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아!" 잎새가 말했다.
"나는 왜 태어난 것일까? 왜 자라난 것일까? 처음 겨울의 칼바람이 걷혀갈때쯤, 뿌리에서 뽑혀올라온 생生의 약동들은 내가 존재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라고 여겼어. 그리고 나는 동물들이 그렇듯, 뱃속에서 잠자는 아이처럼, 알을 깨치고 나가길 기다리는 도마뱀처럼 그렇게 웅크리고 이런 약동하는 맥박을 세상 밖으로 굽이치기 위해 온몸을 뻗어서 가지의 문을 뚫어버리고 나오려 발버둥쳤지. 그리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문을 두드리며 신神의 손길을 드리워주고 문의 손잡이를 살며시 돌려줬을때,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고개로 나뭇가지를 박차고 나와 비로소 하늘을, 태양을, 그리고 구름과 새와 지나가는 다람쥐와 나뭇가지로 이어지는 개미들의 행렬을 바라볼 수 있었지. 나는 바로 이 경이로운 순간에 삶의 모든 진실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어.


태양이 계속 돌아가고 별들이 운행하고, 나는 은하수를 바라보면서 장마가 뿌려주는 넥타르(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음료수)를 받아마시고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나는 이제 예전의 작은 잎새가 아니라 커다란 활엽으로 내가 속해있는 어느 고목에 많은 양분을 보내줄 수 있었고, 나는 더욱 자라나 장정처럼 듬직하고 풍성한 나뭇잎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봄이 보여주었던 그러한 경이로운 삶의 진실들은 여름에 결실을 보게되리라는 나의 신념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봄의 마법은 나를 태어나게 했고, 여름의 축복은 나를 자라나게 했으니, 자연은 그리고 신은 우리의 아버지이며 우리를 기르는 가이아Gaia였던거야.

하지만 곧 나는 깨달았어. 개미들은 여름에 아폴론이 내려준 은총의 결과들을 어디론가 꾸준히 날라놓고,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개미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답없이 이파리의 어귀를 사각사각 갉아내고 물고 어디론가 돌아갔어.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어. 하지만 신은 언제나 나를 기르고 먹이고 살게 해주었기때문에 나는 가이아께 기도드리며 늘상 그렇듯 햇빛과 빗물을 가지고 나무와 뿌리를 향해서 계속 영양분을 보내주었고, 그만큼 나는 더 자라났어.

그런데 이상하지. 최근 며칠간 나는 더이상 자라거나 성장하는게 없는 듯 해. 게다가 양분이 더이상 내게로 돌아오지 않아서 몸에 힘이 점점 빠져나가. 이러다가는 곧 나는 시들어버릴지도 몰라.
시들어버린다고? 그것이 무엇을 말하지? 나는 겪어보지도 못한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난 봄에 나뭇가지의 문을 뚫고 힘차게 세상으로 첫 발을 내딛었을때도 삶을 살지 않은, 출발점에 서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삶의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고 생각했어. 그때의, 신이 내려준 경이로운 심미안이 지금도 발현하는 것일까?

이제 나는 태양조차 차가운 빛을 뿌려대는 이상한 시기로 접어드는 한가운데 있고, 푸르렀던 몸이 점점 말라가고 있어. 그래! 나는 이제 곧 시들어버릴거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봄에 내가 태어난 것 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그 안에 있을거야."

"넌 이제 여기서 가만히 생을 음미하기만 하면 돼."

그때, 매서운 북풍이 잎새의 목을 날카롭게 베어버리며 말했다. 잎새는 바람에게 입맞추고 힘없이 하늘거리며, 그를 품에 안고 황홀감에 젖어 속삭였다.

"고마워. 난 이 순간 진정 살아있음을 느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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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가을에 낙엽을 보다가 감상적으로 스파크가 파파팍 튀어서 자그마치 5분만에 완성한 일종의 오마쥬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시골의사』에 수록된 「작은 우화Kleine Fable」라는 짧은 단편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대답이자 오마주입니다.
가장 최근에 쓴 (작품이라기보다는) 소품입니다. 글 정리하면서 이렇게 연대기순으로 정리해보니, 왠지 제 글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는것 같기도 하네요.
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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