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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고물 고물 거물 ( 6-1 )

2015.06.12 17:1506.12





6. 교차로 : 일의 미래

 

이덕형, 그가 또 수상하다.

우주의 시작은 빅뱅이었다, 가 뻥으로 밝혀진 지난 2106년의 밤도 이렇게 허무하진 않았어.” 이덕형은 그때보다 십 년을 더 늙어버린, 훨씬 더 허무해진 밤을 겪으며 저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늘의 밤은 까맣군. 그리고 별들이 많군. 쓸모없이 많기만 한 하얀 별들 말이야, 젠장. 내 것이 아닌 것들은 굳이 바라봐줄 필요도 없지하고 척 보기에도 오락가락한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바닥에는 뱀같이 똬리를 튼 기름얼룩들이 보였다. 그런 흔적마저 없었다면 가게 창고들은 끼끗한 빈칸으로 보일 수도 있을 지경이어서, 사고의 울분을 떨치고 온전하게 있으려는 사람의 마음을 또 다른 양상의 끔찍한 골로 처넣고 만다. “아아 배가 고픈 순간이다. 창고야, 너도 그렇지?” 혼자 망망대해로 고기 잡으러 나간 무슨 노인처럼 그는 말이 많아졌다. 별을 갖고 있는 저 밤하늘을 시새움할 정도로 소유에 목마른 상황에.

그러다 문득, 헛소리가 잦아든다. “며칠째 일을 못 하고 있는 것이야?” 잠시 살 궁리에 빠진 그다.

벌써 궁리를 마친 것일까. 그렇다. 앞으로는 일이 잘될 것이다. 희망이 움튼다. 함경에서 한몫 잡아올 것 같다는 긍정이 솟는다.

별건 없고. 그간 계속 모으기만 한 모양이야. 함경 그 복잡한 동네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양의 고철을 축적했는지는 모르겠어. 폐기된 그 어떤 병기의 크나큰 잔해2) 같은 것이 아닐까 추측도 돌아. 아무튼 많긴 많나 봐 말해 줄 것 또 한 가지는. 모 기업 영업부라는 이름의 개 몇 마리가 이빨을 내보이고 그리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대. 보았대, 누가.”

시에게서 연락을 받은 바, 괜찮은 일거리였다. 고물을 무더기로 얻거나 그와 관계된 잡일이라도 할 수 있을 거였다. 당장 그년을 잡을 길이 있을 리 없고.(여자를 잡는답시고 트럭을 타고 나가 허탕을 친 뒤였다.) 한에게 갚아야 할 돈도 있고……, 그는 중얼거렸다. 복수보다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낼 궁리만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함경이라? 요새 거기가 화끈하지. 함경, 그래 함경. 요새 라디오에서 계속 떠들던 곳도 함경이었고.

 

**

 

무잡한 점심때가 지나고 구름 사이 굽이에 해가 걸릴 무렵, 이덕형은 앞에 가는 트럭 몇 대를 추월하려고 마음먹었다. 그가 일을 나설 때의 모습은 사뭇 거칠었다. 그랬다기보다는, 그저 폭군이었다. 속도는 올라가고 타이어는 으르렁대고 그 밑의 땅이 움푹움푹 패었다. 비산한 자갈 파편들이 다시 우박처럼 떨어지고 엔진 소리는 터질 듯 윙윙거렸다. 사이드미러에는 차가 없었다. 전방에는 차들이 많았다. 수년간 복용해온 각성제 땜에 피부가 거칠었다. 거친 피부를 사납게 씰룩이는 순간엔 무자비한 속도로 전방을 향해 네르티가 달려들었다. 선량한 사람들의 뒤통수를 습격하는 깡패처럼, .

그래그래.

하고 이덕형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차들이 알아서 비키는 눈치를 보여 온 것이었다. 그래서 마초적인 웃음을 지었고, 쉽게 추월하여 앞서나갔다. 나랑 한방향인 놈 있으면 언제든 작살내주마, 그런 눈빛을 한동안 풀지 않았다(그가 보기에, 자기와 한방향인 놈들은 다 경쟁 상대 같았다).

그는 기어이 독주하는 꼴로 멀어져갔고. 여유깨나 부릴 무렵엔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한 개비 집어 입에 물리고 불을 댕겼다. 한 손으로 착착착 하는 느낌으로.

담뱃불도 담뱃불이지만 행복한 기운을 길게 피워 올렸다. 통보를 받은 뒤였다. 문의가 폭주하는 관계로 오늘 내로 먼저 현장을 찾아오는 분에게 우선권을 주겠다는. 거기서 품을 팔든 돈을 꾸어 물건을 사오든 협상을 하든 작업지점까지 이대로만 간다면야. 껄껄, 그는 웃었다. 도착 지점은, 함경은 여기서 고작 한두 시간 거리를 격해 있었다. 멀리 살고 있는 놈들은 참 안됐어.

한데 그때, 전방에 까만 점 하나가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점은, 종이 위에 떨어진 단 한 방울의 잉크처럼 작디작았으나 종이 위에 떨어진 잉크만치 아주 분명한 느낌이었다.)

더 가까워졌고

와들와들, 극도의 긴장이 솟았다. 긴장보다는 쾌감에 훨씬 더 가까웠다. 망할 년의 그, 그 트럭이었다.

태우던 담배를 부지중에 툭 하고 떨어뜨린 이덕형은, 속도를 한계치까지 높일 셈이었다. 운전대를 그러쥔 손아귀에서 주름이 갈래갈래 거멓게 일어섰다. 더 새카매질 때마다, 네르티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며 쿵쾅거리는 소리3)를 잇따라 질렀다. 땅바닥에선 자갈이 튀어 올라 트럭의 밑창을 때렸고 시커먼 흙먼지가 일어났다.

곧이어 윈드실드에는 흙먼지가 쌓여버렸다. 와셔 액이 쏘아지자 와이퍼가 바삐 움직인다. 그때, 열한 시 방향으로 곧게 뻗어 있던 도로는 급하게 여덟 시 쪽으로 휘어졌다. 그 순간, 덜컹임이 심해져 언제든 다 엎어질 기세였다. 그러나 엎어질 기세로 가야 종국에는 엎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씨발. 이덕형은 정신 나간 21세기의 샐러리맨처럼 뇌까리면서 그 트럭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잇새로 지끔지끔 모래가 씹힌다. 차창을 닫는 걸 깜빡하여 안에 지저분한 먼지바람이 들이닥쳤지만 괘념하지 않았다. 오로지 앞쪽의 곬만 쏘아보며, 거리를 좁힐수록 확신에 가득 찼다. ‘원수를 이런 데서 만나는가? 틀림없어. 저 대단한 크기 그리고 76-A 시리즈 ARM!’

안에는 분명 혼혈 여자가 타고 있겠지? 이제, 내가 너를 미행한다.’

그는 본능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자는 콘솔의 인공지능에 운전을 맞긴 터였다. 버킷 시트에 몸을 파묻자 고급가죽 시트와 완벽한 통풍이 주는 안락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터보차저의 사용에도 승차감은 훌륭했다.

어느 순간, 여자는 묘한 예감에 사로잡혔고 몸을 곧추세운다. 예감은 곧 맹렬한 소음이 되어 현실에 나타난다. 웬 소리일까. 여자는 밖에 신경을 두고 흘깃 사이드미러를 살핀다.

소음을 일으킬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쫓아오는 차량 같은 것도 없다.

소음이라니. 그렇담 내 차, 기관 내부 고장인가?’ 하지만 스크린에는 고장 표시가 없다. ‘혹시 스크린도 고장인가? 아차차. 터보차저를 꺼야겠어, 오버히트!’ 즉시 껐지만 바뀐 것은 없다. 세심히 확인해 보지 않으면 확실히 알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차를 잠시 세워야 할까?’ 그새 소음은 기세를 더욱 키운다.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야?’ 긴장이 되자, 직접 운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자가 운전대를 잡는……

그때였다. 마치 백악기의 육식공룡처럼 거대한 기세로 자신의 트럭을 쫓아오는 것이 있었다. 그런 낌새가 닥쳐왔다. 사이드미러에는 먼지바람밖에 안 보였지만 그 금속성의 소리는, 분명히 이편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러는 새 민의 트럭은 둔덕의 모래를 날리며 야트막한 경사를 오른다. 트럭이 모래를 뒤집어쓰건 말건 간에 여자는 운전에만 집중했다. 다시 땅이 평탄해지고 나서는 리어 뷰 모니터4)로 후방을 주시했다. 유심히 본다. 리어 스코프가 포착한 영상 속에서 먼지의 막이 갈라지며 흩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푸른 지평 아래 서서히 드러나는 물체의 윤곽은, 마치 새 종이 위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삽시에 또렷해졌다.

그것은 트럭이었다. 자신의 트럭과 마찬가지로, 싯누런 먼지를 온통 뒤집어쓴 채로 질주하는 쫓아오는.

 

타깃이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여기서 만나다니 큭.”

이덕형은 척 보기에도 앵두맛 왕사탕 같은 버튼을 눌러 네르티의 옆구리를 열었다. 덜컹 옆면의 일부분이 별안간 어디로 숨고 살벌한 무기가 밖으로 튀어져 나왔다. , 인과의 법칙을 증명할 시간이야, 베이비. 이덕형은 스크린 패널에다 시선을 고정하고선 거칠어진 숨을 잠시 골랐다. 그 후 빠른 손놀림으로, 역시 착착착. 화면 속의 동그란 그물망을 움직여 정중앙에 오게 했다. 타깃에 고정했다. 손은 언제든 발사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죽어!

하고 즉시 발사할까 했지만……. 눈여겨볼수록 차체의 색깔이 달랐다. 전방 스코프가 포착한 모습을 보면 어느 부분은 흡사 네르티처럼 노랗고, 또 어느 부분은 기억에서와 같이 진녹색이었다. 그새 위장 도색을 한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먼지라도 뒤집어쓴 거야? 그럼 내가 몰라볼 줄 알았나.

하지만 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망할 년이 타고 있는 건지, 확실하게 확인부터 해야 하는 게 맞다. 생사람 잡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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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도무지 가용할 수 없는 구식 전차나 중화기들은 분해, 폐기되어 다시 고철자원으로 유통되었다. 기업과 연합이 국책 사업처럼 벌이는 일들 외에도, 그런 것들을 몰래 사들이고 축적하고 시세를 매기고 하는 전문 꾼들이 있었다. 그들은 연합 관료의 자식이거나 제철소를 운영하는 기업의 간부이거나 혹은 사기꾼이었다. 어쨌든, 철의 순환은, 가진 자들의 양식이자 권력이었다. 가끔은 순수한, 일개 업자의 손으로 벌이는 깨끗한 판도 있었는데, 이런 거래는 그 순수성 때문에라도 과연 인기가 좋았다. 물품을 직접 팔거나 판매 하청 계약을 맺을 때, 선착순으로 모집하겠다는 말이라도 나오면, 그 때문에 러시아워가 생길 정도였다.


3)토크를 올릴수록 소음이 심했다. 우레 같은 소리였다 이 시대의 엔진은, 그 자체로 무진동 무소음에 가까웠고, 다만 차가 다니는 기척을 주변에 알리기 위해 아주 옛날식 엔진의 요란한 소리를 모방하여 시끄럽게 내보냈다. 그런 출력 장치가 달려 있었다. 무소음은 위험성을 내포했다. 보행자나 다른 운전자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는 귀에 거슬릴 만한 소음이 꼭 필요했다. 불법적으로, 엔진 자체를 개조하여 연출된 소음이 아닌 진짜 소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음의 규격과 스타일을 연합이 정한 격식에 맞추기는커녕, 자기 마음대로 바꾸고 키웠다.(물론 이런 하찮은 위법행위까지 신경 쓰는 그런 민감하고 엄정한 사회는 아니었다.) 트럭을 몰고 다니는 치들에게 단연 인기인 것은 터져 나오고 울리고 뒤흔드는 소리였는데, 커스터마이징 샵이나 보통 규모의 공업소 같은 곳에서, 얼마든 개조가 가능하였던 부분이다.


4)차량 후방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장치로서 수백 미터 먼 곳까지 관측할 수 있는 디지털식 광학 기계.(마찬가지로 프론트 뷰 모니터도 있다.) 차량 앞뒤로 손가락 굵기만 한 전용 구멍 안에 소형 스코프를 설치하여 그 망원렌즈가 붙잡은 상을 대시패널의 주 화면으로 송출한다. 도심을 출입하는 차량에는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각종 기능에 제한이 걸리고 평범한 배율의 근접 영상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기후가, 시야가 나쁜 지방을 내왕하게 될 시에는 사용에 아무런 제재가 없다. 없지만, 더럽고 강력한 모래바람에 제재를 받는다. 모래 탓에, 수시로 렌즈 보호 캡조차 무용해지고 조리개도 고장 나고 렌즈 오염이 잦다. 그러면 줌인은커녕 앞에 붙은 먼지만 검게 확대되어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물론, 인간의 눈보다는 훨씬 나은 물건이다. 척박한 변경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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