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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엄마는 히어로

2024.03.14 00:3503.14

엄마는 히어로였다.

 

정정한다. 엄마가 히어로였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눈치챘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

 

 

―대국민 사기극, 히어로 ‘퍼플 마스크’는 여자였다!

 

 

기사 제목 진짜 구리네. 나는 엄지로 웹사이트 스크롤을 내렸다. 눈에 담기지 못한 글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차피 다른 기사들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어떻게 여자가 히어로가 될 수 있냐는 둥, 사기죄를 물어야 한다는 둥…… 퍼플 마스크의 정체가 밝혀진 뒤 나온 기사들은 전부 그런 식이었다. 댓글도 마찬가지였다. 퍼플 마스크가 그동안 히어로로서 해 온 일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기사에는 산산조각 난 보라색 가면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영상을 캡처한 듯 초점이 잘 맞지 않았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보라색 바탕에 흰색 물감으로 스마일 표시를 그린 가면. 히어로 퍼플 마스크가 항상 쓰고 다니는 가면이었다.

 

나는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며 스크롤을 끝까지 내렸다. 기사 마지막에 가면을 쓰지 않은 퍼플 마스크의 맨 얼굴이 담긴 사진이 실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했지만, 나는 그 얼굴을 가면보다 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쇼트커트에 얼굴이 동그랗고 볼살이 있는 여자. 엄마였다.

 

 

 

 

 

 

 

 

 

사람들은 엄마를 ‘퍼플 마스크’라고 불렀다. 늘 보라색 가면을 쓰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엄마의 머리가 쇼트커트고 목소리가 저음이라는 이유로 엄마를 남자라고 믿었다. 어쩌면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엄마의 정체가 탄로 난 건 사흘 전이었다. 그날 엄마는 한 남자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그곳에 나타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남자로부터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히어로들은 모두 뛰어난 신체 능력과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세상에는 히어로보다 빌런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었다.

 

엄마가 여자를 남자로부터 떼어놓은 그때, 어디선가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몇몇은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고, 몇몇은 그대로 엄마에게 달려들었다. 엄마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상황 파악을 하지 못 했다. 서너 명의 장정들이 엄마의 팔과 다리를 붙들었고, 방금까지만 해도 여자를 위협하던 남자는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싹 바꾸고선 핸드폰을 보며 과장된 톤으로 말했다.

 

 

“다들 퍼플 마스크의 정체, 궁금하셨죠? 드디어 오늘! 제가 그 정체를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재미난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하듯 웃는 얼굴로 말한 남자가 엄마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피할 틈도 없이 엄마의 가면을 벗겼다. 그 순간, 그곳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아득한 정적을 깨트린 건 남자의 한마디였다.

 

 

“와, 씨발…… 여자였어?”

 

 

남자의 한마디와 함께 얼어 있던 시간이 깨졌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쑥덕거렸다. 남자는 마치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욕을 하며 엄마의 가면을 발로 밟았다. 남자의 발짓 한 번에 산산조각이 난 가면 안에는 언제나 웃고 있던 히어로 퍼플 마스크의 얼굴이 있었다.

 

가면이 조각나는 소리와 함께 엄마는 장정들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조각 난 가면을 손에 쥐고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엄마를 붙잡았지만 엄마는 남자에게 가면이 벗겨질 때처럼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엄마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선 어떤 말도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은 남자의 일행이 촬영 중이던 유튜브 실시간 방송에 고스란히 담겼다.

 

나는 그 영상을 본 뒤에야 퍼플 마스크가 엄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전부터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놀랍진 않았다. 내가 궁금한 건 하나뿐이었다. 왜 엄마는 가면이 벗겨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히어로가 가진 힘이라면 서너 명의 장정은 물론 그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달려들어도 뿌리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엄마에게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퍼플 마스크의 정체가 밝혀진 그날 저녁, 엄마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나는 일부러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게 엄마를 향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아니면 굳이 배려할 필요를 느끼지 못 하는 걸지도 몰랐다.

 

 

“히어로인지 뭔지, 그걸 대체 왜 하는 건데? 직업으로 인정도 못 받고, 여자 몸으로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않아? 여태까지 나온 히어로들이 전부 남자인 이유가 뭐겠어. 여자가 하기에는 힘드니까 그런 거지. 오늘도 봐. 당신이 히어로면 뭐 해. 남자들 여럿 달려드니까 꼼짝도 못하던데. 뭐, 나도 영상으로만 봐서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만둬. 내 말 들어.”

 

 

아빠는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혼자서 열심히 떠들었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결국 요지는 ‘히어로 일을 당장 그만두라’는 거였다. 아빠가 엄마를 걱정하는 걸 알았다. 나도 엄마가 걱정됐다. 하지만 나의 걱정과 아빠의 걱정은 다르다는 것 또한 알았다. 엄마도 그걸 아는 듯했다.

 

 

“난 계속 할 거야.”

 

 

엄마는 딱 한마디를 했다. 그리고 밥을 먹었다. 그게 다였다.

 

아빠는 답답함에 열불이 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태풍처럼 들렸다. 식탁에는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그렇게 둘이 남은 뒤에야 엄마는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아는 엄마의 얼굴이었다. 언제나 온화한 엄마의 모습. 그 모습 위로 자꾸만 다른 모습이 겹쳐졌다. 그건 영상 속 엄마의 웃지 않는 얼굴이었다.

 

 

*

 

 

언젠가부터 세상엔 히어로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뛰어난 신체 능력과 강한 힘을 가졌고,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했다. 말 그대로 히어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자신의 힘을 타인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이타적인 마음이었다.

 

날 때부터 뛰어난 신체 능력과 강한 힘을 지닌 히어로도 있지만, 모든 히어로가 그런 건 아니었다. 후천적인 능력은 주로 위급한 상황에서 발현됐다. 건물에서 떨어진 화분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걸 막기 위해서, 차 밑에 깔린 고양이를 구조하기 위해서, 교통사고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렇게 발현된 능력으로 타인을 돕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을 해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국내 통계에 따르면 적어도 일 년에 한두 명이 히어로로 태어나거나 발현된다고 했다. 하지만 국내의 히어로 수는 그것보다 훨씬 적었다. 국내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나라를 가도 히어로는 가뭄에 콩 나듯 나왔다.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적은 게 아니었다. 그 능력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정부는 히어로를 특수 직업으로 인정하고 관리 센터를 만들어 그들을 관리 감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비리가 터졌다. 히어로가 아님에도 인맥을 이용해 히어로 센터에 입사한 사람들이 줄줄이 드러난 것이다. 아무래도 특수한 직업이다 보니 연봉이 높았고, 돈뿐만 아니라 히어로라는 우월감을 얻기 위해 불법 입사를 감행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밖에도 센터는 비리의 온상이었다. 결국 히어로 센터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창설한 지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동시에 히어로라는 직업 또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히어로로서 사람들을 구하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이제는 가뭄에 콩이 나다 못해 싹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센터는 불명예스러운 일로 사라졌지만, 그를 통해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히어로는 모두 남성이라는 것.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센터에 등록된 히어로는 모두 남성이었고, 앞으로 나타날 히어로도 전부 남성일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진실로 만들려는 듯 여성 히어로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런 세상에서 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아이였다.

 

 

 

 

 

 

 

 

 

어릴 적 내 꿈은 히어로였다. 물론 다들 장난인 줄 알았다. 내 꿈을 장난으로 치부하지 않은 사람은 엄마가 유일했다.

 

초등학생 때는 매 학년을 시작할 때마다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자기소개에는 반드시 장래희망이 포함됐고,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여학생은 나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반 아이들은 크게 웃었다. 쟤 히어로가 되고 싶대. 바보 아냐? 여자는 히어로가 될 수 없어!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을 제지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편을 들어주는 건 아니었다. 그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다른 장래희망은 없느냐고 물어볼 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은 그나마 나았다.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고 윽박을 지르는 선생님도 있었으니까. 해가 넘어갈수록 짜증이 나서, 고학년 때는 많이 벌고 적게 일하는 회사원이 꿈이라고 말했다.

 

내가 히어로를 꿈꾼 계기는 간단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히어로가 멋있어 보였으니까. 베란다에서 떨어진 아이를 상처 하나 없이 받아낸 히어로를 모두가 칭송했다. 정작 히어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달려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뒤 자리를 떠난 히어로의 뒷모습이 멋있어서, 일곱 살의 나는 과자를 입에 문 채 넋을 놓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수저를 손에 든 채 선포했다.

 

 

“나 히어로가 될 거야!”

 

 

내 말에 아빠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 히어로는 세상에 없어.”

 

 

나는 아빠의 말에 화가 났다. 왜 저렇게 심술궂은 말을 하지? 여자 히어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아빠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따박따박 따지고 싶었지만 문장이 잘 정돈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저를 꽉 쥔 채 소리만 질렀다.

 

 

“아냐, 있어! 내가 될 거니까!”

 

 

아빠는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될 리 없다고 믿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그럼. 우리 아현이도 얼마든지 히어로가 될 수 있지.”

 

 

엄마는 내 꿈을 무시하지 않았다. 비웃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때 엄마는 웃고 있었는데, 그건 정말로 내가 히어로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웃음 앞에서 재잘거리며 내 꿈을 얘기했다. 언젠가 멋진 히어로가 돼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겠다고. 그날 엄마는 잠들 때까지 내 말을 경청해 주었다.

 

아마 엄마처럼 웃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나는 끝까지 히어로라는 꿈을 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꿈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로 저녁을 먹고 귀가했을 때, 집에는 아빠가 있었다. 부엌에서 컵라면을 먹던 아빠는 평소보다 일찍 온 나를 보곤 놀란 얼굴을 했다.

 

 

“너 야자 안 했어?”

“오늘 모의고사였는데.”

“저녁은.”

“햄버거 먹고 왔어.”

“엄마가 밥 안 챙겨 줬어?”

“내가 햄버거 먹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돈 준 건데.”

 

 

엄마는 정체가 밝혀진 뒤부터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고 밤늦은 시간에 귀가했다. 재택근무를 하는 프리랜서로서는 이례적인 경우였기 때문에 분명 퍼플 마스크와 관련된 일이겠거니 싶었다. 그런 와중에도 엄마는 내가 밥을 굶지 않도록 언제나 냉장고를 꽉꽉 채워두었다. 나는 어쩐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말한 것도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진짜로 먹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아빠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듯 화난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 들며 구시렁거렸다.

 

 

“네 엄마 진짜 왜 그러냐. 애 밥은 챙겨 줘야지. 히어로 일도 그만두라니까 계속 한다고 하질 않나. 걱정하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지, 아주.”

 

 

아빠는 난타를 하듯 엄지로 핸드폰을 두드리고선 귀에 갖다 댔다. 분명 엄마한테 전화를 거는 거겠지.

 

 

“엄마 전화 안 받아. 내가 아까 해 봤어.”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빠는 여전히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선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는 내게 했던 말을 엄마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다. 얼핏 들으면 걱정 같았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밥도 안 하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냐”는 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물을 크게 틀었다.

 

 

 

 

 

 

 

 

 

엄마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나는 공부를 하다가 들려온 인기척에 방 밖으로 나갔다. 아빠는 이미 안방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안 잤어?”

 

 

엄마가 물었다.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술 마셨어?”

“조금. 네 아빠 잔소리에 스트레스 받아서.”

 

 

엄마는 농담처럼 말하고선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는 엄마의 손을 저지했다. 대신 오렌지 주스를 엄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엄마는 내 얼굴과 오렌지 주스를 번갈아 보더니 소리 없이 웃으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나도 냉장고에서 주스 하나를 꺼내 들고선 엄마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빠 저녁으로 컵라면 먹고 있더라.”

“요 며칠 계속 그랬어. 그거 시위하는 거야. 엄마 보라고.”

“유치해.”

“그러니까. 딸도 아는 걸 아빠는 모른다.”

 

 

엄마가 킥킥 웃었다. 아빠는 잠결에 우리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듯 더 크게 코를 골았다. 나는 조용히 주스를 마셨다.

 

 

“엄마 뭐 하고 왔는지 왜 안 물어봐?”

 

 

엄마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나는 주스 병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물어봐야 돼?”

“아빠는 요즘 만날 물어보거든.”

“그거 진짜 궁금한 게 아니라, 자기 저녁 못 먹을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 아냐?”

 

 

엄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아빠인데 말이 좀 심했나 싶다가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엄마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는 핀잔 따위 주지 않았다.

 

내 말을 끝으로 엄마와 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빠의 코골이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나는 주스를 몇 번 홀짝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현아.”

 

 

때마침 엄마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엄마를 내려다봤다.

 

 

“너 어릴 때 히어로 되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십 년 정도? 별로 안 됐네.”

“갑자기 그 얘긴 왜 꺼내?”

“아직도 히어로가 되고 싶은지 궁금해서.”

 

 

엄마는 평소처럼 온화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도 내가 일곱 살이었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을 텐데, 지금의 나는 열아홉이었다. 몸은 어른이 아니지만 생각은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런 애매한 나이였다.

 

 

“얼른 자. 술 냄새 나니까 씻고.”

 

 

나는 대답 대신 잔소리를 남겨두고 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가기 전,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

 

 

엄마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한참동안 엄마와 눈을 마주하다가, “얼른 씻어.” 괜한 잔소리를 하나 더 던지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체가 밝혀진 그날, 왜 얌전히 가면이 벗겨지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리고 과거에 내가 만난 퍼플 마스크가 정말 엄마가 맞는지.

 

 

*

 

 

퍼플 마스크를 처음 만난 날,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범한 등굣길이었다. 단 한 대의 버스만 지나가는 동네의 작은 정류장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버스를 기다리는 게 무료했고, 노래를 듣기 위해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 이어폰을 귀에 꽂을 때, 치마 속으로 무언가가 불쑥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이어폰을 떨어뜨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누가 내 치마 속으로 손을 넣은 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일이 벌어진 뒤였다. 성추행범인 남자는 개구리처럼 골목길을 뛰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항상 생각했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한다면 어떻게든 가해자와 맞서 싸울 거라고, 나는 절대로 당황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멍한 얼굴로 도망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런 나 자신에게 화조차 나지 않을 만큼 모든 일은 순식간이었다.

 

그런 내 앞에 보라색 가면을 쓴 사람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나타난 가면은 도망가는 남자를 단번에 붙잡았다. 그는 남자의 손목을 비틀어 잡았고, 남자는 신음을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자를 손쉽게 제압하는 가면의 모습은 내가 텔레비전에서 봐 왔던 히어로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가면은 남자를 제압한 채 나를 바라봤다. 순간 가면 아래의 눈과 마주친 것 같았다.

 

 

“경찰에 신고해요!”

 

 

가면이 소리쳤다. 나는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내 112를 눌렀다. 머지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가면은 경찰에게 남자를 인계한 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붙잡을 틈도 없었다. 나는 경찰들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다행히 가면이 떠나기 전 경찰들에게 사건 경위를 설명해 준 덕분에 남자는 가해자가 될 수 있었다.

 

 

“지금 바로 보호자한테 연락하실 수 있나요?”

 

 

경찰서 한 구석에 앉아 있는 내게 경찰이 물었다. 나는 핸드폰에 엄마의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누군가가 경찰서로 들어왔다.

 

 

“아현아!”

 

 

헐레벌떡 들어온 엄마가 내게로 달려왔다. 엄마는 다급히 온 듯 머리가 다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에게 연락을 한 적이 있던가 싶었다. 어떻게 왔냐고 물으려던 찰나, 엄마가 입은 후드 티에 눈길이 갔다. 색색의 꽃잎을 가진 꽃이 활짝 웃고 있는 후드 티. 그건 가면이 입은 것과 똑같은 후드 티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경찰에 신고하라고 외치던 가면의 목소리가 엄마의 목소리와 똑같았다는 걸.

 

 

“아현아,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엄마는 내 어깨를 붙잡은 채 다친 데가 없는지 이리저리 확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무슨 말을 해야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다독이고선 나 대신 경찰에게 신고를 접수했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 현장에 있던 사람처럼.

 

모든 일을 마치고 경찰서 밖으로 나오자 해가 꽤 높아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학교가 생각났다. 선생님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런 내게 엄마가 말했다.

 

 

“아까 엄마가 선생님한테 연락했어. 너 아파서 오늘 결석한다고.”

 

 

나는 황당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라는 사람이 할 행동인가 싶다가도, 엄마라서 가능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경찰서 정문을 나섰다.

 

 

“엄마.”

 

 

나는 엄마를 따라 길을 걸으며 말했다.

 

 

“혹시 말이야, 아까…….”

 

 

보라색 가면을 쓴 사람, 엄마였어?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면의 모습은 내가 그간 봐 온 히어로들과 똑같았다.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나쁜 사람을 단번에 응징하는 히어로. 그런 히어로들은 모두 남자다. 여자는 히어로가 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냐.”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하루의 시작이 좋지 않은 탓인지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나를 알아차린 엄마가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석한 김에 엄마랑 데이트 할까?”

 

 

나는 고개를 들고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이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산책도 좀 하고. 아까 보니까 벚꽃 피었더라.”

 

 

엄마의 말은 대책 없었다. 당장 학교에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모자랄 판에 한가하게 벚꽃 놀이나 입에 올리고 있다니. 그런 엄마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다 났다. 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 같았다.

 

 

“엄마는 일해야 하잖아.”

“엄마도 하루 쉬지, 뭐. 이런 게 프리랜서의 특권인데.”

 

 

나는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엄마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벚꽃을 보러 갔다. 엄마의 말대로 벚꽃이 아주 예쁘게 핀 날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히어로인 퍼플 마스크가 등장한 날이기도 했다.

 

 

*

 

 

주말에도 엄마는 바빴다. 아침 일찍 나가서 해가 다 지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쯤 되니 엄마가 뭘 하고 다니는지 궁금했는데,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분명 퍼플 마스크와 관련된 일일 것이고, 그렇다면 나의 단순한 질문도 엄마에게는 추궁으로 느껴질 테니까. 그래서 가만히 있었는데, 아빠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독서실에 갔다가 집에 오니 아빠가 화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는 걸 보니 또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선 부엌으로 가 물을 마셨다. 저녁 시간에 맞춰 들어온 터라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저녁 뭐 먹어?”

 

 

내가 물었다. 아빠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밥 좀 해라.”

 

 

아빠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잔뜩 구겨진 아빠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겨우 다시 물었다.

 

 

“내가 밥 해?”

“그럼 내가 하냐?”

 

 

아빠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는 듯한 얼굴로 되묻더니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해 보면 밥 하는 아빠의 모습을 본 적 없다. 자기는 선천적으로 요리에 재능이 없다나. 그런데 그건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밥 하는 걸 시킨 적 없으니까. 엄마는 내가 가스불만 켜도 저리 가 있으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럴 때 엄마의 얼굴은 어딘가 결연해 보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밥솥을 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내솥에 쌀을 담고 흐르는 물에 씻었다. 불순물이 섞인 탁한 쌀뜨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싱크대 하수구 속으로 사라졌다.

 

 

 

 

 

 

 

 

 

“대체 뭐 하다 이제 들어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아빠가 거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계란프라이를 부치다 말고 현관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소 피곤한 얼굴의 엄마가 신발을 벗고 있었다. 신발이 툭 하고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이 마주쳤다.

 

 

“너 뭐 해?”

 

 

엄마는 아빠의 물음에 답을 하는 대신 나한테 그렇게 물었다. 아빠는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며 또 성을 냈다.

 

 

“밥 하는데.”

“그걸 왜 아현이 네가 해? 설마 아빠가 시켰어?”

 

 

엄마가 아빠를 노려봤다. 엄마의 시선에도 아빠는 당당하게 말했다.

 

 

“네가 밥도 안 하고 나돌아 다니니까 아현이만 고생이잖아. 히어론지 뭔지, 허구한 날 싸돌아다니는 게 자랑이야? 그딴 거 그만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엄마와 아빠의 사이로 날카로운 공기가 튀었다. 동시에 계란프라이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황급히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그리고 계란프라이를 옮기기 위해 뒤집개로 손을 뻗는데, 불쑥 나타난 엄마의 손이 내 손을 저지했다.

 

 

“나가자.”

 

 

어디를? 내가 그렇게 묻기도 전에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또 어디 가? 밥은?”

 

 

아빠가 소리쳤다. 아빠는 밥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밥, 밥, 소리만 했다. 갓 태어난 아기도 저 정도는 아닐 텐데. 온 힘을 다해 현관문을 연 엄마가 아빠에게 말했다. 그때 엄마의 얼굴은 퍼플 마스크의 가면이 벗겨지던 때와 같았다.

 

 

“네가 알아서 처먹어.”

 

 

 

 

 

 

 

 

 

엄마가 나를 끌고 온 곳은 집 근처 양식점이었다. 나는 포크로 토마토 스파게티를 돌돌 말면서, 동시에 발끝을 오므렸다. 아무리 캐주얼한 양식점이라지만 슬리퍼 차림으로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 발을 보지 못하도록 의자 밑으로 발을 숨겼다.

 

 

“맛없어?”

 

 

엄마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스파게티를 한 입 먹었다. 엄마는 내 행동에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다음부터는 아빠가 밥 하라고 해도 하지 마.”

“내가 굶을 위기에 처해도?”

“그 전에 엄마가 올게. 아빠는 몰라도 너는 안 굶겨.”

“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엄마는 엄마 일해.”

 

 

나는 짐짓 덤덤하게 말하고선 스파게티를 마저 먹었다. 엄마는 포크를 손에 쥔 채 나를 빤히 바라봤다. 할 말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내 말을 끌어내고 싶은 걸까. 요 며칠 동안 본 엄마의 표정과 눈빛은 풀기 어려운 문제집 같았다.

 

 

“왜?”

“그냥,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서.”

 

 

그렇게 빤히 바라봐 놓고 정작 하는 말은 실없다. 꼭 드라마 속 주인공과 주인공의 엄마가 나눌 법한 대화다. 나는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뜬금없이 뭐래.” 같은 말이나 했다.

 

 

“아현아.”

 

 

엄마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정말 히어로에는 관심 없어?”

 

 

또 그 얘기. 나는 엄마를 따라 포크를 내려놓았다. 전처럼 회피를 해야 하나 싶다가도, 그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언젠가는 답을 해야 할 질문이었다. 엄마가 아니라, 나에게.

 

 

“……왜 자꾸 묻는데?”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 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엄마는 아현이 네가 계속 히어로를 꿈꿨으면 좋겠어.”

“나 일 리터짜리 물병도 제대로 못 드는 거 알잖아.”

“능력은 언제 어떻게 발현될지 아무도 몰라. 엄마도 너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발현했는걸.”

“……내가 초등학생 때? 그렇게 오래됐다고?”

 

 

엄마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퍼플 마스크의 등장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엄마는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살아온 걸까.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엄마가 내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꿈꿔, 아현아. 누가 뭐라고 하든.”

 

 

누가 뭐라고 하든. 히어로가 꿈이라고 말했을 때 비웃던 아이들과 나를 혼내던 선생님의 모습 위로 엄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아주 크고 단단한 메아리였다.

 

 

“그건 엄마로서 하는 말이야, 히어로로서 하는 말이야?”

 

 

내가 물었다. 엄마는 청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 다.”

 

 

엄마의 산뜻한 대답에 웃음이 났다. 나는 다시 포크를 들고 스파게티를 돌돌 말았다. 어느새 슬리퍼를 신은 발이 의자 밖으로 삐쭉 나와 있었지만, 아까만큼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리고 주말이 지난 월요일, 엄마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라색 가면을 쓴 히어로 퍼플 마스크가 아닌, 맨 얼굴의 히어로 ‘김시진’으로서.

 

엄마의 인터뷰 영상이 담긴 기사는 업로드 된 지 한 시간 만에 SNS를 휩쓸었다. 기사에는 엄마 외에도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수많은 여성 히어로들이 존재했다. 기사가 업로드 된 시간은 나의 등교 시간과 겹쳤고, 그래서 교실 안의 모든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엄마의 인터뷰를 봤다. 나도 엄마의 인터뷰를, 다른 여성 히어로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저는 저 외에도 수많은 여성 히어로가 존재한단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엄마의 인터뷰는 길지 않았다. 퍼플 마스크와 엄마의 이름 ‘김시진’을 내세운 기사였지만, 주인공은 엄마 혼자가 아니었다. 엄마는 기자와 함께 수많은 여성 히어로들을 만나러 다녔고, 그 만남을 토대로 기사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짧은 인터뷰가 끝난 뒤 낯선 여성들이 차례차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히어로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히어로였다.

 

그곳에는 다양한 여성들이 있었다. 엄마처럼 아이를 키우는 여성과, 머리가 온통 백발인 여성과, 열아홉인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성과, 휠체어를 탄 여성과, 가슴팍에 무지갯빛 배지를 단 여성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여성과…… 그리고 아주 다양한 여성들.

 

그들은 말했다. 우리의 힘을 사람들은 환영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우리의 존재만으로 경멸의 대상이 됐다고. 그런 세상 속에서 그들은 히어로라는 이름을 선택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에겐 선택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영상의 마지막, 엄마가 다시 카메라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여러분을 속인 적 없습니다. 그저 가면을 썼을 뿐입니다.

 

 

엄마의 말을 들은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엄마가 왜 가면을 쓰고 내 앞에 나타났는지, 왜 가면을 벗기려고 하는 사람들을 말리지 않았는지. 어쩌면 엄마는 오늘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영상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나는 핸드폰을 책상 서랍에 넣고선 자습을 하기 위해 문제집을 펼쳤다. 웃음기 하나 없는 수학 문제를 푸는데 자꾸만 입술 사이로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나는 손등으로 입을 막은 채 문제를 풀었다.

 

 

 

 

 

 

 

 

 

처음으로 야자를 빼먹었다. 공부할 게 산더미였고 내일 선생님께 혼날 것도 걱정이 됐지만, 오늘은 그런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서서 신발코로 땅을 툭툭 때렸다. 울퉁불퉁한 땅에서 자갈들이 솟아나왔다. 의미 없이 자갈들을 하나둘 세는 사이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섰다. 뒷문이 열리고 버스에서 엄마가 내렸다.

 

 

“엄마.”

 

 

나는 손을 흔들며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내가 이 시간에 집 근처에 있는 게 놀라운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야자는?”

“쨌어.”

“뭐?”

 

 

엄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딱히 화를 내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발을 맞춰 골목길을 걸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의 골목길은 한산했다. 나는 은근슬쩍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가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꼿꼿하게 정면을 바라본 채 말했다.

 

 

“인터뷰, 멋있더라.”

 

 

귓가를 타고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은 봄바람 같았다.

 

 

“엄마.”

 

 

한참을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엄마도 나를 따라서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제야 엄마를 바라봤다. 주황빛으로 물든 엄마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고마워.”

“뭐가?”

“그냥 다.”

 

 

실없는 내 말에 엄마는 핀잔을 주는 대신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엄마를 따라 웃었다. 우리의 웃음소리는 한 사람의 것처럼 닮아 있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끌어당기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엄마가 나보다 앞에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엄마의 앞에 서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전부 엄마가 퍼플 마스크이기 때문이었다.

 

 

*

 

 

엄마는 히어로였다.

 

정정한다. 엄마는 히어로다. 그리고 그건 결코 변하지 않을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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