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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Rainway - 1.숲의 길

2013.05.14 22:3405.14

 1
 숲의 길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마차가 여러 번 흔들렸다. 마차는 땅에 누워있는 통나무에 걸려 붕 떴다가 땅에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다. 말을 몰고 있는 알켄 씨가 뒤돌아보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길이 험하고 수십 번 큰 충격을 받았는데 마차는 끄떡없었다. 부서지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인 밀림.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면 생긴다는 오솔길이나 표지판, 지도 따위는 없었다. 알켄 씨는 오직 경험과 감에 의지해서 숲을 거닌다고 말했다.(그래서 이따금 숲 주위를 맴돌아 헤매기도 했다.) 땅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에, 돌부리에, 바위에, 얕은 도랑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는 그저 달리기만 했다. 나는 알켄 씨에게 어디로 향하는 중이냐고 물었다. 그가 고삐를 한 번 내치자 마차가 덜컹거리는 정도가 더 심해졌다.
 “허브 포레스트로 가는 중입니다. 곧 도착해요.”
 길리슈트를 입은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나뭇잎을 뒤집어 쓴 곰이 말을 몰고 있나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곰이 문명을 이루고 사는 세계에 있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 덕분에 그가 인간인지 곰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아마도, 그 세계에서도 곰이 말을 몰고 있던 걸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나마 등 뒤에 맨 각궁과 화살통이 그가 인감임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창문으로 밖을 바라봤다. 나무들 사이로 번지던 햇빛이 약해졌다는 걸 느꼈다. 싱그럽던 연두색이 밋밋하게 변하고 있었다. 쿵, 하고 마차가 갑자기 옆쪽으로 기울어졌다. 균형을 잡지 않았으면 통째로 넘어질 뻔했다. 알켄 씨는 동요하지 않고 말을 몰았다.
 말이 달리는 소리가 그쳤다. 알켄 씨가 뒤를 돌아봤다.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앞에는 바윗돌을 얼기설기 쌓아놓은 성벽과 나무로 만들어진 큰 문이 하나 있었다. 알켄 씨가 성문에 대고 딱, 따닥, 딱, 노크를 하더니 문이 열렸고 나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숲은 폐쇄공간에 있는 것처럼 답답했는데, 이곳은 나무 하나 없이 확 트여있었다. 나무에 가려져 있던 광활한 하늘을 보자 약간 어지러웠다. 
 “여기가 허브 포레스트입니다.”
 온통 초록색인 리브 포레스트나 오프닝 포레스트에 비해 허브 포레스트는 다채로웠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보라색, 갈색, 주황색……. 언덕에서 보이는 다양한 색깔들이 땅을 덮고 있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 화단에 심어져 있는 허브를 만지작거렸다. 잎이 부들부들 한 게 아기 피부를 만지는 것 같았다.
 “허브는 약재를 만들 때 쓰이고, 향신료나 관상용으로 쓰이는 것도 있습니다. 허브가 여기서밖에 나질 않아서 우리 파수대에겐 엄청 중요한 곳이죠.”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허브 향기가 좋았다. 복숭아의 향긋한 냄새랄까. 그 향기를 맡고 있자니…… 배가 고파졌다. 마지막으로 먹은 게 10시간 전이었다. 리브 포레스트에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알켄 씨는 내가 배고파하는 기색을 보고선 말했다.
 “일단 서전으로 갈까요?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야하니, 저녁 드시고 쭉 둘러보세요.”
 그의 콧잔등과 왼쪽 볼에는 깊게 패인 흉터가 있었다. 얼굴은 각 지고 눈은 갓 태어난 아기의 눈처럼 작았다. 그런데 우락부락하고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매우 친절했다. 나는 다른 지역도 아닌, 여기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떨어진 이방인이었다. 리브 포레스트에서부터 오프닝 포레스트, 디펜시브 포레스트, 블랙 포레스트에 이르기까지 서쪽 숲을 여행하면서 그의 안내를 받았다.
 육중한 발리스타가 설치된 성벽을 지나 허브 포레스트 중서전에 들어갔다. 식당은 그냥 식탁만 두기에는 아까웠던지 책장으로 빼곡했다. 열람실인지 식당인지 구분이 안 가는 이곳에서 허브로 발효시킨 버터를 바른 빵, 허브를 곁들인 고기구이, 허브를 넣은 수프 등등 무조건 허브가 들어간 허브 포레스트다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배불리 먹고 나서 밖으로 나섰다. 보초 파수꾼들이 책을 읽으면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허브가 피어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넓게 펼쳐진 허브밭에서 아낙들이 허브를 채집하고 있었다. 나는 여행일지를 꺼내 풍경을 스케치했다.
 바람이 불었다. 소녀들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날아온 허브가 내 머리에 들러붙었다. 잎이 붉은 허브였는데 좋은 향기가 났다. 나는 허브를 일지에다가 껴놓았다.
 일지의 앞 쪽을 폈다. 많은 스케치들과 짤막짤막한 소감들.
 특이한 나라였다. 도서관―여기서는 서전(書殿)이라고 불린다―자체가 하나의 도시인 나라. 나라 이름은 없어서 ‘책 읽는 사람들의 나라’라고 기록했다. 서쪽 숲의 사람들은 책 읽고 명상하고 토론하는 것을 유일한 오락거리로 삼았다. ‘원래 세계’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나로선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쓱 살폈다. 한참 부족한 실력이지만 이 정도면 이곳의 이미지를 떠올리기엔 무리가 없을 테다. 여행자는 세계를 한 번 넘어갈 때마다 그 세계에서의 기억 대부분을 잊는다. 지금도 저번 세계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려고 밤을 세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기억을 잃으니 여행을 하나마나였다. 그래서 이렇게 일지를 쓰고 있다. 머리가 기억할 수 없다면 책이 기억하게 해야 했다.
 나는 일지를 덮고 일어섰다. 허브 포레스트 서전엔 허브요리 레시피가 많다던데. 여길 떠나기 전에 레시피 몇 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서전 쪽으로 걸어갔다. 허브의 꽃가루가 날려 앞이 뿌옜다. 향이 너무 진해서인지 머리가 조금 아파왔다.


 이 나라는 전쟁 중이었다.
 ‘책 읽는 사람들의 나라’는 동쪽 숲과 서쪽 숲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서쪽 숲은 지금 내가 있는 이곳, 파수꾼의 영역이고 동쪽 숲은 내가 가려는 사냥꾼의 영역이었다.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벽이 보였다. 저기에 다른 서전이라도 있는 걸까? 리브 포레스트의 요새처럼 높고 험준했다. 나는 알켄 씨에게 저 벽에 대해 물었다.
 “서전은 아니고, 절대방어선이라고 부릅니다.”
 알켄 씨가 거대한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발효한 허브를 종이에 둘둘 만 차련(茶煙, 담배의 일종)이 입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는 연기를 한 번 뿜었다. 매캐한 냄새가 아니라 시원한 향내가 났다. 나는 그의 설명을 기록하기 위해 연필과 일지를 꺼내 준비했다.
 “리브 포레스트 공방전 중에 세워진 요새입니다. 종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나는 그 전쟁이란 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우물거리기만 했다.
 “과거에 오프닝 포레스트 탈환 전쟁 때 역사서가 전부 불타고, 과거를 이야기해주셔야 할 어르신들도 전쟁에 휘말려 대부분 돌아가셨습니다. 탈환 전쟁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역사는 거의 다 사냥꾼들이 약탈해가거나 사라졌어요. 기록꾼들도 모두 죽었고요.”
 역사를 잃은 나라. 알켄 씨도 언제부터 동쪽 숲과 서쪽 숲으로 분열되고, 파수꾼과 사냥꾼이 싸우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체념과 함께.
 마차는 점점 절대방어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엄중 방어를 위해서인지 곳곳에 초소가 보였다. 덩그러니 남겨진 그루터기, 그을려서 거멓게 변해버린 나무, 밟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수풀들. 파수꾼과 사냥꾼의 전쟁이 숲에 쌓여온 듯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참상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었는데 마차가 멈췄다. 나는 그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다른 파수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흘끗 쳐다봤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의 복식과는 전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어서인 것 같다. 알켄 씨는 그들과 이야기를 마친 후 나에게 말했다.
 “아주 잠깐 절대방어선의 문이 열릴 겁니다.”
 나는 벽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거대한 문이 보였다. 특별한 경우 외엔 열리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성문에는 펼쳐진 책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방어선을 넘으면 중간지대입니다. 길 새지 말고 계속 동쪽으로만 걸어가시면 사냥꾼의 영역이 나올 겁니다.”
 숲에서 방위를 찾는 건 어려웠다. 나는 나침반이 없냐고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요? 나침……?”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파수꾼 씨.”
 내가 부르자 파수꾼과 대화하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 말씀하십시오.”
 “왜 저한테 그렇게 친절하셨던 겁니까? 저는 이방인인데?”
 나는 최대한 시비조로 말을 걸었다. 왜 친절했느냐고 따지는 것처럼. 알켄 씨와 헤어지기 전에 꼭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는 웃더니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2년 전에 자기를 여행자라고 하는 사람이 또 있었어요. 여자였지요. 몸매가 호리호리한 게……. 허험, 아무튼 그 사람이 여행자가 무엇인지 웬만한 건 설명을 하고 납득시켜줘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묻지 않았던 거예요. 그 사람도 동쪽 숲으로 넘어갔는데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겠군요.”
 또 다른 여행자. 세계를 여행하면서 여행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만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분은 썩 표정이 좋지 않더군요. 서쪽 숲이 마음에 안 들었나봅니다. 하하.”
 갑자기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절대방어선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5초 정도 굉음과 함께 울림이 지속되다가 멈췄다. 문은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살짝 열려 있었다. 작은 문틈 사이로 수풀들이 보였다. 그가 내 어깨를 톡톡 치면서 뭔가를 건네주었다. 작은 가방이었는데 안에는 부싯돌과 침낭, 등불, 그리고 <리브 포레스트>라는 꽤 두꺼운 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여행자를 보내는 건 역시 아쉽군요……. 한 달 정도 남았다고 하셨지요?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건 그냥 소소한 부탁입니다. 하하. 저는 리브 포레스트에 남아있는 역사서가 없는지 찾아보고, 허브 포레스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알켄 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글쎄요, 라고 대답했다. 앞으로 여행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애초에 계획이 없는 여행이었다. 나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틈이 비좁아서 몸을 옆으로 틀어서 나가야 했다. 수풀이 포삭, 밟혔다. 절대방어선 너머 중간지대였다. 겨우 한 발자국 차이인데.
 “저기요.”
 알켄 씨가 한 발자국 너머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생각해보니 아직 성함을 모르는데,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저번 여행자도 알려주지 않았었는데.”
 이름? 내 이름이 뭐였는지 가물가물하다. 여행을 하면서 계속 되새기지 않는 것은 대부분 잊혀버리니까. 그 편이 나았다. 남에게 이름을 알려주거나 남의 이름을 불러서도 안 된다. 사람들과 친분을 쌓지 말 것.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여행자 씨라고 불러주십시오.”
 알켄 씨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여행자 씨. 행복한 여행되시기를.”
 아까처럼 땅이 울렸다. 파수꾼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더니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나는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건너편에서 파수꾼이 말하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수풀이 바람에 스치고 새들이 지저귄다. 나는 수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풀 뒤로 미로의 입구 같은 나무들이 어서 오라며 기다리고 있었다. 파수꾼은 그냥 동쪽으로 걸어가면 하면 된다고 했다. 까마득했다.
 아, 일단 일지부터 쓰고. 일지를 펴자 허브향이 훅 풍겨왔다. 하루가 지난 허브는 마르지 않고 여전히 파릇파릇했다. 잠깐이지만 그녀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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