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예언을 따르지 않고

2023.09.03 01:2809.03

말은 병들어 보였다. 말라도 너무 말랐다. 갈빗대가 드러나 보일 만큼. 금방이라도 쓰러져 네 다리를 하늘을 향해 뻗고 하얀 거품을 물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말이 낡아빠지고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마차를 끌고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마차에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내가 동물애호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정심마저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저 불쌍한 말이 내 말이 아니고 이 낡아빠진 마차도 내 것이 아니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그저 내 옆자리에 앉아 병든 말의 등짝에 마구 채찍을 갈기는, 스스로를 대마법사라고 칭하는 저 노인네를 노려보는 수밖에.

“아니 이놈이, 왜 이렇게 굼떠? 빨랑빨랑 달리자. 응?”

자칭 대마법사님께서 다시금 채찍을 휘둘렀다. 내가 볼 때 저 말은 나름대로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살아서 서 있는 게 용했다. 내가 이 말을 처음 봤을 땐 자칭 대마법사님께서 무슨 마법을 걸어서 여태껏 살아 있나 했었다. 그런데 어르고 달래며 채찍만 휘두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런 게 아닌 듯싶었다. 애초에 그런 마법이 있을 리가. 그게 가능했다면-생명 연장의 꿈을 마법이 이루어주었더라면 지금처럼 마법사가 외면 받지는 않았겠지.

삼십 분째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풉. 지나가는 아주머니와 아이가 비웃었다. 어떤 아이가 대뜸 뜀박질을 하더니 마차를 추월했다. 그러고는 배를 잡고 낄낄댔다. 내가 조용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을 교체하거나 그냥 마차를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원형탈모로 가운데 머리가 아주 벗겨진 마법사 노인이 두 눈을 부라렸다.

“말 대여비가 얼마나 비싼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허는 거여? 아주 날강도가 따로 없다니까. 요즘 마차 운임비는 또 얼마나 비싸던지. 십 분 거리에 몇 닢이나 받는 줄 알어? 그리고 내 말이 있고 내 마차가 있는데 왜 헛돈을 쓰냐. 다 먹고 살자고 이 고생하는데 애먼 데 돈 쓰면 안 되지. 암튼 걱정 말어. 시간은 충분허니까.”

아무리 봐도 비렁뱅이에 그렇고 그런, 하찮은 마법사였다. 애초에 기대를 말았어야 했다. 요즘 세상에 대마법사가 어디 있다고.

알면서 난 왜 그랬을까.

내 꼴이 참 말이 아니다.

 

 

 

사연이야 길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이게 다 돈 때문이다.

삼월에 태어난 나는 대예언가 케이의 예언을 따라 모험을 떠났다. 삼월에 태어난 자가 첨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고 세상을 구원하리라. 그땐 그 예언이 나를 위한, 나만을 위한 예언인 줄 알았다. 공주를 구하고 당당히 왕국으로 귀환하리라. 영웅이 되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리라. 삼월에 태어난 누구나 그러하듯이 내게도 그런 당찬 포부가 있었더랬다.

나는 십 년 간 용사로 살았다. 그리고 십 년 간 욕이 늘었다. 용사가 되겠다며 설쳐댔던 나를 더 뜯어말리지 않은-아예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른들을 욕했다. 용사라는 타이틀만 쥐어주고는 나 몰라라 하는 이 나라를 욕했다. 그중에서 대예언자 케이를 가장 많이 욕했다. 아니, 삼월이라고 하면 너무 포괄적이지 않은가. 삼월 첫째 주에 태어난……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냔 말이다. 괜히 사람 착각하게 만들지 말고.

큰바위 마을에서 벌어진 오크 군단과의 전투를 끝으로, 나는 용사 관뒀다. 막상 관두고 나니 할 게 없었다. 농부를 해볼까 하니 땅이 없었다. 대장장이를 해보려고 하니 기술이 없었다. 나이 서른에 경력도 스펙도 없으니 정말이지 할 게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여러모로 궁리를 하다가 나는 장사를 해보기로 했다. 용사 출신이기도 하니 무기에 대해선 제법 안다고 자신했다. 작게, 아주 작게 시작하는 거다. 알뜰살뜰하게 질 좋은 무기를 들여놓자. 나는 돈을 벌어서 좋고, 아직 꿈을 잃지 않은 용사들은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무기를 가질 수 있어서 좋고.

마침 왕국은행에 좋은 대출 상품이 있었다. <용사 출신 전용 디딤돌 창업 대출>이라고, 용사 출신의 재기를 위한 복지 정책성 상품이라나 뭐라나. 나처럼 무일푼이어도 받을 수 있는 상품이었다. 심지어 금리도 낮았다. 하. 그래도 뭐라도 챙겨주긴 하는구나. 왕국에서 아주 내다버린 존재가 용사인 줄 알았는데.

가게 계약금이 필요했고 대장간에서 무기를 납품받기 위한 초기자본이 필요했다. 인테리어는 그냥 셀프로 하고. 아주 작게 시작하는 거였는데 그래도 액수가 꽤 됐다.

“사장님, 괜찮으시겠어요? 사업 초기엔 매출이 안 나올 수 있거든요. 가게가 자리 잡아 단골이 생기고 막 그러는 기간이 적어도 반년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통은 몇 달 간이라도 버틸 수 있는 목돈을 추가로 대출받는데…….”

은행원의 조언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목돈까지 대출받았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용사 생활을 십 년 했으면서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용사들, 돈이 없었다. 왕국에서 나눠주는 싸구려 보급 장검을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쓰는 게 용사들이었다. 나도 그랬다. 나, 바보인가 보다.

매출은 형편없었다. 뭐, 마냥 앉아서 멍이나 때리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장사모>, 그러니까 <장사 잘하는 사장님들의 모임>에 꾸준히 출석하면서 귀동냥을 했다. 거기 사장님들이 전단지가 효과적이라고 해서 전단지를 뿌려보았고, 전단지보다 더 요즘 더 먹히는 게 배달 서비스라고 해서 큰맘 먹고 배달 업체에도 입점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것도 참 바보 같았다. 대체 누가 무기를 배달로 구매한단 말인가. 그땐 혁신적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시대에 누가 무기를 매장에서 구매해? 이제 곧 무기도 배달로 주문하는 시대가 올 거라구!

삼 개월 만에 추가로 대출한 목돈이 바닥났다. 임대료가 밀리기 시작했다. 인상 좋던 건물주 양반, 입이 참 거칠더랬다. 처음엔 아이고 용사님 고생 많으셨습니다요 이제는 이 목 좋은 데에서 꽃길만 걸으셔야지요, 그리 사근사근 말해주던 집주인 양반이 얼굴 표정을 싹 바꾸고는 온갖 육두문자를…….

대출원금도 갚지 못했다. 몇 차례 미납 안내 우편이 날아왔다. 그러더니 미납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은행원이 직접 찾아왔다. 아니, 내가 무슨 흉악 범죄자도 아닌데 웬 장검까지 차고 온 건지.

“<용사 출신 전용 디딤돌 창업 대출>은 아주 파격적인 조건으로 용사 출신 사장님들을 지원해드리지만, 그만큼 미납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국가 세금으로 운영하는 상품이다 보니까……. 아무튼 사장님, 다음 달까지 연달아 미납하시면 신용 등급이 큰 폭으로 하락할 겁니다. 그리고 계속 밀려서 연달아 육 개월 간 연체하시면…… 아시죠? 계약서에 쓰여 있듯이…….”

알고 있었다. 은행원이 또박또박 큰 소리로 읽어줬으니까. 주저하는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 대출, 받았다. 왜냐고? 스펙도 경력도 없던 내가 빌어먹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까지 안 팔릴 줄은 몰랐고.

이 나라, 결코 손해는 안 보는 나라였다. 무일푼 비렁뱅이한테 뜯어먹을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몸뚱이뿐이지. 육 개월 간 상환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노역으로 갚아야 했다.

사실상 가게를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노역에 끌려가면 가게 문을 열 수 없다. 가게 문을 열지 못하니 당연히 장사를 못할 테고 그러면 혹시 있을 손님도 수입도 없다. 그러면 그 다음 달의 대출원금도 노역으로 갚아야 할 테고 계속 노역을 해야 하기에 가게 문은 계속 열 수 없고……. 이대로 왕국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가. 이런 허무한 결말이라니.

그리하여 나는 용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장사모>에서 말도 섞지 말고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했던 바로 그 용.

그래도 신중을 가하고자 했다. 그래, 가장 합리적인 사채를 쓰자. 나는 폐지 상자를 뒤져 전단지를 모아보았다. ‘원하는 대로 무조건 대출 회색 산 검은 용 대출’, ‘급한 불부터 끄고 봐요 불꽃 산 붉은 용 대출’, ‘사장님이 원하면 얼마든지 바다 산 푸른 용 대출’……. 회색 산 검은 용이 열네 장, 불꽃 산 붉은 용이 스물두 장, 바다 산 푸른 용이 열여섯 장…….

전단지를 이렇게 뿌린다는 건 그만큼 돈이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그만큼 많이들 찾는다는 뜻이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사채이지만 개중에서도 그나마 합리적인 사채이기에 그러지 않겠는가.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단지를 뿌리는 데 드는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생각했더라면 결코 불꽃 산 붉은 용은 찾지 않았을 텐데.

나는 불꽃 산으로 향했다. 꼬박 하루가 걸렸다. 불꽃 산은 이름처럼 불꽃으로 휘감겨 있는 산은 아니었고, 오히려 산이라고 부르기 애매하다 싶을 만큼 작은 산이었다. 영세한 용이라지만 그래도 용이 기거하는 산인데, 좀 볼품없지 싶었다.

커다란 간판에는 ‘붉꽃 산 붉은 용 대출’이라고 쓰여 있었다. 군데군데 세워둔 입간판에는 ‘급한 불부터 끄고 봐요’, ‘불보다 뜨겁게, 바로 대출’ 따위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동굴 입구에 웬 빨간 투피스 차림에 머리를 트윈테일로 깜찍하게 묶은 오크가 서 있었다. 내가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근육질의 오크가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불티나는 대출 붉은 용 대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목소리가 걸걸했다. 여자인 건 맞는 걸까.

“너…… 여기 직원인 거야?”

내가 검으로 깜찍하게 단장한 오크를 겨누며 물었다.

“네.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검은 집어넣으시죠.” 그렇게 말하고 작게 속닥거렸다. “한번 해보려면 해보든가.”

“뭐라고?”

“네?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깜찍한 오크가 웃음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작게, 그러나 아주 작지는 않은 말소리로 이렇게 속닥거렸다. “쪼꼬만 게 귀도 밝네. 귀가 참 별미인데 말이야.”

녀석의 안내에 따라 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산 내부를 통째로 긁어낸 듯했다. 불꽃 산은 공갈빵과 같은 모양새였다. 야트막한 산이었지만 그래도 산이었으니, 그만큼 내부가 넓었다.

역사서에 나오는 용은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를 깔아뭉개고 잠들어 있곤 하던데,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는 없었고 용도 잠들어 있지 않았다. 불꽃 산에 자리 잡은 붉은 용이라니까 입에서 불꽃도 나오려나.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불꽃을 내뿜는 용은 상위 레벨에 속하는 용이라고 하니까. 영세한 용이어서 그런지 확실히 용치고는 덩치가 작았다. 그래도 웬만한 집채만 하기는 했다. 그리고 피부색은 붉은 색이 아니라 분홍색에 더 가까웠다. 아무리 높게 쳐도, 핫핑크였다. 핫핑크 용이 커다랗고 두꺼운 안경을 코끝에 걸쳐놓고는 동전을 세고 있었다. 덩치 때문에 동전을 세는 게 아니라 마치 좁쌀을 세는 모양새였다. 천오백이십육 닢, 천오백이십칠 닢…….

“저기……. 붉은 용 님?”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핫핑크 용이 동전 세는 걸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핫핑크 용이 두 눈을 꿈뻑이며 잠시 나를 노려보았다. 고양이 눈처럼 동공이 세로로 길게 쭉 찢어져 있었다.

“아아. 손님이 오신 줄도 몰랐네. 보시다시피 비즈니스가 워낙 바빠서……. 아이고, 잘 오셨습니다. 저기 의자에 앉으시죠. 뭐 마실 거라도 드릴까?”

핫핑크 용이 활짝 웃어 보였다.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는 영세한 용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전설 속의 용처럼 덩치가 크지도 않고 또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 이 작은 용들은 덩치도 작고 능력도 없었지만 전설 속의 용만큼이나 보물 욕심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왕국을 침략해서 금은보화를 차지하기엔 힘도 달리고(워낙 약하게 태어난 용이어서 베테랑 용사 몇십 명이 의기투합한다면 인간 손으로 못 잡을 것도 아니었다) 전설 속의 용에게 눈치도 보였다(어찌어찌해서 빼앗더라도 소문이 나면 큰일이었다. 전설 속의 용이 들이닥쳐서 홀라당 빼앗을 수도 있기 때문에). 흰색 용이라고 했던가 녹색 용이라고 했던가. 흰색인지 녹색인지 아무튼 그런 색의 용이 보물 욕심에 끙끙 앓다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했다. 바로 고리대금업이었다. 그래도 웬만한 인간보다야 돈이 많으니 굴릴 돈도 있었고.

흰색인지 녹색인지 아무튼 그런 색의 용이 고리대금업으로 크게 한탕을 친 이후로 영세한 여러 색의 용들이 이 고리대금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大)대부업 시대가 온 것이다. 경쟁이 치열하니 서비스도 좋아진 것이다. 오크 안내양은 아무래도 직원 교육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지만.

어쨌든 존댓말하며 차를 내다주는 용이라니. 살다보니 용에게 이런 대접도 받아보네. 내가 생각했다. 혹시나 잡아먹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내가 훌륭하게 우려낸 차를 홀짝였다.

“고객님, 입맛에 맞으신가요? 이 차가 왕실에서 그 누구냐, 둘째인가 셋째인가 하는 왕자가 없어서 못 먹는다는 차입니다요.”

“과연 맛이 좋네요.”

“고객님, 그나저나 인상이 너무 좋으시다.”

“그런 소리는 좀 듣죠.”

“그나저나 이렇게 사람 좋게 생긴 분이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대? 아주 긴급한 일이신가? 아무튼 잘 찾아오셨어요. 저희 붉은 용 대출에서 도움 받아서 재기에 성공한 사장님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비단 사장님뿐이겠어요. 남편 몰래 큰돈 쓴 주부들, 이혼 안 당하고 지금껏 잘 먹고 잘 사는 게 바로 저희 붉은 용 대출 때문이라니까요. 그래,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제가 그래도 전문가니까 편히 말씀해보세요. 상담 후에 제가 적절한 솔루션을 제공할 테니깐.”

핫핑크 용이 주저리주저리 말하며 기다란 검은 발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사근사근한 저 태도 때문일까. 정말 그 때문일까. 영세한 용이지만 그래도 용이었다. 살갑게 군다고 해서 아주 마음을 놓는 게 말이 될까. 용사 시절, 나는 용을 쓰러뜨리는 꿈을 꾸곤 했다. 첨탑을 지키고 있다는 커다랗고 포악한 용을 납작 쓰러뜨리고, 놈의 심장에 서슬 퍼런 검을 깊숙이 박아버리는 꿈. 그런데 웬일인지 나는 용에게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잠자코 커다란 고개를 주억이고만 있던 핫핑크 용이 입을 열었다. 뱀처럼 두 쪽으로 나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핫핑크 용이 말했다.

“아유, 잘 찾아오셨네요. 맞아요. 왕국이 나빴죠. 아니, 그래도 첨탑에 갇힌 공주 구하겠다고 그 고생을 한 우리 용사들한테 그런 대우라니요. <용출창>, 그거 진짜 나쁜 상품이에요. 복지성 상품은 무슨. 요즘 세상에 육 개월 미납한다고 잡아다가 노역을 시키는 게 말이 돼요?”

핫핑크 용은 나에게 장사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장님이 잘 되어야지 저희 붉은 용 대출이 먹고 사는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요, 저희 서비스 이용하신 사장님들이 다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제 말 들어보세요. 제가 볼 때는요. 사장님의 사업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봐요. 사장님이 허리춤에 찬 장검만 봐도 딱 알겠는데, 저가 제품 위주로 팔고 있죠? 무기 장사라는 게 뭐예요. 이 무기라는 게 사실 사치품이거든.”

핫핑크 용이 낡은 검을 하나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이게 바로 전설 1등급짜리 검이에요. 이 검의 별명이 뭔지 알아요? 바로 ‘트롤학살자’예요. 이 검을 썼던 영웅이 트롤을 참 잘 잡았거든. 왕국 초창기에 활동했던 영웅인데 이름이 뭐더라…….” 핫핑크 용이 자그마한 액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액자 안에는 낡은 종이 쪼가리가 들어 있었다. “여기 전설 1등급 증서도 있어요. 아무튼 이 검이 얼만지 알아요? 무려 이십오만 닢이야. 근데 없어서 못 구하는 명검이죠. 근데 봐요. 날도 무디고 자루는 다 해지고……. 이거 든다고 조무래기 용사들이 트롤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 말은, 좋은 가격에 좋은 무기를 판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무기 장사라는 게 그래요. 값비싸게 스토리를 파는 거야 스토리를. 품질과 성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니까요. 이게 사치 아니고 뭐겠어요?”

“맞네 맞아. 용 사장님한테 배울 점이 많네요. <장사모>에서는 순 쓸데없는 조언만 해줘서…….”

내가 무릎을 탁 쳤다.

나는 전설 등급을 받은 철퇴와 석궁, 대장장이 명인이 도제를 시키지 않고 손수 만들었다는 명검을 가게에 들여놓기 위해 어마어마한 금액을 대출받았다. <장사모>에서 어느 사장님이 그랬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이자율은 연 25%인데, 이걸 비싸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다른 용들보다 훨씬 저렴하게 해드리는 거니까. 그리고 내가 말한 대로 최소한 두 배 뻥튀기해서 팔아봐요. 그럼 이자율 25%는 아주 우습지. 원금도 금방 갚을걸.”

 

을은 갑이 제공한 대출금 원금의 50%OOOOOOOO시까지 갚지 아니할 시, 갑에게 잡아먹히기로 한다.

 

“이건 거의…… 신체포기각서 같은데요?”

계약서를 읽던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좀 무섭죠?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요. 형식적인 거예요. 인간 잡아먹으면서 어떻게 인간이랑 비즈니스를 하겠어요. 안 그래?”

괜찮겠지. 저때까지 50%를 갚지 못할 일은 없을 거고. 나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금화 한 보따리를 받았다. 금화 자루의 묵직한 무게를 몸으로 느끼며, 나는 이제야말로 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사로잡혔다. 전화위복이라고 하던가. 할 수 있다. 붉은 용의 말대로 값비싼 무기를 아주 값비싸게 팔아치워서 나도 남부럽지 않게…….

내가 미쳤지.

지금 생각해보면 둘째인가 셋째인가 하는 왕자가 없어서 못 먹는다는 그 차에 뭔가를 탔지 싶다.

 

 

 

해가 저물었다. 숲속이었다. 마법사 노인이 금방이라도 숨이 꼴까닥 넘어갈 것만 같은 말에게 다가가 주문을 외웠다. 오 분 넘게 저 혼자서 쫑알쫑알거리던 마법사 노인의 손바닥에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물이 흘러넘치는 손바닥을 말의 주둥이에다가 가져다댔다. 말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주문을 외우기 전 소변을 본 마법사의 손에서 나오는 물을 할짝할짝 잘도 받아 마셨다.

“너도 물 마실래?”

마법사 노인이 주룩주룩 물이 흐르는 손바닥을 나에게 내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내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잠깐, 수통에 담긴 물도 설마…….

마법사 노인의 텐트는 낡아서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모기한테 헌혈하는 날이 되겠군. 나는 텐트를 다 치고 땔감을 주워왔다. 부싯돌로 불을 피우려고 하는데 마법사 노인이 나를 막아섰다.

“아니, 마법이 있는데 뭔 고생을 한다냐. 비켜봐라.”

마법사 노인이 땔감더미 앞에 쭈그려 앉아 주문을 외웠다. 물이 불보다 어려운 건가. 오 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일이 분쯤 더 지났을까. 마법사 노인의 손바닥에서 작은 불씨가 일었다.

“이얍!”

마법사 노인이 쇠한 목소리로 기합을 넣었다. 그러자 아이 주먹만 한 불꽃 덩어리가 마법사 노인의 손바닥에서 발사되었다. 발사는 발사인데, 무척 느렸다. 마법사 노인이 만든 불꽃이 지척 거리를 얼마간 두둥실 떠다니다가 땔감더미에 다다랐다.

이러니 마법이 외면 받는 거다. 마법으로 목을 축이자니 오 분 걸리고, 불 좀 피우자니 그보다 더 걸린다. 비단 이것뿐이겠는가. 전투에서는 어떤가. 마법화살을 만드는데 십여 분이 걸린다고 들었다. 쭝얼쭝얼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를 활로 쏴 죽이면 끝이었다. 아니, 이제는 활도 구형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요즘은 총이 최고지.

마법사가 우대받던 시절도 있었다. 그땐 마력이 어마어마한 대마법사가 많았다. 불꽃 덩어리도 바위덩어리만큼 커다랗게 만들 줄 알고, 또 주문을 외우는 속도도 어마어마하게 빨랐단다. 역사서에 따르면 1.7초 만에 거대 불꽃 덩어리를 만들어내 날렸다고 했다. 그게 공식 최단 기록인데 비공식 최단 기록에 따르면 0.9초 만에 만들어낸 마법사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마법사가 활동하던 때가 있었다. 대마법사 한 사람이 오크 군단이며 트롤이며 한꺼번에 불태우던 시절. 이제는 아주 옛날 일이 되었다.

대예언가 케이도 마법사 출신이었다. 물론 그땐 이미 마법사의 사회적 지위가 많이 떨어진 때였다. 그래서 마력이 상당하다고 알려졌던 케이도 재빨리 마법사에서 예언가로 전향했던 것이다. 그게 대박을 쳤고. 그리고 그런 두루뭉술한 예언을 남기고 픽 쓰러져 죽었다지.

어느 때부턴가 전설 속에 으레 등장하던 어마어마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마법사의 명맥이 아주 끊긴 건 아니었다. 미약하게나마 재능을 지닌 마법사가 태어났다. 사실 그런 재능은 흔했다. 통계에 따르면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마력을 지니고 태어난다나 뭐라나. 아무튼 고만고만한 마법사밖에 등장하지 않으니 마법에 대한 경외심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 원형탈모 할아버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는가. 물 좀 뽑는데 오 분 걸리고, 불붙이는 데는 그보다 더 걸린다. 그 시간에 물을 길러오고 부싯돌로 불붙이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마법과 관련된 직업도 이제 몇 없었다. 몇 년 전에는 왕국에서 그래도 전통이니까 갖추고 있던 왕실마법사를 더 이상 선발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그런데 이 마법사 양반은 무슨 수로 자기를 대마법사라 칭하면서 돈을 벌러 다니는 걸까? 그것도 사람까지 고용해가며?

아무리 봐도 하찮은 마법사인데…… 혹시 뭐라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아따, 따땃하니 좋구만.”

마법사가 모닥불 앞에 앉아 씨익 웃었다. 드러난 이가 무척 누랬다.

“마법이…… 좋긴 좋네요.”

내가 눈치껏 자칭 대마법사의 쿵짝을 맞춰주었다.

어쨌든 마법사라고 하니 물어는 봐야지.

 

 

 

밀린 대출금을 처리하고 전설의 아이템을 열댓 개 사니 그 많던 금화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자신 있었다. 봐라. 이 철퇴는 무려 전설 2등급짜리 철퇴다. 물론 철퇴가 무기 시장에서 썩 인기 있는 제품은 아니지마는, 전설 2등급짜리 철퇴라면 다르지. 안 사고는 못 배길걸. 왜냐하면 이 철퇴의 별명은 ‘오크곤죽기’거든. 그러한 자신감은 며칠이 지나자 절망감으로, 불안장애와 불면증 등으로 바뀌었다.

하나도 안 팔렸다. 가격을 낮춰도 보았지만 그래도 안 팔렸다. 처음엔 손님도 제법 있었다. 진귀한 아이템을 판다니까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죄다 행색이 꾀죄죄한 코흘리개 어린 용사들뿐이었다.

금세 한 달이 지났다. 한 번쯤은 봐주지 않을까. 사장님이 잘되어야지 자기도 잘 된다고, 응원한다고 했잖아. 나는 불꽃 산 붉은 용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얼마 후 핫핑크 용이 직접 찾아왔다. 용치고는 아담하지만 그래도 집채만 한 덩치를 직접 끌고 오지는 않았고, 마법을 부렸다. 사람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반투명한 핫핑크 용의 분신이 내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 사람아, 그건 그쪽 사정이고 빌린 돈은 착실히 갚아야 할 거 아니야. 응?”

그러고는 꽤나 험악한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아니 용 사장님, 제가 안 갚는다는 게 아니잖아요. 한 달만 사정을…….”

“에이, 시끄럽고. 우리 비즈니스는 깔끔하게 좀 하자. 어? 당신네 사정은 난 모르겠고, 계약서대로 할 거야. 알겠어? 누군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나 이 인간이……. 쓰읍. 계약서에 따르면 연체 시 원금의 7.8%가 추가되는데…….”

또다시 한 달이 지났다.

“이번 달도 못 갚을 거면 내가 저 무기 좀 사줄까?”

핫핑크 용이 제시한 금액은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싫어? 싫으면 갚을 돈만 불어나는 거지. 싫으면 말어.”

내가 끝까지 팔지 않겠다 했다.

그러자 핫핑크 용이 웬 괴상한 노랫가락을 불러댔다.

“오오. 맛 좋은 인간, 살짝만 데쳐도 맛 좋은 인간, 직화 구이가 최고지 맛 좋은 인간!”

그런 노래를 불러재끼고 있으니 간만에 들어온 손님도 화들짝 놀라서 달아나기 일쑤였다. 영업방해로 경비대에 신고해도 소용없었다. 반투명의 마법 도마뱀이 씨익 웃으며 투명해졌고, 도리어 내가 난처해졌다. 사장님, 자꾸 이렇게 장난치시면 곤란합니다. 경비대가 우스워요?

나는 결국 전설의 아이템을 울며 겨자 먹기로 헐값이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전설 2등급 철퇴는 비인기 무기라는 이유로 반의 반의 반값에 내놓아야 했다.

“내가 이렇게 도와주잖아. 사실 이거 두 배는 더 쳐준 거거든. 이걸 굳이 왜 이 가격에 사주겠냐고. 다 사장님 힘내라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 응? 어디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와. 어차피 손님도 없잖아. 힘내서 빚 갚아야지. 파이팅이야 파이팅!”

언젠가부터 핫핑크 용의 분신이 아예 가게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아니, 도망칠까봐 그런 건 아니고. 어차피 도망쳐봤자 멀리 못 가. 사장님은 계약서에 도장 찍는 순간부터 추적 마법에 걸렸거든. 뭐? 불법 아닌데? 사장님, 계약서 다 안 읽었구나. 좀 꼼꼼히 읽어보지 그랬어. 58항에 따르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추적 마법을 건다고 되어 있어. 아아, 당연히 추적 마법 유효 기간도 준수하지. 몇 년이더라. 이십 년? 아무튼 그래요. 도망쳐봤자 소용없다구.”

아. 도망도 못 치는구나. 계약서 58항을 찾아보고 나는 또다시 절망에 빠졌다. 튀려고 날짜도 봐두었는데, 허사가 되었다.

포기하기엔 일렀다. 무엇보다 이 젊음이 너무도 아깝다. 미친 듯이 아깝다. 용사질한다고 여태껏 연애도 한 번 못해봤다. 내가 여자 못 만나봐서 포기 못한다는 건 아니고, 어쨌든 인생이 억울해 죽겠다 이 말이다.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 추적 마법부터 풀어야 하는데…….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마법사의 마법으로 만든 모닥불이라고 해서 특별히 오래 가는 건 아니었다. 내가 땔감을 더 넣었다.

“그래서 용의 추적 마법을 풀 수 있는 마법 같은 게 있냐고?”

내 얘기를 들은 마법사 노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없을까요? 제가 책에서 읽었는데요. 혼돈 마법이라고요. 그게 강하게 먹히면 웬만한 마법은 다 정신 못 차린다던데…….”

“혼돈 마법? 그거 가지곤 택도 없어. 안 돼. 전설적인 대마법사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 대마법사 게트나 되어야지 혼돈 마법이고 자시고 용의 마법과 겨룰 수 있어. 근데 시방 이 나라 구석구석을 둘러봐라. 어디 그런 대마법사가 있나.”

자칭 대마법사가 말했다.

“정말 뭐가 없을까요? 사람 하나 구해준다 치고 좀 생각 좀 해주세요. 네?”

“없어. 진짜 없어.”

“그럼 망했네요.”

내가 허탈해져서 웃었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했나.

“그냥 성실히 갚는 건 어떠냐. 으잉? 암만 잡한 용이라도 용은 용이여. 그렇게 자꾸 도망칠 생각만 하면 그 용놈이 회까닥 돌아서 꿀꺽 집어삼키면 어쩌려구.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지 않냐.”

“과연 그럴까요.”

 

 

 

무기 진열대가 텅 비었다. 무기 들여올 돈이 없었으니까. 가게는 진작 내놨다. 그때쯤 나의 신용 등급은 옆집 개만도 못한 상태였다. 얼마 안 있으면 끌려가 왕국의 노예로 전락할 판이었다. 나는 차라리 그랬으면 싶었다. 적어도 저 핫핑크 용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질 테니까.

“사장님이 왕국은행에서 빌린 돈 있잖아. 오늘 내가 싹 다 갚았어. 뭐, 너무 고마워하지는 말라구. 갚아준 돈은 금액 그대로 다 우리 붉은 용 대출에 귀속될 거니까. 아니, 여기 빌려놓고 저기 빌려놓고 하면 복잡하잖아. 하나로 묶어두는 게 좋지. 안 그래?”

이 도마뱀 새끼가.

어렵사리 가게를 넘겼다. 밀린 임대료를 정산하느라 보증금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저 돈 가지고 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쯤 되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었다.

“저기……. 이렇게 술만 퍼마시고 있을 거야? 어디 인력사무소라도 나가보지 그래?”

“꺼져, 이 도마뱀 새끼야. 내가 언제 너 밟아 죽인다.”

내가 술병을 핫핑크 용에게 던졌다. 술병이 그대로 반투명한 몸을 통과해 벽면에 부딪쳐 깨졌다.

“거 참 성질하고는. 그래 좋아. 어차피 OO년 OO월 OO일 OO시까지 절대로 못 갚을 것 같은데 이쯤에서 끝내줄까? 사장님만 동의한다면야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그러면 저…… 깨끗하게 씻어줄 수 있을까? 마침 사장님 먹겠다는 고객님이 계셔. 이름은 들어보셨을까. 꽤나 전설적인 용이신데. 아무튼 값도 후하게 쳐준다고 하고 나도 이제 사장님한테 미련 없거든. 솔직히 더 뽑을 것도 없고. 좀 실망했어. 사장님 꼴을 봐. 완전 폐인이 됐잖아. 웬 사람 정신력이 이리 약해? 아무튼 말이야. 그분께서 좀 비위가 약해서 그래. 사장님 요즘 씻지도 않고 술만 퍼 마시는데 으휴, 너무 더럽잖아. 뒷목에 때 낀 것 봐. 맛없는 오크도 잘만 먹는 내가 봐도 입맛 떨어진다. 요즘은 오크도 씻고 다녀. 아무튼 고통 없이 먹어달라고 얘기 좀 해줄게. 원래 그분이 잘게 썰어 먹는 타입이거든? 근데 사장님은 특별히 몇 번 안 씹고 먹어치우게끔 내가 힘 좀 써준다구. 깨끗하게 싹 씻고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돼.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야 이게.”

몸에다가 미리 소금이라도 발라놓을까. 아니면 토마토소스로 온몸을 범벅으로 만들어놓을까. 그럼 기특하게 내려다보다가 열 번 스무 번 씹을 거 일고여덟 번만 씹어주려나.

문득 문제의 그 조항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따져 물었다.

“잠깐. 계약서에 따르면 너한테 잡아먹히기로 되어 있을 텐데?”

그러자 핫핑크 도마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긴 하지. 근데 사장님만 동의해주시면 고통 없이…….”

“싫어. 난 붉은 용 씨 당신한테 잡아먹힐 거야. 협상의 여지는 없어.”

이거, 내가 한 방 먹인 거 같은데.

원래 피부색대로라면 핫핑크 용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자린고비 붉은 용 님은 결코 나를 잡아먹지 않을 것이다. 나한테서 빼앗아간 전설의 아이템을 얼마에 처분했는지는 몰라도-워낙 흥정을 잘해 손해는 안 봤을 거다- 아직은 아쉬울 것이다. 나를 잡아먹겠다는 그 전설적인 용이 내 몸값으로 얼마를 지불한다고 했을까.

붉은 용은 그 값어치를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릴, 그런 사치를 부릴 용이 아니었다.

“아니 그러지 말고…….”

“협상 안 합니다. 용 사장, 우리 깔끔하게 비즈니스합시다요 비즈니스. 예? 그리고요, 위생을 준수해야 한다는 조항도 없으니 앞으로 저는 씻지 않을 겁니다. 몸에 벼룩이 가득하고 온갖 병균이 득시글거려도 인생 밑바닥의 밑바닥의 밑바닥에까지 추락한 놈, 귀찮고 만사 부질없어서 안 씻습니다.”

내가 선언했다.

핫핑크 용이 식식거렸지만 결국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핫핑크 용이 새로운 계약서를 들고 왔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는 처음이다 진짜. 내가 그래도 사장님하고 지낸 정이 있으니까 이 정도까지 해주는 거야. 이쯤 되면 그냥 잡아먹었어. 잘근잘근 씹고 또 씹고 그랬을 거라구. 나도 용이야 용. 인간 잘 먹는다구. 비쩍 말라가지고 어디 먹을 데도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맛있게 냠냠해줄 수 있단 말이야. 아무튼 그럼에도 내가 사장님한테 친근한 정이 있으니까…….” 핫핑크 용이 두 쪽으로 나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남은 원금만 갚아. 처음 빌렸을 때보다 살짝 불기는 했는데, 내가 장난질친 게 아니니까 의심하지 말구. 이래봬도 계산은 칼 같이 하는 용이야 내가. 아무튼 이거 엄청난 제안인 거 알지? 연 이자율이 무려 25%였는데, 이거 다 빼준다는 거야. 어디 가서 소문내지나 마. 내가 이렇게 해줬다는 거 소문나면 우리 붉은 용 대출 망하는 거 순식간이라구.”

계약서 1항에는 18년 간 을이 갑에 대한 모든 채무를 탕감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조항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을이 제 1항을 이행하지 못했을 시 을은 갑이 주선한 어떠한 용에게든 잡아먹힌다.

 

그리고 그 다음 조항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2항을 실행할 경우, 을은 갑의 요구에 따라 목욕 및 양치 등 양호한 위생을 위한 행위를 해야만 한다. 갑은 을에게 갑이 만족할 만큼 깨끗한 위생을 요구할 수 있으며, 이에 불응할 시 갑이 을의 양호한 위생을 위한 목욕 및 양치 등을 강제로 집행할 수 있다.

 

내가 키득 웃었다.

“나 완전 비렁뱅이 다 됐는데 무슨 수로 갚아? 이 나이 먹고 경력도 없고 뭣도 없는 놈 써준다는 사람도 없을 텐데?”

그러자 핫핑크 용이 자그마한 검은 발톱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건 내가 다 알아봐뒀지. 사장님이 지금 아주 쓰레기만도 못한 거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뭘 믿고 이런 계약을 하자 그러겠어? 우리 붉은 용 대출이랑 제휴를 맺은 인력사무소가 있거든. 매일 아침 거기 가면 돼. 사장님만 성실하게 살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니깐. 내가 계산해보니까 일요일 하루 빼고 쭉 일하면 딱 십칠 년 십일 개월이면 다 갚겠더라고. 사장님 혹시라도 아프거나 그럴까봐 특별히 한 달 더 여유롭게 잡았거든. 어때. 괜찮지? 아아. 게다가 귀찮게 갚으러 우리 회사에 오고 그럴 필요도 없어. 인력사무소에서 알아서 송금해줄 거니까.”

“아이고, 노예가 따로 없네. 근데 노예도 먹고 자고 싸기는 해야 할 거 아냐. 요즘 세상에 먹고 자고 싸는 게 다 돈인데.”

“그것도 다 생각해뒀지. 일당의 구 할을 공제할 거야. 나머지 일 할은 사장님 몫이고. 사무소 소장님한테 명세서 확실하게 때달라고 했으니까 이것도 굳이 의심할 필요 없을 거고. 일 할이면 하루 세 끼 사먹는 데에 지장 없을 거야. 그리고 인력사무소 근처에 하숙집 하나 잡아놨어. 좀 좁아도 누울 자리도 푹신하니 나쁘지 않아. 아아. 거기도 우리 회사랑 제휴 관계를 맺은 하숙집인데 하숙 요금도 같이 정산해서 구 할을 뺀 거거든. 제휴 인력사무소랑 하숙집에 대해서는 여기 계약서에 상세히 기재해놨는데, 몇 항이냐 하면…….”

일하기 싫었다. 정확히 말해 저 도마뱀 놈의 배때기를 불려주기 싫었다. 그냥 이대로 잡아먹힐까 싶었다. 그럼에도 내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까. 혹시 그런 게 있을지 모르니까. 용의 추적 마법을 풀거나 따돌릴 수 있는, 그런 게 있어서 나도 자유를 맛보고 저 도마뱀 자식에게도 한 방 먹이고…….

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내 이야기에 어떤 반전이 숨어 있을 거라고 믿어보고 싶었다.

어쨌든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인력사무소에 출근하게 되었다.

“간단한 일이에유. 밭도 손바닥보다 작아유. 잡초 쬐끔 뽑아보실 분 없으실까?”

하루는 엄청나게 커다란 밭에 가서 허리 펼 세 없이 잡초를 뽑아야 했다.

“여기 말 좋아하시는 분 없나? 귀여운 말이랑 쪼매만 놀아주기만 하면 되는디.”

하루는 마구간에 가서 말똥을 치워야 했다.

어느 날은 어느 귀족나리댁에 가서 웬 삽질을 해야 했고, 어느 날은 광산에 가서 해본 적 없는 광질을 했다. 또 어느 날은 왕국 제일의 세탁소가 되겠다면서 공격적으로 여러 군데에 분점을 내고 있는 거대 세탁 회사에 가서 죽어라 손빨래를 해야 했다.

일이 끝나면 낡고 궁색한 하숙집 계단 방, 말 그대로 누울 자리밖에 없는 그 방에서 쪼그려 앉아 딱딱해져 둔기로 써도 괜찮을 법한 형편없는 빵 쪼가리를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러면서 나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진짜 칼을 간 건 아니고, 일 할을 아득바득 아껴서 산 마법 책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지피지기면 백승이라고, 나는 마법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고 바로 오늘 새벽, 내 앞의 이 원형탈모 할배가 인력사무소에 나타나 자신을 대마법사라고 소개하며 제자를 구했다.

“일일 제자가 필요한데요. 아니, 일박이일 제자가 필요한데. 일은 별거 없고요. 그냥 제가 어디 가서 마법을 좀 선보여야 하는데 거기서 조수 역할을 하면 됩니다. 일당은 당연히 이틀치 다 주고요. 어디 좀 젊은 친구였으면 좋겠는데요.”

 

 

 

마법사 노인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 떠보니 아직 캄캄했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간신히 마차에 올랐다. 절로 눈이 감겼다. 울퉁불퉁한 숲길에 마차가 들썩일 때마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고 여긴 어디지 난 누구지, 생각을 하고 여기가 어딘지 난 누군지 깨닫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옆에서 마법사 노인이 중얼거렸다. 일 얘기인 듯싶었었다.

“이 일이라는 게 간단히 말해서…… 그런 거여. 아무튼 너는 내 옆에 착 붙어 서서…… 어떻게 보면 좀 우스꽝스러울 수도…… 이게 다 돈 때문에…… 돈이 최고지. 안 그러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아프지는 않고 살짝 따끔한데…….”

해가 뜰 때쯤 왕국에서 네 번째로 크다는 도시에 도착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 번째였는데 원래 네 번째였던 세 번째로 큰 도시에게 밀린 탓에 네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다시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많이 벌이고 있다고 했다. 마법사 노인이 조잘조잘 말해주었다.

“이럴 때 지자체에서 돈을 풀 거든. 나랏돈만큼 달달한 게 어디 있겠냐. 그게 우리 같은 마법사들한테는 밥줄이고.”

도시 초입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마법과 예언의 도시, 천년 전통의 마을 OO시>

대마법사 게트와 대예언가 케이가 여기 출생이라고 했다. 네 번째로 큰 도시가 세 번째로 큰 도시를 이기기 위해 내놓은 비장의 수가 바로 이것이었다. 관광 도시. 네 번째로 큰 도시는 세 번째로 큰 도시에 비해 인구수도 밀리고 기름 진 땅도 적고 뭣도 없었는데, 그나마 밀리지 않는 게 바로 역사와 전통이었다.

천년 동안 있어왔던 시장이라고 해서 천년 시장이라고 이름 붙인 시장에서는 먹을거리를 파는 게 아니라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나무로 깎아 만든 대예언가 케이의 모형이라든가 대마법사 게트의 모형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 아무튼 이 천년 시장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천년 시장이라고 하지만 시설 자체는 죄다 최신이었다. 주막이나 마구간에 말을 맡기는 게 아니라 아예 주차장이 따로 있었다. 하얀색 선으로 네모반듯하게 그려놓은 자리에 그늘 막이 쳐져 있었고 건초와 깨끗한 물이 담겨 있었다. 마법사 노인이 능숙하게 병든 말을 주차했다. 마차를 떼자 병든 말이 기다렸다는 듯이 건초와 물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아까 얘기했던 대로만 하면 된다. 알았지? 별거 없어. 다 돈이라 생각하는 거다.”

마법사 노인의 말에 내가 고개를 주억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별거 없다니까.

천년 시장 정중앙에 커다랗게 행사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행사장 위에는 <천년의 역사, 우리 고장의 전통 직업 알아보기>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웃통을 까고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철갑으로 된 바지를 입은 근육질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근육질 아저씨가 괴상쩍게 생긴 뿔 달린 투구를 벗고는 고개 푹 숙여 인사했다.

“아이고 마법사 선생님, 오셨습니까.”

마법사 노인이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아이고 바바리안 선생님, 몸이 점점 좋아져 아주.”

얼마간의 덕담이 오갔다. 마력이 점점 세지는 거 같아요. 마법에 문외한인 저한테서도 느껴진다니까요? 바바 선생, 내 마력으로 느낄 수 있는데 전사의 기운이 아주 창대하구만! 가까이서 보니 바바리안 아저씨의 가슴팍에 길쭉한 칼자국이 여럿 나 있었다. 아직 검붉은 색이 도는 게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분장이었다. 아아. 이런 거구나. 여전히 낯 간지러운 덕담을 나누는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마법사 노인은 촌스러운 녹색 옷을 입고 커다란 활을 든 사냥꾼 할머니(저 활을 들고 서 있는 게 대단할 정도로 병약해 보이는 할머니였다. 눈 밑이 아주 시커맸다. 시위는 당길 수 있을까?)와 인사를 나눴고 웬 예전 성직자 복장을 할 수염 긴 중년남자(성직자할 관상이 아니었다. 얼굴에 난 저 칼자국은 바바리안 아저씨의 가슴팍에 그려놓은 것과는 다르게 진짜 칼자국이었다)와도 뻔한 덕담을 나눴다.

인사와 덕담을 다 마친 마법사 노인이 주섬주섬 의복을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옷 입자.”

“이걸…… 입어요?”

“그럼 벗고 일할래?”

마법사 노인이 건넨 로브는 웬 괴상한 로브였다.

내가 공중화장실에서 환복을 하고 나왔다. 내가 입은 로브보다 적어도 두 배는 더 괴상해 보이는 로브를 입은 노인이 이번에는 웬 사람 키만 한 지팡이를 내밀었다.

“이게 네 거다. 조심히 써라. 이렇게 생긴 지팡이 구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녀.”

과연 그럴 것이 꽤나 영험하게 꼬불꼬불한 지팡이였다.

마법사 노인의 손에는 하얀색으로 칠한 일직선의 기다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나에게 준 것보다 두세 뼘 더 긴 지팡이였고, 맨 상단에 보라색 자수정이 박혀 있었다.

“마법사님 지팡이에는 혹시 마력이 깃들어 있나요?”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마력이 깃든 아이템은 기본적으로 단가가 좀 높은데.

“그런 게 깃들어 있었으면 진작 팔아서 말이나 새로 뽑았겠지. 안 그러냐. 그게 얼마나 비싼 물건인데.”

마법사 노인의 말에 내가 다시 고개를 절레 저었다.

어느 공무원 나리로 보이는 작자가 나타나자 마법사 노인이 경망스러운 종종걸음으로 그 작자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나리, 이렇게 또다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요.”

마법사 노인이 허리를 수그리고 두 손을 모은 채 미소를 지었다. 딱 봐도 간사한 미소였다.

“에이, 우리 마술사 선생님 쇼가 워낙 재밌고 그러니까 또 찾는 거지요.”

공무원 나리도 마찬가지로 간사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마법사가 명맥을 유지하는 게 다 나리 같이 큰일을 하시는 분들 덕분입죠.”

마법사 노인이 로브 안쪽에서 자그마한 천 꾸러미를 꺼내 공무원 나리에게 건넸다. 짤랑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공무원 나리가 주위를 슥 돌아보더니 잽싸게 천 꾸러미를 낚아챘다.

“아닙니다. 제가 다 고맙죠. 마술사 선생님 덕분에 우리 도시가 이렇게 볼거리 풍성한 도시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암요. 이번 공연도 잘 해보겠습니다요.”

삼십 분 뒤, <천년의 역사, 우리 고장의 전통 직업 알아보기> 행사가 진행되었다. 무대 앞에 깔아둔 백여 석의 의자에는 관객이 몇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몇 없었다.

행사의 진행은 과거 이 도시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던 어느 느끼하게 생긴 아저씨가 맡았다.

“자, 그럼 첫 번째 순서로 바바리안을 모시겠습니다.”

예의 그 울룩불룩한 근육질의 아저씨가 나타나 가슴 근육을 마음껏 자랑하며 크아아 함성을 질렀다. 시큰둥한 표정의 얼마 없는 관객들 사이, 한 아주머니가 꺄악 비명을 질렀다. 이어지는 공연은 바바리안쇼라기보단 차력쇼라고 해야 하지 않나 싶을 만큼 단순무식했다. 커다란 바윗덩이를 들어 올리는가 하며 나무판자를 격파하는가 하는 식의 바바리안과 저게 무슨 상관인지 모를 법한 쇼가 이어졌다.

이어서 바바리안 아저씨가 관객 하나를 무대 위로 불러서 각목으로 자신을 때리게끔 했다. 그러고 나서 바바리안 아저씨가 큰 소리로 외쳤다.

“바바리안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무대 뒤에서 보았다. 바바리안 아저씨의 뒷목이 파르르 떨리는 걸.

팔다리 중 어딘가가 부러지지 않았으니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바바리안의 공연이 끝났다.

이어서 등장한 아처 할머니가 공연이 시작되었다. 아처 할머니가 힘겹게 활시위를 당겼다. 시위를 당기고 있는 손이 매우 심하게 떨렸다. 그래도 사람은 맞추지 않았다.

“지원자 없으실까예?”

자기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두고 겸허히 죽음을 맞이할 지원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공연은 프리스트 아저씨의 공연이었다. 프리스트 아저씨가 관객 한 사람을 불러와 건강을 회복시켜주겠다면서 관객을 무대 바닥에 눕혔다. 그러더니 허업 기합을 넣으며 손바닥으로 관객의 가슴을 꾸욱 내리눌렀다. 그렇게 일 분쯤 있었을까.

“어떠십니까? 머리가 맑아진 느낌 들지 않으신가요? 선생님께서는 특별히 정신적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정신력을 회복시켜드렸고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얼굴에 칼자국-가짜가 아닌 진짜 칼자국이 난 프리스트 아저씨가 인상을 구기며 재차 되묻자 관객은 머리가 더없이 맑아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대마법사의 공연이었다. 마법사 노인이 무대 위에 올랐고 나도 뒤따라 올랐다. 나는 불현듯 민망함을 느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잡초를 뽑거나 말똥을 치우는 것보단 낫잖아. 이 정도면 거저 아니겠어? 내가 속엣말로 되뇌었다. 그래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에, 마법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습니다요. 그러니까 마법은 인간의 친구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 제가 보여드릴 마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요. 그 뭐시냐, 그래, 격파 마법이랑 마법화살입니다요. 두 마법은 다 살상 능력을 지닌 매우 강력한 마법으로, 어디 가서 보기 힘든 마법입니다요. 우선 격파 마법부터 설명드리자면 그 기원이 어디서부터…….”

자칭 대마법사의 말이 길어졌다. 얼마 없는 관객 중 절반이 졸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바리안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판자처럼 얇고 널찍한 바위 하나를 무대 위에 올렸다. 단단한 바위는 아닌 것 같았다. 부스러기가 후두둑 떨어지는 걸 보면. 굳이 격파 마법이 아니더라도 주먹으로 세게 내리치면……. 마법사 노인이 꽉 쥔 주먹을 번쩍 들고는 비장하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문 시전까지 오 분 정도 소요되었는데, 그래서 그나마 졸지 않고 버티고 있던 나머지 관객까지 모조리 졸게 만들어버렸다.

“이얍!”

마법사 노인이 기합을 넣으며 주먹으로 널빤지처럼 얇은 바윗덩이를 내려치자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어때요. 엄청나지요? 이게 바로 격파 마법입니다요. 아주 무서운 마법이에요. 대마법사 게트께서는 이 격파 마법으로 트롤도 잡으셨고…….”

설명이 끝난 게 아니었나 보다. 마법사 노인이 몇 분 간 장황하게 방금 전 자신이 선보인 마법에 대해 설명했다.

어느 관객은 빈 의자를 여러 개 붙여 아예 침대에 눕듯이 누웠다.

“그 다음에 선보일 마법은 마법 화살이란 건데요. 이것도 어마어마합니다. 이 마법 화살을 만든 마법사가 누구냐 하면…….”

다시 긴 설명이 이어졌다.

“……실은 이 마법 공연에서 제가 추가로 마법 하나를 더 끼워 넣었습니다요. 놀라셨죠? 무려 마법을 세 개씩이나 본다니요. 아무튼 그게 무슨 마법이냐 하면 방어 마법으로, 방어 마법에 이제 갓 능통해진 저의 제자가 시전할 건데…….”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어? 제가요? 방어 마법이요?

내가 마법사 노인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마법사님, 저 마법할 줄 몰라요.”

“아까 말했잖어. 살짝 따끔할 거라고.”

마법사 노인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언제요?”

“아까 말이야. 마차 안에서 말했잖어.”

“못 들었어요. 졸고 있었다고요.”

“에라이 이 사람아. 내가 후딱 얘기해줄게. 강력한 마법 화살에 방어 마법이 깨졌다고 할 거다. 걱정 말어. 맞아도 그냥 살짝 따끔하기만 해. 근데 엄청 아프다는 식으로 뒹굴고 그래야 한다. 액션이 생명이라구. 알았지?”

“그냥 맞으라는 거예요?”

“안 죽어. 걱정 말라구. 그리고 내가 주문 외우는 거 봤지? 그렇게 너도 주문 외우는 척 해야 한다. 내가 기합 넣을 때 너도 딱 그때 주문 시전하는 것마냥 기합 넣고. 알았지? 대강 느낌대로 해봐. 어려울 거 없어.”

마법사 노인이 나한테서 멀리 떨어지더니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십 분 정도 걸릴까. 일단 나도 주문을 외우는 척 했다. 아니 근데, 마법 화살도 화살 아니야? 그냥 맞으라고?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무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두 쪽 난 바윗덩이. 이제 보니 꽤 두꺼워 보였다. 아무리 무른 바위여도 맨주먹으로는 절대 깨지 못할 성싶었다. 저 정도 마력으로 마법 화살을 만들면…… 나 뚫리는 거 아냐?

식은땀이 났다. 내가 슬쩍 관객석을 보았다. 관객들은 여전히 숙면 중이었다. 마법사 노인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십 분이 지났어? 모르겠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 설마 죽기야 하겠어. 저 할아버지 말대로 살짝만 따끔하고 말겠지. 조절 잘해주셨을 거야. 근데 실수로 힘이 더 들어갔으면 어쩌지?

뭐긴 뭐야. 개죽음인 거지.

“이얍!”

내가 눈을 질끈 감으며 기합 소리를 냈다.

무언가가 느껴졌다. 기분 좋은 따스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 느낌이 내 안에 있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걸까.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것이 이제는 내 주위를 활기차게 맴돌았다. 나를 향해 싱긋 웃는 것만 같았다. 내가 눈을 떴다. 나는 반투명의 푸른 구체 안에 있었다. 구체의 표면은 걸죽한 반죽처럼 끈적해 보였고, 빛나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게 아니라 저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이 구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 구체가 나를 지켜줄 것이다.

엄지손가락만 한 자그마한 마법 화살이 날아와 구체의 외벽에 박혔다. 그 순간 구체가 번쩍였다. 스스스, 소리를 내며 마법 화살이 녹아버렸다. 반투명의 푸른 구체 너머, 경악한 표정의 마법사 노인이 마법 화살을 날린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서 있는 게 보였다.

이것을 조절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내 것이니까. 내가 손을 슥 휘둘렀다. 반투명의 푸른 구체가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주문도 모르는데 이걸 어떻게 한 거지?

 

 

 

천년 시장 바깥에 위치한 낡은 주막이었다. 마법사 노인이 자기 돈으로 맥주 두 잔을 시키더니 저녁밥도 먹어야지 않겠냐며 칠면조 구이까지 시켰다. 칠면조 구이를 직접 손질해서 내 접시에 올려주기까지 했고.

내가 마법사 노인이 시키는 대로 불 마법을 시전했다. 손바닥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불꽃이 맹렬하게 쏟아졌다. 깜짝 놀란 내가 손바닥을 오므렸다. 그러자 불이 저절로 꺼졌다. 뜨겁지 않았다. 살짝 따뜻한 정도의 기운이 손바닥 안에서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마법사님을 제자로 받아달라고요?”

“그거지. 내가 마법 알려줄 테니까 자네는 날 제자로 받아주고. 이게 일석이조 아니겠냐.”

“왜……요?”

“대마법사의 제자가 얼마나 명예로운 건지 알어?”

“제가 대마법사예요?”

“엄청난 재능이여. 내가 지금껏 본 적이 없던 것이구만. 주문을 외우자마자 불이 저리 넘칠 듯이 튀어나오는데, 보면 모르겠냐.”

“근데 왜 그런 거예요? 주문도 미처 다 외우지 않았는데…….”

마법사 노인이 맥주를 들이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이라는 게 그런 거다. 첫 번째 주문으로도 시전이 안 되면 바로 두 번째 주문을 넣는 거여. 두 번째 주문도 안 먹히면 바로 세 번째 주문을 넣어야 하구. 불 마법만 해도 백이십팔 개의 주문 순서가 있어. 나 같은 경우 칠십에서 팔십 번대까지만 외우면 되는데, 아무튼 그래. 그리고 이 재능을 타고났다는 게 몇 번째 주문 만에 주문이 시전되느냐에 따라 달린 거다. 방금 내가 첫 번째 주문만 알려준 거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렇다면 제가…… 대마법사가 될 재능인 거네요?”

“의심의 여지가 없지.”

“근데 왜 이제야 이게 되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되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책에서 보면 마법은 유전적인 요인이 크다고 하던데요.”

아직도 얼떨떨했다. 내가 맥주를 들이켰다.

“낸들 어떻게 알겠냐. 갑자기 그 재능이 분출된 거지. 그냥 그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뒤늦게 발현되는 경우도 있구.”

“근데요. 아까 방어 마법은 주문도 외우지 않았는데 그냥 됐잖아요. 그건 어떻게 된 거예요?”

“대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난 경우 주문도 필요 없이 그냥 원하는 대로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하더라구. 대마법사 게트도 그랬다고 하지. 그러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말이다, 너의 재능은.”

“그렇군요.”

내가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무슨 마법이 있나 배워도 봐야 하고 그러지 않겠냐. 그러니까 나를 제자로 받아줘. 내가 싹 다 알려줄게. 마법사 생활 오십 년의 지식과 노하우를 다 전수해준다 이 말이다. 그리고 말이다.” 마법사 노인이 맥주를 들이키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저기…… 이 정도 능력이면 어디 가서 크게 공연을 열 수 있을 거 같은데……. 아예 공연장 하나를 통째로 빌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여. 어떻게 생각하냐. 크게 콘서트를 여는 거지. 몇천 명의 관중이 금방 몰려들 것이여. 근사하지 않냐. 공연장 잡는 거며 뭐며 내가 다 할 테니까 넌 그냥 마법만 부리면 되는 거여. 수익은 오대오, 아니 육대사로 네가 더 가져가구. 금방 떼돈 벌 수 있다 이 말이다. 그래서 그 붉은 용인지 뭐시기한테 빌린 돈도 싹 다 갚구 새 출발도 할 수 있을 거여.”

마법사 노인의 말에 잠시 잊고 있던 그 도마뱀 새끼가 떠올랐다. 나에게 걸린 마법도.

“근데요. 제가 역사서에서 읽었었는데요.” 내가 입을 열었다. “대마법사 게트가 마법으로 용을 잡았다고 하던데요. 대마법사의 재능이면 용도 잡을 수 있나 봐요? 제가 아는 용 중에서 엄청 큰 용은 아니고 되게 자그마한 용이 있는데요. 영세한 용 중에서도 아주 영세한 용인데……. 어떤 용을 말하는지 아시죠?”

내 말에 마법사 노인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구,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냐.”

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뒤였다. 용 사장, 넌 뒤졌다.

그렇게 예비 대마법사와 그의 늙은 제자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댓글 2
  • No Profile
    감동란 23.09.03 13:34 댓글

    시리즈인가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감동란님께
    No Profile
    글쓴이 박낙타 23.09.04 00:59 댓글

    연작 형태로 한 편 더 써보았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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