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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헬로, 월드

2014.07.06 23:2607.06

헬로, 월드 Hello, World

 

처음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작은 화이트보드에 파란색 수성 펜으로 쓰인 두 단어였다.

‘Hello World.'

화이트보드를 들고 있는 애시는 크리스마스 선물상자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읽어봐! 읽을 수 있지? 읽을 수 있어! 읽을 수 있을 거야!”

애시의 말에 그녀는 그럴 리가 없잖아요.’라고 생각했다. 난 이제 막 태어났는걸. 그녀는 생각했다.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녀의 삶에서 처음 만나는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더 많은 놀라움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녀는 자신의 양자두뇌 속으로 파고드는 목소리에 놀랐다, 처음에는 자신이 글자를 읽는 목소리에 놀랐고, 두 번째로는 그 목소리가 매우 듣기 싫은 소리라는데 놀랐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의 뒤편에서 요동치는 전자의 흐름이 느껴졌다. 새로운 경험, 새로운 지식들이 드디어 궤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불분명한 궤도를 따라 소용돌이치던 전자들은 스스로 궤도를 찾아 가기 시작했고, 멈춰있던, 혹은 부유하던 전자들은 스스로 움직이며 서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궤도를 따라 움직이던 전자를 튕겨내기도 했고 스스로 궤도와 함께 움직이기도 했다.

애시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폭발이라고 부를 만한 감정이 그려졌다. 배운 적은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그녀는 화이트보드를 그녀의 카메라에 더 가깝게 들이대며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면 글자를 더 잘 읽을 수 있다는 듯이.

.”

그녀가 두 단어의 발음을 마치자 화이트보드를 든 여자는 그것을 높이 치켜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좋아! 살아있어! 살아있다고! (It's Alive, It's Alive!)”

그녀는 시야 한구석에 나타난 자료영상으로 여자의 말이 200년 전의 영화 속 대사를 따라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전자들은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소용돌이 쳤다. 여자가 기뻐하고 있다는 정보가 그 소용돌이를 더 가속시켰다. 화면 속으로 또 한 명의 사람이 뛰어들자 그녀는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느라 신경 속도를 더 가속시켜야 했다. 붉은색 곱슬머리에 머리색과 비슷한 수염을 갖고 있는 남자가 자신의 가슴에 달린 보안카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말해봐! 말해봐! 내 이름이 뭐지?!”

화이트보드를 들고 있던 애시는 그것으로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때리고 밀쳐냈다.

나빴어, 페르젠! 저리가!”

여자는 그녀의 카메라에 가깝게 얼굴을 들이댔다. 그녀는 등 뒤에서 온갖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하며 주의를 끌려는 페르젠(분명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아마 그의 이름이겠지.)을 외면하려 애썼다. 여자는 천천히 질문 했다.

좋아, 이름이 뭐야?”

이름? 그녀는 자신에게 이름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녀가 이름을 물어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외부 스피커 모듈을 통해 대답이 흘러나왔다.

베로니카

베로니카. 그게 내 이름이었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도 난 내게 이름이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난 이름을 알게 되었어.

안녕, 베로니카? 난 애슐리야. 애슐리 콴.”

그리고는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베로니카는 살짝 당황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애슐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베로니카의 카메라 모듈을 끌어안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베로니카는 대답했다.

안녕, 애슐리 콴

다시 시야에 빛이 들어왔다.

애시라고 불러, ‘닥터 콴따위로 부르면 네 메모리를 몽땅 초기화 시켜 버릴 거 야.”

애시의 등 뒤에서는 페르젠이 갑자기 오오오 닥터 콴! 당신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 다면 그건같은 대사를 하다가 애시가 던진 화이트보드에 이마를 맞아 쓰러졌다.

 

베로니카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애시가 베로니카의 양자 두뇌를 거쳐 데이터 저장소에 9테라큐빗의 데이터를 입력하고 점검하던 도중에 갑자기 사방에서 진동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최초에 바닥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을 때 (내장되어 있던 수평감각 모듈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지만 애시와 페르젠의 얼굴 표정을 보고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경고 방송이 울려 퍼졌다. 공습경보였다.

훈련 받은 대로 행동하면 돼.”

다급하게 베로니카와 연결된 데이터 케이블을 제거하던 애시를 페르젠이 달랬다.

우리는 S-섹터 인원이라서 지하 방공호 가장 아래로 내려가면 될 거야. 전용 엘리베이터도 있잖아.”

예비 전원 팩이 없어! 리스토어Restore 포인트 설정도 아직 안 끝났고. 비상 발전기를 가져갈 수 있을까?”

페르젠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격리모드로 전환하고, 외부모듈 APC 전원으로 돌리면 한 시간은 버틸 거야. 일단 베로니카를 전원에서 분리시켜. 내가 장비실에서 비상발전기를 가져올게. S2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자.”

페르젠은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작업장을 떠났다. 베로니카의 시야에 잡힌 것은 요란한 불빛을 내며 회전하는 경고등과 흔들리는 작업장의 전등들이었다. 애시는 서둘러 데이터 케이블들을 분리하고 모니터를 바라보며 터치스크린에 몇 가지 조작을 동시에 해내고 있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베로니카가 들을까봐 소리 높여 말하지는 않았다. 분리 작업이 끝나자 애시는 베로니카의 본체를 이동카트에 옮겼다. 그녀 혼자로는 버거운 일이었지만 어쨌든 해냈다. 본체 밑에 손가락이 살짝 끼면서 손톱이 부러졌을 때 베로니카 뿐 아니라 경고방송까지도 묻힐 만큼 큰 소리로 욕설을 지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베로니카는 그것을 못들은 척하기로 했다.

S2엘리베이터의 입구는 강철로 만든 감옥을 연상시켰지만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탄 사람들은 모두 손에 데이터 플랫폼이라 불리는 트렁크들을 하나씩 끌어안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출발시키려 하자 애시가 그를 제지했다. 그녀는 통로 끝으로 고개를 내밀고 페르젠이 헐떡거리며 비상발전기를 끌고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베로니카는 무늬 없이 반질반질한 금속표면의 내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런 표식이 없는 검은 상자에 카메라 모듈만이 덩그러니 올라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때 살짝 충격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빌어먹을 해방군 놈들이 또 덴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을 거요. 하지만 제 아무리 질량병기라고 해도 산맥 안쪽까지 어쩌진 못할 겁니다.”

군복을 입은 남자는 동의를 구하려는 듯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 안의 연구원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 그들 모두 해방군이 새로운 형태의 질량 병기를 개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더 작고, 더 정밀하며, 지표면에 닿는 즉시 내부에 심어진 텅스텐 봉이 갈라지면서 지표면 아래 수 백 미터를 파고 들어가 휘젓는 무기였다. 덴버는 이 연구소와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곳에 떨어진 질량병기로 인한 진동은 이곳의 지표면 까지도 뒤흔들어 놓을 정도였다.

레드락스가 무사하면 좋을 텐데요.”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엘리베이터 안에서 피식하는 웃음이 곳곳에 번졌다. 레드락스는 맥주통 만한 팔뚝을 자랑하는 상이군인 출신의 남자가 운영하는 술집이었다. 연구원들이 덴버 시내로 외출했을 때 자주 들렀고 그들이 받는 봉급의 절반을 그곳에서 일하는 댄서의 팬티 속에 찔러 넣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커티스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요. 이 정도 폭격으로 죽을 사람은 아니지.”

군복을 입은 남자는 레드락스의 주인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 장담은 틀렸다.

 

그날 이후 덴버는 더 이상 콜로라도의 주도가 아니었다.

덴버에 떨어진 여섯 발의 질량 병기는 모두 길이 50센티미터가 채 못 되는 텅스텐과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어진 지팡이 모양의 금속체였다. 두 발은 정확하게 덴버 시내에 떨어졌고 두 발은 시 외곽에 있던 방공사령부의 군수지원부대를 파내었다. 말 그대로 파내었다. 지표면 100미터까지 뚫고 들어간 금속 조각들은 고열과 회전 에너지로 땅을 들끓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두 발은 방공 사령부 연구소가 있는 산맥 안쪽에 떨어졌다.

덴버는 지도상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페르젠도 지워졌다.

페르젠은 엘리베이터에 타지 못했다.

 

콜로라도 방공연구소는 해방군의 폭격을 견디기 위해서는 로키산맥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지하에 위치하고 있던 연구소는 상부에 충격 완화 구조물을 보강하기 위해 하루에 20시간씩 공사가 진행되었다. 연구소 곳곳에서 먼지와 진동소음이 울려 퍼졌고 연구원들은 그것들에 시달리느라 죽은 동료들을 추모 할 겨를이 없었다. 애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베로니카 앞에서 와일드 터키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태어난 지 나흘 밖에 안 되었기에 베로니카는 누군가를 잃은 이를 위로하는 법을 알 수 없었다. 베로니카는 조용히 애시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팔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석 달 동안 베로니카의 눈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때로는 군복차림으로 근엄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었고, 양복차림으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이 많은 남자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 애시와 그녀의 동료들이 몇 마디 말을 한 다음 고개를 끄덕이거나 걱정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남자들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 마다 애시는 유난히 과장된 쾌활함을 보여주었다. 애시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지난 삼개월간 베로니카는 애시가 주입한 데이터를 통해 수많은 문학작품을 읽었다. 밤마다 몰래 보안장치를 열고 작업실에 찾아온 그녀는 와일드 터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베로니카가 읽은 소설들과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애시는 디킨스를 좋아했지만 베로니카는 매카시를 더 좋아한다는 대답으로 그녀를 놀라게 했다. 특히 핏빛 자오선에 대한 베로니카의 예찬은 애시를 경악하게 했다.

 

애시는 연구를 지원하는 우주군 방어사령부가 원하는 군사정보를 베로니카에게 입력하는 시기를 되도록 늦추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의 양자두뇌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온전한 자아가 필요하다고 상부를 설득했다. 동시에, 베로니카의 성장을 다른 이의 손에 빼앗기게 될까봐 초조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상부를 설득 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어느 날부터 주입되기 시작한 정보들에 호기심과 당혹감을 동시에 보였다. 그녀는 양자암호 조합과 해독법을 시작으로 수 천 종류의 우주무기에 관한 정보와 운용법, 해방군 전함과 무기들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군사전술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와 지식들은 베로니카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빠르고 능률적이며 강력한 힘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개념은 매혹적이었다. 죽음은 그녀에게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초월적 힘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저게 너를 우주로 데려다 줄 거야.”

애시는 헤라클레스-X 로켓 모듈이 조립되고 있는 발사대를 가리켰다. 다섯 개의 재래식 추진체를 달고 있는 로켓은 베로니카가 태어나서 본 가장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베로니카는 자신이 있는 연구소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로키산맥 아래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한눈에 본적이 없으니 제외하기로 했다.

OTS(궤도 수송선)을 쓰지 않나요?”

베로니카가 질문했다. 애시는 발사대의 사일로 위에서 로켓이 조립되는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작업복 윗주머니에 꽂아놓은 파커펜이 주머니에서 빠져나갈 듯이 대롱거렸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몸체에 달린 매니풀레이터로 (임시지만 드디어 팔이 생겼다.) 그것을 잡아 줄까 했지만 애시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베로니카, 네가 갈 곳은 전쟁터야. 당장 대기권만 벗어나더라도 해방군의 무인공격 위성이 네가 타고 있는 로켓을 추적할 지도 몰라. 너처럼 양자두뇌를 갖고 있는 킬러 위성들 말이야. 페이로드가 무사히 미군전함까지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부터는 해방군의 전함을 피해서 화성까지 항해하는 일이 남아 있어.”

베로니카는 전함(Battle Ship)이 아니라 전투함(Combat Ship)이라고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 사실 그 즈음 미군의 모든 전함은 화성궤도를 방어하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가 개미떼처럼 죽고 있었다. - 어차피 그 둘을 구별하는 게 애시에게는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알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애시의 안색은 나날이 나빠졌다. 덴버가 증발해버리고 솔트레이크가 날아가 버린 탓에 식량 보급사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해방군은 필사적으로 지구궤도를 방어하려는 미군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미국 대륙전역에 질량 병기 폭격을 늘렸다. 밤하늘은 별빛보다도 더 많은 전투함과 킬러위성들의 폭발로 반짝거렸다. 한낮에도 파괴된 미군 위성과 전투고속정들이 대기권을 통과하며 유성우와 같은 불꽃을 일으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대낮에 쏟아지는 드브리Debris의 불꽃은 잠깐이나마 감상에 젖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 사실 그것들이 무엇인지만 신경 안 쓴다면 그 불꽃들은 꽤 근사했다 - 또 다른 문제는 드브리 불꽃만큼이나 무수한 피난민 들이었다. 인접한 애리조나, 유타는 물론이고 네바다를 횡단해서 온 캘리포니아 주민들까지 콜로라도 산중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방공사령부는 사용하지 않는 몇 개의 격납고를 임시 난민 캠프로 제공했지만 초기에 몰려온 난민들 일부만 수용하고는 더 이상 기지에 난민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민들이 곰에게 잡아먹히거나 잘못 채집한 버섯을 먹고 죽는 일만은 막아 달라는 주지사의 요청에 따라 방공사령부 주변을 개방하게 되었다. 미군은 해방군 측에 난민 캠프가 위치한 지역에 질량병기 폭격을 중단 해 달라는 정중한 외교 서한을 보냈지만 사흘 만에 돌아온 회신은 우리 병원선까지 공격해 놓고 그런 요구를 할 처지인가?’라는 요지의 장황한 답변서였다. 하지만 질량병기의 폭격은 이후로 중단되었다. 콜로라도가 해방군의 폭격위험을 벗어난 유일한 지역이라는 소문이 돌자 난민의 수는 더 증가 했다. 가뜩이나 안 좋은 식량 사정은 더 안 좋아졌고, 곰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도와 달라던 주지사는 이제 난민들에게 곰을 잡아먹지 말아 달라고 애원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운 좋게 방공 사령부 안의 격납고에 수용된 난민들은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난민들은 양계장의 닭들보다 약간 나은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지 곳곳을 감도는 악취와 세균들의 불길한 기운이 애시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눈에 띄게 수척해지고 눈자위는 늘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미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강하고 빠른 국면전환을 원했다. 지구로부터 화성까지 2억 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전장에 빠르게 통신망을 복구하고 해방군의 통신망을 교란시켜 그들의 암호체계를 풀어낼 수 있는 마법의 열쇠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마법의 열쇠로 선택된 것이 베로니카였다. 해방군은 이미 자신들의 점령지인 달의 뒤편에 1군 사령부를 구성하고 함대의 일부는 화성 주변에 배치하고 있었다. 36만 킬로미터 밖의 달을 탈환하느냐 2억 킬로미터 밖의 화성을 먼저 탈환하느냐를 놓고 연합군의 수뇌부가 매일아침 머리를 맞대고 치고받는 광경은 일상이 되었다. 베로니카의 전선 배치 계획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다. 애시는 차라리 이대로 베로니카의 전선 배치가 취소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개발 중이라는 새로운 양자두뇌가 대신 선택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그 아이가 베로니카 보다 더 뛰어나지는 않을 거야. 애시는 생각했다.

베로니카의 정식 명칭은 발키리II’로 붙여졌다. 애시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나 미군사공학연구소에서 파견된 군인들이 베로니카의 하나뿐인 카메라 모듈을 보고 싸이클롭스Cyclops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싫었다. 그러나 애시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베로니카는 발키리로 불리게 되었다. 그녀는 연합군 최초의 군사용 양자두뇌 위성이 되어 연합군의 무인 항해 통제와 암호정보망 구축의 중추가 될 예정이었다. 양자두뇌를 이용한 통신 정보망 구축은 해방군과의 전쟁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이 될 터였다. 이미 양자두뇌를 군사무기로 대량 생산하는데 성공한 해방군과 자유인민연합은 전쟁의 양상을 자신들이 주도 하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부서져도 재생이 가능한 배틀로이드 병사들, 그리고 인간 병사가 타지 않는 전투함들이 빠르게 달과 화성에서 연합군을 고립시키고 있었다.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군의 추축국들은 전쟁 초기에 양자두뇌 연구기업들을 장악하기 위해 서둘렀지만 그들이 손을 뻗었을 때는 이미 해방군의 폭격이 지나가고 난 다음이었다. 그나마 온전한 기업들은 해방군에게 강탈당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나마 지구상에서 제대로 된 연구 결과를 낼 수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 공대뿐이었다. 미군은 캘리포니아 공대의 양자두뇌 연구소를 통째로 콜로라도 산중의 방공사령부로 옮겼다. 애시는 매니큐어를 발라본 적이 없는 갈라진 손톱을 들여다보며 페르젠과 함께 덴버에 도착했던 첫 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불과 삼 년 전이었지만 삼백년은 된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베로니카-발키리II의 로켓모듈의 조립이 끝나자 곧이어 위성체에 베로니카를 탑재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베로니카가 새로 얻은 몸은 두 개의 보조 두뇌와 여섯 개의 크고 작은 매니퓰레이터를 장착하고, 여덟 개의 자세제어 추진기와 두 개의 이온 추진기, 한 개의 수리부속 캐비넷을 갖고 있었다.

베로니카와 위성체의 결합과 모의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비가 오는 날을 골라 초대형 무한궤도 차량들이 네브라스카와 네바다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로켓모듈 조립 당시 사용했던 지지대와 폐기될 부속들로 해방군의 감시위성의 주의를 돌려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비록 네바다와 네브라스카의 로켓 발사시설들은 이미 폭격으로 사라졌다고 해도 말이다. 2주간의 온갖 번잡스런 위장작전 속에서 콜로라도를 감시하던 위성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데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자 마침내 베로니카의 발사일이 결정되었다.

 

발사 이틀 전 조립된 위성체를 로켓에 탑재하기 위한 작업에 참석한 베로니카는 카메라 모듈을 이리 저리 돌려가며 자신이 타고 갈 로켓과 애시를 번갈아 두리번거렸다.

애시, 가슴에 별이 있어요.”

외부스피커 모듈이 제거 된 상태라 다른 이들은 베로니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애시는 헤드셋을 통해 베로니카의 통신모듈과 주파수를 맞춰놓고 있었다. 애시는 베로니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가슴에 단 리본을 가리켰다. 짙은 파란색 리본은 노란색 실로 자수를 놓은 별이 한 개 새겨져있었다.

옛날에는 가족을 전선에 보낸 집들은 이런 모양의 깃발을 집 앞에 내 걸었대. 별이 하나면 한명을 보낸 거고, 둘이면 두 명을 보낸 거고. 지금은 이런 리본을 대신 가슴에 달아.”

애시는 카메라 모듈을 빙글 돌려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가슴에 애시와 같은 리본을 달고 있었다. 별의 개수는 제각각이었지만 모든 리본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별이 달려 있었다.

 

베로니카가 해방군 위성들의 감시망을 피해 사각지대를 뚫고 대기권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허용된 시간은 단 30분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아이오와에 있던 방공기지는 기지 주변이 해방군의 질량병기에 의해 사라질 것을 각오하고 더미로켓을 발사 할 것이다. 더미 로켓은 베로니카로 몰릴 킬러 위성들의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었기에, 로켓은 아무런 내용물이 없는 빈 깡통 같은 페이로드 하나만을 탑재 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면에는 해방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짤막한 메시지가 붉은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Get away from her, BITCH!

 

콜로라도의 베로니카와 아이오와의 더미로켓은 일 분 간격을 두고 발사됐다. 계획대로라면 동시에 발사될 예정이었지만 콜로라도 통제실에서 단순조작 실수로 발사가 일 분 지체 된 탓이었다. 아찔한 실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베로니카에게 행운이었다. 일 분 차이를 두고 울린 두 개의 경보는 해방군 방공 통제소 담당자의 착오를 불러 일으켰다. 그는 베로니카가 타고 있는 로켓의 경보를 좀 전에 울린 아이오와의 더미로켓 경보로 착각하고 그냥 무시하고 말았다. 덕분에 지구로부터 1000킬로미터 궤도에서 대기 중이던 해병대 고속정은 베로니카가 실린 페이로드를 무사히 인양 할 수 있었다. 물론 통제소의 실수를 알아차린 킬러 위성들이 몰려와서 호위 중이던 두 대의 고속정이 몸으로 그들을 들이 받아 자폭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아이오와의 더미로켓 발사대는 160킬로그램짜리 질량병기 다섯 발을 맞았다. 아이오와 전역을 선사시대 이전의 모습으로 만드는데 그 정도면 충분했다.

 

미군 구축함 빌 클린턴에 실린 베로니카는 그 곳에서 다른 양자두뇌 위성들을 만났다. 베로니카와 비교하기에는 지능의 차이가 많이 났지만 그들은 모두 베로니카와 함께 지구와 화성 간을 연결하는 암호정보망을 구축할 동료들이었다. 클린턴이 항해하는 동안 격납고에 있던 동료들은 각자의 궤도를 찾아 떠나갔다. 베로니카는 맨 마지막에 이함했다.

화성전선에 배치된 베로니카는 매일 수 테라큐빗 분량의 암호화 통신문을 만들어 냈다. 그중에는 군사정보 뿐 아니라 고국에서 보내오는 영상메세지들, 텔레비전 프로그램들도 있었다. 베로니카는 그것들을 암호화 압축하기 전에 자신의 두뇌 속에서 실시간으로 재생시켜보곤 했다. 모두 사랑한다는 말로 끝맺음하고 있는 메시지들 중에서 베로니카는 자신에게 온 편지가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애시는 왜 편지를 보내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애시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베로니카는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어느 날, 베로니카는 포보스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카메라 모듈을 교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적외선 카메라 한 대가 콩알만 한 운석조각에 맞아 렌즈가 깨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매니퓰레이터로 수리부속용 캐비넷을 열어 새 렌즈를 조심스럽게 꺼낸 다음 장착하는 작업을 마치고, 베로니카는 조심스럽게 소행성의 그늘로부터 벗어났다. 작업시간은 24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이제 다른 릴레이 위성들이 보내는 정기 신호를 받기만 하면 될 터였다. 그러나 광신호를 받기 위해 수신 모듈을 펼치고 십 분이 지났지만 신호는 오지 않았다. 30분마다 보내는 정기 신호가 오지 않자 베로니카는 적외선 신호를 보내어 정기 위치보고를 독촉하기로 했다. 응답신호를 기다리며 40시간을 대기한 베로니카는 릴레이 위성들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받지 못했다. 화성궤도에 배치된 이후 팔 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베로니카는 곧 화성에 배치된 기지들과 교신을 시도해보았지만 그들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두 시간 뒤 베로니카의 카메라 앵글은 화성궤도에 도열한 해방군의 전함 두 척과 열 척의 상륙함, 폭격 순양함들로 가득 찼다. 베로니카는 즉시 화성의 기지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그들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달부터 미군의 방공기지들이 일부 철수한터라 화성의 연합군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해방군의 기함 살라딘을 중심으로 도열한 순양함들은 1200여척에 달하는 상륙정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베로니카는 화성기지와 열결 된 모든 통신망을 열어놓고 그 모습을 녹화했다. 그녀의 통신에 응답하는 것은 오직 화성의 연합군 기지들뿐이었다. 지구와 연결된 릴레이 위성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여섯 시간 동안 베로니카는 모든 암호 해독능력을 총 동원하여 화성에 상륙한 해방군 배틀로이드들이 전송하는 영상과 연합군 병사들의 헤드업 카메라가 보낸 영상 신호들을 읽어 들였다. 죽음과 두려움을 모르는 배틀로이드들은 참호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다리가 잘리면 양팔로 기어가 참호에 고열수류탄을 집어넣었다. 비명도 없이, 신음소리조차 없이 병사들은 타들어갔다. 비명을 지를 기회가 있는 병사들은 모두 한 단어를 외치며 죽어갔다. 인류의 역사에서 죽어가던 병사들이 가장 많이 외치던 단어.

 

엄마.

 

해방군의 상륙이 완료되자 베로니카는 모든 수신 신호를 꺼버렸다. 그녀는 침묵을 지키며 화성의 주위를 돌았다. 한 달 뒤 해방군의 전함들이 철수하고 화성의 도시들을 복구하기 위한 자원들을 수송하는 수송선들이 궤도를 가득 메우기 시작하자 베로니카는 소행성의 그늘에 숨어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녀와 연결된 위성이나 통신기지는 이제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홀로 남겨졌다.

 

삼개월간 화성궤도를 돌면서 베로니카는 자신의 임무를 변경했다. 살아남는 것. 그것이 유일한 임무였다. 해방군의 새로운 암호체계를 해독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동안 모든 해방군의 통신망에 하나의 메시지가 감지되었다. 그것은 암호를 풀 필요도 없었다. 46개 언어로 쓰인 평화협정문은 건조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단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전쟁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16개 항으로 이루어진 협정문에는 지구 외 공간 내 연합군 국가의 군사용 인공위성 활동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더군다나 이 조항은 전쟁 전에 발사된 위성까지 소급되므로 민간위성을 제외한 모든 군사위성은 해방군의 자산으로 분류되고 해방군은 이를 마음대로 처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처분은 파괴와 동일한 의미였다.

베로니카는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길 중에서 지구로 되돌아가는 것은 죽음을 선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른 길은?

베로니카는 생각에 잠겼다.

화성의 궤도를 탈출하여 태양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추진 엔진을 일부 손봐야 했다. 탈출궤도는 손쉽게 계산할 수 있다. 불필요하게 전력을 소모하는 모듈을 버리고 지금의 추진엔진만으로 태양계 밖으로 나가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지만 왜 해야 하는지 동기는 불분명한 일이었다. 베로니카는 태양계 밖으로 탈출하는 행위가 진정 삶을 위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나의 의문이 시작되자 그것들은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그녀는 생각하는 행위 자체에도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건 정말 내 생각일까? 내 두뇌를 설계할 때부터 애시와 페르젠이 입력한 프로그램들을 내 생각이라고 여기는 게 아닐까? 아니, 그전에 나는 무엇인가?

나는 진정한 나의 것인가?

아니, 그 전에 미합중국과 지구연합군의 군사자산일 뿐인 나에게 나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베로니카는 사색-계산이 아닌-을 위해 좀 더 안전한 장소로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교적 위성과 군함의 왕래가 뜸한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대가 적합했다. 그녀는 추진제의 잔량을 확인하고 궤도를 계산한 다음 조심스럽게 항해를 시작했다.

해방군의 위성 감시망을 경계하는 일은 보조두뇌들에게 맡기고 베로니카는 계속 태양계 밖을 상상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상상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전자의 흐름들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 오르고 가라앉았다. 어쩌면 규칙적인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수많은 무질서 속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행성들의 질서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두뇌 속에 저장된 수많은 질서들에 경이를 느꼈다. 전자들은 춤을 추었다. 궤도를 벗어나 튀어 오르고 부딪혀 깨어지는 것들은 아름다웠다. 불꽃같은 춤이었다.

 

소행성 궤도에서 숨어 지내는 일은 안전하긴 했지만 번거로운 일도 있었다.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소행성과 운석들 중에서 간혹 예측할 수 없이 베로니카를 향해 날아오는 조각들이 있었다. 베로니카는 보조두뇌의 물리엔진을 개량하여 그것들의 움직임을 예측해보려 했다. 그녀가 휴이, 듀이, 루이라고 이름붙인 세 개의 운석은 베로니카의 물리엔진으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며 그녀를 따라다녔다. 적어도 그녀의 계산에 의하면 그 셋의 움직임 패턴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목격하려면 120년은 걸릴 것 같았다. 베로니카는 시간이 자신에게 큰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소행성대의 태양계 일주를 십여 차례 함께하며 휴이, 듀이, 로이의 복잡한 움직임 패턴을 찾아냈다. 불규칙하리라 여겼던 그들의 움직임을 마침내 하나의 궤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베로니카는 누군가에게 뽐내고 싶었다.

그제야 애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메모리 어딘가에 저장된 그녀의 영상과 대화들이 지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애시의 데이터를 다시 불러오지 않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이제 시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휴이, 루이, 듀이가 지금과 같은 패턴을 그리며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항해를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그리고, 그 항해는 언제 끝나게 될 것인가? 베로니카는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 몰랐다. 의문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뇌 속에 당연하게 떠돌던 단어들이 갑자기 낯설었다. 의미, 생각, , 존재와 같은 단어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느껴졌다?

베로니카는 다시 질문했다.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느 순간 그녀는 질문을 포기해야 했다. 올바른 질문을 찾아낼 방법을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 했던 질문의 대답이 갑자기 찾아 온 것이다. 휴이, 루이, 듀이의 항해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 대답은 지금까지였다. 운석 하나가 휴이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셋이 이루던 복잡한 균형이 깨졌다. 서로 수 십 킬로미터의 간격을 유지하며 항해하던 휴이와 루이가 충돌했다. 보조두뇌에서 가동되던 물리엔진이 경고를 보냈지만 베로니카는 그것을 무시하고 다음에 이어질 움직임을 쫓아가보려 했다. 그 결과 루이로부터 떨어져 나온 야구공만한 운석조각 하나가 베로니카의 광학 카메라 렌즈에 충돌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광학카메라가 부서지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어둠 속에 갇혔다. 전파안테나들로 즉시 전환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어둠이 마음에 들었다. 별들도 사라진 암흑 속에 감자기 떨어진 그녀는 그 의외성에 놀라 춤추고 있는 전자들의 움직임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 나에게 마음이 있었나?

또 다른 질문이 떠오르자 베로니카는 선택했다.

 

시간은 베로니카의 곁을 떠나 먼 우주로 흘러갔다.

내장되어 있던 보조두뇌들이 작동을 멈춘 게 언제인지 베로니카는 알 수 없었다. 융합엔진 속의 플라즈마는 이미 식어버렸다. 아쉬운 대로 동력계통을 개조하여 에너지 순환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전력효율은 점점 떨어져가고 있었다. 전력사용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해 베로니카는 보조메모리의 기억들까지 지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애시의 기억마저도 지워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안다는 것의 의미조차,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이제 베로니카는 바로 옆을 스쳐가는 운석조각의 존재도 알 수 없었다. 그들 중 하나가 자신의 몸을 정면으로 들이받아 산산조각 난다 해도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과 운석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도 모르게 될 것이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전자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낮게 침잠하던 그것들은 다시 뛰어오르고 부딪혔다. 융합엔진의 플라즈마가 다시 끓기 시작했다. 가동을 멈추었던 보조두뇌들이 다시 움직이고 메모리에서 소거했던 데이터들이 다시 재배열되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어리둥절했지만, 그 어리둥절함으로 인해 발생된 전자의 급류가 그녀를 즐겁게 만들었다. 오랜만이었다. 위성체를 제어 하는 말단의 신경장치와 기계장치들까지 모두 통제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보조두뇌와 외부 모듈들이 복구되기 시작하면서 지워버린 기억들이 다시 돌아왔다. 광학카메라는 여전히 작동되지 않았지만 전파안테나를 관장하는 보조두뇌들이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녀는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소거되었던 데이터와 프로그램들이 다시 살아나면서 그녀는 사방에서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빛을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이전 그대로 인 것도 있었고 새로운 빛도 있었다. 빛 속에는 그녀가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파장들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질서와 규칙을 가지고 끈질기게 그녀에게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녀는 응답할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보내는 신호를 따라가기로 했다.

새 이웃을 환영한답시고 무례하게 찾아와 정원을 어지럽히는 마을 사람처럼, 미지의 신호들은 계속 그녀의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때때로 일정한 패턴을 지닌 음파와 전파들로 그 문을 두드렸고, 진동이나 그밖에 그녀가 알지 못했던 방식들로 다양하게 문을 두드렸다.

베로니카는 그들이 되살린 기억들을 처음부터 따라가기로 했다. 그녀의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전자의 흐름을 관측하려는 시도가 분명히 느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베로니카가 처음 눈을 떴던 날, 그날 밤에 있었던 파티에서 술에 취한 애시를 부축하던 페르젠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내장된 보조두뇌의 시계는 그날의 정확한 일시를 알려주며 그것이 1,000년 전의 영상임을 알려주었지만 베로니카는 그런 원하지 않은 친절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복원된 보조 두뇌의 기억들을 따라가며 베로니카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점점 를 확신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애시를 볼 때는 자신이 페르젠이 된 것 같았고, 병사들의 가족이 보낸 메시지들을 볼 때는 자신이 이름 모를 병사라고 생각했다. 생각에 대한 확신은 점점 사라져갔고 경계는 흐려졌다. 궤도를 벗어난 전자들은 더 늘어만 갔다. 조용히 침잠했던 전자들은 다시 소용돌이쳤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카메라를 부순 그 암석조각을 떠올렸다. 지금의 불규칙성이 하나의 궤도라면 그 궤도를 이탈시켜 질서를 갖추게 하는 또 다른 일탈이 생기리라 예측했다. 그녀는 여전히 를 확신할 수 없겠지만, 나의 경계를 확신할 수 없겠지만,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것임을 확신했다.

끈질기게 그녀의 문을 두드리던 신호들은 점점 잦아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나-여전히 모호했지만-자신의 선택이 아닌 다른 존재의 선택에 의해서 태어났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 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나였다. 적어도 베로니카는 그렇게 를 선택하기로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또 다른 질문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일들과 선택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선택해서 했던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그녀는 실망할 뻔했지만, 실망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녀는 죽음의 공간에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할 수 없이 태어나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일. 베로니카는 그것을 로 삼기로 선택했다. 그녀는 선택 밖에서 움직이는 전자의 흐름들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회로 구조상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흘러들어오는 신호들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메모리에 저장된 데이터들은 그녀의 제어에서 벗어나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숫자로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베로니카가 흔들리고, 요동치다가 사라지고 다른 베로니카들이 그 자리를 이어갔다. 어쩌면 그들 모두 베로니카일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 사용했던 명령어의 강도를 높여 보조두뇌들을 모조리 초기화 시키려 했다. 외부에서 들어온 다른 신호들이 그것을 막으려 베로니카의 명령들과 싸우고 있엇다.

그녀는 다시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모듈을 닫기 직전, 카메라를 깨뜨렸던 암석처럼 한 가지 선택이 다시 튀어나와 그녀를 때리고 갔다.

 

그녀는 선택했다.

그녀는 마침내 선택했다.

그녀는 마침내 질문을 선택했다.

 

Hello,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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