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장 흔한 방법대로, 내 이름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그것도 이미 의미없어진 것이지만.

  내 이름은 플라치.

-였다.

  이 기억의 <시작>은, 텔라 콜로니이다.

  나는 그 때 아폴로 연방군 소속의 군인이었다.





  텔라 콜로니는 휴양시설로 특화하여 개발된 자연 재현형 콜로니였고, 그런 만큼 위기상황에서는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반군 ― 연방에서 부를 때. 그들은 자칭하기를 니케 동맹군이라 했다 ― 세력권에서도 오래 전에 낙오되었고 연방군 입장에서도 손댈 만한 전략적 메리트가 없어 버려지다시피 한 지 오래된 곳이었다. 물론 그 곳에도 사람은 산다. 하지만 행정은 반란 ― 이것도 연방에서 부르는 대로이고, 상대편에서는 부르기를 독립전쟁이라 한다 ― 이 시작된 초기에 정부가 빠져나가면서 이미 마비 상태에 이르렀고, 텔라 콜로니에서 결성된 자치정부도 초기에 연방군의 진압을 버티지 못해 무너지면서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텔라 콜로니는 무정부 상태였기에 다른 콜로니와 연방과의 공식적인 무역 및 지원도 끊어졌다. 돈이 없어서든 빽이 없어서든 개전 초기에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 텔라 콜로니는 연방과 동맹 양쪽에서 버려졌다.

  그 해에 들어, 본격적으로 동맹을 외곽에서부터 잡죄기로 결정한 연방이 텔라 콜로니를 재점령하고 연방군을 진주시킬 때까지, 텔라 콜로니의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 때 텔라 콜로니에 처음 진주한 2개 사단에 소속해 있었다.

  옛날 지구의 어느 시인이 전쟁을 겪으며 읊기를, <나라는 깨어지고 산하만 남았네, 성에 봄이 와도 초목만 우거졌네(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라고 하였다. 텔라 콜로니의 인상은 그랬다. 애초부터 자연 재현형으로 건설된 콜로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는 곳마다 보이는 것은 헐벗은 산과 들뿐이었고 뭔가 산업의 기반이 될 만한 것은 부서진 폐허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이니 동맹과 연방 양측에서 아낌없이 포기할 만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황무한 산야 이곳저곳에서 두더지나 산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반쯤은 허허벌판이라 불러도 무방한 곳에 연방군이 주둔기지를 건설하고 군정을 실시하자 그들은 세 가지 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식량과 의약품의 확보. 둘째는 텔라 콜로니로부터의 탈출. 셋째는 어떻게 결성되었는지 모를 동맹군의 게릴라로서 제3전선의 확대. 그 결과로서 당연히, 나를 비롯한 연방군 병사들에게 텔라 콜로니 거주민은 셋 중 하나였다. 귀찮은 거지떼. 더 귀찮은 똥파리. 즉시 쏴 죽여야 할 게릴라.

  첫째 경우에 대해서는 연방군의 방침상 최대한 선의를 베풀어야 했고, 둘째 경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절차와 인정을 따르면 합법의 범주 안으로 끌어넣을 수도 있었고, 셋째 경우에 대해서는 물론 사후 보고 한 마디로 충분한 즉결처분이었다. 문제는, 상대방이 그 셋 중 어디에 속하는지 전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둔 당시 모든 연방군 병사들은 한 가지 행동 지침을 정하고 있었다. 일단 셋째 경우로 간주하고, 차후에 상태를 보아 가며 첫째로 돌린다. 둘째로 승격시키는지 아닌지는 다시 상황을 살펴서 정한다. 우리는 상대가 여자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간에 일단 이 행동지침을 적용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숨을 건진 녀석의 숫자가, 셋째 경우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첫째 경우를 적용하다가 목숨을 잃은 녀석에 비하면 몇 곱으로 많았으니까.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텔라 콜로니에 대한 당시 연방군의 군정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의미도 된다.

  나는 그런 상태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전쟁 속 무정부 상태의 텔라 콜로니에도 어린이는 있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았다. 버릇없기로는 원숭이와 맞먹었고 끈질기기로는 하이에나였고 위험하기로는 악어였다. 연방군 병사들의 주머니 속에는 항상 군표와 초콜릿 바와 사탕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 구걸하지 않으면 도둑질과 날치기와 소매치기를 일삼았다. 그것뿐이라면 전쟁시 어린이의 생존법이라고 참을 수 있었겠지만 그 중에도 동맹군의 게릴라가 끼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순진한 표정으로 다가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군복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초콜렛"이라고 중얼거리던 계집아이가 어느 순간 그 바짓가랑이 안에 초소형 폭탄을 까넣고 달아나는 수도 있었다. 천사 같은 얼굴의 사내아이에게 구두를 닦게 했더니 그 구두 안에 수류탄을 넣고 가져오는 일도 있었다. 물론 전체에 대한 비율로는 사소했지만 그 심리적인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성질 나쁜 병사들은 어린이라면 어른보다 더 질색했다. 그들이 신조로 삼는 말이 있다. "전쟁터에 어린애 같은 건 없어, 새끼 게릴라가 있을 뿐이야."

  나도 그들의 지침에 따라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율을 만났을 때 나는 그들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텔라 콜로니에서 비번이란 근무중과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그 곳에서는 즐길 거리가 없었다. 연방군 주둔기지를 중심으로 급속히 형성된 명색만 시가지로 나가면 급조된 술집과 어설픈 매춘부가 있었지만 그 수준은 배급품보다 높지 않았다. 그래도 사제가 군용보다는 좋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이 있었고, 그 날 나도 그런 친구 중 한 명과 어울려 나갔다. 전술했다시피 어린이들이 따라왔지만 그 친구가 다 쫓아 버렸다. 길바닥과 허공으로 총을 쏘며 위협하자 아이들은 겁을 먹고 물러났지만, 율은 달랐다. 율은 애초부터, 손을 흔들며 "초콜렛", "사탕"을 소리치는 아이들 틈에 끼어 있지는 않았다. 전쟁터에서였다면 상을 주고픈 정도의 실력으로 길가 이런저런 엄폐물 뒤로 숨으며 우리를 따라오던 율은, 친구가 삐끼 하나와 흥정하느라고 멈춰선 틈을 노려 뛰어나와서, 친구가 마침 꺼내든 군표의 날치기를 시도했다. 옆에 서 있던 내가 율의 목덜미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율은 성공했을 것이다. 내 손아귀에 붙잡혀 새끼 고양이처럼 달랑 매달린 율은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악을 썼고, 친구는 율에게 눈에 불이 번쩍할 정도의 따귀를 먹이려고 했다. "-려고 했다"라고 한 것은 그 때 내가 말렸기 때문이다. 왜 말렸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한 손으로 율을 매달아 든 채 다른 손으로는 초콜릿 바를 꺼내 율에게 내밀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진짜 고양이 새끼처럼 독기가 판들거리는 눈으로 율은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내려놓자 율은 내 손에서 초콜렛 바를 낚아채고는 냉큼 달아났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였다. 텔라 콜로니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제대로 먹지 못해 나이보다 작고 빼빼 말랐는데도 불구하고, 율은 그 초콜렛을 그 자리에서 먹지 않았다. 심지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그냥 들고 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놓아 두고 율을 따라갔다.

  율은 그 명색만 시가지에서 제법 떨어진 산등성이까지 뛰어갔다. 내가 준 초콜렛 바는 포장도 뜯지 않고 움켜쥔 채. 그 산등성이에는 아마 꽤 오랫동안 ― 어쩌면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였는지도, 아니, 태어나기 이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 율에게 비와 밤이슬을 피할 지붕이 되어 주었을 은신처가 하나 있었다. 말이 은신처지 산짐승 굴이라고 해도 큰 차이는 없다. 율은 돌비탈을 기어올라 그 은신처로 들어갔다. 나뭇가지와 덩굴로 엮은 그 지붕 아래, 레가 있었다.

  레와 율은 쌍둥이였는데, 레는 다리가 불편해서 율처럼 뛰어다닐 수 없었다. 게다가 나중에 알았지만 레는 태어날 때부터 병들어 있었다. 더 나중에 알았지만, 레의 다리가 그렇게 된 것은 병든 몸을 이끌고 율과 함께 구걸을 다니다가 술취한 동맹군 병사로부터 심하게 매를 맞은 탓이었다. 혼자서는 걷지도, 그 은신처를 나서지도 못하는 레를 위해, 율은 매일 사방을 돌아다니며 온갖 수단으로 먹을 것을 구해 오고 있었다. 율은 가져온 초콜렛 바를 통째로 레에게 내밀었다. 자신은 한 입도 먹지 않고. 풀더미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포장을 벗긴 초콜렛 바를 핥는 레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런 레를 바라보는 율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웃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건대 그 시절의 나는 결코 다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은신처에서 율과 레 둘이 웃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결심했다. 내가 저 아이들을 돌보겠노라고.

  물론 쉽지는 않았다. 내가 결심하는 것과 아이들이 내 결심을 용납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레에게는 율밖에 없었고 율에게는 레를 제외한 온 세상이 적이었다. 나는 그 <세상>의 하나였다. 그런 만큼, 나에 대한 아이들의 경계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레는 애초부터 내가 관심 밖이었고 율은 내가 조금이라도 레에게 해를 끼칠까 봐 고슴도치처럼 신경을 곤두세웠다. 게다가 나는, 성공할 수 있었던 율의 날치기를 방해하고 율을 붙잡기까지 했던 자였다. 다리가 불편하여 마음대로 도망칠 수 없는 레를 지킬 생각에서였는지, 며칠 동안 율은 먹을 것을 찾으러 나오지도 않고 레와 함께 그 은신처에 들어박혀 있었다.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식량을 들고 찾아갔으나 자칫하면 되려 겁먹은 아이들이 달아날 것 같아서 섣불리 그 은신처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전직 사파리 사냥꾼이었다는 어느 동료의 조언을 받아, 은신처 부근 적당한 지점에 군용식 상자를 던져 놓고 돌아오기만 거듭했다. 그런 시간이 이어지면서 차차 아이들이 나의 존재에 길이 들었다고 할까, 내가 아이들의 신임을 얻었다고 할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군용식 상자가 조금씩 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율이 먹을 것을 구하러 나왔을 때 다시 마주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나는 비번일 때마다 그 명색만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 나에게 동료들은, 그렇게 어설프게 놀다가는 어느 순간 새끼 게릴라에게 목숨이 달아난다고 비아냥 비슷한 주의를 주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고, 그 기대대로 나는 다시 율을 만났다.

  율은 누군가에게 몹시 매를 맞은 얼굴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텔라 콜로니의 어린이로서는 일상다반사로, 그렇게 맞아 죽은 아이들의 시체는 발길에 채일 정도였다. 내가 다가가자 율은 까맣게 멍든 눈을 번득였지만 달아나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금 율에게 초콜렛 바를 내밀었고, 율은 그것을 받았지만 이번에도 먹지 않았다. 나는 한 개를 더 내밀었고, 율은 그것도 받았다. 그리고는, 쭈그려 앉아서 자신과 높이를 얼추 맞추고 있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린 동물을 쓰다듬듯, 내가 그 더부룩하고 지저분한 머리카락 위로 손을 얹었을 때, 율은 피하지 않았다. 율은 내 목말을 타고, 레가 기다리는 은신처로 돌아갔다. 그 비좁은 은신처의 눅눅한 풀더미 위에 셋이 옹송그리고 앉았을 때, 아이들은 내게 레와 율이라는 이름을 말해 주었다.

  미친 짓이라고 혀를 차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텔라 콜로니의 어린이를 후원하겠다는 내 신청은 행정서류 한 장으로 처리되었다. PKD에서 홍보자료로 삼는다며 나와 아이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아이들의 거처를 은신처에서 주둔기지의 군속 거주지로 옮기는 데는, 그 은신처를 달팽이의 껍질만큼이나 익숙하게 여기고 있던 아이들의 미련 때문에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에는 둘 모두 내 말을 들어 주었다. 레의 불편한 다리와 타고난 병도, 기지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기 시작하자 곧 호전되었다.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은, 저는 걸음으로나마 레가 처음으로 지팡이 없이 걸었던 그 날의 기억이다. 바로 그 날, 아이들은 자기들끼리만 짓던 그 세상에서 가장 예쁜 웃음을 내게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를, <플라치>가 아니라 <대디>라고 불렀다. 대디. 대디. 대디. 누가 아이들에게 그 말을 가르쳐 주었던 것인지, 누가 아이들에게 그 말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던 것인지, 누가 아이들에게 그 말로 부를 대상으로 나를 지목해 주었던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때도 알지 못했고 지금도 알지 못한다. 율이 레에게만, 레가 율에게만 짓던 그 너무나도 예쁜 웃음을 아이들은 그 날부터 나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대디>라고 불러 주었다. 나는 그 순간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불릴 수 있으리라고는, 나를 그렇게 부르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는…….

  그로부터 한동안, 나는 아이들의 <대디>일 수 있었다.

  니케 동맹이 아이들을 죽인 그 날까지는.

  또한 나는 <플라치>일 수 있었다.

  아폴로 연방이 아이들을 빼앗은 그 날까지는.

  그 당시, 나는 전쟁 중이었다는 것을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점령지에 주둔한 연방 사단의 군인, <플라치 하사>로서 나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전쟁이라는 자각은 어느 틈에 사라지고 있었다. 나를 향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얼굴로 웃고, 나를 <대디>라고 부르는 아이들만이 나의 모든 것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전쟁 안에서 겪는 전황이란 바다의 표면과 같다. 진원지가 어디인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그 위에 떠 있는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한다. 무엇인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또는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자신의 몸뚱이가 쓰나미에 휩쓸리고 있는 또는 이미 휩쓸려 내동댕이쳐진 이후에서이다. 텔라 콜로니가 그렇게 되고서야 나는 내가 놓인 상황을 알아차렸다. 아니, 알아차렸다고 그 순간에는 믿었다.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아이들만큼도 나는 내가 처한 상황과 해야 하는 행동을 모르고 있었다.

  주둔기지에는 철수 명령이 내려졌고, 우리들은 작전에 투입되었다. 연방군의 군속 및 텔라 콜로니의 거주민 중 적이 아니라고 인정된 사람에 대한 소개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아이들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고, 연방이 내린 모든 호의적인 지침과 나에게 허용된 모든 권한과 내가 잡을 수 있는 연줄을 모두 동원하여 마침내 아이들을 피난선에 태우는 데 성공했다. 그 때 아이들은 몹시도 나와 헤어지기 싫어했다. 자질구레한 장난은 심했지만 결코 내 말을 어기는 적은 없었던 율이 그 때는 아무리 달래도 듣지 않고 그저 발버둥을 쳤다. 떼를 쓰기는커녕 고집 한 번 부리는 일이 없이 매사에 고분고분하던 레조차도 그 때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일어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을 달래고 화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처럼 나더러 함께 가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텔라 콜로니의 상황이 어지간히 위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아이들은 그 때 이미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 피난선에 예비된 운명을 아이들은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 피난선에 탐으로써 자신들이 다다르게 될, 그 결과를, 그 절망을, 그 고통을, 그 최후를…….

  마지막 피난선을 발진시키고 우리는 전투를 시작했다. 텔라 콜로니에 주둔했던 연방군 2개 사단 병력의 거의 전원이 그 일 주일의 격전에서 글자 그대로 녹아 없어졌다고, 나중에 그렇게 들었지만 그 전투 기간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도 없다. 콜로니의 천장이 외벽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우주로부터의 포격을 뒤집어 쓰면서, 나는 그저 쏘고 쏘고 쏘고 또 쏘았다. 피난선에 태워 떠나보낸 아이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나는 살아남아야만 했고, 우리 대대에서 살아남은 단 열 명 중의 한 사람으로 회수선을 타는 데 성공했다. 그 회수선 안에서 우리는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더욱 제정신이 아니었다. 왜냐 하면, 그 회수선을 탄 후에야 나는 일 주일 전에 떠나보낸 피난선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니케 동맹의 오점 중 하나로 손꼽히는 텔라 콜로니 피난선 격추 사건. 바로 그 사건이다. 바로 아이들이 탄 그 피난선. 동맹에서는 그 피난선이 탈출 제한 시간을 초과하고도 작전영역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교전 규칙에 따라 적선으로 간주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것은 피난선이었다. 그 안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율이. 레가.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그 피난선에 태워 보냈던, 내 아이들이.

  그때까지도 나는 아이들이 죽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피난선에도 구명캡슐은 있었다. 아이들은 구명캡슐에 탔을지도 몰랐다. 겨우 여덟 살밖에 안 된 율은, 레는, 충분히 아니 반드시 구명캡슐에 탔을 것이었다. 상황이 긴박하여 둘이 한 캡슐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어린이 둘이서 6개월은 버틸 수 있다. 6개월이면 나는 충분히 아이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6개월도 필요없다. 6일, 6일이면.

  그러나 나는 아이들을 찾으러 갈 수 없었다.

  동맹과 연방 어느 쪽에서도 섣불리 회수를 시도하지 못할 만큼 위험한 전투 쓰레기로 가득한 곳에서 내 아이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데, 상부에서는 나를 보내 주지 않았다. 텔라 콜로니를 제외하고도 3개 콜로니에서 동시에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당시의 긴박한 전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탈영을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상부에서는 나를 즉결처분하는 대신 더미(dummy)라 부르는 신경제어수술 명령을 내렸다. 총 쏠 수 있는 손가락 하나가 아쉬웠을 그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용납할 수는 없다.

  내가 <D(더미)-Θ(세타)-10975>에서 <플라치 하사>로 다시 깨어난 것은, 전황이 연방 측의 우세로 돌아서고, 전선이 안정되고, 이제 더미를 부릴 필요까지는 없어진 상부가 그때까지 살아남은 것들을 모아서 신경제어 해제 수술실에 넣어 준 때였다. 신경제어 기간은 내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수술대에 누웠다가 같은 수술대에서 일어난 것만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눕고 일어남 사이에는 3년이 있었다. 3년. 사흘도 3개월도 아니라 3년.

  당연히, 나는 눕고 일어남 사이에 기억하지 못하는 3년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내 기억을 제외한 모든 것은 바뀌어 있었다. 전황도, 동료들의 얼굴도, 그리고 내 몸도. 자질구레한 흉터는 제외하고, 내 왼팔은 어깻죽지에서부터 기계로 된 의수로 바뀌어 있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처. 이제 와서 그것을 인정할 수 있든 없든 간에, 흘러간 3년 가운데 언제였던가 이미 일어난 일의 결과로서 현존하고 있는.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3년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왼팔이 의수라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아이들을 잃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나의 레. 나의 율. 나를 향해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웃던, 나를 <대디>라고 부르던 그 아이들이 이제는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이, 이미 일어난 일의 결과로서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라는 사실을 나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했다.

  그 3년간에 대해 보도와 소문을 막론하고 정보를 찾아다녔지만, 그 결과는 항상 동일했다. 새로운 정보를 얻을 때마다 사실을 재확인했다. 당시의 작전구역은 위험도 적색등급의 전투 쓰레기로 가득하여, <텔라의 무덤>으로 불리는 출입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음. 격추된 피난선으로부터 구조된 구명캡슐은 없음. 승선자는 전원 사망한 것으로 인정. 생존자 0.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못하든, 내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못하든, 그 사실은 이미 사실이었다. 나는 3년을 잃었고, 아이들은 사라졌다. 내 왼팔은 의수가 되었고, 아이들은 사라졌다. 나는 3년을 잃었고, 내 왼팔은 의수가 되었고.

  아이들은.

  죽었다.

  그리고 <대디>도 사라졌다.

  그 사실은 이미 사실이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제대할 수 있었다. 즉결처분 대신 신경제어수술을 받은 병사는, 상부가 인정하는 복무기간을 채우고 해제수술을 받을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전제 하에서, 그 신경제어수술을 받게 된 원인에 대한 기록을 말소하고 소속과 직급을 회복시킨다는 것이 공식적인 규칙이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병사들과 똑같다. 하지만 비공식적 지침으로, 전(前) 더미는 가급적 빨리 제대시키거나 전투와 무관한 보직으로 돌리도록 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신경제어수술의 후유증 때문인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더미 시절의 체험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더미였다가 해제된 병사는 전투상황에 들어가면 쉽게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돌발행동을 저지르기 때문이었다. 더미 기간을 제외하고도 연방군으로서 내 복무기간은 제대 가능 하한선을 이미 넘어 있었기에, 나는 제대를 신청했고 승인되었다.

  그로써 <플라치 하사>도 사라졌다.





  니케 동맹이 내 아이들을 죽였다.

  그로써 <대디>가 사라졌다.

  아폴로 연방이 내 아이들을 빼앗아 갔다.

  그로써 <플라치>가 사라졌다.

  나는 지금 <무덤지기>이다.





  나를 계속해서 플라치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나는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부름에도 대답에도 별다른 의미는 없다. 도그라 부르든 이누라 부르든 똑같은 개[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지금 <무덤지기>이다. 이것은 내 직업이기도 하고 이름이기도 하다. <무덤>이란 광역의 대규모 전투가 있은 후, 그 때 발생한 고위험등급의 전투 쓰레기 때문에 출입제한지역으로 묶이게 된 구역을 말한다. 하지만 그 쓰레기들 속에는 멀쩡한 것도 있고, 조금만 수리하고 다듬으면 군납품에 섞어 넣어도 표시가 나지 않는 것도 있고, 심지어 회수하지 못한 병사들의 유체나 그 존재가 확인되기만 하면 연방과 동맹 양쪽에서 부르는 대로 사 줄 기밀급 자료까지 가끔은 섞여 있다. <무덤지기>란 우주의 사냥꾼 중에서도, 이렇게 전투 후 위험구역으로 간주되어 출입이 묶인 <무덤>을 돌아다니며 쓸 만한 것들을 찾아 팔아서 살아가는 녀석들을 말한다. 당연히 불법이다. 하지만 이들이 있기에 연방과 동맹은 자기들 스스로는 찾으러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필요한 것들을 되찾아올 수 있고, 그래서 현행범으로 잡히지 않는 한 반쯤은 묵인하고 있다. 때로는 연방과 동맹의 상부들 스스로 <무덤지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물론 대리인을 내세워 자신들을 숨기지만 서로가 다 알고 있다. 어느 <무덤>에서 무엇을 찾아오라는 의뢰를 받으면 <무덤지기>는 그런 것을 찾는 자가 어디의 누구라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무덤지기>가 그렇게 짐작한다는 것을 의뢰자는 이미 알고 있다. 서로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

  신경제어 수술을 받은 후, 더미 기간을 포함하여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것은 신경제어 수술의 공인된 단 한 가지 부작용이다. 잠을 자되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부작용이라 부를 수 없으므로 그것은 부작용이라고 유일하게 공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꿈을 꾼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속에서.

  계기의 화이트 노이즈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오는 꿈.





               대. 디. 살. 려. 줘. 너. 무. 어. 두. 워.




* <텔라의 무덤: 플라치의 과거>는 <기역에서 히읗까지> 중 <다가오다 / 다감하다 / 다다르다 / 다듬다> 네 편을 묶은 것입니다.
황당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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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단편 환상문학웹진 거울 <<외계인 앤솔러지(가제)>> 출간기념 이벤트 mirror 2007.04.28 0
399 단편 침입 황당무계 2007.05.21 0
398 단편 일기 라반디스 2007.05.21 0
397 단편 <b>이번엔 <font color="green">외계인</font>이다. - 2차 소재별 앤솔러지 작품 공모</b> mirror 2007.01.18 0
단편 텔라의 무덤: 플라치의 과거 황당무계 2007.05.17 0
395 단편 우주부활 주식회사(본문 삭제) Inkholic 2007.05.16 0
394 단편 회절 hybris 2007.05.10 0
393 단편 보건소에서 0.2파섹 singularity 2007.05.09 0
392 단편 어느 소녀의 일기(호기심)1 라반디스 2007.05.02 0
391 단편 [외계인] 라의 날1 hybris 2007.04.28 0
390 단편 간장 / 경이 / 끼다 황당무계 2007.04.26 0
389 단편 [외계인] 지구의 아이들에게 희자 2007.04.26 0
388 단편 <b><<외계인 앤솔러지>>공모 마감 27일 금요일 자정입니다.</b>1 mirror 2007.04.24 0
387 단편 농구화 (3)1 황당무계 2007.04.23 0
386 단편 농구화 (2) 황당무계 2007.04.23 0
385 단편 농구화 (1)1 황당무계 2007.04.23 0
384 단편 Running 디안 2007.04.21 0
383 단편 달들 singularity 2007.04.21 0
382 단편 괴물 주환 2007.04.20 0
381 단편 [외계인]이빨에 끼인 돌개바람(본문 삭제)5 Inkholic 2007.04.2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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