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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너는 스노볼 속에

2023.11.25 01:4111.25

란이 몸을 웅크리고 빙글 돌았다. 이리저리 산발하면서도 한 방향으로 흐르는 란의 머리카락에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 해양 다큐멘터리 속 해조류처럼 하느작거리는 머리카락들. 구불구불하고 윤기 넘치는 모습이 언젠가 지구 사진에서 본 강물 같기도 했다. 우리와 똑같은 샴푸를 쓰는데 어쩜 저렇게 머릿결이 좋을까. 한 번만 손으로 쓸어봤으면.

란이 틀어놓은 음악이 점점 빨라졌다. 란은 몸을 조금씩 펴더니 팔다리를 꺾으며 잠시 정지했다가, 음량이 폭발하는 지점에서 벽에 붙은 핸드레일을 도움닫기 삼아 날아올랐다. 아이들이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세찬미르호가 지구를 떠날 때 저런 모습이었을까. 란의 발바닥에서 뿜어 나오는 불길을 본 것만 같았다.

민아, 이런 데서 뭐 하고 있어?

월이 누나였다. 내가 뭘 하는지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누나의 시선은 곧 내가 아닌 란을 향했다. 누나의 표정이 굳었다.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자라면 잘라서 재생기에 넣어야한다는 규칙을 란이 아침식사를 포기하면서까지 어겨서만은 아니었다. 란을 에워싼 무리 중에서 홍이 형을 발견한 탓이었다. 지난주에 월이 누나가 홍이 형과 드잡이했다는 사실을 나는 떠올렸다.

그냥 구경 좀 했어.”

핸드레일을 잡고 몸을 돌렸다. 란이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월이 누나가 바짝 따라붙었다. 누구보다 덩치가 컸지만 동작이 잽싸기로는 빼빼 마른 란 못지않았다.

오늘 발언 기대할게.”

누나는 눈을 찡긋하더니 핸드레일을 힘차게 밀며 나아갔다. 나는 누나의 몸이 둥둥 떠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발언문 작성을 엉망으로 한 탓이었다. 어젯밤에도 란의 머리카락들은 내 망막에 진한 잔상으로 남아 발언문을 작성하는 내내 눈앞에서 하느작거렸다.

 

☆★☆

 

“25천 년 전, 우리 인류는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전쟁, 기아, 질병, 오염……

뻔한 이야기를 읊어대고 있으니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월이 누나와, 이른바 잔존파들이 기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홍이 형을 따르는 분리파들은 여차하면 냉소를 끼얹으려 입술을 실룩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민망하게 하는 것은 유리잔에 담긴 생수처럼 맑은 눈망울로 내 말을 경청하는 란이었다. 란의 머리카락은 막 감고 나온 듯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인류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우리 세찬미르호가 날아올라…… 이제 새로운 고향이자 제2의 고향인 보미나리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의 부모가 그토록 바라던 안정과 행복을……

발언이 끝나고 내려오자 월이 누나가 어깨를 두드렸다. 칭찬의 말들이 귓전을 훑었지만 나는 연단으로 오르는 란의 모습에만 마음이 쏠렸다. 지난달부터 이어진 잔존-분리 찬반 토론에서 란이 발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좋은 말씀 해주신 민에게 감사드립니다.”

란이 나를 향해 꾸벅했다. 나는 얼떨결에 란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란이 날 이렇게 똑바로 쳐다본 적이 있었나? 내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란의 관심을 받을 수가 없나 보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아니, 이런 관심이라도 받은 걸 기뻐해야 하는 걸까.

인류의 존속과 번영, 좋은 얘기죠. 옳은 얘기에요. 하지만 제가 머리가 나빠 그런지 어렵고 복잡하네요. 전 그런 게 싫어요.”

부끄러운 줄 알라는 잔존파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나는 그들에게 입 다물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에요. 전 이곳에서 태어났어요. 세찬미르 안에서요. 이곳이 제 고향이고 여기서 사는 게 익숙하고 좋아요. 보미나리로 내려가면 우린 서지도 못 하고 허리도 못 편다면서요? 중력에 익숙해질 때까지 1년도 넘게 재활훈련을 해야 한다면서요?”

란의 얼굴에 진지한 기운이 감돌았다.

전 춤추는 게 좋아요. 여기서 저는 맘대로 춤출 수 있어요. 하지만 땅에서는, 중력장 안에서는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우리 부모들은 땅을 밟고 춤을 췄어!”

불쑥 외친 사람은 탄이 형이었다. 경이 누나가 허리를 쭉 폈다.

발언 중에 무슨 무례야!”

탄이 형도 몸을 일으켰지만 월이 누나가 말리자 다시 웅크렸다. 150명과 250명이 전부 모여 있는 카페테리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 바닥, 천장 할 것 없이 핸드레일을 붙잡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얼굴들이 엘턴을 바라봤다. 모두가 엘턴의 징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난주에 월이 누나와 홍이 형은 토론 중에 감정이 격해져 치고받고 싸운 바람에 각자의 방에 감금됐다. 전체 인구의 8분의 1이 떠나겠다고 들고 일어선 판이었다. 두 사람 다 이런 시국에 갇혀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엘턴의 용서를 받기 위해 그 둘은 스스로와 각자의 친구들을 잘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200KB 넘게 써야 했다.

재활훈련이 끝나면 우리는 기지를 확장하는 고된 노동에 투입되겠죠. 저는 춤출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거예요. 춤출 시간이 없을 테니까요. 전부가 우리 부모들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죠.”

란은 잠시 머뭇대더니 홍이 형이 헛기침을 하자 말을 이었다.

저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 부모가 누구죠? 우리가 이곳에 냉동 배아 상태로 실렸을 때 그 배아의 원료가 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난자와 정자의 주인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우릴 보살피고 가르친 엘턴을 말하는 건가요? 엘턴은 춤출 몸이 없지 않나요? , 세찬미르가 엘턴의 몸이죠. 하지만 세찬미르는 땅을 디뎌본 적이 없어요.”

저건 홍이 형이 알려준 말이군. 나는 연단 구석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홀로그램의 형태로 토론을 지켜보는 엘턴을 힐끗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글거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 하는 것은 잔존파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씀드릴게요. 진이 대신 말해달라고 한 건데요.”

란이 착착 접힌 스마트패드를 꺼내 펼쳤다. 분리파에 속해 있던 여자 아이 하나가 벌게진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진이었다.

재활훈련 받고 나면 우린 걷고 일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을 해야 해요. 아기를 낳는 거죠. 달걀부화기처럼 말이에요. 우리에겐 배양기가 있어요. 그걸 왜 이용하지 말자는 거죠?”

란은 스마트패드를 다시 접어 집어넣었다.

말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잔존파의 야유와 분리파의 성원 속에서 엘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보미나리에 내려가면 세찬미르가 기지 건설에 이용될 거라는 사실을 지난 학기에 배웠습니다.”

진이 당황하더니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엘턴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배양기는 우리가 싣고 온 가축들의 배아를 키우는 데에 쓰일 겁니다. 여러분이 먹고 싶어 하는 진짜 치킨과 진짜 스테이크를 안겨줄 닭과 소 같은 것들 말입니다. 개체 수가 확보되면 배양기는 분해돼서 기지 확장에 이용됩니다.”

엘턴은 연단 중앙으로 순간이동했다.

여러분, 단지 그 때문에 잔존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배양기 일부를 여러분의 후손을 키우는데 할당할 것을 적극 검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하나는 배양기보다 소중하니까요.”

과연 그럴까. 분리파가 정말로 분리되면 짊어지고 나갈 기계 장치와 자원들이 아까운 게 아닐까. 사람이야 모자라면 낳으면 그만이다. 기계 장치는 그렇지 않다. 부모가 만들어준 이 물건들을 똑같이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직 없다.

진은 엘턴의 계산을 모르는 듯 했다. 옆에 앉은 친구와 환한 시선을 나누더니 홍이 형이 눈을 부라리자 고개를 떨궜다. 그걸 놓치지 않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월이 누나는 진과 진의 친구가 잔존파로 넘어올 때까지 설득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나가 성공할 것을 알고 있었다.

 

☆★☆

 

테라포밍학 수업이 끝나고 복도로 나오자 월이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양자역학 수업이 한창일 텐데 무슨 일일까. 1기들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인데.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수업을 땡땡이 치고? 엘턴에게 무슨 경고를 들으려고?

인트라넷을 뒤지다 영화를 하나 찾았는데 너무 재밌어서 혼자 보기 아깝더라고.”

영화라는 말에 나를 비롯한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오늘 저녁에는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건가. 왜 우리가 고향을 떠나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루하고 처참한 장면으로 범벅된 영상물을 말이다.

카페테리아 내부 스크린에 상영된 것은 20세기 소녀라는 제목의 21세기 영화였다. 제작된 것은 무려 250세기 전이지만 세찬미르호가 날아오는 내내 우리가 냉동 배아 상태였다는 걸 감안하면 1세기 전 영화라고도 볼 수 있었다. 대사를 알아듣기 조금 힘들었지만 자막과 함께 보니 다 알아듣는 것만 같은 착각에 금방 빠졌다. 내가 빨고 있는 튜브 속 음식의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 할 정도로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우리 선조들이 비참하게만 살았던 건 아니었다.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일을 하고 다양한 고민을 하며 살았다. 나도 저때 저곳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생각하다 결말을 맞이하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떠난 사랑. 다시 만나자는 약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설레는 마음. 뜸해지는 연락. 그가 연락할 수 없었던 건…….

어떤 아이들은 소리 내어 울었다. 나와 다른 아이들은 목이 메어서 말도 못 하고 음식도 삼키지 못 했다. 누나가 미웠다. 이 영화를 왜 보여주는지 뻔해서. 그리고 고마웠다. 이 영화를 보게 해줘서.

지금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둘은 있을 거야.”

누나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연기인 걸까, 진심인 걸까.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생각이 금세 들었다. 난 누나한테 설득돼 버렸는걸.

우린 한 배에서 태어났어.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나 마찬가지지. 배에 실리면서부터 우린 소중한 사람을 잃었어. 우리 부모들은 눈물을 머금고 우리를 이 배에 실었지. 우리가 가진 건 서로가 전부야. 그런데 우리가 또 누군가를 잃어야 할까?”

카페테리아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도 그 바다에 한 줌의 눈물을 보태고 있었다. 눈물 속에서 란을 찾았다. 란이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란은 지금 누구를 떠올리고 있을까.

그때 문이 열리며 홍이 형이 들이닥쳤다. ‘월이 너, 이게 무슨 수작이야!’라고 외치기 직전의 표정으로. 하지만 형은 하나같이 울고 있는 우리 모습에 당황하기만 했다.

월이 너, 아프다는 게 진짜였어?”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1기 선배들이 속속들이 몰려들었다. 양자역학 수업이 끝나고 저녁을 먹으러 온 것이었다. 월이 누나는 언제 슬퍼했냐는 듯 환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옛날 영화를 찾아냈어. 진짜 재밌는데 같이 볼래?”

이 모든 게 월이 누나와 엘턴의 합동작전이었음을 깨달았다. 방금 먹은 저녁이 튜브 속 음식을 짜낼 때처럼 식도를 거슬러 올라왔다. 나는 재빨리 카페테리아를 빠져나왔다.

 

☆★☆

 

이제는 일대일 공략이다.”

월이 누나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한 말이었다.

네가 란이를 맡아.”

그렇게 뻔했나? 당황스러운 나머지 안 해도 될 말이 나가버렸다.

일대일이 아닐 텐데.”

너한테만큼은 일대일이지. 찬이랑 준이랑 다 같이 몰려 갈 건 아니잖아.”

우리의 순정이 그저 플랜A, 플랜B, 플랜C로밖에 안 보이는 거야? 누나의 싱글거리는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물론 누나는 내가 주먹을 뻗자마자 그걸 으스러뜨려 버리겠지만.

누나는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홍이 형이 부른다며 나가 버렸다. 멍하니 문만 바라보는데, 4기 아이들이 한 무리 찾아와 산수 숙제를 도와달라고 졸랐다.

배양기에서 나온 지 5년밖에 안 된 동생들. 귀여운 마음에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아이들이 부러웠다. 너희가 갖고 있는 고민이란 숙제를 끝내면 뭘 하고 놀아야 할까 정도겠지. 언니오빠들이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먼 훗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한때의 꿈처럼 여겨질 거야.

가슴이 답답해졌다. 분리파를 새로 이끌게 된 경이 누나와 누나의 남자친구 혁이 형이 떠올랐다. 자신들을 따르는 3, 4기 아이들까지 끌고 나가겠다고 우기는 두 사람. 홍이 형이 분리파에 남아 있었더라면 경이 누나가 저런 생각을 못 하게 막았을 텐데. 쓸데없는 걱정이다. 월이 누나는 도리어 아이들을 이용해 경이 누나와 혁이 형을 설득할 거다.

월이 누나와 엘턴이 20세기 소녀를 보고 잔존파가 오히려 분리파로 넘어가버릴 것을 걱정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나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영화 속 배경은 광활하고 서정적이고 다채로웠다. 보미나리를 지구처럼 바꾸고 마을과 도시를 지으면 우리도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지. 이 좁고 삭막한 우주선 안에서는 영화 같은 로맨스를 펼칠 수 없었다.

많은 아이들이 그걸 깨달은 게 틀림없었다. 이제 분리파는 전체 인구의 20분의 1인 열 명으로 줄어들었다. 란은 여전히 그 열 명에 속해 있었다. 홍이 형마저 잔존파로 넘어왔는데도.

이제 월이 누나와 홍이 형은 딱 붙어 다닌다. 핸드레일을 잡아야 하는 것만 아니면 팔짱을 끼고 다녔을 것이다. 월이 누나가 홍이 형에게 웃음 짓는 걸 볼 때마다 가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배가 아프기도 했다.

나는 태어난 지 15년이 되는 지금까지 란과 얘기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애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먼발치에서 바라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까딱 잘못하면 영영 헤어지게 됐다. 그러고 싶지 않으면 보미나리로 함께 내려가자고 설득해야 한다. 그 애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팔딱대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머릿속은 텅 비고 입은 굳어버린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잘생김으로는 준이를 따라갈 수 없고 말재주로는 찬이를 이길 수가 없었다. 고작 생각해낸 거라곤 일주일 뒤가 우리 2기들의 생일이라는 사실. 나는 그저 내가 잘 하는 걸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

 

란이 걔 좀 돈 거 같더라.”

아님 멍청이든가. 어떻게 혼자 떠날 생각을 하냐고.”

머리 나쁘단 말이 진짜였나.”

맨날 뱅글뱅글 돌아서 그래.”

준과 찬이 방 안을 떠다니는 채로 튜브를 빨며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녀석들이 왜 이렇게 툴툴대는지 알면서도 기쁘지 않았다. 준과 찬이 번갈아가며 란을 유혹하는 시도는 실패했다. 란은 꿈꾸고 있는 안무가 있는데 그걸 완성하는 게 자기 인생 최대의 과업이라고 했다. 그건 무중력에서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보미나리로 내려갈 수 없다고.

민아, 언제 끝나?”

투명 구에 물을 막 채운 참이었다. 나는 마개를 단단히 닫고 실리콘으로 그 주변을 꼼꼼히 발랐다. 실리콘이 다 마른 것을 확인한 뒤 살짝 흔든 다음 뒤집자 구 안에서 란을 닮은 피규어가 팔과 다리와 머리카락을 하느작거리고 그 주변을 무수한 글리터가 떠다녔다. 구는 사람 머리만 했다. 내가 일주일 치의 저녁을 반납하고 허락받은 재료들로 만든 스노볼이었다. 지금도 내 뱃속에서는 천둥이 치고 있었다.

이야, 멋진데! 역시 민이 너는!”

란이 운명이 너한테 달려 있다.”

나는 스노볼을 소중히 들고, 찬과 준은 그런 나를 끌고 란의 방으로 갔다. 인터폰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란의 룸메이트 진이 튀어나오더니 내 손에 들린 스노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는 찬과 준과 함께 엄지를 척 들어보이고는 복도 끝으로 둥둥 떠갔다. 나는 그 애들을 따라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란이 내 손목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거 뭐야? 나 주려고 가져온 거지? 어디 좀 봐봐.”

란은 스노볼을 빼앗다시피 해서 가져가서는 이리저리 흔들다가 코를 박고 안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했다.

너 손재주 좋은 거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정말 나랑 똑같은데?”

고마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손재주 좋은 걸 알고 있었다니!

이 피규어 어떻게 만든 거야?”

“3D 프린터로 뽑았어. ABS수지야.”

란을 꼭 닮은 설계도를 그리느라 며칠 밤을 꼬박 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안에 든 건 물인가?”

. 글리세린 섞은 거야.”

반짝거리는 건?”

거울 부숴서 만들었어.”

너 손 괜찮아?”

란은 스노볼을 놓더니 내 두 손을 쥐고 살펴봤다. 물론 밀폐 후드 속에서 장갑을 끼고 작업했기에 상처 따위는 없었다. 나는 황홀하면서도 민망한 마음을 달래려 불쑥 말했다.

생일 축하해.”

나도.”

란은 두리번거리더니 책상 위에 붙여둔 튜브를 떼어냈다.

이건 내가 주는 선물.”

내가 싫어하는 연어시저샐러드였다. 하지만 배가 너무 고팠기에 얼른 뜯어서 빨아먹었다. 그동안 란은 스노볼을 잡아채서 들여다봤다. 내가 란의 저녁을 먹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벽에 부착된 재생기 투입구에 빈 튜브를 집어넣은 후였다. 내일 배급되는 아침식사를 란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란이 고개를 들었다.

너도 내가 미친 것 같아?”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꿈꾸는 안무가 뭔지 궁금해. 꼭 보고 싶어.”

그럼 같이 가자.”

그래 좋아, 하고 말할 뻔 했지만 또 고개를 저었다.

나도 하고 싶은 게 있어. 보미나리에서만 할 수 있는 거야.”

엘턴은 건축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내 말에 그 경력의 시작으로 기지의 확장 구역 중 한 곳을 내게 맡기겠다고 했다. 나는 놀이터를 만들 생각이었다. 우리 모두 안전하고 즐겁게 뛰어 놀 수 있는 곳.

그게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거라는 걸 어떻게 확신해?”

내가 하고 싶으니까.”

란이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묻는지 알아. 나도 고민해본 거고.”

란이 고개를 돌려 현창을 내다봤다. 내가 뭐 하러 왔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언제나 내 혀를 굳어버리게 만드는 그 아이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 탓에 나는 준비해 온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주어진건지, ‘생겨난건지 넌 따지고 싶겠지. 처음에 분리파가 들고 일어섰을 때는 너희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고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어. 내가 부모들에게 세뇌당한 바보인 것만 같아서. 하지만 잠을 설쳐가며 생각해 봐도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거야. 난 이곳이 단조롭고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어. 똑같은 모양의 복도, 똑같은 색깔의 벽과 천장. 옛날 영화를 보고 판타지에 사로잡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그래, 나 같은 인간도 있는 거야. 네가 지구에서 태어났으면 훌륭한 무용가라고 칭찬하지 미쳤다고 비웃는 사람은 없었을 거야. 다만 우리가 우주선에서 태어났다는 것, 애초에 갈 곳이 정해진 존재였다는 것이 문제였어.”

란은 스노볼을 끌어안은 채 귀를 기울였다. 방을 밝힌 불빛 때문에 현창 밖의 별들은 보이지 않았다. 란의 핼쑥한 얼굴만 희미하게 비칠 뿐이었다.

란아, 인공위성에서 살면 안 돼? 보미나리 주변을 돌면서 말이야. 굳이 계속 날아갈 필요가 없지 않아?”

“24시간 내내 보미나리가 눈앞에 있다면 포기하고 싶어질 거야. 난 이걸 완성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없어.”

란의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였다. 이래서 애들이 미쳤다고 한 거구나. 란이 나와 엄청나게 다른 존재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와 똑같다는 생각이 이내 들었다. 반대의 상상을 한 덕분이었다. 우리가 우주를 맴돌며 살도록 돼 있었는데 마침 괜찮은 행성 근처를 날게 됐다면 나는 그곳에 내려가자고, 그러지 않으면 나 혼자서라도 내려갈 거라고 우겼을 지도 몰랐다.

란아, 응원할게.”

나를 향한 란의 눈망울이 놀라움과 환희와 감사로 빛났다.

우리 연락하고 지내자.”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말했다. 란이 다가와 나를 안았다. 나는 그 아이의 숨결과 흐느낌과 따뜻함을 고스란히 느끼다 방을 빠져나왔다. 보미나리에서는 스노볼 속 글리터가 바닥으로 내려앉는 걸 볼 수 있을 거란 말은 하지도 못 한 채.

 

☆★☆

 

, 생존에 필요한 것들만 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치품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똥 한 덩어리조차 소중한 자원입니다.”

엘턴이 스노볼을 가리키자 란은 그걸 꼭 끌어안았다.

생일 선물로 받은 거예요.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당장 재생기에 집어넣으십시오.”

엘턴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나는 엘턴도 화를 낼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게 무섭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보미나르 착륙 보름 전이자 란이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란이 타고 떠날 우주선이 준비됐다. 엘턴은 탈출선을 하나 골라 생존유지장치를 보강하고 란의 예상 수명을 계산한 다음 그동안 소비될 보급품을 실었다. 란은 그 배를 광년호라고 이름 지었다. ‘光年이 아닌 ’.

광년호가 떠날 시각과 그것이 떨어져 나갈 경우 줄어들 세찬미르의 중량을 감안해 세찬미르호의 착륙 경로도 수정되었다. 저 스노볼은 엘턴이 계산한 중량에 포함되지 않았다. 똥조차 귀중하다는 말은 진실 중의 진실이었다. 보미나리에 내려가더라도 당장 자원을 채굴하긴 힘들었다. 배양기에선 5기 아기들이 곧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면 되겠죠?”

란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전부 밀어버린 다음 재생기에 집어넣었다. 민머리가 된 란은 더욱 앙상해 보였다.

모자랍니다.”

엘턴의 말에 란은 샴푸와 비누를 가져왔다.

당분간 머리 감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냄새 난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요.”

엘턴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란은 떠났다. 테라포밍은 비윤리적이라며 죽을 때까지 우주를 떠돌겠다던 경이 누나와, 함께 우주를 떠돌며 평생 글만 쓰겠다던 혁이 형도 란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뒤늦게 재생기 투입구를 뒤져 란의 머리카락을 한 올 찾아냈다. 언제나 느려터진 나에게도 이 정도 행운은 있었다.

 

☆★☆

 

, 축하합니다. 정말 멋진 곳이에요.”

내 나이 예순다섯. 주름이 얼굴을 뒤덮고 머리는 백발이 되었지만 엘턴은 내가 어릴 적에 처음 인식한 모습 그대로였다.

오늘은 내가 지은 놀이공원 크레이지라니월드의 개장일. 즐거움 가득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투명 돔 천장에 닿을 듯이 솟구쳤다 떨어지는 롤러코스터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나는 롤러코스터가 급회전할 때 어느 젊은 여자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모습을 보며 란을 떠올렸다.

고맙습니다. 다 엘턴 덕분이에요.”

란에게서 소식은 없습니까?”

아직은요.”

9년 전에 받은 것이 마지막이다. 란과 나는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내가 보낸 전파가 광년호에 도달하고 란이 보낸 전파가 보미나리로 날아오는 데에 몇 초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시간은 점차 길어져 몇 분, 몇 시간, 며칠, 몇 주가 되었다. 9년 전에 받은 소식은 내가 전파를 보낸 지 무려 5년 만에 받은 것이었다. 란이 최대한 빨리 답장을 보낸 것임을 알면서도 초조해졌다. 지금 내가 보내는 전파는 언제쯤 란에게 닿을까. 화면 속 란은 나처럼 늙어가고 있었다.

외롭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아. 너와 얘기할 수 있어서인 것 같아.”

나는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란이 그 말을 언제 듣게 될지, 아니 듣게는 될지 알지도 못 한 채로.

란은 여전히 안무를 연구 중이라고 했다. 자신이 꿈꾸는 것에 근접했다며 보여준 영상들은 정말 놀라웠다. 란은 한 마리의 문어 같기도 했고, 백만 마리의 나비 떼 같기도 했다. 기다란 머리카락은 중간부터 뿌리까지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런 머리카락들이 하느작거리자 마치 한 편의 미술작품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가 란이 커다란 스노볼 속에 들어가 있는 피규어인 것 같은 오묘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란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연했다. 오히려 더 유연해진 것 같았다. 관절염 같은 건 없다고 했다. 중력이 없으니까. 작년에 인공 연골을 무릎에 넣은 나는 부럽다는 멘트를 남겼다.

란이 그 말을 들을 때쯤이면 난 재수술을 몇 번 더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폐에 생겼다는 종양이 온몸으로 퍼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 있을지도. 그렇다 하더라도 아쉬울 것 없는 인생이다. 나는 내 꿈을 이뤘고, 란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겠다는 소원도 이뤘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내가 란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경우 란이 느낄 상실과 고독, 우울이었다.

엘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죽여 달라는 것만 빼면 뭐든지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반대입니다, 엘턴. 제가 계속 살게 해 주십시오.”

엘턴은 그러겠다고 했다. 내가 란보다 먼저 죽으면 내 모습으로 변해 란에게 답장을 보내주겠다고.

고맙습니다. 맘이 놓이네요. 그럼 이제 놀아봐야겠습니다.”

손자손녀들이 불러대던 참이었다. 엄마아빠도 아니고 할아버지와 함께 회전목마를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이 그 모습을 찍으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은 뒤 앙증맞은 손을 꼭 잡고 회전목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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