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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것의 용도

2021.12.28 12:1612.28

 

우리 셋은 대학기숙사에서 만났다. 나와 찬, 욱은 금세 친구가 됐다. 우린 전공부터 성격, 외모, 취향이 다 달랐다. 그 간극이 워낙에 크다 보니 다투거나 경쟁할 일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만, 그야말로 중간의 중간 같은 타입이라 어딜 갖다 놔도 눈에 띄지 않는다. 찬은 혼자 책을 보며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한다. 그래도 나, 욱과는 자주 이야길 나눴고, 자기가 책에서 새로 알게 된 (쓸모없는) 지식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걸 즐겼다. 욱은 약간 다혈질에 생각과 키가 짧고 성욕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사춘기를 소환해 지금의 욱과 붙여도 욱쪽이 이길 것이다. 그래도 욱은 좋은 녀석이다. 궂은일에 앞장서고 의리를 중히 여긴다. 약간 피곤하지만 그만큼 믿음이 간다.

 

우리는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돈을 모아 학교 근처에 방을 얻었다. 취업 준비에 전념할 때기도 하고, 비좁은 기숙사에 지쳤고, 우리 셋이면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결정했다. 반지하에 방이 두 개뿐이라 나랑 욱이 큰 방을 같이 썼다. 하지만 기숙사 4인실보다 큰 방이어서 나랑 욱은 전혀 불만이 없다. 찬은 대각선으로 누워야 겨우 몸을 펼 수 있는 좁은 방을 혼자 쓰기로 했는데 자기만의 공간이 생겨 기뻐하는 눈치였다.

이사하고 사흘 동안은 재밌었다. 낮에는 세간 마련을 위해 중고물품을 쇼핑하고 밤이면 집들이 겸해서 맥주를 진탕 마셨다. 그렇게 신나게 기분을 내다가 나흘째부터는 취준생으로 열심히 살아갈 예정이었다.

이사하고 사흘째 되는 날, 술에 취해 자는데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설핏 깼다. 찬이 주방에서 물을 마시나보다 하고 눈을 감았다. 새벽에 잠깐 깼는데 여전히 빛이 보였다. 창문을 봤지만 해는 뜨지 않았다. ‘찬이가 불을 안 껐나 보네. 전기세는 똑같이 나눠서 내는데....’ 라고 생각하며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해장 겸 아침으로 라면을 먹는데 찬이가 물었다. “어제 새벽에 주방 불 켜고 안 껐어?” 그러자 욱이가 “네가 나와서 불 안 끄고 간 거 아냐?”라고 되물었다. 찬이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셋은 동시에 라면 먹던 젓가락을 멈췄다. 1초, 2초, 3초 정도의 적막이 흐른 후 욱이가 “라면 뿐다!”라고 해서 다시 후루룩- 면을 빨아들였다.

우리의 찜찜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빛의 실체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나와 욱은 취업 준비를 빙자한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커뮤니티의 웃긴 글과 짤을 보고 있었고 욱은 헐벗은 여자들의 SNS를 진득하게 감상 중이었다.

“야! 빨리 나와봐-” 찬이 답지 않은 다급한 목소리에 나와 욱이 급히 거실로 나갔다.

우리의 주방 겸 거실에 빛나는 물체가 떠 있었다. 야구공만 한 크기에 구형의 그것은 화장실 전구 정도의 밝기로 광원의 가운데에는 검은색의 공간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둘러싸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신고할까? “찬이 말했다. “어디다?” 내가 대답했다. “신고하면 뭐라고 할 건데?” 욱이 덧붙였다. 흐음~ 셋이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이사 전에 나름대로 대비를 했다. 곰팡이가 생길 때는 이렇게 하자, 하수구가 역류하면 저렇게 하자, 집안일은 공평하게 분담하자는 식으로 세세하게 경우의 수를 다 정해뒀다. 하지만 이런 건 예상치 못했다.

“정체가 뭘까?”라며 욱이 빛의 구에 손을 대려 했다. 찬이가 재빨리 욱의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옆에 놓여있던 빈 맥주캔을 집어 빛을 향해 던졌다. 빈 캔은 광구(光球)의 가장자리에 맞고 튕겨 나왔다. 우리 모두 헉- 했다. 단순히 빛의 덩어리가 아니라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이다.

“블랙홀은 아닌가 봐. 물체를 튕겨내잖아.” 나와 욱은 찬이를 쳐다봤다. 우리 중 책을 가장 많이 보니 그의 의견이 맞을 것이다. 욱이 생각난 듯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나와 찬은 욱이 곁으로 다가가 사진을 확인했다. 일그러진 화이트와 블랙 패턴만 가득했다. 우리 주방이나 광구는 찍히지 않았다. 나와 찬이가 다시 찍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동영상도 같았다. 광구가 근처에 있으면 노이즈만 찍혔다.

우리 셋은 광구 옆에서 대책(?) 회의를 했다. 광구 덕에 전등을 켜지 않아도 되니 그건 좋았다. 머리를 맞댄 결과, 우리는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찬이에겐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가 있어서 그걸로 확인해봤더니 위험한 뭔가가 나오진 않았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직접적인 해가 없는데 괜히 신고 같은 거 했다가 집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면 난감한 상황이 되니 말이다. 또 우리가 모르는 가능성도 있다. 광구의 영향으로 슈퍼파워가 생기는 것이다. (이건 욱의 생각이다) 나는 어이없는 의견이라고 생각하지만, 찬이 동조해서 그런 가능성도 열어두기로 했다. (당연히 지금도 황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우리는 방사능으로 죽거나 슈퍼파워가 생기지 않았고, 광구는 주방 부근에서 위치를 바꿔가며 계속 나타났다. 그렇게 일주일쯤 됐을 때 우린 완전히 적응해서 광구에 대해 거의 신경을 끄게 됐다. 여전히 찜찜해서 만지거나 가까이 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광구는 불규칙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크기나 밝기도 매번 달랐다. 그래봤자 탁구공에서 야구공 사이였고 드물게 동시에 두 개가 발생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 하나만 생겼다. 뿜어내는 빛의 양도 달라서 밝을 땐 주방 조명을 대신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촛불을 켠 정도였다. 신기하게 광구가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광경은 한 번도 목격되지 않았다. 찬이는 양자 어쩌구 하면서 우리가 보고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관심이 사라져서 솔직히 상관없었다. 불편하니까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사라지길 바랄 뿐이었다.

 

우리가 광구를 달리 대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내가 설거지 당번인 날이었다. 하필 광구가 싱크대 위에 생겼다. 설거지하려면 광구 양옆으로 팔을 뻗어야 했다. 당연히 하기 싫었지만 우리는 규칙을 정해두었다. 자정까지 당번이 설거지를 끝내지 않으면 다음 날 내내 전원의 밥을 책임지는 것이다. 광구를 팔 사이에 끼고 설거지를 하는 편이 합리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가혹한 처사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주장한 규칙이고, 벌칙도 내 제안이다. 결국, 나는 광구를 둔 채로 그릇을 씻었는데 정말 불편했다. (나중에 그 모습을 본 찬이가 대야를 들고 화장실에서 하라고 했지만…. 거의 끝난 상태였다) 그릇을 다 닦고 개수대까지 훔치고 나자 화가 났다. 이 멍청한 빛나는 검정 공 때문에 목과 어깨가 아프다! 순간적으로 부아가 치밀어 나는 손날을 만들어 광구를 푹 쑤셨다. 어라? 예상과 달리 내 손은 어디에도 부딪혀 튕겨 나오지 않고 광구 한가운데로 쑥 들어갔다. 꼭 구멍에 손을 집어넣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얼른 고개를 숙여 광구 반대편을 봤다. 내 손이 광구를 관통한 거라면 반대편으로 삐져나와야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광구가 내 손을 먹었나!? 아니다. 잽싸게 손을 뺐는데 멀쩡하다. 마침 그 광경을 찬과 욱도 봤다.

내 손은 멀쩡했다. 구멍에 들어갔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광구 안은 딱히 차갑거나 뜨겁지 않았고, 만져지는 것도 없었다. 허공에 팔을 들고 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구의 테두리는 물리적인 형태지만 내부는 텅 빈 허공이란 거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와 욱은 찬의 결론은 기다렸다. 찬은 극적 효과를 노린 듯, 충분히 뜸을 들인 다음에 “웜홀이야.”라고 말했다. “웜홀?” 눈이 동그래졌다. 나도 들어본 단어다.

“그래, 저 건 이곳과 다른 시공간을 연결하는 구멍이 틀림없어.”

“그래……. 근데 연결해서 뭐에 쓰는데? 누가 왜 만든 거고?”

찬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다. 여전히 쓸데는 없다. 영화에서 보면 웜홀로 우주선이 막 워프를 하던데 우리 집 주방에 생긴 야구공만 한 거론 어림도 없다. 하지만 찬은 물리적 기준이 우리와 다른 우주에서 파리나 모기만 한 함선이 오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들은 난 이 집에서 내가 잡은 벌레가 수십 마리니 어쩌면 외계 종족 하나를 절멸시켰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당연히 웃으면서 농담으로!) 근데 찬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다큐로 받아들이다니…. 저 구멍에서 벌레든 뭐든 뭔가가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나와 찬이 웜홀의 용도와 처분에 관해 고민하는데 욱이 굴러다니던 맥주캔을 쑤셔 넣었다.

“좋다! 이렇게 쓰면 되겠네.”

“안 돼! 저기에 다른 차원의 네가 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쓰레기가 쏟아지면 좋겠니?”

“.... 내 머리 위로는 안 떨어지는데?”

“다른 존재가 있다면 말이야!”

“야, 그런 가정은 너무 오바 아니냐? 이쁜 여자는 다 남자가 있으니까 말 걸지 말라는 거랑 똑같잖아.”

나는 욱의 비유도 찬의 염려도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웜홀이 나타나 우릴 불편하고 귀찮게 한다. 그런데 누가 우릴 불쌍히 여겨 공과금이나 집세를 할인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웜홀을 이용해서 ‘쓰레기 버리는 귀찮음’ 정도는 해소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찬과 욱의 입씨름에 끼어서 중재를 시도했다. 너무 끔찍한 쓰레기는 버리지 말자고. 화장실 배수구에 낀 더러운 털뭉치라던지, 축축한 음식물 쓰레기 같은 거 말고 깨끗한 쓰레기들, 예를 들어 물로 헹군 빈 캔이나 과자부스러기를 털어낸 비닐봉지, 포장용 종이상자 같은 건 웜홀에 버려도 상대(?)에게 큰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니 말이다.

찬은 여전히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웜홀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한 나와 욱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한 쓰레기만 버리기로 합의를 봤다. 드디어 이 빌어먹을 구멍에 보조조명 이외의 용도가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웜홀은 우리의 충실한 재활용쓰레기통이 되었다. 그런 용도라도 있으니 웜홀을 대하는 게 훨씬 편했다. 고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왜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지 이해되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찬이는 본가에 일이 있어 며칠 집을 비웠고, 나는 멀리 있는 무역회사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출퇴근에만 3시간이 걸려서 집에선 잠만 잤다. 그날도 피곤에 쩔어 집에 왔는데 욱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욱은 단순한 아이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나는 피로 때문에 평소보다 더 차분한 태도로 욱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욱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저 웜홀 너머에.... 여자가.... 여자가 있을 거 같은 거야. 그런 느낌이 오더라고. 그래서 며칠 전에 손 넣고 인사도 했어... 그러니까 좀 친해진 기분이 들더라고. 그래서 오늘 낮에 혼자 있을 때 갑자기...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웜홀에다 내 물건을 넣어보면 어떨까? 여자가 만져줄 수도 있고, 안 만져도 별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 그래서 저 구멍에 니 그걸 넣었어?” 욱이 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그건 좀 무섭더라고. 혹시나 물건을 넣었는데 잘못되면 큰일이잖아.”

“그럼 안 넣었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물건 대신에 알을 넣었어.” “알? 고환?” 이번엔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마이, 갓! 미친놈, 완전 미친또라이다. 성욕에 미쳐서 웜홀에다 쑤셔댈 생각이나 하고, 거시기나 고환이나 별 차이도 없는데 거시기는 소중하니까 대신 고환을 집어넣는 똥멍청이!

“넣고 좀 있었는데 느낌이 오는 거야. 누가 내 알에 대고 킁킁대서 이렇게 야사시한 숨결이 닿는 그런 거 말이야.”

“......”

“살짝 흥분되더라고. 심지어 이렇게, 이렇게 사알짝- 더듬기도 했어.”

“더러운 손동작은 하지 말고 얘기해!”

“그렇게 만져질 때는 와- 알이 아니라 물건을 넣을 걸 그랬나? 싶었지. 근데! 갑자기 악- 소리가 나는 거야. 멀리서 들렸는데 그래도 분명히 남자 목소리였어. 진짜 간이 철렁하더라. 그리고는 내 알을 싸대기 때리듯이 때린 거야. 찰싹- 진짜 아프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욱의 얘기에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니라 컨디션이 최고로 좋은 상태였어도, 절대로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온갖 감정이 지나갔다. 동정심과 혐오감, 측은함과 불쾌감, 화도 나고 어처구니도 없고……. 문득 짧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 얘긴 찬에겐 비밀로 해야겠다, 이제 웜홀에다 아무것도 버리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만약 욱의 고환과 마주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손바닥으로 찰싹- 때려서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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