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단순한 요청

2006.10.13 17:2010.13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모른다는 것이다.

-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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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한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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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글자는 제발 빼줘요.

그가 말했다. 커피에 각설탕을 넣고 있던 나의 손이 멈춘 것을
나의 눈으로 보며 나의 입은 움직였다.

-그 단어에 왜 그렇게 집착해요?
-말했잖아요.
  마음에 안들어요.

그의 대답과 함께 각설탕은 커피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보았다. 눈화장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약간 쳐진
눈꼬리에서 나른함이 느껴졌다.
내가 듣기에도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 단어를 빼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겨우 두 글자에요.
  당신이야말로 왜 그렇게 집착해요?

그는 말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고양이처럼 곡선이
있는 그의 입술이 일자 모양으로 바뀌었다. 기분이 안좋을 때의
표정이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그 두 글자는..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딱 한번 나와요.
  하지만 글 전체의 주제를 나타내기도 하죠.
  그 글자를 삭제하는 것만으로도 내용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겨우..두 글자에요.

그는 힘주어 말하며 어깨를 당겨 얼굴을 가까이했다. 입술에 다시
곡선이 그려지더니 그가 다시 몸을 뒤로 물러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나른한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당신이 어떤 글을 쓰던 상관한 적 있나요?  
  처음 부탁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냉정하죠?

그의 말에 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기에 커피 한 모금을 마시
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내가 싫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나의 눈은 차가운 광택이 도는 핑크빛 입술을 보았다.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 두 글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어쩌면..
-..말해봐요.

말을 하려다 멈춘 나를 보며 핑크빛 입술이 움직였다.

-그 두 글자는 그냥 핑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핑계?
-당신이..
  나를 떠나기 위해 만든 변명거리요.
-내가요?

그는 약간 과장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듯 손을 움직여서
놀랐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가슴에 얹고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단지 그 두 글자가 마음에 안드는 것 뿐이에요.

그가 정확한 발음과 억양으로 강하게 말하는 그 한 마디를 들으며
나는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빠르게 들이켰다.

-내가 당신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해요?
  단지 두 글자 때문에?

그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눈썹을 살짝 움직이며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건 망상이에요.
  당신이 이번 글을 얼마나 공들여서 썼는지는
  나도 잘 알아요. 계속 지켜봤으니까요.
  하지만 그 두 글자는 마음에 안들어요.
  자, 어느 쪽이 더 중요해요?
  나랑..그 글자 중에?

비어있는 잔을 보고 있는 나에게 그는 속삭이듯 대답을 종용했다.
어떤 대답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질문을 하는 이유에 대한 두려움이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건 망상이에요..그의 말을 믿는 수 밖에 없다.
입천장이 아릿하다는 느낌 속에 나는 약간의 한숨을 섞어 말했다.

-알았어요. 지우죠.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그려졌다.

몇일이 흘렀다.
그 두 글자를 지우기 위해 열 문단 이상을 고쳐야했지만, 그 글자
는 원고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나는 고쳐진 원고를 가지고 그를 다시 만났다.
자신의 앞에 놓인 원고를 찬찬히 살피고 난 그는, 은색 립스틱이
빛나는 입술을 움직여 조용히 말했다.

-변덕이 심하군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내 표정을 보지도 않고 원고
를 내 앞으로 다시 밀어놓으며 이어서 말했다.

-줏대없이..
  남이 하는 말은 다 듣는 거에요?

그 뒤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떠나고 비어있던 의자와 칼로 갈기갈기 찢어버린 원고
만이 기억에 남았다.
망상이 현실화된 만남이 끝난 이후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와 함께 다니던 곳들은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간이 꽤 흘렀다.
그때 그 소설의 내용은 이제 한구절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한가지는 선명하게 기억난다.
내가 찢어버린 원고의, 22페이지 3번째 라인에 있던 단어.
그의 부탁으로 지워버렸던 두 글자.
그 두 글자는 '이별'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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