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자유의 날개짓(하)

2007.01.17 16:4901.17


4.

“라이드, 네가 여긴 무슨 일로?”

구름탑의 도서관은 조용했다. 특히 지금처럼 전쟁이 난 시점에서는 붐빌 이유가 없었다. 용기사 보조일을 하는 틈틈이 정식 표식술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하는 리곤이야 자주 도서관에 들리지만, 책과는 거리가 먼 편인 용기사가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귀족 출신으로 용기사 대장인 레오폴트 정도나 가끔 도서관에 오는 정도였고, 놀기 좋아하는 라이드가 도서관에 오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했다. 그러니 리곤이 라이드를 보고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심심해서 책이나 보려구.”

리곤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라이드에게 보냈다. 라이드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글을 잘 읽지 못했다. 읽기는 읽는데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라, 남들은 십분이면 읽을 만한 분량을 더듬거리며 끙끙거려야 했다. 가만히 누워만 있으려니 얼마나 라이드가 심심했을까 안쓰럽기도 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놈 우습기도 했다.

“어떤 책을 보려는데?”

라이드는 리곤이 들고 있는 ‘고급 표식술 실기응용 100선’ 이라고 쓰여 있는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책을 한번 곁눈질하더니 오한이 이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이드는 소년답게 모험소설이나 영웅담이 주로 쓰여있는 책장으로 갔다. 한참동안이나 제목들을 들여다보던 라이드는 결국 리곤의 예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책을 뽑아들었다.

“용기사 리에루트라… 네가 뭐라도 책을 보는 게 다행이긴 하다만…”
“헷. 다른 건 어려워서.”
“글쎄. 아무튼 간에 오늘 내일은 푹 쉬고, 내일 모레는 좀 일어나서 몸을 풀어둬라.”
“아, 그럼 스핏 타도 될까?”
“안돼. 지금 성밖에 적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용을 띄울 수가 없어.”
“아, 그럼…?”
“그래. 사흘 후 출전이야.”

라이드는 약간 시무룩해졌지만, 곧 다시 활짝 웃었다. 출전이건 어쨌건 스핏을 탄다는 사실이 즐거운 것이다. 라이드는 경쾌한 걸음으로 책을 안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는 리곤의 심정은 착잡했다. 아직 견습이지만 리곤은 표식술사다. 설사 전쟁에서 진다 하더라도 귀한 표식술사는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물론 웬만큼 자리도 보장된다. 그러나 용기사의 경우는 다르다. 비록 용기사가 몹시 귀하고, 항복한다면 적도 회유하러 하겠지만, 그 전에 용기사들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야 한다.

열 여섯 살 어린 라이드도 바로 그런 용기사였다.





5.

라이드는 침대에서 뒹굴었다. 책은 고르고 골라 가장 재미있을 법한 걸 고른 거였지만 워낙에 읽는 속도가 느리다보니 흥미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무엇보다 라이드는 책에서 흥미를 느끼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 지겨워.”

마침내 용기사 리에루트라가 적국의 공주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피눈물을 흘리는 부분에 이르러 라이드는 책을 던져버렸다. 말하자면 그건 우스운 책이었다. 농기구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사람이 농사에 대한 책을 쓰면 농부는 비웃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용기사 리에루트라의 이야기는 진짜 용기사인 라이드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것 투성이었다.

“하나도 재미 없잖아. 다른 거나 빌려올까.”

라이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타박상과 충격에서 오는 근육의 결림 현상은 며칠 쉬는 동안 거의 다 나았기에 몸은 정상이나 다름없었다. 책을 집어들며 옆방의 무리카리에게나 놀러갈까 생각하던 라이드는 하마터면 책 속에서 떨어진 또 하나의 얇은 책을 놓칠 뻔 했다.

“어라?”

라이드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용기사 리에루트라의 이야기가 꽤 긴 이야기이고 두꺼운 책이기도 했지만 라이드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얇은 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이라기 보다는 종이를 여러장 겹쳐놓고 구멍을 뚫어 묶어놓은, 일종의 공책이었다.

보통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제목이 보이지 않는 공책의 오른쪽 구석에는 미려한 필체로 하나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스코트… 위더? 웨더? 이름인가?”

라이드는 그것을 펼쳤다. 직접 손으로 써 넣은 것이 분명한 글들이 종이 가득 빼곡해 라이드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렇잖아도 공부가 짧은 라이드에게 미려한 필기체는 읽기 고약한 암호문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무리 익숙치 않은 사람의 필기체라 하더라도 몇 번이나 반복되는 한 가지 단어만큼은 눈에 확 띄었다.

“스피리어트?!”


대륙력 520년 두 번째 달 1간 3일 날씨 맑음
나는 오늘 처음으로 내 용을 만났다. 표식술사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용과 감각을 공유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처음 보는 순간 알았다. 이 녀석과 나는 운명지어져 있다 라고. 내가 기라트 님을 처음 뵈었을때, 그분의 용 네버레이드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어떤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멋진 청룡을 보는 순간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을 느꼈다. 이 녀석과 앞으로 해나갈 모든 일들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 나는 이미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녀석의 이름은 스피리어트라고 지었다. 용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부터 나의 용의 이름은 스피리어트라고 정해놓고 있었다. 이 녀석의 날렵한 몸을 보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을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청룡은 용들 중 가장 빠르다고 하지 않는가? 돌풍만큼 잘 어울리는 이름도 없을 것이다.

대륙력 520년 두 번째 달 1간 4일 날씨 맑음
스피리어트 녀석은 내가 녀석을 좋아하는 것 만큼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와 함께 용기사가 된 잉글러는 자신의 용을 다루는데 애를 먹는 것 같다. 감각은 전해져 오는데 명령 내리기가 어렵다나?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스피리어트와 나는 몸이 닿는 순간 한 몸이 된 것 같은 기분인데 말이다.


그리고 등등등. 그 정도만 읽는 데도 라이드는 거의 땀이 흐를 정도의 고생을 했다. 스코트란 사람은 몹시 미려한 필체를 갖고 있었다. 필체가 아름답다는 것은 꽤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미끄러지는 듯 글을 흘려써도 획을 생략한 글자도 없었고 자로 댄 듯 반듯하게 열이 맞추어져 있고, 글씨의 크기와 모양도 매우 안정적이었다. 레오폴트 말고도 고등교육을 받은 용기사가 있었구나 하고 라이드는 놀랐지만 그것보다 놀란 것은 이것이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의 일기장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게 왜 여기에?”

라이드는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사실 용기사가 죽을 때 용이 살아남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용이 죽으면 용기사도 죽었고, 용기사가 죽으면 용도 죽었다. 물론 용기사가 용에 탑승하지 않고 죽었을 때는 용도 멀쩡하지만,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은 분명 ‘전사’ 했고, 때문에 시체를 수습할 수 없었기에 무덤도 없었다.

리곤도 무리카리도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 금기도 아니었고, 비밀도 아니었다. 다만 꺼림칙한 주제였다. 라이드도 일부러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에 대해 그리 캐물은 적이 없었다. 모든 용기사와 용의 죽음은 금기는 아니었으나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캐묻지 않는다고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 라이드는 마침내 스피리어트의 전 주인에 대해 알 수 있는 물건이 생겨 몹시 기뻐했다. 은근한 질투심도 생겼다. 자신은 스피리어트와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이드는 끙끙거리며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두 페이지 째를 읽다가 코를 골며 곯아떨어지기 직전까지, 그는 용기사 교본보다도 이 얇은 일기장에 더 많은 열성을 가지고 있었다.




6.

“무리카리이이이이!”

무리카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라이드의 비명을 아예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날고 있는 라이드의 목소리는 찢어지는 바람소리에 묻혀 라이드 자신조차도 듣지 못했으니까. 자신의 목이 비명으로 떨고 있는데 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아무리 외쳐도 허무로 돌아가 버린다.

라이드는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다. 스피리어트의 날개는 반쯤 접혀져 바람을 갈랐다. 무리카리와 다뭄은 세 마리의 용 사이에 끼어 있었다. 무리카리가 라이드의 비명을 들었더라도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세 마리 용의 사이에 끼어있는 다뭄이 몸을 비틀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무리한 일이였다. 무리카리는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용을 다루며 동시에 칼을 휘둘러 주변의 적들을 떨치려 했지만 적은 셋이었다.

하강은 무서운 느낌이었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공포를 들추어 내는 오싹함이 등골을 타고 흐르고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어느때보다도 크게 느껴진다. 그렇게 높이 날고 있었는데도 땅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대지가 그에게 다가왔다. 건기의 초원은 우울한 연두빛으로 메말라 있었다. 라이드는 날개를 펼쳤다. 스피리어트가 그의 의지를 따랐다.

날개에 바람이 묵직하게 안겨들고 스피리어트는 급격히 머리를 쳐들었다. 시야를 매운 대지가 갑자기 하늘로 바뀌었다. 스피리어트는 아름다운 각도로 대지를 스치며 다시금 하늘로 날아올랐다. 직각하강으로 얻은 속도는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 날개를 펄럭일 이유는 없었다. 안겨들고 부딪쳐오는 바람 사이로 빠져나가기 위해 살짝 비틀 뿐이었다. 그렇게 최고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어도, 무리카리와 그의 사이는 너무 멀었다.

으뜨득. 파공성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폐를 쥐어짜 내뱉는 자신의 고함조차 들리지 않지만 라이드의 눈에 생생히 들어오는 그 광경에 라이드는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했다. 검은 천조각 같은 것이 다뭄에게서 떨어져나왔다. 무자비하게 뜯겨진 날개는 낙엽처럼 팔랑거리며 저편으로 떨어져 나갔다. 날개보다 더 무거운 다뭄의 본체는 바람을 타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말라붙은 풀들이 짓뭉개지고 뿌연 먼지구름이 다뭄의 주위로 피어올랐다. 라이드는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다시금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용의 감각으로 가득찬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솟구쳐 들어왔다.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었다.

다뭄의 날개를 물어뜯어낸 적룡의 용기사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는 스피리어트를 발견한 듯 수신호를 보냈다. 세 마리의 용이 세 방향으로 갈라졌다. 날개를 잃은 용기사의 숨통을 끊느니 라이드의 돌격을 피하는 게 낫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날개를 잃은 용은 죽은 용이었으니까. 스피리어트는 다뭄의 위를 스치며 몸을 비틀었다. 이미 속도를 얻은 스피리어트와 라이드를 뿌리치는 것을 불가능했다. 셋 으로 나뉠 때 오른쪽으로 갔던 적룡을 쫓으며 스피리어트 역시 오른쪽으로 호선을 그렸다.

거의 속도를 잃은 체 정지했던 세 용기사들은 다시 속도를 얻으며 라이드와 스피리어트를 포위하고 싶을 것이었다. 무리카리와 다뭄이 당했던 것처럼 양 옆에서 달라붙어 움직임을 막고 위에서부터 찍어누르고 싶을 것이었다. 그들이 일정 비행 속도에 도달하기 전에 잡아야 했다. 그리고 스피리어트는 그럴 수 있을 만큼 빨랐다.

스피리어트의 위에 바짝 엎드린 듯한 자세로 라이드는 양 손 모두 고삐를 놓았다. 격렬한 전투 비행 중에는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고삐 없이도 스피리어트는 그의 모든 의지를 따르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안장 옆의 랜스를 꺼내들고, 왼손은 안장 뒤를 더듬어 짧은 창을 꺼내들었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날고 있는지 무기를 꺼내 들고 벌린 양 팔을 바윗덩이 같은 바람이 내리눌렀다.

스피리어트는 단숨에 상대에게 따라붙었다. 적룡은 오른쪽으로 호선을 그리며 날다 갑작스레 왼편으로 회피기동을 시도했다. 적룡에 비해 라이드는 무리다 싶을 정도로 속도를 올리고 있었기에 그런 각도로 쫓아갈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스피리어트에게 다른 명령을 전달했다.

스피리어트는 더더욱 오른쪽으로 돌았다. 펼쳐진 날개 밑으로 무리다 싶을 정도의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용의 강인한 날개는 그 격랑을 타넘고 끝끝내 라이드 자신이 놀랄 정도로 작디 작은 원을 그리는 선회기동을 성공시켰다. 왼쪽으로 피했던 용기사는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스피리어트의 속도가 실린 투창이 적룡의 날갯죽지를 스쳤다. 두 번째 투창은 던질 필요도 없었다. 라이드는 적룡의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며 투창을 놓아버렸다. 투창은 갑옷이 없는 용기사의 등판을 꿰뚫었다.

용의 넓은 시야가 두 개의 적을 포착했다. 하나는 라이드와 같은 고도에서 측면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고 하나는 라이드보다 높은 고도에서 . 적룡을 쫓는 사이 속도를 올린 듯 쇄도해오는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같은 고도에서 돌진해오는 것은 은룡이었다. 상대의 속도가 더 붙기 전에 라이드는 결판을 내고 싶었다. 심장은 계속된 고속비행으로 부족해진 산소를 달라며 헐떡거렸다.

왼손의 투창을 자신보다 높은 고도의 용에게 던져낸 라이드는 곧바로 선회기동에 들어갔다. 완만한 반원을 그리며 선회하자 상대 은룡은 지척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찰나에 라이드는 오른팔을 내뻗었다. 랜스 격돌은 찰나의 싸움이었다. 누가 정확한 순간에 정확히 랜스를 갖다 대는가. 가공할 속도로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용기사들에게 내뻗는 힘은 무의미했다. 두 개의 랜스가 교차했다. 라이드의 것은 은빛 비늘을 가르고 용의 옆구리를 꿰뚫었고 상대의 것은 스피리어트의 비늘만을 긁어내며 튕겨나갔다.

랜스가 박히는 순간 미처 손을 놓지 못한 라이드가 뒤로 튕겨났다. 하늘이 눈에 들어오고, 스피리어트의 감각과 그의 눈이 받아들이는 시야의 괴리가 또다시 두통을 일으켰다. 부서질 것 같은 허리로 몸을 다시 일으켰다. 적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드는 뒤를 곁눈질했다. 과연, 또 하나의 적이 뒤에 있었다.

은룡과의 격돌 순간에 스피리어트의 속도를 늦추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라이드가 원하는 타이밍을 잡아내었지만 대신 뒤를 허용한 것이다. 상대를 떨치기 위해 라이드는 한 차례 회피기동을 시도했지만 상대는 문제없이 그를 따라잡았다.

상대도 청룡이었다. 이미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 그의 추격을 단순한 속도만으로 떨치기는 어려워 보였다. 스피리어트의 뒷다리에 무언가가 날아와 박혔다. 겨우 비늘을 뚫고 겉가죽에 박히는 수준이었지만 그 순간의 고통은 인간인 라이드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뒤의 상대는 망설임 없이 두 번째 투창을 내던졌다. 투창은 라이드의 종아리를 긁었다. 바지가 찢겨지고 피가 튀었다. 라이드는 오른팔로 칼을 꺼내려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깨가 탈구된 모양이었다. 라이드는 왼손으로 칼을 뽑아들었다. 라이드와 스피리어트가 속도를 올리면 상대도 속도를 올렸고 선회하면 따라붙었다. 피할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야 했다.

라이드는 날개를 힘껏 펼쳐내었다. 한꺼번에 안겨드는 벅찬 바람의 힘에 스피리어트는 벽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우뚝 멈추어서며 몸을 뒤로 비틀었다. 세상이 뒤집히고, 라이드는 칼을 휘둘렀다. 언제나 그렇듯 많은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추격해오는 상대의 속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용의 비늘을 가르고 들어갈 수 있도록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용기사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미처 던져내지 못한 투창이 용기사의 손에서 떨어졌다.

피분수가 바람을 적셨다. 푸른 용은 천천히 날개짓하며 바람 속을 유영했다. 창공에 있던 상대 용기사들이 물러서기 시작하자 대지에서의 전투도 멈췄다. 메마른 들판을 적시던 피분수는 그제서야 멈추었다.




7.

스피리어트는 부드럽게 땅에 내려섰고, 라이드는 안장에서 튕겨나오기라도 하듯 뛰어내렸다. 착륙도 하기 전부터 안장에 묶인 허리의 벨트를 끌러내고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카리!”

라이드가 달려갔을 때 이미 다른 용기사들도 무리카리의 주변으로 모이고 있는 터였다. 리곤과 의무반이 무리카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상태는 처참했다.

추락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기라도 하듯 풀이 짓뭉개진 흔적이 길게 나 있고 용의 피가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다뭄의 검은 거체는 그 모든 흔적들의 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그 몸은 온통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용의 발톱이 훑어낸 자국, 칼로 베인 상처, 여기저기 박힌 투창, 오른쪽 뒷다리를 완전히 관통하고 있는 랜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처참한 것은 오른쪽 날개의 부재였다.

다뭄의 바로 곁에서는 리곤이 무리카리를 부축하고 있었다. 무리카리도 상처투성이었다. 의무대원들이 그의 곁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무리카리의 몸은 붕대가 감기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감은 붕대도 어릿한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라이드, 잘 했다. 너 혼자서 셋을 물리쳤어.”
“… 무리카리는 어떻게 된 거죠?”
“지난 번 전투에서 네가 한명, 무리카리가 한명, 이렇게 둘이나 되는 용기사를 쓰러트렸지. 저들에겐 엄청난 손실이었다. 반면 우리편은 너와 무리카리가 부상을 입었지만 전장에 복귀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 12대 9가 되버린 하늘의 싸움은 우리가 얼마든지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저들은 모험을 하는 수 밖에 없었고, 각개격파를 시도한 거다. 속도가 느린 편인 무리카리와 다뭄은 좋은 목표였지…. 하지만 네가 셋을 쓰러트렸으니 이젠 11대 6이다. 하늘은 완전히 우리가 장악했어.”
“대장. 제가 물은 것은 그게 아닙니다.”

라이드는 세차게 도리질쳤다.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그런 대답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었다. 무리카리의 상세가 어떤가를 물은 것이었다. 전략적인 원인도 전술적인 결과도 알고 싶지 않았다.

“라이드. 가만히 있어라.”
“잠깐… 무리카리는 뭘 하려는 겁니까?”
“… 다뭄을 보내주려는 거지.”

라이드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다뭄은 죽지 않아요! 저 정도 상처로는, 아직 죽지 않아요. 치료하면 낫는다고요!”
“그러나 다시는 날 수 없어.”
“표식으로, 표식으로 이어붙이면 되잖아요? 내가 가서 날개를 주워오겠어요.”
“모든 용은 이미 길들임의 표식을 갖고 있지. 하나의 생명체에는 하나의 표식만이 허락된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한 용이라도 한 개 이상의 표식은 감당하지 못해.”

무리카리가 일어났다. 비틀거리면서도 리곤의 부축을 거절한 그는 옆의 용기사가 건네주는 랜스를 받아들었다. 라이드는 새삼스럽게 쏟아지고 있는 햇빛을 느꼈다. 햇빛은 창끝에서 부서지고 용의 검은 비늘에서 부딪쳐 반짝였다.

“그만둬요! 무리카리!”

라이드가 몸부림쳤지만 레오폴트의 억센 손은 라이드의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은 비행 중이 아니었는데, 분명히 라이드의 목소리가 가 닿았을 텐데, 무리카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힘겹게 랜스를 치켜올리며 다뭄의 앞에 섰다. 검은 용은 기운 없이 목을 쳐들었다. 다뭄의 노란 눈동자가 무리카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안, 다뭄.”

무리카리는 창을 놓쳤다. 그는 애써 그것을 다시 주워올렸다. 부상투성이의 몸으로는 랜스를 똑바로 쥐는 것조차 몹시 어려웠다. 라이드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나왔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도 돼.”
“아냐, 리곤. 이건 내가 해야 해.”

무리카리는 제멋대로 창을 놓치려는 손에 마지막 힘을 몰아넣었다. 손이, 팔이, 그리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뭄은 그 모든 과정을 조용히 기다렸다. 무리카리는 아직 각성제의 기운이 남아 있을 때 일을 끝마치려 애썼다. 각성제의 기운이 가시면, 너무 슬퍼 일을 끝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가 끝내지 않으면 다른 자의 손에 맡겨야 하는데, 그것만은 다뭄도 원치 않을 거라 생각했다.

“라이드, 잘 봐둬라.”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방법은 없었다. 옴쭉달싹 못하게 라이드를 붙잡아 놓은 체, 레오폴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것이 용기사의 방식이다.”

무리카리의 단련된 근육이 부풀어올랐다. 흰 붕대의 여기저기가 삽시간에 짙은 붉은 색으로 물들어갔지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창을 끌어당겼다. 기합은 없었다. 무리카리는 신음소리조차 없이 창을 꽂아넣었다. 단숨에, 고통 없이. 그것이 목적이었던 창은 여지없이 검은 비늘을 꿰뚫고 들어갔다. 목 바로 밑, 랜스를 찔러넣어 닿을 수 있는 용의 심장.

다뭄의 거체가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맥없이 허물어졌다. 무리카리의 몸이 함께 허물어졌다. 라이드는 무릎꿇었다. 스피리어트의 머리가 그를 부드럽게 밀쳤지만 라이드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8.

대륙력 522년 다섯 번째 달 2간 7일 날씨 비가 많이 옴
나는 스피리어트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말을 처음 리곤에게 했을 때, 리곤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에게 열쇠를 달라고 했고, 리곤은 안된다고 했다. 대체 왜?! 작년 그가 막 용기사 보조가 되었을 때, 쩔쩔매던 그를 내가 그토록이나 도와주었는데도 그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나를 설득하려 했다. 웃기는 일이다. 내가 스피리어트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열쇠를 줄 수 없다면 뺏으면 그만이다. 리곤이 도서관에 갈 때를 노려야지.


대륙력 522년 다섯 번째 달 2간 8일 날씨 맑음

세상에, 리곤 녀석! 내가 어제 그 말을 꺼낸 이후로 나를 몹시 피하더니, 주변에도 말을 떠벌린 모양이었다. 대장님이 날 찾아왔었다! 대장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을 놓아줄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렸지만 대장님은 몇번이나 내개 당부했다.


대륙력 522년 다섯 번째 달 2간 11일 날씨 맑음

사흘 후 전투에 출전하기로 날짜가 잡혔다. 그렇다면 내일 모레 떠나면 된다. 전투를 하루 앞두고 추격해 올 수 는 없을 것이다. 전우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스피리어트를 죽음의 위험에 빠트릴 수 없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인간의 전쟁에 용을 끌어들여 쓰는 건 잘못되었다. 용은 자유롭게, 용답게 살아야 한다. 표식술 같은 것으로 억눌러 놓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스피리어트를 창공으로 날려보낼 것이다. 원래 녀석이 살던 그곳으로.

일기장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라이드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떨어져 종이를 적시고 잉크를 번지게 만들었지만 라이드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소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깊은 어둠 너머로 바람탑이 서 있었다.

무리카리가 다뭄을 죽였을 때부터 라이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곳은 감옥이었다. 사슬로 얽어매인 운명을 끊어내고 싶었다. 라이드는 울면서 일기장을 덮었다. 스코트 웨더의 일기는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라이드를 다잡아 일으켰다. 라이드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생각했다.

“스코트는 죽었어.”

소리내어 중얼거리자 그 사실은 무섭도록 빠르게 심장을 옥죄어왔다. 스코트 웨더는 죽었다. 왜? 스피리어트는 두 번째 길들임의 표식을 박은 체로 돌아와 있다. 어떻게? 두 번째 길들임의 표식을 박았다는 것은 첫 번째 길들임의 표식을 누군가 떼어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하겠어.”

스코트는 죽었다. 이 일을 시도하다가. 왜? 어떻게? 자신도 그렇게 죽을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은 두려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시도해야 했다. 스피리어트를 언제까지 쇠사슬로 얽어맬 수는 없었다. 스피리어트를 전장으로 내몰 수 없었다.

라이드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9.

“라이드. 내 말을 들어. 그 칼 놓고 물러서.”
“열쇠를 줘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찌르겠어.”

리곤이 고개를 젓자 라이드는 칼을 쓱 내밀었다. 용의 비늘도 베는 칼날이었다. 사람의 피부는 쉽사리 갈라졌다. 목에서 피가 흐르자 리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라이드는 그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자신을 아껴주었던 사람. 자신을 챙겨주었던 사람.

“라이드…”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열쇠를 줘요.”

리곤의 떨리는 손이 품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철로 만든 열쇠 하나가 손에 들려 있었다. 라이드는 왼손으로 그 열쇠를 잡아챘다.

“라이드, 그만둬. 이건 잘못된 일이야.”
“한 마디만 더하면 정말로 찌르겠어요.”

라이드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런 긴장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간 정신이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싸늘한 칼날은 이미 피의 맛을 보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찔러버리면? 아니, 깊게 찌를 것도 없었다. 가볍게 옆으로 긋는 것 만으로도 리곤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라이드는 목숨의 가벼움에 아찔함을 느꼈다. 현기증에 칼을 놓칠 것 같았다.

“미안해요, 리곤. 하지만 이럴 수 밖에 없어요. 스코트의 일기를 봤어요. 스코트는 스핏을 놓아주고 싶어했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언젠가 스피리어트는 싸우다 죽겠죠. 내가 죽인 모든 용기사들과 내가 죽인 모든 용들처럼, 스피리어트와 나도 죽겠죠. 아니면 무리카리처럼 내가 스피리어트를 찔러 죽여야 할 거에요.”

리곤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칼끝이 목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오자 리곤은 숨도 쉬지 못했다.

“차라리 당신을 죽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스피리어트를 죽일 수는 없어요.”

그렇게 말한 라이드는,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곤에게 한 알의 약을 건내었다. 용기사들이 먹는 각성제에는 심각하지는 않지만 몇가지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각성제를 먹은 바로 다음날 찾아오는 불면증이었다. 라이드가 리곤에게 준 약은, 그래서 모든 용기사들이 조금씩 지니고 있는 수면제였다.

“먹어요.”

칼끝이 목에 닿아 있을 때, 리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라이드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을 가져왔다. 리곤은 아무 말도 없이 수면제를 삼켰다. 오분이 지나지 않아 리곤은 쓰러졌다. 그가 잠든 척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라이드는 리곤의 방을 나섰다.

바람탑까지의 20분 거리를 라이드는 한번도 쉬지 않고 내리 달렸다. 어제 탈구되었던 어깨는 제자리로 끼워넣었지만 한번 탈구된 어깨는 또 탈구될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받았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던가. 그러나 라이드는 달렸다.

“스핏!”

용이 눈을 번쩍 떴다. 어둠속에서 샛노란 두 개의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용이 옅은 숨을 내쉬우며 반가움을 표했다. 라이드는 스피리어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스피리어트의 반대편, 다뭄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또다시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가자, 스피리어트.”

스피리어트가 날개를 펼칠 때, 하늘의 저편이 장밋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새벽의 색은 아름다웠다. 짙은 남청색과 옅은 남청색의 하늘, 그리고 부드러운 장밋빛의 하늘이 켜켜이 쌓인 여명을 향해 라이드는 날아갔다.



10.

그들은 부드러운 초원 위에 내려앉았다. 얼마나 날아왔을까? 햇빛이 따가웠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따가웠다. 라이드는 눈물을 훔쳐내었다. 비행은 그렇게도 아름다웠고 그렇게도 즐거웠건만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라이드는 스피리어트의 목덜미를 쓰다듬고는 내려왔다.

푸른 용은 자신의 주인을 가만히 기다렸다. 라이드는 안장을 풀어내었고 고삐를 풀러내었다. 랜스 걸이까지 떼어내자 스피리어트는 완벽하게 자유의 몸으로 돌아갔다. 딱 한 가지만을 빼고는. 라이드는 스피리어트의 위로 기어올라가 은으로 된 표식을 움켜쥐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몇 번이나 손으로 그것을 잡아당겼지만 그것을 손으로 잡아뺀다는 것은 무리였다. 라이드는 칼을 들어 표식과 비늘의 틈에 칼날을 밀어넣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칼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미안, 스핏. 좀 아플거야.”

칼날이 비늘을 후벼내고 들어가자 격렬한 고통이 라이드를 엄습했다. 한 번도, 각성제를 먹고 전투에 나설 때조차도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의 교감, 그것이 라이드를 뒤흔들었다. 너무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머릿속을 메아리치는 외침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으며 동시에 엄청나게 힘이 드는 작업이었다. 아무리 예리한 날이라 하더라도 라이드의 완력만으로 용의 겉가죽만을 얇게 도려낸다는 것은 어려웠다. 그 작업은 아주 지리한 시간이 흘렀으며 라이드는 심장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는 끝가지 칼을 놓지 않았으며 마침내 표식을 도려내었다. 그 모든 작업의 과정 동안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빛을 내뿜던 표식이 갑작스레 발광을 멈추었다. 라이드는 한 손으로 그 표식을 쥐고 굴러떨어졌다.

부드러운 풀이 가득 자라는 초원이었지만 역시 아팠다. 하지만 떨어진 아픔보다 더 심한 아픔이 그의 전신을 유린하고 있었다. 용이 눈을 한번 깜박였다. 그러더니 날개를 한번 펄럭였다. 길고 유연한 목을 뻗어 한차례 주위를 훑어보았다.

“날아, 스핏.”

눈물을 흘리며 라이드는 속삭였다. 용이 갑자기 날개를 펼쳤고, 그대로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쳤다. 라이드는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용은 자유로웠다. 용은 아름다웠다. 용의 비행은 진정으로 자유로웠다. 안장도, 용기사도 없기에 용은 용기사의 안정적인 자세를 위해 목을 약간 숙일 필요도 없었다.

용은 새파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어떤 대단한 용기사가 교감하고 있을 때보다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그 강한 날개를 마음껏 펼치고 바람을 타넘었다. 용은 무한한 자유를 향해 날아갔다. 푸르디 푸른 창공, 끝없이 쏟아지는 햇빛과 바람의 노래가 용의 비행을 찬양했다.

라이드는 눈물흘렸다. 간신히 칼에 기대어 일어난 그는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용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용은 자유를 향해 날았고 과거의 굴레를 돌아보지 않았다. 은으로 만든 표식은 그의 발치에 떨어져 다른 용구들과 함께 뒹굴었다. 끝없는 창공으로 날아가는 용에게 라이드는 작별의 인사를 했다. 자유, 날개, 스피리어트. 라이드는 울었고 또 웃었다. 눈물이 끊임없이 솟는데도 미칠 듯이 유쾌한 기분이었다.

한때 스피리어트라고 불렸던 푸른 용은 미려한 곡선을 그리며 선회했다. 바람을 뚫지도, 바람을 타지도 않고 바람 그 자체가 되어 창공을 유영하는 용의 사냥 비행은 산들바람처럼 부드럽다가도 벼락처럼 날카로웠다.

스피리어트의 선회는 라이드를 놀라게 했다. 용은 되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되돌아오지 않았다. 스피리어트는 거기에 없었고, 한 마리 푸른 용만이 있었다. 푸른 용이 포효했다. 길들여진 용은 포효하지 않았고, 야생의 용만이 포효했다. 용의 포효가 창공을 뒤흔들었다. 소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용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11.

‘너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없었던 것은 네가 너무 순수했기 때문이었어. 그래, 라이드. 너는 너무 순수했다. 너무 순수했기에 그만큼의 교감을 이끌어 낸 것이겠지. 네가 진실을 알았다면 그 교감은 끝장났겠지. 우리는 너같이 뛰어난 용기사를 잃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진실을 숨겼어. 아아, 라이드. 너는 왜 그렇게 순수했을까? 한 번의 의심도 하지 않았지. 마치 스코트가 그랬던 것처럼.

용과 용기사는 교감하지 않아. 용은 길들임의 표식에 의해 강제당하고, 용기사는 단지 표식과 교감해. 어떤 용도 길들여질 수 없어. 용을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생명력을 이용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내는 우리 표식술사들의 표식 뿐이지. 너는 표식과의 교감이 너무 뛰어났고, 너의 의지는, 심지어 무의식중에 생각한 것 마저도 모두 용에게 전해졌어. 마치 용이 너를 정말로 친근해 하는 것처럼 다가오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너의 의지일 뿐이고, 네가 용을 쓰다듬을 때 용이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감는 것조차 사실은 네가 용에게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진실을 너에게 말할 수 없었어.

우리는 너무 욕심을 부렸던 거야. 이미 한번 스코트를 잃었으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너를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스피리어트에 무슨 저주라도 씌인 걸까? 우리는 이제 그 용을 다시 쫓지 않을 거야. 서식처를 아는 용을 생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만, 그래, 상부도 두 명이나 되는 용기사를 잡아먹은 용을 다시 포획할 생각은 없는 듯 해.

너는 스피리어트에게 자유를 주었어. 축하해, 라이드. 너의 목숨은 사라졌지만, 그게 네가 생각한 스피리어트였을지, 그것은 의문이지만, 그래도 용은 자유를 얻었으니까.’

리곤은 오래도록 라이드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핏자국과 용구들과 저 만치 떨어져 있던 소년의 팔 하나 뿐이었다. 어쨌든 하나도 남김 없이 용에게 삼켜진 스코트보다는 나았다. 유체가 있었으니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너도 자유를 얻은 걸까, 라이드?’

리곤은 울지 않았다.
댓글 2
  • No Profile
    귀우혁 07.01.17 23:31 댓글 수정 삭제
    화룡연참 : →↘↓→ LP+RK
    재밌는 이야기의 연속기로 상대방 플레이어의 HP를 4단계에 걸쳐 99%깎는다. SP포인트 3개 소모...
  • No Profile
    화룡 07.01.18 05:00 댓글 수정 삭제
    옛날에 써둔 것일 뿐이니까... 연속해서 올리기가 뭐해서 다른 분들이 작품 올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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