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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보건소에서 0.2파섹

2007.05.09 22:4205.09

  구형 우주복에 처음 몸을 집어 넣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풍성한 보온복이 제멋대로 뒤엉키는 사태가 발생한다. 나도 막 그런 난국에 봉착한 참이었다. 오른팔 어딘가가 단단히 틀어졌으며 바지는 앞뒤가 뒤바뀐 것 같았고 윗옷이 말려 올라갔는지 등어리가 꽁꽁 얼고 있었다. 난 듣는 사람도 없는 헤드셋에 대고 버럭 소리쳤다.
  "그러니까, 에스페란쟈 통합 내외과 과정을 잘 마치고 나서 왜 은하계 변방에서 구르겠다고 자처한거야, 넌?"
  아무리 찬찬히 생각해 봐도, 당시 별 기대도 않고 방문했던 헤스챠인(人) 공무원의 형식적인 보건 의료 지원 요청을 기쁘게 받아들인건 미친 착상일 뿐이었다. 은하계의 두번째 팔 외곽으로 파견된 후 4년간 하루도 편하게 쉬어 본 일이 없었다. 가끔 난 내가 반쯤 미쳐버린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누구라도 4년 내내 기상천외한 종족들의 듣도 보도 못한 증상과 씨름하며 지내다 보면 나랑 비슷한 정신상태를 보일 것이다.
  한참을 악전고투한 결과, 드럼 세탁기에 돌린 커튼처럼 베베 꼬인 보온복을 겨우 덜 불편한 수준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도 등이 어는 것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난 진료가 끝날 때까지 치명적인 동상에 걸리지 않을거라고 내 불안감을 토닥이며 추진기를 작동했다. 그때, 누가 내 대뇌피질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 어, 저기, 박사님? 제가 뭐 불편하게 해 드리기라도 했나요?
  이런 맙소사. 소심한 BM-221이 날 마중 나와 있었잖아.
  "아뇨, 아뇨. 당신한테 화난게 아니에요. 지금 우주복 안이 좀 불편한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좀 짜증이 난 것 뿐이에요."
  - 정말 그것 뿐인가요?
  "네 맞아요. 난 단지 내 신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중력과 대기를 벗어났기 때문에 다소 스트레스를 받았을 뿐이에요. 절대 당신에게 화난게 아니라구요."
  - 음, 하지만 박사님은 좀전에 변방 의료 지원에 넌덜머리가 난다는 말을 하셨어요. 제가 인간의 미묘한 어휘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건 분명히 박사님이 현재 상황에 불만을 가지신다는 말이고, 어, 그러니까 아무래도 전 박사님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지금 아픈건 좀 가라앉았고 시간이 지나면 그냥 나을 것 같으니까‥‥‥.
  난 머리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게 내 운명이지. 수줍고 소심하며 다른 지성체를 지나치게 배려하는 가스 생명체들을 상대하고 도닥여 주는 것. 다 이게 대학 과정에서 괴상하고 상식을 벗어난 종족들에 지나치게 몰입한 탓이었다.
  난 직경 15km 정도로 응축되어 도근거리고 있는, 핑크빛으로 빛나는 아메바형 지성체 BM-221에게 말했다.
  "시끄러워요. 어쨋든 당신은 환자고 난 의사라구요. 난 의사에게 주어진 의무는 다 할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환자로써 할 것만 하면 돼요. 자, 염화메탄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것 같다고 했죠? 이리 와서 스펙트럼 패턴을 찍어봅시다."
  - 아니, 저, 전 이제 더 안아픈데요. 박사님도 바쁘실테니 이만 돌아가세요.
  "자꾸 이럴래요? 계속 그러면 앰뷸런스 화물칸에 압축해 놓고 강제로 검사할 거예요. 당신이 기분 나빠할건 알지만, 이렇게 나오면 더 방법이 없어요. 자, 어쩔래요? 그냥 얌전히 검사 받을래요? 아니면 흡입기를 쓸까요?"
  BM-221은 한 2km 정도 더 움츠러 들더니 손전등 건전지만한 전압으로 대답했다.
  - 예, 그럼 폐가 안된다면‥‥‥.
  "좋아요. 이리 가까이 와요. 잠깐 스파크가 튈 겁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난 우주복에서 전극이 연결된 바늘 두쌍을 꺼내 작동 여부를 검사한 후 곧바로 검사를 시작했다.
  흠, 내가 아까 왜 이 변방에서 뒹굴고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었나? 글쎄 아직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죽을때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등이 얼어붙고 있는 와중에도 BM-221의 스펙트럼 패턴을 조사하고 통증의 원인을 고민하는 이 순간을 내가 지극히 행복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이유는 이것 하나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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