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Rainway - 5.여행자의 길

2013.05.14 22:3805.14

5
여행자의 길
앞으로 언젠가, 어느 해인가 전쟁이 끝나면 책은 다시 쓰일 것이오.
- 레이 브레드버리 <화씨 451>







 “즐거운 여행이 되셨습니까?”
 알켄 씨가 차련의 연기를 훅 뿜어냈다. 오랜만에 맡는 허브의 향기가 서전 안으로 은은히 퍼졌다. 나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로군요. 알켄 씨는 차련을 재떨이에 쑤셨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향기는 모두 흩어져버렸다. 나는 일지만 꺼내고 가방은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내 가방에 묻은 핏자국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끔찍하지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책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을 전쟁으로 몰아넣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냥꾼은 책을 불태우기 위해, 파수꾼을 책을 지키고 그들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서로를 해치지요. 대체 이 역사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리브 포레스트에서 역사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켄 씨는 품에서 차련을 하나 더 꺼내 등불에서 불을 옮겨왔다. 다시 연기가 주변으로 퍼졌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오히려…… 역사서가 없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도 드네요.”
 알켄 씨가 중얼거렸다. 이제는 역사 같은 건 아무렴 상관없었다. 역사를 알아야할 이유가 없었다. ‘책 읽는 사람들의 나라’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다. 여행 가이드가 슬슬 떠날 채비를 하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일지를 폈다. 사냥꾼의 영역을 떠나온 때부터 아무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다음 세계로 가 이 일지를 보고서 기억해낼 수 있을까. 여기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나는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훑어보고 알켄 씨에게서 연필을 빌려 받았다.
 마지막 기록.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적지 않은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녀와, 헤루인에 대하여. 이게 내가 그들에게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 생각을 수없이도 많이 해왔을 터였다. 여행을 할 때마다 기억을 잃게 된다는 건, 다행이면서도 잔인했다.
 빈 페이지 없이 모두 채우고 나니 어느덧 체류 시간은 20분으로 다가와 있었다. 지루하게 시간이 가는 동안 계속 내 앞을 지키고 있던 알켄 씨에게 말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알켄 씨는 아까부터 차련만 뻑뻑 피우고 있었다. 그는 새로 차련을 꺼내 불을 붙이고 나에게 건넸다. 조금이지만 마음이 편해지실 겁니다. 나는 그걸 받아서 입에 물었다. 한 번 들이마시자 달콤한 허브의 향이 들어왔다. 약간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것도 잠시였다. 레인웨이 포레스트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나면서 오히려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곳의 파수꾼은, 허브 포레스트 출신이랬지. 붉은 허브를 코 가까이대고 향을 맡던 파수꾼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켄 씨는, 저 최전방의 파수꾼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아쉽네요.”
 알켄 씨는 차련을 재떨이에 쑤시며 이어서 말했다.
 “저는…… 이 전쟁이 헛된 것이길 바랍니다.”
 “기구하군요.”
 나는 피식 웃으면서 펜을 책상에 놓았다. 기록은 끝났다. 알켄 씨가 일어났다. 그는 옷을 단정히 여미더니 몸을 꼿꼿이 세우면서 왼쪽 가슴에 주먹 쥔 손을 올려놓았다. 파수꾼의 경례였다. 몹시 비장한 표정이었다. 나는 가만히 책의 겉장을 덮었다.
 “앞으로, 행복한 여행되시기를.”
 
 ‘책 읽는 사람들의 나라’를 다녀와서, 59일간의 방관의 기록. 이에 나는 여기에 기록한다.


 
×



 “대대장님, 수색원 편성이 끝났습니다.”
 알켄은 자기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군장에 일지를 넣고 등 뒤에 짊어졌다. 그 위에는 파수대의 문장이 그려진 망토를 썼다. 어깨에는 활을 매고 군장 사이에 화살통을 끼워 넣었다. 완전히 무장을 갖춘 알켄은 뒤를 돌아봤다.
 “바로 출발하자.”
 “그런데 왜 갑자기 수색인 건가요? 절대방어선 너머론 이제 살아있는 파수꾼이 몇 안 될 텐데.”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
 “레인웨이 포레스트는 최전방이잖아요. 이미 사냥꾼이 점령했거나 그럴 텐데 왜 굳이……. 거긴 파수꾼 한 명도 안 남아 있을 거라구요.”
 “수색원 신입 생도들 실전 경험하는 거라고 생각해.”
 절대방어선의 문 앞에는 수색꾼 스무 명이 말을 탄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알켄이 말에 올라타 출발 선언을 하자 성문이 서서히 열렸고 수색꾼 부대가 달리기 시작했다.
 수색꾼들은 쉬지 않고 달려 하룻밤 만에 ‘비가 내리는 숲’에 당도할 수 있었다. 비가 거세서 말의 눈에도 고글을 씌워주어야 했다. 절대방어선 안에 있으면서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은 신입 파수꾼들은, 전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나무에 다다닥 박힌 파편과 젖어있는 길리슈트와 전투복, 그리고 해골과 뼛조각들이 숱하게 보였다.
 ‘비가 내리는 숲’을 사흘 정도 돌아다닌 끝에 한 성벽이 보였다. 성문 앞에는 버려져 있는 발리스타 하나가 녹슬어가고 있었다. 성문은 부서져 있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나무에 묶어놓고, 무장을 갖춰 성 안으로 들어갔다. 물안개가 자욱했다. 입구에서부터 사냥꾼의 시체가 있었다. 아직 부패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시체와 파편과 화살과 볼트는 곳곳에 포진해있었다. 
 수색꾼들은 흩어져서 주변을 조사했다. 알켄은 직속부하 한 명과 함께 중앙으로 걸어갔다. 길리슈트를 입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한 파수꾼이 보였다. 알켄은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파수꾼을 일으켜 얼굴을 확인하고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는 파수꾼입니까?”
 부하가 물었다.
 “훈련원 교관 시절 후배였지……. 많이 예뻐했었는데.”
 가녀린 소녀가 거기에 있었다. 알켄은 소녀의 고글과 후드를 벗겼다. 앞머리가 축 내려와 얼굴을 가렸다. 그는 손으로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얼굴을 한 번 쓸어주었다. 창백했다. 그는 흉터로 얼룩진 손을 잡았다. 거칠거칠했다. 그저 기절한 것이라고, 아직 숨을 쉬고 있을 거라고 그는 믿고 싶었다. 그러나 숨은 맥없이 끊어져 있었다. 그는 허브 포레스트의 소녀를 기억했다. 
 그는 소녀를 들어 숲이 있는 쪽으로 갔다. 그리고 수색꾼들을 불러 땅을 파게 했다. 땅이 축축했기에 파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느 정도 깊이의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알켄은 소녀를 조심스럽게 안치했다. 책과 노란 허브와 함께 다시 묻고, 나뭇잎으로 덮었다. 
 무덤은 묘비도 없고 봉우리도 솟아있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였다. 수색꾼들은 그 앞에 서서 가슴에 주먹 쥔 손을 올려놓았다.
 “수서원 하정, 헤루인. 레인웨이 포레스트의 외로운 파수꾼을 위하여, 묵념!”
 죽은 이들은 하늘에서 비를 뿌린다. ‘비가 내리는 숲’은 그 후로 절대로 비가 그치는 법이 없었다. 임무를 마친 수색꾼들은 비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


 
 이곳은 어디일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 작은 침대에 나는 누워 있었다. 앞에는 화로에서 장작불이 불타고 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렸다. 통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이었다. 벽에는 엽총과 박제된 동물의 머리가 걸려 있다. 책이 몇 권 있고 접시와 포크는 두 개씩이고, 장작더미가 쌓여 있다. 
 “일어나셨습니까? 몸은 어떠십니까?”
 젖어있는 우비를 걸친 어떤 남성이 나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것이 어딘가 중후한 신사처럼도 보였다. 아아, 다른 세계로 온 것이구나.
 “길가에 쓰러져 있기에 데려왔습니다. 좀 쉬십시오.”
 남자는 집을 나갔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내가 전에 있던 세계는 어떤 곳이었지? 분명 그곳은 온통 숲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아, 그래. ‘책 읽는 사람들의 나라’. 분명 나는 그곳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숲을 헤매며 여행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왜 그런 이름으로 불렀을까? 책을 즐겨있는 사람들이 살았던가? 
 아아. 일지든 일기이든 기록을 해야지. 여행을 할 때마다 기억을 잃으니 대체 내가 저번 세계에서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 완전히 각인된 ‘원래 세계’에 대한 기억은 조금이지만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나는 집주인 남자에게서 여행자에 대해 겨우 설득시킨 후에 이 세계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어느 왕국 구석의 초라한 영지의 초라한 마을. 이 나라도 예전에 있던 세계와 비슷했다. 1년 중 2/3는 비가 내렸다. 신전에서는 하늘을 달래기 위해 비가 그칠 때마다 맑은 날이 오길 기원하는 제사를 치른다고 했다. 나는 남자의 소개로 상인을 만나 왕도로 갈 수 있었다.
 평화로운 나라. 나는 이곳 사람들의 소박한 인심과 생활과 문화를 일지에 기록했다. 나는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거닐면서 문득 그녀에 대한 생각이 났다. ‘원래 세계’에서 실종돼버린, 내 연인이었을지도 모를 그녀를.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지금 나는 어느 신전에 있다. 밖은 비가 내린다. 한창 우기였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가느다란 빗줄기가 제 몸을 부서트린다. 신이 너무 슬퍼 울고 있는 건가. 가만히 책상에 앉아 하늘을 보면서, 비가 내리는 나라라고, 나는 여기에 기록한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71 중편 네크로노미콘을 향한 금단의 추적 - 3 타락천사 2015.06.29 0
170 중편 네크로노미콘을 향한 금단의 추적 - 2 타락천사 2015.06.29 0
169 중편 네크로노미콘을 향한 금단의 추적 -1 타락천사 2015.06.29 0
168 중편 고물 고물 거물 ( 6-2 ) 광석 2015.06.12 0
167 중편 고물 고물 거물 ( 6-1 ) 광석 2015.06.12 0
166 중편 고물 고물 거물 ( 5 ) 광석 2015.06.12 0
165 중편 고물 고물 거물 ( 4 ) 광석 2015.06.12 0
164 중편 고물 고물 거물 ( 2 ,3 ) 광석 2015.06.12 0
163 중편 수정) 고물 고물 거물 ( 1 ) 광석 2015.06.12 0
162 중편 진실의 순간(3) 견마지로 2014.12.27 0
161 중편 진실의 순간(2) 견마지로 2014.12.27 0
160 중편 진실의 순간 (1) 견마지로 2014.12.19 0
159 중편 린트 열전(1) ㅆㄱ 2014.01.23 0
중편 Rainway - 5.여행자의 길 서늘해 2013.05.14 0
157 중편 Rainway - 4.파수의 길 서늘해 2013.05.14 0
156 중편 Rainway - 3.사냥의 길 서늘해 2013.05.14 0
155 중편 Rainway - 2.비의 길 서늘해 2013.05.14 0
154 중편 Rainway - 1.숲의 길 서늘해 2013.05.14 0
153 중편 복수와 장미 -프롤로그 규영 2013.01.04 0
152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10(完) 이니 군 2012.03.21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