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라 자유여 은빛 날개를 달고

이건해

 

#1

“날 수 있는데 왜 날지 않아?”

따위 질문을 내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 나의 동반자 도현은 여느 인간 이상의 빼어난 인격자라고 봐도 좋았다. 내가 평생에 걸쳐 겪어본 바에 따르면 날개가 달린 사람한테는 날아보라고 하는 게 보편적이고, 날지 않는다고 정직하게 대답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하는 게 인지상정에 가까웠으니까. 날개를 가진 사람을 보면 꼭 그렇게 물어보라고 학교에서 가르치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다리가 있는 사람에게는 뛰어보라고 하지 않는데, 날개를 가진 사람에게는 날아보라고 한다. 넌더리나는 일이다.

아무튼 날개라고 하면 듣기에는 좋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동화처럼 따뜻하지가 않다. 내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것은 누구도 원치 않은 일이었다. 나도 부모도, 심지어 정부도 원치 않았다. 인류가 몇 번의 팬데믹을 겪은 이후 해충을 박멸한다고 오만가지 검증되지 않은 방법을 동원한 뒤 수 년만에 세계 곳곳에서 태어난 것이 나 같은 특이신체보유자, 줄여서 특신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특신자 중에서도 드물게 날개를 갖고 태어난 경우였다. 그러나 그 날개가 ‘날개’ 하면 쉽게 떠올리게 되는 천사의 멋진 깃털 날개가 아니었다. 악마의 이미지에 흔히 쓰이는 박쥐 날개도 아니었다. 얇고 투명한 곤충의 날개였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잠자리 등의 곤충에 심대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니 해충을 박멸하자고 뿌린 약품으로 인해 곤충의 날개를 가진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은 일종의 인과응보 같기도 했다. 그 죗값을 내가 치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흔히 어릴 때 ‘날개가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같은 질문으로 창의력을 시험해보곤 하는데, 내게는 그 질문이 재미있는 상상 놀이의 영역이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 자유롭게 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부모님이 가르친 대로, 내가 스스로 깨우친 교훈대로 날지 않는다. 혓바닥만 뱀처럼 갈라져 있어도 징그럽다고 야단을 떠는 세상에 잠자리 날개로 날아다니는 사람이 발견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너도나도 촬영해서 개인 채널 조회수를 끌어올리려 하고, 신상을 털고, 국가에선 주요 감시 대상자로 선정해서 실험을 반복하고 발신기를 심겠지. 물론 그런 대가를 치르고 나면 강연회나 쇼를 해서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소심해서 그렇게까지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았고, 일찌감치 날개를 잘 갈무리해서 접어놓고 평범하게 사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도현은 내 날개를 본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처음에는 보여주려고 보여준 게 아니었다. 물놀이가 가능한 계절의 끄트머리에 겨우 찾아간 제주도의 어느 해수욕장에서 내가 방심하고 헤엄치는 모습을,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다가가서 해명했다. 그냥 모른척 자리를 피하는 것도 방법이긴 했으나, 그랬다가 괴생물체라고 신고당한 적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놀라셨을 것 같은데, 제가 특신자라서 이렇게 생겼어요. 위험한 사람 아니고 그냥 사람입니다.”

“좀 놀라긴 했는데 이상하진 않고, 그냥 멋있네요.”

도현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그렇게 심심한 반응만을 보여주었다. 그 미소는 내가 그때까지 봐왔던 그 어떤 미소보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는데, 대화를 이어가다 도현이 계약자를 찾지 못한 동반자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렬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 감동은 내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곧장 도현과 함께 그녀의 보호자인 중고 로봇 거래상 ‘제주삼다로봇’을 찾아가서 도현의 동반자가 되기로 계약을 신청했고, 보호자와 도현 모두의 동의를 얻어 도현과 동반자로서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특신자지만 공격성에 문제가 없다는 증명서도 떼고 소득 증명도 하고 막대한 계약금을 할부로 치루게 되긴 했으나, 평생의 이해자를 구하는 데에 그 정도의 대가는 감수할 만했다.

다만 사장의 태도는 오래도록 마음에 걸렸다. 처음에는 장모 비슷한 존재로 생각하려 했는데, 그 노파는 결제를 마치곤 미운 딸을 졸부에게 시집 보낸 악역 계모처럼 웃으며, ‘잘 해줄 테니’ 질리거나 아주 고장나면 다시 찾아달라고 했다. 거래가 즐거운 상대는 아니었다. 나는 듣지 못한 척했다. 나의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봇 동반자와의 결합이 인간들의 결합보다 안정적으로 오래 간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증명된 사실이었다.

그렇게 도현과 함께한지 5년이 지났다. 제법 긴 시간을 함께하며 내가 알게 된 것은, 도현이 동반자 로봇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일단 그녀는 수리가 아주 어려웠다. 그녀의 제조사는 코랄 블루라는 기업이었는데, 한때 유수의 초국가 기업들을 능가할 정도로 동반자 로봇 업계를 선도하던 그곳은, 과도할 정도로 자유로운 의식을 갖춘 로봇이 동반자의 자살을 간접적으로 돕는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아무도 찾지 않던 미출시 시제품인 도현과 내가 비교적 저렴한 값에 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여차하면 사설 수리 센터를 전전하며 부르는 대로 수리비를 내야 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부담이 되었다.

당연히 나는 도현이 어지간한 일은 하지 않아도 되도록, 낡은 표현처럼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아도 되도록’ 배려했는데, 그녀는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우리가 가사 노동 분배의 균형을 맞추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노동의 항목으로 따져보면 내가 6, 도현이 4 정도의 비율로 정착한 듯했다.

도현이 특별한 이유는 그녀가 희귀한 존재라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회적 이슈, 그중에서 특히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보통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자기 삶의 문제에 매몰되어 아무 활동도 하지 못하는 데에 비해, 도현은 환경 문제를 자기 삶의 문제와 동일한 수준으로 대하는 듯했다. 내가 환경 문제의 산물이라는 점도 한몫 한 게 아닐까 싶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고 나는 도현의 정체성이 나의 동반자에서 그치지 않길 바랐기에, 그녀가 팬데믹의 거친 파랑을 뚫고 시위에 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위험할 때 자기 몸을 지키기로 약속하기도 했고, 도현이 병에 걸릴 일은 절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도현이 나가는 시위가 무엇인지 알게 된 나는 가슴속이 얼어붙듯 차가워졌다.

도현은 백신 반대 운동에 나가고 있었다.

 

#2

백신 반대 운동!

입에 담기도 괴로운 말이었다.

백신 반대론자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방역망에 구멍이 뚫렸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가? 당장 다섯 가지의 바이러스가 동시에 팬데믹으로 번지고 있는 지금만 하더라도 백신 반대론자들과 싸우는 것이 백신을 만들어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캠페인이 벌어질 지경이 아닌가.

나는 사랑하는 나의 동반자가 환경을 보호하자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인공적인 것은 모두 해롭고 세계 정부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음모론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로봇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사고를 하게 되어 있으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그 의심을 돌려 말하자, 도현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물결치는 머리칼에 반사되는 빛이 여전히 향기로웠다.

“왜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내가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거든?”

톡 쏘는 듯한 말에 나는 오히려 마음이 좀 놓였다.

“올해 최고의 희소식인데. 그럼 대체 멀쩡한 백신을 왜 반대하는 거야?”

“베이츠사의 백신은 멀쩡하지 않거든. 그래서 다른 걸 맞자는 거야. 경쟁사인 구즐사 백신 같은 거. 백신을 전부 부정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베이츠는 누가 뭐래도 세계 최대의 기업이고, 구즐이 휘어잡은 게임 분야만 빼면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다. 내일 모레쯤이면 암도 정복할 거라는 소리가 들리는 기업의 백신을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반지성주의의 일종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로봇과 반지성주의라, 사랑스럽지만은 않은 조합이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도현은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비밀을 알려주듯이 말했다.

“장한빛, 잘 들어. 그동안 지구에 워낙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서 팬데믹 사태도 큰 문제 없이 지나갈 거라고 믿고 싶겠지만, 이번만은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야. 권위 있는 연구 기관들은 전세계를 두 달간 완벽하게 봉쇄하거나, 전인류가 미쳐서 세계 정부의 방역 지침을 두 달 간 완벽하게 다 지키지 않는 이상, 인구의 30퍼센트가 죽고 나머지는 사회 안전망과 경제 붕괴로 처참한 생활을 면치 못한다고 보고 있어.”

분명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한 얘기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끔찍해서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다소 과장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두 달간 전세계를 락다운할 순 없어. 전인류가 방역 지침을 다 들을 리도 없고.”

도현은 방역 외투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서 새로 도입하려는 게 위대한 릭 베이츠 선생의 베이츠 백신이야. 거기엔 인간을 완전 통제하는 칩이 들어 있어. 전인류를 조종해서 완벽하게 방역 수칙을 지키게 만들겠다는 거지.”

전자 장비를 이용해서 인간 두뇌를 조종하는 연구가 성공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지만, 주사 바늘로 주입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칩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양보해도 세기말적 상상력이 가미된 음모론처럼 들렸다. 나는 책상에서 담배를 집어 입에 물었다.

“설마.”

그러자 도현은 시계를 보더니, 음성 명령으로 TV를 불러 뉴스를 틀었다. 때마침 팬데믹 상황 극복을 위해 베이츠 백신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세계 정부 발표가 나오고 있었다.

“……방역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베이츠 백신을 접종하고, 2개월에 걸친 접종자의 생활은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인 알파 베이츠의 판단에 맡긴다는 겁니다. 이같은 결정에 일부 시민 단체는 우려를 표하고 있지만, 릭 베이츠 씨는 알파 베이츠에 의한 자율 생활이 완벽하게 안전하며, 삶의 질도 보수도 개인의 의지에 맡겼을 때보다 비약적으로 높아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뉴스에서 그렇게 말하니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피우려던 담배를 다시 내려놓았다. 도현은 내게 의견을 묻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깔끔히 사과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서 미안해. 당신이 특별한 만큼 엉뚱한 생각을 한 줄 알았어.”

“특별한 것도 엉뚱한 것도 맞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야. 아무튼 어떻게 생각해? 돈 좀 받는다고 위대한 인공지능한테 삶을 위탁하고 싶어?”

나는 그건 못하겠다고 답하려다가, TV에 표시된 날짜를 보고 쉽게 대답할 처지가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슬슬 도현의 상태를 점검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식 AS를 받을 수 없는 만큼 도현의 점검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나는 수중에 돈이 거의 없었고, 돈이 들어올 예정도 없는 상태였다. 인공지능 일러스트레이션이 보편화되어 나같은 무명 일러스트레이터는 인공지능이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기상천외하고 음탕한 춘화를 그리는 것만이 살길이었으나, 이제 그마저도 기계학습에 점령되고 있다.

내가 잠시 대답하지 못하자, 도현은 작게 한숨을 쉬곤 말했다.

“그렇게 돈이 마음에 걸리면 나도 일할까?”

“그런 소리 하지 마. 너 고생시키느니 내가 굶는 게 나아.”
도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도현이 자유롭길 바랐으니 그녀가 일을 하겠다면 시키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언제나 이상한 신종 투자에 돈을 날려 근심과 빈곤만을 생산했던 아버지 때문에 인신공격과 모욕을 당함으로써 고객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전전해야 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동반자에게 일을 시키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다.

나는 간신히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알겠는데, 그래도 방역상 베이츠 백신을 맞는 게 인류를 구하는 지름길이야. 심지어 돈도 된다니 그게 가장 합리적인 일 아니겠어?”

“구즐 백신도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하진 않아. 시간이 오래 걸려 사망자가 더 나오긴 하겠지만, 인류 전체의 자유까지 지키려면 감수할 만한 희생이야.”

일리는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 희생이 병으로 죽을 일은 없는 로봇만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대꾸할 말을 한참 찾아야 했다.

도현은 내 대답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방역 외투를 단단히 걸쳐 입으며 말했다.

“난 자유로운 인간을 모델로 만들어졌어. 자유롭지 않은 게 당연한 로봇에서 발전을 거듭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덕분에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하고. 그런데 자유롭게 태어난 당신은 지금 그 자유를 남의 손에 맡기겠다 말하고 있어. 비록 잠깐이라 해도 자유를 잃어버린 채 인공지능에 의해 움직이는 당신이 나를 사랑할까? 사랑한다면 그건 당신의 자유에 의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한참만에야 답할 수 있었다.

“내가 다시 당신을 자유롭게 사랑할 때까지 기다려 줘.”

“그래……, 당신이 원한다면 그래야지.”

도현은 표정을 감춘 채 현관문 너머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 나는 TV의 볼륨을 높이고, 신형 백신 관련 뉴스를 모아달라고 요구했다. 낡은 TV의 인공지능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3

베이츠 백신을 도입하는 게 과연 옳은가? 우리집에서도 그랬듯이 전세계에서도 연일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오만가지 철학적 고찰과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대한 경고가 무색하게도 베이츠 백신 도입은 반강제로 진행되었다.

다섯 가지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것도 모자라서 남극 대륙이 녹으면서 풀려난 옛적의 바이러스가 연구원을 통해 MIT로 퍼졌고, 이것이 미국 내에서 빠른 속도로 변이를 일으켜 여섯 가지 바이러스의 동시 대유행이라는 거짓말 같은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모두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는 아니었으나 두 가지나 세 가지에 동시에 걸리면 온갖 증상에 시달리다 합병증으로 죽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게다가 하나같이 전파가 빨랐으며, 변이는 쉽게 일어났다.

결국, 과거의 사례에서 락다운이 만능이 아님을 배운 나라들조차 공포로 붕괴하기 전에 마지막 희망으로 베이츠 백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구즐사의 백신도 대안 중에서는 가장 유력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방역 수칙을 준수하게 만드는 효능까진 없었으니 국민의 건강을 위해 베이츠 백신을 택하는 것은 너무나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사람의 행동을 모조리 제어한다는 극단적 상황을 모두가 합리적인 수단이라고 받아들일 리도 없었다. 그리하여 의로운 사람들은 시위를 시작했고, 도현은 ‘인간 의지 수호 연대(인수연)’를 조직해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인간의 이성을 단 한순간이라도 기계 장치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이성을 기계에게 맡긴 인간은 고깃덩이로 만들어진 기계입니다! 아무리 생명이 위험하다한들 인류를 기계로 바꿔버릴 수는 없습니다! 릭 베이츠는 백신으로 인간을 기계화하고 세계를 정복하려는 악마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그런 인수연의 구호와 주장은 억지스럽기 짝이 없었고, 그간 무수히 봐온 음모론자, 백신 반대론자들의 논리와 다를 게 별로 없었다. 심지어 베이츠 백신을 구해서 침팬지에게 주사하고, 침팬지가 쇼크사하는 과정을 생중계하는 작태는 기존의 어떤 음모론자들보다도 악독하고 유해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침팬지의 생명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가만히 놔두면 인수연이 앞으로 얼마나 더 과격한 짓을 할지 모를 일이었고, 의견 충돌은 있었으나 어쨌든 사랑하는 동반자가 테러리스트로 변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다음 생중계가 시작되자마자 도현에게 전화했다.

“제발 이 정신나간 짓 좀 그만둘 수 없어? 반대야 할 수 있지만 해도 꼭 이런 식으로 해야돼?”

도현은 지극히 차분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 반 년만 시간이 있었어도 토론회 같은 걸 할 텐데, 지금은 접종이 목전이야. 아무리 더럽고 치사하고 끔찍한 방법이라도 가리지 않고 써야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어.”

“그렇다고 죄 없는 침팬지까지 죽이는 건 너무하잖아? 아무리 사람을 구했다 쳐도 그런 희생을 치렀다는 사실이 나중에 떳떳하겠어?”

“떳떳하지 않아도 되고, 사람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면 침팬지 백 마리든 만 마리든 죽일 수 있어.”

사명감에 눈이 멀면 이렇게까지 사람이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 로봇이기에 가능한 판단일까? 나는 도현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져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기묘할 정도로 고요한 정적 사이로 숨소리만이 너댓 번 들려왔다. 도현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그거 맞지 마. 계속 날 사랑해줘.”

나는 영혼의 깊은 곳 어딘가가 녹스는 듯한 슬픔 속에서 답했다.

“몸조심하고 두 달 뒤에 봐. 그리고 내가 내가 아니더라도 어딘가 있을 나는 항상 널 사랑할 거야.”

전화를 마치고 나자, TV에서는 정부가 인수연을 비롯한 백신 반대 단체들을 방역 특별법에 의거하여 긴급 체포하기로 결정했다는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주일 후 10월 4일, 정부는 베이츠 백신 접종을 시작했고, 소득이 적다는 이유로도, 특신자라는 이유로도 취약층으로 분류된 나는 인근 병원에 가서 온갖 의학 용어와 법률 용어가 뒤섞인 서류에 서명한 뒤 적합성 테스트를 거쳐 백신을 맞았다. 바늘이 좀 큰 편이라 지금껏 맞아본 주사중에 가장 고통스러웠는데,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비명이나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접종을 마치고 이상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한 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가짜뉴스 유포자를 엄벌하는 방역 특별법이 시행되어 무수한 스트리머들이 조사를 받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며 스마트폰으로 특신자 커뮤니티를 둘러보았다.

커뮤니티에선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아프다는둥 열이 난다는둥, 인간들을 모두 죽일 준비가 되었다는둥 잡담을 하며 웃고 떠들었는데, 그중에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누가 올린 블랙박스 소개글이었다. 베이츠 백신을 안 맞으면 건보료가 말도 안 될 정도로 크게 뛴다고 해서 맞긴 하지만, 자신은 국가도 릭 베이츠도 믿지 않기에 60일간 작동하는 극한 환경 작업자용 블랙박스 카메라를 사서 가슴에 장착했다는 것이다.

그대로 공중 화장실이나 공중 목욕탕 따위를 갔다간 범죄자가 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알파 베이츠의 조종이 정말로 완벽하다면 그것도 알아서 극복할 테고, 완벽하지 않다면 배상을 요구할 수 있을 테니 괜찮지 않겠냐는 의견에 많은 사람이 동의했다. 내 생각에도 그건 의지를 잃게 된 시간 동안 나를 감시하는 방법으로 가장 현실적인 듯 싶었다.

이상 반응을 관찰하는 한 시간이 지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간호사 확인을 받았다. 벌써부터 비참한 격무에 시달려 눈밑이 거무죽죽하게 변한 간호사는 내 혈액 샘플을 뽑아 검사기에 넣은 다음 모니터를 보며 차분하게 경고했다.

“스트레스가 상당히 높고 정서 복원성이 평균 이하로 나오셨어요. 특이 체질로 인한 호르몬 영향이 있는 것 같은데, 이 경우엔 자율 생활 이후로 기억 장애가 있을 수 있으니까 당황하지 마시고 연락 주세요.”

그밖에도 이런저런 안내 사항이 있었지만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블랙박스를 싸고 빠르게 구할 수 있을지 궁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팬데믹이 오고 또 오기를 반복하면서 수요가 폭증하는 물건들을 예측해서 사들이고 수익을 나누는 투자 사업이 보편화되는 통에 까딱하면 수십 배를 내고도 원하는 물건을 구할 수 없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병원을 나선 나는 인근의 마트와 잡화점은 물론이고 백화점까지 돌았다. 그러나 그렇게 발품을 팔고도 블랙박스는 구하지 못했다. 애초에 두 달이나 가는 특수 장비 자체를 발견할 수 없었고, 보름 가는 물건은 하나 남은 게 즉석 경매에 올라서 값이 칠백만 원을 넘겼기에 없는 셈 쳐야 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그보다 훨씬 싼 가격에도 구할 수 있긴 했지만, 베이츠 백신을 맞고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 시간이 한계다. 정보를 더 일찌감치 찾아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병원에서 설명한 대로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알파 베이츠가 내 몸의 조종권을 가져가려 한다는 신호였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거의 고막이 두근대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처형을 기다리는 모범수처럼 단정히 앉아서 도현에게 전화했다. 전화는 네 번 다섯 번을 걸어도 연결되지 않아서,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수준의 울분이 치솟았다. 세상 전부로부터 버려지고 동반자도 나 자신도 잃어버릴 것 같은 불길한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정부를 믿는다고 말은 했지만 나 역시 무서웠던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영상 메시지를 찍어서 보냈다. 베이츠 백신을 맞았고, 몸 상태는 아주 건강하고, 걱정할 필요 없고, 너도 건강하길 바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한다는 내용이 되었다. 비슷한 내용을 유서로도 남겼다. 글이면 좀 낫겠지 싶었으나, 다시 읽어보니 어쩐지 한층 더 두서없는 편지글 비슷한 게 되었다.

마지막 담배를 피우면서 커피를 마셨는데 졸음을 쫓지는 못했다. 나는 펜을 대충 집어던지고 담배를 비벼끈 뒤에 침대에 쓰러졌다.

 

#4

베이츠 백신이 불러온 잠은 용암처럼 뜨겁고 끈적해서 영혼을 지표 밑 어딘가에 묶어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무덤을 뚫고 기어나온 좀비처럼 일어나서 스마트폰 시계부터 확인했다.

12월 4일 오전 11시. 의식을 잃은지 두 달 뒤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을 잃었다기보다는 의식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두 달간의 기억은 마치 200년 전에 본 영화처럼 흐릿해서 한두 장면만 떠오를 듯 말듯했다.

뉴스 앱에는 각종 속보가 폭설처럼 날아와 쌓이고 있었다. 대체로 특단의 조치를 취한 덕에 인류가 사실상 팬데믹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이었다. 릭 베이츠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고 그를 세계 대통령으로 추대해야 한다는둥, 지구의 유년기가 끝났다는둥 별별 헛소리도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것을 읽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책상 의자에 앉아서 잘 보이는 곳에 놓인 일기장을 펼쳤다. 들었던 설명대로 나는 자율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 이곳에서 일기를 작성했다. 의심할 여지 없는 내 글씨로.

인류 최고의 천재이자 괴짜라는 릭 베이츠가 만들어낸 인공지능, 알파 베이츠. 그것은 두 달동안 내 인생을 어디로 이끌었을까.

예상은 했지만 일기는 아무런 감정 묘사 없이 있었던 일만 기록해둬서 일기라기보다는 일지, 혹은 무슨 프로그램의 로그에 가까워 보였는데, 금전출납 기록은 물론이고 식단, 몸무게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어 나 자신의 사육 일지 같기도 했다.

알파 베이츠는 일단 나, 한빛을 운동시키는 것으로 자율 생활을 시작했다. 푸쉬업과 하프 버피처럼 실내에서 간단히 할 수 있으면서 효율이 높은 맨손 운동들. 흥미롭게도 거기엔 ‘날개 단련’까지 끼어 있었다. 곤충 날개를 단련하는 운동에 적절한 표준안이 있을 턱이 없는데, 알파 베이츠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특신자들의 신체 조건을 검토해서 운동 방법을 개발한 모양이었다.

웃통을 벗고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 오랜만에 날개를 펼쳐 봤다. 조금 움직여보는 것만으로 두 쌍의 잠자리 날개가 전보다 훨씬 강인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남의 신체 부위를 갖다 붙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긴 하지만.

다시 일기를 읽었다.

한빛은 오랜만에 들어온 일감을 무서운 속도로 해치우고,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하면서 다시 운동에 매진했다. 흔히 영화에서 억울하게 수감된 주요 인물이 복수를 준비하며 죽도록 운동하곤 하는데, 마치 그런 인물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건강해질 필요가 있나? 백신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한 조치인가? 남들도 이랬을까?

악착같이 운동한 이유는 오래지 않아서 찾을 수 있었다.

한빛은 백신을 맞고 이 주일 지난 뒤 정부 소속의 방역유지군에 입대했다.

주급 3백만 원 6주 계약. 자율 생활 전의 꼬락서니를 생각하면 비교가 허망해지는 대가였는데, 군은 특수한 능력을 필요로 하고 한빛은 돈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가장 합리적인 생활일 듯싶었다.

나는 전신을 천천히 움직여 봤다. 곳곳에서 묵직한 피로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한편으로 저 깊은 곳에는 개운함이 감도는 것이, 아주 두꺼운 옷을 입고 격렬한 운동을 한 다음날 같기도 했다.

드론 대신 날아다니면서 방역법 위반자들을 적발한 것일까?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한빛은 투입되자마자 분주하게 날아다니며 방역법 위반자들을 찾아내고 범칙금을 부과해서 인간 드론이라는 악명을 쌓기 시작했다. 그나마 방독면을 쓴 게 천만다행이다.

그러다 나는 다음 대목에서 눈을 의심했다.

-베이츠 백신 반대론자 집회 해산에 투입. 그물잡이 직무 수행.

그물잡이가 뭔지는 검색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위대를 살상하지 않고 제압, 체포하는 영상은 뉴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그때마다 누군가는 바주카포 같은 것으로 거대한 그물을 쏘아 사람들을 휘감곤 하니까. 그러니까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일은 아닌 셈이다.

문제는 그물잡이를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진압 상대가 ‘베이츠 백신 반대론자’였다는 것이다. 설마 한빛이 도현을 상대한 건 아니겠지? 그나마 위안 삼을 만한 사실은 도현이 속한 단체 ‘인수연’이 대충 ‘베이츠 백신 반대론자’로 뭉뚱그려도 될 만큼 작고 이름 없는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일기를 읽어내려갔다.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한빛은 자고 일어나 씻고 먹고 출동하고 진압하고 귀가하고 씻고 먹고 외주하고 운동하고 자는 것 외에 아무 활동도 하지 않았다. 반대론자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율 생활을 했을 테니 단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완벽하게 규율에 맞춰 안전하게 돌아가는 사회. 상상과 기억 사이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그 모습은 조용한 유토피아로 보이긴 했으나 사람 사는 세상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비인간적인 인류의 자율 생활은 릭 베이츠가 장담하고 세계 정부가 인정한 대로 세상을 위기에서 구출해냈다. 대개의 경우 그렇듯이, 성과가 빼어나면 의미 같은 것은 따져 물을 이유가 사라지고 만다.

일기를 계속해서 읽었다.

한빛은 그물잡이 외에도 정찰, 촬영, 경고와 홍보 방송 등 사회의 안전을 위한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평화롭게 지냈는데,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터 큰 변화가 생겼다. 반대론자들이 무력 시위를 시작해서 대응도 훨씬 강경해진 것이다.

한빛은 총기를 이용한 시가전 훈련을 받은 뒤에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고, 필요에 따라 적을 사살했다. 한빛은 상식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경로로 이동할 수 있어서 적 제압에 아주 유리했다.

일기에는 그날 발포해서 죽이거나 다치게 한 사람 숫자까지 적혀 있었다. 나는 읽으면서 그 숫자를 더하다 열 명부터 그만두고 말았다. 숨이 막혀야 할 것 같은데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게 무섭고 역겨웠다. 하지만 정말로 경악할 부분은 저번 주 일기에 들어서서야 나왔다.

-인간 의지 수호 연대 대장 사살 추정

눈을 비비거나 필적을 의심하는 등의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나는 일단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되지 않았다.

전화기의 전원이 꺼져 있거나 없는 번호라는 안내를 여러 번 들었다. 잠깐 사고가 정지했지만, 나는 곧 재치있게도 메신저를 실행할 수 있었다. 메신저에도 통화 기능이 있으니까.

일단 최근 대화 목록을 살펴봤다. 도현은 내가 마지막으로 보낸 영상 편지까지 읽은 모양인데, 새로 보낸 메시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음성 통화도 영상 통화도 한없이 연결되지 않았다.

도무지 연락할 길이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나는 도현의 스마트폰 연락처 하나만 알 뿐, 그녀가 누구와 친해서 연락을 주고받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고, 가족에게 묻고 싶어도 그 가족이 바로 두 달간 의식이 없던 나뿐이니 어디에도 답이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한기가 몰려들었다. 우리는 분명 서로를 운명적인 상대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사랑했다. 그러나 운명과 사랑이 서로의 위치나 건강 상태 따위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고, 실질적으로 우리를 원거리에서 이어주는 것은 스마트폰 번호 하나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뭔가가 잡아뜯은 생명선 하나만 쥔 채 우주 공간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옷을 걸쳐입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두 달만의 흡연이라 연기가 매캐하게 머릿속에 스며들어 눈으로 새어나오는 듯했다. 지금의 심리 상태에 적합한 고통이었다.

한빛이 정말 인수연의 대장을 쏘았을까? 그렇다면 인수연의 대장은 도현이었을까? 알파 베이츠의 감정 없는 판단 아래 한빛은 인류의 안녕을 위협하는 동반자를 쏘아 죽이고 말없이 집에 돌아와 씻고 잠들었는가?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영화나 드라마 따위에서 본 장면을 아무렇게나 재조합한 착각과 내 몸이 직접 경험하고 기억한 기억을 구분해야 했다.

웃옷을 벗고 일어나서 날개를 펼친 뒤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날갯짓은 자율 생활을 하기 전에는 일년에 한 번도 하지 않던 일이라, 몸의 움직임과 연동된 것처럼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화염과 연기 속에서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

방역 외투를 입은 채 화염병을 던지며 온갖 공구를 휘두르거나 못을 쏴대는 사람들.

상공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그물을 던지고 총을 쏘던 순간의 반동이 떠올랐다.

그리고 총을 쏘던 나를 향해 갈고리를 던지는 사람이 있었고…… 갈고리가 내 날개를 잡아당기기 전에 나는 그자를 반사적으로 쏘았다.

가슴으로 붉은 액체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방역 외투 너머로 비치는 몸의 형상.

도현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가 착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착각이어야 하는데.

화장실로 달려가서 거울에 날개를 비춰보았다. 날개 하나의 뿌리 쪽에 살짝 찢어진 자국이 있었다. 뾰족한 물건에 걸려 찢어진 것 같은 자국이.

갈고리가 걸린 자리임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5

내가 도현을 총으로 쏘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하는 게 좋을 듯했다. 문제는 확실한 증거도 사건의 결과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뉴스를 검색해도 방역유지군이 시위대의 대장을 사살했다든가, 시위대가 대장의 피살을 근거로 당국을 규탄했다든가 하는 소식은 찾을 수 없었다. 마치 그런 일은 완전히 나의 꿈에서나 일어난 일 같았다.

그러나 내 날개에 난 상처와 희미한 기억은 분명 일치하고, 도현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다. 이 악몽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사실을 확인해야만 한다.

나는 일단 동반자 로봇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동반자 로봇을 어떻게 찾는지 알아보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GPS로 위치를 조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도현보다 이전 세대의 모델에나 적용되는 것이고, 요근래에 출시된 모델은 로봇의 자유를 존중하여 위치 추적 장치를 내장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보편적인 방법은 실종 로봇 보호 센터에 접수된 기록이 없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건 애초에 허사일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실종 로봇을 보호하면 센터에서 보호자를 조회하여 바로 연락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검색해보았으나 역시 접수 내역은 없었다.

전산 기록 찾기를 포기하고 내가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나의 작전 기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경찰도 군인도 작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블랙박스를 장착하고 활동하므로 내가 작전에 투입되었을 때의 활동 기록도 저장되어 있을 것이었다.

방역유지군은 국방부 소속이므로 나는 국방부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민원 로봇의 대답은 시원치 않았다.

“선생님, 방역 유지군의 작전 기록은 국가 기밀에 해당하여 열람하실 수 없습니다.”

신청만 하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나는 미리 준비한 첫 번째 방법을 썼다.

“재작년부터 공권력의 강제 집행은 모두 기록하고 공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위대 해산과 체포 역시 이에 해당하므로 정보 공개를 요구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방역 유지군은 세계 정부에 소속되어 있으며 국가가 지휘권을 위임받았을 뿐이므로 공권력이라 할 수 없고, 백신 접종 반대자는 민주적 절차에 따른 시위대가 아니라 국제 테러리스트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백신 접종 반대 시위를 상대로 한 방역 유지군의 작전 내용은 공개 대상이 아닙니다.”

아무렇지 않게 희망의 싹을 자르는 민원 로봇은 먼 옛날의 어린이 만화에 나오는 깡통 로봇 같은 형상이었다. 진짜 인간같이 생긴 로봇이 민원인의 성질을 긁으면 ‘기계가 말을 안 듣는다’가 아니라 ‘이 자식이 사람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디자인이 탁월하다는 생각을 했다. 민원 로봇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보다 체념이 빠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가까스로 물었다.

“내가…… 국가의 지시에 따라 사람을 죽인 사실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고, 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처리됩니까?”

민원 로봇은 차분히, 기계처럼 대답했다.

“문의하신 사항은 본 기관에서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순간적으로 체념을 초월하여 분노가 치밀었지만, 관공서 한군데에서 원하는 일을 모두 처리하려는 게 미친놈일 것이다. 나는 한가닥 비참한 희망을 품고 국방부를 나섰다.

 

군 내부의 부당 명령, 부정 행위 따위를 감시하고 민원을 처리하는 국민권익위원회 국방감찰과는 비교적 무거운 사안이 많아서 그런지, 살아숨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 나와서 민원에 응했다. 그러나 미소가 푸근한 중년 남성 담당자는 내 말을 듣고는 난색을 표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께서 작전 중 살인을 했다는 말씀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일단 군인이 작전에 따라 저지른 살인은 상대가 민간인일 때만 범죄로 취급하는데, 백신 반대 시위라면 테러리스트로 간주하므로 살인죄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적법한 작전 수행이죠.”

“적법한 작전 수행으로 전쟁을 치룬 군인도 불필요한 살인을 강요당했다는 사유로 정신적 손해 배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될까요?”

그러자 담당자는 볼펜 끝으로 관자놀이를 살짝 긁었다.

“조사를 많이 하셨군요. 보통 사안이라면 그것도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작전 수행이 자율 생활 중에 일어났다는 게 지금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자율 생활 중인 인간은 자율성이 없는 구세대 로봇과 동일하게 간주하고, 아시다시피 구세대 로봇이 사고를 내면 책임은 대개 명령권자가 집니다. 그런데 자율 생활 중인 인간의 명령권자는 베이츠사죠? 베이츠사는 자율 생활 중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느껴지시겠지만, 인류를 최악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선 베이츠사가 유리한 조건으로 백신 공급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어떤 나라든 그래요.”

팬데믹 전이었다면 모를까, 인류가 구원받은 뒤로 베이츠사와 싸운다는 건 신과 싸운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심장이 천천히 얼어가는 것을 느끼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군인에게 명령한 것은 최종적으로는 국방부 아닙니까? 그럼 국방부에게 책임이 넘어간 것 아닐까요?”

“전례가 없긴 하지만 그렇게 해석할 여지는 있습니다. 베이츠사가 세계 정부로, 세계 정부가 대한민국 국방부로 책임을 넘겼다고. 하지만 그렇게 보면 국방부가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도록 명령했다고 따져야 하는데, 그 주장의 증거가 될 자료를 국방부가 갖고 있으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작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손해 배상을 요구하면서 국방부가증거 자료를 꺼내길 유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될 정도로 순진한 망상이었다. 피해를 혼자 주장하려면 증거가 필요한데 증거를 가진 게 국방부고, 여럿이 주장하려면 똑같은 피해를 본 동료가 필요한데 나는 혼자서 팀이었던 데다가, 자율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같은 작전에 누가 투입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깊은 곳에서 뭔가 들끓고 치미는 것이 있었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나는 휴지를 집어서 피를 닦았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세요.”

담당자는 깨진 유리 그릇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심리적 부담이 심하신 것 같은데, 필요하시면 저희 쪽에서 심리 상담 센터를 연결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판단이든 성급히 정하지 마시고, 언제든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그는 책상 위에 있던 전단지 하나를 집어 건네주었다. 받아서 앞면을 보니, ‘당신이 가는 길은 터널이 아닙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군관련 문제 전문 스타 상담사가 대거 포진한 최고의 상담소’ 어쩌고 하는 홍보문이 적혀 있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감찰과를 나섰다.


오후의 서울 중심가는 평화롭기 이를데 없었다. 서울시 홍보 이미지에나 쓰일 법한 광경이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빛나는 빌딩숲과 나무의 초록. 그리고 그 아래서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덕에 모두가 맨얼굴로 바깥 공기를 마신다는 게 어떤 것인지 오랜만에 실감하며 그저 햇살 아래 숨쉬고 걷는 것만으로 행복에 젖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그 아름다운 광경 속의 외부인으로서 그저 허망하게, 진창을 기어가는 지렁이 같은 심정으로 걸을 뿐이었다.

나는 혼자일 때 병에 걸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그러다 도현과 함께하게 되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그녀는 내가 취향에 따라 골라서 나를 사랑하게 만든 로봇이 아니라 우연히 만나 자유롭게 나를 사랑한 존재였고, 간편히 고쳐지지 않기에 더욱 귀한 존재였다. 그런 그녀와 오래도록 함께하기 위해 백신을 맞은 것인데, 그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했단 말인가?

이제 사랑하는 이와 거리를 걷는 것조차 이룰 수 없는 공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었다. 걷는다기보다는 무력감 속에서 허우적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발을 교대로 움직이긴 했으나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광화문 역 앞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형상이 있어 돌아보니, 항상 누군가 혼자서 시위하는 자리에 오늘은 헝클어진 백발을 늘어뜨린 노인이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릭 베이츠를 세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희망자를 모두 백신으로 조종하라!

-나는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팻말에 적힌 주장은 그 두 가지였다. 노인의 처지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노인도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것이리라. 죽어지지도 않고 삶을 영위하기엔 벅찬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삶의 고삐를 놓는 일을 생각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다, 문득 물어볼 곳이 하나 남았음을 떠올렸다. 나 때문에 피해를 본 시위대, 인수연에 물어야 했다.


#6

인간 의지 수호 연대, 인수연은 연락이 용이하지 않은 집단이었다. 홈페이지를 대신하여 SNS 계정은 갖고 있었고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었으나 실시간으로 소통 가능한 창구는 없었다. 그 SNS라는 것도 국정원이든 모사드든 인터폴이든 그 누가 이용자 정보를 요구한대도 내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서비스임을 생각해 보면 추적을 피하기 위한 방침이리라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다이렉트 메시지로 상황을 자세히 적어서 확인을 부탁했다. 자의든 타의든 당신들을 진압하는 일에 앞장서놓고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게 얼마나 황당하게 보일지 잘 안다, 하지만 나의 동반자인 도현을 내 손으로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다, 총격을 당한 것이 도현이 맞는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실마리라도 알려준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대강 그런 내용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내가 진압에 참여한 특신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날개까지 찍어 보냈다. 당장 순혈 인간 우월주의 테러리스트가 처들어온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천만한 개인 정보 노출이었지만, 절박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메시지를 보낸 뒤로 긴 시간을 기다렸다. 실제로 시간이 길었는지, 아니면 초조함 때문에 길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감각이 사실인지 아닌지와는 무관하게, 답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지친 아메바처럼 생물로서 존재하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일주일이 지났다. 울릴 이유가 전혀 없던 전화가 울려서 황급히 받아보니 보건소 로봇이었다.

“안녕하세요, 장한빛 선생님 맞으시죠? 뉴스로 보셨겠지만, 새로 발견된 바이러스가 30대에서 특히 치명률이 높아서 무작위 추첨으로 추가 접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접종 가능하신지요?”

나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접종 백신이 뭐죠?”

“접종 받으셨던 것과 동일한 베이츠 백신입니다.”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굴한 희망에 기운이 솟았다. 또 두 달간 나를 놓아버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겠지만 죽이면 안 될 사람은 이미 죽인 뒤인 것 같으니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가장 빠른 시간대로 잡아주세요.”

보건소에서 오전 10시에 추가 접종을 받기로 하고 보니 이미 9시 40분이라 시간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날아갈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택시를 타면 그만이었다. 요즘 택시는 한 번 타려면 적금을 깨야 한다는 농담도 있을 지경이지만, 통장에 사람 죽여서 번 돈이 쌓여 있으니까 그 정도 지출은 감당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신흥 귀족처럼 택시를 타고 보건소로 갔다. 마음이 편했다. 아무 답도 필요없는 삶이 거기 있을 테니까.

그러나 막상 접종 전 적합성 테스트에서 충격적인 판정을 받고 말았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특이 조직에서 갖추고 있는 별개의 면역 체계가 2차 접종에서 어떤 반응을 할 것인지는 충분한 연구 결과가 없어서 접종에 적합하지 않으세요. 추후에 다시 연락드릴 테니까 양해 부탁드릴게요.”

그건 감히 표현하건대 영혼을 파괴하는 말이었다. 감정의 지옥에서 타고 올라가던 동아줄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나는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다시 무슨 길이든 찾아야 한다는 게 너무나 무서웠다.

“이상 있으면 전부 제 책임으로 돌린다는 각서든 뭐든 쓸테니까 그냥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자 옆에서 일하던 더 높은 직급의 직원이 다가오더니 지쳐서 넌더리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그런 절차를 저희가 판단해서 수행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같은 분은 한 명만 이상 반응을 보여도 유사집단 전체에 대한 접종 중단 조치가 취해질 텐데, 그게 공익적인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 되시죠?”

나를 미치게 한 것이 그의 말인지 태도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책임지고 맞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요, 대체! 그리고 반버러지라고 싸잡아서 접종 중단하면 그게 미친 짓인데 내가 왜 그것 때문에 공익을 따지고 지랄을 해야 하는데, 이 개놈의 새끼야! 내가 아무렇게나 죽어도 상관 없는 실험실 벌레야 뭐야?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으면 사람을 살려, 이 갈고리로 찢어죽일 새끼야!”

견디지 못하고 쌍욕을 퍼붓기 시작하자, 당연하게도 경비 로봇들이 몰려와서 나를 붙잡고 병원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몸부림치면서 저항했다. 그러나 사람을 붙잡고 제압하는 일에 특화된 로봇을 사람이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끌려가며 고함을 치다 입이 막힌 채 목놓아 울었다. 마지막 포기마저 빼앗긴 게 비통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봇들은 나를 병원 앞의 광장에 집어던졌고, 나는 뒹굴다 그대로 누워버렸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지나는 사람들이 종종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치안 유지 로봇을 찾는 사람도 있었다. 오래 누워있을 수도 없을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가린 채 흐느끼며 모터 움직이는 소리가 다가오는지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러자니 근처의 대형 광고판에서 뉴스가 들려왔다.

-한국을 방문한 릭 베이츠 씨는 내일 오후 1시에 무역센터에서 백신 개량과 보급에 대한 협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협의에 참여할 관계사는……

동앗줄을 하나 더 발견했다. 나는 일어나서 그 뉴스를 끝까지 듣고, 검색해서 다시 들으며 이동했다. 할 일이 정해졌다. 제품 때문에 피해를 봤으면 생산자에게 따지면 되는 일이었다.

할 일이 정해지니 혼돈이 가라앉아 좋았다.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잡다한 준비물을 사서 귀가했다. 그런데 집에 들어와 보니, 현관문 아래 틈으로 서류 봉투 하나가 밀려 들어와 있었다. 봉투에 다른 표시는 없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냈다. 종이 신문이었다. 릭 베이츠가 서울에 방문한다는 기사가 1면에 나와 있었는데 얼굴에는 빨간 펜으로 가위표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제거 대상처럼.

최근에 접촉한 사람 중에 릭 베이츠를 특히 미워할 사람이 누구일까. 도현? 그건 너무 장밋빛 망상이고, 실제로는 인수연일 것이다. 나는 신탁을 받은 사제처럼 당당해졌다.


#7

세계 최고의 갑부이자 천재,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가장 크게 바꿔놓은 사람.

한 인간에게 주어지기에 너무 많은 수식어를 가진 릭 베이츠를 납치하는 계획은 치밀하게 세울 수 없었다. 영화라면 온갖 분야의 전문가 팀을 꾸려 보안 상황을 알아내고 주변 인물로 변장하며 탈출로를 확보하는 등 별 준비를 다하겠지만, 나는 그저 우울하고 무력한 비행 청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납치 계획은 릭이 회의장 앞에서 내린 뒤, 건물 입구 바로 앞에서 그물을 씌우고 그대로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엉성한 것이 되었는데, 예상에 비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마 베이츠사도 기계의 도움 없이 고공에서 날아와 고공으로 사라지는 적에 대한 대비책은 세우지 못한 탓이리라.

다행히 피해도 그리 크지 않았다. 포획을 위해 지상에 접근한 순간 스턴건을 한 발 맞긴 했지만, 릭의 안전을 고려해서 전류를 약하게 한 탓인지, 아니면 군복 위에 옷을 한 겹 더 입은 덕인지 전기가 별로 통하지 않았다.

나는 건설사 도산으로 공사가 중단된 빌딩의 옥상층에 자리잡고 릭을 의자에 묶은 뒤 액션캠을 켰다.

“당신이 그토록 완벽하다고 자랑하는 베이츠 백신을 맞고 알파 베이츠의 통제 하에 놓인 결과 내 손으로 동반자를 총으로 쐈어. 하지만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

릭은 바르게 앉아서 에메랄드색 눈을 빛냈다. 기묘할 정도로 맑게 빛나는 눈이었다.

“돈을 원하나?”

상상을 초월하는 침착함이었다.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하다못해 유감이라는 말이라도 할 수 없나?”

“유감이라는 말을 해도 고작 그게 전부냐고 화를 낼 것 같은데.”

“태도의 문제지. 하긴 당신 같은 사람은 남의 눈치를 보고 자세를 낮춰본 적이 없어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화를 내기로 결정한 사람을 말릴 방법은 없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었다. 릭이 엉엉 울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용서를 구한다 해도 기분이 그리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그가 동요를 일으키길 바라는 건 시간낭비였다.

“괜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내 동반자를 찾아줘. 채도현. 코랄 블루에서 제조된 동반자 로봇 2032년형으로, 인간 의지 수호 연대에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 대장을 맡고 있었다면 내가…… 총으로 쐈을 거야.”

릭은 무감동하게 되물었다.

“찾지 못하겠다면 나를 죽일 생각인가?”

두려울 게 전혀 없다는 투였다. 어이가 없었다. 인질이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이나 자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절박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내 심정이 상상이 안 되나?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사랑이 뭔질 몰라?”

“사랑이 뭔지 정확히 말할 순 없어도, 최소한 당신이 중독된 게 만들어진 감정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지.”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상대로 한 사랑은 순수하지 않다거나 가짜 역할놀이라는 얘기는 기술 발달과 함께 질리도록 나온 얘기였다. 그리고 그런 논쟁이 지속되면서 확실해진 것은 단 하나, 사랑을 정의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뿐이었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한답시고 세금을 써서 괜한 토론회나 개최하지 말라며 시청자가 공영방송에 올린 민원이 화제가 되었을 지경이다.

“괜한 선문답으로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찾아내.”

나는 보안 회선으로 연결된 랩탑을 릭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신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아적인 집착과 성교 중독에 불과해. 파편화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정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내가 만든 고도의 인형놀이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나는 결국 랩탑으로 릭의 뺨을 후려갈겼다. 릭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여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만든 인형이면 책임지고 당장 찾아내, 발가락부터 하나씩 으깨버리기 전에.”

“이러면 돼?”

심장이 멈출 뻔했다.

사무치게 그리웠던 목소리와 함께 이쪽으로 되돌린 릭의 얼굴은 도현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환각은 아니었다. 얼굴을 만져보니 촉감도 기억과 일치했다.

“어떻게 이런…….”

“석 달 전에 사설 수리를 받을 때 수리 기사가 클라우드에 백업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직을 재구성한 거야. 석 달 전의 도현과 외관도 데이터도 동일하니까 원한다면 이 개체를 줄게.”

도현의 목소리와 말투로 말하는 존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심호흡을 해야 했다. 현기증에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기둥을 붙들었다.

“릭 베이츠가 애초에 로봇인 건가? 아니면 내가 릭 베이츠의 대역을 납치한 건가?”

릭은 도현의 얼굴로 담담히 대답했다. 아주 희미하게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릭 베이츠는 허구야. 세계 정부가 인공지능에게 중요 사안의 최종 결정권을 넘겨주지 않기 때문에 인간들이 존경하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낸 존재지. 그러니까 이건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단말에 불과해.”

쉽게 믿을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면 증거는 코앞에 있었고, 알파 베이츠 입장에서 합리적이기도 했다. 팬데믹의 위험에서 거의 벗어난 이후, 릭 베이츠를 세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의견은 실현될 법한 것이 되어 있었다. 그 상황을 생각하면 알파 베이츠가 중요한 결정을 위해 위인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 할 만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이 사실을 밝히는 건, 나를 언제든 죽일 수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보 통제에 자신이 있어서?”

도현의 얼굴이 다시 릭 베이츠로 돌아갔다. 나는 그 형상의 붕괴를 보고 있을 수 없어 시선을 돌려야 했다.

“알고 있다면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장한빛, 고통에 매달리지 말고 3개월 전으로 돌아가 간편한 행복을 누려라. 쉽게 주어진 행복이라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차피 도현의 기존 개체는 해체되어 추적이 불가능하다.”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도현은 사라졌지만 가까운 과거의 데이터로 복구가 가능하다면, 심지어 비용도 들지 않는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반려 로봇이나 동반자 로봇을 가진 사람 대부분 심한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들 한다. 스마트폰 복구하듯이.

하지만 나는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에게 로봇 하나를 주면서까지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뭐지? 알파 베이츠 입장에선 별 힘도 없는 인간 하나쯤 그냥 무시하고 지워버려도 상관없을 텐데?”

그러자 알파 베이츠는 도현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것은 나를 응시하며 눈을 빛냈다.

“당신은 특별하니까. 어디서도 구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니까. 세상에는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종종 들어본 말이었다. 나는 언제 이런 말을 들었는지 떠올려 봤다. 답은 금방 나왔다. 어릴 때, 특신자라고 놀림받았을 때 선생님과 부모님이 그런 말로 나를 위로했다. 나는 이상한 게 아니라 둘도 없는 존재고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그건 보통 열등감을 달래는 위로지만, 나는 자라면서 특신자에 대해 알아보고 그 말이 객관적 사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파 베이츠의 말도 마찬가지로 객관적 사실이었다. 나는 아주 특별한 희귀 샘플이다. 갖고 놀다 괴로워하면 우리에 암컷 인형을 넣어줘서라도 죽지 않게 달래고 유전자를 뽑아 분석할 가치가 있으리라. 내가 날아다니며 사람을 죽인 기록을 봤다면 확보해두고 싶을 테지.

하지만 사실이기에 단순한 모욕보다 더 모욕적이었다.

가방에서 전동톱을 꺼냈다. 나를 바라보던 알파 베이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난 너를 응원할게.”

나는 대답 대신 고글과 마스크를 썼다. 도현의 모습을 한 알파 베이츠의 목을 잘라서 챙기기는 심리적으로 쉽지 않았다.


#8

알파 베이츠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오로지 모욕감 때문은 아니었다. 알파 베이츠가 제공한 3개월 전의 도현의 복제판이 정말 3개월 전의 도현과 모든 게 일치한다 하더라도 도현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한때 릭 베이츠였던 육체가 아니라 내가 아는 온기를 품은 그 육체를 바랐고, 무엇보다 근래의 기억을 갖지 못한 도현의 백업 인격을 도현으로 생각하기 싫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에 합당한 책임을 지지도 못했는데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시기의 도현을 도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백업된 도현을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린다 쳐도 기존의 도현이 어떻게 되었는지 제대로 확인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인수연에서 내 집까지 찾아와서 찔러넣었을 메시지도 알파 베이츠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 중 하나였다. 도현이 어찌 되었는지 알려달라는 부탁에 돌아온 답이 릭 베이츠 머리에 친 가위표였으니, 릭 베이츠로 알려진 개체를 죽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나는 한때 릭 베이츠였던 로봇의 머리를 잘라서 몸뚱아리는 ‘릭 베이츠는 로봇이다’라는 글을 써서 시청 광장에 버리고, 머리는 챙겨서 집에 가져왔다. 그것은 진짜 도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덕분인지 심리적인 거부감은 차츰 줄어들었다.

릭 베이츠의 몸을 버린 이후로 한동안은 눈이 빨갛게 빛나는 죽음의 로봇 군단이 나를 잡으러 오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인간형 로봇의 몸체가 발견되어 수사 중이라는 뉴스가 짧게 나왔을 따름이다.

뉴스 내용을 다시 검색해본 나는 알파 베이츠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확신했다. 릭 베이츠가 로봇이라는 메시지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격자가 많이 생길 위치에 버렸는데 SNS에 사진 한 장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정보가 그렇게 통제되는 바람에 내가 릭 베이츠라 불리던 개체를 파괴했다는 주장에 대한 신빙성은 상당히 낮아졌고, 인수연에 보내는 메시지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나는 메시지에 자초지종을 조리 있게 쓰고, 릭을 납치한 뒤로 계속 촬영했던 영상도 첨부했다. 그건 아주 싫은 짓이었다. 인간형 로봇을 파괴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배포하는 것이 중대한 위법 행위임을 떠나서, 도현에 대해 알려달라면서 도현의 형상을 한 로봇을 파괴하는 영상을 보내자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도저히 제정신인 작자의 요구로 느껴지지 않았다.

답이 올까 안 올까.

인수연에서도 침팬지를 죽이는 실험을 라이브로 한 적이 있으니 이 정도를 불쾌하게 여기진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미친놈이 뭐라고 하든 말든 릭 베이츠 공격에 이용이나 해보자고 해놓고 이제 모른척 할 것 같기도 했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돌보지 못해 어질러진 집안을 청소하고 밥을 챙겨 먹었다. 도현과 살 때는 약간 지저분한 구석도 있었으므로 딱 그 정도로 맞춰 청소했고, 식사 메뉴도 도현과 같이 먹던 토마토 스파게티를 해 먹었다. 도현은 아니지만 형상은 그녀와 똑같은 머리가 있었기에 테이블 맞은편에 잘 세워두고 같이 식사하는 기분도 냈다. 과히 나쁘진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한 뒤에는 도현의 머리를 안고 자리에 누워 둘이서 놀러 다니며 찍은 영상들을 보았다. 그녀가 있을 때 종종 하던 여가였는데, 이렇게 재현하자니 정말 과거의 그 순간인 것 같기도 했다. 특히 도현이 먼저 잠들고 내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때를 생각하면 다를 것도 없었다. 도현의 머리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지금도 가슴 깊은 곳을 달구었다.

슬슬 잠이 왔다. 의식이 단속적으로 끊어졌는데, 나는 비몽사몽간에 끌어안을 도현의 몸을 찾다가 공허감과 불길한 예상 속에서 깨어났다.

만약 도현을 찾았는데 복구는 불가능하고 머리만 남았다면 어쩌지. 그래서 둘 다 안고 자다가 뒤섞이면 어떻게 구분할까.

정신 나간 상상이지만 가능성이 낮진 않았다. 나는 이따위 생각을 해야 하는 상황이 괴로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가 현관문을 노크한 것은 그때였다. 인터폰으로 확인하니 얼핏 봐선 가면을 쓴 느낌이 잘 나지 않는 인면형 가면을 쓰고 음식 배달용 플라스틱 가방을 든 사람이었다.

“누구세요?”

조용히 묻자 상대도 조용히 답했다. 변조된 목소리였다.

“그릇 찾으러 왔습니다.”

식칼을 들고 문을 열었다. 상대는 자극하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들어왔다. 나는 질문했다.

“채도현에 대한 정보부터 주시죠.”

“당신이 쏜 건 채도현이 맞습니다.” 상대는 조용한 킬러가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이듯 말했다. “채도현은 1기와 3기 시위대 대장을 맡았고, 3기 활동 중 특신자의 산탄총을 맞고 기능이 정지했습니다.”

두려워하던 소식이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던 순간을 그리워하며 물었다.

“증거는?”

그러자 상대는 플라스틱 가방을 열더니 안에서 소시지 같은 것을 꺼냈다. 아니, 그것은 손가락이었다.

“확인해 보시죠.”

사랑하는 사람의 신체 일부를 배달 받는 기분이란 떨어져나간 내 몸을 보는 것보다 몇 배로 끔찍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방금 전까지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똑같이 생긴 머리를 안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끔찍함의 기준이 엉망이었다.

도현의 태블릿을 찾아서 손가락을 인식시켰다. 아무렇지 않게 잠금이 해제되었다. 도현은 인수연에 있거나 있었고, 어디에 있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자, 견디기 힘든 고통이 발밑부터 스며오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듯 말했다.

“일단…… 시위대를 공격해서 미안합니다. 도현이 말고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겠죠. 정말 미안합니다. 그런데 도현이는…….”

인수연의 전령은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침대 쪽을 가리켰다.

“그릇을 주시죠.”

나는 곧장 그에게 도현의 형상을 한 머리를 넘겨주었는데, 손가락을 받고 머리를 주는 일은 아무래도 불합리한 거래처럼 느껴졌다. 도현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모조 머리라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알아낼 걸 알아내고 이 자를 죽이면 어떨까?

잠시나마 그 생각이 그럴듯한 방법처럼 느껴졌다는 게 어이 없었다. 나는 인수연에 잡힌 약점이 적지 않고, 사람을 흔적 없이 죽여 없애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인데다가, 전령의 배달 가방에 기관단총 따위가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정신 나간 충동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나는 전령이 도현의 모조 머리를 무슨 측정기로 확인한 다음 가방에 넣는 과정을 얌전히 지켜보았다.

“어디에 쓸 생각입니까?”

“알파 베이츠가 인류를 속여왔다는 증거로 쓸 예정입니다. 증거로 쓸 만큼 분석하지 못한다면 시위용 로봇을 구성하는 부품으로 쓸 테고, 그것도 실패하면 암거래상에 팔아서 활동 자금으로 써야겠죠.”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음성도 변조되어 전령의 감정을 읽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인수연이 적절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어 알파 베이츠가 버린 로봇도 해킹할만하다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절차상 분석 시도만 해볼 예정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전자에 희박한 희망을 품고 물었다.

“도현이는 어떤 상태입니까? 그쪽에 있는 건 맞습니까? 복구 가능할까요?”

전령이 나를 보는 시선은 어쩐지 동정적으로 느껴졌다. 불길했다.

“채도현의 메모리에서 정지 직전에 저장한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어 내밀었다. 밀봉되지 않은 봉투였다. 내가 그것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자 전령은 돌아섰다.

“그걸 읽은 뒤에도 채도현을 찾고 싶다면 SNS로 연락하십시오.”

그는 거둘 목숨을 거둔 사신처럼 조용히 나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봉투 안의 서류를 꺼냈다. 특징 없이 프린터로 대강 뽑은 인쇄물이었다. 첫 줄은 ‘한빛 씨, 안녕’으로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고 읽기 시작했다.


-한빛 씨, 안녕.

일단 사과할게. 당신이 진압하러 온 것을 보자마자 알아보고 붙잡아놓으려 했어. 당신은 여러 작전에 쓰기 좋으니까 그대로 돌려보내면 험한 일을 할 것 같았거든. 그런데 번개같이 반격하더라고. 아마 그 일 때문에 자책하고 있겠지? 하지만 당신은 자율 생활 중이었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자극한 거니까 순전히 내 탓이야.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베이츠 백신을 맞은 것도 베이츠 사에서 당신을 사회적인 방법으로 조종했기 때문이니까 자책하지마. 내가 더 잘 하지 못한 게 잘못이지.

아무튼 나는 5초 안에 정지할 거야. 당신이 사용한 산탄은 회로 파괴용이라 로봇에게도 효과가 좋거든. 시간이 없으니 괜한 소리는 그만하고 꼭 해야 할 말부터 할게. 사랑해. 나는 특별한 것에 끌리게 만들어졌고 솔직히 당신에게 날개가 있어서 끌리긴 했지만, 아마 당신에게 날개가 없었어도 섬세한 그림자에서 특별함을 느꼈을 거야.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도 좋아. 쉽게 슬퍼하는 성격만 좀 고치고.

회로 파괴용 산탄에 맞은 기기를 복구하기란 아주 어려워. 탄환이 수천 조각으로 흩어져 모든 곳을 망쳐놓거든. 십중팔구 폐기물로 직행이지. 그러니까 날 찾아서 복구할 생각은 하지 말고 사설 수리 센터에서 내 백업을 받아. 요즘 동반자 로봇은 주문자가 원하는 대로도 만들어 주고 백업본 설치도 자유로워. 팬데믹 덕분에 취약층 1인 가구에 대한 국가 보조금도 나오니까 부담도 안 될 거야. 저장되지 않은 시간 3개월은 그냥 사고로 기억 상실에 걸렸다 치고 잘 설명해줘. 인간의 낡은 고정관념에 얽메여 지금 메시지를 남기는 이 개체만이 당신의 진짜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조만간 새 몸으로 만나면 바다나 가자. 인수연이 이 데이터를 빨리 찾아내서 전해주면 좋겠네.


나는 도현의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온몸을 채운 슬픔이 천천히 빠져나가길 바랐다. 그리고 그런 한편으로 도현이 합리적인 논리에 따라 백업본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있지만, 그녀 자신은 복구되길 바란다는 것을 느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도현의 백업본을 3개월 전의 도현과 같은 존재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도현의 시각으로 보면 백업된 도현은 자신과 기억 일부가 동일한 쌍둥이에 가깝고, 자신은 그냥 죽음을 맞을 뿐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내가 백업본을 택하길 바란다면 이런 메시지를 남기지 않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그랬다면 내가 적절히 좌절하고 미련을 버렸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졌으리라.

도현은 살고 싶어 한다.

나는 그녀가 말하지 않은 소원을 이뤄주기로 했다.


#9

도현을 찾아야겠다고 인수연에 연락했다. 그러나 답이 오지 않았다. 전령이 물건을 전달하고 필요한 만큼 분석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하루를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 뒤에 찾아온 것은 인수연의 답장이 아니라 뉴스 속보였다.

“인간 의지 수호 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세계 정부의 베이츠 백신 접종을 반대하고 잔혹한 동물 학대 영상을 유포하며 테러를 일삼았던 범죄 조직이 일망타진되었습니다. 베이츠사의 협조로 본거지를 알아낸 덕분인데, 자세한 내용 들으시겠습니다.”

나는 황급히 SNS를 실행해서 인수연의 계정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인수연에 대해 검색해도 뉴스 내용 이외엔 정보가 없었다.

나는 철저히 숨었던 인수연이 발각된 이유를 생각해봤다. 망하기 전과 후로 달라진 것은 하나였다. 도현의 모조품 머리가 화근이었으리라. 전령이 뭘 확인한다고 확인했지만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자르려 할 때 알파 베이츠가 나를 부추겼던 것을 떠올렸다. 무슨 결정을 하든 나를 응원하겠다고……. 어쩌면 알파 베이츠의 로봇을 어떤 식으로든 가져가게 될 상황에 놓인 것부터 모두 실패였던 게 아닐까.

화가 치밀었지만 절망감이 더 심했다. 앞이 캄캄했다. 부서진 도현이 어찌 되었는지 답해줄 사람이 남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든 다 손에 잡히는 대로 박살내고 싶었지만, 잠시나마 도현과 함께하는 기분을 느꼈던 공간을 망칠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알파 베이츠는 도현이 해체되어 추적 불가능하다고 했다. 전령은 모조품 도현의 머리를 분석하거나 부품으로 쓰거나 암거래상에 팔아치울 거라고 했다.

따라서 인수연은 파괴된 도현도 해체해서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데이터를 꺼낸 것으로 보아 필요한 분석을 마치고 부품으로 쓰려는 시도를 해봤겠지. 하지만 회로 파괴용 탄환이 회로를 새로 사는 게 나을 정도로 파괴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도현은 암거래상에 팔렸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불법 로봇 매매에 대해 검색했다. 인격이 있는 로봇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양도와 폐기 등의 절차가 아주 까다로운데, 불법 매매 업자가 절차를 생략하고 매입하거나 폐기장에서 말로만 폐기했다고 하고 업자에게 넘기는 경우가 적지 않아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특히 사람에게 일련 번호를 매기고 관리하는 일에 아주 익숙한 한국의 경우는 일련 번호 체계 밖에서 활동하는 로봇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어서, 사립 탐정의 신고를 받고 이런 업자를 단속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각종 미디어에서 나오는 멋진 모습과 달리 대체로 불륜 조사만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탐정들에게 불법 로봇 적발은 멋도 있고 돈도 되는 일로 자리잡은지 몇 년 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마 팬데믹으로 인한 개인용 로봇 수요의 폭증이 원인이겠지.

나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검색해보고 커뮤니티에 질문도 한 끝에 사립 탐정을 만나보기로 했다. 국가 기관은 애초에 믿을 수 없을 뿐더러 불법 매매에 대해 물어봤자 내게 도움이 될 정보를 얻을 수 있을리가 만무하니, 가장 전문성이 빼어난 이들은 사립 탐정일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로봇을 찾기로 커뮤니티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이라는 해실 대밋은 상담 예약을 잡는 것도 어려웠을 뿐더러 단순 상담만으로도 큰 돈을 지불해야 했다. 영리한 장사라고 할 만했다. 탐정에게 실종자 수색을 의뢰하는 사람이란 보통 절박하기 마련이라 부르는 대로 돈을 쓸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해실은 어째선지 침침한 실내에서도 짙은 선글라스를 쓴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굳이 낡은 티가 나도록 유지한 사무실에서 내 질문을 듣자마자 깔끔히 대답했다.

“회로 파괴 탄환을 맞고 처분된 로봇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나 들으려고 몇 백만 원을 내고 온 게 아니었다. 나는 치밀어오르려는 것을 참고 입을 열었는데, 해실의 말이 약간 더 빨랐다.

“회로가 구석구석 박살난 로봇을 부품이라도 쓰려면 로봇을 완전 분해해서 모든 회로를 살펴볼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단순히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고가의 장비까지 갖춰야 하죠. 당연히 사업 규모도 상당하기 마련이고, 신뢰성 높은 장물아비를 통해 거래합니다.”

“그럼 그 장물아비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만날 방법은 있지만, 만난다고 해서 장물아비가 업자에게 안내해주진 않을 겁니다. 굳이 장물아비를 쓰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수수료를 떼어주면서 장물아비를 쓰는 이유는 안전 때문이다. 장물아비 역시 장기적인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해 입을 다물 테지.

하지만 장기적인 밥줄보다는 당장의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갖가지 고문 방법을 빠르게 고민하는 내게, 해실이 말했다.

“비밀을 알아내는 방법이 꼭 고통을 주는 것뿐은 아니죠. 장물아비가 가진 장비를 모두 해킹하면 반드시 알아낼 수 있습니다.”

듣기에는 간단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자가 보안 체계를 엉성하게 갖추고 있을 리는 없다. 요컨대 장물아비를 잡아서 모든 장비를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해킹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러자면 비용도 문제일 뿐더러, 그런 해커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고전적인 해킹이 낫겠군요. 저렴하기도 하고.”

그러자 해실은 큭큭 웃었는데, 잠시 고개를 숙일 때 선글라스 너머로 눈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오른쪽 안구는 전체가 검은 색이고, 왼쪽 안구는 붉게 빛났다. 나는 그녀가 특신자이자 부분 개조자임을 알았다. 비상한 능력을 가진 자에겐 비상한 육체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장물아비만 잡아오시면 해킹은 무료로 해드리죠. 같은 특신자끼리 서로 도와야하지 않겠습니까.”

 

고마운 말이지만 호의도 정도가 있다. 특히 탐정처럼 한 건 한 건을 잘 뽑아먹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해킹처럼 큰 돈이 될 건수를 이렇게 버릴 이유가 없다. 굳이 이렇게 함으로써 더 큰 이익을 보는 게 아닌 다음에야.

“내가 장물아비를 잡아서 불법 수리업자를 만나길 바라는 자가 있군요.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불확실한 보수를 위해 확실한 보수를 포기할 리가 없으니, 상대는 충분한 보수를 이미 지급했거나,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자일 겁니다.”

해실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 짐작하셨다면 받아들이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모두가 이득을 보는 방향이 좋죠.”

그러면서 그녀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렸다. 기계 눈과 곤충의 겹눈이 모두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너머에 있을 것들을 생각했다.


해실이 알려준 대로 장물아비를 만나기 위해서는 준비물이 필요했는데, 그 준비물이란 다름아닌 파괴된 인간형 로봇이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수리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파괴되었거나 제조사가 사라진 모델이 필요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처분이 필요한 물건도 없는 자와 만나기로 하면 단속반을 만나게 될지, 탐정이나 강도를 만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그렇게 불순한 목적을 가진 자들도 어디서든 부서진 로봇을 구해올 수 있긴 하겠으나, 사람 시체를 구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게 손상된 인간형 로봇을 구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부서진 인간형 로봇을 촬영하는 행위는 파손 이후의 모습만 찍는다 하더라도 당국의 경계 대상에 오른다. 요컨대 장물아비를 불러내자면 약점을 만들어 공유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알파 베이츠를 찍은 장면은 있어도 로봇은 갖고 있지 않으므로 준비를 새로 해야 했다. 해실이 알려준 것은 바로 그 로봇을 구할 장소였다.

새벽 두 시의 안양천 공원. 비가 내린지 오래되어 수심이 얕아진 하천변의 공원은 잡다한 관목 따위가 곳곳에 자라서 적당히 아름다운 편이긴 했지만, 다른 공원에 비하면 조경이 잘 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정도였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몇 번이나 물에 잠기는 곳이니 신경 써서 꾸며둔다는 게 무의미한 탓이리라. 그러나 관리가 덜 된 그 비주류적인 느낌과 어둑어둑한 조명이 더 연인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갖게 만들었다.

나는 공원의 일부라고 하기도 힘들 만큼 어두운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암묵적 안전 거리를 지켜가며 곳곳에 숨듯이 자리하고 사랑을 확인하는 연인들을 보며 도현을 생각했다. 우리도 이런 곳에 와 봤으면 좋았을 텐데. 왜 항상 판에 박힌 일상만을 반복하며 만족했던 것일까?

나는 우리가 누려야 했을 시간들과 누릴 수 있을 시간들 사이에서 고통받으며 연인들을, 그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에 자리잡고 가장 은밀한 사랑을 확인하는 자들을 주시했다. 동반자 로봇과 인간의 사랑은 아직도 종종 조롱당한다. 에로스적 사랑이 상호 독점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문화로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내 눈앞의 인간 여자와 여성형 동반자 로봇도 짙은 어둠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중이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전기 충격기와 와이어를 쥐고, 구멍난 옷 위로 날개를 펼 준비를 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였던 릭 베이츠도 납치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이번에도 못할 이유가 없었다. 로봇부터 무력화하고, 인간을 기절시킨 다음 와이어로 감아서 날아가면 그만이다. 심지어 로봇은 아예 파괴해야 하니 조심해서 다룰 이유조차 없다. 어떻게 봐도 어린아이 손에서 사탕을 빼앗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란 얼마나 부주의한가.

그러나 지금 가면 완벽하겠다는 순간이 몇 번이나 지나도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해실에게 나를 도우라고 시켰을 의뢰주, 알파 베이츠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날 도우라고 한 것이 알파 베이츠라는 짐작은 짐작이라고 하기도 뭣한 수준의, 그야말로 당연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탐정을 찾아가서 도현을 찾을 방법을 알아보리라 예상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자가 그밖에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알파 베이츠가 나를 돕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도현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나를 도움으로써 녀석이 대체 어떤 이익을 본단 말인가? 심지어 알파 베이츠는 사람도 아닌 만큼 자신만의 이익을 얻거나 나를 엿먹이려 하는 게 아니라 공익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어서 하는 짓이 분명한데, 내가 도현을 찾아냄으로써 어떤 공익이 발생하는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대체 뭘까? 공익 이전에 도현을 되찾으면 일단 나는 무엇을 얻을까? 알파 베이츠는 3개월 전의 백업된 도현으로 만족하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원래의 도현을 찾도록 하고 있으니, 두 도현 사이의 차이에 알파 베이츠가 원하는 게 있단 말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도현이 3개월 사이에 얻은 정보에는 인수연에 대한 정보가 끼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도현을 되찾는다면 알파 베이츠는 인수연의 중요 인물에 대한 정보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알파 베이츠에게 그 어떤 것도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인수연의 중요 인물들이 빠져나가서 새로운 저항 운동을 벌이고, 알파 베이츠가 망해버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고작 그런 바람을 위해 도현을 찾을 가장 확실한 방법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알파 베이츠가 어찌되든 인수연이 어찌되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설령 도현을 되찾는 대가로 핵미사일 발사 코드 따위를 넘겨주게 된대도 상관없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의 연인을 향했다. 그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서로를 탐색하고 갈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를 영영 잃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10

결국 나는 습격도 납치도 할 수 없었다. 도현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누굴 어떻게 얼마나 죽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지만, 행복을 누리고 있는 연인들을 완전히 박살내서 지금 내가 있는 지옥에 처박는 게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아니, 더 엄밀히 따져보자면 내가 하려던 일을 할 경우에 그 인간 여자가 처할 상황은 나보다 훨씬 끔찍할 것이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공지능이 어떤 목적에서건 뒤를 봐주지 않을 테니까. 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남을 확실한 불행에 처박는 건 정당하거나 합리적인 일이 아니리라.

그 연인들을 불행에 빠뜨림으로써 내가 확실히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 역시 나를 돌아서게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알파 베이츠가 깔아놓은 판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녀석이 원하는 것을 쥐어주는 선택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녀석이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일지라도.

습격과 납치를 저지르는 대신, 나는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차림새를 다듬은 뒤, 산책을 하며 몸을 푸는 아저씨처럼 끙끙대거나 아이고 소리를 내며 그녀들 근처까지 걸어갔다. 그러자 사랑의 격정 속에서 빠져나온 두 여자가 경계하는 눈초리로 나를 돌아보았다. 심지어 인간쪽은 동반자를 보호하듯, 살짝 자기 몸으로 가리기까지 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누가 계신줄 몰랐네요.”

내가 어수룩하게 사과하자 인간 여자가 날카롭게 답했다.

“우리 죄지은 거 없으니까 시비 걸 생각 말고 갈 길 가세요.”

아마 잡다한 이유로 시비를 거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리라. 나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이빨을 드러낸 그녀에게 쓰라린 동질감을 느꼈다.

“이해합니다.”

“네?”

“이해한다고요. 나도 로봇 동반자가 있었거든요.”

두 사람의 눈빛이 약간 누그러졌다. 뒤쪽의 로봇이 물었다.

“지금은 안 계신가요?”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야 답할 수 있었다.

“자율 생활을 하고 깨어나니 실종되었더군요. 찾으려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해봤지만 잘 되진 않았고…….”

“동일 모델로 복구는 해보셨나요?”

로봇이 말하자마자 인간이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분위기 파악 좀 하라는 의미 같았다. 그 모습은 무척 보기 좋아서, 나는 대답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3개월 전의 백업본으로 복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옳은지 모르겠더군요. 줄곧 나와 함께한 동반자를…… 포기하는 꼴이 아닌지…….”

목에서 쇳소리가 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로봇은 내가 진정할 시간을 기다려주고 말했다.

“말도 안 된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제 말을 들어보세요.”

고개를 끄덕였다. 로봇은 연인과 눈을 한 번 마주치고 차분히 설명했다.

“실종된 동반자분의 알고리즘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라는 개체성보다는 연인을 사랑한다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둡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단독한 개체로서의 나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고 보죠.”

그것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그야말로 생각도 해보지 못한 관점이었다.

“결국 그쪽분의 마음에 달린 일이에요.”

인간이 덧붙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과거의 도현에 집착하는 것이 결국 나만을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허망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도현이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오고 싶어한다는 믿음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굳건하진 않았다.

나는 인간으로서 연속적인 기억을 보유한 자신이야말로 유일한 나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달리 생각할 길이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인식이다. 하지만 복제가 가능한 로봇이라면 기억이 이어지지 않더라도 복수로서의 자신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생각은 나를 점점 고통스럽게 했다. 예전의 도현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작정이었다. 그게 도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정작 도현이 개체성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어떤 버전의 자신으로든 나를 사랑하면 그만이라면, 이 모든 일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몸부림에 불과할 것이다.

게다가 더 심한 문제는, 도현이 이에 대해 어떤 생각, 혹은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그녀에게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물론이고 제조사조차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뭘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공허감 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도현의 모습을 구현한 가짜 머리만이 머물렀던 공간을 둘러보았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행복이라고 할 만한 감정을 누릴 수 있었다. 최소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도현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럭저럭 괜찮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집착인지 고집인지 모를 단단한 의지가 꺾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슬슬 포기해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도현을 백업으로 다시 만들어야겠다. 기억을 다소 잃어버린 도현이라도 도현일 테고, 잃어버린 육체에 새겨졌을 우리의 시간은 다시 새겨넣으면 될 것이다.

마음을 어느 정도 굳힌 나는 등록증을 찾기 위해 앨범을 꺼냈다. 도현 본인이 없으니 인증 칩이 들어간 등록증을 가져가야 백업본을 정상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죽 정장 앨범을 오랜만에 펼쳐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촉감부터 다가오는 추억의 모음집에는 눅눅한 슬픔이 배어 있는 듯했다. 도현의 사진을 보니 그녀가 남긴 말도 새삼 떠올랐다.

-조만간 새 몸으로 만나면 바다나 가자.

몸만 새것이 된다는 듯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어찌되든 상관없다 하더라도, 과거의 도현을 불러내려는 나는 지금 본래의 도현과 작별하고 그녀의 쌍둥이를 찾으러 가는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제 미래는 없고 과거만 남은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시간 순서로 정리했으니 등록증은 아마도 앨범의 앞 부분에 있을 것이다. 나는 슬픔의 기원을 찾듯 앨범의 과거로 과거로 넘어갔다. 추억을 하나하나 곱씹는 일은 자신의 심장을 씹어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내 마음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내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나는 정서적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두 번째 페이지에 도착했다. 오른쪽에는 등록증이, 왼쪽에는 제주도의 해수욕장에서 찍은 첫 사진이 있었다. 우리가 동반자 계약을 마치고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찍은 첫 사진.

거짓말같이 가깝게 느껴지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손에 잡을 수 있는 사랑과 다가올 시간의 행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던 순간으로. 그때는 모든 게 다 완벽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눈물을 참으며 사진을 보던 나는 문득, 사진 끄트머리에 찍힌 중고 로봇 판매점을 발견했다. 도현에게는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마냥 그리워할 수는 없는 그곳. 기분 나쁜 사장이 했던 인사가 떠올랐다.

‘질리거나 아주 고장나면 다시 찾아주시게, 잘 해줄 테니.’

새삼 생각해 보니 그건 분명 영업이었지만 이상한 영업이었다. 단순 가전 제품을 사도 몇 달은 무상 수리를 해주겠다거나 어떤 부분은 보험 적용이 안 되니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언급이 있기 마련인데, 사장의 말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음험함을 넘어 불법적인 냄새까지 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희망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곧장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전화를 걸었다.

“네, 제주삼다로봇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노파의 목소리가 맞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코랄 블루사에서 제조된 동반자 로봇을 쓰던 사람인데, 얼마 전에 심하게 망가져서요. 혹시 수리할 수 있을까요?

“코랄 블루 제품이면 좀……. 아, 얼마 전에 부품이 좀 들어왔으니까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네. 현금 챙겨서 방문해 주시오. 보고 나서 상의하게.”

코랄 블루는 망한지 오래고, 유통되는 로봇은 없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따라서 코랄 블루의 부품이 얼마 전에 입수되었다면 그게 바로 도현일 확률이 높았다. 하나 더 확인했다.

“만약 수리가 안 되면 그쪽에서 그, 처리를 잘 해주실 수 있을까요?”

불법적인 처리를 의미하는 단어를 피해서 에둘러 묻자, 상대는 다소 따분하게 답했다.

“이렇게 전화로 얘기하긴 어려운 부분이니까 직접 갖고 오셔야 할 것 같소. 우리 가게에서 안 되는 건 없지만 내가 상태를 확인하고 방법을 상의해야 하니까. 육지에 계시오?”

“오늘 중으로 내려갈 예정입니다.”

“로봇이랑 현금 잊지 마시게.”

통화를 마치고, 나는 당장 잡다한 도구와 짐을 챙겨 공항으로 출발했다.

내 생각이 맞았다. 제주삼다로봇은 그냥 중고 로봇만 취급하는 게 아니라 불법 매매도 하고 있었고, 도현은 다시 그곳으로 팔렸다. 인수연이 체포되기 전에 수많은 암거래상 중에서 제주도를 택해 거래하게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제주삼다로봇이 암거래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도현이 또다른 메시지로 인수연에 자기가 아는 처분처를 추천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우리의 시작점에 도현을 온전히 되찾는다는 나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11

5년 만에 찾은 추억의 해수욕장은 폐쇄되어 있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놀 만한 공간이 사라진 탓이다. 나는 잃어버린 추억의 흔적에 불길함을 느끼며 ‘제주삼다로봇’에 들어갔다.

로봇 정비 및 거래 업체였던 그곳은 이제 인테리어를 뜯어고치고 카페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맨살이 넓게 드러난 수영복을 입은 미남 미녀 로봇들이 서빙 중이라 ‘로봇 산업의 어둠과 로봇권의 사각지대’따위 제목으로 르포를 찍으면 적절할 것 같았다.

저 안쪽의 작업대에서 로봇을 손보던 사장은 나이를 먹을수록 마르는 타입인지 전에 봤을 때보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기술자라기보다는 병으로 은퇴한 해녀 같았다. 내가 코랄 블루 제품 수리 건으로 전화하고 왔다고 말하자 그녀는 마스크를 쓴 나를 살펴보곤 의심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고장난 로봇은 어쩌고 빈손으로 오셨소?”

내가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별 증명 없이 이 불법 거래상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전화로 희귀 모델의 수리부터 문의했고, 이곳에서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인 일만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불법 로봇 거래를 빈손으로 시작할 수는 없을 모양이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봇 사냥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대로 되는 데까지 부딪혀보기로 했다.

“아는 수리 기사가 있어서 부품부터 보려고 왔습니다.”

사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미약하게 갈등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이 덧붙였다.

“코랄 블루 부품이면 호환성이 낮아서 어디 쓸 일도 없으실 텐데요.”

꼬우면 때려치우라는 말을 온건히 한 셈이었는데, 꺼지라는 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는 것만 해도 어느 정도는 통한 듯했다. 나는 뜸을 들이는 노파 앞에서 반 걸음 물러서서 재촉했다. 재촉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실패한다 해도 다음 단계로 가면 그만이다. 납치와 고문에 필요한 것들은 이미 다 보관함에 넣어두고 왔으니까.

이윽고 사장이 말했다.

“보안상 검사는 해야 한다는 점 양해해 주시오. 량, 스캔해.”

량이라 불린 양복 차림의 로봇이 금속 탐지기처럼 보이는 물건을 들고와서 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사장은 결과를 안구나 뇌로 직접 전송 받은 듯, 무슨 보고를 듣기도 전에 갑자기 헛웃음을 지었다.

“날개 달린 특신자라, 장사 오래 하다 보니 별 손님이 다 왔군. 아무튼 이쪽으로 오시게.”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량과 함께 나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사장은 지하 2층이라고 음성 인식을 시켰다. 버튼에는 없는 층이었다.

“사적인 공간이니까 괜히 어디 가서 말하진 마시오.”

말하면 소송을 건다든가 로봇 군단을 보내서 때려주겠다든가 하는 협박도 없었다. 그러나 등뒤에 있는 로봇 때문인지 압박감이 심했다.

지하 2층은 연구소와 카센터를 반반 섞은 것처럼 생긴 곳이었다. 사장 성격이 원래 꼼꼼한 것인지 아니면 로봇들이 일을 잘 하는 것인지, 다양한 로봇의 부품이 곳곳의 선반에 모델별로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코랄 블루라면 이쪽이오. 우연히 해류를 타고 흘러들어왔지. 우리 애들이 물질을 하다 발견한 거라오.”

사장은 선반 사이를 지나서 커다란 작업대 앞으로 갔다. 나는 그 거짓 입수 경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고민하다 작업대 위를 보고 생각이 멈춰버렸다.

작업대 위에는 수산시장의 연어처럼 해체된 도현이 늘어서 있었다. 각 부위가 따로 놓여 있었으므로 누워 있다고 표현하기도 불가능했다. 눈을 뜨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깨끗했지만 뺨에 작은 총알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나는 로봇을 파괴하는 영상의 유포가 왜 범죄인지 새삼 깨달았다. 사랑하는 형상의 붕괴는 심리적으로 지독했다.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현기증에 비틀대자 량이 팔을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고맙습니다. 괜찮습니다.”

입을 가리고 바로 서는 나를 보고 사장이 킬킬댔다.

“보기에 좋지 않다는 걸 말했어야 하는데 미안하게 됐구려. 아무튼 재수없이 좀 험한 꼴을 당한 물건이오. 회로 파괴용 산탄을 맞아서 비싼 부품은 죄다 작살이 났지.”

나는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도현의 얼굴을 봤다.

“머리는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데, 두뇌는 좀 어떻습니까?”

“회로 파괴용 산탄이 회로를 가려가며 망가뜨리진 않지. 혈류를 타고 침입해서 개떡이 됐을 거요. 고치려면 회로 곳곳에 박힌 미세 파편을 일일히 제거하고 회로를 전부 재연결해야 하니, 두뇌는 다른 걸 찾아보시게.”

하마터면 절망할 뻔했지만, 절대 고칠 수 없다는 건 아니었다. 확보만 한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세트를 전부 주십시오.”

그러자 사장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탐색하듯, 눈을 응시하며 간사한 미소를 지었다. 뱀 같기도 하고 맹금류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파는 건 좋지만 두뇌 수리는 여기 아니면 못 할 거요. 베이츠사 공인 로봇 회로 정비사 알파급 자격에 나노 공정 작업대까지 있어야 손 대볼 엄두라도 낼 수 있을 텐데, 그거 둘 다 가진 게 한국에 나뿐이거든.”

“그럼 외국에서 하면 될 게 아닙니까?”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나서 실수를 깨달았다. 사장은 내가 도현의 두뇌를 원한다는 사실을 확신했을 것이다.

노파의 미소는 짙어졌다.

“없는 소리를 해서 돈 좀 벌어보려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충고하는 거요. 실력이 부족한 작자가 1나노미터 삐끗하면 기억이 반씩 줄어든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게다가 가만히 보관만 하고 있어도 미세 진동이 영향을 주니까 6개월 안에는 결판을 내야 가망이 있겠고……. 알아듣겠소? 여기서 이 짓만 30년 하면서 바닷물에서 건진 로봇까지 복원하는 내가 바로 적임자요.”

그녀는 오래 기다린 순간을 맞이한 듯이 웃으며 덧붙였다.

“사랑하는 이를 구하는 일에 타협을 할 생각이신가?”

마음이 쇳소리를 내며 꺾일 것 같았다. 사장은 모두 알고 있었다. 마스크 너머로도 얼굴을 완전히 인식하는 것인지 알파 베이츠의 연락을 받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느쪽이든 가능했다. 애초부터 나는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 같은 상황이었는데, 혼자서만 모르고 있었다. 수치스럽고 화가 났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나는 관성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물었다.

“얼마가 들겠습니까?”

사장은 행복한 듯 웃었다.

“재방문 고객이니 단돈 1억 4천만 원에 해드리지.”


이제야 알파 베이츠가 내게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나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나를 어떻게 굴려서든 유용한 희귀종이라는 말을 자기 통제 하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 단말을 안겨줘서 세뇌하고 포섭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거부하자 납치와 해킹을 택하게 만들어 중범죄자로 낙인 찍고 평생을 부려먹으려 했고, 그에 실패하니 이번에는 거액의 빚을 지게 하려는 작전으로 바꾼 것이리라. 여기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서고 싶어도 내가 책임져야 할 잘못의 결과로 해체된 도현을 모른척하고 다른 선택지를 고른다는 것은 도현을 사랑한 시간이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자율생활을 통해 방역 유지군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1억 4천만 원은 사람이 이런저런 수단을 다 동원한다면 마련하지 못할 금액은 아니지만, 주어진 시간이 6개월뿐이니 어쩔 수 없었다. 도박을 하면 도박을 하는 대로 망할 게 분명하고, 사채를 쓰면 사채를 쓰는 대로 도현과 함께 불법적 착취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에 비하면 국제적으로 합법적인 군대에 잠깐 들어가는 건 얼마나 합리적인 일인가. 한동안 알파 베이츠의 통제 하에 놓이는 게 영원한 패배와 굴종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니 받아들여야만 했다.

다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백신을 맞으러 가봤자 나는 특이 신체 조직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거절당할 운명이다. 게다가 이 상태 그대로 날뛰어 악마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집에 돌아온 나는 곧장 화장실에 들어가 톱으로 날개를 뿌리부터 뜯어냈다. 흔히 미디어에서 고문 중의 고문으로 손발톱이나 생니를 뽑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건 그보다 끔찍했다. 톱날 하나하나가 신경을 갉아낼 때마다 어깨부터 척추까지 뜨거운 꼬챙이를 박고 휘젓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몸도 건강히 유지하고 자유로운 의지로 돈도 벌며 온전한 도현과 다시 산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게다가 알파 베이츠에게 엿을 먹일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해야 했다.
날개를 네 장 다 뜯어낸 나는 보건소로 직행했다. 이제 아무 문제 없이 백신을 맞을 수 있을 테고, 몇 달만 효율적으로 살고 나면 도현과 행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암담한 시간의 그림자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미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유로운 사랑과 행복을 향해 걸으며, 나는 뜨거운 희망이 꿈결처럼 온몸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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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중편 가라 자유여 은빛 날개를 달고 이건해 2023.08.30 0
230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6 (完) scholasty 2023.04.12 0
229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5 scholasty 2023.04.12 0
228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4 scholasty 2023.04.08 0
227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3 scholasty 2023.04.06 0
226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2 scholasty 2023.04.05 0
225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 1 scholasty 2023.04.05 0
224 중편 반짝임에 이르는 병 이멍 2022.02.18 7
223 중편 얼음뿔 의심주의자 2021.12.22 0
222 중편 조심도(鳥深島)에서: 재회 (하) 진정현 2021.11.10 1
221 중편 조심도(鳥深島)에서: 재회 (상) 진정현 2021.11.10 1
220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완 키미기미 2021.10.31 0
219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10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8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9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7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8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6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7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5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6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4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5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3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4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2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3장 키미기미 2021.10.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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