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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미칠 것 같은 밤에

2003.09.06 22:1909.06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내 주위에는 웃고 떠들고 제각기 어딘가로 무리
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세상은 어두운
가운데 화려한 네온사인만이 가득했다. 이 세상은 달을 잊었다. 별도
잊었다. 오직 지상의 화려함만이 세상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거리를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대며 걸어갔다.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
는 듯 했다. 당장 죽음이 찾아와도 '고맙다'며 덥썩 죽음의 손을 잡아 버
릴 것 같은 이 기분. 나는 이 기분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는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어딘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있을지
도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나는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미친 듯이 걷고 있을 때 마침 내 어깨를 잡아 끄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내가 위에서 말한 '죽음'이란 놈이었다. 죽음은 내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죽음을 줄테니 너는 내게 영생을 줄 수 있겠느냐?"

"당치도 않은 소리. 나는 네게 아무 것도 주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나는 대가 없이 네
게 죽음을 선사할 만큼 마음 좋은 녀석이 못된다."

"그렇다면 나는 네게 세상을 세계를 주겠다."

"세상을? 이 세계 전부를 말인가?"

"그렇다. 나를 미칠 듯 걷게만 만드는 이 세상, 이 세계를 통채로
네게 주겠다. 모두 가져 가거라. 그리고 내게 영원한 안식을, 죽음을
주거라.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

"그것 참 재미있는 제안이군.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서 죽음은 내게 영원한 안식을 주고 세상을 가져 갔다.
더 이상 나는 걷지 않아도 되고 살지 않아도 되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나는 더 이상 미칠 것 같지 않았다. 나에겐 드디어 평온
이 찾아왔다. 그렇게 오직 평온만이 가득한 세상없음 속에서 나는
외쳤다. '진작 이러지 못한 것이 한이었어. 진작 죽음을 만났어야
했어. 그랬다면 나는 더 일찍 평온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러나 지
금이라도 만난 것이 다행이야.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찾지
않아도 돼.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돼. 아 평화
롭다. 아 아름답다. 아 즐겁다. 아 기쁘다!' 그리고 그 외침의 끝에
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돌아갈 순 없는 걸까? 그 미칠 듯한 거리 속으로 미친 발걸음으로
돌아갈 순 없는 걸까? 돌아갈 순 없을까?'

그리고 내가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 죽음은 홀연히 나타나 말했다.

"모든 사람이 너와 같지. 그래서 세상은 항상 돌아가는 게 아닌가.
너는 세상을 주고 죽음을 얻었지만 다시 그 세상을 그리워 하게 되
어 있지. 너는 사실 미칠 듯이 걸으며 죽음을 희구하는 그 상태를
원했을 뿐이기 때문이지. 너는 단지 죽음을 바라고 싶었을 뿐, 죽
고 싶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네게 도로 삶을 돌려
줄 수는 없지. 너는 너의 세상 전부를 나에게 바쳤기 때문이야. 너
는 다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에게 줄 것이 없어. 넌 평온의 지
옥에서 살아야만 할거야. 알겠나. 친구."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
다. 나의 조용한 지옥을 맛보기 위해 나는 침잠을 시도했다. 나의
몸은 조용해 지고 조금씩 옅어져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평온할 수 밖에 없다. 이 곳엔 나를 괴롭히는 아
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히지만 그래도 이 상태를 벗어날
순 없다. 나는 내가 별로 영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늦은 깨달음이었다.

또 다른 미칠 것 같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두움만이 가득한
끝날 수 없는 밤이었다.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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