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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벤트] Three of swords

2004.02.19 18:4102.19

아침은 상쾌했다. 어제 아프던 다리도 침대 속에 넣어 둔 따뜻한 탕파로 많이 나아졌고, 끈덕진 잠의 칭얼거림 없이 산뜻하게 깨어났다. 겨울치고는 따뜻한 날씨였다. 피부에 서늘하게 와 닿는 공기를 느끼며 맨 발을 침대 밑으로 내어놓고, 한껏 기지개를 켰다.
양젖으로 만든 치즈가 곁들여진 가톨릭계 학교 기숙사의 소박한 음식을 먹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헬바에게 그 날 아침은 썩 좋은 것이었다. 아침의 산뜻한 기분은 홀에서 받아 든 편지에 의해 고조되었다 편지 겉봉의 뜯어짐과 함께 찢어 발겨져 발 밑으로 흩어졌다.
그 편지는 그의 대모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는 편지를 말아 쥐고 기숙사 방으로 내달렸다. 그는 성급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와 원목 책상의 서랍을 열고 서둘러 편지지를 꺼냈다. 성급한 그의 몸놀림에 차갑고 딱딱한 걸상이 부딪쳐 쿵하는 소리를 냈다. 펜을 쥔 손이 이마께에서 바들바들 떨렸다.
눈물은 천천히 흘렀다. 도착한 편지는 완곡하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분명하게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헬바는 눈물을 훔치며 서둘러 펜을 놀렸다. 그는 정확하게 무엇이 잘못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로 사죄의 말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주변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를 붙잡고 좀 진정을 하라고 얘기를 했겠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혼자 있었고 따라서 그 패닉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과의 말만을 편지지에 써넣는 것뿐이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대모의 발 아래 몸을 던져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고, 실망 받고 싶지도 않았다. 헬바는 대모 마음의 선 밖으로 내몰리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으로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펜을 휘날렸다.

"아, 이것. 부탁합니다."

헬바는 서둘러 문을 열고 회랑으로 달려나가 그가 편지를 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심부름꾼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주며 답장을 건냈다.
겨울의 중간 즈음, 헬바는 회당에 서서 인간관계에 대한 자신감이 붕괴하는 좌절감을 맞보며 심부름꾼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Three of Swords.

                  

"헬바!"

수업을 위해 잿빛 돌로 만들어진 긴 복도를 걷고 있던 헬바가 뒤를 돌아 피레를 바라보았다.

"아, 나는 네가 먼저 간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있나. 친구."
헬바가 건넨 말에 피레는 가볍게 응답을 하며 책을 고쳐들었다.

"잠깐 볼일이 있었을 뿐이지."

피레가 웃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부활절도 상당할 것 같더데. 교수가 굉장한 걸 가져왔어.
그걸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 그것만으로도 사순절을 정숙하게 보내는 보람이 있겠어."
"그거야 성공했을 때의 일이지."
"으하하! 성공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신은 당신의 부활 찬송을 위해 두 달이란 시간과 최고의 합창단을 안배해 놓지 않으셨다고."
"엘레나를 말이지."
"이런, 엘레나는 최고의 합창단의 일부인거지."

헬바는 '엘레나가 있기에 최고의 합창단인 것은 아니고?'라고 빈정대려는 입을 간신히 조용히 시켰다. 헬바는 엘레나가 싫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신경이 긁히는 듯한 기분이 들고 안절부절해지는 자신에게 평정을 가장시키는 것도 피곤했다. 질투.
우수한 능력과 방정한 품행, 교수의 신임과 동료의 동경. 엘레나는 확실히 빛에 속한 자였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어둠도 강한 법-이라고 헬바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질투는 타당한 것이라고.

일주일에 세 번 들은 음악시간에는 성가를 배웠다. 작곡가나 음악지식에 대해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모분의 시간을 합창을 중심으로 성가를 불렀다. 이것은 학생에게는 화성과 발성에 대한 체험적 지식과 합창 실력을 학교측에는 우수한 성가대란 이득을 가져왔다. 모든 학생들이 성가대인 것은 아니었지만, 음악시간의 절반 이상은 미사를 위해 바쳐졌다. 부활미사와 성탄미사 그리고, 매 주 미사의 찬송가와 특송, 노래들은 매주 엮이어 제대 앞에 바쳐졌고, 그 노래의 꽃다발은 학교 주변의 평신도를 기쁘게 했고, 학교의 교수와 학장을 기쁘게 했다. (하느님도 기뻐하셨길. 아멘)
사정이 이런 만큼 각 파트의 솔로는 눈에 띄는 존재이다. 교수는 합창에서는 개개인이 다 중요하고, 그 찬송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라 하지만, 어쩌겠는가. 유니크한 것는 눈에 띄기 마련이고, 아름다운 것은 마음을 사로잡기 마련인 것을. 그 동경과 내밀한 부러움를 일으키는 존재 중에 엘레나가 있다. 평소에는 평범하던 목소리가 노래를 부를 때에는 성가에 가장 적합한 목소리를 내며 풍부하게 울린다.
아무튼, 그가 3단 케익 첨단에 얹힌 설탕으로 만든 가장 화려한 데코레이션임에는 틀림없다-고 피레는 생각했다. 그리고, 헬바가 엘레나를 싫어하는 건 그 데코레이션을 얻은 자신이 없는 아이의 투덜거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피레는 조금 웃었다.

교수가 들어오고, 첫 연습이 시작되었다.


**
"피레?"

헬바는 가느다란 소리로 친구를 불렀다. 캄캄한 방으로 희미한 달빛이 들어와 썰렁한 방안을 스산하게 비췄다.

"피레, 자?"
"음?"
"뭐 물어봐도 될까?"
"응."

헬바는 잠시 주저했다.

"내가.. 누구한테 실수를 했는데, 그 당시에는 내가 잘못한 줄을 몰랐어. 솔직히 말하면 뭘 어떻게 잘못한 거지도 모르겠어. 나, 난 정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그냥 내 마음을 알아주면 안 되는 걸까?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아. 사죄편지를 보냈는데 아무 답장이 없어. 다시 야단치는 편지라도 좋고, 아니면 앞으로는 조심하라는 편지라도 좋아. 왜 아무 편지가 없지? 다시 편지를 보내야 할까? 아니면 기다려야 할까? 어쩌면 좋지?"
"일단은 좀 기다려 보는 게 어때? 아직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화가 다 풀리셔서 다시 편지를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르잖아. 그 누구가 대모님이지?"
"...응."
"기다려 봐. 편지를 자주 쓰시는 분도 아니시니."

헬바는 침묵했다. 괜찮은 걸까. 그저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도. 그 사이에 대모님의 마음이 점점 틀어져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 네 대모님이시잖아."

그래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대모님이었기에. 어째서 자신은 친밀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그 간단하고도 중요한 원리를 가벼이 넘겨버렸던 것일까.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조금 더 조심하고,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예의바르고, 조금 더 이기적이지만 않았으면 좋은 것이었는데. 헬바는 강한 자기혐오에 몸부림쳤다.
피레는 밤새 잠 못 들어 하는 헬바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충고와 격려 몇 마디뿐이었고, 나머지는 헬바의 몫이었다.


**
호흡은 배에 힘을 주고, 이마가 울리듯이 가라앉지 않고 가볍게 들어올리는 느낌으로,
소리가 입 안에만 머물지 않도록 저 멀리 있는 목표를 향해서 창을 던지듯 소리를 낸다.
악보의 암기는 필수. 악보가 아니라 지휘자를 보면서 같은 느낌을 공유하면서 해야하기 때문이다. 피아니시모부터 포르티시모까지. 고통스럽게 영광스럽게 환희에 차서.
그러나 오페라 가수처럼 불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아이의 덜 여문 소리가 나서도 안 된다. 추구하는 것은 성스러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만!"

쩌렁. 소리가 울렸다.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어. 다른 파트의 소리를 잘 들으라고 했잖아! 거기서 그렇게 계속 흥분하면 어쩌자는 거야! 흥분은 싹 가라앉히고 다른 파트 소리를 들으면서 하라고 했지! 너네 혼자 노래해? 엉? 혼자 흥분해서 뛰쳐나가면 어쩌자는 거야!"

가끔 있는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연습 초기에는 각 파트들이 조화보다는 자기 음을 지키기 위해 악을 쓰며 노래하는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각자가 각자의 템포로 달려가 버린다고 할까. 그렇게 되면 다른 파트가 거기에 딸려가 빨라져 버리거나 서로 어긋나 버린다던가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똑바로 안 해! 노래를 한 게 몇 핸데 아직도 이 모양이야!"

'하지만 매년 신입생이 들어오는 걸요. 교수님'이라고 말하고 싶은 학생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뭐. 어찌하겠는가. 후배의 잘못을 감싸안지 못한 것이 선배의 죄라면 죄인 것을.

"니들이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면 뭐해. 전체적으로 조화가 되야 될 것 아냐. 자, 그 전 마디부터 다시."

연습을 그 뒤로도 교수의 얼굴을 몇 번씩 붉게 만든 뒤에 끝이 났다. 피레는 엘레나의 솔로부분을 듣지 못한 것에 상당히 아쉬워하며 헬바에게도 동의를 구하려 했다.

"어째서? 엘레나의 솔로가 좋지 않아?"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야."
"궁극의 미는 취향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진리란 보편적인 거라구."
"그거랑 이거는 다른 거 같은데."

헬바는 가볍게 코웃음쳤다.

"아무튼, 그의 노래가 별로란 말이야?"
"별로란 뜻이 아냐. 단지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거지. 너무 가늘고 너무 기교적이야. 아, 그래. 목소리는 좋을지 모르지만. 너무 잘 부르려고 하는 점이 싫다구."
"그에게 콤플렉스를 느끼는게 아니구?"

피레는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헬바는 '무슨 그런 쓸데없는-' 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이곤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콤플렉스-. 정확히는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헬바는 그것이 질투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관심없는 표정을 하고 언제나 엘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친해지고 싶지만 먼저 손 내밀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 가볍게 다가가면 그 쪽에서도 가볍게 상대해 주겠지만 그것이 싫은 지도. 하지만, 엘레나쪽에서 먼저 손 내밀어 줄 리도 만무하다. 아무튼, 그 쪽은 그야말로 [인기인]이었으니까.  
자신이 언제까지나 그의 단 하나뿐인 친구로 남아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저 단순히 엘레나에게 말을 걸고 인사를 할 기회가 필요했다. 그를 극복한다면 다른 것들은 보다 쉬울 것이다. 그는 온실 속에서 걸어나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거기까지 생각한 피레는 헬바의 뒤를 쫓아 걸어갔다.



**
얼마 뒤, 피레는 헬바가 회랑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편진야?"

피레가 고개를 드밀며 물었다.

"대모님이야. 대모님이 편지를 보내셨어."

헬바는 피레를 바라보며 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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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은 카드는
Three of Swords.
전체 그림, 적합한 것들이 어떻게 해야 함께 어우를 수 있는 지를 인지하는 힘입니다.
[조화를 아는 아이,피레]가 [조화가 필요한 아이,헬바]의 조력자..라는 이미지였건만;;
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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