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원하는 자

2007.04.16 20:0804.16

고등학생인 박소연 양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녀에게 세상은 너무나 쉬워 보였고 그렇게 생각하게된 많은 이유가 바로 그 비밀에 있었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사실 누구에게나 특별한 능력은 있다. 어떤 이는 달리기를 잘하고 어떤 이는 말을 잘 한다. 박소연 양은 이를테면, 만들기를 잘했다. 그녀가 5살 때, 그러니까 아마 추석이었을 것이다.그녀는 송편을 만들고 있었다. 어른들은 담배와 술을 찾아 차츰 송편에서 멀어졌다. 다섯살난 아이는 싫증도 내지 않고 송편을 빚었다. 사실 그건 송편이라기보다는 콩이 들어간 수제비에 가까웠다. 다음날 사람들이 허둥지둥 차례를 지내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기이한 조형물이었다. 그건 후일 아이의 어머니가 말했듯이 웃옷을 벗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아이는 조형물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었다. 만약 그 큰 것이 들어갈만큼 거대한 솥이 있었다면 그들은 차롓상에 지금껏 한번도 올려보지 못했던 거대한 송편을 진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 그것은 익히지 않은 송편이었다. 안에 엄청난 양의 콩과 흑설탕이 들어 있었다.  

박소연 양은 커서도 비슷한 일을 여러번 경험했다. 베개 대신에 나타난 수제비 반죽이라든가 가사 실습 시간에 한자리를 차지한 책상만한 떡볶이가 그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이 먹을 것을 크게 만드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광범위한 능력이라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초경을 시작할 즈음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숙했다. 그건 그녀의 능력 덕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능력이 어떤 것인지, 어떤 고통을 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 거대한 빵이나 밀크셰이크를 처리하기 위해 더이상 동분서주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가 부서진 버스에서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빠져나오거나 이모가 강도의 칼에 찔리고도 태연히 웃으며 부러진 칼날을 던지는 일도 없게 되었다.

박소연 양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아무도 그녀가 거대한 음식으로 파티를 연 일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녀조차도 얼마간은 그랬다. 하지만 2학년에 올라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박소연 양은 그를 만났다. 그는 단정하고 우아했으며 침착했다. 그는 광야에 홀로 선 단독자이고 침묵하는 순례자였다. 그리 인기 있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경멸당하거나 비웃음을 사는 타입도 결코 아니었다. 그는 조용하지만 강했고 또한 부드러웠다. 결코 부러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박소연 양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건 어쩌면 운명이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소연 양은 용기있는 여자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한 여자였고 때문에 그에게 직접 말하기로 했다. 그는 3학년이었고 학생회장이었다. 그가 방과후에는 학생회실에서 일을 한다는 건 보통 다들 아는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일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곤 했다.

박소연 양이 학생회실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노래를 듣고 있었다. 원탁에 올려진 라디오 형태의 mp3 플레이어는 noodles의 'her'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 선배."

그는 귀가 좋은 편인지 감았던 눈을 바로 떴다.

"응?"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시간 좀 내주실래요?

그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음악은 동경일화의 허스키한 록으로 변해갔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개를 끄덕였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난 시간이 없거든. 어디 시간 많은 애가 있을 거야."

음성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의지는 강했다. 결코 부러지지 않았다. 그의 판단은. 그의 결심은.

그녀는 낙심했다. 절망했다. 병이 들었다. 깊어졌다.

박소연 양은 상사병에 걸렸다. 열이 오른 뇌로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 열이 내리고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학교에 갔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그는 변해 있었다. 얼굴이 붉고 몸짓이 어리석은 성성이 같았다. 말도 더듬었다. 그녀는 그의 모습이 익숙했고 그가 하는 말을 다 듣고 나자 기시감마저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 그는 사랑에 몸이 달아버린 바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음을 알았다. 사랑을 잃었음을 알았다. 또한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자신임을 알았다. 참혹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학교가, 가족이, 세상이, 우주가 혐오스러웠다. 그녀는 모두 사라지길 원했다. 진정으로. 그러자 그렇게 되었다. 세상은 암흑으로 덮이고 암흑마저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아니 있음조차도 없고 있지 않음조차도 없는 무명無明, 무무명無無明 속에 그녀는 있지 않음으로써 있었다. 그녀는 사고했고 곧 사고를 잃었다. 이름을 기억해 냈지만 잊었고 기억하는 것마저 잃었다. 그녀는 여전히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하는 자'가 되었다.

원하는 자는 춥지 않음으로써 추웠고 무섭지 않음으로써 무서웠다. 원하는 자는 따뜻해지길 원했다. 그러자 거대한 빛이 모여들어 불타는 공을 이루었다. 공은 곧 터져나갈 것처럼 박동했다. 원하는 자는 공을 알처럼 품었다. 그것은 그녀의 알이 되었다. 알은 작지만 거대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겨자씨에 우주가, 바늘귀에 사해四海가 담겨 있는 법이다. 원하는 자는 알이 부화하기를 원했다.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영겁에 가까운 순간을 암흑 아닌 암흑 속에 있었던 원하는 자는 알에게 이름이 필요하다고 원했다. 알은 '우주'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곧 진정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땅콩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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