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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고물 고물 거물 ( 5 )

2015.06.12 17:0606.12





5. 다시 고물상 이덕형의 이야기로

 

민이, 맡긴 트럭을 되찾으러 P에게 가던 날, 그날 새벽, 자강구에서 조금 먼 한의 공업소에서.

 

바람은 거칠었다. 못된 약을 땅콩처럼 씹어 먹는 중독자의 까슬한 피부처럼.

고철압축기의 모터음이 여섯 번을 윙윙거릴 때마다 하나씩, 덩어리가 배설되었다. “, 빌어먹을.” 또 덩어리가 사출되었다. 그 뒤 덩어리꼴 고철을 로봇의 지게 손으로 짊어 옮기는 광경이 이덕형에게는 퍽 흥미로워 보였다. 바람이야 거세지든 말든, 저런 고가의 기계가 나한테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쯤일 것이었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는 한의 작업장 뒷문 언저리에 서서 이웃 센터의 떳떳한 형편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졸음기 가득한 개개풀린 눈빛이었다. 그런 눈빛, 그런 눈에도 기갑병 분대처럼 절도 있게 움직이는 저 자동화 시스템은 좋게만 알아졌다. 희망찬 헛된 욕망이 연신 욕설과 함께 솟았다.

씹할, 빌어먹을. 좋네, 거 좋네. 나도……, 빌어먹을 규모로, 끝내주는 재활용센터를 차리는 거야.

한데 왜일까. 희망 품음이 헛되어지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뭐라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개조 작업의 끝이 보일락 말락 한 시점이었다. 더 강력해지도록 바뀐 네르티와 함께라면, 돈 버는 일뿐 아니라 염원에 염원을 거듭하던 그 어떤 일마저 이룰 수 있을 듯했다. 그년을 공손하게 만들자는 그것은 복수다.

이덕형은 네르티의 부활과 어울리는 이벤트로 <그 여자의 굴복>을 생각했다. 그것이 현실이 되기를 너무 바랐던 탓일는지, 그를 부르는 소리가 그의 귓전에서 번번이 튕겨져 나갔다. “이봐.” 하고 한이 세 번이나 불렀을 때도 이덕형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 춥구나.” 그러기나 할 뿐 도무지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푸른빛의 새벽이었다. 뒷문 안팎으로 내려앉은 새벽은 작업장 전체로 쌀쌀하게 스미어 퍼져 나갔다.

작업장 한복판에서 네르티의 겉이, 강판이, 새벽의 빛을 퍼렇게 되비침 하였다. 한은 그에게 말 걸기를 포기하고 가볍게 노크하듯이 똑, , , 똑 네르티의 이곳저곳을 두드리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지는, 깔끔한 느낌. 한은 흐뭇한 낯빛을 띄웠지만, “!” 하고 큰소리로 이덕형을 불렀을 때는 자못 예민한 느낌이었다. 어디서 녹슨 경첩이라도 떨어졌는지 잘강거리는 쇳소리가 주변을 굴렀다. 그것이 땅 하고 세게 부딪는 순간에야 저 바보가 제정신을 차린다. 자기의 멍청한 얼굴을 무엇보다 능청스러운 낯으로 바꾸고 다가왔다.

 

**

 

일을 마친 쾌감을 누리려고 한은 이른 시각부터 맥주를 들이켰다. 저 손님이 가시려는 가 보다 싶을 즈음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어이 친구, 강판 두께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무장 정도도 어때 보이는지?”

적당해.”

그런 반응인즉 적당하지 않고 아주 좋아, 라고 한은 알고 있었다.

, 고생 많이 했는데, 혹시 수고비 좀 얹어 줄 텐가?”

돈이 없으니 이만 가봐야겠다.”

그런 도피인즉 좋지 않은 징조였다.

어이, 가기 전에 이것부터.”

한은, 이덕형의 바지 뒷주머니에 이번 건에 대한 각종 주문서와 영수증뭉텅이를 가득 찔러 넣었다가, 호되게 한마디 들었다. 이덕형은 이번일만잘되면!따위의 기약도 확신도 없는 말로 한의 입을 막았다. 그러면 안 돼. 이번만은. 완고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들은 척도 안 하는 그에게

각자 살아가는 세상인데, 고마워.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놈에게

부리나케 네르티에 탑승하여 도망하려는 자에게 한은 뭐라 뭐라 끈질기게 채근했다.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야, 하고 못을 박는 선에서 그쳤다. 새벽의 끝이 아침의 처음으로 이어지던 무렵의 일이었다.

 

이 건물을 앞에서 보니 초콜릿 케이크, 초콜릿 케이크의 단면처럼 검고 불긋한 모습으로 보였다. 숨 쉬러 밖을 나온 중년의 수리공이 끙, 인상을 찡그렸다. 건물 전면에 입힌, 은빛 섞인 하얀 도료는 다 어디로 갔을까? 부식에 칠이 벗겨져 쇠 벽마다 검붉은 녹이 가득했다.

거세고 거센 모래바람을 받는 쪽이라서 그럴까? 언덕에 면한 건물 뒤쪽과 비교해보았다.

아예 녹처럼 검붉게 칠해버릴까? 되도록 찬찬히 정하기로 하며, 건물 뒤의 언덕을 그는 바라보았다. 날의 밝음이 여름의 아침만큼 빠르게 온다고 느꼈다. 멍청이가 사라진 부근에 숨처럼 부연 먼지가 남아 있었다.

 

**

 

어느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고 여기가 도심의 부촌과 가깝다는 것, 분홍빛 조명이 들어온 바의 내부라는 것, 그리고 스툴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가 주크박스에서 들려오는 흑인풍 재즈 음악을 간간이 바수고 있다는 것,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단히 이국적인 매력을 지닌 한 여자일견 혼혈 같아 보이는 여자가 보인다. 그 여자가 입을 연다. 아직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라서 목소리에는 뭉개짐이 없었다.

판이 벌어질 때가 됐단 말이지. 이제 뭐가 필요한지는 뻔하지 않아?”

그러자, 옆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현찰, 현찰이 있어야 될 테지.”

으흥.”

여자는 그러고 묘한 웃음을 흘렸다.

남자가 말했다.

지난번에 한두 번 광고한 뒤로, 그것도 고작 라디오에서였나? 그 후로 잠잠한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야, 달링. 여유가 있음을 자랑하는 거라구. 틀림없이, 거래자들이 몰리면 입찰가를 놓고 한동안 저울질하겠지.”

내가 볼 땐.”

여자가 말했다.

거래 초기에 승부하는 놈들을 그저 총알받이가 될 뿐. 입찰가는 항상 마지막에 써내는 게.”

역시 달링은 똑똑해. 정답.”

남자가 말했다.

근데 함경으로는 언제 떠나? 현찰이 준비되는 대로?”

으흥.”

여자는 또다시 웃었다.

뭐니 뭐니 해도 지폐만 한 선물이 없기에. 계좌 속 숫자보단 손에 쥘 수 있는 짜릿한 거. 고것, 준비 좀 되는 대로.”

여인의 표정에 어딘가 얄망궂은 것이 있어서, 남자는 질투가 났다. ‘그러나 부러워. 진심이야. 그 능력만은.’ 그런 마음의 그가, 묻는다.

여전히 회사를 나올 생각은 없어? 어차피 만날 뒷주머니에다 돈을 모으면서. 몰래 그러는 거 귀찮고 질리지도 않느냐고요. 차라리 나랑 동업하지 않을래? 밤마다 나랑 침대 위에서 하는 동업 말고 앞으로는 일로도 함께합시다!”

분위기가 썰렁해진 것은 사내가 약간의 말실수를 한 탓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흐르는 음악에만 귀를 기울였다.

 

남자가 말했다. 음계가 완만하게 내려앉는 곡조보다 부드럽게.

대단히 조용한 도로를 찾아냈어, 내가. 바로 당신을 위해.”

사내의 목소리는 그때까지만 그랬고 점점 거칠게 올라갔다. 자기가 정보력이 좋다며 자랑하듯이 몇 마디를 늘어놓을 때는 영락없는 수컷이었다. 그 모습이 촌스럽고 짜증스러워 여인은 입을 비죽거렸다. 그 언짢은 반응에도 사내는 더욱 밀어붙여본다.

그리로 가라구! 아니면 피곤해져. 괜히 경쟁자들 몰리는 복판을 지나갈 필욘 없잖아. 운전도 중요한 일이에요. 일반 도로에는 자기한테 보복하려는 원수들도 있을지 몰라요. 아닌 게 아니라……, 지난번에 자강……? 그 어느 시골에 가서 한 건 했지 않아? 시골 놈들이 복수하려고 길에 매복해 있을 수도 있어요. 이건 농담이 아니라니깐. 내 맘 알지, 달링? 몸 좀 사려. 꼭 이 길로 가.”

여자는 듣고 있지 않았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타산적인 눈빛을 사내 어깨 너머 어딘가로 숨긴 채 손가락을 딱딱테이블에 튕기고 있었다.(이 여자의 버릇이다.) 손가락이 일으키는 그 주기적인 진동에, 찰랑찰랑 자줏빛 액체가 술잔 속에 굽이쳤다.

바에서 음악이 멈추었고 그녀 <장현영>의 마음에서는 흥겨운 돈의 음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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