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고물 고물 거물 ( 6-2 )

2015.06.12 17:1706.12

**

 

여자는 길섶에 차를 대었다.

그녀의 트럭이 고통에 몸부림쳐서다.

그러니까 소음은, 공교하게도 차 내부에서도 들려왔던 것이다.

스태빌라이저, 쇼크업소버 정상, 서스펜션 이상 무, 차축 기울기 양호, 조향장치 정상, 브레이크 센서 이상 없음, 터보차저 및 엔진 기관 이상 없음.”이라며 시스템 보이스가 떠들어댔다. “고장 여부를 진단하지 못한 것은 점검 시스템상의 오류일 수도 있습니다. 오류로 의심되는 경우, 추가적으로 자체오류검사기능을 사용하십시오. 오류검사기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해 보아도, 다시 점점 명령을 내려 보아도, 아무것도 걸려들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사뭇 심각한 고장이었다. 주행 시 잇따라 굉음이 나고 차체가 잦바듬히 기울어지는 건, 주행을 포기해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었다. “거참 귀찮게 됐군요, 갑가지 고장이라니. 어쩐담. 여기에 지원팀 부를까?” 그러다 여자는 담당 직원의 짜증스러운 말씨와 표정이 떠올라, 생각을 접었다. 게다가 위성 신호도 가물가물한 탓에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일조차 힘들었다. 단속적으로 이어지던 전파는 끝내는 완전히 죽어졌다. 그럴 만큼 여자는 외딴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어쩌지.”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별달리 묘안이 없는 거였다. 뷰 모니터로 근처 풍경을 확대해 보아도 사람 흔적은 발견할 수도 없다. 그래도 도움을 청할 곳이 있을까 해서, 여자는 차에서 내린다.

근처에 무어라도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막막한 고지대를 관통하는 낯선 도로 위였다. 오로지 적막했다. 도로는 넓고도 긴 편이지만 좌측으로는 수풀과 계곡을, 우측으로는 높고 가파른 능선을 끼고 있었다. 능선이 내린 그늘이 짙었고, 트럭이 지나온 길은 그 품에 가려졌다. 가야 할 길에도 그늘이 내려 있고, 마치 그 안은 한낮이 아닌, 늦은 시간의 장소처럼 보인다.

여기서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숨겨진 수리 센터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여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함경까지는 갈 길이 먼데. 참 곤란하게 됐군요, 라고 중얼거렸다.

 

전방 스코프는 아직까지는 쓸 만했다. 달라붙은 오물에 상이 또렷하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이덕형 그가 보기에, 여자는 차에서 내려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듯했다. 이덕형과 그의 탈것은 여자보다 훨씬 뒤에, 발각되지 않을 만큼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다음 순간, 이 교활한 사내는 자신의 트럭을 천천히 이쪽으로 굴려오며 여자의 동정을 살핀다. 그리고 여자의 몸태까지도 자세히 살피려고 했다. 돌풍이 불었고 시야가 흐렸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맞는 것 같아. 그때 그년이. 뒤를 밟던 이덕형은 상대가 알아채지 않게 좀 더 조심히 접근해야 한다며, 속도를 더 떨어뜨리더니 전진을 중단했고. 다시 가속페달을 살짝, 살짝만 밟자 얄미운 친구의 뒤통수를 때리러 가는 사람처럼 네르티가 전진했다. 어디까지 접근할까, 아니면 바로 지금 한바탕을 할까. 그는 적당한 방법과 시점을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망할 년이 맞는지, 여기서 한 번 더 확인하고 가도 괜찮을 것이다.

 

여자는 눈앞에 이어진 앞의 끝을 보았다. 부옇게 흐려서 보이지 않았다. 거친 바람이 잇따라 불었다. 바람은 능선의 바위들을 깎아버릴 기세로 불어왔다. 여자는 바람에 저항하며, 하지만 마땅한 마련 없이 움직였다. 손에 든 단말기의 버튼을 꾹꾹 눌러보았지만 통신이 터지는 곳은 없었다.

 

뷰 모니터가 온통 새까매진 것은 먼지를 동반한 돌풍 때문이었다. 돌풍은 렌즈부에 알갱이를 잔뜩 뿌리고 그것의 눈을 멀게 했다. 빌어먹을. 여자의 모습을 멀리서 확인할 수 없게 되자 이덕형은 짜증이 솟았다. 그는 문득 윈도 와셔를 켰다. 다시 앞 유리의 와이퍼가 부지런히 닦는 질을 하기 시작했다. 연신 날려 와 앞 유리에 두껍게 발리는 더러운 알갱이들을 닦개 팔들이 지워낼 때, 이덕형은 그다음 수를 꺼내들었다. 보조석의 옷더미 밑에 깔린 군용 방풍 고글을 꺼내 머리에 쓴 다음 줌인을 당겼다. 그러곤 눈앞으로 확대되어 맺히는 상을 본다…….

오호, 맞아! , 묘하게 생긴 년.’

그의 마음속에서 환호의 목소리가 터졌고,

뜻밖에도 따끔한 주먹맛을 보여 주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묵사발을 내주리.’ 그래야 속이 시원하게 풀릴 것 같았다. 멀리서 무기로 위협하는 것이 어쩐지 사내답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 정도로 가까이 갈 수 있는데, 토끼가 가다가 서준 꼴인데, 몸소 나서야지.’ 이덕형은 손가락 마디를 우두둑 꺾었다. 정말 철퇴 같은 쇠주먹이었다.

 

무슨 사람 소리 같은 게 들리지 않았나, 방금?”

누군가 쭝얼거리는 것이다 하고 확신할 만한 낌새를 느낀 듯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아닌 착각이었다. 여자는 여전히, 단 한 사람의 그림자조차 구경할 수 없다. 바람만이 거셌다.

저 여자가 차에서 멀어져 있을 때가 돌격의 순간으로는 가장 적당해 보였다. 그는 그렇다고 판단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선 앙탈을 부려 봤자 소용없을 것이야. 실컷 두들겨준 다음 돈도, 수리비도 받아야 내야지. 그는 즐겁다. 능글맞은 웃음으로 여유 있게 트럭을 몰아갔다. 호젓한 바위벽이 노변으로 그늘을 짙게 내렸다. 네르티의 절반쯤이 그 속에 은폐돼 있다.

여기서 잠시 멈추었다가 때가 되면 튀어 나가세. <그 여자의 굴복>을 볼 시간까지 앞으로 30, 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일단 차로 돌아가 있는 게 좋겠어. 뭔가 을씨년스럽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곁을 둘러보았다. 도움 받을 곳이 있을까 했는데 역시나 없는 것이다. 근처를 배회하던 여자는 자신의 트럭이 있는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저만치 먼 곳에, 길의 끄트머리쯤에 웬 트럭이 와 있었다. , 아까 그, 시끄럽게 쫓아오던 트럭인 듯싶은데 나처럼 뭔 일이라도 났나? 앞질러 가지 않고, ? 의아한 표정이 지어졌다.

……이쪽을 보고 빤히 정차 중인 트럭이었다. 그때 불현듯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고 그래서 여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교활하게.

 

네르티가 드디어 움직였고 속도가 단번에 쭉 올라갔다. 타깃의 앞을 급히 가로막으려는 심산이었다. 조금 불길했다. 왠지 발각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리고

 

정말 벼락같은 속도였다. 네르티는, 정차해 있는 트럭 앞을 무서운 속도로 지나치는 것 같더니 금세 유턴하여 다시 이쪽으로 왔다. 네르티의 운전석과 저 차의 운전석이 마주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이덕형은 차를 멈추고 곧바로 뛰어내렸고 육탄전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보여줄 기세로 상대방의 운전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고맙게도 차 문이 열려 있던 덕분에, 이덕형은 바로 운전석 안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었다. 얼굴도 보지 않고 발길질부터 해댔다. 여자는, 이 느닷없는 상황에 보조석 아래로 몸을 피하고 이내 본능적으로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공처럼 몸을 말아 보호했다.

 

, 아파.”

통증이 맹렬했다. 여자는, 움츠러들었다.

 

이덕형은, 차 문을 열고 도망하려는 여자의 팔을 붙잡아 꺾어버렸다. 도망하게, 허튼 짓을 하게 그냥 놔두지 않았다. 더욱더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해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여자의 상반을 겨누었다.

, 기억하시는지? ?”

여자는 말이 없다.

먼젓번에 훔쳐 간 그 고물의 값을 돌려받아야겠어. 내 차 수리비는 물론이거니와!”

이번에도 말이 없자, 이덕형은 권총을 들지 않은 손으로 여자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그리고 놓칠세라 멱을 더 단단히 쥔다. 상대를 완전히 구겨버릴 기세였다.

, 잠깐.”

고개 숙인 채로, 여자가 항복하는 시늉을 보이며 말했다.

잠깐 놓아줄래?”

그 말을 듣고서 이덕형은 잠시 주저했다. 그리고 이덕형은……, 마치 풍선 두 개 같은 이 여자의 가슴에 홀딱 반해버렸다. , 좋은데. 겁박을 중단하고 군침이나 꼴깍이는 그를, 여자가 눈을 치떠 빤히 보았다.

하지만 권총을 쥔 자의 시선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는 여유롭게 암컷의 상반을 감상한다. , 좋은데. 강간해버릴까? 그러던 그가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을 때, 아가씨같이도 보이고 아줌마같이도 보이는 얼굴에서는 아무래도 여자답지 않은 드센 기운이 풍겼다. 일견 강성이 있어 보였고 그래서 혼혈의 묘한 분위기 같은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잠시 후 이덕형은 제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리 허술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며, 멱을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돌연 멱을 풀어주더니, 총신으로 여자의 왼쪽 젖가슴을 찔렀다.

여자가 말했다.

아 누군지 알겠네. 그 시골, 그러니까 그 자강구란 지역에서 만난……, 그때 그이 맞지?” 어쩐지 여자는 자신의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지난번엔 장난이었어, 자기. 용서해줘 용서해줘.” 여자가 이국적인 눈을 찡긋하며 정신 나간 애교를 날렸다. 그러나 자비란 없다. “알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돈이지? 돈 줄게.” 애교를 지운 여자의 표정에서는 오로지 돈, 돈 같은 냄새만이 풍겼다.

선뜻 돈을 주겠다는 말에 상대가 관심을 보이자 여자는 예의 느긋한 발동작으로 좌석 밑의 검은 꾸러미를 더듬었다. 이덕형은 순간 흠칫했다. 저년이 무슨 흉기라도 건져 올리려고 하는 것인가? 하고 긴장했지만, 저 발끝에 걸린 건 가방이었다.

현찰을 원해? 아니면 크레디트를 원해? 현찰이라면 저 잡낭 안에 있어.”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고,

이덕형은 이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늘씬 두들겨 패주겠다는 마음은 그냥 접어버렸다. 여자가 불쌍해서는 아니었다. 이건 냉정하게 바라볼 문제였다. 심하게 모욕감을 주었다가 죽고 죽여야 하는 불공대천의 원수 사이가 돼버리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곤란하다. 지금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단 말이지.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게 아니라면. 적당한 선에서. 쿨하게, 돈을 받고 끝내자. 까짓 과거쯤 잊어주지.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프로다운 자세다. 이 여자의 돈을 최대한 알겨먹는 게 지금의 그로서는 가장 큰 문제였다. 오로지 돈만이, 액수만이 문제였다.

어디, 얼마큼 성의를 보이는지 보겠어.” 이덕형은 교활하게 웃는다. “그리고 현찰로 하지. 가짜 크레디트로 사기 치는 게 요새 유행이라서.”

. 꼼꼼하기는.”

여자는 마지못해 굼뜬 동작으로 돈뭉치를 건넸다. 꼬리를 잡힌 건 이번이 처음이야, 라고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어느새 긴장을 내려놓은 상태였고, 무심결에 버릇인 양 손가락을 딱딱튕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은 복수가 아닌 평범한, 비즈니스의 순간처럼 보였다. 이덕형은 여자에게 아직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손들고 뒤돌아 있어.” 이덕형은 권총으로 여자의 등골을 압박했고 다른 손으로는 자기 가슴 포켓을 열고 만능 단말을 꺼냈다. 그리고 돈뭉치에 감별용 적색 광을 쏘았다. 위조한 흔적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간단하고 정확한 생활 수단이었다. 협잡의 시대를 살아온 노회한 눈빛으로 지폐를 살폈고 수상한 흔적이 없음을 이내 확인하자, 그제야 돈을 자기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물러날 채비를 하면서 이덕형이 말했다.

연사 가능한 무반동 권총이니까는! 조심해, 30초 동안 가만히 수그리고만 있어, 아무 짓도 하지 마.”

그는 여자가 반항심을 품고 반격할까 봐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운전석에서 내리자마자 탕, , 탕 위협사격을 하며 허겁지겁 물러갔다.

영겁 같은 30초를 보낸 뒤 여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여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농락했던 그 불청객의 동정을 살폈다. 불청객의 트럭이 이쪽을 노려본 채로 느리게 후진 기동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무엇이 슉 하고 여자의 트럭을 스쳐 지나갔다. 저만치 후방에서 고폭탄이 터졌다. 폭발은 무언의 메시지였다 얼른 꺼지라는 소리였다. 그러지 않으면 험한 꼴 보게 될 거라는 소리였다. 순순히 뒤꽁무니를 보이고 투항하는 자세로 떠나라는 강압적인 명령이었다.

성가신 아저씨네. 알았어, 알았다구.”

여자는 갑자기 발끈하여 한마디를 덧붙였다. <골드 트래시(Gold-trash & Co.)의 장현영>, 자기 이름 세 글자를 꼭 기억해두라는 외침이었다.

어쨌든 얌전히 물러나야 했다. 시동을 넣자 여자의 트럭, 트럭의 심장부가 떨었다. 그리고 트럭의 바퀴는 더디게만 굴러 갔다. 속도가 오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전히 차의 한 부분이 고장 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나라의 북부에서는 모래가 심하게 날렸다. 특히 이곳은 더러운 계곡과 더러운 능선으로 구불구불 뻗어나갔고 긴긴 도로에서는 모래바람이 거셌다. 전자 장비 의존도가 높은 이 시대의 차량들은 방풍에 온 정성을 들인 구조였지만 자연의 징벌 앞에서는 무력했다. 전자 장비를 건드릴 뿐 아니라 섀시의 틈이란 틈을 모두 찾아내는 미세한 알갱이들은, 수시로 차량 내부에 틈입해 중요 기관을 공격했다. 그런 공격은, 오염은 꾸준히 누적되다 어느 순간, 문제를 일으켰다. 탈것들은 왕왕 고장에 시달렸다.(장현영의 트럭처럼, 근방 어딘가에서는, 다른 이의 트럭이 역시 같은 유의 문제를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돌연한 고장에 몹시 당황하고 있거나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거나 차를 세워 놓고 무엇을 찾아 서성이고 있을지 모른다.)

차 좀 세우고 내려서 고쳐볼까 하다가 이렇게 되다니. 하루가, 운수가, 대단히 좋구나. 장현영은 잇따라 중얼거렸다. 가다가 누구를 만나면 온종일 하소연으로 시간을 보낼지도 몰랐다. 몹시도 짜증이 치밀었다. 운전대에 딱딱손가락을 튕기는 횟수가 늘더니 튕기는 세기마저 증가했다. 손톱 밑이 아려올 정도로 세게.

 

**

 

뉴스를 듣는다.

뉴스에서는 트럭 A가 트럭 B를 약탈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규격화한 폭력이 어떻게 번지는지, 생활에 어떻게 밀착되어 나타나는지, 앞으로의 날들이 어떻게 될지 알기에 충분하다. 이런 현상을, 민은 듣는다. 그 누구도 나처럼 일을 벌이고 있구나. 다들 그렇게 잘 살고 있다는 생각에, 심중에서 동질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건 그거고. 정신 차려, 아가씨.”

민이 민에게 경고했다.

한적한 곳에서 트럭이 퍼졌기 때문이다. 속도 저하 현상이 심각해 십여 미터를 가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 모래바람이라는 현상이 자꾸 거세어져서는 근방의 모든 것을 고립시키고만 있었다. 함경에 가기도 전에 고생을 하게 되다니.

 

바람이 다소 잦아들었을 때, 민은 차에 올라타 핸들을 쥐었다. 쥐었다가 다시 손을 뗐다. 굼벵이 같은 트럭보다야 그녀의 발이 더 빠를 거였다. 저기까지 가서는 손을 흔들어 보자, 고 그녀는 생각했다.

저 멀리, 후방으로 다가온 한 트럭은 민의 뚱보와 같은 기종이었다. 국내에 단 아홉 대뿐인, 한정 생산된 기종을 이럴 때 만난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스페어 부품 같은 걸 얻을 수 있을지 모르고, 수리에 관한 정보 한 도막이라도 얻을 수 있을 거였다. 빠르게 발을 달렸다. 민의 호흡이 가빠졌다.

 

**

 

내 트럭도 지금, 살짝 맛이 가 있거든. 또 섰네, 또 섰어. 여기까지 오는 데 몇 번 섰는지 알아?

……아까 한 20분 전엔가? 손 좀 보려고 잠시 길에 세웠었는데, 길에 세운 그때 하필, 원수를 만났네. 원수를. 재수 없게.”

민이 도움을 요청하자 또 다른 뚱보의 차주는, 그 여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정신 나간 사람일까, 하고 민이 생각하는 순간에도 말들은 쏟아졌다.

아니지 원수가 아니지. 내가 그 사람한테 원수겠지. 먼저 수작을 부렸던 건 나니까.”

그 말들을 재조립해 보아도 당최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이상한 사람일까? 민은 그 여자를 살폈다 그 여자는 길 위에 서 있는 민을 차에 탄 채로 내려다보고 있었고, 아가씨같이도 보이고 아줌마같이도 보이는 얼굴에서는 아무래도 여자답지 않은 드센 기운이 풍겼다. 어디서 얻어터지다가 온 것일까? 여기저기 멍 자국도 보였다. 민이 보기에 이래저래 수상한 사람 같았다. 이 사람한테 도움을 받아도 될까?

그 여자가 말했다.

아무튼 난 여기가 싫어. 이젠 수리도 웬만큼 끝났고 난 갈 거야.”

여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창을 닫자마자 떠나버렸다. 저기요, 하며 붙잡는 말은 듣지도 않고.

여자는 얼마 후 다시 후진하여 민에게로 왔다.

빼꼼 차창을 연 틈으로 아직 도로에 서 있는 민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있다가, 뒤에서 웬 망나니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그 놈한테 도움을 받아보든지. 그리고 아가씨…….”

여자의 표정이 사뭇 교활한 빛을 띄웠다.

이리 으슥한 곳에 혼자 있다간 나 같은 미친년한테 당할 수도 있단 거 알지? 내가 자기를 어떻게 할 수도 있었어. 무방비 상태로, 그런 귀여운 얼굴까지 하고 있지는 마. 누가 만만히 보고, 뭐라도 강탈해 갈지도 몰라. 내가 다 겪어봐서 하는 말이에요. 조심하는 게 좋을걸?”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섬뜩한 말이었다. 황영민은 긴장을 하게 되었고,

그 여자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여자의 트럭이 천천히 바퀴를 굴렸다. 뚱보와 같은 급인, 괴수만 한 초장축 트럭의 궁둥이가 부르르 떨었다. 뒷바퀴를 감싼 머드 가드가 펄럭였고, 흙먼지가 날렸다. 트럭에 붙어 있던 더께들이 떨어져 나가자 트럭의 본모습이 드러났는데, 거기서 민은 놀랐다. 진녹색 바디는 물론 공교롭게도 ARM까지도 일치하는, 보기 드문 우연 때문이었다. ‘나랑 취향이 같은가? 그러고 보니 나랑 머리 스타일도 비슷했잖아? 살빛도 나랑 비슷했고. 혹시 성격도 나처럼 공격적일까? 왕년에 약탈 좀 해 본 언니일까? 그보다……, , 내가 애송이처럼 보였던 걸까? 지금의 나, 전혀 프로답지 못하잖아.’ 민은 자신의 어수룩함이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여기 계속 있다 보면 높은 확률로 사달이 나겠지. 혼자 있기엔 위험한 곳. 분명 그래, 하고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리고 이곳은 고요하기만 했다. 민이 수상하게 여긴 그 여인마저 가버린 뒤로, 다시,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소리의 겹]

매 때마다 들이닥친 바람, 바람은 세세한 여러 가지 소리들을 휘감아 올렸다. 그 소리는 마치 일상의 소리와 엉정벙정 흩어진 고철쪼가리들을 밟으면 나는 소리와 두툼한 입술을 짐짓 동그랗게 말아 내는 어설픈 휘파람 소리와 땀이 밴 숨을 폐로 떨어뜨리거나 치솟게 할 때 나는 소리와 무성한 나무 같은 폐포에 수두룩하게 숨이 맺히는 소리와 금속 조각 수천 개를 상인에게 넘겨주면 듣던 흥겨운 소리와 삭아 부글거리는 배터리의 트림 같은 소리와 모르타르 벽 무너지고 마는 소리와 맨홀 뚜껑도 고물로 여기던 자 인생에 쓰게 웃던 그 소리와 산소에 벌겋게 달군 철근이 서서히 끊어지고 식어가는 소리와 이 모든 소리를 깡통처럼 콱 찌그러뜨린 소리 그런 소리와도 비슷했다. 아무 의미 없이 있다 보니 복잡한 일상의 소리가 불어와 마음을 채웠다. 그 소리는 점차로, 경쟁의 뜨거움에서 벗어나 있다는 불안으로 바뀌었다. 도무지 트럭은 움직일 것 같지 않은데, 가까스로 연락이 된 지원팀에서는 거기라면 두 시간은 걸리죠.”라고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는데, 절망이었다. 절망 속으로 바람이 불었고 또다시 소리들이 피어올랐다.

쓸쓸한 바람마저 가버렸을 때 여태 남은 소리들은 민의 귓전을 맴돌다 사라졌다. 희미하게 들리다가 먼 메아리처럼, 자신과 관계없는 것의 소리처럼, 또는 아직 겪어보지 못한 시간의 울림처럼, 자그마한 역사처럼, 그렇게.

 

**

 

민의 뚱보 트럭, 트럭은 설사약을 잘못 먹은 사람처럼 꾸르륵거렸다. 이내 크게 한번 휘청거렸다. 억지로 길을 갈 수는 있지만 여러모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고립된 장소를 벗어나야 했다. 수리를 위해선 인적이 들려오는 곳까지 차를 몰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민은 결심했다. 백 미터라도 가보자. 중간에 부서지든 말든, 폭발하든 말든, 하는 마음이었다. 계기를 살펴 잔여 동력이 충분한지도 헤아렸다. 수치상 낮기는 해도 이곳을 벗어나기엔 넉넉해 보였다. 그렇다고만 믿고, 차를 계속 굴렸다.

굽어지는 내리받이에서 차체가 주저앉아 버렸지만, 그 고비를 넘고 나니 한동안 쉼 없이 달릴 수 있었다. 기적 같은 운이 따랐다.

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얼마나 더 갈 수 있으려나? 정말 아무것도 없어, 주위엔……. 이렇게 걱정이 따라붙을 때면, 간혹 마주치는 도로변의 철골 구조물이 마치 7년 만에 만나는 옛 친구처럼 반갑게 보여 왔다. 마침내, 이런저런 건물들이 아득히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 어딘가에는 수리를 받을 만한 곳이 있을 것이었다. 민의 트럭은 낯선 터널의 가랑이 사이로 조심조심 굼뜨게 들어갔다. 터널을 통과하니 북적이는 곳에 더 가까워진다……

 

정비소를 찾았지만 거기서 세 시간을 보낸 뒤에야 다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황영민은 부랴부랴 길을 떠난다. 일을 위해. 다시 전투적인 마음으로 무장한 뒤였고……

 

어느 변두리 마을로 가는 관문에 이르러서는 도로 폭이 비좁아졌다. 길은 점점 혼잡해질 조짐을 보인다. 무척 시끄럽고, 바퀴 달린 쇳덩이들의 덩치가 컸다 뚱보에서 괴수로, 또는 트럭에서 전차로, 진화의 분기를 넘은, 뭇 차량들의 육체미가 우람한 무렵이었다.

근데, 이것들은 왜 이리 많은 것일까? 내 것과 비슷한 덩치의 트럭들. 이 지긋지긋한 치열한 굴레의 안쪽으로, 더 안쪽을 향해. 그녀는 비슷하게 교차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똑같은 양상의 다툼에 대해서도. 그때, 한 떼의 트럭이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난다. 정차 신호가 들어왔고, 머잖아 일어설 그 물결들은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잠시 동안은 얌전히만 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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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중편 진실의 순간(3) 견마지로 2014.12.27 0
161 중편 진실의 순간(2) 견마지로 2014.12.27 0
160 중편 진실의 순간 (1) 견마지로 2014.12.19 0
159 중편 린트 열전(1) ㅆㄱ 2014.01.23 0
158 중편 Rainway - 5.여행자의 길 서늘해 2013.05.14 0
157 중편 Rainway - 4.파수의 길 서늘해 2013.05.14 0
156 중편 Rainway - 3.사냥의 길 서늘해 2013.05.14 0
155 중편 Rainway - 2.비의 길 서늘해 2013.05.14 0
154 중편 Rainway - 1.숲의 길 서늘해 2013.05.14 0
153 중편 복수와 장미 -프롤로그 규영 2013.01.04 0
152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10(完) 이니 군 2012.03.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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