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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복수와 장미 -프롤로그

2013.01.04 21:3301.04

이 붉은 장미처럼 아득한 맹세를
이 붉은 장미처럼 영원한 사랑을

***
모두 죽었다.

에르제 가(家)의 사람도
헤르할 가(家)의 사람도

이 두 가문을 지배하고 있던 복수의 궤를 타고 마침내 도달한 이곳,
이곳에 다다른 이는 모두 죽었다.

에르제 의 검에 헤르할이
헤르할 의 검에 에르제가

헤르할 의 독에 에르제가
에르제 의 독에 헤르할이

헤르할의 비수에 헤르할이
에르제의 비수에 에르제가

그렇게 모두 죽였다.
그렇게 모두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둘만이 남았다.

에르제의 남자아이
헤르할의 여자아이

에르제가의 가주의 유일한 피붙이인 갓난쟁이 아들 이오드 에르제
헤르할가의 가주의 유일한 피붙이인 올해로 7살에 접어드는 어린 딸 주호 헤르할

아무도 올 이 없이 텅 빈 공소에 이 궤멸한 두 가문의 장례식을 위해 제단 앞에 선 사제가 짚으로 엉성히 짜인 요람 옆에 나란히 선 헤르할의 여식을 바라보았다.
낡고 초라한 요람 안에는 에르제의 남아가 추위에 떨며 발그레한 볼을 밝히며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저는 오늘 죽음으로 신의 품에 돌아간 두 가문의 사람들을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에르제가의 모든 일원들은 헤르할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헤르할가의 모든 일원들은 에르제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새근히 잠든 인형 같은 아이가 눕혀져 있는 요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르제의 유일한 혈육인 이오드 에르제는 헤르할의 유일한 혈육인 주호 헤르할에게 복수 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사제는 고개를 돌려 그 옆의 까만 머리의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헤르할의 유일한 혈육인 주호 헤르할은 에르제의 유일한 혈육인 이오드 에르제에게 복수 할 수 있습니다.

흑단 같은 머리와 붉은 입술을 가진 표정 없는 어린 소녀는 아득한 푸른 눈을 반짝이며 늙은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람의 잠든 아기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이내 갑자기 뒤돌아서 공소의 열려진 낡은 문을 향해서 뛰어나갔다.
찾는 이 없이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초라한 공소주변에는 정돈되지 않은 정원수들로 어지러워져있었다. 소녀는 그중 반쯤 무너진 낡은 담벼락너머 담쟁이넝쿨에 감겨진 가녀리고 볼품없는 장미나무를 향해 뛰어갔다. 여름에 다다라 화려하게 꽃을 피울 시기이건만 우거진 잡초에 가려진 장미넝쿨에는 나약한 하얀 장미만이 두어 송이 매달려 있었다.
소녀는 작은 두 손에 장미 한 송이를 함껏 쥐어 넝쿨에서 꺾어내었다.
자그맣고 유난히도 날카로운 가시들이 소녀의 두 손 바닥을 찔러 붉은 피를 맺히게 했다.
소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 듯이 피가 흐르는 두 손에 하얀 장미를 쥐고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는 공소로 뛰어 들어갔다.

사제는 아까처럼 제단에 지쳐 서 있었다.
소녀는 숨을 고르고 치마에 피가 뭍은 손을 가볍게 슥슥 닦고는 피로 반쯤 붉게 물든 하얀 장미를 들고 아이가 잠들어 있는 요람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반쯤 붉은 장미를 요람의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 가만히 내려 두었다.

-사랑하겠어요.

소녀가 짧고 단호한 목소리로 가만히 소리쳤다.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할 거예요. 이 아이를 내 몸의 전부처럼, 내 평생처럼 아끼고 사랑하겠어요.
소녀가 굳은 표정으로 사제를 바라보았다.
늙은 사제가 여전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기의 머리맡에 놓인 반쯤 붉은 장미는 더 이상 하얀 장미가 아니었다.
이것은 붉은 장미이다.

으앙
문득 소녀의 작은 두 손에 채 박히지 않은 가시가 남았는지, 요람의 아이는 날카로운 장미 가시에 찔린 것처럼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소녀는 다정하게 몸을 숙여 요람에 얼굴을 마주 대었다.
그리고 피 흘리지 않은 양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아이를 어루만지며 서투르게 아이를 달래었다.
-울지 마, 울지 마. 이젠 내가 너를 사랑할거야. 사랑해, 이오드.

사랑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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