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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타요리가나이의 사람들

2024.03.09 11:1403.09

자전거에 문제가 생긴 건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날의 목적지인 이케나이에 가기 위해 자전거를 손 보려고했지만, 해가 져버린 숲에서 정비를 보기란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애를 써 보다가 결국 오늘은 이케나이에 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휴대폰의 구글 맵을 켰다. 근처 마을은 5km 남짓 거리였지만 그 외의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전거를 끌고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였다. 늦은 시간이라 묵을 곳을 찾는 걸 반쯤 포기한 상태였지만, 놀랍게도 도착한 마을은 곳곳에 횃불을 세워두고 사람들이 앉아 음식과 술을 마시는 축제 중 이였다.

 

"이리 오시게. 자전거가 말썽인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다가와 자전거를 살폈다.

 

"공구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내일 해 뜨면 손 봐야겠구만."

 

"감사합니다."

 

늦은 밤에 찾아온 외지인임에도 마을 사람들은 경계하는 기색 없이 반겨주었다. 그것이 이곳의 원래 풍습인지, 늦은저녁까지 들이킨 탁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다행스런 일이었다. 자전거 종주는 상당히 고된 일이었고 대부분의 날을 침낭을 펴고 노상을 하며 보내던 때에 따뜻한 음식과 술은 여우잔칫날이라해도 마다할 수 없던 차였다.

 

나는 어르신 옆에 자리를 내고 앉아 흰 사발에 따라주는 새콤한 탁주를 들이켰다. 오늘은 어린아이들도 잠에 들지 않고 반딧불을 쫒으며 특별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특별한 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뾰족한 나무 꼭대기 사이로 촘촘한 별들이 빛난다. 어디선가 연주하는 가느다란 피리소리가 사이를 메운다. 특별하다는 것은 사실 이름만 거창하지 평소와 조금 다른 일상일뿐이다. 자야하는 시간에 잠들지 않고 머리 맡에 작은 불을 켜고서 이불 속에 나란히 들어가 "잠이 안오면 오늘은 엄마가 옛날 전설 이야기를 해줄까?" 하는 것 처럼.

 

선선한 바람이 이마를 스친다. 도란도란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 표정에서도 한결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허리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부인이 내 앞에 먹음직스럽게 생긴 고기 말이를 놓아주었다.

 

"드셔보세요. 저희 마을 전통음식인데, 간장양념이 특히 맛있을거에요."

 

"그거 쇼우타네 양념장인가?"

 

"맞아요."

 

어쩐지 대답하는 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싶었는데 어르신도 짧은 입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주춤하며 고기 말이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말한대로 고기 맛도 훌륭했지만, 속에 스며든 양념이 일품이었다.

 

"정말 맛있는데요? 쇼우타란 분이 솜씨가 좋으신가봐요."

 

내 말에 어르신이 쓴 웃음을 지었다.

 

"정확히는 쇼우타의 부인, 사야카의 솜씨라네. 하지만 몇 해전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

 

어르신의 말을 이어받듯 부인이 덧붙였다.

 

"사야카가 아주 요리를 잘했어요. 이 양념장 만드는 법도 알려주었지요. 불쌍한 사야카."

 

부인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마치 슬픔을 퍼트리지 않으려는 듯 바삐 돌아갔다. 어르신은 탁주 한 사발을 들이키고 소매로 입가를 쓱 닦아내었다.

 

"사야카가 그렇게 된 후 쇼우타는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그 마을로 들어가버렸어."

 

"그 마을이요?"

 

어르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누군가 돌멩이를 던져 넣은 것처럼. 일자로 꾹 닫혀 있던 입이 열리고 어둡고 축축한 동굴같은 입 속에서 그 이름이 튀어 나왔다.

 

"타요리가나이. 우리는 그 마을을 이렇게 부른다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사방을 메운다. 그건 마치 알려지지 않은 곤충의 울음소리 같기도하다. 보이지도 잡을 수도 없이, 오로지 소리라는 형태로만 존재하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야. 당시 온 지역에 역병이 돌고 이 마을도 역귀를 피할 수 없었다네. 그 때 어린 딸과 부인을 잃은 남자가 있었어. 그는 침통함에 빠져 하루하루를 견디다 싶이 살아갔지. 그러던 어느날엔가 갑자기 사라져버린거야. 마을 사람들은 그를 찾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모두들 그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몇 해 뒤 멀쩡한 모습으로 숲 속을 걷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어. 마을 사람들은 서둘러 붙잡고는 마을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그는 이렇게 말하고 떠났다고하더군. 자신은 '평화를 찾았다'고."

 

"...평화를 찾았다."

 

병으로 아내와 딸을 잃은 남자가 찾은 평화는 무엇이었을까. 생각이 깊어지려할때 이야기는 이어졌다.

 

"후에 길을 잃은 마을 사람 한 명이 그가 숲의 건너편에서 움막을 짓고 사는 것을 봤다고 했어. 잘지내보이니 그러려니했지. 하지만 이상한 소문이 돌기시작한건 그때부터야.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그곳에 가면 남자처럼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거지. 하지만 무슨일인지 그 마을에 한번 들어가면 도무지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어. 마치 늪에 빠져 사라지는 것처럼말이야. 그때문에 마을 어른들은 타요리가나이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했어. 하지만 그 마을은 분명 존재하는 곳이라네."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나는 앞에 놓인 탁주를 내려다 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 딱 한번, 타요리가나이에서 돌아 온 여자를 본 적이 있거든. 한달 내내 비가 쏟아붓던 때였지. 여자는 앞도 안보일만큼 쏟아지는 빗속에서 헤매다가 다음 날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했어. 나는 여자가 내 옆을 지나칠 때 느꼈던 한기가 아직도 기억나. 그리고 그 여자 중얼거리던 말도 들었지. 그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다녔어. '없어, 없어'라고."

 

어느새 반딧불을 쫒던 아이들도, 고소하게 풍기던 요리 기름 냄새도 사라져있었다. 산 속 깊은 곳에서만 느끼는 살갖을 들어올리는 스산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나, 곧 힘없는 연처럼 고꾸라졌다.

 

볼에 닿는 낮선 감촉에 잠에서 깨곤 잠시 이곳이 어딘지 파악하기 위해 흩어지는 정신을 갈무리해야했다. 벽에 걸린 액자 속 노부부의 사진을 보고 간신히 이곳이 어젯 밤 만난 어르신 댁이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밖은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나는 굉장한 실례를 했다는 생각에 이불을 개두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자전거는 세워져 있었고, 어르신은 평상에 앉아 있었다.

 

"잘잤는가? 탁주가 좀 독했나보구만."

 

"어르신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닐세. 모처럼 찾아온 손님이라 나도 즐거웠지."

 

어젯 밤의 활기는 찾아 볼 수 없고 공허한 마을엔 푸른 공기만 떠다녔다.

 

"노인이라 아침 잠이 없어서 내 일찍 자전거 손 봐놨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지폐를 꺼내기 위해 짐 가방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빼내다가 그만 갖고 다니던 사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르신은 땅에 떨어진 사진을 힐끗 보다가 고개를 들어 먼산을 내다보았다.

 

"사례는 되었네. 바로 떠날 거면 내가 감자라도 좀 싸주고."

 

나는 손사레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는 한동안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말했다.

 

"큰길을 따라 가다보면, 마주보는 산 쪽으로 나 있는 오솔길하나 나올걸세. 그 쪽으로 빠지지 말고 곧장 오른편으로 꺾어서 내려가게. 왼쪽은 쳐 다 보지도 말고."

 

나는 인사를 올리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마을을 빠져나와 숲길을 달려가는데, 멀리 거대한 산 하나가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그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산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마주보는 산...."

 

그리고 다시 앞을 내다보는데 왼쪽으로 오솔길이 보였다.

 

전화벨이 울린건 그때였다.

 

"자전거 여행은 잘 되가?"

 

회사 동료 마사타케였다. 마사다케의 반가운 말투에도 내 신경은 온통 왼쪽의 오솔길로 쏠렸다. 그 남자가 찾은 평화는 무엇일까.

 

"이번 여행 끝나면, 돌아오는거지?"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다들 자네 걱정을 많이 했다고. 그 일이 있은지도 이제 삼년이 되어가니까. 그래도 자네가 이렇게 기운을 차리고..."

 

마사타케의 뒷말을 자르며 휴대폰이 시스템 종료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그곳에 가면 남자처럼 평화를 찾을 수 있다. 나는 자전거 헤드를 왼쪽으로 돌리고 페달을 밟았다. 오늘도 앞으로도 이케나이엔 갈 수 없을 것이다.

 

"이봐요."

 

한참을 하얀 꽃이 핀 산길을 내달리는 중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이런 산속에서 사람을 만날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은 터라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쪽으론 왜 가는거에요?"

 

남자는 뜯고 있던 나물을 망태기에 담으며 물었다.

 

"거기엔 길이 없어요."

 

"이쪽으로 가면 마을이 하나 나오지 않나요?"

 

"...마을?"

 

남자의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며 그자리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설마. 거기에 가려고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 경계하지 말아요. 내가 그 마을 사람이니까."

 

남자는 무성히 자란 풀 사이를 겅중겅중 넘어왔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는 깨끗한 옷에 좋은 냄새가 났고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험한 길은 이제 끝나요. 곧 넓은 길이 나오죠. 그렇다고 누군가 다듬은 길은 아니에요. 원래부터 있던 곳이에요."

 

남자의 말마따나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오자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널따란 길이 나왔다. 길 양 옆으론 울창한 나무들이 줄지어있고 굵은 가지들이 뻗어나가 서로 맞닿아 있었다. 나무에는 하얀색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멋지죠?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흰나무터널이라고 부릅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에요."

 

흰나무터널은 남자가 자부심을 갖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대로 나뭇잎이 흔들리며 꽃잎이 날리는 모습은 타요이가나이에대한 불길한 이야기도 잊어버릴만큼 멋졌다.

 

터널은 꽤 길어서 우리는 한참을 걸어야했다. 남자는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마을이 쉽게 찾아 올 수 있는 곳은 아닌데, 어떻게 아셨죠?"

 

나는 어젯 밤 어르신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듣다가 말미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하죠. 타요리가나이라.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남자는 벅찬 감격을 억누르기라도 하듯 숨을 한번 고르고 말했다.

 

"거기에 가면 간절하게 소망한 이를 만날 수 있어요. 그게 타요이가나이에 들어간 사람들이 소식이 없는 까닭이죠. 거길 떠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남자의 해맑은 웃음에 할말을 찾지 못했지만 표정을 보면 그 말이 거짓말같진 않았다. 나는 꽃가루가 흩날리는 흰나무 터널을 올려다보며 곰곰히 생각을 곱씹었다. 간절하게 소망하는 이를 만날 수 있다는것에 대해.

 

마을을 알리는 선돌 같은 건 없었다. 흙으로 지은 작은 집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고, 밭이나 울타리에 가둔 가축들이 보였다.

 

마을 가운데엔 큰나무 아래 우물이 놓여 있었고 우물가엔 여인 두 명이 물을 기르고 있었다. 머리엔 하얀색 두건을, 허리에는 앞치마를 두른 그들은 나와 함께 돌아온 남자를 보고 웃으며 아는 체하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했다.

 

"우리 마을에 오시려는 분이야."

 

남자가 나를 소개하자 그들은 굳었던 얼굴을 펴고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을 한 컵 떠서 나에게 권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나는 건네 받은 물에 떠 있는 하얀 꽃잎을 마시지 않기 위해 애쓰며 한 컵을 다 마셨다. 그리고 티나지 않게 눈동자를 굴려 마을을 살펴보았다. 흡사 과거의 어느 시대로 온 것 만 같다. 그때 남자가 손을 들고 휘휘 저으며 누구가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제 아내에요."

 

나는 남자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요?"

 

"저기요. 검은 단발 머리에, 갈색 옷을 입은 사람이요."

 

"아아, 네."

 

나는 남자의 아내에게 꾸벅 인사했다. 단발머리의 눈가의 점이 있는 그의 아내는 수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남자는 행복한 표정이 되어 나를 돌아보았다.

 

"촌장님한테 인사드리러 가지요."

 

나는 남자를 따라 마을 제일 안쪽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마당에서 꽃에 물을 주던 머리 희끗한 노인을 발견하자 남자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분은 뉘신가?"

 

"저희 마을에 오신다기에 모셔왔습니다."

 

촌장은 인자하게 웃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따듯한 꽃차 한 잔을 내어주고 손으로 그린듯한 마을 지도를 보여주며 어느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꼼꼼하게 설명해 준 후, 마을 입구와 가까운 집 한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여기는 빈 집일세. 이곳에 머무르게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촌장이 가지라고 준 지도를 품에 안고 나왔다.

 

바깥에 서 있던 남자가 돌아온 나를 환영하며 새로운 집으로 데려가 주었는데 집은 오래되보이긴 했지만 꾸준히 정리를 해온 듯 깨끗했다. 남자는 내일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다니자고 말 한 뒤 자리를 떠나려했다. 나는 급하게 남자를 불러세웠다.

 

"오시면서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이곳에 오면 간절히 소망하던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요."

 

"곧 만나게 될 겁니다."

 

남자는 내 심정을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때 담장 밖을 지나가던 다른 이가 남자를 발견하고 말을 건넸다.

 

"쇼우타, 저번에 만들어준 낫이 고장났어. 새로 하나 부탁함세."

 

"네네, 알겠습니다. 빨리 하나 만들어드릴게요."

 

남자는 밤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나는 낮선 곳의 낮선 방에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누워 있었다.

 

손목시계에서 자정을 알리는 소리가 울릴 때, 대문을 두드리고 찾아온 것은 삼년 전 죽은 내 아내였다.

 

-

 

"안녕."

 

그녀는 태연하지만 살짝 쑥스러운 듯 인사했다.

 

"고마워. 나를 찾아줘서."

 

와락 아내를 껴안았다. 간절하게 소망하는 이를 만날 수 있다는 쇼우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대로 손을 풀어버리면 아내를 또 다시 잃어버릴 것 만 같아 더욱 세게 껴안았다.

 

"아야! 아파. 살살."

 

그녀가 베시시 웃으며 내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감촉.

 

그거면 됐다. 그녀가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는지, 이 마을이 갖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을 위협하는 자가 있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내게서 아내를 두번 다시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잠들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때 혹시라도 그녀가 사라져 있을까봐.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집에 있던 식량이 떨어져 갈때 쯤 새벽 일찍 촌장이 찾아왔다.

 

그는 마당에 서서 나를 불렀다. 나는 재빠르게 나와 겸연쩍게 인사를 올렸다. 아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촌장에게 알릴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처음엔 다들 그런다오. 누구는 한달 내내 집 밖에 안나오기도 했지. 그 분은 어디계신가?"

 

촌장이 고개를 빼고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내는 지금 자고 있습니다. 원래 아침 잠이 많은 편이었거든요."

 

"오, 아내분이신가. 그렇구만."

 

촌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당부의 말을 전했다.

 

"요새 하늘이 심상치 않은 걸보니 곧 큰 비가 내릴 것 같으이. 비오는 날은 위험하니 절대 집 밖을 나오면 안된다네."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둡고 큼지막한 먹구름이 머리 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촌장이 가져다 준 식거리를 들고와 부엌 선반에 정리해 놓았다. 감자와 고구마, 밀가루, 말린 꽃잎,쌀 한 되, 그리고 마을에서 보기 드물었던 통조림까지 들어 있었다. 비가 두달 넘게 와도 거뜬히 지낼 만큼의 식량이었다.

 

잠에서 깬 아내가 다가와 폭 안으며 등에 얼굴을 기댔다. 온기. 그녀가 갖은 이 온기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비는 나흘 내내 무섭도록 쏟아부었다. 우리는 한 칸짜리 흙으로 만든 집에서 번갈아가며 예전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잠이 쏟아지면 낮잠을 자고, 육수를 우려 낸 국물에 수제비를 떠 먹기도하며 시간을 보냈다.

 

비가 내린지 여드렛날.우리는 툇마루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기로하고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아내가 찻잔에 말린 꽃잎을 띄우고 물을 부어주려 할때 별안간 큰 천둥이 하늘을 울렸다.

 

"어머!"

 

손이 미끄러진 탓에 뜨거운 물이 왼손 등에 쏟아졌다.

 

"괜찮아?"

 

깜짝 놀란 아내가 허둥지둥했지만, 나는 그녀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찬물에 열을 식히며 대수 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우리는 차 마시는 걸 포기하고 그저 서로 어깨에 기대어 비 내리는 것을 구경했다.

 

깜빡 잠이 들었던지 정신이 번쩍하고 들었다. 깨어 있던 아내가 웃으며 돌아보았다.

 

"비가 좀 그쳤어. 우리 산책 갈까?"

 

그녀의 말처럼 지겹게 내리던 빗방울이 약해져있었다. 오랫동안 집에만 있었더니 아내도 지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럴까,하고 대답하려는 찰나 촌장의 당부가 떠올랐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답답하단 말야. 걷고 싶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그쳐가고 있으니 지금쯤은 나가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집 안을 뒤져 우산을 챙겨들고 아내와 밖으로 나왔다.

 

마을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집안에 그대로 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돌아다니다가 촌장에게 발각될까 싶어 나는 아내를 데리고 흰나무터널 쪽으로 향했다. 환상적인 그곳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아내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마을 입구를 지나 도착한 흰나무터널은 아쉽게도 폭우로 인해 내가 봤던 모습과는 달랐다. 꽃잎은 죄다 땅으로 떨어져 있었고, 나뭇잎 사이를 메우던 꽃향기도 나지 않았다.

 

"근데, 천둥이 게속 치는거야?"

 

아내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나무들이 흔들렸다.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천둥 소리는 아니지만, 아내의 말처럼 무언가 쿵쿵 울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에 집중하며 근원지를 찾아가보자, 소리는 땅에서 울리고 있었다.

 

"산사태다!"

 

바람 없이 흔들리는 나무, 땅에서 울리는 소리, 모두 산사태의 전조증상이었다.

 

"얼른 내려가야해!"

 

나는 아내의 손을 채어 달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마을 사람들은?"하고 절규하듯 외쳤지만, 지금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금 돌아가는 건 아내를 또 잃는 일이었다. 먼저 안전한 곳에 도착한 다음 마을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게 신고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빗방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붙잡고 있는 아내의 손이 차가워졌다.

 

그때 미처보지 못한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까진 무릎에서 피가 났다. 힘겹게 고개를 드니 거대한 산이 보인다.

 

"여보?"

 

괜찮냐고 물어왔을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여보! 어딨어?"

 

목소리는 거센 빗방울에 갇혀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불쾌할 정도로 가쁘게 뛰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이끌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길을 찾았지만, 억센 비와 두통이 겹쳐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를 위협하던 산사태는 여전히 진행중일 터 였지만, 아내 없이 내려가는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근방을 돌며 아내를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없어,없어...."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었던가. 절망에 빠진 내가 고꾸라졌다.

 

-

 

"깨어나셨어요."

 

여자의 목소리다.하지만 아내는 아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의 목소리다. 목소리에 대한 기억에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더듬어보니 그건 마지막 통화에서 들었던 마사타케였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역시 그의 수더분한 얼굴이 보였다. 걱정이 한가득인 얼굴이었다.

 

"이봐!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어떻게 된거에요?"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나왔다.

 

"어찌된 일이긴. 자네와 통화하다가 갑자기 끊기더니, 며칠이 지나도 통화가 안돼서 내가 경찰에 신고했지. 마지막 발신지역을 수색하던 중에 자네를 발견해서 병원에 데려온거야."

 

"환자분,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아까 그 여자의 목소리다. 단발머리의 의사가 쓴 안경에 내 모습이 얼핏 비친다.

 

"네. 그런데, 제 아내는요?"

 

"왜 이러나, 자네 아내는...삼년 전에 죽었잖아."

 

"아니에요! 그 마을에 있어요. 거기 있을거에요."

 

내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의사가 진정하라며 어깨를 살포시 눌렀다.

 

"그 마을이요? 아내 분이 거기 계시다고요?"

 

"네, 맞아요. 거기요. 타요리가나이."

 

의사가 마사다케를 돌아보았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환자분, 혹시 이거 뭔지 아세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단번에 알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흰나무 꽃이요."

 

"맞아요. 이 꽃에는 알카로이드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요. 환자분 혈액검사에도 이 성분이 다량 검출됐고요."

 

"그게 어쨌다는거죠? 마사다케, 지금 그 마을로 좀 가줘.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거야."

 

"알카로이드 성분은 환각과 환청을 일으키는 마약성분이에요."

 

의사가 차분한 어조로 나를 옳아매었다.

 

"환각이요? 그럼 지금 내 아내가 환각이었다는 말을 하려는거에요?"

 

"잘 생각해보세요. 이 꽃을 어떻게 접하셨는지를요."

 

꽃.

 

흰나무터널. 타요리가나이를 가려면 무조건 지나가야 하는 단 하나의 길. 만발한 꽃. 날리는 꽃가루. 우물에 띄워져 있던 꽃잎들. 촌장이 건내주던 말린 꽃잎 차....

 

"말도 안돼요.그럴리가 없어요. 왜냐면, 거긴 간절하게 소망하던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마을이란 말이에요. 나 말고도 만난 사람들이 있다고요!"

 

"제 삼자가 아내를 보았다고요?"

 

나는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촌장이 왔을 때.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의사는 안쓰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집단 환각이란 것이 있어요. 오히려 그 장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공통된 심리상태에 있을 때 더 잘 일어나는 현상이기도해요. 그 마을에 가면 간절하게 소망하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라는 공통 심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집단 환각에 더 빠지기 쉬울 수 있다는 거죠."

 

그때 병원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며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찌르듯 울려퍼졌다.

 

"잠시만요. 환자분, 안식을 취하고 계세요."

 

의사는 황급히 구급차에 실려온 환자를 살피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마치 그 공간을 채우려는 듯 켜져있던 텔레비전에서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지역 산사태가 발생해 인명피해가...]

 

"저기, 자네가 있던 그 산이잖아?"

 

마사다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그의 등 뒤로 간호사들이 방금 실려온 환자를 이동용 들것에 눕혀 이동하고 있었다.

 

"그 남자야."

 

들것에 실린 남자는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만류하는 마사다케의 손도 뿌리치고 그 남자,쇼우타에게 다가갔다. 정신 없는 의료진들은 내가 가까이 가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산사태에 묻혀 있었던 듯 그는 온통 흙 투성이였다. 쇼우타는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을 놓칠세라 안간힘을 다 했던 것 처럼.

 

나는 쇼우타의 손가락을 펼쳐보았다. 거기엔 사진이 들어가 있는 팬던트가 쥐어져 있었다. 사진에는 쇼우타와 그의 아내의 모습이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자 화상을 입은 상처가 쓰라렸다.

김은애

김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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