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는 혼자서 여행하는 며칠 동안 딱히 목소리를 낼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 쓰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여행은 끝났고,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색하게 여겨지는 현실생활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여행지 시각으로 자정이 넘어서 비행기에 탑승한 그는 잠시 눈을 붙였다. 몇 시간이 지나, 약한 복도 전등이 켜지고 승무원이 음료를 서빙하기 시작했다. 원래 신경이 예민한 그는 벌써 잠에서 깨어있었지만 멍한 피로감을 느끼며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에게도 승무원이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틀어올려 바짝 묶은 머리와 유니폼 깃 아래에 살짝 걸친 명찰을 연이어 바라보았다. 'Angie'.

 그녀는 쟁반 위에 물과 오렌지, 사과 주스를 받쳐 들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 기계적인 동작으로 그와 눈을 맞추어 깨어있는 것을 확인하며 물었다. "음료 하시겠습니까?"
 그는 두어 시간 전에 받았던 플라스틱 컵을 집어들어 그녀의 쟁반 위에 가만히 올렸다.

 

(엔지는 비행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되는 신입 승무원이었다. 대게 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녀도 절반의 열정과 절반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행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장시간 비행, 잦은 시차의 변화, 그리고 고된 스케쥴을 견뎌내야만 했다. 엔지는 그래도 깨끗한 유니폼과 넓은 공항이 마음에 들었다. 직원 전용 게이트를 통과할 때면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좋았다.)

 

 그녀는 그가 말없이 컵을 올리자,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재빨리 파악하려고 했다. 물을 담는 컵과 주스를 담는 컵은 색깔이 달랐고 그의 컵은 이륙한 지 30분쯤 지났을 때에 제공되었던 물을 담는 컵이었다. 그녀는 물병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물을 원하는지 아니면 그냥 컵을 치워주길 원하는지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는 컵을 쟁반에 올리고 나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적당히 매력적이었고, 그는 과거에 만났던 몇 명의 여자들.. 그리고 그가 실패로 이끌었던 많은 대화를 떠올렸다. 물론 그녀에게 수작을 걸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문득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영어로 다시한번, 그 다음에는 불어로 물었을 때까지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러자 잠시후 그녀는 '아'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얼굴을 살짝 붉혔고, 그의 컵에 물을 따라 돌려주고 다음 좌석으로 향했다.

 

 그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가 그를 농아로 판단했다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앞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상대가 알아챈다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가! 그는 자신이 벙어리였다면 얼마나 사교적이고 유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를 생각했다. 말을 할 수 없었다면 그들은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이해하려고 했을 것이고, 그는 그들에게 언어장애가 있는 멋진 친구가 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비행 내내 입을 다물고 벙어리 행세를 했고, 사무적이기만 하던 승무원들이 이제는 그의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으며 신경을 써 주는 것에 대해 감탄했다. 그는 잠시동안, 앞으로 평생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 비행기는 목적지에 도착하였고,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때 던져진 공항 직원의 질문에 그는 무심코 소리 내어 대답했다. 그는 이내 '아'하는 작은 소리를 내었고, 이제 정말로 여행이 끝나버렸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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