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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호문클러스

2006.01.24 20:5101.24



이곳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여기 글을 올리기에는 많이 미숙한것 같아서 안올리고 있었는데... 그래도 어떤분이 한번 올려보라고 해서 올려봅니다. 겸손떠는게 아니라 정말로 많이 미숙하니 좀 양해해주세요 [..]


호문클러스

*

'파아앗……!'

순백의 날카로운 검광이 지나간 자리에, 검붉은 핏줄기가 솟구쳤다.  그래, 핏줄기……. 착각하기 딱 좋은 색이다. 이들의 피 역시 인간과 같은 붉은 색이라는 건…… 이 모든 일을 꾸민 작자의 악취미 장난인 것일까.

잠시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른다는 듯 한 표정으로 그것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순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 표정은 곧 도저히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분노, 당황, 격앙, 공포. 이런 감정이 표출된 것이 아니다.

슬픔. 그것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히 나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속아서도 안 된다. 난 내가 베어낸 그것의 가슴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인간과 똑같이 생기기는 했지만, 인간이라면 원래 심장이 들어있어야 할 왼쪽 가슴에서 내가 꺼낸 것은 피처럼 붉은, 현자의 돌이었다.

"봐라."

나는 그 핏빛 돌을 들어 그것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아직 살아있다. 이것을 꺼낸다고 해도 부서지기 전 까지는 잠시 죽지 않아. 그러니 대답해라."

"어째서 너희들은 죽을 때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것의 입이 조금 움직였다. 대답하려는 건가, 라고 생각했지만 그 입가의 움직임은 그대로 애달픈 미소로 이어졌다. 그리고 재수 없는 그 미소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제에엔장!"

'파아앙-!'

순간적인 분노에 손에 힘이 들어갔고, 조용히 잠들어 있던 현자의 돌은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그 핏빛 파편이 땅에 흩뿌려지는 순간, 그것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더없이 평안한, 그리고 슬픈 표정이었다.

*

"주문하신 와인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날이 밝았다. 호문클러스를 죽인 후에는, 만 하루. 즉 24시간이 지날 때까지 내 어떤 힘도 쓸 수 없다. 고쳐보려 노력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결국엔 이것 역시 내게 주어진 능력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24시간이 지나는 동안 보통 나는 와인을 마신다.

  뭐 대충 계산해 봐도 8년. 8년이라는 시간동안 40명에 가까운 호문클러스를 죽였다. 그들은 평소에는 조용히 숨어 인간과 같은 생활을 한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들의 힘을 해방해 살인을 저지르며, 범행을 저지르는 시기가 불특정하고 워낙 광범위하게 돌아다니기 때문에 찾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은 살인을 저지른 후 돌아오는 곳이 항상 같다.

그곳이 그들이 만들어진 곳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된 뒤로 수사는 매우 쉬워졌다. 그들은 낮에 인간 행세를 할 때도 절대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다. 결혼 같은 것도 해봄직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가 그들은 절대 인간과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아무 마을에나 가서 '이 마을에 유난히 말수가 적고 마을을 떠나있는 일이 잦은 사람을 알고 있나요' 라는 물음으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말수가 없고 마을을 떠나있는 일이 잦다고 해서 무턱대고 죽이는 건 아무리 호문클러스를 잡기 위한 것이라 해도 별다른 가책 없이 미친 짓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물음을 통한 조사는 단지 '용의자'를 찾기 위한 방법일 뿐, 일단 용의자를 정하기만 하면 나는 그의 결백, 혹은 정체를 완벽하게 가려낼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호문클러스와 단 한마디라도 얘기를 주고받게 되면 그가 아무리 능숙히 변장을 하고 있더라도 그 정체를 한번에 알아챌 수 있다. 이것은 겉모습의 문제가 아니다. 내면의. 어떠한 직감이랄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애매한 것 같지만 그 '직감'이 찾아온 순간 그 직감은 나로서는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각인된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어이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 내 직감이 빗나간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의 능력을 완전히 신뢰한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그들이 왜 살인을 저지르는지, 왜 죽을 때 나를 그렇게 안타까운 눈길로 쳐다보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게 된지 오래다. 확인 차 한번 물음을 던져볼 뿐. 이제 내게는 단지 어서 단서를 잡아 이것들을 만드는 빌어먹을 작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여, 안녕하세요?"

어디선가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아침을 즐기고 있는 이곳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랗기도 했다. 물론 실례다. 저런 자와는 되도록 가까이 있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뚜벅, 뚜벅' 하는 발소리는 바로 내 테이블 앞까지 와서야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하. 설마, 나에게 인사한 건가. 이상하군. 나는 이런 무례한자와 사귄 기억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술집에서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넬 사람 자체가 없다시피 하다. 내 삶은, 내 임무는 너무 위험하기에 나로 인해 위험해질 누군가를 만든다는 것은 최대한 꺼려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나마나 생각 없이 놀기 좋아하는 멍청이겠지. 이런 부류의 인간은 무시하면 그쪽에서 먼저 제풀에 지쳐 가 버린 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난 참으로 관대하게도 그가 내 앞자리에 앉아 내 와인을 따라 마시는 것까지 모른 척 해 주기로 했다.

"크으- 좋은 술이네요."
"……."

아무 말 없이 세 잔을 연거푸 비우고는 하는 말이 고작 이거였다. 그러니까, 평가해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말이지. 이 정도로 해라. 더 이상은 인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난 슬슬 저 버릇없는 녀석을 내쫓을 심산으로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뻗었다. 물론 저 녀석이 그 행동을 알아챘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돌연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물론 이렇게 얻어먹기만 하는 건 도리가 아니겠죠."
"……?"
"술값으로 재미있는 얘기를 해드릴까요."

……정말 가지가지 한다. 술값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일어나 걸어 나가는 것이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그러나 이 녀석, 얼굴이 보통 두꺼운 게 아니었다. 이야기를 꺼내려고 작정한 듯 내 술을 한잔 더 자신의 술잔에 따랐다. 정말 어처구니없다. 저런 멍청이의 얘기 따위에 내가……

"호문클러스라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무의식적으로, 술잔을 쥐고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녀석은 여전히 싱글거리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호문클러스. 설마 저 녀석이 호문클러스를 진짜로 알고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설 속에나 나오는 얘기를 조금 주워들은 정도겠지. 하지만 생활이 생활인만큼 어쩔 수 없이 조금은 흥미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그런 내 표정을 다 읽었다는 듯, 그의 얼굴에도 재밌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제, 결국에는 다 들어야 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 건가. 어쩔 수 없이, 계속 하라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감사합니다. 호문클러스는 인간에게 창조된 인간입니다. 그들은 인간처럼 먹고, 마시며, 희노애락의 감정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생김새가 인간과 똑같다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죠. 다만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호문클러스는, 단 한가지. 신만이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없다고 합니다."

뻔한 얘기다. 물론 아는 사람 자체가 소수이긴 하지만, 닳고닳은 이야기.

"후후,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네, 호문클러스에게는 영혼이 없습니다. 비록 적지만 알고있는 사람에게는 뻔한 얘기겠죠. 하지만 이 말, 정말 재밌지 않습니까? 호문클러스는 지금 존재하고있는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전설-이야기에 따르면 적어도 어느 순간 호문클러스는 존재했고, 그들은 보통의 인간들과 섞여 살았다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는데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럼 우리에게 영혼이란 과연 뭘까요? 있으나 없으나 고작 서푼어치 연기로 한데 섞일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스러워 할 필요가 있을까요?"

머리 속이 새하얘졌다. 맞는 말이다. 호문클러스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것도. 그리고 그럼에도 그들은 인간들 틈에서 아무 지장 없이 살아간다는 것도. 그리고 그 두 사실을 가지고 도출해낸 결론도 그럴 듯 하다.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 자식,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그러나 얘기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영혼이 무엇인지 조차 잘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영혼이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호문클러스는 절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인간이 아니라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살해당할 것이 뻔하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막상 호문클러스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철이 들기 훨씬 전부터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친한 친구가 알고 보니 호문클러스였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인간이 뭔지, 저 같은 놈이 알 리가 없죠. 하지만 최소한 인간처럼 보이는 것은 굉장히 쉽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인간과 똑같은 외모에 정상적인 사고만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사실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는 호문클러스보다 딱히 나을 것이 있다고만 볼 수는 없는 거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호문클러스는 영혼을 얻기 위해 인간을 살해한다. 달이 없던 어느 밤, 처참하게 살해된 부모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던 기억은 이미 빛 바랜 사진처럼 무의미하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복수심의 발현이 아니다. 그날의 외침은 순수한 슬픔이었고, 지금 나의 모든 것은 그 슬픔을 나 외의 어떤 누구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일 뿐이었다. 거의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 시피 하면서도 나를 지탱해주던 한가지는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도 바로 그 '확신'이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나는 그 사실이 싫었다.

"이름이 뭔가."
"네, 전 루인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형편없는 이름이다.

"……술값은 잘 받았다. 꺼져라."

잠깐동안 파악한 저 녀석의 성격으로 봐서 뭐라 한마디 할 법도 했지만, 그는 내게 정중히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자리를 일어나는 녀석의 푹 숙인 얼굴에서, 왠지 알 수 없는 미소 같은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나는 술집을 나왔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루인이란 놈이 뱉은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오후의 도시는 활기차다. 정말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은 햇살 아래, 시끌벅적 움직이는 사람들은 '생기' 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려는 듯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가 왼쪽 가슴에 심장 대신 피처럼 붉은 현자의 돌을 넣고 다닐런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호문클러스. 인간에게 만들어진 인간.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어질 만큼 그들의 숫자가 많아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위대한 제국의 황제와 그가 들인 양자와 그들을 보필하는 신하들 모두 심장이 없는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먹이사슬의 최상층에서, 가짜 심장을 달고 사는 저들이 우리를 조용히 비웃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 해도 뭐가 달라지는가.

그 녀석의 말은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인간……. 그 녀석은 '나 같은 놈이' 라고 말했지만, 인간이 뭔지 모르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혼이라는, 보이지도 않는 것만이 우리를 인간이라고 정의해줄 유일한 수단인가. 세계는 넓다. 우주의 어딘가에, 우리와 똑같은 수준의 사고를 하는 어떤 생명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생김새는 다르겠지. 하지만 그들은 당연히 우리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그럼 그들과 우리를 구별할 수단은 무엇인가.

영혼이 아니다.

생김새. 유전적인 정보.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이다. 개와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는 멍청이는 없다. 그리고 그 구별의 수단은 개의 영혼과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개의 생김새와 사람의 생김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의 '종'과 인간의 '종' 극히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인 기준일 뿐, 그곳에 영혼이 끼어 들 여지는 없다. 결국 인간을 정의해주는 건…… 영혼 따위가 아니라 세포 깊숙이 박혀있는 하나의 정보일 뿐이다.

얼마나 하찮은가.

호문클러스를 죽이는 일이 얼마나 의미 없는가. 나는 누구인가. 호문클러스가 살인을 저지른다고? 그건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난 내 눈앞에서 살인자를 직접 본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 녀석과 그 녀석의 가족, 친지, 친구를 모조리 죽여버리지는 않는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이미 그 일을 해왔다. 8년 동안이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혼이라는 보이지도 않는 어떠한 것이 없다는 이유로.

*

이때까지 살아온 모든 삶을 부정 당하는 기분이 어떨까. 쉬이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을 당해버렸지만……, 역시 지금 나의 상태를 한마디로 딱히 정의 내릴 수는 없는 것 같다. 아니, 내가 '나'라고 불러야 할 것이 무엇인지 조차 햇갈리고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물에 빠져버린 기분이다. 축축하고……, 뜨겁고……, 숨막힌다…….

"이런 개자식!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녀!"

무슨 소리가 들린다. 지독히 울리는 목소리. 추하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얼씨구, 나를 무시해? 이게 죽으려고!"
'빠아악-'

얼굴 한쪽이 화끈해졌다. 입안에서 짭짜름한 것이……. 당연히 피겠군. 이제서야 앞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디 보자, 나를 때린 것은……. 그래, 하루하루를 남을 괴롭히는 재미로 사는 쓰레기구나. 너에게도 영혼이란 것이 있겠지. 아니면 없겠지. 그리고 너는 어느쪽이던 간에 신경 쓰지 않겠지. 가만히 검을 뽑았다.

"푸하하, 꼴에 맞고 가만있지는 않겠다는 모양이군. 검을 뽑은 이상 너도 진짜 죽을 각오를……."

나는 이 살상 도구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한번 뽑은 이상 절대로 그냥 집어넣지 않는다. 녀석으로서는 인지도 못할 만큼 짧은 순간, 내 검이 녀석의 허벅지를 뚫었다. 그리고 그 검은 다시 신음소리조차 나기 전에 놈의 목을 겨눴다.

"으아아악!"

뒤늦게 터지는 놈의 비명소리. 관심 없다. 움직이면 그대로 벨 테니까. 녀석도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눈치 챘는지, 타는 듯한 고통일 것에도 불구하고 허튼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꺼져라."
"무, 무슨……."
"다시 말하지 않겠다. 꺼져라."

당연히 목을 겨눈 검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조심스레 몸을 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한심하다. 저 녀석이나, 저런 녀석에게 검을 빼어든 나나.

*

밖은 어두웠다.

나는 오래 전에 사두고도, 정작 머무를 시간은 별로 없었던 내 집을 새삼스레 돌아봤다. 앞으로 호문클러스를 죽이지는 않을 거다. 난 경비병이 아니야. 호문클러스가 살인을 한다면 그건 그 지역의 경비병들이 알아서 하겠지. 난 더 이상 그들을 죽일 권리가 없다. 곧 있으면 24시간이 지난다. 쓰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그런 능력이란 해만 될 뿐이다. 언제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호문클러스를 발견해버릴지도 모르니까. 더 이상 죽이지는 않겠지만, 난 그들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다.

이 능력이 돌아오는 즉시 신전에 가서 대책을 문의해야겠다. 늦은 시간이지만, 신전은 문을 닫지 않으니까. 능력을 지우고……, 내가 이때까지 해온 일을 회개하며 살아갈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이제 끝이다. 5초……, 4……, 3……, 2…….

'푹-'

……1.
마지막으로 한번도 열어보지 않은 방문을 연 순간이었다. 난 저런 놈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하자 오히려 실없는 농담이 나왔다. 하지만 희극적인 내 내면과는 달리 날카로운 단도가 박힌 내 배에서는 피가 범벅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두운 밤, 모든 것이 어두웠지만 내 피만은 가릴 수 없는 붉은 색으로 빛났다.

누굴까. 호문클러스를 많이 죽이기는 했지만 모두 극비로 이루어진 일, 누군가가 알고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저 이 마을의 평범한 청년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무척이나 나를 찌른 범인이 궁금했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충격이 가시자 난 그 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낮에 만났던……. 그 건달이었다. 얕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결국 내 끝은 이것이다. 평생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을 반성하는 순간 죽음. 난 결국 살인자로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유치한 결말이다. 차라리 호문클러스에게 당했다면 좀더 나은 기분이었을 텐데. 그런데 그 건달 놈의 표정이 이상했다.

"아, 이런 착각하지 마세요."
"……?"
"네, 그러니까……. 호문클러스 사냥꾼에 대해서는. 들어 보셨나요?"

왠지 머리가 아파질 것 같은 전개다. 당연히 들어봤다. 그게 나니까. 그럼 이 자식은 날 동경하고 결국 나를 죽이고 내 위치를 차지하려는……. 관두자. 그런데 뭘 어쩌자는 거냐.

"하하. 어리둥절한 표정이군요. (일단은 맞는 말이었다) 저는 호문클러스 사냥꾼 케이라고 합니다. 아까는 본의 아니게 당신을 두 번이나 때렸죠. 죄송합니다만, 저는 어떻게 해서라도 당신과 대화를 했어야 했거든요."

내가 죽고 난 뒤에도 그런 식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보편화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다.

"호문클러스의 특징. 말이 없고, 거의 전 세계를 돌아다니지만 결국에는 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럼에도 결혼은커녕 친한 친구조차 사귀지 않죠. 그래서 호문클러스를 찾으려면 그 마을의 아무에게나 '이 마을에 유난히 말수가 적고 마을을 떠나있는 일이 잦은 사람을 알고 있나요' 라고 물어보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당신과 술집에서 당신과 마주쳤던 은발의 남자에게 물어봤죠. 이름이……, 리안이던가? 아 뭐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래서 전 당신과 어떻게든 이야기를 해보려고 결심했죠. 전 단 한마디라도 대화를 주고받으면 호문클러스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있거든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다. 진부하고, 무모하고, 어리석은 어떤 남자의 얘기와 비슷하다.

"많이도 죽였더군요. 50명이 다 되가는 걸요? 제가 조사하기만 해도 이 정도니, 실제로 죽인 건 더욱 많겠죠.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뭐 조금 거친 방법을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성공했으니까요. 저는 만족합니다."

"……정말로."
"네?"
"정말로 만족하나……."

그리고 그 순간,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내 전신을 훑어갔다. 말도 안 되. 이건 정말로 비극이다. 난 케이라는 작자의 말을 다시 가만히 되뇌었다. 리안……이라고. 하하하. 정말 재밌군. 결국에는 모두…….

"흠, 글쎄요. 단 한가지만 빼고요. 제가 당신을 아직 죽이지 않고 있는 이유죠."


"어째서 당신들은 죽을 때 나를 그렇게 슬픈 눈으로 쳐다보는 건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왼쪽 가슴에서 꺼내어진 붉은 돌이 부숴지는 것을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괜찮은 인생이었다.
리안
댓글 3
  • No Profile
    ^^ 06.01.25 00:28 댓글 수정 삭제
    결국 인간을 정의해주는 건…… 영혼 따위가 아니라 세포 깊숙이 박혀있는 하나의 정보일 뿐이다. 괜찮은 인생이었다. => 요 두 문장이 인상 깊네요. 이렇게 말하면 좀 야만스러울 것 같지만 동족혐오라는 걸까요. 아님 운명의 굴레라는 걸까요. 아님 본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걸까요.
  • No Profile
    반전이 좋군요. 잘 읽었습니다 :)
  • No Profile
    리안 06.01.25 12:12 댓글 수정 삭제
    아앗,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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