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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외계인] 블랙아몬드

2007.02.28 18:0902.28

  나는 화려한 문신을 새겨주겠다고 구슬려 자매를 꼬시려는데 성공할 참이었다. 그녀들은 얼굴은 꽤 예쁘지만 골은 텅텅 빈,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스타일로 내게 즐거운 밤을 선사해줄 예정이었다.
  적어도 베키가 나를 발로 차서 침대 밖으로 굴러 떨어트리기 전 까진.
  “이 새끼는 깨워도, 깨워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해!”
  그녀가 으르렁 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그 모든 것이 꿈이었음에 지독히 실망했다. 꿈이라서 실망 했다기보다는, 꼭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나를 깨우는 베키의 잔인함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손으로 배를 긁적이다가 다시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베키는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있었다. 눈썹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오른팔은 얼마 전 피부염색을 해서 온통 초록색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붉게 타오르는 머리색과 잘 어울렸지만, 내가 그녀의 팔에 새겨준 거미 문신이 죽어버리는 결과를 낳아 나를 좌절시켰다.
  방안 어딘가에서 또 다른 소음이 들린다. 나는 고개를 내밀어 침대 밑을 바라봤다. 펫 버크와 윌킨스가 코를 있는 대로 골며 자고 있다. 이름처럼 거대하고 우람한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펫, 그리고 흑인이지만 우리보다 훨씬 옷걸이가 훌륭한 윌킨스. 머리에 든 건 많은 것 같은데, 무식한 우리랑 다니다 보니 아는 척 할 기회가 없는 펫, 마이크란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성으로 안 부르면 화를 벌컥 내는 똘아이 윌킨스. 어젯밤,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들어와 이 집에서 자는 것 까진 허락했지만, 침실 말고도 방이 두 개나 더 있는데 굳이 남의 침대 밑에서 뒹굴고 있는 이 두 생물의 저의가 알고 싶다.  
  이번엔 시계로 눈을 돌렸다. 오전 11시. 내게는 새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아직 꿈나라를 헤매도 아무 하자가 없을 시간대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역시 오늘 아침 베키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다는데 이르렀다.
  하지만 나 역시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자 있는 대로 퍼부은 술이 내 뱃속에서 용암처럼 요동을 치고, 머리는 뱅뱅 돌기 시작했다. 구역질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마치 경쾌한 락밴드의 앨범을 틀어놓고 CD의 모든 곡이 끝날 때까지 헤드뱅잉한 것과도 같은 기분이 나를 엄습해왔다.
  “죽을 것 같아.”
  나는 간신히 쥐어짜듯 한마디 내뱉는다. 그러자 베키의 눈이 잠시 내게로 머물다 다시 거울로 돌아간다. 그녀는 이제 입술을 그리고 있다.
  “넌 쓰레기야.”
  그다지 반박할 마음은 없다. 그보다는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서 다시 잠들고 싶을 뿐이다.
  “왜 쓰레긴줄 알아?”
  오, 이런. 그녀는 끝낼 생각이 없나보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듯, 화장을 멈추고 내게로 돌아섰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대 밖으로 다리를 뻗어 펫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가 깨어나서 베키의 시선을 분산시켜 주기를 바라며.
  “야, 펫. …펫. …펫! 일어나, 돼지 새꺄!”
  말 한마디, 한마디 내뱉기가 고역이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입 밖으로 삐져나오는 소리는 다 죽어가는 놈의 신음소리마냥 맥없다. 이래가지고는 코까지 골며 좀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이 비대한 몸집의 돼지를 깨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일찍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성인 이래로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 불쌍한 인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속사포와도 같은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넌 말야, 도대체가 말이지 영 글러먹은 새끼야. 물론 이 동네에, 아니 이 모든 세상을 통틀어서도 제대로 된 남자 새끼가 있는지 퍽이나 궁금하지만, 넌 그중에서도 최고의 쓰레기라고 장담하겠어.”
  나는 더 이상 소리 내어 깨우기를 포기하고 발에 좀 더 힘을 싣기로 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힘을 오버했다가는 내 뱃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어젯밤 먹었던 술안주들이 전부 로켓처럼 뿜어져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쯤에서 그쳐줄지도 모르는 베키의 분노가 역으로 폼페이를 무너트렸던 활화산이 되는 건 시간문제기 때문이다.
  “네 대가리 속에 들은 거라곤 온통 여자뿐이고,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지 않을 때는 그저 어떻게 하면 더 여자들한테 멋져 보일까하는 생각뿐인 것도 쓰레기지. 또 그 생각의 결과가 겨우 운동으로 몸이나 만들어보자고 명령하는 주름 하나 없는 뇌도 쓰레기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더욱 힘을 줘서 펫의 비계 가득한 옆구리를 발로 찔러댄다. 그러자 그가 신경질을 내면서 몸을 뒤척인다. 오. 신이시여, 제게 조금만 더 힘을 주소서.
  “땀 뻘뻘 흘려 운동한 주제에 끝내고나면 제대로 씻기를 하나, 스스로 정리정돈 하길 하나. 그렇게 말했는데도 쓰레기는 아무데나 휙휙 내던지고. 뭣 좀 고쳐놓으라고 하면 죽는 날까지 미뤄놓지. 뭔가 부탁을 하면 뒤 돌아서는 순간 싹 다 잊어먹는 건 예사요, 하는 일마다 건성건성.”
  드디어 펫이 눈을 뜨고는 상체를 일으키며 내게 욕을 퍼부었다. 그의 욕지거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간다 치더라도 너를 최고의 쓰레기로 만들어주는 건-”
  그녀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펫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보였다. 겁먹지 말고 어서 아무 말이라도 씨부려 봐, 제발. 내게 욕을 퍼부어!
  …하지만 그는 닥치고 있는 게 최선이라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렸다. 개새끼.
  “네가 술에 미쳐있다는 사실이야.”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앞머리가 흘러내려 위로 쓸어 올렸다.
  억울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나는 니들 처럼 약을 하지 않거든?
  …라고 이 방안에 있는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삿대질하며 말하고 싶지만-특히 베키-본능적으로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대신 펫과 눈을 마주치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으쓱.
  “넌 구제불능이라고.”
  베키가 다시 거울로 눈을 돌렸다. 나는 메두사의 눈에서 벗어난 것처럼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어제 집에 들어온 꼴을 직접 봐야하는 건데. 저 떨거지 둘을 데리고 의기양양하게 개난리치던 자신의 모습을. 담에는 꼭 영상으로 담고 말겠어.”
  드디어 그녀가 말을 마쳤다. 나는 그 순간 거리로 뛰쳐나가 지나가던 여자들을 모두 붙잡고 볼에 키스해주고 싶었다. 지금 초고속회전을 하고 있는 머리의 상태는 둘째치고서.
  베키는 자신이 아끼는 백을 손에 쥐고 일어섰다.
  “혼자 떠들어대기도 지쳤어. 지긋지긋해.”
  그녀는 돌처럼 굳어버린 우리 둘을 뒤로 하고, 또 아직까지도 혼자서 속편하게 쳐자고 있는 윌킨스 위로 넘어서며 방문을 열었다. 한숨을 내쉬려던 그 순간 그녀가 뒤를 돌아봤기에 나는 급히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좀 늦을 거야. 밤에 봐.”
  그녀는 지금까지 몰아친 게 다소 미안했는지 나긋나긋한 말투로 얘기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이런 점이 바로 그녀의 매력이다. 아이고, 예쁜 것. 내 사랑.
  베키가 현관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멀어졌을 때도 우리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건 원래 침묵뿐인 법. 엄청난 적막감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방 안에 떠도는 소음이라곤 빌어먹을 윌킨스의 코고는 소리뿐이었다. 하도 두들겨 맞아서인지는 몰라도 왠지 모르게 숙취가 조금이나마 가신 듯한 느낌이다.
  펫과 나는 혹시나 그녀가 다시 돌아와 제 2부를 시작하지나 않을까 현관문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그런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이 1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졌다는 판단이 든 후에야 비로소 문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펫은 자다가 허리케인에 휘말린 사람처럼 얼빠진 몰골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위해 어깨를 으쓱해주었다. 으쓱.
  그리곤 물었다.
  “마나님 기분이 아침부터 개떡 같은 이유가 뭔지 알고 있어?”
  펫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니.”
  물론 어젯밤, 내가 킹 오브 똘아이였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가 술에 삼켜져 다른 인격체로 극적인 변화를 이루는 모습을 그녀가 여태껏 보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이제까지 그녀는 나의 이런 한심한 모습도 대수롭지 않은 듯 넘겨왔다. 아니면 참고, 참고 또 참아오다가 결국에 뚜껑이 열려버린 걸까. 관대했던 게 아니라 피나는 노력으로 참아오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버렸단 말인가.
  “어쩌면.” 펫이 말했다.
  “어쩌면?” 나는 대답했다.
  그는 한 번 읊어보기나 하는 의견이니 대수롭게 생각지 말라는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요새가 1년 중에 가장 끝내주는 드럭 페스티발 아니냐.”
  “그래서?” 나는 인내심이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베키는 이 동네서 가장 끝발 날리는 아마츄어 드럭 아티스트고.”
  “그렇지.” 내 대답엔 재촉의 의지가 숨겨져 있다.
  “그런데 요새 그녀의 약보다 훨씬 끝내주는 물건이 나왔다는 소문이 있어. 완전 인기 폭발이라 구하기조차 힘들다던데. 나도 이름만 들었지 구경조차 못했어. 어찌나 평이 좋던지 약을 끊은 나조차 혹하게 만들더라니까. 하지만 끝내 구하진 못했지.”
  네가 약을 끊어? 천지에 소문난 정키 피그가? 나는 굳이 내 속마음을 말로 표현하진 않는다. 그저 그가 계속 말하기를 재촉할 뿐.
  “그것 때문에 베키의 자존심이 팍 상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아마 그래서 심기가 불편한 게 아닐까?”
  음음. 그럴 듯한 가설이다. 다른 여자를 꼬실 때를 제외하고는 베키의 사소한 것까지 공유하고 싶은 내게 있어서 취약점이라면 바로 드럭에 관한 것이다. 나는 술은 미치도록 사랑하지만 약은 절대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것에 관한 정보에도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불쌍한 베키. 콧대 높은 여왕님이 얼마나 상심이 클꼬.
  “저 병신은 어때? 쟤는 해봤대?”
  잠통에 빠져버린 윌킨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펫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눈이 뒤집힐 정도로 찾아 헤맸지만 못 구했나봐.”
  과연. 펫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구제불능 쓰레기 정키인 윌킨스가 못 해볼 정도로 인기 있는 약이라면 이 바닥에서 주름잡던 베키라도 힘들지도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털면서 일어났다. 어차피 내가 처리할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난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당분간 술을 자제하면서-오, 이런!-잔뜩 상심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올 베키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일 뿐. 그거라도 잘해야 느긋하게 꿈속에서 여자들을 꼬실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검은색 러닝셔츠를 벗으며 욕실로 발을 옮겼다. 그러다 도중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 돌아보며 펫에게 물었다.
  “그 잘나가는 약 이름은 뭐래?”
  펫은 다시 잠들 생각인지 드러누우며 대답했다.
  “글쎄, 뭐였더라…. 블랙 아몬드였던가. 아마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블랙 아몬드?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응. 아몬드.” 펫은 옷 밖으로 내민 배를 통통 두들기며 말했다.  
  “거, 싸구려 같은 이름이군.”
  이건 내 솔직한 감상이다.

  *       *       *

  햇빛이 따갑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거리로 나섰다. 손으로 얼굴을 가려보지만 역부족이다.
  가게 문을 열러 나가는 길은 언제나 괴롭다. 안 그래도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죽음이 가까워져 가는 것만 같은 기분인데, 굳이 저 빌어먹을 태양이 나를 괴롭힐 이유에는 어디에도 없다. 거기다 아직 술도 깨지 않았다. 그러니 꺼져, 제발.
  거리는 활기로 가득 차다. 아냐, 아냐.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니들이 신나하며 낮을 즐길 권리 따윈 없어. 나는 으르렁댄다. 하지만 그것은 단단한 우리에 갇힌 맹수의 그것 마냥 부질없고, 어떠한 위엄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방에 음악이 울려 퍼지고 여러 인간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어 북적북적하다. 나를 제외하곤 누구 하나 웃지 않는 이가 없다. 평소엔 더없이 조용하고 한가한 시골 동네다. 하지만 1년 중, 꼭 이 일주일간만 그 어느 대도시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소란스럽고 활기찬 동네로 변신한다.
  
  알약으로 정제된 마약이 몇 년 전 합법화 되면서-물론 주사나 그 외의 방법들은 여전히 예외지만-사람들의 삶이 많이 바뀌었다. 베키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드럭 아티스트란 직업으로 한 몫 단단히 벌고 있으니. 알약으로 기준점을 잡은 게 결정적이었다. 중독이나 금단현상을 최소화시키면서 누구든지 부담 없게 즐기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여하간 모든 이들이 파티를 즐기듯, 콜라를 마시듯, 내진 술을 마시듯 약을 즐겼다. 나를 제외하곤.
  그리고 이 동네 역시 제대로 변했다. 누가 대갈통을 제대로 굴린 건진 알 수 없지만 드럭 페스티발을 계획한 것은 그 인간 인생에 있어 가장 쾌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잭팟이 터졌고, 돈이 매년 다발로 굴러 들어오니까.
  특히 이 동네가 약이 합법화 되는데 있어서 그 시발점이 되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적도 있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난 알지 못한다. 나는 불과 몇 개월 전에 이사 온 이방인이니까. 어쨌든 이런 저런 요소들이 겹쳐 매년 일정한 시기에 펼쳐지는 페스티발은 엄청난 규모의 축제가 되었다. 일주일 내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정키들이, 그리고 자신을 아티스트라 부르는 인종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어 동네를 활보하며 광란의 파티를 펼치고 있다. 남녀노소, 약을 즐기지 않는 인간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페스티발을 계획한 인간들의 바램대로 돈을 다발로 뿌리고, 그걸 자신의 배설물인 마냥 흔적으로 남겨 놓고 사라진다. 마약 만세.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숨쉬기조차 버겁다. 차라리 질펀하게 한 번 토하고 속을 정화시켜볼까 생각해본다. 이 시기에 길거리에 토를 하는 것쯤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니 별로 쪽팔린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정키로 보이고 싶지 않다. 결코, 절대로. 이미 충분히 그렇게 보인다 하더라도….
  젊은 여성 두 명이 깔깔 웃으며 내 옆으로 스쳐지나간다. 평소 같으면 이미 둘 사이를 파고들어 순식간에 양 옆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웃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일 따위는 때려 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자고 싶다. 다시 술이 미치도록 그리워 질 때 까지 자고 싶다. 집에서 나올 때 펫과 윌킨스, 이 염병할 것들이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크나큰 괴로움이었다. 나는 어느새 내 마음이 급격히 기울었음을 스스로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이 기간은 내게 있어서도 대목이니까 이대로 돈다발을 포기하기는 너무 억울했다. 나는 사람 몸에 낙서하는 일로 빌어먹고 산다. 뭐, 낙서가 아니라 문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문신을 새기는 일은 나름 즐겁다. 돈을 버는 것 이외에도 여자를 꼬시는 데도 꽤 유용한 기술이니까.
  어쨌든 페스티발 기간엔 사람도 바글바글하니 기념 삼아 문신을 새기는 인간들이 꽤 많다. 주로 촌스러운 그림, 문구들을 많이 선택한다. ‘드럭은 나의 어머니’라고 쓰여진 하트무늬라든지, 장난스럽게 생긴 늑대 두 마리가 짝짓기 하는 모습을 새긴 것들 등등. 뭐 대충 그런 허접한 그림들.
  페스티발이 시작하기 몇 주 전부터 새로운 무늬를 고안해내며 이런 촌스러운 것들이 먹힐까 불안해하지만, 결국엔 촌스러우면 촌스러울수록 인기가 많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들은 개똥만큼도 선택 안 되고. 이런 예술도 모르는 무지한 것들이 약이나 하고 자빠졌지. 나는 돈을 벌면서도 혀를 끌끌 찬다.
  지금이라도 당장 발걸음을 돌려 돌아가고픈 유혹과 전쟁을 펼치는 와중에 10평 남짓한 내 가게에 도착했다. 길거리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뜬금없는 나만의 공간. 이제는 발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음을 인식하며 한숨을 내쉬고는 셔터를 올린다. 셔터는 올라가기를 거부한다. 나는 욕을 하며 다시 힘을 줬다. 하지만 여전히 요지부동. 나는 괴성을 지르며 셔터를 부서져라 흔든다. 그리고 백기.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내 삶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에 욕을 내뱉는다. 씨발, 개씨발. 그때 뭔가가 눈에 들어온다. 작은 자물쇠 두 개가. 이번엔 넋을 놓고 있는 팔푼이 같은 자신에게 욕을 내뱉으며 바지를 뒤져 주섬주섬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평소보다 30분정도 늦은 오후3시 반에 문을 열고, 나는 쓰러지듯 의자에 기댄 채 손님을 기다렸다. 아직까지 돌아다니는 쪽보다 자고 있는 인간들의 비율이 훨씬 높은지 한가하다. 나는 늦가을의, 따뜻한 햇살이 지면을 달구는 모습을 바라보며 꾸벅꾸벅 졸았다. 첫 손님이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2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였다.
  “헤이, 에디. 잘 지냈어?”
  누군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내뱉는 경쾌한 말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았다. 문득 다시 토하고 싶어졌다. 이번엔 숙취 때문이 아니라 갑작스레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눈을 잔뜩 찡그린 채, 내 앞에 놓인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는 이를 바라본다.
  훤칠한 외모에다 반 곱슬머리, 새하얀 피부. 덤으로 시원스런 미소까지. 카일이었다. 이 녀석도 그럴듯한 외모와는 달리 알아주는 꼴통이다.
  “아, 물론. 끝내주게 잘 지냈지.”
  그는 다 알겠다는 듯 건들건들 고개를 끄덕인다.
  “나 예쁜 걸로 하나 새겨줘. 여자들이 보고 뿅 갈만한 걸로.”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잘 들어, 카일. 여자를 뿅 가게 만드는 방법은 바로 아무 문신도 새기지 않는 거야. 제 정신이 박힌 여자들은, 자기 몸이 낙서판인 마냥 여기저기에 낙서한 인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거기다 플러스로 내 문신은 여자를 멀리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어.”
  그는 킬킬 거리며 말했다.
  “좋아. 맘에 들어. 빨리 하나 새겨줘. 네가 하고 싶은 걸로, 목 뒤에다.”
  이런 개새끼가 제일 싫다. 최소한 그림이라도 니 눈으로 보고 고르란 말야. 망할 것아.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갈 때 쯤, 웬 날파리 같은 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펫과 윌킨스였다. 그들은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고 뒷문에 달린 창 너머로 힐끔힐끔 안을 들여다봤다.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나는 작업 중에 정신 사납게 만드는 새끼들을 정말 싫어한다. 그걸 알고 있는 놈들이 저 지랄이니, 원.
  집중력이 사라진 상태로 버벅대며 간신히 문신을 완성했다. 면도날로 그은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드는 철조망 문신이 카일의 목덜미에 새로 자리 잡았다. 자칫 실수라도 할 까봐 진땀을 쏟아야 했다.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끝났어, 카일. 완벽해. 여자들이 네 목덜미에 키스하지 못해 안달이 날걸.”
  그는 기분이 괜찮은지 연신 낄낄 댔다. 순간 이 새끼가 약을 하고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인간의 정신 상태는 약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별 차이가 없어서 구분하기란 대단히 쉽지 않다.
  나는 노동의 대가를 지불 받고 엉덩이를 걷어차듯 서둘러 그를 내보냈다. 마지막으로 카일을 향해 영업용 미소를 날려준 뒤,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다시 짜증이 파도를 타고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를 꽥 질렀다.
  “이 염병할 놈의 새끼들! 일하는데 알짱알짱 대고 지랄이야!”
  그러자 윌킨스가 뒷문을 열고 배실배실 웃으며 들어왔다. 거대한 몸집의 펫이 그의 뒤를 따랐다.
  “여, 장사는 잘 돼? 술은 좀 깬 거야?”
  가끔가다 윌킨스의 깐죽대는 저 면상에 주먹을 세차게 꽂아 넣고픈 유혹에 시달릴 때가 있다. 그렇게 되면 술친구 한 놈을 잃게 되겠지만, 그 정도 대가는 치루고 서라도.
  윌킨스는 벽에 기대며 섰고, 펫은 두리번거리다가 빈 철제의자를 하나 들고 와 앉았다.
  “넌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서 실실 쪼개고 있어?”
  내가 도구를 정리하며 물었다. 윌킨스는 굳이 얼굴의 웃음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오늘 밤 그걸 구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그가 말했다.
  “그거?”
  “블랙 아몬드.”
  윌킨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하.”
  나는 무의미한 감탄사를 내뱉는다. 윌킨스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그걸 구하기 위해 얼마나 똥줄 타게 돌아다녔는지 알아? 내가 태어날 때 마약에 절어서 아무 힘도 못주는 울 엄마 뱃속에서 빠져나오려고 용쓸 때도 이만큼 노력하진 않았을 거야. 그랬는데도 그 약은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어. 노력이 성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걸 내게 가르쳐줬다고! 이 염병할 아티스트 새끼가 더럽게 영악한 놈이거든. 극소량만을 풀어서 우선 입소문이 쫙 퍼지게 만들었어. 해본 놈들은 완전히 뻑간 모양이고.”
  “근데 어떻게 구했는데.”
  윌킨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 아직 구한 건 아냐. 근데 거리에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씀이지. 그 약을 만든 새끼가 오늘 밤에 약을 대량으로 풀 거라는 얘기가 은밀히 퍼져나가고 있어. 물량만 확보돼봐. 내가 그걸 못 구할 것 같아?”
  그의 목소리 톤이 점점 높아져 갔다.
  “뭐하러 약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건데, 병신아. 그냥 그 아티스트를 찾아가서 약을 달라고 하면 될 거 아냐. 어차피 돈 한, 두 푼 쏟아 부을 것도 아닌데 이왕이면 도매가로 사야지.”
  그러자 윌킨스가 나와 펫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내가 진작에 그 생각을 안 해봤겠냐! 당연히 제일 먼저 시도했지. 그런데 그 인간 모습을 아는 놈이 아무도 없어. 아직까지 남잔지, 여잔지도 모른다구.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묵고 있는지, 누구를 통해 약을 퍼트리고 있는지 조차 몰라. 실제로 봤다는 놈이 있긴 해. 근데 별 개똥같은 소리라 신빙성이 없어. 말로는 그 아티스트는 긴 코트에 모자까지 푹 눌러 쓰고 있다는구만. 세상에, 지금이 몇 월이라고 벌써부터 그따위로 입고 있겠어?”
  “또 모르지. 금단현상에 시달려서 옷을 두껍게 입는지도.” 펫이 끼어들었다.
  “아냐, 이 돼지새끼야, 아니라구.” 윌킨스는 두 손을 뻗으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계속 들어봐. 더 있으니까 끼어들지마. 봤다고 우기는 놈에 따르면-여기서부터 점점 말이 안 돼는 데 말야-피부가 꼭 사람이 토한 것 같은 색에 가깝대. 거기다 생긴 것 자체도 기묘하다던데. 얼굴이 딴 사람보다 훨씬 크고, 귀도 뾰족하다 그러고. 거기다 결정적으로… 눈이 전부 새카맣대. 흰자가 안 보인다는 거야. 약 이름도 사실 직접 명명한 게 아니라, 그 인간에 눈 때문에 블랙 아몬드라고 별명 붙인거래. 그걸 연상시킨다면서.”
  펫과 나는 눈을 마주쳤다. 어느 타이밍에 이 한심한 얘기의 맥을 끊어야 될지 재면서. 그런데 윌킨스는 우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나 되냐고! 이런 옘병! 이게 다 스스로 정체를 안 드러내니까 소문이 엉뚱하게 부풀려져서 이렇게 된 거 아냐! 진작에 약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수소문해서 체계적으로 퍼트렸으면 얼마나 좋아. 바로 나 같은 놈한테!”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펫은 이제 상관 하지 않겠다는 얼굴이다. 윌킨스는 말을 멈추고 다소 흥분을 가라앉혔는지 처음 기댔던 벽으로 돌아가 다시 얌전히 몸을 기댔다.
  “…해서, 불쌍한 이 몸은 그냥 얌전히 약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겟하겠다는 거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맛보고 말겠어.”
  만약 지금 그의 손에 무언가 들려있었다면, 결연에 가득 찬 그의 손에 의해서 으스러졌을 것이다.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근데 대체 왜 남이 장사하는데 와서 알짱대냔 말이지.”
  이제야 간신히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윌킨스는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같이 가자구. 이제 너도 인생에 가장 큰 즐거움을 알 때가 됐어. 언제까지 속만 버리는 술만 줄창 마셔대면서 살 건데? 내가 책임지고 구할 테니, 가자.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거야, 형제.”
  그는 내 앞까지 다가와 얼굴을 들이대며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에디 쇼. 지금 네 앞에 천국으로 가는 문이 열려 있어.”  
  “나는 됐어.” 내가 말했다.
  “정말?”
  “정말.”
  “진짜?”
  “진짜.”
  그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간다. 실망한 빛이 역력한 표정이다. 하지만 포기도 빠른 인간이다. 그는 허리를 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넌 죽을 때까지 그러고 살아. 펫, 가자.”
  그가 돌아보며 말하자 펫이 당황한 듯 어물거렸다.
  “어, 그러니까… 나도 관둘래.”
  “뭐?” 이제 윌킨스의 표정이 슬슬 짜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됐다구. 나는 아틀란티스로도 충분히 만족했고, 그걸 끝으로 이제 약은 끊기로 했거든.”
  “뭐시라?” 똥 닦는데 쓰인 구겨진 신문 같은 얼굴.
  “잠깐. 아틀란티스는 또 뭐야?” 내가 끼어들었다.
  “베키가 만든 거. 회심의 역작이지.” 펫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게 그녀의 한계이기도 하고.” 윌킨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곤 셋 다 침묵.
  “니들 진짜 안 갈 거야?”
  윌킨스가 다시 물었다. 우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윌킨스는 불쌍해 죽겠다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포기한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맘대로 하셔들. 니들이 내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게 믿기기 않는다.”
  그는 뒷문을 열며 말했다. 문이 열리자 시원한 바람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윌킨스는 재킷의 윗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끼고는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제군들. 나는 천국에 다녀올 테니 열심히 번민들 하고 계시게.”
  그리고는 성큼성큼 내딛으며 사라져갔다. 햇살이 그의 가는 길을 밝혔다. 우리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레? 아침이랑 꽤나 비슷한 시추에이션인데?
  손님도 없었건만 피곤함이 배로 몰려왔다. 어쩐지 피곤한 하루다.
  “넌 왜 약을 끊은 건데?”
  수다쟁이가 사라진 뒤 내가 물었다. 그러자 펫은 말없이 웃기만 한다.
  “도로시 때문이지?”
  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도로시는 요새 펫이 맘에 들어 하는 여자다. 어느 술집에서 만났었더라…. 그건 잘 기억나진 않지만, 도로시는 원래 내가 먼저 꼬시려다 실패했던 것만은 똑똑히 기억났다.
  내 질문에 펫 역시 씨익 웃을 뿐, 그는 또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       *       *

  며칠간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새 내일이면 페스티발의 막이 내린다. 모든 정키들이 쥐떼처럼 우르르 빠져나가고 나면 이곳은 다시 유령마을처럼 적막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폐회사를 알리는 마을의 유명인사는 피리 부는 남자다. 그가 씨부렁대는 순간, 마을에 있던 착하디착한 우리 정키들이 싹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번에도 꽤 한몫 번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다. 이제 겨울을 날만큼은 벌었으니 어서들 엉덩이를 걷어 채이기 전에 꺼져줬으면 싶을 뿐이다.
  그동안 베키도, 윌킨스의 모습도 구경조차 못했다. 베키는 한참 자신의 작품을 뽐내느라 바쁠 것이고, 윌킨스는 약에 힘을 빌려 지 말대로 천국에라도 갔을 것이다. 나는 새벽에 문을 닫으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 온전한 정신 상태를 베키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집에 들르질 않았으므로 허사였다. 말짱한 정신으로 깨어난 다음날 아침이면 침대 옆자리가 비었음을 확인하고는, 차라리 술이나 질펀 마실 걸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오늘 밤은 마지막 광란의 축제가 펼쳐질 예정이어선지 문신 따위를 새기러 오는 얼간이는 아무도 없었다. 음, 정키라는 존재는 은근히 똘똘한 놈(그리고 년)일지도 모르겠다.
  평소보다 일찍 문 닫을 준비를 하자니 슬며시 펫이 나타났다.
  “어때?”
  “완전 공쳤어. 다들 축제에 갔는지 코빼기도 안 비치네.”
  “그렇겠지. 거리도 조용해. 오로지 광장만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소란스러워.”
  “옘병. 축제가 선량한 소시민 잡네. 어때, 너 하나 새길래? 최대한 싼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손님.”
  “됐어.” 그가 손을 내젓는다.
  나는 도구를 정리하며 ‘그럼 꺼져.’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그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
  “지금 문 닫는 거지? 기다릴게, 같이 들어가자.”
  “고마워, 엄마.”
  빈정거리다가 문득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발견한다. 오, 이런, 세상에.
  “야, 네 손에….” 말을 잇지 못한다.
  “이거?”
  펫이 손에 쥐고 있는 술병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들어 보이며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의 흔적을 쫓았다. 그는 병을 입에서 떼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놈이 들고 있던 건데, 완전히 꼴아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더라고. 그래서 너무나도 친절한 내가 그 새끼의 몸을 생각해서 뺏어왔지. 단 주먹 두 방에.”
  술에 완전히 꼴은 놈이라면서 깔끔하게 한 방에 끝내지 못하고 두 대씩이나 때려야한 내 친구가 한없이 불쌍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반대로 술병을 들고 있는 녀석이 구세주로 보이기도 했다.
  “야, 펫. 어차피 문도 일직 닫았는데 술이나 진탕 마시자. 우리도 페스티발의 마지막을 즐기자구. …나랑 별 상관은 없지만.”
  “나야 좋지만 너 괜찮아? 베키한테 제정신인 모습 보여 준다면서.”
  “오, 왜 이러셔. 설마 걔가 오늘 기어 들어오겠어? 그럴 리 없잖아. 내일부터 다시 끊으면 돼. 산뜻한 기분으로. 오케이?”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 역시 내일의 내가 절대 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더군다나 술을 끊는다는 것은 미친 행위다. 나는 절대, 내가 죽는 날까지 술을 끊지 못할 것임을 신께 당당히 맹세할 수 있다.

  눈을 뜬다. 0.03초도 안 돼서 골이 뱅뱅 돈다. 잠깐. 어떤 새끼가, 그 짧은 잠든 사이에 나를 놀이기구에 태운 거야? 좋은 말 할 때 세우는 게 좋을 걸.
  중얼거린다. 내려줘, 아 씨발, 내려달라고. 토할 것 같아, 내려줘, 제발. 오, 제발요.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뭔가가 머리에 부딪쳤다.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올려다보자 식탁의 아랫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옆으론 의자 다리가 여럿 보였다. 나는 의자 하나를 밀쳐 내면서 식탁 밑에서 빠져 나왔다. 펫은 냉장고 앞에서 몸을 동그랗게 만 채로 코를 골고 있다. 저 비대한 몸이 저만큼이나 구부려 지다니, 놀라운 일이다. 식탁 위에는 술병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실수로 팔을 식탁에 부딪치자 술병 하나가 또르르 구르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어제 집에 들어온 모양이긴 하다. 기억은 없다. 펍에서 줄창 마셔대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집에서까지 마신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널려있는 술병의 양이 장난이 아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적당히 마셨어야 되는데, 옘병.
  언젠가 베키가 선물해줬던, 그리고 그 후로 줄곧 내 왼쪽 손목에 채워져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6시 14분. 새벽일 리가 없지. 새벽일 리가 없어. 지금은 확실한 저녁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우리는 하루 종일 쳐잔 것이다.
  몸을 일으켰다. 어지럼증은 여전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일어서서 보니 내 주위로 펼쳐진 난장판이 더 또렷이, 그리고 더 절망적으로 보인다. 분명 싫다는 데도 이 새끼가 나한테 자꾸 술을 먹였을 거야. 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펫의 배를 잘근잘근 밟았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언제나 한결 같이 느긋하던 내가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베키가 보기라도 하는 날엔 얼굴이 박살날지도 모른다. 문득, 잔뜩 술에 취해 그녀 앞에서 알짱대다가 코가 깨져버린 어떤 불쌍한 새끼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니, 그 인간의 얼굴이 어느새 내 얼굴로 바뀌어있다.
  우선 샤워를 해서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그리고 씻고 나오면 펫을 깨워 치우는 것을 거들게 하자. 전적으로 이 새끼가 나쁜 놈이다.
  갈아입을 속옷을 챙기러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경악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의 놀라움. 숨이 멎는 줄만 알았다.
  베키가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엎드린 채 누워 잠들어 있다. 나는 몸이 굳어버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몇 시에 들어온 거지? 축제는 전부 끝났나? 그렇다면 우리가 벌려놓은 꼬라지를 전부 본건가? 아니면 마시고 있는 모습도 봤을까? 그녀에게 뭔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닐까?
  짧은 순간에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냥 이대로 놔두고 가게로 도망쳐 버릴까 생각했다. 베키가 일어나고 나서 그때까지도 속 편히 자고 있는 펫을 깨워 다시 한바탕하게끔. 그때 나는 여유로운 미소로 손님의 팔에, 혹은 등에, 아니면 은밀한 어딘가에 문신을 새기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아니. 좋지 않은 방법이다. 늦든, 빠르든 나 역시 그녀에게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쥐도 새도 모르게 정리를 시작하는 건? 그녀가 자고 있는 동안 이 난장판을 원상복구 시켜놓은 뒤 잠시 나갔다 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이에 눈을 뜬 그녀는 말하겠지. 어머, 씨발. 내가 꿈을 꾼 건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모든 게 부질없는 짓임을. 술에서 덜 깨지만 않았더라도, 내 생각보다 지금 처해져있는 상황이 훨씬 더 비관적임을 똑똑히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보기는 단 한 가지. 우선 될 수 있는 한 깨끗이 정리한 다음, 잠에서 깬 그녀의 기분이 썩 나쁘지 않길 기도하는 것.
  좋아. 해보자. 나는 바싹 기합을 넣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베키에게 이불을 덮어주려 침대로 다가간 순간…. 1초 만에 나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술에 취한 내 몸은 비틀거리다가 침대 옆에 세워진 스탠드를 끌어안은 채 그녀에게 다이빙 해버렸다. 내 팔꿈치가 그녀의 엉덩이를 세차게 내리 찍었고, 스탠드는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엎드려 자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얼굴에 상처를 입을 뻔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그녀의 분노를 충분히 점화시키고도 남았다는 점이다.
  화들짝 놀라 서둘러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스탠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뒹굴었다.
  “오, 이런, 썅, 베키, 미안, 이건 절대 내가 취해서 그런 게 아냐, 실수였다고, 그래, 실수, 알잖아? …베키?”
  뭔가 이상하다. 그녀는 이 난장판 속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베키. …괜찮아?”
  나는 침을 삼키며 살짝 고개를 내민 채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잠조차 깨지 않았다.
  “베키?”
  순간적으로 그녀가 그대로 기절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리고 이번엔 진정한 내 목소리로 비명 질렀다. 영혼이 뿜어내는 비명이었다.
  그녀는 입을 반쯤 벌리고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눈이 전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눈동자와 흰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것은 생각보다도 더 기묘하고, 사람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베키!”
  나는 그녀의 뺨을 두들겼다. 틀렸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미약하게나마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느껴졌다. 대신 내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지금부터 뭘 해야 좋을지 생각했다. 병원은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다. 구급차를 부르느니 내가 직접 업고 가는 편이 훨씬 빠르다.
  “펫! 펫! 일어나, 돼지 새꺄!”
  부엌으로 달려가 펫의 배를 세차게 걷어찼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씨발!” 그리고 외친 한 마디.
  “씨발이고 나발이고 베키의 상태가 이상해. 어차피 병원이 멀지 않으니 내가 업고 가는 게 좋겠어. 그러니까 너는 먼저 가서 응급환자가 곧 올 거라고 말해둬. 빨리 가!”
  “베키가? 어떻게? 괜찮아?” 그의 표정이 메두사의 얼굴을 본 양, 삽시간에 돌이 되었다.
  “몰라, 씨발! 빨랑 가라고!”
  그러자 펫은 고맙게도 사족을 달지 않고 후다닥 몸을 일으키더니 현관문을 열고 사라졌다. 나는 다시 침대로 달려가서 베키를 일으켜 등에 업었다. 그녀의 몸은 완전히 축 쳐진 상태라 상당히 무거워 비틀거렸다. 결코 내가 술에 취해서 비틀거린 게 아니다. 아마도.
  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그녀를 업은 채 뛰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짐작대로 지금은 저녁이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축제의 끝에 서있는 저녁은 짙은 파란색에 고요함이 더해져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골목을 돌아 큰길로 달려갔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 밑까지 찼다. 운동 부족인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 익숙한 인물이 멈춰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펫이었다.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병신아! 병원으로 가라니까 뭐하고 자빠졌어! 도움이 안 되는 새끼!”
  내가 멈춰서며 빽 소리 지르자, 그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로 돌아서서 나를 바라봤다.
  “에디…. 뭔가 이상해.”
  그의 눈이 겁에 질린 사람처럼 동그래졌다. 나는 뭔가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왠지 모를 거리의 적막감이 한층 더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펫은 내게서 눈을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가라앉히며 큰길로 나가 펫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리는 마치 죽어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있다. 그래, 아직 페스티발을 끝나지 않았을 테니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누구하나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마치 모두 죽은 듯, 이미 시체가 된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풍경이다. 멈춰서있는 차들, 돌아다니는 이가 없음에도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는 신호등….
  펫과 나는 서로를 마주보고는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가까운 곳 쓰레기통 옆에 한 명이 뒹굴고 있었다. 다소 젊은 남자로 보이는데 그는 대자로 몸을 뻗은 채였다. 나는 베키를 업고 있기 때문에 펫이 몸을 구부려 그의 몸을 뒤집었다.
  흐읍. 나는 숨을 멈췄다. 그는 베키와 똑같은 상태였다. 눈 전체가 검게 물들어있다. 베키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펫은 질겁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그에게 숨을 쉬는지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숨은 쉬는 것 같다고 펫이 말했다. 나는 그에게 확인사살을 가했다.
  “펫. 이리 와서 베키를 봐봐.”
  그는 일어서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내 등에 업혀있는 베키를 바라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데, 에디.”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마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도 모르지.”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목이 메었다.
  “저기 쓰러져있는 몇 명을 더 확인해봐, 펫.”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틀비틀 걸어가 쓰러져있는 몇몇의 상태를 보러갔다. 그는 내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 똑같은 상태인 것이다. 이곳은 말 그대로 죽은 도시였다. 아니, 죽어있는 것보다 더 섬뜩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근래의 바람답지 않게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져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펫이 다가왔다.
  “전염병일까?” 그가 물었다.
  “글쎄… 모르겠어. 일단 병원으로 가보자. 그러면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지.”
  우리는 뛰기 시작했다. 병원은 집에서 고작 두 블록 위였다. 나는 속도를 냈고, 펫은 점차 뒤쳐졌다. 거리의 정황을 살펴볼 겨를은 없었지만, 우리 말고 살아 움직이는 이가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병원에 도착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등 뒤로 숨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헐떡이는 펫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       *       *  

  “맛있냐?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셔?”
  어두운 전등 아래서 내가 묻는다. 전등 수명이 다 돼 가는 건 아니다. 내 칙칙한 기분이 집 안을 온통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다. 마치 희생자들의 눈동자처럼.
  책망하듯 묻는 내 물음에 펫은 음식을 잔뜩 넣어 부풀어진 입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그를 괴롭히는 척을 하면서 그가 더 많이 먹게끔 수작부리고 있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 펫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오로지 줄창 먹어대는 것뿐이다. 나는 어떻게든 그가 기운을 되찾게끔 해주고 싶었다. 그는 잔뜩 풀이 죽어있는 상태다. 원인은 도로시. 이 마을에서 누구보다도 제정상인 것처럼 보였던 그녀도 희생자의 대열에 합류해 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베키를 데리고 좀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 곳에서 시간을 죽일 바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베키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우리는 술병들이 발에 차이는 공간에서 저녁을 먹었다.
  마을을 빙 둘러보고 오는 길에 여러 사람을 만났다. 다행히도 멀쩡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게 우리 밖에 없진 않았다. 극소수라는 점이 문제지만. 그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속으로 신께 감사드렸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저는 진짜로 펫이랑 아담과 이브 놀이는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고, 성실해 보이는 중년남자를 만나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에게 있어서는 서로의 얼빠진 표정이 인사로 통했다. 누가 더 멍청해 보이냐가 공손함의 척도로 여겨졌다. 어쨌든 남겨진 이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이 외부에 퍼지기 전에 은밀히 마을에서 빠져 나가는 게 아마도 최 상책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남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베키를 집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정도의 쓰레기는 아니며, 사실 다른 여자를 꼬실 때를 제외하면 베키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절대 그녀 없이는 마을을 떠날 마음이 없다.
  “이제 어떡하지?”
  입 안 가득 담겨있던 음식물을 꿀꺽 삼키며 펫이 물었다. 다행히도 우울한 모습이 많이 가신 듯한 모습이다.
  “낸들 아나.” 뒤통수를 긁으며 내가 대답했다.
  은근히 어두운 듯한 전등이 내 신경을 건드렸다. 성질 같아서는 전부 박살내버리고 싶었지만 욕망을 뒤로하고 계속 말했다. “우선은…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부터 알아봐야겠어. 전염병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해. 우리만 멀쩡한 것도 그렇고…. 독가스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순식간에, 또 동시에  수많은 인간들을 뻗게 만드는 전염병이 있을 리가 없지. 뭣보다 신경 쓰이는 건 사람들의 눈이야. 저런 증상에 대해선 듣도 보도 못했어.”
  펫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오느라 잠시 대화가 끊겼다. 나는 그 사이 눈을 치켜 떠 전등을 노려봤다. 그가 다시 자리에 앉고 나서야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술에 꼴아 쳐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면? 우리가 뻗어있던 건 고작 반나절 조금 넘는 정도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있던 건 바로 그때뿐이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우선 정신이 있는 사람들 중에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자. 아깐 경황이 없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늦진 않았겠지.”
  “좋았어.” 펫이 물 한통을 전부 들이키더니 트림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기 전에 부엌에 있는 전등을 모조리 박살내버렸다.

  “세상에. 여기 좀 봐.”
  펫이 말을 잇지 못한다. 그 보다 조금 늦게 언덕을 올라선 나는 훨씬 더 큰 충격 받았다. 마지막 축제가 벌어졌던 광장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엄청난 수의 인간들이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전부 똑같은 눈으로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며 서로의 몸에 부대끼고 있다. 그것은 마치 전쟁터에서나 볼 법한 시체더미를 연상시켰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을 것만 같은 공간에 촘촘히 들어서서 축제를 즐기던 인간들이리라.
  그들이 차례차례 쓰러졌을지 아니면 한꺼번에 무너진 건지 상상해본다. 하지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한참동안이나 굳어버린 채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이대로 그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어느샌가 저들처럼 돼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거 코버 아냐?” 갑작스레 펫이 말했다.
  “뭐?”
  “카일 코버. 그 왜 얼마 전에 네가 문신 새겨줬던 핫바리.”
  아, 그래. 망나니 카일. 목덜미에 허접한 문신 하나 새겨줬더니 낄낄 대며 좋아하던.
  “어디?”
  내가 황급히 묻자 펫이 손을 뻗어 가리켰다. 광장 밑으로 조성돼있는 넓은 숲이 있는 공원에서 누군가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다. 척 봐도 허우대만 멀쩡한 카일이었다.
  “야, 카일!”
  내가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못 들었는지 공원 안쪽으로 계속해서 걸어 들어갔다.
  “카일! 카일! 카일! 썅놈아!”
  침묵이 지배하기 시작한 마을에서 이만큼 소리를 꽥 질렀다면 충분히 들었을 법도 한데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곧 있으면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시야에서 벗어날 것 같았다.
  나는 욕을 하며 뛰기 시작했다. 설레발치며 나돌아 다니기 좋아하는 저 놈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어떡해서든 그를 따라잡아야 했다. 나는 빛의 속도로-물론 체감 속도로만-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멈춰 서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달린 끝에 숲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 나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다른 손으론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야, 카일.”
  그리고 나는 또다시-도대체 오늘 하루 동안만 몇 번째인지 조차 모르겠으나-기겁을 하고 말았다. 억지로 돌려 세운 그의 얼굴. 그의 눈동자가 반쯤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다른 희생자들과도 같은 모습이 돼버릴 태세였다.
  “야, 정신 차려 새꺄!”
  나는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나는 숨을 가라앉히며 연신 그의 뺨을 때렸다.
  “얌마! 새꺄!”
  그의 입에서 침이 흘렀다. 그리고는 입술이 벌어졌다. 그가 뭔가 말하려는 듯 보였기에 나는 재빨리 귀를 갖다 댔다.
  “…아몬….”
  “뭐?”
  “에디!” 뒤에서 뒤뚱거리며 펫이 달려왔다.
  나는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붙이며 닥치라는 뜻을 전달했다. 순간 카일이 다시 중얼거렸지만 펫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너무나도 커서 듣지 못했다. 나는 살인 충동을 느끼며 카일의 몸을 흔들었다.
  “야! 뭐라고? 다시 말해봐, 어서!”
  다시 그의 뺨을 때렸다. 새빨개진 뺨 따위는 내가 신경 쓸 바 아니다. 카일의 눈이 점점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카일!” 나는 절망적인 마음에 소리 질렀다.
  “…아…몬…드.”
  그는 유언을 남기듯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곤 잠시 후 눈이 완전히 검은색으로 뒤덮였다. 차가운 감촉이 뺨에 느껴졌다. 빗방울이다. 나는 완전히 축 늘어진 카일을 조심스레 나무 밑에 눕히고 일어섰다.
  “이 새끼 뭐라고 그런 거야?” 내가 물었다.
  “아몬드라고 그런 거 같은데.” 어느새 숨을 가라앉힌 펫이 대답했다.
  “아몬드가 뭔데?”
  “먹는 거.”
  “그건 나도 알아, 돼지새꺄.” 나는 울컥했지만 참기로 했다.
  빗줄기가 하나 둘씩 늘어났다. 밤하늘을 덮은 구름의 양으로 봐선 적지 않은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아마….”
  펫이 자신 없이 말했다. 그건 좋은 징조다. 펫이 우물쭈물 꺼내는 얘기는 옳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를 재촉했다.
  “블랙 아몬드를 말하는 거 같아.”
  “그게 뭔데?”
  내가 묻자 펫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왠지 더러운 기분.
  “저번에 말해줬잖아. 인기 폭발이던 약 말야. 윌킨스가 구하려고 똥줄 태우던 그거.”
  “아하.”
  잠시 침묵, 그리고.
  “근데?” 다시 물었다.
  “근데 라니?”
  점차 빗줄기 거세지기 시작했다. 옷이 금세 젖어들었다.
  “그 약이 뭐 어쨌다고? 지금 약이 사람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기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니,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펫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는 발끝으로 애꿎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갑자기 그가 고개를 들더니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뭘 어쨌다고! 물어보길래 대답한 것뿐이잖아.”
  그가 어찌나 억울한 표정을 짓던지, 괜히 미안해졌다. 그때였다. 바지주머니 속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꺼냈다. 놀라운 일이다. 언제 충전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핸드폰에 아직 배터리가 남아있었을 줄이야.
  “여보세요.” 나는 빗줄기가 시끄러워 한쪽 귀를 막으며 말했다.
  “에디? 나야, 닐.”
  그는 우리 단골 펍의 주인이었다.
  “오우, 무사했어요, 닐?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그게 말야. 윌킨스를 발견했거든. 그래서 전화했어.”
  “아, 그래요? 그 병신은 코빼기도 안 비추고 뭐하고 있대요?”
  그러나 닐의 대답은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그 자식도군요.”
  “그래, 에디. 길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히 찾았어. 어떡할래? 그냥 가게에 눕혀둘까? 나는 좀 있으면 여길 벗어날 거야. 알다시피 마을 밖으로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거든. 얼마 안 있으면 언론 나부랭이들이랑 호기심 가득한 인종들이 물밀듯이 밀려들 거야. 그전에 후딱 도망쳐야지.”
  “알았어요, 닐. 데리러 갈 테니까 문은 잠그지 말고 가줘요. 그래줄 수 있죠?”
  “그럴게. 아, 가게 안에 남아있는 술은 내 선물이니까 마음대로 마셔. 어차피 비싼 것들은 이미 내가 챙겼거든.”
  “고마워요.” 나는 진심으로 웃었다. 어쩐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너도 빨리 도망쳐. 그럼 끊을게.”
  “행운을 빌어요, 닐.”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 위로 금세 빗방울들이 떨어졌다. 비는 생각만큼 거세진 않았지만 우리를 흠뻑 적시긴 충분했다. 펫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쓰레기 하나 회수하러 가자, 썅.”

  *       *       *

  우리의 관심사는 널브러져있는 윌킨스가 아니었다. 펫과 나는 펍에 들어가자마자 윌킨스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부터 꺼내 마셨다.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잡은 채 한 모금 들이키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기가 나를 감쌌다.
  “씨발, 죽이는데.”
  펫이 황홀한 말투로 말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젖은 옷을 벗어 말리고, 술 한 병을 금세 해치웠다. 펫은 재빨리 다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얌마. 멈춰.”
  “왜?” 펫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내 머리통을 박살 낼 기세였다.
  “여기서 더 마시다간 절대 멈출 수 없을 거야. 우선 저 병신을 데리고 집으로 가야잖아.”
  그러자 펫은 1등 당첨된 복권을 삥 뜯기는 사람 같은 얼굴로 술병을 내려놨다.
  “왜 그리 죽을상을 짓고 있어. 내가 이 새끼를 업을 테니까 너는 술이나 잔뜩 챙겨. 가져가서 마시면 되잖아.”
  다시 펫의 얼굴이 변했다. 그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괴성을 질러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젖은 옷을 턴 다음 다시 입었다. 옷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소름이 끼쳤다. 나는 펫과는 다른 이유로 괴성을 질렀다. 근데 저 병신은 내가 지 기분에 동조했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그러다가 갑작스레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는 흘끔흘끔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내가 물었다.
  “아는 사람이 저렇게 변한 걸 보니까 좀 그렇지? 모르는 사람들 보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야.”
  그가 턱으로 윌킨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문득 베키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어찌나 놀랐던지. 기억을 떨치려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머리카락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잔소리 말고 좀 도와줘. 이 새끼 완전히 축 쳐져서 너무 무거워,”
  펫이 다가와 윌킨스를 업는 걸 도왔다. 하지만 나는 3초도 못 버티고 신음소리와 함께 윌킨스를 내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뭔가 딱딱한 것이 내 등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야, 이 새끼 재킷 안주머니에 뭐 있나봐. 더럽게 아프네, 썅.”
  내가 등을 문지르는 동안 펫이 윌킨스의 재킷에서 은색 케이스를 하나 꺼냈다.
  “그게 뭐야?”
  “드럭 케이스. 윌킨스의 보물이지.”
  펫은 대답하며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정제된 알약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검정색….” 펫이 중얼거리더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에디. 아마 이게 바로 블랙 아몬드일 거야. 이렇게 생겼다고 들어본 기억이 있어. 그리고….”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
  “…나 말야. 뭔가 떠오른 게 있어.”
  하지만 그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나 역시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를 재촉했다. 어쩐지 펫의 입술이 떨리는 듯 보였다. 그것이 비단 비를 맞아서 만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희생자들은 전부 약을 하는 사람들이야. 정키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페스티발 기간에는 충분히 약을 즐길만한 그런 사람들.”
  “뭐?”
  “뒤집어 생각해보면 더 편하지. 너는 원래 약을 안 하고, 나는 끊었어. 또 우리가 누굴 봤지? 골목에서 마주친 노부부. 아무리 봐도 약을 할 것 같진 않은 인상이야. 그리고 닐. 그는 장사를 해야 되기 때문에 약을 안 한다고 언젠가 말했었잖아.”
  “그러니까 네 말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된 게 약, 아니 그중에서도 네 손에 들려있는 그 블랙 아몬드 때문이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진심이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내 입술도 떨리기 시작했다.
  “베키는? 걔도 그 약을 했다고? 라이벌의 작품인데?”
  “에디, 생각해봐. 베키는 자존심이 무지 강하단 말야. 자신의 회심작이 다른 것에 밀려 맥도 못 추고 있을 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겠어? 어디 얼마나 대단한 건지 체험이나 해보자, 라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그럴 것이다. 분명 그 자존심 덩어리는 분을 못 참으면서도 인기폭발이라는 약을 직접 먹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어떡하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펫이 물었다. 나는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간신히 한 마디 내뱉었다.
  “화장실 다녀올게.”
  내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펫은 두 알의 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야, 야, 야! 너 그걸 할 생각은 아니겠지?”
  내가 묻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에서 케이스를 떨어트렸다.
  “아니… 그저 궁금해서.” 그는 변명조로 말하며 케이스를 다시 주웠다.
  “궁금하다고?”
  “응. 도대체 어떤 물건이길래 사람들을 뿅 가게 만들더니, 그 다음엔 아주 맛이 가게 만든 건지.”
  “시끄러. 윌킨스나 데리고 빨리 집으로 가자.” 나는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에디.”
  내가 다시 윌킨스를 업으려고 몸을 일으킬 때 펫이 말했다. 나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왜, 라고 말했다.
  “이거 해보자.” 단호한 목소리였다.
  “뭐? 너 미쳤어? 사람들이 저렇게 된 게 그 약 때문일지도 모른다면서!”
  “아마 한 알로는 그 정도까지 이르진 않을 거야. 분명 계속 그 약을 먹어서겠지. 그 점에서 우린 다행이야. 어차피 두 알 밖에 없으니까 더 먹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거든. 어때? 나 사실 너무 궁금해 미치겠어.”
  “미친 새끼. 쳐먹으려면 너나 쳐먹어, 병신아. 말해두는데 네 그 코끼리만한 몸을 업는 건 불가능하니까 난 여기다 너를 버리고 갈 거야.”
  “…알았어. 그럼 나 혼자 할 테니 제발 지켜봐줘. 그럼 내 가설이 진짠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나는 당장이라도, 뻘소리를 해대는 저 주댕이에 주먹을 꽂은 다음,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린 후에 억지로라도 집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궁금한 것이다. 마을 내에서 가장 정신상태가 올바르다고 여겨지던, 그리고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정키의 대명사인 펫이 약을 끊게 만든 바로 그-도로시까지 저렇게 만든 약의 파워가.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분명 나는….  
  “알았어, 씨발.” 내가 말했다.
  “봐줄 거야, 에디?” 펫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아니, 나도 먹을 거야. 친구 혼자 사지로 내몰 순 없지. 그리고…”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나는 웃었다.
  “사실 좆나 궁금하잖아.”
  우리는 낄낄 거리며 약을 하나씩 손에 쥐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검은색인 약은, 또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리게 하는 힘을 지닌 것 같았다. 나는 약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쉽사리 입에 집어넣지 못했다. 마치 쓰디쓴 약을 먹어야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아니, 사실 고백하건데 내가 약을 하지 않게 된 건 어떤 기억 때문이다. 나는 그전까지만 해도 지독한 정키가 될 확률이 높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갓 13살이 넘었을 무렵 조잡하게 만들어진 약을 얻게 된 나는-그 약은 실험적으로 만들어져 아이들을 상대로 효능을 시험해보는 그런 종류의 물건이었다-내가 열렬히 좋아하던 여자애와 둘이서 하기로 했다. 우리는 주사기에 넣기 위해 약을 물에 섞어 가열하는 동안 서로를 마주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 순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커플이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지혈기를 이용해서 정맥을 팽창시킨 다음 망설임 없이 정맥에 주사바늘을 꽂았다. 그리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좋아하는 여자에 앞에서 똥을 질펀하게 싼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다시는 나와 인사도 나누지 않으려 했다.
  “에디?”
  나는 펫의 저음에 깜짝 놀라 저 밑에 가라앉혀 두었던 끔찍한 과거에서 벗어났다.
  “좋아…. 내가 셋을 세면 동시에 먹는 거야. 됐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펫은 굳은 결심을 한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씨발새끼. 약이라면 그저 좋아서.        
  “자, 간다. 각오해. 자, 셋이야. 난 셋을 셀 거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냐. 나는-”
  “에디.”
  “에이 씨발, 알았어, 개새꺄. 셋이다! 쳐먹자!”
  우리는 동시에 약을 삼켰다.

  눈을 감고 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 몸이 어디론가 스르르 떠내려  가는 느낌이다. 물은 아니다. 훨씬 황홀한 감촉이 나를 감싸 안는다. 누군가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손은 스멀스멀 다리 밑에서 기어 올라와 차가운, 그러나 따스한 느낌으로 나를 감싸 안는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내가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알고 싶다.
  눈을 뜬다. 천천히, 그리고 살며시. 그리고 나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내 앞엔 필경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건만, 놀랍기보다는 황홀경에 사로잡혀 웃음만이 남는다.
  내 앞엔 광활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투명 돛단배에 몸을 싣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운 포즈로 우주를 유영하고 있다. 내 가까이에 별은 없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어느 방향에서나 수많은 별의 무리가 보인다. 너무나도 많아서 태양같이 밝은, 그러나 훨씬 은은한 빛이 사방에서 나를 반긴다. 손을 뻗으면, 별무리를 한 움큼 손에 잡을 수만 있을 것 같다. 그것들을 잡고 감촉을 느낀 다음, 다시 우주에 확 뿌리고만 싶다. 그러면 별들은 새로운 위치에서,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나는 조심히 자세를 바꿔본다. 이제 자유형을 하듯이 흘러간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어디인들 상관없다. 아니, 이대로 영원히 흘러갔으면 좋겠다. 가끔 별들 사이로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영원히. 이 광활한 우주에, 나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모든 별들이 나의 친구이자 사랑이었다. 그들을 전부 감싸 안고 싶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상한 기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별들과 함께라면 홀로 우주를 유영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 노랫소리가 이끄는 방향으로 가길 원한다. 가녀린 목소리. 여자의 것인지, 남자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노랫소리는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천상의 목소리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내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노랫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제는 확신에 가깝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를 부르고 있다. 그는 외로워하고 있다. 자신의 노래를 들어줄 누군가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오, 슬퍼하지 마오. 홀로 우주를 방황하던 방랑자가 지금 그대에게 달려가고 있다오.
  나는 수영을 하듯 팔을 젓는다. 상쾌한 느낌이다. 한줄기 빛조차 파고들 여지가 없는 심연 깊숙한 곳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어느새 상쾌한 기분은 사라지고, 외로움만이 남는다. 어쩐지 노랫소리가 멀어지는 느낌이다. 안 돼. 안 돼. 제발.

  뺨에 눈물의 느낌이 남아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뺨을 닦았다. 몸과 마음이 경건해지는 기분. 세상에. 내게 신의 은총이 내린 걸까. 이 보잘 것 없는 내게.
  눈을 뜬다. 눈을 뜨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을 한다. 내가 있는 장소는 여전히 어둡고 침침한 펍 안이겠지. 광활한 우주가 아니라. 내 옆에는 뚱뚱한 친구가 있을 것이고,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흑인 친구도 있을 것이다. 상황은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으며 나는 다시는 그 우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어쩐지 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눈을 뜬다. 누군가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희미한 모습. 얼굴을 분간할 수 없는. 어느 정도 시력이 되돌아 왔지만 여전히 모르는 얼굴이다.
  “헤이, 일어났어?” 그가 묻는다. 전에 들어본 적 없는 걸걸한 목소리다.
  이제 그의 모습이 눈에 또렷이 돌아온다. 특이한 모습이다. 어중간한 피부색에, 다소 날카로운 귀.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그의 눈이다. 그의 눈은 희생자들의 것처럼 온통 검정색이었다. 희생자들이 깨어난 걸까?
  웃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파악하기 힘든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도 이상할 정도로 크고.
  “어때? 정신이 들어?”
  그의 끔찍한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골이 지끈거렸다.
  “당신… 누구야?” 내가 물었다.
  그는 이해 못 할 웃음소리를 내며 코트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블랙 아몬드였다. 나는 그 약을 보자마자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약을 만든 존재야. 어때, 바로 하나 더 할래?”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나를 말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느꼈다. 그건 나일수도, 아니면 나를 위해주는 그 누구의 목소리일수도 있었다. 내가 반응하지 않자 그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약… 뭔가 수상해. 대체 정체가 뭐야?”
  그는 대답 없이 웃기만 한다.
  “나도 소싯적에 약을 하긴 했지만 그런 느낌의 약은 듣도 보도 못했어. 그리고 넌 또 뭐야? 우리가 여깄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그는 이번엔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오, 하나도 이상할 것 없어. 이건 우주여행을 도와주는 물건일 뿐이야. 그건 허구가 이닌 진짜 우주라고. 너도 느꼈잖아?”
  “엿이나 드시지.”
  내 말에 그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실제로 굳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느낌엔 그래 보였다.
  “역시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답게 정신력이 강한데 그래. 남아있던 인간들은 모두 도망친지 오래거든.”
  “뭐?”
  나는 반사적으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펫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말을 이었다.
  “네 친구는 너보다 훨씬 먼저 깨어났어. 그리고 내가 권유하기도 전에 내 손에서 약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10알 넘게 삼켜버리더군.”
  욕이 나왔다. 하지만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소리는 신음소리에 가까웠다.
  “대체 뭐하는 새끼야. 그 빌어먹을 약은 뭐고.”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질문을 했다.
  “다시 묻지. 약 하나 더 할래?”
  “꺼져, 병신새꺄. 그리고… 네 목소리 좆나 짜증나.”
  그러자 그는 나를 열 받게라도 하려는 듯, 예의 그 엿 같은 목소리로 다시 키득거렸다.
  “훌륭해. 우리는 너 같은 인간이 필요해.” 한참을 웃고 나더니 그가 말했다.
  “우리?”
  그는 일어섰다. 서있는 모습을 보니 의외로 왜소한 체형이었다. 틀림없이 저 몸에는 너무 커다란 코트 안에 숨겨진 몸은 더더욱 볼품없을 것이다. 다시 골이 지끈거렸다.
  그는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  
  “그래, 우리. 인간과는 다른 존재. 그리고… 다른 별에서 온 존재지.”
  내 앞에 서있는 저 병신이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인간들 표현으로는 외계인이라고 하던가. 그게 바로 우리야. 이봐, 이건 진짜야. 진실만을 얘기하는 거라구.”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형편없는 농담이라 맞받아쳐주기 조차 민망했다. 아니,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이 지구를, 그리고 너희 인간들을 실험하고 있어. 아주 오래된 일이지. 그건 인간이 우리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해야 됐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래봤자, 완벽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오랜 연구 끝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냈어. 그게 바로 이 약이지.”
  “씨발,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냥 납치해가는 게 편하잖아.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랬던 적도 있어. 아니, 자주 그랬지. 덕분에 인간의 육체에 관한 연구는 완벽히 끝냈어. 그 다음으로 우리가 흥미를 느낀 건 인간의 영혼이야. 형편없는 육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운 대상이지. 우리는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끝에 인간의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해내는 방법을 찾아냈어. 이 약을 장기복용하게 되면… 네가 본 그대로 되는 거야. 영혼은 빠져나가고 빈껍데기만 남게 되는 거지.”
  “…영혼들은 다 어쨌는데?”
  그는 다시 킬킬거렸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손에 야구방망이라고 하나 들려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기원했다. 저 새끼 목소리가 너무 짜증나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묵사발을 만들어 주기 위해.  
  “너도 이미 경험했잖아? 그것들은 우주로 날아가. 그리고 우리가 정해놓은 장소로 흘러들어가게 되지. 노랫소리에 이끌려서.”
  다시금 노랫소리가 떠올랐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밀려오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봐, 친구. 이건 네가 생각하는 죽음 같은 게 아냐. 영혼은 살아있을 적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가는 거야. 우리의 연구를 위해 약간만 협조해주면 되는 거라고. 그리고 연구가 끝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알아? 응? 그다음엔 말야… 천국이 기다리고 있어!”
  천국. 저기 뻗어있는 멍청한 흑인친구가 그렇게나 찾던 천국. 은근히 화가 솟구쳤다. 그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지껄였다.
  “이 지구보다 월등히 고차원적인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고통도, 슬픔도, 괴로움도 없는 행복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너희가 그렇게 꿈꾸던 낙원 같은 곳에서.”  
  “입…닥쳐.”
  어쩐지 저 새끼의 말투가 구제불능 예수쟁이들을 연상시켜 짜증이 났다.
  “응?”
  “닥치라고.”
  몸이 떨렸다. 참을 수 없는 추위가 엄습했다. 금단증상? 아니, 이건 금단증상보다도 몇 배나 지독했다.
  그가 말했다. 차가운 말투였다.
  “뭐, 네가 관심 없다면 할 수 없지. 이곳에서 볼 일은 다 봤어. 나는 여길 떠날 거야. 더 많은 데이터를 얻으러 가야겠지. 물론 이 마을은 삽시간에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될 거야. 네가 계속 여기 남아있는다면 사람들이 너를 발견하겠지. 그럼 네 이름이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거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나를 발가벗겨놓고 남극 한복판에 떨어트려 놓은 것 같다. 온 몸이 격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오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누가나좀죽여줘씨발.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 황홀한 우주로 나아갈 수 있어.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야.”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빙하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구멍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나를 잡아 먹으려하고 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비명 지른다. 얼음바닥에 있는 대로 토하고, 몸부림친다.
  “어쩔 수 없군. 가장 훌륭한 샘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불량품이었어. 단 한 알에 맛이 가다니…. 그럼, 친구. 잘 있어.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어디든 훌륭한 여행이 되길 빌어.”
  거기서, 개새꺄. 나를 제 정상으로 돌려놓고 가. 하지만 내 입 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는다.
  그가 뒤를 돌아 나와 눈을 마주친다.
  “혹시 모르니 여기 약을 두고 가지. 맘 내키면 즐기라구. 내키면 말야.”
  그는 미소 지으며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들긴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영롱할 정도로 검은 빛을 띠고 있는 약 몇 알이 내 앞에 놓여있다. 나는 이를 꽉 깨문다.  
  빙하가 점점 크게 입을 벌린다. 아, 씨발. 이곳이 너무 추워 차라리 빙하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기로 했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다.
  
<끝>                

ro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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