, 디프원의 우두머리인 그 대제사장의 시선도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모든 사악한 것들의 시선이 아직 남아있는 한 사람의 희생양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대제사장이 혐오스러운 함성을 질렀다. 모든 사악한 존재들이 나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현상계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달아나라고 말했다. 산 정상으로 뛰어올라가라고 말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말며, 산 위까지 뛰어 가라고 나에게 외쳤다.

나는 그녀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살기 위한 방어 본능이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죽든 나는 디프원의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속력을 다해서 뛰어갔고, 구릉을 몇 개나 넘어섰는지 모른다. 돌부리에 부딪혀 몇 번을 넘어졌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의 명령에는 나름의 충실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그 악몽 속에서 겪은 장소는 추측컨대 르뤼에는 분명히 아닌 듯하다. 데이곤의 추종자들인 디프원들과 맞닥뜨렸음에도 그런 추정을 하는 이유는, 우선 내 인상에는 많은 디프원들을 그 도시의 곳곳에서 봤음에도, 그들이 어디인지 모르게 활력이 떨어져 보인다는 인상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꿈의 세계를 분명히 명사로써 드림랜드라고 말하였다. 나는 현상계로 돌아온 이후에 다시 한 번 크틀루 신들의 연대기를 철저히 조사해보았고, 드림랜드를 최종적으로 통치하는 신은 데이곤이 아닌 니알라토텝이 옳을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또한 고양이와 같은 인간과 친숙한 동물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해저 생활에 친숙한 디프원의 입장에선 완전히 새로운 환경과 만나고 그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적응한다는 그들 나름의 중대한 결단에 들어선 과정에 있을 것이라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에게 습지 생활은 친숙한 것이지만 고산대의 건조하고 황량한 기후는 본질적으로 낯설고 새로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니알라토텝은 드림랜드의 일부분을 데이곤에게 빌려줬지만, 데이곤의 사역마인 디프원들은 습지대의 생태권 바깥으로 나와서는 거의 생활을 하지 않았다. 만약 그 산에도 골짜기와 계곡이 없었다면 디프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까지 올라올 이유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뒤를 돌아볼 생각 없이, 그저 전속력으로 산꼭대기를 향해 달려가기만 했음에도 나를 뒤쫓는 디프원과 데이곤 숭배자들의 수가 차츰 줄어들고 있음을 어느 정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고산 지대로 갈수록 디프원종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 수분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것이 비록 꿈이었다고 하나 나의 신체 조건은 상인 남성의 평균을 웃도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고, 내가 상대하는 적들은 이계의 악마적 존재들이었다.


나는 결국 큰 바위가 솟아있는 어떤 비탈에서 돌부리에 부딪혀 또 한 번 넘어져야 했고, 다시는 일어날 기력을 찾지 못했다. 숨을 헐떡이는 가운데, ‘디프원들 중에서 가장 발군의 신체 능력을 갖춘 한 녀석이 나를 덮쳐오기 위해 펄쩍 뛰어오르는 것을 달 그림자를 통하여 볼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고 모든 체념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무언가 나는 눈앞에서 번쩍이는 것을 보았고, 그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내게서 떨어지며 풀밭에 고꾸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를 쫓아오던 몇 안남은 디프원들이 무엇 때문인지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것을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주변을 둘러본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드림랜드에서 유일하게 나의 조력자 역할을 해주었던 그녀가 이제는 나의 수호신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녀가 손전등을 비춰서 일곱별의 팬던트를 번쩍이게 한 것이었다. 일곱별의 팬던트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는 어떤 상징이었고, 그녀는 일곱별의 팬던트를 번쩍이게 하면 그들에게 비로소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어서올라가세요. 모든 힘을 다해서 산정상으로 올라가셔야 해요. 절벽이 보이면 뛰어내리세요. 그것만이 당신을 지켜줄 수 있어요!”

나는 다시금 죽음 힘을 다하여 달렸다. 꿈이었으나 내 목을 죄어오는 듯한 가슴의 압박을 지금도 생생히 느끼고 있다. 완전한 탈진 상태에 이르렀을 즈음에야, 나는 절벽을 볼 수 있었다. 나무조차 몇 없는 사방이 온통 돌무더기뿐인 황량한 산꼭대기였다. 절벽 앞에 섰을 때, 나는 어찌할 수 없는 방어본능이 되살아났다. 정녕 이 방법 뿐이란 말인가.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는 것과 디프원에게 사로잡혀 언데드가 되는 것간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뛰어내리세요. 무엇을 망설이세요! 여기는 드림랜드에요. 당신은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어느덧 그녀는 나의 뒤에 서 있었다. 나를 보호해주기 위하여 팬던트에 계속 손전등을 비추고 있었다. 나를 뒤쫓는 흉측한 괴물들이 네 마리 정도 안개 너머에서 어슬렁거리는 듯도 보였다. 그 녀석들은 팬던트 불빛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고, 팬던트 불빛을 보게 되면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짙은 어둠과 안개속에서 손전등 불빛을 비추어서 그들을 다 쫓아낸 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한 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안개들뿐이었다. 어느 정도 높은 절벽인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절벽 아래로 발을 디디려 했다. 그 때 사악한 어떤 목소리가 내 어둠의 뒤에서 쩌렁하게 울러퍼지면서 나를 다시 한번 멈칫하게 했다

그것을 내려놔! 이 망할 년아. 너는 네 아비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새하얀 안개 어둠의 너머에서 번뜩이는 사악한 눈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디프원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체격과 위압적인 목소리를 갖춘 가장 강력한 존재가 내 뒤에 서 있었다. 그 잔혹한 사악함 앞에서 나의 가련한 수호신은 어떤 두려움도 없이 그 공포와 맞서서 그것을 향대 독설을 내뱉었다.

저리 꺼져! 망해야 할 존재란 바로 당신이야! 그깟 허접스런 예술 나부랭이를 만들기 위해서 엄마를 악마에게 바치더니 이제 내 영혼까지 잡아먹으려는 거야! 하지만 절대 내 영혼을 양보 못해. 반드시 내 몸을 찾아내서 내 어머니의 복수를 해낼 거야. 당신을 지옥의 저편 너머로 보내 버리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겼다. 무언가 나또한 이 세상에서 보호해야만 할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도 좋을 것 같다는 예감,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희망이 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는 예감이었다.

나는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절벽아래를 향해 던졌다. 나 자신을.......


하늘에선 사악한 달이 기괴한 눈으로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끝없는 안개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러나 더는 무섭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 운명을 편안히 맞아 들여도 좋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용기라는 것이 그런 것일까? 문득 그녀가 내 손에 쥐어준 일곱별의 팬던트를 떠올릴 수 있었고, 바지춤을 뒤져서 그것을 꺼내보았다. 나는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 일곱별이 스스로 반짝이는 것이었다.

안개 아래에서 뭉개 같은 것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황금빛의 뭉개구름이었다. 어쩜 저 구름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 탈 없이 지구로의 착지가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그러했다. 뭉개구름이 내 몸을 편안히 받쳐주었고, 나는 구름의 인도로 지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구의 푸른 빛이 너무나 반가웠고 아름다웠다.


6.

 

깨어나자마자 나는 주저 없이 그녀가 부탁했던 것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어느덧 아침이 가까이 왔고, 창밖에는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해변의 아침 햇살은 어찌 그렇게 싱그럽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일까. 바다의 수면에 부딪혀 찰랑이는 은빛 물결을 오랫동안 감상하고 싶었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250여 페이지에 이르는 네크로노미콘의 책장에서 악령들의 삽화가 그려진 책장수를 찾아보니 종합해서 35페이지였다. 악령을 추종하는 사역마들까지 모두 다 찾아내 불태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과연 책 자체의 생명력이 갖고 있는 저항이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질긴 가죽을 칼로 자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나는 서랍에서 사무용 칼을 꺼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악마가 그려진 책장들을 오려냈다. 한 페이지를 오려낼 때마다 책 안에서 어떤 생명체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가장 마지막 페이지, 밤하늘의 사악한 기괴한 눈을 닮은 소용돌이 모양의 신이 그려진 그 장만큼은 아무리 필사적으로 오려내려 해도 찢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 신이 아자토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궁극적인 혼돈이자, 모든 것의 시초이며, 동시에 종말은 그것만큼은 이 세상에 남겨두어도 좋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혼돈이 그것에서부터 시작된다면, 모든 종말 또한 그것이 등장함으로써 끝이 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그 책장이 갖고 있는 생명력이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하기 때문일 뿐이다.

진정한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도무지 불이 붙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라이터를 켜서 아무리 불로 지져보아도 그 책의 종이들은 그을음하나 생기지 않았다. 예사로운 책이 아님은 분명했다.


나는 곰곰이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꿈속에서 그녀가 말한 대로 이 책은 악령이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또한 어떤 힘에 의해서 아직까지 봉인된 책이기도 하다. 책 전체를 불태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부분적으로 불태워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전체적 주제는 악령들의 연대기였다 그것 들의 시작과 종말에 이르는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나는 그 삽화들을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 - 비록 마지막 장은 네크로노미콘속에 봉인되어 있지만 - 까지 나란하게 책장에 펼쳐 놓았다. 가장 마지막 장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은 다해 봐야 했다. 문득 나는 그 사람이 점토뿐 아니라 가끔 금속이나 보석을 세공을 할 때도 있단 사실을 떠올렸다. 괴물들의 손톱이나 발톱을 장식할 때는 금속을 세공하고, 괴물들의 눈에는 항상 어떤 종류의 보석을 박아 넣었다. 그 사람이 금속에 묻은 그을음을 닦기 위해 작업실에 시너를 비축해 두고 있단 사실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항상 밤에 작업을 하고 아침나절부터 저녁 한창때까지는 잠이 드니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였다. 혹시나 정지연씨의 현상계에 속해 있는 자아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넓은 저택에서 그들 부녀가 낮에 깨어나서 돌아다니는 것을 본적은 거의 없었다. 틀림없이 그녀또한 잠에 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계단을 디디면서 2층으로 내려갔다. 작업실 문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연장통을 놓아두는 우측 한편에 시너를 담고 있는 통이 분명히 보였다. 그 남자는 연장통 창문이 있는 좌측 한편에 놓여진 침대 위에 잠들어 있었다.


나는 숨죽여 그의 작업실에 들어갔고, 그 통을 손에 집어 들었다. 조각상의 사악한 보석박힌 눈들이 나를 주시하는 듯한 오싹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외면하며 작업실 밖을 슬금슬금 벋어나려 했다. 문득 등 뒤에서 그 사람이 몸을 뒤척이는 듯한 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시너 통을 떨어뜨릴 뻔 했다. 하지만 들키지 않게 문을 닫을 수 있었고, 그가 나에게 대여해준 장서실까지 무사히 그것을 들고 올 수 있었다.

이제 결심한 것을 실행에 옳길 때였다. 그것 외에는 생각해 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네크로노미콘의 악령들이 올려져 있는 책상위에다 시너를 쏟아 부었다. 그리고 라이터로 불을 지폈다. 불이 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것이었다. 타들어가는 종이 안에서 악령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심리적인 공포가 아닌 실제로 들리는 소리였다. 악령들이 불길 안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야!”


그 미친 조각가가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윗옷을 벗더니 책상을 향해 뛰어왔다. 불을 끄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불길은 오히려 그의 옷에 옮겨 붙을 뿐이었다. 그는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소화기가 놓여 있단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소화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나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거 놓으라고. 어서 놓으란 말이야.” 그는 내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나를 밀쳐냈지만 나는 그가 일어서려 할 때 발목을 잡아서 넘어 뜨렷다. 나는 한동안 눈앞이 얼얼했지만, 그가 소화기를 집어 들려 할 때쯤 그에게 또다시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랐다. 한동안 뒤엉켜서 우리는 땅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나이와 완력에 있어서 젊은 내가 그를 압도해야 할 듯싶었지만 악마에게서 영감을 얻는 그의 힘이 나를 압도했다. 하지만 이미 불길은 책상을 넘어서 카페트에 옮겨 붙고 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절망에 찬 눈길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방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서 유리창을 가리는 커튼에까지 옳겨 붙고 있었으며, 그가 수십 년 동안 모아둔 마도의 고서를 꼽아든 서책장에도 불길이 와닿고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방을 전부 송두리째 불태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미친 조각가는 자신의 수십년 동안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벌어졌다. 아래층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십 여개의 악령들이 차원 너머의 어떤 곳에서 벌어진 일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완전한 패닉에 휩싸인 그 남자는 2층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가 없어지자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입술이 터졌고, 코가 터져서 셔츠가 온통 피범벅이었으나 다행히 이빨을 부서지지 않은 듯 했다. 불길을 그대로 방치해둬서는 안될 일이었다. 걷잡을 수 없기 전에 진정을 시켜야 했다. 나는 소화기에서 안전핀을 뽑아내서 가스를 분사했다. 다행히 불길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2층에서 들리는 고통에 찬 비명은 전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가 무너지고 쓰러져가고 파괴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었지만, 일단은 불을 끄는 일이 우선이었다.


불길이 다 꺼진 후에도 나는 그것이 남겨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명히 책장 위에 함께 올려져 있었지만 네크로노미콘의 원본 책자와 내가 필사한 원고는 그 잿더미 속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불길이 태운 것은 고작 삼십여 페이지의 삽화들과 나뭇더미(그 외의 잡다한 부스러기)였을 뿐이었다.

그 때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나 내 뒤에 서있었다. 절망과 분노가 뒤섞인 완전한 혼란의 눈, 그가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당신이 뭔데 나의 꿈을 파괴하느냔 말이야!” 그가 나를 향하여 소리쳤다.

나는 차분하게 그의 말에 응수하기 위해 애를 쓰며 대답했다.

그럼 저는 왜 당신의 꿈을 위해 이용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는 더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쏘아볼 뿐이었다. 그의 혼란한 감정은 점점 절망으로 가득 채워져 가는 듯했다. 나는 어느 순간 그가 매우 애처롭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꿈속에서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어요. 당신이 예술적 영감을 위해서 아내를 희생했다는 이야기를 당신의 딸을 통해서 들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딸의 영혼까지 악마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더군요.”

그말은 사실이 아니야.” 그는 잿더미에 휩싸인 책장 쪽으로 걸어오며 말 했다. 그의 모든 얼굴과 몸짓에 체념과 낙담의 제스처만이 보였기에 나는 더는 그에게서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잿더미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내 아내를 살려내 준다고 하지는 않았어. 다만 영생을 준다고 했지. 내 아내의 영혼은 이계 너머의 어느 곳에서 살아있어

이계 너머에서. 그게 당신에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죠?”

자네는 이해를 못해. 그건 나만이 알 수 있어.”

그는 잿더미에 불타버린 종잇장을 손으로 움켜쥐어 보았다. 완전히 불에 타버린 책의 페이지들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내고만 싶다는 듯이. 하지만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고, 단지 잿더미일 뿐이었다.

“2층으로 내려가 뫄. 당신이 나에게서 빼앗아 간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야.”

그의 말을 들은 후에 나는 2층으로 내려갔다. 작업실의 문은 열린 채로 놔두어져 있었다. 거의 모든 조각상들이 부수어져 땅바닥에 나뒹구는 돌더미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남겨져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겁에 질려 있는 한 여인의 전신상과 그녀를 포획하려고 마수를 뻗치고 있는 어떤 괴물의 조각상뿐이었다. 그 조각상도 신체의 절반쯤은 훼손되어져 있었다.

저 조각들안에 갇힌 생명이 죽었기 때문이야. 저 조각들도 함께 부서져 버린 거야.”

하지만 아직 네크로노미콘의 원본이 남아 있잖습니까. 나의 필사본도 아직 위에 있고.”

그것은 나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그 책의 삽화들이지, 문자가 아니야. 그것이 나와 네크로노미콘 사이에 관계된 계약이었으니까.”

어찌했든 그것은 당신의 사정이지, 저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저는 할 만큼 했습니다. 이제 그만 나를 보내주십시오. 책은 거의 다 번역이 됐어요.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제가 알바가 아니지만요. 나는 단 한번도 스스로 원해본적이 없는 악몽에 시달리며 당신을 도왔어요.”

그는 냉소 섞인 눈길로 나를 쏘아보더니 연장도구를 올려놓은 책상이 놓여진 쪽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더니 지폐 더미를 꺼내서 세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가 주는 돈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지폐 더미를 편지 봉투에 넣어서는 나에게 건냈다.

“10만 원짜리 수표 20장이오. 어쨌든 꽤나 수고하셨소. 금단의 고서를 아무나 읽는 것은 아니지. 지금까지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오. 하지만 당신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네크로노미콘을 찾는 사람은 많아. 새로운 사람을 물색해서 남은 작업을 끝낼 것이오. 네크로노미콘은 이제 당신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만 돌아가시오.”

그깟 쓸데없는 일에 자존심을 걸고 싶진 않습니다. 그건 악마의 책이지 나의 책은 아니지요. 어쨌든 수고비는 지불해주신다니 참 고맙군요. 잃어버린 내 시간을 보상받을 만한 액수는 충분하군요.”

네크로노미콘을 완역했더라면 당신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영광을 얻었을 거야.”

세상이 멸망하는 데 그딴 영광이 무슨 소용이라는 겁니까!”


나는 소리를 치면서 그의 손에서 지폐 봉투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작업실문을 뛰쳐나왔다. 1층의 현관문을 열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과연 문을 열고 나와보니 그의 저택은 아주 높은 언덕위에 지어져 있었다. 다소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서 바다의 소금기가 실려오는 듯 했다. 나는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촌 마을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아주 평범한 어느 식당에 들러서 나는 간단하게 요기를 했고, 식당 아주머니께 마을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아주머니는 비교적 친절하게 장산 시내로 가는 버스 정류장의 위치와 번호를 알려주었다. 식당을 나가기 전에 나는 혹시나 하는 의문을 풀어보고 싶어졌다.

저기 언덕위에 말이에요. 저 큰 저택에 사시는 분을 만난 적이 있으세요? 이 마을을 자주 방문합니까?”

아니요. 저 저택에 노인분과 따님 한분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는데, 그 분들이 우리 마을에서 본 적은 거의 없어요. 저 저택에 사시는 분들은 뭔가를 필요로 할 때는 꼭 택배 주문을 하던가 아님 도심으로 나간다고 하던데요.”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을 할 수가 있었다. 최소한 이 어촌 마을은 인스머스와 같은 퇴행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진 않은 것이다. 저택의 미친 예술가는 아직 자신의 상상력을 예술적인 감각에만 사용하고 있을 뿐, 현실을 향해서 발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었다.

나는 마을버스를 타고 장산에서 하차한 후에 다시 그곳에서 시내버스로 환승해서 나의 동네에까지 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피곤이 쏟아져서 정신없이 잠에 빠져 들었다.


6.

역시 예상했던 대로 나의 직장인 재즈바는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사장이 혼자서 영업을 전담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거의 보름 만에 나타난 것에 적잖이 놀라워했다. 왜 갑자기 사라졌으며,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나는 그저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아프시기 때문에 급하게 고향을 다녀오게 되었다고 둘러댈 뿐이었다. 미처 연락을 못드려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휴대폰을 챙겨갈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이곳에는 별일이 없었냐고 그분께 질문을 했다.

이 가게야 무슨 특별한 일이 있겠어. 다만 요즘에 세상 자체가 약간 뒤숭숭해

세상이 뒤숭숭하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시죠?”그러니까 말이야. 이 동네에 들고양이 꽤 많잔아. 근데 들고양이가 열 마리 넘게 우리 동네에 있는 어느 놀이터에서 떼 지어서 죽어있는 것을 보게 됐단 말이야. 참 이상하지 않나?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독을 탄 밥을 고양이들한테 먹인 것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한 장소에서 열 마리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게 정말 이상해. 요즘 나는 이 가게까지 오는 길에 적어도 죽은 고양이를 하룻동안 다섯 마리는 넘게 볼 수 있어.”

고양이가 죽는 것 외에는 별 다른 일이 없는 겁니까?”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런 거라고 한다면 별 수 없는 거지만 말이야. 요즘 들어선 정말 이상해. 우리집 아파트 옆 1105호네 안경집 한다는 김씨 일가족 말이야. 그 집의 큰 아들이 자살을 했다지 뭔가. 공부도 썩 잘하고 급우들하고도 잘 지내는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이었다는데, 나도 도무지 그 친구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를 모르겠어. 내가 보기에도 항상 긍정적인 성격이었거든. 그리고 뭐 뉴스나 신문을 보면 항상 사건 사고는 끊임없이 생기는 거지만 요즘에는 왜 그렇지 끔직한 사건만 터지는지. 정말 말세가 올려나. 허허.”

나는 더는 질문하지 않고 깊은 침묵에 빠졌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테이블에 올려진 진토닉 한잔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그가 나를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 너무 수척해 보이는군.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 같아. 어머니가 정말 많이 불편하신 가?”

나는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크로노미콘의 악령에서는 벋어났지만 내게는 여전히 악몽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었다. 비록 이제는 단편적인 꿈의 흔적일 뿐이지만, 나는 여전히 가끔씩은 그 안개 짙은 숲 속을 거닐 때가 있었고, 유황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냇가를 볼 때가 있었다. 깨어나 있을 때도 가끔 거리를 걸을 때면, 내 곁을 지나는 사람들 중의 일부에게서 데이곤 밀교의 숭배자인 듯한 느낌이 올 때가 있어서 오싹해지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의 몸에선 항상 생선 비린내가 풍겨져 왔다.


그런데 말일세. 어떤 여자가 한 닷새 전쯤에 여길 온적이 있었네. 오자마자 대뜸 당신을 찾더군. 내가 한동안 자네를 본적이 없다고 하니까, 자네가 돌아오게 되면 꼭 이 책을 자네에게 선물을 해 주라고 하더군.”

사장이 나에게 건넨 책은 네크로미콘이었다. ‘네크로노미콘 - 금단의 고대 문서, 국내 최초 완역본이라는 허접스러운 광고 문구를 싣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나의 것이었다. 내가 악령의 영감에 의해서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떠오르는 대로 마구 써낸 내용이 그대로 적혀져 있었다. 그러나 태초의 혼돈에서, 앞으로 다가올 종말이며 그 후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 악마적인 존재들이 이 땅위에 행해왔고 또 행할 역사가 모두 다 기록된 그 책이 틀림없었다. 머릿속이 분별없는 혼란으로 엉망이 되어져 가고 있었다. 황소의 머리를 가진 암호랑이, 혹은 암소의 몸통위에 호랑이의 머리가 덧 쓰인 듯한 혼돈이었다. 나는 구역지기를 올라올 것만 같았다. 사장에게 몸이 급히 불편해져서 이만 집에 들어가 보아야겠다고 인사를 하곤 그 자리를 떠났다. 잠시 동안 몸을 추스르겠노라고 그 후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줄곧 네크로노미콘만을 펼쳐보았다. 비록 주요 그레이트 올드윈들의 삽화들이 모두 생략된 책이었지만 문자로 기록된 사악함 만으로도 나는 그것이 이 세상을 온통 광기의 암흑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의 앞과 뒤 어디에도 역자의 이름은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압둘 알하즈레드의 아랍어 원본을 최초로 완역한 책이라고 출판사는 강조하고 있었다. 출판사 조차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출판사의 주소와 전화번호조차 표기되지 않은 책이었다. 하지만 그 책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마다 네크로노미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합리적 성향이 강하고 실용주의적인 한국 사람들이 왜 이렇게 신비주의적인 현상에 집착하는지 방송사마다 저명인사를 초빙해서 사회학적 분석을 내놓기 위하여 혈안이 되고 있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이 날에 나는 네크로노미콘이 17주째 베스트셀러 판매 순위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다. 판매량은 점점 증가해서 도무지 하향 추세를 보이지 않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미 나의 완역본을 기초로 해서 영어판과 프랑스어판, 독일과 스페인어판의 출판 계약이 성립되었다는 소식도 접하고 있다. 그 책이 전해준 영감에 의하여 시나리오를 쓴 어떤 무명작가의 시나리오가 국내의 가장 유명한 영화사에서 진행한 기획전에서 최우수상을 심사 받았으며, 곧 그 시나리오의 영화가 제작 단계에 들어서게 될 것이란 소식도 접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스테리 현상에 대해서 언론은 크게 주목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시베리아의 어느 극지에서 손바닥 크기 만한 괴생명체가 러시아 연구팀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온몸이 붉은 빛을 띄는 뱀장어처럼 생겼고 입에서는 맹독을 뿜는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연구팀은 그것에게 올고르 코르고이라는 이름을 불였다고 했는데, 나는 그 생명체의 사진이 네크로노미콘 원본에 실린 삽화 중의 하나와 완벽하게 일치한 것을 보는 순간 거품을 물 뻔하였다. 미국 유타 주의 어느 사막 변경에서 열기에 타 죽은 듯한 괴생명체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접하였다. 그것은 하반신은 물고기이며 상반신은 남자의 형체를 띄고 있었는데 그 또한 네크로노미콘의 원본에 실려있는 어떤 아우터 갓의 사역마가 틀림없는 것이었다. 주요 언론계는 이런 소식들을 그저 타블로이드 가십의 일부로만 취급할 뿐이지만, 오직 나 한사람은 사역마들의 삽화를 그 책의 원본에 그대로 남겨둔 것을 후회하고 있을 따름이다.


예리한 사람들은 네크로노미콘의 몇몇 중요한 부분들이 생략되었으며, 전체적인 구성이 산만하며, 그 안에 모순들이 일관되게 발견된다면서 그 책을 조잡한 위조본이라 절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지자들은 그 책이 악마학에 관한 고대의 지식들을 종합한 책이며, 신화와 같은 구성을 취했기 때문에 모순은 사소한 것일 뿐이라 반박하였다. 지지자들은 나의 완역본이 성경과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그 책의 궁극적인 귀결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언서라고 말하였다.

나의 책에 대한 비판자들과 자지자들의 의견은 모두가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논쟁이 아니라, 그 책 자체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네크로노미콘에서 얻은 영감을 발표한 어느 영국 시인의 시가 그 해 최고의 시로 영국 왕립학회에서 선정되어 곧 상장을 수여받게 될 것이란 소식을 하루 전에 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창작물이 아니다. 패러디조차 아니다. 그것은 그저 표절에 불과하다. 나는 네크로노미콘의 어느 구절의 불길한 예언에 관해서 압둘 알하즈레드 자신이 서사시의 형식을 빌어서 그 부분에 주해를 달아놓은 것을 읽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인 또한 나의 네크로노미콘을 읽으면서 그 시를 접하진 못했을 것이며, 지구의 다른 모든 네크로노미콘 추종자들처럼 예지몽을 통해서 그 내용을 전수받았을 것이기에, 그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머지않은 미래에 종말이 좀 더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되고, 불길한 예감이 아닌 지금의 현실로 다가오게 될 때에 사람들은 나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 숭배를 받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단지 내가 말해주고 싶은 것은 일말의 희망만큼은 붙잡고 있으라는 것이다. 네크로노미콘의 악령과 대면한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광기에 저항하면서 악령이 불러준 모든 것들을 다 기술한 것은 아니다. 비록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의 현실로 그들의 숨결이 스며들겠지만, 내가 그레이트 올드원들의 거의 모든 삽화들을 불태웠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은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될 것이란 사실만을 전해주고 싶다. 인류의 미래에 파괴는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결코 파멸은 아니며 인류의 형상이 상당할 정도로 변형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멸종은 아니라는 것이 내가 인류에게 해주고 싶은 기대의 전부이다.


그 악몽의 드림랜드에서 나를 지켜준 엘더 갓엘더 사인처럼 소수 나마 엘더 갓과 접촉하는 인간은 틀림없이 있게 될 것이며, 그들을 통해 인류의 미래가 계승될 수 있기를 나는 바랄 뿐이다. 하지만 엘더 갓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지구에 얼마나 될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가 없다. 적어도 형상만으로 사람들이 엘더 갓아우터 갓의 본질적인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네크로노미콘을 통해서 접한 엘더 갓을 대표하는 어떤 존재의 형상도, 그 자체로는 인간에게 전혀 접근이 불가능한 괴기함만을 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와 미를 선입견 없이, 그리고 선과 악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혜안 있는 인류가 이 지구에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내게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나를 드림랜드의 악몽에 끌어들였으면서, 동시에 그 악몽에서 탈출시켜준 한 여인의 행방이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그 여인의 모습을 어디서도 본적이 없다. 틀림없이 이계의 어떤 행성에서 그녀의 본래적 자아가 걷는 길과 이 곳의 지구에서 오염된 자아가 행하는 행위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리라. 그러나 나는 그것이 선악의 양면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인간성의 어떤 지표를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어느 지점에서 그 두 여인의 나뉘어진 자아가 서로를 만나게 되고 다시 합치되는 그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잠식해오는, 우리에게서 미래를 세는 날수를 점점 빼앗아가는 종말의 그림자에 대해서 어떤 혜안을 제공해주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이제 나는 여기서 이 기록을 종식하려고 한다. 파국의 파도가 한차례 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갈 때까지, 나는 내 존재를 보호해줄 피난처를 찾을 궁리만을 하고 있다. 그곳이 정신병원이 된다 하더라도 차라리 거리 밖을 무턱대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겨진다.


요즘에는 꼬마아이들조차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주문에다 리듬을 넣어서 찬양가처럼 암송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되어 사악한 소용돌이 문양의 달이 검은 하늘에 떠올라서 대지 위로 빛을 뿜어대면, 꼬마아이들 집밖으로 나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이런 노래를 부른다.

아아. 크툴루 파탄! 이야! 이야! 크툴루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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