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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예언 이야기

2006.10.07 23:1210.07

“오늘 아침은 이상한 바람이 불던걸요.”

“아, 그래?”

창가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아운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아침이라 창백한 햇빛을 받아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잠깐이지만 은색으로 반짝였다. 그 머리칼에 티내지 않고 속으로만 감탄하면서 라히는 말했다.

“너무 무덤덤하시군요. 우리는 3년이나 이걸 기다려 왔는데.”

아운은 차갑게 대꾸했다.

“글쎄... 이상한 바람이라고 해서 꼭 징조라는 법은 없잖아? 바람을 읽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특히 너 같은 바보한테는 힘들걸.”

“확실히 저로서는 역부족이지요.”

라히는 아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운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었다. 이제는 아운의 빈정거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라히는 약간의 심술을 담아서 덧붙였다.

“그러니 저 대신 당신이 바람을 읽어보지 그러십니까? 항상 저한테만 시키지 마시고.”

순간 아운의 표정이 흔들렸다. 라히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회색 돌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이곳이 그들이 살던 마을이었다면, 아운이 혼자 불평을 터트리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 족장의 딸인 그녀와 자신이 이렇게 말을 나눌 일도 없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라히가 있는 이 방은 이 탑의 유일한 방이었다. 여기를 나가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들이 탑에 갇힌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정말이지, 하필이면 왜 너같이 음침한 녀석이랑 한 방에 있어야 하는 거지!”

아운이 항상 하던 불평을 내뱉었다. 또 시작이군, 하고 생각하면서 라히는 태연히 대꾸했다.

“그게 누가 할 말인데요?”

“너야 이 몸이랑 매일 같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원래대로였다면 너 같은 건...!”

“오늘 아침에,”

라의는 아운의 말을 끊고 말했다. 아운이 화가 나서 입을 뻐끔뻐끔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가볍게 무시했다. 3년 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운이나 라히나 이런 말다툼에 익숙해졌다.

“이상한 바람이 분 건 사실입니다. 제가 느꼈을 정도면 당신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요?”

아운은 코웃음을 쳤다.

“물론. 나도 느꼈어. 알아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거지.”

“인간들은 못 하지요.”  

“아... 그래. 그래서 우리가 이 빌어먹을 탑에 갇혀 있는 거고 말이야.”

아운은 이 말을 끝으로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다시 창밖의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아침해가 붉게 하늘을 물들이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라히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분명히 징조입니다.”

***
탑은 녹색 비단처럼 보드라운 잔디로 뒤덮인 아름다운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사철 장미와 진달래가 피어 있는 사이로 열두어 살 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언덕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소녀는 왕의 조카딸인 이라 공주였다. 사실 이곳은 왕족이라 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공주는 왕의 명령으로 탑을 찾아온 것이었다.  

이라 공주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화창한 대낮의 햇살을 받아 탑의 그림자가 언덕에 얼룩을 만들었다. 이 아름다운 언덕에 음침한 회색 탑은 무척이나 안 어울렸다. 이곳에는 원래 탑이 없었다. 적어도 30년 전에는 그랬다고 한다. 30년 전, 바람의 일족은 오랜 전쟁 끝에 왕국의 군대에 패배했다. 그리고 왕은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바람족 여자를 왕궁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는 이 언덕에 탑을 짓고 여자를 가두어 버렸다고 한다. 3년 전에 첫 번째로 끌려왔던 그 여자가 탑 안에서 죽자, 두 번째 바람족이 끌려왔다. 처음과 달랐던 점은 이번에는 끌려온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는 것이다.  

탑에 도착한 이라 공주는 문 앞에 섰다. 튼튼한 철문이었다. 몇 년 동안이나 아무도 손대지 않아서인지 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살짝 밀자, 의외로 쉽게 열렸다. 어쩌면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라 공주는 약간 놀랐다. 시커먼 어둠 사이로 어렴풋하게 돌계단의 윤곽이 보였다. 안쪽을 향해 발을 옮기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이라는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뒤를 돌아다았다. 자신과 똑같은 갈색 고수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동갑내기 사촌의 온화한 얼굴이 이라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덴! 여긴 웬일이야?”

“아바마마께서 널 혼자 여기로 보내셨다고 해서 부리나케 왔어. 그렇게 안 보여도 이 탑은 위험하다고. 마법이 걸려 있어서 막 들어가고 그러면 안 돼.”

“걱정할 필요 없는데. 폐하의 허락을 받았는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네가 또 사고치면 뒷수습은 내가 해야 하니까 그렇.... ”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렸다.

“어이, 거기 두 사라아아암!”

그 소리는 위쪽에서 들렸다. 둘은 멍하니 탑 위쪽을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탑 꼭대기에 난 조그만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내 목소리 들리냐!”

멀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창가에 치렁치렁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이라 공주는 갇혀 있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기 이전에 왠지 모를 감탄을 느꼈다. 정말로 누군가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는 데 대한 감탄이었다. 그것도 저렇게 시끄러운 사람이 말이다. 이라 공주는 내내 저 조용한 탑 안쪽에 과연 사람이 있긴 한 걸까 하고 의심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분명 소녀의 것이었다. 이라 공주보다 겨우 서너 살 많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당황에는 아랑곳없이, 다시 그 소녀가 소리를 질렀다.

“너희는 왕이 보낸 자들이냐?”

“아, 네...!”

이라는 얼결에 대답했다. 옆에서 이덴이 ‘좀 더 크게 말해야 들리지 않을까?’ 하고 중얼거렸지만 소녀는 이라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어쩌면 이라 공주가 뭐라고 대답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어쩐지 화난 듯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선언했다.

“가서 왕에게 전해라! 징조가 나타났다고. 이제 예언이 실현될 때가 왔다. 징조가 알려준 바를 듣고 싶거든 왕이 직접 찾아오라고 전해라! 그리고 이제 이 탑에서 우릴 내보내줄 때가 되었다고!”

이덴 왕자와 이라 공주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덴이 말했다.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알고 계시겠지.”

***
이덴과 이라는 왕을 찾아갔다. 왕은 이라의 옆에 이덴이 있는 것을 보고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왕은 자기 동생의 딸인 이라를 옛날부터 꺼려했다. 거기다 아들인 이덴 왕자와 이라 공주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은 항상 그를 언짢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가벼운 불쾌감은 바람족 여자의 전언을 듣고 나서 왕이 느낀 두려움과 광기어린 환희에 금세 밀려나고 말았다. 왕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무시무시하게 웃더니,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탑에 가겠다. 너희들은 별궁으로 돌아가라.”

이덴 왕자와 이라 공주는 어전을 나와 숙소가 있는 별궁으로 향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봄을 맞은 아름다운 별궁의 정원이 노을로 붉게 물들었다. 이라 공주는 발끝으로 채이는 돌을 툭툭 차면서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공주의 그런 행동을 나무랐겠지만 이덴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말없이 이라 공주의 옆에서 걷고 있던 이덴 왕자가 입을 열었다.

“넌 그 탑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어?”

“아니. 어렴풋이 예언이 어쩌니 계약이 어쩌니 하는 소릴 들었던 기억이 나긴 하는데.”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아, 이라. 아바마마의 태도가 이상했어.”

“폐하야 항상 이상하신걸.”

“그렇기야 하지만...아바바마의 그런 표정은 처음 봤어.”

이 말을 끝으로 이덴은 입을 다물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이덴 왕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라 공주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유모가 한 손에는 드레스를, 다른 한 손에는 빗을 들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못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는 유모를 보며 이라 공주는 움찔했다.

“공주님! 어딜 갔다가 이제 오시는 거예요. 저녁때가 다 됐는데!”

“이, 이번엔 마을로 놀러간 거 아니야! 폐하의 명령을 받고 심부름을 다녀왔단 말이야!”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왠지 스스로에게도 변명처럼 들려서 이라는 당황했다. 유모는 이라가 뭐라고 말하든 신경쓰지 않고 자기의 의무를 수행했다.

“어쨌든 이리 오세요. 옷 갈아입혀 드릴 테니까.”

“옷 정도는 내 손으로 갈아입을 수 있어.”

유모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빨리 갈아입으세요. 머리는 제가 빗겨 드리겠어요. 머리가 엉망이에요.”

이라는 재빨리 놀이옷을 벗고 만찬용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유모는 이라 공주를 거울 앞에 앉히고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이라 공주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저기, 유모.”

“네?”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진 공주의 머리채를 가능한 한 단정하게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던 유모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유모는, 언덕 위의 탑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서 알고 있지? 왜 거기에 30년 전부터 바람족이 갇혀 있는지도. 유모는 그 때 이미 어른이었으니깐.”

“그건 알아서 좋을 거 하나도 없는 이야기랍니다.”

“그래도 알고 싶어. 알려줘. 응? 응? 응? 그럼 이제 말썽 안 부릴게!”

유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원 참,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정 듣고 싶으시다면 얘기해 드리지 못할 것도 없죠.”

유모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라 공주는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바람의 일족은 옛날부터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답니다. 왕국과의 오랜 전쟁 끝에 바람족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궁지에 몰린 바람족의 족장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그들의 신에게 소원을 빌었대요...”

-너는 네 혈족의 손에 살해당할 것이며, 너의 왕국은 퇴락하고 멸망할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말보다도 죽어가는 그녀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에 왕은 공포를 느꼈다. 전쟁에서 이겼지만 왕은 그녀의 저주가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왕은 마법사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이었던 카암에게 조언을 구했다. 왕의 동생은 그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예언이며, 그 예언이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왕과 살아남은 바람족들은 계약을 맺었다. 예언이 언제 실현될지, 누가 왕을 살해할 자일지 미리 알아낼 수 있다면 예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법사 카암의 말에 따르면, 그 징조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바람족뿐이었다. 죽은 족장이 호소했던 신은 그들만이 섬기는 신이었으며, 그들만이 그 신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바람족은 그 예언의 징조를 읽어낼 수 있는 자, 족장의 피를 이은 자를 왕국에 볼모로 보내기로 약조했다. 대신 바람족은 살아남은 일족들을 위한 일시적인 평화와 그들이 조용히 살아갈 조그만 숲을 얻었다. 이 계약은 징조가 찾아올 그날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폐하는 끝내 바람족에 대한 혐오를 버리지 못하셨죠. 결국 마법사 카암 님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바람족 여인을 가두어 둘 탑을 세웠어요. 그 여인이 왕의 눈에 뜨여 왕의 심기를 거슬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오로지 왕만이 탑을 둘러싼 결계를 해지할 수 있도록 마법을 걸었죠.”

이라 공주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그 탑을 세웠다고?”

“카암 님이 세운 건 그 탑뿐만이 아니에요. 안타깝게도 공주님은 그 재능을 물려받지 못하셨지만, 카암 님은 정말 대단한 마법사셨거든요. 탑이 완성되자 바람족이 보낸 ‘징조를 읽는 자’는 그곳에 갇히게 되었죠.
  
하지만 사실 그건 왕이 그 바람족 여자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한 복수였다는 소문도 있었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고, 왕의 동생이었던 마법사 카암이야말로 그녀의 진짜 연인이었다고 말했지요.”

유모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소릴 했는지 깨닫고 재빨리 공주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공주는 기억도 거의 나지 않는 아버지의 연애 행각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유모는 안심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어쨌든 그 여자는 탑 안에서 죽었고, 3년 전에 바람족은 새로운 ‘징조를 읽는 자’로서 두 명의 소녀들을 보냈죠.”

“그러니까, 탑에 갇힌 바람족들한텐 아무 죄도 없다는 이야기네?”

이야기가 끝나자 공주는 살짝 콧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유모는 재빨리 공주의 말을 정정했다.

“그렇지 않아요! 바람족과의 전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른다고요! 게다가 그때 탑으로 끌려가는 바람족 여자를 직접 본 제 어머니 말씀으로는, 그야말로 악마의 형상과 같았더랍니다. 미친 듯이 날뛰면서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왕께 퍼부었다나요! 이 왕국이 멸망하고, 왕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길 저승에서도 빌겠다고 했대요.”

“어머나, 하지만 왕국이란 언젠가는 멸망하게 마련이야. 게다가 나라도 그 상황에선 그렇게 말했을 것 같은걸. 삼촌도 정말 너무하셨어. 볼모로 끌려온 것만도 서러울 텐데 탑에 가두라고 명령하다니.”

유모는 입을 딱 벌리고 한탄했다.

“설마 폐하나 이덴 왕자님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공주님, 언젠가는 멸망할 왕국이라고 해서 지금 소중히 여기지 않을 이유는 없어요. 이덴 님이 왕으로 즉위하시면, 그땐 공주님께서 이덴 님을 도우셔야죠.”

“응, 있을 때 잘 하란 거지? 나도 알아.”

이라 공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유모는 한숨을 쉬면서 공주의 갈색 머리카락을 빗어내리기 시작했다.

“암만 봐도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그때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무장한 병사들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유모와 공주를 에워싸고 창과 칼을 들이댔다. 유모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
“그나저나, 정말로 그 공주가 왕을 죽이고 왕국을 멸망시키게 될까? 도저히 그렇게는 보이지 않던데.”

“당연히 그렇겠지요.”

라히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운은 꺼림칙함을 느끼고 재처 물었다.

“무슨 뜻이지?”

라히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건 거짓말이니까요. 예언의 징조 따위는 없었습니다. 이 탑을 나가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예언이 말해지고 나서 벌써 30년이나 지났어요. 언제 징조가 찾아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뭐? 하지만 네가 바람을 읽었댔잖아!”

“당신도 바람에서 징조를 읽었다고 말했지 않나요?”

아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히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전 당신에게 바람을 읽는 능력이 없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당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거란 사실도.”

아운은 천천히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라히도 그 옆에 앉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아운은 라히를 노려보며 물었다.

“어머니도, 알고 계셨어...? 나에게는 능력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걸.”

“아마도.”

“그래서 어머니가 탑에 너를 같이 보낸 거로군. 난 족장의 피를 이었다 뿐이지 징조를 읽어낼 능력이 없으니까.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아운은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이었다.

“결국 널 보낸 건 어머니의 실수였어. 넌 모르고 있어. 예언이 이루어져서 정말로 왕국이 멸망한다면, 우리 일족은 자유로워질 거야. 하지만 예언이 거짓이라면, 언제까지고 나타나지 않을 징조를 기다리면서 이 계약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 그러지 않으면 다시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르니까! 사실 우린 징조가 정말로 나타났더라도 왕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거였어... 하지만,”

아운은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라히가 대신 아운의 말을 받아서 끝마쳤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깨닫지 못한 척했지요. 왜냐하면, 아운 당신도, 여기서 나가고 싶었으니까... 그렇지요? 게다가, 그 예언은 그저 죽어가던 선대 족장의 헛소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신이 그 정도로 강력하고 세상사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우리 일족이 전쟁에서 졌을 리가 없으니까요. 예언이 가짜라면, 그 징조도 가짜가 될 수밖에.”

아운은 낯선 사람을 보듯 라히를 보았다. 라히는 아운의 눈길을 피했다. 아운은 고개를 돌려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하늘과, 언덕 아래로 펼쳐진 시가지에 하나 둘 불빛이 밝혀지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3년 만에 보는 바깥세상의 풍경이었다. 저 너머에는 그들이 살던 그리운 고향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넌 아마 나랑 같이 탑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원하지도 않는 역할을 뒤집어쓴 거겠지... 너는 내 어머니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르잖아? 안 봐도 뻔하지. 하지만, 일족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도망치려 하다니. 그럼 안 되는 거잖아. 정말, 그 여자애를 희생시켜도 좋아?”

이번 물음에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분명히 그 공주님은 괜찮을 겁니다. 사실, 바람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했던 건 아니거든요. 오늘 아침에 이상한 바람이 불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 그리고 말해두는데, 전 족장님이 명해서 당신을 따라온 게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 있었던 건 오로지 제 뜻이었어요.”

***
이라 공주는 감옥의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달빛도 비쳐들지 않는 어두운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 왔어.”

이덴이었다. 이라는 이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이덴이 입을 열어 물었다.

“도망칠 거야?”

“글쎄... 모르겠어.”

이덴은 피식 웃었다.

“날 못 믿는구나. 이거 서운한데. 도망치는 거 도와주려고 했단 말이야.”

“... 사실은, 진짜로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해봤어.”

“그래도 역시 죽을 수는 없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삼촌을 죽일 리가 없잖아! 어째서 폐하는 내 말보다 그런 예언을 더 믿으시는 거지...?”

이라 공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덴은 조용히 대답했다.

“가족과 신하와 자기 자신을 항상 의심하는 게 왕의 의무니까...”

하지만 난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이덴은 생각했다.  

“같이 가자. 보초는 내가 처리했어.”
    
***
라히와 아운은 왕도를 빠져나왔다. 왕궁의 불빛이 뒤로 멀어지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온 짙은 풀과 나무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숲이 가까워 오는 모양이었다. 아운은 입을 열었다.

“역시, 그 예언은 가짜였겠지? 어차피 이제 와선 다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라히는 아운을 잠깐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글쎄...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요.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서 밤하늘 아래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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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서없는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려요♡
뭔가 뒷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이야기는 백합물입니다(....도망간다)
w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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