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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에반게리온의 죽음

2007.03.19 23:0003.19

# 에반게리온의 죽음 / 이름 (200*117)


동력선이 끊겼다. 남아있는 배터리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30분. 에바1호기는 오른손을 뻗어 주위를 맴돌고 있는 전투헬기 꼬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작렬! 헬기는 모기가 중심을 잃고 추락하듯 백사장에 힘없이 처박혔다. 폭발음이 들렸다. 폭발음에 맞춰 다른 헬기에선 포탄과 총탄을 에바1호기에 무차별적으로 쏟아냈다. 하지만 첨단소재로 만들어진 에바의 방탄갑옷을 뚫을 수는 없다. 에바1호기는 힘찬 포효를 했다. 신지는 조종간을 잡고 헬기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레이더를 주시했다. 조종석에 설치된 무선통신기는 자동으로 적의 주파수를 탐지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드문드문 거친 파도소리처럼 뿜어냈다.
“에바1호기의 저항이 거셉니다. 피닉스 군도를 접수하기 위해서는 무인(無人)에바가 필요합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졌다면 레이를 처참히 찢어버렸던 무인에바들이 나타날 것이다. 신지는 조종간을 더욱 세게 움켜쥐고 헬기를 향해 돌진했다. 수없이 몰려드는 헬기 편대와 악전고투를 벌일 때, 바다를 울리는 굉음이 들리며 수송기가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한 무리의 물체가 떨어졌다. 에바1호기처럼 방탄갑옷을 둘러쓴 무인에바들이 백사장에 사뿐히 착지하여 음울하고도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칼날 같은 이빨을 드러내더니 더러운 침을 질질 쏟아내었다. 에바1호기를 사방에서 둘러싼 채 하이에나처럼 두 손과 두 발을 땅에 탄탄히 고정시키고 자세를 깊이 웅크렸다. 목표물인 에바1호기를 정확히 노려보았다. 우선 두 마리가 탐색전을 벌이더니 먼저 공격을 시도했다. 1호기는 한 손을 한 마리의 얼굴에 한 발을 다른 녀석의 가슴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그들은 뜨거운 햇볕에 지글대는 하얀 모래바닥에 깊이 처박혔다. 지켜보던 다른 녀석들은 잠시 뒤로 물러섰다가 이내 에바1호기 주위를 촘촘히 둘러쌌다. 그들의 침이 백사장을 적셨다. 어디에도 에바1호기가 탈출할 틈은 없어 보였다. 신지는 조종간을 잡고 그들의 공격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무인에바의 음울한 표정, 비열한 웃음이 기다릴 것만 같았다. 신지는 갑자기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역한 냄새에 헛구역질이 났다.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도저히 이길 수 없어.
신지는 목표를 응시하지 못한 채 자꾸만 고개를 수그리려고 했다. 틈을 노리던 무인에바들은 이러한 기운을 눈치 챘는지 1호기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것들은 목표물에 일격을 가하기 위한 마지막 의식을 치르듯이 격렬했다. 에바1호기의 머리, 몸통, 그리고 다리에 대여섯 마리의 무인에바가 달라붙었다. 신지는 반사적으로 조종간을 잡았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적으로 에바와의 합체율이 80%까지 올랐다. 조종간의 움직임보다 더 빠르게 에바1호기를 움직이는 신지의 신경은 오로지 살고 싶다는 데에 집중되었다. 다리와 가슴에 붙은 놈들을 발과 팔꿈치로 떨쳐낸 1호기는 얼굴에 들러붙은 무인에바를 떼어내어 그것의 머리를 뽑아내고 거꾸로 들어 다리를 부여잡았다. 해머던지기 선수처럼 그것을 돌리며 접근하는 무리를 쳐내었다. 다시금 무인에바들이 물러서자 다소 여유가 생긴 신지는 시간을 벌기 위해 방어막인 AT필드를 생성하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본부에 SOS교신을 한 후, 배터리를 최소로 사용하는 절전모드를 설정하였다. 그러자 조정석 안에는 어둠이 깔렸다. 몇 개의 버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제외한, 모든 빛이 사라졌다. 에바1호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왼쪽 무릎을 땅에 대고 오른쪽 손으로 백사장을 짚은 채 고개를 수그렸다. 이를 보고 급하게 달려든 몇몇의 무인에바가 AT필드에 부딪혀서 나뒹굴었다. 영원히 지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들의 눈빛은 맹렬했다.
무인에바가 있었다는 사실을 신지는 몰랐다. 조종사가 필요치 않아 언제나 일정한 수준의 합체율을 보이는 무인에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신지는 에바1호기에 절대 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우수한 유전자만을 복제한 후 신의 전지전능함을 본뜨고자 시도한 생명체가 에바야.”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신지를 안내하던 미사토가 말했다. 에바는 스스로 조종사를 선택한다고 덧붙였다. 에바는 보통의 금속 덩어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이에 맞는 조종사를 발굴하는 게 중요하다며 신지 역시 그러한 임무를 수행할 후보 중 하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신지는 어렴풋이 아버지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사실 아버지가 신지를 자신의 계획도시인 피닉스로 불렀을 때 신지는 의아했었다.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를 불렀을 때 조금은 난감했던 것이다.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아주 어렸을 적, 그러니까 갓난아기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살았었다지만,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신지는 줄곧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그런데 15살이 되자, 아버지는 신지를 피닉스로 불렀다. 물론 아버지와는 단 한차례의 통화조차 없었다. 할머니를 통해서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를 안내하러 온 사람도 아버지가 아닌 가츠라기 미사토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아버지의 연구소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아버지와는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으니, 피닉스로 가는 건 신지의 의사라기보다는 아버지의 명령에 가까웠다. 미사토에 따르면 아버지는 국방장관인 제례가 극비리에 추진하는 프로젝트인 ‘비밀병기 에반게리온’의 총책임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의 핵심인 에반게리온1호기의 조종사로 신지 자신이 내정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신지는 별다른 투정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딱히 반항할 구실을 찾지 못한 게 이유였다면 이유다. 어쩌면 어른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이 신지의 처세술일 수도 있다. 그렇게 묵묵히 미사토를 따라 할머니를 곁을 떠나왔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의 어느 저녁 무렵 피닉스에 도착했다. 피닉스는 미사토가 말한 것처럼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는 계획도시처럼 보이진 않았다. 무인도들인 피닉스 군도까지 아우른 항구도시인 피닉스는 겉으로 보기엔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최신식 항만시설, 잘 뚫린 큰 도로와 깨끗한 거리 등이 인상적이었다는 점 외에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신지가 처음으로 구경하게 된 아버지의 연구소는 더욱 현대적이었다. 미래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원통형 통로에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통로를 따라 설치된 유리벽으로는 각 실험실이 보였다. 첨단 기기들 앞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은빛 빛나는 실험복을 입고 얼굴을 온통 가린 보호마스크를 쓴 채 차트를 뒤지거나 기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은빛 통로에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소리로 은은하게 울렸고, 그들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져있었다. 레이를 만난 것은 연구소의 최신식 통로를 신기하게 구경하며 걸어갈 때였다. 가벼운 강도의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통로는 미세하게 흔들렸다. 신지는 진동의 발원지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고개를 향했다. 미사토는 신지의 손을 잡고 그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통로에 난 유리벽을 통해 3, 4층 정도 높이의 지하층을 하나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격납고를 보았다. 그 곳에는 거대한 크기의 로봇이 하나 들어서고 있었는데, 순간 로봇의 눈과 신지의 눈이 마주쳤고 신지는 움찔하였다.
“네가 조종할 에바가 이런 거야.”
미사토는 말을 흘렸고 신지는 에반게리온을 유심히 살폈다. 로봇의 머리 부분으로 한사람 정도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자동으로 다가갔다. 그것이 에바의 뒤통수를 가볍게 건드리며 삽입되자, 인큐베이터처럼 생긴 물체가 에바로부터 분리되어 다리에 놓였다. 뜨거운 열기가 다리에 닿았는지 연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세 사람이 급하게 물체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물체에 손을 대려다 차마 대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다른 남자가 그들을 밀쳐내고 물체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문이 열렸다. 정신을 잃은 채 앉아있는 소녀가 보였다. 남자는 자신의 손은 살피지도 않고 소녀를 들추어내어 바깥에 뉘였다. 소녀가 서서히 눈을 떴다.
“저 분이 네 아버지야.”
신지는 소녀에게 놓았던 시선을 남자에게로 옮겼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턱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턱선은 매끄러웠고 눈매는 날카로웠다. 그는 자신의 냉철한 인상을 더욱 드러내려는 듯 네모 각진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그에 걸맞지 않게 자상한 눈빛으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신지로서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오래 떨어져 있었고, 그동안 단 한 번의 연락도 없던 사람.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미쳐버린 과학자였다. 그런 그가 신지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단상도 잠시, 사무실에서 마주친 그는 신지가 그리던 냉정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두 손에 붕대를 감고 나타난 그는 신지에게 잠시 동안 시선을 두었을 뿐 이내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았다. 마치 당장 처리할 일이 있다는 듯 컴퓨터를 켜고 서류를 뒤적거렸다. 이를 지켜보던 미사토가 기다리다 지쳤는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아드님을 데려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다음 지시를 내려주세요.”
그러자 모니터를 향하던 시선을 다시 신지에게 두었다. 이미 알아보기 어렵게 성장한 아들이 앞에 서있는데도 별다른 느낌이 없는지 날카로운 눈매에 어울리는 안경을 똑바로 눈가에 맞추고는,
“네가 신지냐?”
“네.”
그뿐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러고는 전학문제를 처리하고 미사토의 숙소에서 같이 지낼 것과 앞으로의 뒷바라지를 미사토가 담당할 것을 주문하였다. 훈련은 일주일 후부터라는 마지막 말을 뱉고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그가 신지에게 말을 걸 경우는 오직 에반게리온 조종에 관련된 임무를 지시할 때뿐이었다. 그는 신지의 상관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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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는 에바 모의 조종 장치에 들어가, 반복해서 에반게리온과 조종사 간의 합체율 실험을 했다. 에바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에바의 신경이 조종사의 그것과 교류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조종사의 정신력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 일주일을 훌쩍 넘겼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에바를 조종할 수 없어
에바는 네 마음속에 있어
반복해서 들려오던 교관의 목소리가 귓가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아무리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았다.
생소한 환경에서 모의훈련을 수행하며 바쁘게 일주일을 보낸 신지가 첫 실전훈련에 돌입할 시기가 왔다. 그날 신지는 레이를 처음 대면하였다. 아야나미 레이야, 라는 간결한 소개로 인사를 건넨 그녀는 얼마 전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멀쩡했다. 대기실에서 출격준비 중이던 그녀는 그 곳에 막 들어선 신지에게 다가와 너무도 담담하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이것을 본 미사토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역시 유전자는 유전자인 모양이야.”
라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하기야 평소에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말을 무심코 내뱉는 그녀였기에 신지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난 신지라고 해.”
신지는 우물거렸다. 레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은 에반게리온 제로기를 조종한다고 말했다. 만일 신지가 없다면 자신이 1호기를 조종하게 될 수도 있었는데 신지가 와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만큼 1호기의 조종은 까다롭다며 건조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그다지 친절하지 않음에도 신지는 묘했다. 그것은 그녀가 지닌 엷은 녹색기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신지에게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보았던 낯익은 풍경이 레이에게서 느껴졌다. 항상 멜빵 치마에 흰 티셔츠를 입는 레이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였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냉정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세상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넌 심한 부상을 당하고 나서도 에바를 조종하는 게 무섭지 않니?”
“왜?”
너무도 뜻밖의 답변에 신지는 그만 머리를 긁적이며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레이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반응을 보일 때는 오직 출동명령이 떨어질 경우였다.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신지와 처음 호흡을 맞추던, 그 날도 레이는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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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실전훈련은 레이와의 합동작전을 통해 동력선이 미치는 범위에서 최대한 신속하게 적을 섬멸한다는 내용이었다. 목표를 센터에 넣고 스위치, 목표를 센터에 넣고 스위치, 신지는 조종간을 잡고 반복해서 되뇌었다. 조종간에 장착된 스위치를 당길 때마다 에바1호기가 든 총의 끝부분에서는 불꽃이 피어올랐고, 그때마다 강한 반동이 느껴졌다. 훈련장의 흙들은 거침없이 튀어 올랐다. 흙덩이들이 에바의 발등에 묻었다. 반동을 이기기 위해 발바닥을 땅바닥에 더욱 밀착시키고 발끝에 힘을 주었다. 레이의 에바제로기는 동력선이 엉키지 않으면서도 능숙하게 뛰어다녔고,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하여 가격하였다. 거침이 없었다. 반면에 신지의 합체율은 간신히 27%를 넘겼다.

의기소침했다. 27%는 에바를 원활하게 조종할 수 있는 이론상의 합체율이다. 하지만 실제로 원활하기 위해서는 최소 30%가 되어야 하는데, 신지는 27%를 간신히 넘긴 정도였다. 실격선인 13%보다는 훨씬 웃돌았지만 어차피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도 그런 것이 아니라 막상 ‘열등’이라는 평가를 받고 나니 신지는 자신의 부족한 능력에 대해서 부끄러웠다. 첫 야전훈련 이후 신지는 한동안 훈련소집명령을 받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고 미사토의 아파트에서 시간을 때우는 일이 전부였다. 간혹 미사토가 술에 만취되어 들어올 때면 신지에게 가벼운 포옹을 하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웃으면서 응대해 주는 정도가 타인에 대해 신지가 할 수 있는 거라면,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흐른 어느 날, 학교에서 공부 중이던 신지에게 미사토는 소집명령을 전했다. 연구실 방향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신지를 수송하기 위해 달려온 미사토에 따르면, 적이었다. 실전상황이니 긴장하라고 단단히 이르는 그녀도 숨을 자주 고르며 차를 급하게 몰았다. 출전 준비를 위해 격납고에 들어섰을 때 모니터에서는 먼저 출격한 에바제로기가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방탄갑옷에 낙지모양의 적이 들러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촉수처럼 생긴 기다란 다리로 방탄갑옷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했다. 에바제로기는 한 손으로 촉수를 끊어버렸다. 찌익 늘어나서 찢겨진 다리에서 새로운 다리가 여러 개 나왔다. 더 가늘고 더 날카로운 촉수는 에바제로기의 팔을 휘감고 다른 촉수로 방탄갑옷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 해가 저물어가며 붉은 빛이 물결처럼 공기를 적시고 있을 때 에바제로기는 사력을 다해 적과 결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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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1호기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물결처럼 퍼지는 공기는 나른한 휴식을 끝낸 에바1호기를 반겼다. 100미터 전방에서 붉은 생채액이 젖은 촉수가 빠르게 에바1호기에게로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비켰다. 그러자 촉수의 끝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더니 더욱 가는 촉수가 생기고 그것들은 유도탄처럼 에바1호기에게로 다가와 방탄갑옷의 틈으로 꽂히기도 하고 몸통을 묶어버리기도 했다.
“당황하지 마, 신지!”
무선교신기에서 미사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떨리는 손을 간신히 조종간에 갖다대었다. 온 몸이 욱신거리면서 잠시 합체율이 45%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22%까지 떨어지자, 신지는 자꾸만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보시스템은 촉수가 에바1호기의 신경계로 침투했다는 걸 알렸다. 시끄럽게 경보사이렌이 울리자 신지는 그만 귀를 막아버렸다. 무선교신에서는 다급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정신 차려, 정신!”
신지의 아버지는 다그치듯이 말했다. 하지만 신지는 몸 아래쪽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벌레가 느껴지는 듯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조종간을 놓아버렸다. 에바제로기의 몸통을 찢어버리려는 듯 발 아래쪽을 묶은 촉수와 목 쪽을 휘감은 촉수를 반대쪽으로 늘여대던 적은 남아도는 촉수를 에바1호기의 가슴을 향해 날렸다. 관통. 구멍 난 방탄갑옷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촉수가 많아질수록, 적에게 약점을 내어준 에바1호기는 붉은 생채액을 더욱 세차게 분사했다. 가슴을 잠식하는 촉수를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1호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리의 신경을 뚫고 들어오는 촉수가 많아질수록 에바1호기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신지는 조종석에서 사태를 외면하였다.
“원격조종시스템으로 전환한다.”
결국 아버지는 신지의 기회를 박탈했지만, 동기는 신지가 제공했다. 그는 조종석 방탄 창으로 밖을 내다보거나 눈을 감는 법만 알았지, 조종간을 힘 있게 부여잡은 채 목표를 센터에 넣고 스위치를 당길 줄은 몰랐다. 훈련을 했음에도.
아버지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신지는 알았다. 이미 18%까지 떨어져버린 조종사의 정신력보다는 24%정도의 원격조종률이 에바1호기를 움직이는 데 효과적이었다. 조종석의 방탄창으로 스며들어오는 붉은 빛은 서서히 어둠에 먹혀갔다. 에바1호기는 천천히 촉수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비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살기 위해 치열했다. 가슴을 관통한 촉수가 에바1호기의 등을 타고 목을 휘감았다. 에바제로기를 제압하고 있는 지점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에바1호기는 주춤거리며 발꿈치로 땅바닥을 긁었다, 저항하였다. 에바1호기는 오른쪽 손날로 가슴을 관통한 촉수를 후려쳤다. 끊어졌다. 끊어지는 부분에서 수많은 촉수가 구더기가 끓는 피어나더니 다시금 에바1호기의 몸통전체를 감싸왔다. 이 때 사방에 큰 소리가 울렸다. 수많은 촉수에 잠식당한 에바제로기가 공중으로 치켜 들려졌다가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방탄갑옷이 부서지고 에바제로기의 파열된 살점의 여러 군데에서 붉은 생체액이 쉴 새 없이 분사되었다.
“레이!”
아버지, 미사토, 연구소 직원들 그리고 신지의 목소리가 무선 교신기를 통해 동시에 울렸다. 드디어 에바1호기의 등뼈가 자잘한 촉수에 잠식당했다. 척수를 관통하여 목뼈까지 칼날처럼 뻗어 가는 적의 흔적. 에바1호기는 신음을 토해내며 심하게 경련하더니, 몸통에 들러붙은 촉수에 스스로의 의지를 빼앗긴 채 빠르게 끌려갔다. 그리고 에바제로기와 충돌하였다. 엉켜버린 제로기와 1호기는 무력했다. 두려워서 웅크리고 있던 신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덤덤하게 조종간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 레이가 보였다. 어떠한 동요도 없는 듯했다. 그녀와 신지는 잠시 동안 눈을 맞추었다. 하나의 촉수를 동시에 공격했다. 끊어졌다. 끊어진 촉수에서 다시 징그러운 것들이 생성되어 에바1호기의 가슴을 다시 옥죄려할 때 제로기는 등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려 강하게 반동하더니 모든 힘을 두발에 실었다. 그리고 에바1호기의 가슴을 힘껏 찼다. 에바1호기는 100m정도를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큰 폭풍이 일듯이 쉴 새 없이 흙들이 먼지를 일으켰다. 한참동안 거대한 소요가 일었다.
“레이, 레... 이...”
무선교신기에서 아버지의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레이의 에바제로기는 적과 함께 자폭하였다. 산산이 부서진 잔해에서 피어오르는 불꽃만이 지글대는 촉수를 태우고 밤을 밝혔다.

똑딱 똑딱
시계침소리가 들릴 정도로 주위는 고요했다. 정신을 차린 신지는 자신이 링거 주사를 맞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창가에는 붉은 빛이 어려 있었고, 머리맡에 놓인 시계는 6시를 가리켰다. 신지는 후들거리는 상태로 조종석에서 분리되어 내렸을 때 급하게 뛰어온 아버지에게 뺨을 얻어맞은 데까지는 기억났다. 레이 때문이었다. 신지는 어쩔 수 없이 깨달았다. 자신의 비겁함을, 그리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폭한 여자아이의 당당함을. 붉은 빛깔은 신지의 몸을 적셨다. 신지는 링거 주사를 스스로 뽑았다. 왼쪽 팔에서 링거주사를 뽑자 붉은 액체가 한 방울 배어 나왔다. 신지는 훌쩍이며 손으로 팔뚝을 타고 흐르는 붉은 액체 한 방울을 닦아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탁자 위에 가지런히 접혀진 옷을 챙겨 입고 병실을 빠져나온 신지는 미사토의 아파트까지 걸었다. 전봇대에는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해가 걸렸다. 선선한 바람은 부서진 빌딩 사이로 불었다. 에바제로기의 머리는 빌딩의 한 부분을 부수고 그 자리에 슬픈 꼴로 박힌 채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현장에 몰려들었고, 연구소 직원들과 용역업체 사람들은 잔해처리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파트에 미사토는 없었다. 그녀는 잔해처리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파트 안은 신지가 나왔을 때와 같았다. 식탁에는 우유잔과 식빵이 놓여있던 접시가 있었고, 신지의 방문은 반쯤 열려있었다. 그의 침대는 어지럽혀진 그대로였고, 잠옷이 방바닥에 마구 팽개쳐진 상태였다. 신지가 거실에 들어섰을 때 굳게 닫힌 미사토의 방문이 보였다. 거실 창가를 통해 엷게 사그라져 가는 빛을 타고 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시계침은 규칙적으로 소리를 냈다. 신지는 시계가 걸린 벽에 바투 놓여진 소파에 고꾸라지듯이 누워 쿠션에 얼굴을 처박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깜빡 졸던 신지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미사토가 서있었다. 얼굴을 조금 상기되었고, 숨을 한껏 몰아쉬었다. 잔해처리작업 중에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신지가 없어진 걸 알았다고 투덜대는 미사토는 여러 군데를 뒤졌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파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맞았다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고 신지에게 핀잔을 주었다. 신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미사토도 멋쩍었는지 억지웃음을 지으며 병원에 가서 안정을 조금 더 취하자고 말했다. 의사선생님이 괜찮다면 바로 퇴원해서 맛있는 식사를 하자고 열심히 다음 계획을 제안하는 미사토에게 신지는 말했다.
“누나는 남이니까, 잘못에 대해서 야단치지 않는군요.”
신지는 미사토를 잠시 응시하며 이렇게 말을 던지고는 다시 쿠션에 얼굴을 묻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이 때 미사토가 쿠션을 잡아채더니 거실 바닥에 그것을 내동댕이치고는 신지의 양볼을 부여잡았다. 신지의 시선이 미사토 자신을 향하도록 하고 잠시 그의 눈을 응시하였다. 신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똑바로 봐. 똑바로 보고 이야기 해봐. 앞으로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모르겠니? 너 같은 정신 상태로는 남에게 짐만 될 뿐이야.”
침묵이 흘렀다.
“레이가 죽은 건 제 잘못이에요.”
미사토는 가볍게 신지의 얼굴을 두 손으로 흔들어주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죽지 않았어, 단지 꿈을 꾼 거야. 정말이야,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그게 꿈이었다고? 그렇게 생생한 느낌이 단지 꿈이었다고?’
신지는 믿기 어려웠다. 뒤죽박죽 떠오르는 잡념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는 동안 신지는 미사토의 확신에 찬 눈을 보았고,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보았고, 향기를 느꼈다. 신지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티셔츠가 살짝 쳐진 틈으로 내비치는 그녀의 가슴으로 옮겨가려고 했다.
‘난 나쁜 아이야.’

레이는 정말 멀쩡했다. 대기실로 가는 복도에서 마주친 레이는 녹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흰 티셔츠와 녹색멜빵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아무런 동요 없는 표정으로 유리창을 통해 연구실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신지는 옆으로 살짝 보인 레이의 눈빛을 느꼈다. 묘했다. 그녀의 눈 속에 바다가 들어차 있을 거라고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레이 앞에 선 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향수를 그녀에게서 느꼈다.
“괜찮은 거니?”
신지는 물었다. 레이는 한동안 침묵하며 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신지는 당황해서 다시 쭈뼛하게 말을 걸었다.
“괜찮냐고? 정말 꿈이었나?”
혼잣말인지, 레이에게 하고픈 말인지 뚜렷한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레이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신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신지는 잠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무안해졌다. 이 때 레이가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 난 레이라고 해, 아야라미 레이. 에바 2호기를 조종하는 임무를 맡고 있어.”
신지는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얼떨결에 그녀에게 답했다.
“어, 난 신지야. 에바1호기를 조종해.”
그러자 레이는 알고 있다고 무심히 답하고는 신지가 걸어왔던 복도로 걸어갔다. 신지는 레이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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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출현했다. 에바1호기와 에바2호기는 어느 정도 호흡이 맞아갔고, 에바3호기와 에바4호기도 곧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 일정에 맞추어 훈련 중인 어린이들 중에서 적격자가 선발될 것이다. 상황은 순조로웠다. 어느 정도 능숙하게 정신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면서 신지와 에바1호기의 합체율은 나날이 상승했다. 기록은 78%까지. 평균적으로는 65%에서 72% 정도의 선을 유지했다. 에바1호기는 강력해졌다.
적은 AT필드를 쉽게 뚫지 못했다. 정확하게 적을 노리며 총을 뽑았다. 섬멸! 보이지 않는 적도 있었다. 환영과 대치하며 격렬히 전투를 벌였지만 정작 숙주는 하늘바깥에서 유유자적하는 부류. 창으로 해결했다. 섬멸! 2호기는 보통 적의 후방을 맡았다. 합체율 수준이 신지가 레이보다 앞서자 신지는 모든 작전의 주전이 되었다. 2호기가 상대의 정신을 분산시키면 거친 숨소리를 내는 에바1호기가 맹렬하게 뛰어들어 적의 중심을 빼앗는다. 칼을 녀석의 급소에 꽂는다. 섬멸! 새로운 멤버의 등장으로 팀웍이 깨지는 경우도 있었다. 아스카라는 예쁘지만 오만하고, 허풍 센 여자아이가 에바3호기를 조종하면서 에바편대는 3명이 담당했다. 지네처럼 많은 다리를 땅바닥에 밀착시키고 금속을 녹여대는 화학용액을 뿌려대며 다가오는 적을 부수기 위해 아스카는 무모하게 뛰어들었다. 합체율도 겨우 35%밖에 안 되면서.
당연히 운동신경이 떨어진 에바3호기는 녀석의 저녁식사가 될 찰나였다. 역시 레이는 녀석의 주둥이로 뛰어 들어온 몸으로 녀석의 대가리를 붙들어 매며 화학용액으로 목욕하는 동안 신지의 에바는 적의 등으로 뛰어올라 급소에 거리낌 없이 손을 찔러 넣었다. 손을 녀석의 불쾌한 피부에서 뽑아내자 적은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에바1호기의 손을 감싼 방탄장갑이 군데군데 녹아 들어갔고, 적의 피로 흥건했으며, 손바닥에는 녀석의 심장 부스러기가 초라하게 남아있었다. 섬멸! 신지는 이미 능숙한 조종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도 토모와 카오루에 대해서만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토모는 에바4호기의 조종사로 내정된 아이였다. 신지를 괴롭히던 그는 덩치가 비교적 좋고 짓궂은 장난꾸러기였다. 문제의 그 날엔 에바4호기와 에바1호기가 호흡을 맞추기 위한 실전훈련이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에바4호기에 어떤 후보가 타고 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리고 불행히도 에바4호기는 바이러스 유형의 적에게 감염되었다. 뜻하지 않게 에바4호기가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적은 에바1호기에게 총구를 들이대었다. 반사적으로 피했으나 연신 쏘아댄 총탄 중의 서너 개가 에바1호기의 방탄갑옷에 꽂혔다. 신지는 가슴이 얼얼해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끙끙댔다. 에바4호기는 1호기를 덮쳤다. 신지가 고개를 들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며 전방을 향했을 때 4호기의 조종석에서 토모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신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신지는 조종간을 놓았다.
“사람이 타고 있어요!”
신지는 무선교신기에 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아버지의 답변은 ‘수행하라,’였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록 토모라는 녀석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때로는 패 죽이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만한 나이는 되었다. 결국 혼란스러운 마음은 집중력을 해쳤고 원격조종시스템으로 전환되었다.
“그러지 마세요! 사람이 타고 있어요. 사람이 타고 있다고요!”
신지의 외침은 무의미한 잡음일 뿐이었는지 에바1호기는 철저하고도 깨끗하게 적을 섬멸하였다. 신지의 에바는 신지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에바4호기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붉은 생체액은 주위의 땅을 물들였다. 저녁 무렵의 노을처럼.
카오루를 제거할 때는 이랬다. 친구처럼 다가와 어려운 고민을 잘 받아 넘겨주던 카오루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였다. 그 아이는 종종 알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것은 ‘인류는, 고독은, 절망은, 생존은’ 따위로 시작하는 현학적인 내용들로 신지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그러니까 아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말들이었다. 이상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가 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신지는. 그리고 그를 안지 며칠이 지나자 적이 연구소 중앙컴퓨터를 거쳐 에바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바이러스 유형의 적이라고만 여겼다. 그것이 카오루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신지는 그가 유일하게 건드리지 않은 에바1호기를 타고 그가 발견된 장소에 도착했다. 카오루는 기다리고 있었다며 신지에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신지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했다.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신지는 눈물을 흘리며, 어째서 이런 잔인한 짓을 하느냐고 카오루를 힐난했다. 그러자 그는 ‘멸망을 모면하고 미래를 부여받는 생명체는 오로지 하나’라고 신지에게 충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은 전설 속의 새가 불 속에서 스스로를 태움으로써 부활하듯이 다시 살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눈을 감고 편안하게 말하던 그를 지켜보던 에바는, 신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버지가 내린 명령을 수행했다. 그렇게 카오루를 떠나보냈다. 신지는 어쩐지, 카오루가 했던 말까지 기억 속에서 흘려버릴 수는 없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신지는 더 이상 에바를 조종하고 싶지 않았다. 아스카라는 아이는 전투에 적응하지 못하고 요양에 들어갔다. 앞으로 에바를 조종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이제 조종 따위 하고 싶지 않아. 아버지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어.”
신지는 레이에게 말했고, 처음으로 레이는 원망하는 눈빛을 띠며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아버지한테서 도망치면 안 돼, 아버지를 미워해서도 안 되고, 라고 그녀답지 않게 충고를 덧붙였다. 그녀가 아버지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정도는 신지도 알았다. 그래서 그저 얼얼한 뺨을 매만지는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평생 그러고 살거니? 어중간한 게 가장 나빠.”
미사토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생각에 따르자면 신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에바를 끝까지 조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한 물음이 신지의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실 적이 어디서 오고, 언제까지 오는지 연구소 사람들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니 신지가 이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지금은 별다른 탈출구를 찾을 수 없으므로, 조종간을 잡아야 했다. 아버지에게서 도망가면 안 되므로, 어중간한 게 가장 나쁘므로.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있었다. 미사토와 레이, 둘 다 신지에게는 타인일 뿐이었다. 여전히 그들의 과거를 알 수 없었으니, 오직 표면으로만 서로를 이해하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 그들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신지로서는 언뜻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먼저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니까, 라고 얼버무리듯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리고는 수긍해버리기로 한 것이다. 때로는 그게 편하니까.
1급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신속하게 연구소로 몰려든 사람들을 기다리는 건 연구소의 중앙시스템이 크래커들의 공격을 받아 연구소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신지의 아버지는 신지를 급하게 호출하였다. 미사토는 그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다. 신지는 복도를 지나 아버지의 사무실 앞에 섰다. 처음 연구소에 왔을 때 방문한 이후로는 한 번도 찾지 않은 곳이었다. 아버지가 이곳으로 자신을 호출했다는 사실만으로 분명 중대한 일이라는 생각이 어린 아이에게도 스쳐지나갔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레이와 같이 있었다. 평온한 표정의 레이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인상의 아버지. 아버지는 처음으로 신지에게 다가와 부탁하는 어조로 말을 건네었다. 이제 마지막일 수도 있다며, 결국 마지막 적은 인간이었다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레이와 신지에게 임무를 주었다.
시스템의 마비로 인해 수동으로 에바를 출격시킬 준비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줄곧 레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전쟁터로 떠나가는 연인을 대면하고 있는 사람처럼 아버지의 눈매에는 슬픔이 맴도는 부드러운 눈빛이 맺혔다. 불행히도 신지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시선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 시선을 외면한 채 거대한 크기의 생체로봇, 에바의 출격을 기다렸다. 이 때 미사토가 신지에게 다가왔다. 눈 속에 살짝 물방울이 고인 채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온 미사토는 신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신지의 얼굴이 미사토의 가슴에 파묻혔다. 신지는 긴장하였다. 그녀는 신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쓸어주었다.
“신지야, 넌 잘 할 수 있어. 임무 끝나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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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빨랐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연구소를 접수하고 살상무기로 사용할 목적으로 연구 자료와 유인에바를 강탈하려는 반란군의 특수부대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연구소가 비교적 잘 노출되는 언덕에 탱크가 배치되었고, 보병부대는 진입준비를 마쳤다. 헬기는 떠올랐고, 그들의 화력이 연구소의 입구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막대한 예산을 이용해 철저하게 방어시설을 갖춘 연구소의 시스템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연구소 직원들이 방공시설로 대피할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결국 그들을 이겨내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은 에바를 출동시키는 거였다. 아스카도 없다. 토모는 죽었다. 3호기와 4호기는 적당한 조종사를 발굴할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남은 건 에바 1호기와 2호기뿐이었다. 지상에 남겨진 에바1호기와 2호기는 동력선에 의지한 채 헬기를 저지하고 날아오는 포탄을 쳐내었다. 멀리 떨어진 탱크를 조준하여 사격을 했다. 임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제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다음 단계로 옮길 차례였다.
신지는 연구소를 사수한다. 레이는 도시를 우회하여 바다로 잠입한다. 그리고 훈련한대로 특수레이더로 방향을 정하여 피닉스군도의 예비격납고로 들어가서 출격명령을 기다린다. 3호기와 4호기가 출동할 때 협공한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지시를 내렸다. 에바1호기는 이에 따라 엄호사격을 했다. 에바2호기는 자신의 동력선을 몸으로부터 떼어내고 전력으로 질주하였다. 이 때 굉음이 하늘로부터 들리며 수송기에서 로봇들이 떨어졌다. 에반게리온이었다.
“무인에바야.”
레이의 목소리가 무선교신기를 통해 신지의 조종석으로 흘러들었다. 적어도 유인용 에바가 연구소에서 진행되는 4대가 전부라면 무인에바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탐욕으로만 가득 찬 생체로봇이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손톱으로 땅바닥을 찍어 지상에 단단히 몸뚱어리를 고정시킨 수십 마리의 그것들은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침을 쉴 새 없이 흘려대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도무지 없어 보였다. 만일 합체율이 인간이 조종할 때보다 뛰어나다면 유인에바를 완전히 대체할 완벽한 살상무기, 무인에바는 무리를 이루며 천천히 표적을 옥죄었다. 질주하려다 멈칫한 에바2호기는 이내 1호기 곁으로 돌아왔다.
“네가 가. 내가 남을 게.”
“무슨 소리야?”
“무인에바는 내가 더 잘 알아. 내가 남는 게 나아. 그러니까 네가 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와 신지 앞에 버틴, 악마 같은 녀석들의 살기는 여태까지 보아왔던 적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살아날 모든 가능성을 철저하게 찢어놓고야 말 눈빛을 지닌 녀석들이었다.
“죽음이 두렵지도 않니?”
“그런 거 몰라, 어차피 나는 또 있으니까.”
또 있다고?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어차피 레이라는 인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가 없었으니 그녀가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레이의 에바는 재빠르게 신지의 에바로부터 동력선을 떼어낸 후 다시 자신의 등에 동력선을 삽입했다. 그녀는 총구를 무인에바에게 겨누었다. 녀석들은 그렁대는 불쾌한 소리를 지속적으로 뿜어대며 냉혹한 살기를 발산했다. 그들이 밀착한 바닥은 그들의 침으로 얼룩졌다.
‘제길, 어차피 누군가 살아야 한다면…….’
무인에바의 기세에 눌려 신지는 움츠러들었다. 그의 머리에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자라났다. 뛰기 시작했다. 무인에바가 1호기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레이는 총부리를 무인에바에게 정확히 들이대고는 총탄을 퍼부었다. 이내 녀석들은 2호기를 표적으로 삼았다. 에바는, 신지는 정신없이 달렸다. 헬기를 부수고 탱크를 부수고 도시의 한복판을 갈랐다. 피닉스 군도로 가기 위해 우회했다. 쫓아오는 헬기나 전투기를 모두 부숴 버렸다. 한참을 달렸다. 석양이 질 무렵 산 너머에서 에바의 절규가 들렸다. 폭발음이 들렸다. 레이가 죽었을 것이다.
에바1호기는 반나절을 더 달려서 깊은 어둠이 깔리고 더 이상 포탄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바닷가에 이르자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도 변함없이 밝은, 그래서 너무도 지독하게 잔인한 빛깔의 별은 처음 보았다, 신지는. 조종석에서 계속 훌쩍이던 신지는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물결을 거스르며 악에 받쳐 걸었다. 보안주파수로 설정된 레이더에 의지하여 목적지를 향해 쉬지도 않고 걸었다. 다음 임무를 위해서 신지는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다시 한 나절을 물살과 싸우며 걷고 나서야 에바1호기는 피닉스군도에 건설된 예비격납고에 도착했다. 섬에 은밀히 감춰진 채 사용된 적이 없었던 그 곳에는 거의 완벽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도착한 에바1호기는 우선 동력공급장치를 열어서 등 쪽의 삽입구에 동력선을 꽂아 넣었다. 에바는, 신지는 레이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남겨둔 채 양분을 빨아들이는 탯줄을 부여잡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신지는 크게 숨을 골랐다. 등 쪽에 장착된 창을 뽑아 AT필드를 사정없이 찔러대는 무인에바의 무리. 세 마리씩 모여 필드의 한 지점을 협력하여 찔렀다. AT필드가 조금씩 찢겼다. 균열되어 틈이 생기자 날카로운 손톱으로 틈을 벌리기 위해 두 팔을 위아래로, 좌우로 힘껏 당겨대었다. 파열. 무인에바들이 침입할 공간이 생겼다. AT필드는 힘을 다했고, 1호기는 더 이상 소극적으로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신지는 어쩔 수 없이 전원을 켜고 AT필드를 제거했다. 녀석들은 뜨거운 햇볕아래서 지글대는 적개심을 피어 올렸다. 물불을 안 가리고 달려드는 하이에나 무리와 대치한 채, 20분도 남지 않은 배터리에 의지한 에바1호기는 전력을 다했다. 총을 한 손에 뽑아들고 다른 손에는 창을 뽑아 들었다. 모든 방향을 감싸고 죄어오는 녀석들에게 있는 대로 총탄을 퍼붓고, 급소를 노려서 창을 찔러댔다. 공중에서는 헬기가 에바1호기의 머리를 향해 화력을 쏟아댔다. 모래사장엔 총탄이 빽빽이 박혔고, 육탄전을 펼치는 무인에바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에바1호기의 방탄갑옷을 뜯어내려고 몸통과 다리에 바짝 밀착했다. 도저히 수적으로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총탄은 떨어졌다. 창은 한 마리의 무인에바의 가슴 깊이 박혔다. 녀석이 두 손으로 창을 부여잡고 뒤로 물려서며 붉은 생채액을 뿜어댔다. 모래사장이 붉게 물들었다. 맨손으로 남은 녀석들의 얼굴과 몸통을 정신없이 가격했지만 녀석들은 변함없이 음울한 웃음을 띠며 뜨거운 침을 흘려대었다. 햇볕에 달궈진 공기 사이로 지글대는 녀석들의 형상이 보였다. 가망성이 없었다. 20분의 혈투는 종반으로 치달았다. 방탄갑옷의 일부가 너덜대기 시작했다. 에바1호기는 가슴에 들러붙은 한 놈을 떼어내 던져버리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커질수록 합체율은 상승했다. 처음으로 85%를 넘겼다. 배터리의 용량이 바닥날 즈음이었지만 에바1호기는 최고의 기량을 보였다. 하지만 녀석들도 지치지 않았다. 목표로 정한 먹이를 갈가리 찢어놓기 전에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창을 다시 거머쥐는 놈도 있었고, 아래를 공략하기 위해 몸을 더욱 낮추고 침을 흘리며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녀석도 있었다. 어떤 녀석은 날개를 펼치고 공중으로부터 공략할 태세를 갖추었다. 다시 혈투가 벌어졌다. 바다에서는 여전히 파도가 몰려왔고, 햇볕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단지 바닷가에서 노닐던 게들이 숨어버렸고, 모래가 주변에 흩날리고 있다는 점만이 다르다면 달랐다. 20분의 시간이 모두 끝나버렸다. 에바1호기는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더 이상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여러 군데 찢겨진 살점에서 붉은 생채액이 흘렀다. 무인에바들을 다 잡은 먹이의 주변에 몰려들어 기괴하게 포효를 했다. 포획한 먹이를 흔적도 없이 먹어치우기 전에 치르는 이를테면 의식이리라. 야멸친 비웃음과도 같은 감정이 그것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갔고, 에바1호기의 자극적인 비명소리는 피닉스 군도의 사방을 흔들었다. 붉은 것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간혹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는 무인에바의 입가에는 살점과 핏빛의 액체가 묻어있었다. 신지는 가슴을 움켜잡고 고통스러워했다. 의식은 혼미해졌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울먹이며 중얼대던 신지는 이제 마지막이라고 느꼈다. 이 때 무선교신기에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피닉스 연구소를 접수했습니다. 생존자는 없습니다. 사령관님의 명령대로 철저히 증거인멸중입니다. 3호기는 양호한 상태며, 제로기와 4호기는 수리가 마무리 단계로 판단하고 접수했습니다. 2호기는 폐기해야 할 듯 보입니다. 다음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연구소로부터 송신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연구소 직원이 아니었다. 신지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선고받았다. 무인에바는 1호기를 찢어대었고 신지를 도울 이들은 사라졌다. 레이도, 미사토도, 심지어 아버지마저. 미세한 경련이 신지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혼자 살아내야만 했다. 혼자 살아내야만 한다. 본능적으로 조종간을 부여잡았다. 조종석에 불이 들어오고 합체율이 단번에 95%까지 올랐다. 배터리가 없음에도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재빠르게 두 마리의 무인에바를 던져버리고 튀어 오르듯이 일어나 지글대는 녀석들의 표정을 지워버리려는 듯 오로지 그들의 얼굴을 공격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다시 일어서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기괴한 웃음과 음울한 기운이 지겹도록 역겨웠다. 이대로는 아무리 노력해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신지는 깨달았다. 혐오스러운 요물은 에바1호기에게 접근했다. 에바1호기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숙주를 찾기 위해 사방을 살폈다. 바다에 깨알같이 보이는 구축함과 항공모함. 레이더에 잡히는 적들의 위치는 피닉스와 피닉스 군도 사이였다. 에바1호기는 그것들을 향해 모래사장을 박차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뛰어올랐다. 합체율은 98%까지 올랐다. 헬기를 지나 거대한 포물선의 상향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치닫는 극한점을 찍었다. 그리고 어차피 한번은 그려야만 할 포물선의 하향곡선을 그려낸 에바1호기는 정확하게 항공모함의 갑판에 착지했다. 바닷물이 튀어 오르고 항공모함은 크게 진동했다. 항공모함을 호위하는 구축함은 대공포를 에바1호기에 조준하고 무차별적으로 사격했다. 헬기와 전투기도 에바1호기를 조준했다. 신지는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레이의 말처럼 아버지에게서 도망가지 않고, 미사토의 말처럼 어중간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카오루의 말처럼 단 하나의 선택받은 종족만이 살아남는 것이라면 그를 따라 자신을 불사르고 다시 태어나리라 생각하며 자꾸만 눈물을 흘렸다. 에바1호기를 쫓아 날아오던 무인에바 중 한 마리가 1호기의 등을 겨냥해서 창을 던졌다. 관통! 에바는, 신지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붉은 생체액을 항공모함의 갑판과 에바1호기의 조종석에 뿌려대었다. 합체율은 100%가 되었다. 신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레이가 웃었다.
‘아버지한테서 도망치면 안돼, 아버지를 미워해서도 안 되고.’
‘레이, 넌 꼭 엄마 같아.’
레이의 옆에 서있는 아버지가 신지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한다.
서서히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지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신지는 말했다.
‘아빠는 나빠요. 내가 하기 싫은 건 늘 하게하고, 하고 싶은 건 늘 못하게 해요. ……, 피닉스를 지켜야 해요. 피닉스를 지켜야 한다고요.’
신지의 얼굴을 똑바로 부여잡고 눈을 맞추던 미사토도 보였다.
‘누나, 고마워요.’
미사토는 웃으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답답해. 넌 너무 나약해. 그럴 땐 사랑한다고 하는 거야.’
‘누나, 사랑해요.’
레이 넌 꼭 엄마 같아 아빠는 나빠요 내가 하기 싫은 건 늘 하게하고 하고 싶은 건 늘 못하게 해요 …… 피닉스를 지켜야 해요 피닉스를 지켜야 한다고요 누나 고마워요 누나 사랑해요
무인에바는 에바1호기의 등과 가슴을 관통하여 항공모함의 갑판에 꽂혀버린 창의 주변을 둘러싸며 착지했다. 에바1호기는 닭꼬치처럼 창에 꽂혀 신경을 놓고 너덜대었다. 창을 타고 흐르는 붉은 생채액이 갑판에 가득 흘렀다. 무인에바는 지글대는 웃음을 뱉으며 먹이를 뜯기 시작했다. 신지는, 에바는 거대한 포효를 내지르며 카오루의 방식을 따랐다. 장작은 많았다. 무인에바도, 헬기도, 전투기도, 항공모함과 구축함도, 그리고 인간도 신지와 에바1호기를 위해 준비되었다.
작렬! 뜨거운 절규는 사방을 흔들었고, 바다가 요동쳤다. 불꽃이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하늘까지 뻗어 올라갈 기세로 피어올랐다. 마치 다시 살기 위해 노쇠한 몸을 버리는 새처럼 아름다운 형상이었다. 폭발음은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가 공기를 찢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 이 작품은 에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토대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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