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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당신이 남긴 말 - 10장

2021.10.31 02:1510.31

창가로 빗줄기가 채찍질을 가한다. 바람이 크게 요동쳤고 마을 내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었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커다란 폭풍우가 마을을 직격할 것이라 떠들고, 통보하였다. 동준이는 창가로 바다만을 노려보았다. 자는 사이 누나가 사라졌다. 다시 바다로 돌아간 걸까.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왠지 더 이상 누나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준은 발가락을 꼬물대었다.

 

 

여보, 응, 지금?

너무 위험하잖아!

 

 

폭풍우가 코앞까지 다가온다. 할머니는 티비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셨고 엄마는 전화로 성난 목소리를 내고 계셨다. 동준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누나에게 알려줄 것이 있었는데.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할머니가 내쫓은 걸까, 싶어 티비방으로 몰래 몸을 바싹 붙여보았지만 바다 냄새만 잔뜩 나고 물어볼 엄두는 역시 나지 않았다. 동준은 숨을 내쉬었다.

 

 

준아, 아빠가 오는 중이라는데,

길이 폭풍우에 덮여 애를 먹는다는구나.

잠시 할머니랑 같이 있을 수 있겠니?

 

 

엄마가 우산과 비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동준이가 불안한 눈으로 엄마를 좆지만 따라가지 못한다. 바람과 빗물에 날려 깡통과 표지판들이 마구 거리를 나뒹굴었다. 창으로 엄마가 보인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비옷이 날개를 펼치고서 푸드덕거리고 있다.

 

 

따르릉.

 

 

집 전화가 울린다. 동준이는 전화를 집어 들었다. 하람이와 은령이의 목소리가 반갑게 번진다.

 

 

부모님이 영이네 삼촌이랑 같이 있으랬어.

은령이네 삼촌 집이 더 높이 있거든.

 

 

하람이랑 있어 , 쭈나!

너도 와!

 

 

으응.....

 

 

걱정이 담긴 동준이의 대답에 하람이가 위로하였다.

 

 

걱정 마, 준아.

이번 폭풍우는 금방 사라질 거래.

 

 

맞아, 그리고 매년 찾아왔대.

할머니가 그랬어!

 

 

동준이가 빈 소파를 돌아본다. 준이는 말없이 서있기만 하였다. 하람이가 힘 있는 말투로 소리친다.

 

 

누나는 돌아올 거야!

 

 

맞아!

아니면 우리가 찾으러 가자!

 

 

은령이 말이 맞아.

이번 폭풍우가 그치면 다 같이 찾으러 가는 거야!

 

 

두 사람의 응원에 동준이가 기운을 차린다.

 

 

응!

 

 

그리고 멀리, 창으로 보이는 마을의 해안도로가 거대한 파도에 집어 삼켜진다.

 

 

 

 

 

 

 

동준이가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곤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엄마의 비명소리 뿐이었다. 절규를 하듯 소리치는 엄마를 붙잡고서 장정들이 안간힘을 다 해 말리고 있다.

 

 

아빠, 아빠는?

 

 

동준이와 할머니를 찾아온 사람은 마을의 이장님이었다. 해안도로가 갑자기 파도에 휩쓸렸고 거기엔 준이의 아빠도 끼어 있었다. 엄마가 주저앉는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해변에 모여 있었다. 모두들 패닉에 빠져 허우적대고 손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바람을 가리키기도 했었다. 동준이는 무섭고 두려워 할머니의 소매만을 붙잡았다. 할머니는 입술을 물고서 바다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동준이는 기도했다. 쓰러져 울고 있는 엄마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 제발.

 

 

뭣들 하고 있어!

 

 

노인 하나가 역정을 내며 밧줄과 배를 몰고 온다.

 

 

사람이 빠졌어.

구해야 하지 않겠나!

 

 

동준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저번 낮에 본 화를 내던 할아버지였다. 그의 옆으로 자신을 파출소까지 대려다 준 자상한 할아버지도 있었다.

 

 

자네, 대체 어쩌려는 셈이야!

 

 

구명조끼를 잔뜩 걸어 그걸 바다로 던지는 거야!

 

 

그냥 구조대원들을 기다려!

 

 

언제 올 줄 알고!

 

 

할아버지의 곁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붙잡고 말린다. 이 날씨에 바다로 나간다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할아버지는 파도 속을 가리켰다.

 

 

내가 저기서 자동차 한 대를 봤어.

갈고리를 걸어 건져 올릴 수 있을 거야!

 

 

연신 고함을 지르는 할아버지를 향해 자상한 노인이 면박을 주었다.

 

 

자네, 현숙이 앞이라고 너무 들뜬 거 아냐?

 

 

역정이 더욱 커진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모두가 난색을 표하는 그때, 동준이의 엄마가 노인의 밧줄을 어깨로 걸친다.

 

 

남편을 구해야 해요, 어서!

 

 

비바람이 섞여 목소리도 묻히는 날씨에서 엄마는 노인에게 허리를 숙여 부탁하였다.

 

 

같이 구하러 가주세요!

 

 

노인이 다시 역정을 낸다.

 

 

뭣들 하는 게야!

어서 구해야지 다들 서둘러!

 

 

사람들이 노인의 배를 바다로 밀어 올린다.

 

 

잠시 기다려!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지아 누나가 사람들을 앞을 막아섰다. 그녀가 소리 지른다.

 

 

이대로 그냥 나가면 배까지 침몰할 거예요!

 

 

그럼 어쩌자는 거야!

 

 

지욱 씨의 배와 할아버지의 배를 묶읍시다.

지욱 씨의 배가 해변에 남아 버텨줄 거예요!

 

 

지욱 삼촌이 급히 자신의 배를 끌고 온다. 커다란 덤프트럭이 해변의 가로 주차되어 있었다. 그가 운전을 해오자 지아 누나는 능수능란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아 밧줄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욱 삼촌의 덤프트럭과 배에 밧줄을 묶고 노인의 배에 연결한다. 그리고 어망을 길게 늘어뜨려 갈고리들을 건다.

 

 

준비 됐어!

 

 

시간이 얼마 없어!

 

 

동준이의 엄마를 태운 노인의 배가 다시 휘영청 바다로 나간다. 파도가 그들을 덮치고 바람이 소리를 잘게 찢어 놓았다. 파도 속에 잠기어 있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물살을 견디며 깜빡거린다. 노인의 배가 기적적으로 자동차 근처까지 닿는다. 배에 타고 있던 어부들이 어망을 던져 자동차에 갈고리가 걸리도록 갖은 애를 썼다. 해변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소리 지른다.

 

 

던져!

 

 

그를 구해!

 

 

할 수 있다!

 

 

어부들이 다시 한 번 세차게 어망을 던진다. 갈고리들이 자동차의 보닛에 맞아 튕겨져 나간다.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쓴다. 어부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소리를 모은다.

 

 

던져!

 

 

갈고리 몇 개가 자동차의 바퀴에 걸린다. 어부들이 해변을 향해 소리 지른다. 지아 누나가 사람들에게로 소리 쳤다.

 

 

배가 돌아와야 해요!

다들 밧줄을 당겨요!

 

 

지욱 삼촌이 덤프트럭을 반대 방향으로 몰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밧줄로 달려들어 힘을 주었다.

 

 

더 힘껏 당겨요, 어서!

 

 

배가 파도에 집어 삼켜져 반대로 뒤집히고 만다. 아연한 얼굴의 사람들에게로 지아 누나가 화를 내었다.

 

 

어서, 당겨요.

시간이 없어요!

 

 

으랏차, 으랏차!

 

 

기합 소리가 천둥을 가른다. 온 마을 사람들의 고함이 기적 소리가 되어 하늘을 찌른다. 폭풍우가 더욱 세차게 몰아치고 배가 완전히 파도에 잠긴다. 밧줄을 끌던 이들도, 기합을 넣던 이들도, 지욱 삼촌이 몰던 덤프트럭도, 기력을 잃는다.

 

 

촤악!

 

 

거친 물살을 가르며 검은 형체 하나가 익사자를 구해낸다. 어부 하나를 건져 올린 그것은 곧 수십이 되어 배에서 빠진 이들을 거침없이 구해내기 시작하였다. 해변의 가로 바다에 허우적대었던 이들이 콜록댄다. 지아 누나가 먼저 달려들어 제 옷을 벗어 감싼다.

 

 

어서 도와요, 다들!

 

 

온 마을 사람들이 제 옷을 벗고, 수건들을 가져오고, 물병을 소란스럽게 가지고 온다. 그 검은 형체들은 바다에 갇힌 이들을 건져 해변으로 돌려보내었다. 완전히 잠기어 버린 고철 덩어리를 열어젖혀 안에든 동준이의 아빠 역시 건져 올린다. 해변으로 올라온 그것에게로 준이가 다가간다. 까만 머리칼과 백옥의 피부.

 

 

누나.

 

 

누나는 아직 사람의 몸이었다. 하지만 몸의 많은 부분이 거품으로 지워져 곳곳이 비어있었다. 누나가 동준이의 아빠를 내려놓고서 준이를 쓰다듬는다.

 

 

미안해, 준아.

꼭 같이 있고 싶었는데.

 

 

누나, 누나.

 

 

동준이가 누나의 다리에 매달린다. 현숙도 그녀를 알고 다가온다. 현숙를 보고서 누나는 살며시 웃어보였다.

 

 

또 작별이네.

 

 

인어의 저주 때문인 거야?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세상에 인어의 저주 같은 건 없어.

인어가 동화 속 존재인 것처럼.

 

 

그럼.

 

 

현숙이 누나의 거품들을 가리켰다. 누나는 진이 빠진 얼굴을 하였다.

 

 

인어는 계속 인어인 채로 살아야 해.

만약 인간이 되면 오래 살지 못하거든.

 

 

이대로 사라지는 거야?

 

 

아마도.

 

 

누나를 따라온 수이 많은 인어들이 바다에 빠진 이들을 건져 올리고,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 옷을 덥히고 따뜻한 물을 먹인다. 누나는 제 다리에 매달린 동준이에게 무릎을 굽혀 꼭 껴안았다.

 

 

준이 덕분에 상혁이를 많이 알게 되었어.

정말 고마워.

 

 

누나, 누나 죽는 거야?

 

 

작게 미소를 지으며 누나가 고개를 젓는다.

 

 

난 바다의 일부가 되는 거야.

마치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야.

 

 

사람들을 전부 구한 인어들이 파도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누나는 준이를 놓아 바다로 돌아간다.

 

 

누나, 누나!

 

 

현숙이 준이를 붙잡았다. 누나가 둘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아주, 아주 밝은 웃음을.

 

 

꼭 행복하게 살아줘.

이곳에서 계속 보고 있을 테니까.

부탁할게.

 

 

목소리가 완전히 돌아온 누나의 말은 아름다웠고, 잊기 힘들 정도로 구슬펐다. 바다 속으로, 폭풍우가 치는 어둠으로, 그 모든 소란이 잠들 만큼 어여뻤다. 온 세상과 마을을 어지럽게 했던 폭풍우는 소나기가 지나듯 그치었고 말간 하늘을 비추었다. 동준이의 곁으로 엄마와 아빠, 둘 모두 모래사장에 쓰러져 기침을 콜록거렸다.

 

 

바다로 돌아가던 그 인어는, 누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바랐다. 곧 상혁이를 볼 수 있겠지, 하고 바랐다. 그녀의 거품이 바다 속에서 완전히 흩어져 자취를 감춘다. 밝은 하늘이 마을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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