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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Rainway - 2.비의 길

2013.05.14 22:3505.14

2
 비의 길
죽은 자는 더 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  류시화 「봄비 속을 걷다」






 숲의 밤은 익숙했다. 육각형 상자 안에 반딧불이가 날아다녔다. 등불이 넘실거리며 앞을 비추었지만 잘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주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서, 나무들이 나를 둘러싸고 서로 숙덕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이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다섯 번째 달이 떴는데도 여기가 어디인지, 사냥꾼의 영역까진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큰 나무 줄기를 넘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공터엔 검게 그을리고 하얀 재로 덮인 바닥과 무너진 텐트가 있었다. 여기가 알켄 씨가 말했던 사냥꾼의 전진기지인가 생각했는데 텐트엔 절대방어선에서 봤던 것과 같은 책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공기가 스산했다. 약하게 부는 바람이 내 피부를 스쳐지나갔다. 주변에는 귀뚜라미들의 울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와 부싯돌을 긁었다. 착, 착, 착, 착, 착……. 몇 번을 부딪친 끝에야 불씨가 일었다. 입을 불씨 가까이 대고 숨을 불어넣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니 땔감이 타들어가면서 불이 솟아올랐다. 주변이 환해졌다. 나는 침낭을 펴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 가방에서 일지를 꺼냈다. 허브 포레스트를 떠나기 전에 알켄 씨를 그린 그림이 떨어져 내 가슴팍에 걸렸다. 나는 일지를 쓰고 가방에다가 넣었다. 여행. 한 달 하고 닷새.
 똑바로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별들이 반짝였다. 이렇게 별이 잘 보이는 하늘은 처음이었다. 검은 바탕에 수놓아진 별들, 주변을 가득매운 귀뚜라미 울음, 적당히 차가운 공기.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원래 세계’에서 연인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녀와 함께 이곳에 있었더라면. 하지만 그녀는 사라졌고 나는 다른 세계로 와버렸다. 그녀는 사서였다는 것과, 책을 아주 좋아했다는 것과, 언제나 미소가 없는 건조한 표정이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를 분명 좋아했을 거라는 확신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눈을 감았다. 지금 이 분위기가 계속 되기를 바랬고―
 갑자기 공기를 진동시키는 비명이 완전히 부서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인기척과 함께 작은 신음이 들렸다. 그것도 여러 명. 나는 일어나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발소리를 죽여 걸어가는데 사람의 그림자가 밟혔다. 누군가가 들고 있는 횃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무 뒤에 서서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파수꾼 두 사람이 무릎을 꿇은 채, 사냥꾼 여섯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하는 찰나, 사냥꾼이 석궁으로 파수꾼의 심장을 꿰뚫었다. 찢어질 듯한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파수꾼은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소리를 집어삼키면서 몸부림을 쳤다. 풀이 붉게 물들었다. 옆에 있는 다른 파수꾼은 고기 덩어리가 돼버린 동료를 보면서 가쁘게 숨을 쉬었다.
 알켄 씨에게 들었다. 리브 포레스트 공방전은 종전되었고, 지금은 소강상태라고. 그러나 절대방어선 너머 ‘버려진’ 서전의 파수꾼들은 아직도 유격전을 벌이고 있다고. 아마도 이들도 그런 부류일 것이다. 
 나는 나무 뒤에서 고개만 내민 채 일지에 기록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파수꾼과 눈이 마주쳤다. 횃불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나에게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사냥꾼이 그의 머리에 석궁을 갖다 댔다. 지금 내가 나서서 저들의 눈길을 끈다면 파수꾼은 살 수 있다. 나는 여행자이기 때문에, 불가침 특권이 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내가 소리를 지른다면, 저 앞에 나서서 나를 쫓게 한다면. 파수꾼은 그런 나를 통찰한 듯이 눈동자를 굴려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지켜보았다. 독백처럼, 파수꾼은 죽었다.
 사냥꾼은 그들의 시체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유유히 떠나갔다. 횃불이 멀어지면서 어두워졌고, 암흑이 빛을 좇으며 파수꾼의 시체를 덮었다. 나는 다시 침낭으로 돌아갔다. 파수꾼이 나를 보던 눈빛을 억지로 감겨버렸다. 여행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이 여행규칙은 나에게 여행 권한을 준 가이드가 정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런 규칙을 정했다는 것이, 소실되는 기억 사이에 여행규칙만은 또렷이 남아 나를 구속한다는 것이, 더 슬펐다. 
 나는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걸 보고서야 겨우 까무룩,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나는 이곳을 ‘비가 내리는 숲’이라고 기록했다.
 하늘은 뚜껑으로 덮어놓은 듯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하늘이 파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엔 회색빛이 감돌았다.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괜스레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팔위로 차가운 게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서 양동이로 물을 붓기라도 하는지 세차게 쏟아졌다. 몸을 툭툭 치는 빗줄기가 아플 정도였다. 옷이 젖어들어가면서 무거워졌다. 발을 한 번 내딛기가 힘들다. 시야는 가려지고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바람까지 불어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낙수를 못 이겨 축 늘어진 나뭇가지를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저 동쪽으로만 가면 될 줄 알았다. 알켄 씨의 말로는 천천히 걸어도 1주일이라고 했는데 벌써 8일 째다. 사냥꾼의 영역까지 대체 얼마나 더 가야하는가. 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 밑동에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듯한 공간을 발견했다.. 사람 하나가 비를 피하기에 알맞은 굴이었다. 나는 굴 안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앉았다. 빗물이 새어 들어오고 바닥이 질퍽했지만 괜찮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비는 충분히 막아주었다. 나는 알켄 씨가 주었던 가방을 들었다. 방수처리가 되어있어서 내용물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나는 아까 주웠던 사과 비슷한 열매를 꺼내 먹었다. 바나나 맛이 난다는 게 좀 이상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가만히 비가 바닥을 두드리는 것을 보았다. 빗줄기는 땅과 만나면서 제 몸을 부서트렸다. 오랜 시간 응시했다. 빗줄기는 아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꼬박 잠이 들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잠에서 깬 나는 진흙에 눌러 붙어버린 엉덩이를 들었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꼼짝 하지 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비 내리는 소리 사이에서 사람이 말하는 게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안개에 실루엣이 비쳤다. 두 가지 경우였다. 파수꾼이거나, 사냥꾼이거나.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가죽 군화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일곱까지 생겼다. 그들은 내 앞에서 뭐라 대화했다.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고개를 숙여 나무 밑동에 들이댔다. 
 남자는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나자빠졌다. 나는 가만히 나무 밑동에서 나왔다. 카키색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나를 살기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검은색 철모에 복면을 하고 있어 누가 누군지 식별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석궁에 볼트를 장전하고 나에게 겨누었다. 
 “누구냐? 관등성명을 대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방 확인해봐. 책 있으면 바로 죽여.”
 사냥꾼이 가방을 낚아챘다. 일지가 위험하다는 것에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하면서 나는 사냥꾼을 밀치고 다시 가방을 빼앗았다. 그러자 다른 사냥꾼이 거의 동시에 석궁을 쐈다. 볼트는 나를 통과해 지나갔고,
 “으아아아아악!”
 가방을 빼앗으려던 남자의 허벅지에 볼트가 박혔다. 사냥꾼은 뒤로 고꾸라지면서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다른 사냥꾼들이 나에게 시위를 당겼다. 볼트는 내 뒤에 있는 나무에 박혔다. 나는 가방을 껴안고 달렸다. 사냥꾼들이 석궁을 쏴대면서 나를 쫓았지만 하나도 맞지 않았다. 불가침 특권, 저들은 나에게 상처 하나 남길 수 없다.
 무거워진 옷을 이끌고 뛰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옷이 족쇄처럼 나를 자꾸 붙잡았다. 사냥꾼들은 어느새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위치까지 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가방이 손을 떠나 저만치 쓸려갔다. 사냥꾼이 내 몸을 발로 짓밟으면서 머리에 석궁을 댔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도 피해 다니네…….”
 다른 이가 내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는 가방을 열고 <리브 포레스트>를 꺼냈다. 책은 비에 노출됐고 휴지처럼 젖어가면서 제본이 풀렸다. 낱장이 우수수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는 낙수에 찢어져 분해됐고 물과 하나가 되어 풀잎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사냥꾼은 또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퉁기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를 밟고 있던 사냥꾼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나는 뒤뚱거리면서 달려가 몸을 던졌다. 그때 사냥꾼은 바로 내 앞에서 피를 뿜어내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뜨근한 액체가 얼굴과 옷을 적셨다. 나는 공중에 붕 뜬 가방을 잡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냥꾼의 목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사냥꾼들은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사냥꾼의 심장에 꽂혔다. 그리고 파편이 주위로 튀면서 주위에 있던 사냥꾼들에게도 박혔다.
 바닥에 주저앉아 사냥꾼들이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길리슈트를 입은 파수꾼이 고글 너머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파수꾼은 몸을 돌려 사냥꾼이 있는 쪽으로 산탄 폭발과 동시에 작은 탄환들이 흩어져나가는 폭탄.
을 던지고 화살로 꿰뚫었다. 공중에서 파편이 팍 튀더니 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냥꾼들을 덮쳤다. 비가 땅을 향해 쏟아지고, 피는 하늘을 향해 쏟아졌다.
 잠잠해졌다. 다시 빗소리만 들린다. 나는 파수꾼을 올려다보았다. 키가 나보다 작았다. 파수꾼은 나를 보더니 고글을 올려 이마에 걸쳤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당신도, 여행자예요?”
 연약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나에게 손을 내밀려다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리더니 다시 고글을 썼다.
 “쉿.”
 그녀는 활을 치켜 올렸다. 눈을 굴리면서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세요.”
 소녀는 몸을 낮추고 군장 옆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산탄(霰彈)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산탄을 던짐과 동시에 화살을 박았다. 파편이 땅으로 튀고 나무에 다닥다닥 박혔다. 뒤에 숨어있던 사냥꾼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녀를 향해 석궁을 쐈다. 소녀는 나무 뒤로 몸을 굴려 볼트를 피하면서 차례차례 한 명 씩 처리했다. 
 소녀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화살을 난사했고, 산탄을 던졌다. 전면전으로 돌파하려고 뛰어들었던 사냥꾼들은 바닥에 떨어진 산탄을 보고 팔로 얼굴을 가렸다. 산탄에 화살이 박혀 파편이 튀어 올랐다. 피가 튀기면서 사냥꾼들이 뒤로 나자빠져 굴렀다. 사냥꾼이 반격할 틈도 없이 파편이 튀었고 파편은 그들의 살을 깎고 뼈를 흠집 내며 무자비하게 시체를 낭자했다. 내가 있는 쪽으로도 파편이 굴러왔다. 뾰족하게 잘 제련된 금속이었다. 나무의 껍질도 간단하게 도려낼 수 있을 정도로 예리했다.
 피가 튀겼다. 파편과 함께 솟은 핏방울들이 다시 비가 되어 내렸다. 땅은 어느새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소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둘러보고는 활을 등에 맸다. 소녀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나는 온몸이 진흙투성이였고, 그녀는 피투성이였다. 얼굴에도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일단 따라 와주실래요?”
 나는 소녀를 따라갔다.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체를 밟았다. 시체에서 빨래 물 짜는 것처럼 피가 나왔다. 바닥은 사냥꾼들의 시체로 덮여있었다. 피는 계속 몸에서 흘러나와 빗물과 섞여 나무 아래로 흘러갔다. 알켄 씨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냥꾼과 파수꾼의 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 중간지대의 나무들은 대부분 피를 마시고 자랐다고.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숲을 헤쳐 나갔다. 비가 내 몸을 씻고 내려갔다. 소녀의 핏자국만 표식처럼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한 15분 정도 걸었을까, 바위로 된 낮은 성벽과 책 문양이 그려진 문이 보였다.
 안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통나무로 만든 오두막 일곱 채와 논 반 마지기, 그 주변을 둘러싼 내 키보다 두 배 정도 높은 성벽, 그리고 마을 구석에 크지 않은 서전뿐이었다. 길 구석에 침수를 막으려고 만들어놓은 수로에는 세차게 물이 흘러가는 소리로 가득했다. 소녀는 서전 쪽으로 슬슬 걸어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랐다. 넓게 뻗은 처마가 비를 막아주었다.
 “레인웨이 포레스트입니다. 환영해요.”
 소녀가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서쪽 숲을 여행하면서 본 서전들과 비교해서 엄청나게 약소했다. 땅이라곤 겨우 논 하나였다. 오두막으로 된 민가에 사람이 사는지 의심스러웠다.
 “여긴 주민이 스무 명밖에 안 돼요.”
 나는 그녀를 따라 레인웨이 포레스트 소서전으로 들어갔다. 안은 습한 바깥과 다르게 쾌적했다. 책장 네 개가 죽 늘어서 있었는데 책이 꽂혀 있지 않은 빈 곳이 많았다. 서가에 있는 책이 레인웨이 포레스트가 보유한 장서 전부인 것 같았다. 서고로 보이는 곳도 없이 파수꾼이 지내는 내무반과 긴 책상 하나에 의자 여섯 개가 놓여있는 열람실뿐이었다. 어느 곳 하나 깨끗하지 않았다. 책과 책꽂이에는 먼지가 쌓여있었고 의자와 책상도 한 자리를 빼놓곤 하얀 먼지가 앉아있었다. 허브 포레스트 서전에서도 대여섯 명 정도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여기엔 아무도 없었다.
 오랫동안.
 소녀는 물방울과 함께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길리슈트를 벗으면서 내무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새 길리슈트를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나왔다. 소녀가 옷을 준 덕분에 나는 갈아입을 수 있었다. 원래 남자가 입던 옷인 듯 통이 큰 셔츠와 바지였다. 그녀는 나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유한 후, 잔을 내밀었다. 그냥 뜨겁게 데운 맹물이었다. 나는 잔을 받아들고 의자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홀짝였다. 잔이 다 빌 때 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여행자가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알려주지 않겠죠.”
 내 심중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소녀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나는 최대한 말을 아끼려고 하면서 물었다. 뭔가 알고 있느냐고.
 “다른 여행자가 다녀갔었으니까요.”
 알켄 씨가 말한 그 여자 여행자인가.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납득시킬 수고가 사라졌으니 다행이다. 소녀는, 이미 지나간 그 여행자를 계속 ‘언니’라고 불렀다. 그 정도로 친근했었다는 말이다. 여행 권한을 포기하려고 작정했던 건가.
 “저는 수서원 하정, 헤루인입니다. 당신도 사냥꾼의 영역으로 가는 건가요?”
 “네.”
 헤루인은 그저 얕게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낡은 종이의 냄새가 풍겨왔다. 지금이라도 누군가 들어와 서가에서 책을 뽑고 읽을 것 같은데 먼지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게 조금은 씁쓸했다.
 “리브 포레스트에서 오셨겠죠? 지금 어떤지 물어도 될까요? 혹시 함락당한 건 아니겠죠?”
 헤루인에겐 아직 이 세계는 전쟁 중이었다. 리브 포레스트에서 파수꾼과 사냥꾼 사이의 공방전이 계속 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세계를 깨트리면 안 된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전쟁 속에 살아가야한다는 건 잔인한 일이지만, 그 잔인함을 덮어주는 건 내 권한이 아니었다.
 여행자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물어선 안 되는 거였네요.”
 나는 다른 파수꾼은 없느냐고 물었다. 보통 소서전이라도 파수꾼 한 부대, 열다섯 명 정도가 사수하는데.
 “아……. 약간 불공평하네요. 저는 물어선 안 되는데 이것저것 질문하시고.”
 헤루인은 이번에도 쓴웃음을 지었다.
 “동료들은 모두 전사했어요. 파수꾼들을 더 보내달라고 하고 싶어도 연락망이 끊겼고……. 언제 사냥꾼이 공격해올지 모르니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요.”
 어린 소녀였다. 모든 것을 다 초연한 듯한 모습이었다. 동료가 죽었다는 말을 저렇게 웃음을 지으면서 할 수 있는 걸까. 혼자서 이곳을 지켜야한다는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여행을 다니는 당신이 부러워요. 저에게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시무룩해하면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나는 일지를 꺼내 적어 내려갔다. 그녀를 위로라도 해주는 게 도리였지만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나는 헤루인과 친분을 쌓아선 안 됐다. 그녀는 그저 여행을 하다 만난 사람일 뿐이다.
 “일지도 쓰시나 봐요?”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책갈피로 쓰는 허브를 잠시 옆에다가 꺼내 놨다. 이 세계의 허브는 신기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마르지 않았다. 여전히 잎은 보들보들 했고, 향을 잃지 않았다.
 “그건…….”
 헤루인이 허브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허브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향을 맡았다. 줄기 깊숙이 숨겨진 향기까지 모두 맡겠다는 듯이, 코를 갔다대고 한참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허브를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짧은 흑발이 축 내려오면서 얼굴을 가렸다. 얕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이 붉었다. 송곳니로 깨물고 있는 입술에 약간 붉은 기가 돌았다. 그녀는 숨을 깊게 내쉬었고 웃음을 지었다.
 “허브 포레스트가 제 고향이거든요. 원래는 허브 포레스트에 있었는데 여기로 파견 나온 거예요.”
 허브 포레스트 바로 앞에 절대방어선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헤루인이 파견을 나오지 않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가방에 일지를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루인이 문 쪽으로 가려는 나를 쳐다봤다.
 “어디 가세요?”
 “갈 길 가야죠.”
 “벌써요?”
 “한 달도 안 남았어요. 여유부릴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여전히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는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비가 안에까지 들어와 나무로 된 바닥을 적셨다. 밖으로 나서려는데 헤루인이 다가와서 내 어깨를 잡았다.
 “내일이나 이틀 후면 비가 잠잠해질 거예요. 날씨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전보단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어요. 비가 그쳤을 때 가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사냥꾼의 영역까지는 길이 험해서 헤매실 겁니다.”
 헤루인은 쏟아내듯이 빠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비가 오는 숲을 보았다. 비가 오면 아무래도 이동하는데 오래 걸린다. 아까처럼 사냥꾼을 마주치면, 도망치기도 힘들어진다. 비가 그친 이틀 후에 출발하는 것과, 지금 출발해서 비를 뚫고 가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빠를까?
 나는 눈을 감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쯤은 괜찮겠지. 헤루인은 내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말했다.
 “그럼, 여행자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저녁에도 비는 결코 그치지 않았다. 맞을 때는 귀찮게만 느껴지던 것이 안에 있으니 포근하게 느껴졌다. 후두둑, 후둑, 후두둑.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작은 등불이 흔들리면서 그림자가 약하게 떨렸다. 서전 안은 은은한 갈색 빛이 돌았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운 채 등불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춤을 추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다가 조용히 일어나서 책상 아래로 내려갔다.
 책장이 겨우 네 개 뿐인 서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파수 이야기>, <나무 위에서>, <리브 포레스트, 겨울성>, <산탄 조각>…… 하나씩 펴보아서 부분부분 읽었지만, 소설의 내용들은 모두 싸우는 얘기뿐이었다. 주인공은 파수꾼이거나 파수꾼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었고 적은 무조건 사냥꾼이었다. ‘책 읽는 사람들의 나라’의 역사가 적힌 책을 찾았지만, ‘역사’라던가 하다못해 옛날 이야기집이나 고전 소설도 하나 없었다. 정말로 이곳에 남은 역사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책을 몇 권 꺼내서 들춰보다가 눈이 침침해질 때 쯤 다시 책상 위로 올라가 누웠다. 여전히 비는 내렸고, 등불은 흔들렸다. 나는 책을 쌓아 만든 딱딱한 베개에 머리를 댔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에 들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깼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면서 책상에서 내려가니 어질어질 했다. 창문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중충하던 서전 안에는 오랜만에 햇빛을 받은 풀들처럼 생기가 돌았다. 기지개를 펴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부시도록 햇볕이 내리쬐었다. 정말로, 정말로 하룻밤이 지나니 비가 그쳐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였다. ‘비가 내리는 숲’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어, 깨셨네요?”
 헤루인은 길리슈트가 아닌 셔츠에 반바지뿐인 평상복으로 난간에 걸터앉아있었다.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책 수호의 사명에 관하여>. 책을 읽는 헤루인을 보자니, ‘원래 세계’의 그녀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책을 좋아했다. 도서관에 출근하면 언제나 그녀는 먼저 와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헤루인에게 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색한 기색을 보였다.
 “날씨 좋죠? 이런 날은 1년에 다섯 번밖에 없어요. 이런 하늘 보기 참 힘들죠.”
 지붕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과 젖어있는 계단이 어제 비가 왔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나는 일지를 가져와 펴들었다.
 “원래 레인웨이 포레스트는, 처음부터 레인웨이 포레스트가 아니었어요.”
 나는 왜냐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샤인(Shine) 포레스트였죠. 아주 옛날에는 강수도 안정되고 햇빛이 다른 곳보다 많이 비춰서 그런 이름이었데요. 아마도 사냥꾼과 파수꾼으로 분열되기 전의 이야기겠죠.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쪽 숲은 최대 격전지로 변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서전은 불탔습니다. 중간지대의 나무들은 피를 먹고 자랐어요. 그리고…….”
 헤루인은 하늘을 쳐다봤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대요. 비만 내리고, 태양은 비추지 않고. 일 년 내내. 그래서 사람들은 샤인 포레스트를 레인웨이 포레스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대요. 맨날 흐린데 햇살이라고 하기엔 그렇잖아요?”
 나는 그녀의 말들을 일지에 적어 내려가면서 이따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울고 있는 거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태어났을 때부터 레인웨이 포레스트라고 불린 터라 샤인 포레스트였을 때는 어땠는지 궁금해요.”
 헤루인은 멋쩍게 웃었다. 나는 기록꾼이라도 되는 마냥 한 톨도 빠짐없이 그 이야기를 일지에 썼다. 딱 마침표를 찍고 일지를 덮으려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였지만, 선율과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구슬픈 느낌이 났다. 노래가 흘러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아래에서 주민들이 서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물이 담겨있었는데, 푸른 하늘이 비쳐보였다. 선율은 하늘로 올라갔다. 제사를 지내는 걸까? 나는 난간에 앉아서 그 광경을 스케치했다. 아름다웠다. 성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단우제(斷雨祭)예요. 비가 더 이상 내리지 말기를 기도하는 거예요.”
 왜 당신은 참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도를 해도…… 어차피 내일이나 모레면 비가 오는걸요.”
 바람이 불었다. 나는 스케치를 끝내고 나서 서전 안으로 들어가 아직 축축한 옷과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비가 오지 않을 때 어서 출발해야했다. 그녀는 난간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실 건가요?”
 헤루인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자 씨,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턱을 내밀면서 무엇이냐는 제스처를 취했다.
 “여행자 씨가 있던 ‘원래 세계’라는 곳은 어땠어요?”
 “그걸…….”
 ―기억할 리가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분명 많은 기억을 잃었지만 그래도 ‘원래 세계’는 부분부분 기억이 남았다. 완전히 잊혀져버린 건 아니었다. 아주 강렬하게 남은 기억들만 석판에 새겨놓은 것처럼 선명했다.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여행을 해도 잊히지 않을 기억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안 나네요.”
 “하하……. 언니도 그랬었는데.”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헤루인은 성문까지 따라 걸어왔다. 단우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성문에서, 헤루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이쪽으로 쭉 가면 사냥꾼이 영역이 나올 거예요. 헤매지 마시고, 좋은 여행되시길 빌게요. 혹시나 돌아올 때…… 여기 한 번 더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언니는 결국 안 돌아왔거든요. 아마 2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니 벌써 다른 세계로 갔겠죠?”
 나는 고개만 끄덕거리고 말없이 성문 너머로 나갔다. 헤루인이 잘 가라고 소리쳤다. 뒤를 돌아보려다가 말았다. 자중하자, 자중해야한다. 나는 여행자다. 능력이 생긴 게 아니라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고, 여행자답게 세계에 간섭하면 안 된다. 시간이 지나면 헤루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 져야만 한다. 기억돼서, 그녀의 인생을 바꾸면 안 된다. 세계에 간섭하는 일이니까.
 이런 조건이 없었다면 나는 헤루인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을까? 
 그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걸어 성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뒤를 돌아 레인웨이 포레스트를 볼 수 있었다. 성벽의 처마 밑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나는 비가 와서 질척질척해진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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