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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Rainway - 4.파수의 길

2013.05.14 22:3705.14

4

파수의 길

우리는 책이 불에 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책을 불로 죽일 수 없다는 더 큰 지식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죽어도 책은 결코 죽지 않는다.

- F.D. 루즈벨트

 

 

 

 

 

 

 다시, ‘비가 내리는 숲’이었다.

 온기를 머금고 있는 시체와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을 흐르는 물엔 아직 핏기가 남았다. 한 파수꾼은 좀 부자연스럽게 웅크린 자세로 죽어 있었다. 시체를 뒤집으니 책 한 권이 꼭 쥐어져 있었다. 피를 머금고 있었다. 책은 물에 젖어 들어갔다. 비의 세기에 못 이겨 종이는 물에 젖은 휴지처럼 분해되어갔다. 제목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사유와 철학의 의미 – 페노메논은 이렇게 말했다>.

 어디가 서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대로 계속 가다보면 절대방어선이 보이리라. 중간지대에서 헤매다가 체류 기간이 만료되어도 상관없었다. 여행을 하고 싶은 욕구가 나지 않았다. 이대로 어서 60일을 채워 다른 세계로 가고, 기억을 잃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직 20일이나 남았다.

 나흘 째 밤이 지났을 때, 나는 어느 폐허가 된 파수꾼 전진기지에 있었다. 책 두 권이 젖지 않은 채 텐트 천에 묻혀 있었다. 고문헌이어서 제목조차 읽을 수 없었다. 책이 젖으려고 하자 바로 천을 다시 덮었다.

 텐트 주변을 살펴보는데 풀숲에서 부스스 소리가 났다. 나는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주변은 탁 트인 공터라서 엄폐물이 없었다. 내가 이리저리 발만 구르는 동안 풀숲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길리슈트로 얼굴까지 덮은 어떤 파수꾼이 내가 있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후드와 고글을 벗었다. 헤루인이었다. 반가운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헤루인도 그다지 내색하진 않는 것 같았다. 내 앞에 서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표현할 만한 단어를 찾는 듯 입을 우물거리고만 있었다.

 “사냥꾼의 영역은…… 어땠나요……?”

 헤루인은 그런 말로 운을 뗐다. 당신이 언니라고 부르던 그 여행자는 지금은 사냥꾼이라고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대답할 수 없습니다. 헤루인은 어색하게 웃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나는 몇 주일 전의 그 숲을 다시 걸어 레인웨이 포레스트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때쯤, 비는 막 그치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네요. 몇 주 만에 날이 갠 적은 없었는데.”

 비는 완전히 그쳤다. 먹구름이 걷히면서 그 사이로 빛이 오로라처럼 쬐어 들어왔다. 아름다운 풍경이 서전 위에서 펼쳐졌다. 비를 피해 웅크리고 있던 새들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길게 편대를 이룬 새들은 높게 활공했다. 주민들이 중앙으로 모여들어 단우제를 시작했다. 다시 샤인 포레스트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노래가 흘렀다.

 “주변 순찰 좀 돌고 있었는데 또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헤루인은 아까 전진기지에 남아있던 고문헌 서적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제본을 풀러 한 장 한 장 떼어냈다. 그리고 서전 안에 줄을 몇 개 걸더니 종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그 위에 널었다. 내용을 아는지 하나씩 읽어보면서. 내 눈엔 그저 괴상한 문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음…… 이건 아마도…… 역사와 관련된 것 같네요. 연도가 적혀 있어요. 그리고 지은이가 옛날 헌원에 있었던 기록꾼이기도 하고……, 지금은 죽었지만……. 아무튼 무척 오래된 책이에요. 사냥꾼에게 약탈당했었을 텐데 탈환했다가 거기에 버려진 건가 봐요.”

 헤루인은 낱장을 천천히 훑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역사서라는 말에 번뜩 눈이 뜨였다. 나는 이걸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제가 해독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에요. 관서원 파수대 직제 중 하나. 서전과 도서 관리를 담당하고 오프닝 포레스트에서는 출판까지 한다. 이외에도 파수대를 총괄하는 헌원, 서전을 수비하는 수서원, 숲 수색을 담당하는 수색원,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훈련원, 주민들의 독서를 담당하는 독서원이 있다.

에 있었을 때 날림으로 배운 게 전부라서……. 아, 서문은 대충 해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쪽 숲으로 돌아갈 때 가져가시겠어요?”

 나는 서문이라도 해독해달라고 했지만, 가져가는 것에 대해선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글자라면, 분명 사냥꾼과 파수꾼이 대립하기 전의 역사도 있을 게 분명했다. 관록 있는 알켄 씨도 모르는 역사를 내가 전달하게 되면, 위험했다. 역사는 세계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이 있다.

 “그러면 모두 마르는 대로 해독을 해볼게요. 체류기간까지 19일 정도 남으셨죠?”

 헤루인은 여행일자를 세고 있었다는 듯이 정확하게 말했다. 어느새 서전은 종이 낱장들로 널려 있었다. 젖은 종이에서 떨어지는 물은 거무스름했다. 잉크가 번지고 있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흘이 지나서야 종이는 손에 집어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랐다. 헤루인은 알 수 없는 문자들로 채워진 종이 여덟 장을 책상 위에 늘여놓고 해독에 착수했다. 한 장을 해독하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헤루인은 서전 안에 있는 사전이란 사전들을 모조리 동원했다. 책상 주변은 두꺼운 사전들로 쌓여갔고 종이들도 널브러졌다. 헤루인에게서 힘들다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일을 하게 돼서 좋다는 듯이 열정적이었다. 책을 만지는 손길이, 마치 좋아하는 연인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왜 책을 좋아하십니까?”

 나는 헤루인과 마주 앉아서 에일레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반대로 해서 질문했다. 그녀는 해독에 몰두한 채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 옆에는 남아 있는 게 책 밖에 없거든요. 최소한 책은…… 제 옆을 떠나거나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있잖아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냥 서전을 버리고 도망쳐도 되는데, 왜 계속 이곳에서 홀로 지키고 있는 건가요. 목숨을 바칠 만큼 책이 소중한 건가요. 내 질문에 헤루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파수꾼이니까요. 책을 지킬 의무를 부여받았으니까. 그런데 저도 가끔은 도망치고 싶어요.”

 사냥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서로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빨리 전쟁이 끝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군요. 나는 대화를 끊었다.

 그녀가 열람실에 있을 때는 내무반에, 내무반에 있을 때는 열람실로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5일을 보냈다. 서문은 장장 열다섯 장에 걸쳐 해독되어 있었다. 헤루인은 바닥과 책상 위에 어질러져있는 사전들과 서류들을 정리했다.

 “의역한 부분이 많아서…… 관서원에서 해독해주면 더 정확하겠지만 이 정도밖에 안 돼서 죄송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나에게 해독본을 넘겨주었다. 대충 훑었는데 처음에는 또박또박 쓰여 있는 글씨가 갈수록 흐트러져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람실 의자에 앉아 제목을 읽었다. 헤루인은 내 옆에 앉지 않고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숲의 역사>, 기록꾼 트리폴리.

 다음은 내가 리브 포레스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역사까지 끄집어내어 정리해놓은 역사서이다. 우리에게 가장 찬란한 햇빛을 선사하던 태양의 숲이 구름으로 뒤덮이고, 눈물을 뿌리는 비의 숲으로 바뀌게 된 그 방대한 역사를 기록함이라. 나는 기록꾼으로서 서쪽 숲과 동쪽 숲으로 분열된 이 나라에 대해……

 갑자기 공기를 진동시키는 울림에 내 시선을 붙잡아두던 글씨가 아래로 후두둑 떨어져버렸다. 쿵, 하는 소리가 서전 안을 뒤흔들었다. 간격을 두고 굉음은 규칙적으로 일어났다. 천둥이 치나 해서 밖으로 나갔지만 하늘은 비만 내릴 뿐 잠잠했다. 누군가가 서전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우비도 쓰지 않은 남자가 헐레벌떡 오더니 숨을 몰아쉬면서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막 내무반에서 나온 헤루인은 남자의 말을 듣기도 전에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사냥꾼이, 성문을 공격하고 있어요.

 나는 뒤를 돌아봤다. 길리슈트에 산탄과 화살통으로 주렁주렁한 군장과 긁혀서 약간 흐릿한 고글을 쓴 헤루인의 모습이 있었다. 헤루인은 서전을 박차고 나와 뛰어갔다. 나는 뒤늦게 그녀를 따라갔다. 여전히 쿵쿵거리는 소리는 계속 되고 있었다.

 철퍽이는 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성벽 위를 몇 번 달린 끝에 성문이 있는 쪽에 다다랐다. 나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앞머리를 손으로 넘기면서 앞을 보았다. 한 쉰 명 정도 되는 사냥꾼들이 성문 앞을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발리스타 거대한 화살을 발사하는 장치.

를 설치해놓고 거대한 화살로 성문을 공격했다.

 “올 게 왔네요.”

 헤루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산탄 다섯 개를 사냥꾼들 위로 던졌다. 그리고 산탄 하나에 화살을 박아 넣었다. 그러자 파편들이 나머지 산탄에 박히면서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파편이 아래로 흩뿌려졌다. 사냥꾼들은 예상이라도 했는지 파편을 맞은 몇몇을 제외하곤 바로 양옆으로 흩어졌다. 방패지기가 발리스타로 다가갔다.

 성벽 위로 볼트가 날아왔다. 헤루인은 성벽에서 싸우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지 성벽 아래로 내려가 성문 앞에 산탄을 설치하고 옆에 풀숲에 숨어 대기했다. 문은 그 모진 공격에서도 끈질기게 버텼다. 그러나 곧 문이 산산조각 나면서 사냥꾼들이 들어왔다. 헤루인은 바닥에 깔린 산탄에 화살을 쏘았다.

 위로 파편이 튀었지만 정작 사냥꾼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방패지기들이 앞장서 있었다. 헤루인은 그들 위로 산탄을 던졌다. 파편에 세 명이 죽었지만 곧바로 방패지기들이 위를 막았다. 

 사냥꾼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헤루인은 풀숲을 뛰어가면서 그들을 쫓았다. 수적으로 헤루인이 불리했다. 나는 성벽 위에 있다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래로 내려왔다. 비는 여전히 내렸고 나는 서전에 있는 일지를 가져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서전에서 일지와 해독된 역사서를 가방에다가 챙기고 급히 나왔다. 서전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이미 사냥꾼 몇 명이 민가 쪽으로 와 사람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피가 솟구치는 것도 보였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헤루인이 나무 사이를 오가면서 활을 쏘고 산탄을 던지는 모습이 있었다. 헤루인을 쫓는 사냥꾼들은 하나 둘 씩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나는 아래로 내려와서 빠른 걸음으로 민가 쪽으로 갔다. 비명 소리와 산탄이 터지는 소리, 사냥꾼들의 고함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마저도 비 내리는 소리에 거의 묻힌 상태였다. 순간, 헤루인이 내 앞을 쉭 지나갔다. 나는 그 짧은 시간에 헤루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체념이었다. 뒤이어 사냥꾼들도 지나갔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그저 헤루인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헤루인은 지쳐가고 있었다. 수시로 나무 뒤에 숨어서 숨을 돌렸다. 그러다가 사냥꾼에게 발견되면 다시 추격전의 시작이었다. 간간히 산탄을 터트리고 활을 쏘면서 사냥꾼들을 처리했지만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헤루인의 발이 점점 느려졌다. 헤루인은 한계를 인식했는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볼트를 다 써버린 사냥꾼들은 석궁을 버리고 허벅지에서 칼을 빼들었다. 

 사냥꾼들이 나무 뒤로 근접했다. 헤루인도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서 손에 쥐었다. 손에 쥔 단도가 가늘게 떨렸다. 곧 사냥꾼 한 명이 달려들었다. 헤루인은 단도를 거꾸로 쥐고 타이밍에 맞춰 옆으로 휘둘렀다. 달려든 사냥꾼의 얼굴이 단도에 꿰뚫렸다. 직후에 뒤쪽에서 다른 사냥꾼이 덮쳤다. 헤루인은 단도를 뒤쪽으로 돌려 옆구리에 박았다. 

 사냥꾼들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헤루인은 능숙한 움직임으로 사냥꾼의 목과 손목을 그었다. 달려드는 칼날들 앞에서 헤루인은 춤을 췄다. 칼이 빗방울을 갈랐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헤루인이 단도를 휘두르려는 순간 사냥꾼이 손목을 붙잡았다. 단도들이 그녀의 목에 겨눠졌다. 헤루인은 몸부림치면서 저항했지만 손목을 붙잡은 사냥꾼은 쉽게 그녀를 무장해제 시키고 숲 밖으로 끌고나갔다.

 레인웨이 포레스트 소서전은 이미 점령당해 있었다. 헤루인은 피가 고여 있는 바닥에 무릎 꿇렸다. 그 앞에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피를 쏟아내는 주민들이 쌓여 있었다. 사냥꾼이 헤루인의 후드를 벗기고 고글을 벗겨 바닥에 내팽개쳤다.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갔다. 헤루인은 상처가 나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었다. 사냥꾼 하나가 헤루인 앞에 섰다. 헤루인은 고개를 들었다. 사냥꾼은 철모와 복면을 벗었다.

 어딘가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냥꾼은,

 그녀였다.

 “언니…….”

 헤루인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냥꾼들이 서전에서 책들을 천에 덮은 채 가져왔다. 그리고 책을 하나하나 천에서 꺼내 헤루인 앞에 떨어트렸다. 책은 바닥에 떨어져 비에 젖고, 찢어지고, 분해됐다. 종이조각이 핏물로 물들었다.사냥꾼들은 죽어가는 책을 보며 낄낄거렸다. 헤루인은 한 권이 떨어질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책은 계속 떨어졌다. 그러나 쌓이지는 않았다. 모두 빗물이 되어 흘러갔다. 마지막 한 권, ‘책 읽는 사람들의 나라’의 방대한 역사를 기록한 <숲의 역사>까지 모두 분해됐다. 

 헤루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게 그녀의 눈망울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내가 세계에 간섭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나는 또 이렇게 죽음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언제나 여행을 하면서 나를 힘들 게 하던 딜레마였다. 사람이 앞에 죽어가고 있어도 도와주지 않고 외면했다. 사람이길 포기하고 여행자를 선택했다. 내가 지금 헤루인을 도운다면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여행 권한이 나에게 부여한 이 미칠 것 같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 오랜 여행 끝에 너무 무뎌져버렸다. 

 헤루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들리진 않았다. 에일레르, 그녀는 품에서 그린허브 약을 꺼내 마셨다. 그리고 단도를 쥐었다. 어떤 최후통첩 같은 건 없었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도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둘렀다. 헤루인의 목이 그였다. 피는 솟구쳤다.

 사람의 인생은 책이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허무했다. 책이 불타는 것은, 그 책이 쌓아온 수시간의 지식과 사람들의 손길이 한 줌도 안 되는 재로 사라짐을 의미하고,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일생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임을 의미했다.  나는 그 사실을 앎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네 일지를 본 덕분에 레인웨이 포레스트를 기억할 수 있었어.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 곳에서 신세를 졌었다니……. 끔찍하네.”

 그녀는 말했다. 내가 일지를 썼기 때문에 헤루인이 죽은 것이라면, 나는 세계에 간섭한 것이므로 여행 권한이 박탈당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녀는 나를 흘기더니 철모를 쓰고 다시 복면으로 입을 가렸다. 웃고 있었을 것이다. 사냥꾼은 울지 않으니까. 사냥꾼들은 유유히 빗줄기 속으로 사라졌다. 사방은 비가 내리는 소리로 가득했고, 바닥은 피로 흥건했다. 차라리 피가 내린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헤루인을 등졌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레인웨이 포레스트를 떠났다.

 <숲의 역사>. 헤루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도 그곳에 남기고 왔다. ‘비가 내리는 숲’은 아까보다도 더 세차게 비를 뿌리는 것 같았다. 나는 비의 길을 걸어갔다. 빗물은 나의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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