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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명조호텔 1907-8호

2006.12.23 05:2812.23

듀나님의 소설 '몰록'을 읽다가
초반부에 나오는 명조호텔의 묘사에 반해 썼습니다.
듀나님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혹시 몰록을 읽고 싶으시면
무루님의 사이트인 이곳으로 가세요.
꽤 오래전에 나온 소설로 추정됩니다.
물론 '몰록'을 읽지 않아도 이 소설을 읽는데 무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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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호텔은 의천의 랜드마크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의천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비록 과도하게 장식적이었지만 그 당시 호텔 옆을 지나던 사람들은 그 사치스러운 외관에 압도되곤
했다. 관광객들은 멀리서라도 명조호텔을 배경으로 잡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지금 그 건물은 더
이상 화려하지 않다. 기실 호텔로의 기능도 이미 하고 있지 않다. 1997년의 대화재 이후 호텔은 제
대로 보수되지 않았다. 엉성하게 복구된 전기는 쉽게 나갔으며 금이 간 내벽은 부슬부슬 무너져 내
리고 지하에서는 유독가스가 올라오곤 했다. 이제 명조호텔은 암시장이자 불법클럽이자, 부랑자와
약물중독자와 범죄자들의 집단거주지이다.

나는 명조호텔 19층에 이 년 째 살고 있다. 그날 아침, 인영과 나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자위를
하고 있었다. 인영의 신음소리에 선잠을 깨었지만 손을 뻗어 서로를 살피는 것조차 피곤했다. 그날
따라 자위도 별 감흥이 없어서 다시 잠이나 잘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 쪽 천장 일부가 무너지
면서 무언가 떨어져내렸다.  

우리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뭐지?"
"어린 애 아니야?"
우리는 다소 겁을 먹었다. 이 방에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은 오랫만이기 때문이었다.
"죽은 거 같은데"
"어떻게 하지?"
"....일단 내버려 두고 나중에 생각하자. 시체가 움직이진 않을 테니까"
"방에서 썩어가게 내버려두자고?"
"누가 그러쟤?"
나는 살짝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인영과 길게 대화하는 것은 나흘만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말투는
신경을 건드렸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중에 버리든지 하자는 거지."
"지겨워. 결국 나보고 치우라는 거잖아"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라고 대꾸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인영과는 가능한 적게 말하는
편이 나았다. 이야기는 끝도 없어지고 다툼이 될 뿐이다. 인영은 몸에 감은 이불을 질질 끌며 엎어
져 있는 시체에게로 걸어갔다.
"생각보다 큰 애네. 너가 좀 치워."
"왜?"
"시체잖아. 징그럽단 말야"
"나중에"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인영이 계속 소리 지르기에 약을 먹고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디기239가 보여주는 꿈은 언제나 멋졌다. 나는 흡혈귀 일곱 명을 칼로 찔러대고 승리의 기쁨으로 하
늘을  날다가 잠에서 깨었다.

  날은 어느새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인영은 창가 거울 앞에 앉아 얼마 안남은 빛에 의지해 화장을
하고 있었다. 먹을 것이 떨어져도 인영은 그녀가 구할 수 있는 가장 고급의 화장품을 사들이곤 했
다. 나는 인영이 조심스레 마스카라를 바르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길고 풍성하게 위로 뻗쳐올
라간 속눈썹은 언제나 인영의 자랑이었다. 날개처럼 파닥이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나는 웅얼거리
듯 물었다.  
"몇 시야?"
"다섯 시"
젠장. 이비치와의 거래시간이 지났다.
"난 늦을 거야. 올 때까지 저것 좀 치워놓아."
"시끄러"
나는 비척 일어나서 세면대로 걸어갔다. 세면대로 가려면 그 시체를 타넘고 가야했다. 잠이 덜 깬
탓인지 천장 잔해에 발이 걸려 그 아이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인영이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투덜
거리며 일어나 시체를 약간 옆으로 밀었다.
"어? 인영!"
인영은 들은 체도 않고 눈동자에 염색약 바늘을 찔러 넣고 있었다.
"인영! 이거 너 아니야?"
"무슨 소리야? 약 덜 깼어?"
"봐봐. 이거 너잖아!"
"돌았어. 진짜."
인영은 한쪽 눈만 금색으로 물들인 채 걸어왔다.
"뭐가 어떻다는 거야?"
나는 인영이 잘 볼 수 있게끔 시체의 머리카락을 치웠다. 소녀의 시체는 열 네 살 때의 인영의 얼
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난감해졌다. 뚫린 천장 구멍을 올려다 보니 어두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영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비틀비틀 침대에 가 앉더니 갑자기 옷을 챙겨 입었다.
"뭐해?"
"난 나갈 거야. 늦었어"
"이 상황에서?"
"늦었어"
"말도 안돼"
난 옷을 입는 인영의 팔을 잡았다. 인영이 내 손목을 세게 때렸다. 뼈마디를 맞은 손목은 금새 벌
겋게 달아올랐다. 아픔에 화가 난 나는 소리를 질렀다.  
"너가 뭐 약속이라도 있어? 기껏해야 클럽이나 가는 거잖아."
"내가 어디 가든 니가 알게 뭐야?"
"너가 뭐하고 사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머리비고 별 볼 일 없는 애들 꼬셔 주머니나 뜯어내는 주
제에. 그 짓하고 있을 때 난 네 유령이랑 이 방에 있으라고?"
인영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잘 아네. 그럼 내가 머리빈 애들 주머니 뜯어오면 너가 거기 빌붙어 살고 있는 것도 알고 있지?"
"조용히 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세 달째 수입이 없었다. 다시 잠들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디기239통을 쳐다
보았다.
“쓰레기 약물 중독자.”
인영은 스타킹을 신으며 말을 퍼부었다. 여전히 한쪽 눈만 금색이었다.
"내가 딴 애들하고 뒹굴 동안 넌 저 시체랑 뒹굴면 되잖아. 열 네 살 때의 내가 섹시했다며?
하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지? 변태 로리타 콤플렉스 환자. 잘 되었네. 이딴 사진 보고 자위하느니
실물이 나타났으니 좋잖아."
인영은 먼지가 쌓인 책상 위에서 작은 액자를 꺼내 들었다. 나는 그 사진이 거기 있는지도 몰랐
다. 내 로켓 속에 있는 줄 알았는데. 하긴 로켓이 어디론가 없어진 지도 꽤 되었다.

인영은 액자를 집어던졌다. 꽤 오랫만에 터트리는 히스테리였다. 인영은 유리파편 속에서 사진을
집어 들어 방금이라도 찢을 듯한 손동작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서서 인영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한때 나는 그 사진이 든 로켓을 언제나 목에 걸고 다녔다. 인영의 오빠 손에
로켓 줄이 뜯겨져 철로 밖으로 던져졌을 때, 나는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려고 까지 했다. 결국
그 날 밤을 새워 철로 곁 덤불을 뒤져 로켓을 찾아내었다. 인영은 간신히 접속한 통신기 너머에서
울었다. 사진이 뭐가 대수라고 그 고생을 해. 하지만 난 네 사진이 이거 밖에 없는걸.

인영은 결국 사진을 찢지 않고 그냥 바닥에 내팽겨쳤다. 하지만 그녀가 탁자 위에 던져놓은 코트
를 휙 잡아 끌었을 때 화병이 떨어졌다. 썩은 꽃이 바닥에 흩어지고 오랫동안 갈지 않은 상한 물이
열 네 살 인영의 사진 위로 배어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내리고 사진이 얼룩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쾅, 세게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인영이 팽겨치고 나간 옷들과 물건들로 방안은 어
지러웠다. 나는 디기 239통을 집어 들었다. 약은 두어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여섯 알은 먹어야
효과가 있건만. 나는 바닥에 남은 가루까지 입에 털어놓고 다시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머리가 아팠다. 정량을 채우지 못한 디기는 끈적거리고 불쾌한 질감의 꿈만을 남겨놓았
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연기 냄새가 났다. 스탠드를 켜고 시계를 보니 자정이 채 안 되
었다. 지하에서 또다시 화재가 난 듯 했다. 그곳의 전기배선은 엉망이고 금이 간 지층에서 아직도
가스가 올라오기에 일년에 한두 번 정도는 크고 작은 화재가 나기 일수 였다. 하지만 불길은 대부
분 지하와 지상층을 가르는 철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거기서 잡히곤 했다. 창으로 고개를 내미니 이
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 사람들과 앰블런스가 보였다. 앰블런스와 소방차의 대수로 보다 평소보다
큰 화재인 듯했다.

  대피를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무엇을 챙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스탠드 불빛 속
에서 구석에 쳐 박힌 채 오랫동안 건들지 않은 베이스 기타와 공구상자가 보였다. 아주 천천히 모든
것들이 쓸모없어져 갔다. 가져가야만 하는 것은 없다. 요새 나는 부쩍 말라서 예전에 입었던 옷들조
차 딱히 챙겨야 할 필요가 없었다. 지난 번 화재에도 아무 일 없었으니 이번에도 불이 여기까지 오
지 않을 거라고 애써 생각하려 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사이 연기냄새가 좀더 심해지고 있었다. 디기239통이 비어 있으니 할 일이 없었
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흐마또바의 시집을 주워 들었다. 어딘가에 쑤셔 박혀 있다가 아까 책장에
서 액자를 집어들 때 떨어진 듯 했다. 아주 오래 전 인영이 내게 읽어주곤 하던 시집이었다. 나는
음정이 맞지 않은 노래를 부르면서 바닥에 꼼짝 않고 누워있는 시체에게로 다가갔다.  

예뻤다. 열 네 살 때의 인영이었다. 몇번이고 발 돌려 돌아보게 하던 인영이었다. 방금이라도 손을
뻗어 가볍게 내 목을 감아올 것 같았다. 그 때의 일별 후 다시 만나기 까지 칠 년이 더 걸렸지만
나는 그 기간동안 한 번도 인영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나는 천장 잔해 속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인영의 몸을 반듯하게 눕혔다. 조금 단정하게 정리해주고 싶었다. 구겨진 스커트의 주름
도 매만지고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정리해 놓았다. 그리곤 인영의 볼을 슬쩍 만졌다. 차가웠지만, 생
각만큼 딱딱하지 않았다. 나는 온기를 돌게 하고 싶어서 손바닥을 들어 인영의 볼을 부볐다. 입술
옆에 있는 작은 점 외에는 티없이 하얀 얼굴이었다. 그래, 그때 내 가장 큰 소원은 인영에게 입 맞
추는 거였다. 딱 한 번 용기를 내어 다가갔을 때 그녀의 오빠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그는 평소에도
혼혈 중성체 기형아 새끼라고 나를 욕하던 사나운 소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오빠는 없다. 나는
눈감고 있는 인영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덥다. 내 심장이 흥분한 탓인지 화재의 열기 탓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웃옷을 벗고 인영의 블라우스 단추도 푼다. 그 시절 그녀는 언니만 곁에 있으면 무
엇이든 다 좋다고 말하곤 했다. 수학에서 늘 만점을 받는다는 이유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먼지로 더럽혀진 푸른 스커트 밑으로 가만히 손을 넣
는다. 창 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한 층 더 커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 번에야말로 불이 여기까지 올라
올 지 모른다. 나는 이것으로 해피엔딩이라 생각하며 인영의 감긴 눈으로 입술을 옮겼다.


+     +     +
축복처럼 거창한 마지막은 없었다. 불은 이번에도 19층까지 오지 않았다. 드물게 지하의 철문을 빠
져나온 불길이었지만  새벽이 되기 전에  조용히 사그라 들었다. 본디 명조호텔의 외관은 불탄 자욱
투성이라 그 전과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가 열 네 살 인영의 시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암시
장 패거리들이 위층 창고에 쌓아두었던 신형 로봇 모델 중 하나였다. 피부가 인간 시체처럼 뻣뻣이
강직되어 나온 첫번째 대중품이었다. 인영은 자기의 외모을 도용했다면서 소송을 걸겠다 했지만,
막상 확인해 본 결과 인영의 어릴 적 모습과는 그리 닮지 않았다. 내가 로켓 속에 넣어다니던 사진과
는 거의 똑같았지만 사진은 물에 젖어 이미 판독할 수 없었다. 실재의 열 네 살 인영은 그 사진과는
달랐고 나는 그 사진의 모습로 기억 속의 인영 을 대체해 왔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디기에 취해 거의 자면서 지냈다. 디기가 보여주는 꿈은 언제나 멋졌다. 일주일 전부
터 인영은 방에 들어오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돈많은 애인을 붙잡는데 성공했는지도 모
른다. 오늘 만난 디기 밀수업자 보리스는 인영이 고급차 옆 좌석에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 했다. 보
리스는 새로 끼어든 어떤 불법적인 사업에 계산을 잘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나에게 의향을 물었
다. 돈이 필요했기에 무엇인지 묻지 않고 승낙했다. 보리스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호텔
앞 벤치에 앉아 햇빛을 쐬었다. 밖에서 바라본 명조호텔은 불탄 흔적으로 가득해 안에서보다 더 음
침해 보인다. 놋쇠 손잡이는 녹이 슬고 장식이 많은 창틀은 더러운 더께를 뒤집어 쓴 채 방치되어
있다. 명조호텔이 호사스럽게 번쩍거리던 때를 떠올려 보려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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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호텔 이야기 역시 연작으로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이 맛이 간 주인공의 이야기는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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