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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노미콘을 향한 추적>>

 

1.

 

한 때 나는 밤을 무척 사랑했다. 밤이 되면 세상이 조용히 잠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 내게는 밤에만 깨어나는 어떤 것들이 보였다. 나는 밤이 되어야만 활동하는 그 존재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나는 밤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왔다. 그것을 하루가 흘러가는 중의 어떤 시간적 상황을 설명하는 개념이라고 믿지 않았다. 나는 밤 그 자체가 살아있으면서 활동하는 어떤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밤에 대한 나의 모든 예감이 사실로 드러난 지금은 다르다. 나는 이제 밤이 오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잠에 드는 것이 두렵다. 비록 두려움의 실체를 꺼내서 누구의 눈앞에 보여줄 수는 없다고 하여도,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밤에 생겨난 일이었다. 그날 밤의 사건 이후로 내게는 더 이상 인생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다. 내게 남겨진 생의 모든 시간을 다 더한다 해도, 그 보름날, 보름 동안의 시간이 뺏어간 것을 회복시켜주진 못한다.


모든 것은 한 여인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당시 나는 서면의 어느 도심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재즈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는 가난한 재즈바였다. 초저녁부터 시작해서 자정을 조금 넘기는 영업 시간 동안에, 그곳을 찾아오는 손님은 열손가락 안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적자에 허덕이는 카페가 문을 닫지 않는 이유는 그저 상업적 가치가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그런 상권에 위치한 주점을 인수하려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상태에도 내가 해고되고 있지 않은 이유는 그저 내가 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이유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곳에서 나는 한 달을 만근으로 가득 채워도 백만원도 받지 못하는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었다.



시급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하는 일이 손쉽고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저녁 7시쯤 문을 열어서 새벽 1시에서 2시쯤 까지만 그저 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새벽잠이 적은 내게는 가장 적당한 직업이었다. 손님이 없는 동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장르들인 스토너 메탈 장르나 고전적인 사이키델릭과 프로그레시브 락음악등을 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손님이 찾아오면 그 손님들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유투브나 소울식등을 통해 검색해서 들려주면 그뿐 이었다. 안주는 새우깡이나 과자류를 적당히 접시에 담아주면 됐으니 따로 요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음악 듣기조차 지겨워지면 시나 소설등의 잡문을 써가면서 시간을 때웠다. 그것조차 지루해지면 그냥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었다. 누구의 시여도 누구의 소설이어도 상관이 없었다. 내가 읽는 것은 글자 속에 숨겨진 의미보다는 글자 그 자체가 전해주는 느낌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저 글자를 읽어내기만 했을 뿐이었다. 글은 하나의 암호이며 독자의 임무는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을 해독해내는 작업이란 야망을 그 당시의 나는 포기한 상태였다.




한때의 나라는 사람은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소설이 잘 안 풀릴 때는 시를 썼고 희곡도 조금씩 썼다. 한때의 나에게도 야망이 가득했었다. 누구에게나 이름만 듣게 하면 알아낼 수 있는 대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필력은 나 자신조차 이해 못할 잡문만을 만들어 낼 뿐이었고, 공모전의 수상자 이름에는 항상 내가 아닌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필력을 나의 능력으로 흡수해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면류관은 항상 다른 이들에게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세월은 흘러가버렸고, 어느덧 나는 삼류소설가의 발턱에도 이를 수 없는 낙오자란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이르러버렸다. 자괴감만이 내게 돌아오는 전부였다.



쌓여가는 자괴감의 비대칭적인 곳에서 자의식이 산더미처럼 커져가고 있었다. 나의 자의식이 자괴감을 먹어서 커져가는 것인지 그 반대적으로 자괴감이 자의식의 자양분을 흡수하고 있는 것인지 나 자신조차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머릿속에 가득한 지적 먹물 때문에 자의식만 가득해져서 막노동도 하지 못하고, 생계에 도움 되는 이렇다 할 기술조차 배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런 식으로 나의 세월을 허비해 버렸다. 그러듯 어느덧 삼십대의 중턱에 이른 것이다.



그 재즈 카페가 언젠가는 폐업을 하게 될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 어떠한 준비나 전망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다가올 내리막길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 내리막길은 완만한 경사면이 아니라 아마도 낭떠러지와 같은 비탈이 틀림 없으리라. 나는 추락하게 될 것이다.



재즈라는 타이틀이 새로운 트랜드에 민감한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매력을 주는 음악 장르가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그 카페를 찾는 사람들은 중장년층이 대다수였다. 그 사람들조차도 대부분 오래된 LP레코드에 대한 향수 때문에 그곳을 찾은 것이지 굳이 재즈를 듣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은 재즈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엘튼 존이나 빌리 조엘 같은 올드팝 싱어들에 대한 향수를 되살리러 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고, 나역시 그들의 요구를 뿌리칠 이유는 없었다. 그 사람들이 빌 에반스와 오스카 피터슨의 연주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취향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까지 재즈에 대한 나의 애정은 록큰롤에 대한 열정에 비견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재즈가 듣고 싶어졌다. 항상 침울하기 만한 나의 기분에 어느 정도의 서정성을 불어넣어 환기를 주고 싶어졌다. 그날은 부산에서는 보기 드물게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창밖에 맺히는 하얀 수증기를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다. 창을 닦아내도 하얀 안개는 창문으로 계속 흡착되었다. 밤은 사물들의 윤곽을 흐릿하게 하기 때문에 좋다. 눈이 내리면 밤이 지운 사물들의 경계를 하얀 수증지가 덮는 듯이 더 희미해진다. 물론 기온이 상승하면 저 모든 눈이 녹아버리고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가리어졌던 경계는 다시금 선명해지겠지만, 지금은 그저 이 순간이 좋을 뿐이다. 눈은 녹아 사라져버릴 것이지만 밤은 다시 돌아올 것이고, 아침과 낮이 열어놓은 사물들간의 경계선을 다시 지워버릴 것이다. 혹은 단순화시킬 것이다.



눈 내리는 시내를 바라보면서 그런 상념에 빠져있던 중에 로비의 문이 열렸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젊은 여성이 종종 찾아오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첫인상은 서면 시내의 번화가와 유흥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윤락 여성의 차림새였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이라 많은 노출을 할 순 없지만 몸의 굴곡을 여지없이 드러내주는 타이트한 스키니 청바지와 부츠, 갈색 코트. 짙은 화장을 한 얼굴, 높은 콧대에 크고 둥근 눈, 아름답지만 너무 인공적이어서 조화롭다기 보다는 조금은 거부감을 드는 첫인상. 하지만 한번쯤 유혹하거나 유혹당해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그런 여자였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이런 낡고 어두운 카페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서면에는 트랜디한 여성들의 기호를 만족시켜줄만한 호화로운 바와 카페들이 즐비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도저히 그렇게 모던한 여자들의 욕망을 만족시켜줄만한 어떤 것이 갖춰져 있는 곳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런 곳을 찾아온 거지, 하는 의혹이 순간적으로 마음속에서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나의 당혹해하는 얼굴 표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디스크 자키석의 바로 앞자리, 다시 말해 나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숄더백을 열고 뒤적거리더니 담배를 꺼냈다. 여자들이 흔히 좋아하는 민트향이 나는 국산 박하 담배였다. 나는 재떨이와 메뉴판을 그녀에게 건냈다. 속으로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계속 망설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어이없는 첫마디가 입밖으로 꺼내지고 말았다.



여기서는 케이팝을 틀어주지 않아요.”

그 말을 듣고는 그녀는 내 얼굴을 빤리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는 것이었다.

입구에 들어올 때쯤부터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왔어요.”

그리고 그녀는 카페의 전경을 고개를 돌리면서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의 포스터,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찍은 사진, 너바나와 커트 코베인, 존 콜트레인, 마일즈 데이비스, 지미 스미스 등등..... 그리고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참 특이한 곳이네요.”

너무 낡은 곳이죠내가 대답했다.

여자의 눈을 살포시 들여다보니 그 눈에는 어딘지 모를 슬픔과 요상한 귀기 같은 것이 엿보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예쁘면서도 기묘하게 사악한 느낌이 드는 눈을 나는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너무 짙은 화장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낡다니요? 제가 보기엔 아주 세련된 곳인데요. 인테리어도 그렇고…….”

낡았다기 보다는 저의 말은 이곳이 조금 구식이란 뜻이에요. 고전적이라는 뜻도 될 수 있겠고.”

확실히 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나긴 하네요. 외국에 있는 어떤 BAR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네요.”

외국에서 오셨어요? 좀 이국적인 느낌이 들게 하는 얼굴인데.”

아니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크게 번지더니, “전 순수한 한국인이에요이라고 말하고는 산뜻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긴 했어요.”

미인이셔서 그렇게들 말하는 거예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은 좋네요. 하지만 너무 과찬하시는 거 아니세요?”

과찬 아닙니다. 저라는 사람은 도무지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아름다움에 어딘지 귀기가 스며들어 있다는 말은 입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나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잘 못한다는 것은 옳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만 말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반쯤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진실을 모두 있는 대로만 말하면 사회로부터 소외된단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듣고 싶은 노래는 없으세요?”

지금은 특별히 생각나는 곡이 없네요. 저는 음악을 잘 모르거든요. 그냥 사장님이 틀어주는 노래만 들을게요.”

저는 사장님이 아니에요. 하하.”

웃음을 조금 들려주긴 했지만 사실 그런 경우가 가장 난감하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마음속에 스며들만한 스마트한 음악을 나는 거의 모르기 때문이다. 20대 중후반쯤부터 우중충하고 궁상맞은 정체성을 확고하게 갖게 되면서 내가 듣는 음악도 어딘지 음침하고 그로테스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의 표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잠깐 동안 고민하다 나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1956년도 앨범인 쿠킨(cookin)의 리마스터링 씨디를 앨범장에서 꺼내서 들려주게 되었다. 꽤 오랫동안 조용히 우리는 음악만 듣고 있었다.



그런데 서랍장에 꽂혀있는 저 많은 것들이 전부 다 엘피 레코드들이죠?”

그녀가 오른손의 검지를 뻗어내며 약 2500여장의 lp들이 꽂혀있는 카페의 서랍장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 그렇죠. 제 소유는 아니고 거의 다 여기 오너의 소장품들이지만 제가 사서 꽂아둔 앨범도 몇 백 장 정도는 되요.”

거의 다 재즈 음반들인가요?”

비율로 따지면 록큰롤 음반들이 더 많아요.”

지금 듣고 있는 노래 상당히 좋은데 누구의 곡인지 알아도 되나요?”

지금 듣고 계신 곡은 마일즈 데이비스의 곡이에요. 트랙은 2번 트랙이고요. Studio Chatter라는 곡이에요.”

노래가 괜찮네요. 전부 다 연주곡인가요?”

이 앨범에 수록된 곡은 전부 다 그래요.”

취향이 참 특이하시네요. 듣기 좋으세요?”

듣기 좋으니까 듣는 편이죠. 당신께는 꽤 생소한 음악이죠?”

생소하긴 하지만 저도 싫은 건 아니에요. 다만 이해가 좀 안될 뿐이죠.”

음악을 굳이 이해하려 들을 필요는 없어요. 그저 음감이 전달해주는 느낌에 그냥 감각적으로 반응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음악을 즐기는 한 방법이죠.”

이 음악이 저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 건 사실인데, 그것을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굳이 음악을 언어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어떤 것들은 정말 말로 표현이 되질 않거든요. 또 설령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부분은 대체로 이론적인 지식이 바탕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지식이 충분하게 자신의 정서적인 느낌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자기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것이거든요.”

느낌이라는 것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녀의 예뿐 눈이 예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훨씬 이전부터 어떤 특정한 대상에 그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다시 가늘고 긴 검지를 뻗어내서 서랍장의 일부분을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저곳에 진열된 책들은 무엇이죠?”

그녀는 내가 심심할 때 시간 때우기 용도로 읽고 있는 몇 권의 책들이 진열된 곳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제목들이 흥미로워요. 몇 권만 보여줘도 될까요?”

그다지 재미있는 책들은 아닌데요.”

저는 재미있을 것 같아요. 특히 저 책과 저 책이요.”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책들은 <유럽의 점성학><악마에 대한 모든 것>이란 책이었다. 모두 외국 도서를 번역 출판한 것으로 내가 보기에는 번역이 조악하기 그지 없는 삼류 수준의 페이퍼 북들일 뿐이었다.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조금요. 흥미가 있는 편이죠.”

나는 그 두 권의 책을 그녀에게 건넸고 그녀는 <유럽의 점성학>부터 차근차근하게 그리고 매우 유심히 책장을 넘기며 읽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러한 신비주의적 지식을 접하는 데는 왠지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이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고 느껴졌고, 한참 고민하던 끝에 파로아 센더스(Phroah Sanders)의 곡을 들려주었다. 수확의 계절(hervest time)이란 곡이었다.

노래가 정말 좋은데요. 아주 쉽게 책의 내용에 몰입이 되는 것 같아요.”

모든 관계는 궁합이 맞아야 조화가 잘 되는 거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어떤 대상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개와 궁합이 잘 맞는 사람이 고양이와 궁합이 잘 맞지 않는 것처럼요.”

하지만 때때로 개와 고양이와 모두 궁합이 잘 맞는 사람도 있긴 하잖아요.” 그녀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나의 말에 대답했다. 음악의 영향 때문인지 그녀의 책 읽는 속도는 조금씩 빨라졌으며 그래도 여전히 광채를 발하는 눈빛을 보면서 그녀의 집중력 또한 놀라울 정도로 상승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정말로 예언적 점성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녀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그 즈음에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의 장은 영국의 시변 점성학자 윌리엄 릴리의 생애와 예언을 기록한 부분이었다. 윌리엄이 시민전쟁의 발발일과 찰스 1세의 사형식이 있던 날을 정확하게 예언한 부분, 그리고 1665년에 런던에서 발생한 페스트 대역병과 1666년에 일어난 기록적 대화제가 발생한 날을 정확하게 예언한 부분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글쎄요. 반쯤은 믿고 반쯤은 믿지 않는 편입니다. 반쯤을 믿는 이유는 노스트라다무스나 당신께서 지금 읽고 있는 책에 기록된 윌리엄 릴리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실존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제게는 미래를 내다볼 정도의 투시력이 없거든요.”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만 믿을 수 있다고 보시는 것이세요? 철저한 경험론자이신가 보네요.”



그런 것은 아니에요. 다만 보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곧 검증 가능한 과학이라는 평범한 논리를 거부할 수는 없다는 뜻이죠. 그런 것이 과학이잖아요.”

저는 과학이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해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 말을 끝내면서 그녀는 <유럽의 점성학>을 덮고는 <악마에 대한 모든 것>의 책장 첫 페이지를 열었다. 나에게는 그녀의 그 모든 행동이 물이 흘러가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보였다. 마치 지금의 이 순간이 어느덧 시간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착시적 혼란이 슬금슬금 나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하였다.

이 책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군요.”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아시죠?

발행 연도나 역자의 이름이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잖아요. 그리고 책도 아주 낡아 보이네요. 정말 서양의 어떤 고서를 보는 것 같아요.”

그 책은 아주 오래된 어떤 책의 필사본을 재번역한 겁니다. 발췌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진 않지만 비교적 현대 시기에 가까운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죠.”

그런데 왜 역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은 거죠? 이런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 시도는 제가 알기에는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저는 당신 같은 아리따운 여성분이 왜 이런 악마학 같은 사이비 학문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악마학은 사이비가 아니에요.” 다시 책에서 눈을 떼어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야릇한 광기의 흔적이 배여 있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악마학은 실재하는 존재들에 대한 학문이에요.”

악마가 실재한다고요? 그것을 어떻게 믿으시죠?”

그녀가 일어섰다. 그녀는 좁은 카페의 중앙에 있는 가장 큰 테이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즈음에 파로아 센더스의 음악도 연주가 끝나서 카페에는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완전한 침묵.

나는 악마를 느낄 수가 있거든요. 그것들은 저의 곁에 있어요.”

그녀는 블랙 사바스의 데뷔 앨범 포스터가 걸려있는 왼쪽 카운터의 벽면 근처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그 포스터의 괴기함에 도취되는 듯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의 빠져드는 몽롱한 눈빛으로 그 포스터를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 그림은 대체 뭔가요?”

뮤지션의 포스터죠. 블랙 사바스란 밴드에요. 헤비메탈이란 장르의 실질적인 창시자고, 그 포스터는 그들의 첫 앨범의 표지 디자인입니다.”

멋지네요. 이들의 음악을 좀 들려주실 수 있으세요?”

아가씨는 정말 특이하신 분이시네요.”

뭐가 특이하단 거에요?”

헤비메탈을 찾아서 듣는 여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거든요.”

헤비메탈이 뭐가 어떻다는 걸까요? 저는 그저 다른 사람들의 취향이라고만 생각할 뿐이거든요.”

다른 사람의 취향을 존중한다는 뜻은 기본적으로는 좋은 것이죠. 하지만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의 취향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제게는 왠지 슬픈 일로 느껴져요.”

왜 그렇게 느끼세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맞아요. 바로 그거에요. 그런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저는 저 자신의 한계를 느낄 수 있게 되거든요. 내가 어디까지나 그저 나라는 존재에 불과함을 인지하게 된다는 사실이 저를 서글프게 하거든요. 결국 그것은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에 불과할 뿐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조금 어려운 이야기네요. 저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이해를 못하겠어요.”

나는 블랙 사바스의 레코드를 진열장에서 꺼내서 레코드 플레이어에 올리고 바늘을 끼우면서 말하고 있었다.

저는 이 음악의 완벽한 검은 어두움을 아가씨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블랙 사바스의 가라앉은 묵직한 암울한 사운드가 카페 안과 우리의 내면을 점점 암울하게 채워가고 있었다.

노래가 너무 좋아요. 정말 마음에 쏙 들어요.” 그녀는 작은 동작으로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까지 내게 보여줬다. 작은 소녀가 그런 행동을 하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나 귀여웠다.

그런 것은 어디서 보셨어요?” 내가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물었다.

텔레비전에서요. 어떤 채널인지 생각이 나지는 않는데, 음악 라이브 방송에서 밴드들이 연주하는 리듬에 따라 사람들이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너무 귀여웠어요.”

그녀는 계속 머리를 끄덕이면서 음악의 리듬에 따라 발도 움직여보면서 말했다.

이런 음악을 실제로 내가 연주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기타를 치면서 드럼도 연주하면서, 직접 노래도 부르고 말이죠.”

전 한때 그런 일도 하긴 했었는데......”

뭐라고요? 헤비메탈 밴드를 했었다는 말씀이세요?”

....... 그런 일로 돈은 못 벌었지만요. 이래 보여도 제법 노래를 잘 불러요.”

이야. 멋진데요. 이분들의 노래도 부르셨나요?”

당연하죠. 사실 이 나라에선 헤비메탈에 대한 취향이 어느 정도 있는 친구들도 블랙 사바스의 곡을 자주 연주하진 않아요. 워낙 스레쉬 메탈이나 블랙 메탈 같은 빠르고 공격적인 음악에만 사람들 취향이 편중 되어 있어서요. 안타까운 일이죠. ...이런 전문적인 용어는 초보자들에겐 거의 문외한일텐데, 죄송하네요.”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근데 이들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뭔가 특별한 것을 느껴본 적 없으세요?”

특별한 것이라고요?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시죠?”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그냥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하는 저에겐 무언가 정말 특별한 것이 느껴지거든요.”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사악함이나 기괴함 같은 것에 이끌리는 그런 감정을 물으시는건가요?”

. 바로 그거에요. 바로 그거. 그런거요.” 그리고는 그녀는 크게 웃었는데, 단지 유쾌한 감정이 폭발해서 쏟아져 나오는 그런 웃음만이 아닌 그 속에는 무언가에 신들린 듯한 광기가 잔뜩 실여있는 것만 같았다.

전 그런 것이 좋아요. 자꾸만 그런 것에 이끌려요. 내 마음이요.”

저도 한때 사타니즘에 관심이 있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면서 그런 사상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어요. 신이 없다면 악마라는 존재의 의미도 없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신의 성스러움의 믿지 않는 것과 신 자체를 믿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주 달라요.”

하하. 재미있군요.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은 아주 오랜만인데.”

그리고 관심이 없어졌다는 것과 완전하게 부정한다는 것도 사실은 알고 보면 다르죠. 제가 보기엔 선생님은 부정한다기 보다는 관심이 없어졌다는 편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많은 오컬트 책자를 수집할리는 없을 거 아닌가요? 제가 만나본 사람 중에 저 정도로 오컬트 책을 많이 수집한 사람은 선생님이 거의 예외에요.”

나는 그녀가 선생님이라는 극도의 존칭을 쓰는 것이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레코드 진열장의 음악보다는 상대적으로 수는 적지만 - 그래도 20여권의 책이 진열장이 꽂혀 있었다. - 내가 가진 책에 담겨 있는 사상들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지금 선생님이 듣고 계시는 이런 장르의 음악과 선생님이 관심 가지고 있는 분야의 공통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에요.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저런 책을 읽을 수 있을까요?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의 기담 모음집’, 그 책에는 우크라이나의 습지대에 살고 있다는 호수의 요괴, ‘비이라는 생물이 등장하지 않나요? 모파상의 단편 모음집이나 카프카의 변신이나 심판과 같은 책은 평범하다고 할 수도 있죠. 하지만 모파상과 카프카 같은 작가들에게 오컬티즘의 영향력이 짙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죠.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같은 시집은 보다 분명히 뚜렷하고요. 하지만 하만 에이본의 에이본의 서와 같은 본격적인 오컬티즘 서적은 대체 뭔가요? 러브크래프트는 하만 에이본이 헬라스 사람이라고 생각된다고 했지만, 사실 하만 에이본은 바이킹 시대 노르드 바이킹 집단의 룬 전승사가였어요. 그는 지금으로 보자면 노르웨이 영토에 속하는 어느 지방에 태어난 사람이죠. 그래서 그가 저술한 책자의 최초 원본이 모두 룬 문자로 기록된 것이라고요.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판본도 번역자가 중세 프랑스어 판 복사본의 필사본을 다시 복췌한 판본이라고 밝히고 있지 않으세요? 그 중세 프랑스어 판본은 유럽 근대화의 시대에 잠깐 동안 부흥한 오컬트 지식의 유행에 힘입어, 영국 출신의 신지학자 존 메자말렉이란 사람에 의해서 영어로 재 번역된 적이 있지요. 하지만 세월의 오래된 풍파에 휩쓸려 그는 자신의 번역본은 원전의 소실된 많은 부분을 찾아내서 수록하지 못한 점을 스스로도 안타깝게 느낀다고 밝힌바가 있어요. 하지만 존 메자말렉이란 그 사람 자체가 뛰어난 신지학자였기 때문에 그 사람의 독창적인 지식과 상상력으로 매꿔진 그 판본도 결코 수준이 낮다고는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선생님이 갖고 계신 판본의 번역자도 아마 제 생각엔 존 메자말렉의 번역본을 재 번역한 책일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사실 중세 프랑스어를 연구한 학자는 이 나라는 지금까지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주장은 신빙성이 전혀 떨어져요. 물론 선생님의 한국어 판본에도 번역자의 이름이 적혀 있진 않을 거에요.”

나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매료되어가면서 가슴속에서 황홀하면서도 무언가 멍멍한 감정이 향료의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 감정의 상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오컬트 지식을 습득하고 계신 겁니까? 이런 막막한 지구의 변방 같은 나라에서, 그런 심연의 지식을 습득하면서 암흑의 세계를 향해 두 손을 뻗으시는 것은 멍청한 짓입니다. 사람들이 비웃어요.”

비웃지 않는 사람들도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선생님도 그렇지 않으세요?”

글쎄요. 그런 질문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네요. 너무 오래 기다렸기 때문에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을 모두 다 내다버린 것 같아요.”

씁슬한 이야기였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가볍게 웃었다. 나는 다운템포의 헤비메탈 음악이 가져다주는 묵직한 위압과 가라앉은 실내의 공기 속에서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이 이상한 방향으로 친밀하게 엮어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가고 있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이미 눈이 그쳤으며 만개한 구름들이 저편으로 지나는 그 안개의 숲 사이로 달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엄한 달이 검은 하늘에 떠 있었다. 가득한 만월의 찬란한 은빛 원형이 위엄에 찬 눈길로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달빛이 흩날리고 있었다. 진눈깨비와 함께. 그리고 고요한 정적.

혹시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을 좋아하세요?” 그 엄중한 침묵의 무게를 꿰뚫으면서 그녀는 그런 질문을 나에게 던진 것이다. 마치 내 마음의 정곡을 찌르려고 작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좋아합니다. 미친 듯이 좋아하죠.”

에이본의 서 287쪽에 나오는 어떤 사라진 고대 문명의 신전 사진을 선생님도 알고 계시겠죠? 그 형태와 곡선이 기가 막힐 정도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사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에이본의 서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 책을 그녀에게 전해준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유치한 짜깁기겠죠. 그 책은 삼류 판타지 소설에 지나지 않아요. 현대에 만들어진 건축의 유니크한 특성을 배껴와서는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겁니다.”

그런 말씀하시는 분이 밑줄을 그렇게 많이 쳐가면서 꼼꼼하게 읽으세요? 아시다시피 이 책은 출판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에요. 그리고 선생님이 밑줄 치신 부분과 제가 밑줄 친 부분은 묘하게도 약간씩은 차이가 있네요.”

그녀는 책을 살짝 들어서 내게 보여줬다. 그 책은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그녀는 나처럼 금단의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대체 그 책은 어디서 구한 것입니까? 저는 그저 부전동의 헌책방 골목길 서점들을 드나들던 중 눈에 띄는 책이기에 구입한 것일 뿐이에요. 하지만 책을 구입할 당시 서점 주인 아주머니조차 우리 책방에 이런 책이 있었는지 자신도 전혀 몰랐다고 말하시더군요.”

이 책은 제 아버지가 구입하신 책이에요. 언제 구입하신지는 저도 몰라요. 저희 집에는 이 책과 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아주 많아요. 아마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것과는 비교도 안될 거에요. 그리고 제 아버지는 이런 책들을 구입하면서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어요. 저희 아빠는 화가이자 조각가에요. 그 책들을 통해 영감을 얻어가면서 그분의 예술은 뭔가 새로운 빛을 발하기 시작했어요. 대신에 그분의 정신과 영혼은 점점 무엇인가에 빼앗겨가고 있어요.”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는 심리겠지요 저도 글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런 느낌을 갖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고 저 자신에게 계속 주입을 시키지요.”

당신께서 저희 아버님의 조각품을 한번 진짜로 보셔야 되요. 그럼 아마도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분의 예술품들은 정말 악마의 영감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결과겠지요. 저도 글을 쓸 때에 글 속의 인물이나 상황이 마치 현실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기는 해요. 하지만 저 자신에게 이것은 착각일 뿐이라고 계속해서 주입시키죠. 그렇게 해야 미치지 않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선생님이 알고 계시는 현실과 다른 현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시겠어요? 다른 현실은 어쩌면 있을지도 몰라요. 물론 저도 어쩌면 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이를테면 제가 이 카페를 찾아온 이유도 그냥 어찌 보면 하나의 영감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막상 들어와서 이곳을 보게 되니, 그저 단순히 우연의 장난이라고만 느끼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요. 선생님도 공포 소설을 좋아하시니 그 작가의 이름을 아시겠죠? 스티븐 케인이란 사람이요. 그 사람의 소설 안개 숲 속의 마을, 홉스의 끝이란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스티븐 케인은 저도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데. 아직 홉스의 끝은 읽어보질 못했어요. 안타깝게도요.”




홉스의 끝의 주인공은 안개 숲이라는 조그만 카페를 운영해요. 선생님처럼 라디오 디제이 흉내를 많이 내죠. 그리고 그 카페의 배경을 한번 보세요.”

그녀는 다시 핸드백 속으로 손을 넣어서 홉스의 끝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홉스의 끝은 책장 중간씩 삽화가 곁들여진 전형적인 미국식 호러 소설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삽화의 한 페이지는 아무리 내가 이 세계를 합리성의 틀로 이해하고, 호러에 대한 취향을 그저 하나의 흥밋거리로 여기는 이성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만이 전해주는 단말의 쇼크만은 결코 부인할 수 없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 책에는 내가 그려져 있었다. 디스크 자키를 하고 있는 나의 얼굴과 비슷한 남자가 그 책에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우연의 일치겠죠. 미국이란 그 넓은 나라에 하드락 카페가 얼마나 많겠어요.”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하지만 카페의 세부적 정경에 대한 묘사가 이토록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을까요? 홉스의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어요. ‘....... 그의 카페는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의 어떤 도시, 어떤 도심, 어떤 번화가에나 있을 법한 흔해빠진 하드락 펍이었다. 2층 현관정문 로비로 들어서는 복도의 정면에는 allman brothers의 포스터가 걸려 있으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맥주가 진열된 아이스박스가 보인다. 디제이 부스와 가장 가까운 열 댓 개의 의자가 놓여진 테이블 왼쪽 가장자리에는 존 콜트레인의 blue train앨범의 표지를 인쇄한 큰 포스터가 걸려 있다. 그의 펍이 외관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에는 어떠한 특별한 점도, 아무런 이상한 점도 없다. 오직 사람들이 전혀 눈여겨보지 않는, 그의 취미 생활로 진열된 몇 십여 권의 책들, 그것들뿐이다. 오직 그것들만이 그의 내면 세계를 정직하게 그리고 아주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것도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요?”

정말 그렇게 적혀 있단 말입니까 그 책에서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당신의 눈으로 직접 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나에게 홉스의 끝을 나에게 건네줬다. 나는 홉스의 끝을 첫장부터 읽어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실로오랜만에 정말 공포다운 공포의 감정에 매료되어가 갔다. 나는 사춘기를 넘어서면서,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공포라는 감정을 잊어버렸다. 아니 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공포라는 감각에 무덤덤해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를 무섭게 하는 것이 없어진 자신감이 충만한 남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진정으로 나를 무섭게 하는 것은 이 세상 그 자체일 뿐이었다. 세상이 하나의 새장 같은 감옥, 커다란 감옥과 같은, 다분한 음성적 유머가 아닌 의미적 진지함으로 느껴지는 중압감이야말로 나를 무섭게 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책에는 그런 것과는 다른 공포가 있었다. 그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공포였다. 그 책에의 서두에는 정말 내가 속한 세계와 유사한 상황이 있었다. 나라는 존재를 다른 어떤 이가 자신의 책 속에 써내려간 것과 같은 유사함이.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하지만 성격이나 공간적 배경의 유사성만 제외하면 제가 살고 있는 상황하곤 완전히 달라요. 일단 시대나 시간적 배경을 고려하면 전혀 일치하는 부분이 없네요. 그리고 연령대도 저하곤 다르고요. 이 책의 주인공은 이미 마흔 줄에 들어섰지만 저는 그래도 아직은 삼십대라고요.”

스티븐 케인의 소설이지, 선생님의 소설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차이점이지 핵심적인 면에선 더 많은 것이 유사해요. 그리고 선생님은 그 책을 다 읽지도 않았잖아요.”

스티븐 케인이 유명하긴 하지만 유명하다고 해서 제가 꼭 그의 팬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요. 저도 그의 초기 작품들은 좀 인정합니다. 하지만 갈수록 그의 소설들은 클리세 투성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종말이라는 주제에 너무 집착하고 있어요.”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해요. 하지만 제 아버지는 스티븐 케인의 소설에 열렬히 매료가 되고 있어요. 그리고 스티븐 케인이라는 사람이 네크로노미콘이라는 책에서 엄청난 영감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죠? 인터뷰에서 고백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러브크래프트가 만들어낸 가공의 책일 뿐이라고 웃어넘겼지만, 전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믿게 됐어요. 왜냐면 제 아버지도 그 책을 구하게 됐거든요.”

뭐라고요? 네크로노미콘을 갖고 계신다고요? 아가씨의 아버님께서?........”

사실이에요.”



네크로노미콘, 러브크래프트의 신화,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아랍의 미친 신학자 압둘 알하즈레드가 썼다는 인류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지구에 존재해온 초자연적이면서 악마적인 존재들에 관한 보고서, 기가스 파타스보다 연대기적으로 더 오래된 악마학의 고서. 물론 나는 그런 책의 실존을 믿지 않는다.

선생님이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아버지를 오염시킨 그것들이 이제는 저 자신까지 오염시키려고 하고 있어요.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대체 그것들이라고 하는 것들이 어떤 것을 보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까?”

그 책들에게서 나오고 있어요. 선생님. 제 말은 진실이에요. 선생님과 저희 아빠가 읽고 있는 책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스며 나오고 있어요. 그것들이 진짜로 있어요.”




나는 그녀의 흥분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녀의 아버지 본가로 찾아갈 약속을 정했다. 일단은 수영만 요트 경기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후 7시쯤. 사장에게는 내일은 사정 때문에 밤 10시 이후에나 출근하기로 약속을 정해 두었다. 카페를 나가면서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부탁을 했다. 내일 저녁 집밖으로 나온 후에,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 거리에 죽어있는 고양이의 수를 헤아려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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