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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고물 고물 거물 ( 2 ,3 )

2015.06.12 16:5206.12








2.

 

범인의 행방을 모른 채 시간이 흘렀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행방이나 자취 같은 건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래서, 그동안 화약고였다. 여전히 화약고 같은 얼굴이었다. 분노에 사로잡혀 하우스 안을 왔다 갔다 하는 일도, 홧김에 권총을 마구 쏘는 일도 그에게는 일상이었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이덕형은 자신의 고물상, 가게 안을 살펴보다가는 쉬기로 했고, 담배를 물고 불을 댕겼다. 문득 담배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더니 한데 몰렸고 그것은 여자의 얼굴로 화했다. 확실히 그년 얼굴이었다. 그가 권총을 난사하자 얼굴은 일격에 산화했다. 연기를 얼굴로 착각하고, 그렇게 분노가 허상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그 여자를 저주한 순간은 많다. 그는 하우스를 들락날락할 때마다, 문고리를 돌릴 때마다, 문고리로 새어 흐르는 전류에 감전될 때마다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악운이 여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만 생각했다.

그의 트럭, 애매가 두 달째 잘 굴러가고 있는 것만은 다행이었다. 다만 그때, 차량을 고치기 위해 얻은 빚이 지금까지 남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곤궁해진 지금의 살림을 볼 때면 또 그년 생각이 나곤 했다. . 뱃구레를 그년 가죽으로 채우고 싶구나. 배 속에 넣기 전에 아주 잘근잘근 씹어 줘야지, 하는 새 시간이 지나 사위가 고요하게 바뀌어 있었다. 숙성한 분노를 또 한 번 터뜨린다면 하늘의 밤도 놀라고, 저 모래둔덕 너머에도 들릴 터였다.

참아야지, 하고 또 억눌렀다. 화약고는 간신히 봉쇄되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밤새 도난당한 게 있나 하여 고물상 안을 둘러보았고 이내 모든 것이 제 위치에 있음을 안 뒤로는 더러 안심하는 눈치가 되어갔다. 하루의 시작이 차분하고 일상적이었다.(사실은 이것 역시 화를 간신히 참고 있는 장면이다.)

지독해. 오늘은 UFO만 한 청소기가 있어야 되겠어. 위에서 한 번에 싹 빨아들이게.

그는 모래바람이 남긴 흔적들을 삽으로 퍼 담아 치우고는 환기팬을 전부 가동시켰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모래들은, 외벽 쪽으로 빨려 들어가며 벽을 핥고 스치고 하더니 사라져갔다. 단연 최악의 기후를 버티기 위해 여기 집촌의 고물상들은 그래도 환기 시설만은 잘 갖추고 있었다. 곤궁의 도가니 속에서도.

더는 소모적인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복수를 위해, 아니 생존과 생활을 위해 일만 할 생각을 하자.”

컨테이너 하우스로 돌아가서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한낱 해적 방송이나 삼류 광고 방송 따위를 들을 수 있다. 허위사실/과장광고를 일삼는 방송이기는 해도 고철 매매의 동향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요새 들어선 고작 라디오밖에 의지할 만한 것이 없었다. 별로 오늘은 들을 것이 없지만 말이다.

()와 내가 절교를 한 지 얼마나 됐지? 일방적으로 절교를 당한 지가.”

라디오를 끄고 생각에 잠겼다. 헤아려 보니 트럭이 박살 난 그 사건, 그 무렵부터인 것 같았다.

밖을 나오니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어? 하고 그가 이웃에게 묻자 폐지 전문 고물상이 답했다. 저기를 봐봐. 이웃은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모래둔덕 정상에 어떤 낯선 자들이 와 있다는 얘기였다. 아무래도 중심 도시에서 온 인간들인 것 같다고.

그렇다니. 그것참 좋지 못한 징조였다.

 

**

 

도시와 지방 사이에는 낭떠러지만 한 높이와 황무지만 한 넓이를 지닌 어떤 개념이 존재한다. 그 거대 개념에는 격차라는 단어가 빼곡히 들어가 있다. 그렇듯 이쪽과 저쪽이 나뉘고, 서로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처럼 뿔뿔이 멀어지고 있었다. 도시에는 과학의 힘이 여전히 미치고 있었고, 청량한 공기가 일 년 내내 시가지 위를 휘돌았다. 인구 포화 현상이 문제일 뿐 지난 파괴의 세월과 몰락의 세월에도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고 견디어 오고 있었다. 물론 모든 도시가 다 유지되어 온 것은 아니며, 22세기 S국에는 오직 3개의 도시만이 남았다. 자원 전쟁과 무력 전쟁의 후유증에도 그 도시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다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견딜힘의 주체는 지방을, 자신들과 가까운 영세한 사람들을 수탈하는 것이었다.

뻔뻔한 놈들.”

한의 공업소에서, 이덕형이 말했다.

또 수작 부리러 온 것인가. 무슨 피를 또 보려고?”

떳떳한 양심으로 몸가짐을 제대로 하여도 언제든 권총 구경을 할 수 있는 것이 이즈음의 장사였다. 때로 펑, 하고 폭발하는 화염을 본 적도 있었으니깐 더한 무기로 으르는 것도 이즈음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지방 상인이든 도시 상인이든 공통된 양상이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오는 것들은 일사분란하고 조직적이어서 훨씬 더 위험했다. 이를테면 큰 규모의 카르텔형 기업이 있는 것이다. 여기 자강구, 고물상 집촌의 사람들은 지킬 선을 지키며 밥벌이를 하지만, 그들은 그 선을 넘기 위해 존재하는 부류였다. 여기 집촌의 사람들은, 가끔 외지의 경쟁자를 겁주려고 허세를 부릴 때가 아니고서야 힘을 앞세운 적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도시 밖으로 기어나 올 때면, 항상 끔찍한 가면을 쓰고 오는 것이다. 이것이 장사인지 목숨 내놓기인지 구분이 안 될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그년은 중심도시의 시민인 게 아닐까?

과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고.”

작업 보조 로봇을 부려 차량의 밸런스를 교정하던 한이 말했다.

그냥 지나가다 들렀을 수도 있지. 그리고 우릴 착취하려는 카르텔이 아니라 이 동네 구경 온 일반인들이었는지도.”

이덕형의 표정은 그대로다.

정 걱정되면 자네……, 애마에 무기라도 장착해 보겠어? 지난번에 내가 말한 걸 다시 한 번 고려해 봐.”

그래야 할까? ……, 난폭하고 전문적인 놈들이 부디 없어지기를. 사람을 좀 가만 내버려 두면 좋겠는데.”

하던 이덕형은 차오르는 근심을 누를 수가 없었다. 힘을 다 버리고 살 수는 없나. 힘을 보유한 자 때문에 나도 힘들 지녀야 한다니. 그는 교활한 편이지만 이처럼 순수한 부분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의 사고가 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도 속세의, 데빌의 힘을 믿으리라 하고.

한편 그는 수개월 전의 일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다. 무엇이 터지는 소리가 잇따라 들렸던, 트럭이 어디에 처박히면서 순간 정신을 잃었던 유쾌한 경험을. 무력이란 건 정말 지긋지긋해.

다 됐어. 이제 돌아가 봐. 다음 달에나 다시 보자고.”

한이 작별을 고한다. 점검은 다 됐어.

사건 이후로 이덕형의 애마, 즉 네르티라는 카고 트럭은,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였다. 그리고 차주 또한 점검이 필요한 상태로, 마음이 망가지고 영혼이 미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완전히 회복시킬 만한 짬은 없다. 하루하루 격차를 줄여야 할 일들. 거대한 개념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할 힘겨운 일들 때문에.

이덕형은 냉정을 찾아갔다. 수다를 떨어 소회를 더 풀까 하다가 그 마음을 참고 자강구의 모래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마침내 고물상 집촌으로 돌아가는 와중이었다. 그는 아직 어둑하지 않은 도로상에서 웬 익숙한 트럭 한 대를 목격했다. 그 트럭은 76시리즈 ARM을 차량 후미에 장착하고 있었고, 왠지 기분 나쁘게 생겼고, 녹색으로 칠갑한 바디였다. 육중한 몸체를 들이밀면서 이쪽으로 다가올 듯하더니 방향을 틀어서는 이내 멀어졌다. 어떤 직감이 그를 스친다.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혹시, 아마, 그때, 그년? 이덕형은 소름이 돋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3. 출전 준비

 

7.84 규모 쓰레기 매립지가 황무지 위로 펼쳐져 있었다.

사내의 플로터가 그곳을 달린다. 플로터의 바디가 털털거리며, 애드벌룬처럼 동글동글한 가스포집 시설을 스쳤다. 매립지에 곁딸린 열 발전 시설에서 터빈이 돌아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나왔다. 가깝게 스치자 그 소리가 사람의 몸을, 플로터 프레임을 흔든다. 콕핏의, 다중 정보 네비게이션 화면이 잠시 울렁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을 관통하는 편이 훨씬 빠르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을 관통하는 한 사내가 있다.

 

저 건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케이크 조각처럼, 케이크 조각에 하얀 초가 일고여덟 개쯤 꽂힌 모습처럼 보일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초는, 초같이 길쭉한 것들은, 한의 공업소에 전력을 공급하는 풍력발전기의 타워 기둥이었다. 케이크 조각 같은 건물 위로 사업장용 발전기의 기둥들이 떳떳하게 서 있음을, 그 위로 날개바퀴들이 잘도 돌아가고 있음을, 모래둔덕 정상에서 어떤 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곳은 뭔가 잘되고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저쪽의 사정이 자신의 사정보다 나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쯧쯧, 하고 이덕형은 혀를 찼다. 자기 자신을 연민할 때 그는 그런 식으로 조소를 짓곤 했다.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자 플로터는 둔덕 아래의 길로 나아갔다. 이대로 곧장 가면 3분 안에 한의 공업소에 닿을 것이었다. 심심하지? 와서 작업 구경을 해도 괜찮아, 한의 말을 듣자마자 출발한 길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하루라도 빨리 트럭을 보고 싶었다.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는, 애마와 함께 복수의 여정을 떠나고 싶었다. ‘새로운 모습으로 개조된 내 애마와 함께.’ 입아귀가 귀밑까지 찢어지면서 그는 악마의 미소 같은 것을 지어 보였다.

 

외곽 철문 앞에 서자, 보안 카메라의 눈이 떠졌다. 이곳의 보안 카메라에는 불쾌한 꼬락서니를 한, 초췌한 방문자의 모습이 얼굴부터 차례로 아랫도리까지 잡혔다. 사내의 행색은 정말이지 구질구질했다. 잠자리 눈 같은 고글과 시궁창 색의 재킷과 꼬질꼬질한 바지 차림이었다. 이렇게나 더러운 행색을 화면을 통해 접하게 되면 통상 문은 안 열어주고 웬 조롱이나 해대는 한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런 말소리도 없이 철문은 개방되었고 한창 바쁘다는 사실을 넌짓 알 수 있었다.

이덕형은 자신의 플로터를 작업장 입구에 팽개치듯 주차한 뒤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해치처럼 생긴 원형의 철문 사이로 몸을 들이밀자 쇳내가 독하게 풍겨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 안으로 들어갈 땐 돌출한 기단부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하는 것이었다. “제발, 문 좀 넓힐 수는 없는 거야?” 하고 분명한 발음으로 한마디 하기도 했지만 손으로 코를 틀어막은 터라 코맹맹이 소리만 전해졌다. “차강 드나드능 뭉 말고 인간을 위항 것들엥 신경을 좀 쓰라구. 좁공, 냄새나고.” 구시렁구시렁. “이봐, 내 말 듣공…… 있나?”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먹은 건지 한은 문간을 슬쩍 일별하더니,

어서와, 그런데 몰골은 왜 그래?”

하고는 다시 일에 들러붙었다.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었다구. 페인트 통 팔아 치운 돈으로 산 빵 한 봉지가 고작이었어.”

한은 오, 저런! 하고 가엾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랬을 뿐이었다.

무엇을 칙칙 뿌리고 난 다음에야 방문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전재全財를 팔아서 고작 빵 값밖에 못 벌었다니. 쯧쯧. 전재戰災에 버금가는 비극이군그래.”

어려운 농담, 난 이해 못한다고.”

이덕형은 휘적휘적 네르티 앞으로 걸어갔다.

겉보기에, 차체에 암기를 붙이는 작업은 더디게만 걸릴 것 같았다.

제발 좀 빨리!”

재차 강조하던 그는,

자기 궁둥이 붙일 데나 찾고 있었다. 어구구. 다리가 아프다는 거였다. 한이 고갯짓으로 접의자의 위치를 일러주며 근데 이제는 페인트 통, 그마저도 없다는 소리지? 나한테 부품 값이라도 쥐여 주려면 최소한 일만 개는 있어야 할 텐데?”

그만큼 있다고 해도…….” 뜸을 들이는 폼이 궁상 좀 떨어보려는 투다. “안 팔아. 만 개가 있건 백 개가 있건 간에, 안 팔아. , 오해하지는 말아요. 왕년에 사설 군대와 계약했던 나 같은 위대한 고물상은 고작 깡통이나 팔아서는 안 되는 거야. 그래서야. 어떻게든, 돈은 꼭 지불하리다.” 구멍이 휑한 접의자에 엉덩이를 담그고 끙, 소리를 냈다.

한은, “깡통이라도 남아 있었으니까, 빵을 사서 먹었지. 감사하라구, 깡통에게.” 스패너로 차 옆면 어딘가의 암나사를 꽉 죄고 나서는 힐긋 그를 쳐다본다. “인상이 꼭 쪼글쪼글해진 비닐봉지 같잖나. 웃으면 복이 온대요.”

그럴 리가, 씹할 하는 표정이 바로 보여 왔다.

 

손님이 왔으니 잠시 쉬었다 해야겠군. 선반까지 비척비척 걸어간 한은 손에 든 공구를 선반에 내려놓았다. 장갑을 잘 벗어서 옆에 올려놓곤 선반 모서리에 걸려 있는 더러운 수건을 집어 든다. 먼저 얼굴과 목의 땀을 닦은 후 수건을 옷 속에 쑤셔 넣어 손이 잘 닿지 않는 구석의 땀마저 훔쳐내었다. 이덕형은 매친 듯 돌아가는 내 신세 같으니, 하고 있었다. 한은 갑자기 이덕형 동정론자라도 된 것인 양 위로하는 마음으로 되어갔다. 하기는 그렇지. 요즘 세상이 잔혹하지, 하려던 그가 홀연 태도를 바꾸었다 동정이나 위로 따위는 필요 없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저쪽이 잔혹하다면 이쪽에서는 경각심이라도 일깨워 줘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너를 찾으러 온 거야.”

나를?”

이 바닥에서 호구는 너밖에 없지.”

하하하.”

이덕형은 부러 웃고 있었다.

사실 소름이 돋긴 했어.”

또 당할 수도 있었어.”

이란 그의 단 한 마디에는 상념이 한 다발쯤 걸려 있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건 정말 아찔한 순간일 뿐이었다. 자강구로 돌아가던 길에서 그년 트럭과 비슷한, 아니 그년이 탔을 것만 같은 트럭76시리즈 ARM 시스템을 장착한, 괴물같이 큰 모델이 자신 앞을 스쳐간 일. 그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정말 다행일까? 그는 자신의 이성에 물었다. 아무래도 결심을 하길 잘했어. 그는 자신에게도 힘이 필요한 시점임을 알고 있었다.

한은 아쉬워했다.

무장의 필요성에 대해서 내가 예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지. 그때 결정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

블랙마켓을 보니 제법 싼값에 나온 게 있었거든. 무너진 군부에서 유출된 구형 중에서도 꽤 괜찮은. 작지만 화력은 큰.”

어떤 기종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고,

둘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시에게서 연락이 왔다.

 

**

 

프렌즈(Friends & Co.)라는 한 기업이 있다. 등쳐 먹을 수 있는 지방 상인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중심 도시의 기업들과 함께 거대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던 그들은, 규모를 헤아릴 수 없을 만치 거대한 조직이었다. 무장 폭력 집단에도 비길 만한 무력을 지닌 데다 각계 고위에도 손이 미치는 까닭에 업계에서는 단연 으뜸이었고 다른 두셋의 업체가 힘을 합치지 않은 한 이들에게 맞설 수는 없을 정도였다. 자원 업계의 한 축이자 중심이었다. 남의 물건을 빼앗는 것도 업무의 일부였는데, 치안이 철저한 곳에서는 인면수심의 모습을 싹 감추다가는 감시의 눈에서 벗어날수록 도에 넘는 짓을 하여, 아시아 연합의 눈총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한 돈의 힘에는 연합 정부조차 매수할 수 있는 절대적 권능이 있었으므로, 귀밑까지 입아귀를 올린 포식자의 광기 같은 일들만 벌어질 뿐이었다. 이 나라의 중앙 정부가 부채에 깔려 망해버린 뒤였기에 그들은 더욱 날뛰었다.

그들은 암거래 시장을 통해서, 또는 직접 연합의 군부를 상대하면서 무기를 사들였고 그것들은 그들의 연구소나 창고들에 보내졌다. 그런데 일부는 한낱 직원에게 제공되기도 했다(고철이나 재활용품 등의 거래가는 치솟고 구식 소형 화기의 값은 헐하게 떨어졌으니 가능한 이야기였다. 또한 이렇듯, 비폭력으로 향하는 개화의 길이 인류에게는 언제나 멀었다.). 물론 한때의 일이고 제재가 강화된 지금에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힘은 잠시 숨었을 뿐 결코 사라진 건 아니다 라는 식으로 시는 말했다.

시의 대머리가 번득였다.

기왕에 악행을 저지르던 무리가 있었지. 지금도 왕성하게 비즈니스를 벌이고 있고. 아마 거기 직원인지도 몰라. 네가 그년 잡는 일을 완전히 포기는 안 했다기에 나도 조사를 간간이 하고는 있었지. 별 성과는 없지만, 대략 내 추측이 그래.”

한이 묻는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모른다는 얘기지? 누가 이 얼간이를 겁탈했는지.”

그러자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어이 시, 알아낸 건 설마 그것뿐이야?”

한과 이덕형이 거의 동시에 묻는다.

그러자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이덕형은 끽연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숨을 후우 불고 있다. 다음 순간, 시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년에 관한 것은 미안한데 모르겠다, 별 정보가 없다.(이 말을 듣는 순간 이덕형은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다만 이것은 훨씬 중요한 문제다, 이 판을 독점하려고 프렌즈가 아주 더러운 방법조차 가리지 않고 있다, 무력에 누구나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라는 얘기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프렌즈가 구축한 사설 무기고가 국경 부근에만 네 개 이상이라는 거 알지? 당분간 자질구레한 일만 하세요 사고당하기 싫으면.”

그 후 영상이 흔들렸고 소리도 엉망이 되었다. 신호에 노이즈가 끼는 것이 칵칵 하고 누가 가래침을 뱉는 소리 같았다. 송수신 감도가 엉망이군. 또 모래폭격인가? 그러고 나서 소리만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어느 암컷의 엉덩이를 찬양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건 시의 목소리였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보고 있나? 이쪽에서는 더는 얼간이의 농담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시끄러, 더 지껄였다간 러시안 룰렛을 해야 할 거다, 총알 꽉 채운 총으로, 물론 그대가 먼저 쏘는 순서로. 이덕형은 그렇게 일침을 놓은 후 몇 초간 숨을 고르는 시늉을 했다. 나한테 할 말이 더 있으면 어서 하고 끊게나, 했다.

아니. 아무것도.”

화면 속의 대머리 수컷이 말했다.

정확하게 끊어서 구사하는 화술은 자신감 또한 최고였다. 이덕형과 한이 그를 욕하듯이 중얼거렸으나 더 괜찮은 엉덩이를 찾아낸 시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이후로 전해져 오는 것은, 암컷 엉덩이의 섹시한 흔들림만큼이나 출렁거리는 화면이었다. 하나같이 저질인 소리와.

 

**

 

작업의 진척이 사뭇 더디다. 구형 모델의 속을 파면 팔수록 골치가 아파지게 마련이었다.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시가 말한 대로 프렌즈 소속일까, 가해자는?”

한이 물었다.

그럴 것 같아.”

항간에 떠도는 소리로는 골드 트래시(Gold-trash & Co.)가 아닐까 생각도 되는데.”

거긴 또 어디?”

꽤 거칠게 일하는 놈들이라 하더군. 업계의 뉴 페이스.”

이덕형은 퍽 관심이 간다는 눈치였으나 한이 아는 것은 단지 그뿐이었다.

득시글하군, 무뢰배들…….”

이덕형이 중얼거린다. 그는 어깻죽지가 욱신거려 인상을 구겼고, 손으로 그곳을 주물렀다.

다친 데는 괜찮아? 타박상이라곤 해도 그런 연놈들의 솜씨란 아주 요란한 것이니까, 조금 걱정되는데?”

폭발음이 아주 지랄 같았어요. 기절한 내 영혼에도 들릴 정도였다니까? 그런데도 많이 안 다친 건, 다행. 기적 같은 일이야.”

기적이라. 참 다난한 세상이야.”

2년 넘게 조용한 것 같더니 또 이런 짓거리들이 늘어나려나? 젠장.”

그는 긴 수다로도 성이 덜 풀린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고 속을 토해내듯 짖어 볼까 하다가, 한의 경우, 잦은 정도로 남을 훈계하려 들기 때문에(더구나 아직까지 한 번도 훈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두기로 한다. 긴 끈처럼 이어지던 분감을 다부지게 말아서 마음의 밑바닥에다 내려놓았다. 그런 그를 빤히 보고 있던 한이었다.

가만 있자, 이거, 개조 작업이 더 지연될 수도 있겠어. 조그마한 무기 하나 달려는데 왜 이리 부족한 것들이 많아? 만일…… 이게 없으면 발주도 해야 되고, 그럼 며칠은 더 걸릴 텐데…….”

,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네더니 슬쩍 딴소리를 꺼낸다.

찾아서 붙잡은 다음엔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까 가해자 말이지.”

이덕형은 일순 말이 없다. 방금 건네받은 담배를 입에 가져가다 말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시늉을 했다. 방금 전까지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었던 담배가 그가 주먹을 불끈 쥐는 순간 완전히 구겨져버렸다. 일그러진 조음부가 만들어 내는 발음은 차의 엔진음처럼 무겁고 거칠게 주변을 울렸다.

공손한 여자로 만들어주겠어. 다음번에 만나면.”

해야 할 것은, 복수뿐이다. 아니면 크게 한몫 잡아 그 기분을 풀던가.

억만금이 내게 오면, 복수는 취소.” “뭐라고?” “그냥 농담.” “아무튼, 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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