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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농구화 (2)

2007.04.23 00:2804.23





        < 5 - 높이 >




  "안다."

  "……."

  반행신이 대답하자 허순진은 선뜻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벗어 주랴?"

  "……."

  "벗어 주면 신을 수 있어?"

  "…… 지, 지금……."

  "지금 벗어 줄까?"

  "…… 아니, 그, 그게……, 그러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이거 네 신발이라며? <진짜 나이키, 그것도 에어조던 1, 게다가 검빨, 강백호가 신은 것과 똑같은 모델>인 농구화."

  "…… 내 거예요, 그거……, 내 거……."

  "그래. 네 거. 이것 때문에 네가 여기 있는 거 아니야? 이것만 찾으면 떠나는 거였잖아."

  "…… 아니……, 나, 저기……, 신발 찾으러 온 게……, 아니……, 아니라요……, 저기……. 그게 내 신발……, 내 거는 맞는데……, 아, 그러니까……! 지, 지……! 지금……, 지금……!"

  허순진은 반행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한참이나 우물쭈물 횡설수설하면서 쭈빗쭈빗 눈치를 살폈다. 반행신은 답답함을 꾹 참고 기다렸다. 맨발을 서로 비비대던 허순진은 흐읍 숨을 들이키더니 눈까지 꼭 감고 소리질렀다.

  "…… 나, 나……! 아, 아저씨도, 주, 주, 주……! …… 죽여야 되거든요!"

  "……?"

  "……!"

  "……?"

  "……!!"

  반행신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허순진을 쳐다보았고, 허순진은 오히려 애걸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행신은 자신을 가리켰고, 허순진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반행신은 한참만에 말했다.

  "왜?"

  "…… 마, 말하면 안 돼요……!"

  "어떻게 죽일 건데?"

  "…… 어, 어떻게든……!"

  말하면서도 허순진이 명색 귀신이면서 어찌나 떠는지, 그 바람에 오히려 반행신은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반행신은 신문을 내려놓고 일어나 어깨를 폈다. 자기 머리 위로 한참이나 올라가는 반행신의 키와 두 배는 되고도 남을 만한 체격에 허순진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허순진."

  "으와!"

  그렇지 않아도 주위로부터 "탱크 엔진음"이니 "홍어탁주"니 심하면 "삼천 년 묵은 대마왕 목소리"라는 평을 듣는 반행신이 그 중저음 목소리를 아연히 낮추자, 허순진은 불쌍하게도 깜짝 놀라고 겁에 질려 물러나다가 제풀에 플랫폼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졌다. 호랑이의 포효를 듣고 인간이 마비되는 것은 공포 이전에 그 울음소리에 섞인 초저주파의 진동 때문이라던가. 반행신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허순진!"

  "으, 으아앙!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잉잉잉, 아저씨한테는 손 안 댈게요! 잘못했어요!"

  허순진은 다리가 풀렸는지 일어나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었다. 이런 녀석도 원령이랍시고, 애꿎은 애 신발끈에 매달려서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게 만들었단 말이지? 반행신은 한심함과 불쌍함을 동시에 느끼며 다소 목소리를 풀고 표정도 부드럽게 했다.

  "자, 화내는 게 아니니까 진정해. 물어 볼 게 있어서 온 거야."

  "…… 잉잉잉……."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 잉잉잉……."

  허순진은 플랫폼 바닥에 주저앉은 채 쿨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순진, 너, 나 본 적 있지?"

  "…… 네……."

  "그 때 이 농구화를 신고 있던 김재환이라는 애, 알지?"

  "…… 이름은 모, 몰라요……."

  "그 애 이름이 김재환이야. 김재환이 사고당하게 만든 거, 너지?"

  "…… 네……. 잘못했어요……, 잉잉잉……."

  "왜 그랬어?"

  "…… 주, 죽여야 된다고……, 했거든요……, 너무 무, 무서워서……, 나, 난 도망치지도 모, 못하는데……, 농구화는……, 농구화는 내, 내가……, 만질 수 있으니까……, 그냥……, 나, 난 농구화만 붙잡았는데……, 잘못했어요, 잉잉잉……."

  "어제하고 오늘은 왜 나타나지 않은 건데?"

  "…… 아저씨가 무, 무……, 무서운 아저씨랑 같이……, 같이 있었으니까요……, 드, 들키면 끌려가서, 어, 엄청나게 호, 혼난다고……, 지옥 간다고……, 그, 그러길래……, 무서워서……, 잘못했어요, 잉잉잉……."

  허순진은 반행신의 물음에 더듬더듬 대답하며 훌쩍훌쩍 울어댔다. 상황을 재구성하던 반행신은 허순진의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알아차렸다.

  허순진은 계속 간접인용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데?"

  "…… 네?"

  "너한테, 이 농구화 신은 사람을 죽이라고, 저승사자한테 들키면 끌려간다고, 누가 그랬는데?"

  "……."

  허순진은 대답하려고 입을 움직였다.

  그 때, 뿔테 졸보기 안경 너머에서 허순진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리고 입에서는 처음 의도와 완전히 다른 소리가 튀어나갔다.

  "뒤! 아저씨! 뒤!"

  홱 몸을 돌이킨 반행신이 본 것은 누군가가 엄청난 기세로 휘두르는 녹슨 소화기였다.

  간발의 차로 반행신은 소화기에 찍히는 것을 피했으나 이마를 빗맞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상대는 몸집이 다부지고 얼굴이 넓적한 남자였다. 반행신이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끄응, 하고 힘주는 소리를 내며 다시금 소화기를 두 손으로 잡고 높이 쳐들었다. 그 소화기는 분명히, 지하철역에 늘 비치되어 있는 현실계의 진짜 소화기였다. 이놈은 소화기에 한이 맺힌 원령이냐?! 한 대 정통으로 맞으면 골로 갈 것이 분명한 그 소화기가 머리 위로 번쩍 올라가는 것을 보는 순간 반행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빗맞은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그쪽 시야가 흐려졌다.

  "야이시발라마색햐무간맷돌에들들갈려아수라환생할색햐거기꼼짝마!"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욕설이 귀청을 때렸다. <라이방> 저승사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소화기 원령 ― 반행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 은 냉큼 소화기를 집어던지고는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허순진의 손목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웠다. 반행신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소화기 원령과 허순진의 모습은 선로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괜찮소? 어유, 피가 나잖아. 어이, 괴기탐정, 괜찮소? 많이 다치지 않았소?"

  저승사자가 달려와 반행신의 어깨를 흔들었다.

  "…… 괜찮습니다……."

  반행신은 손으로 상처를 누르며 일어났다. 저승사자는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두 혼령이 사라진 어둠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내가 찾는 녀석과 당신이 쫓는 녀석이 달랐습니다."

  "……."

  "농구화에 집착하는 건 별 힘도 없는 학생 유령이었습니다. 조금 더 달래 주면 사라질 것 같은데, 나한테 소화기를 들고 덤빈 녀석이 분명……."

  "<세이예스>."

  "……  뭐라고요?"

  "저승사자 ID UK-4-AN-6-HYON-54, 통칭 <세이예스>. 이 역에서 실종되었다던 내 동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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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 놓치다 >




  축 늘어진 눈꺼풀에 잠귀신을 오른쪽에 둘씩 왼쪽에 둘씩 매달고 있던 당직 의사는 밤늦은 시간에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찾아온 반행신과 <라이방> 저승사자를 보고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취객과 그 동료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간호사가 반행신의 이마에 붕대를 다 감을 때쯤 하여, 진짜 취객 여덟이 다들 하늘이 돈짝만하게 보이는 상태로 그 중 셋이 쌍코피에 타박상에 발가락 골절에 터진 입술에 빠진 이빨 한 개까지 들고서 갈비뼈 골절과 요추 탈출과 경추 이상을 소리 높이 호소하며 나타나는 바람에 응급실이 온통 소란해졌다. 당직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 주취환자들을 진정시키고 보살피느라 몰려간 동안, 반행신과 <라이방>은 응급실 한구석에서 종이컵의 커피를 홀짝거리며 다시금 작전회의를 열었다.

  "허순진이라고 했소? 그 <진짜 나이키> 어쩌고 하는 농구화에 집착하는 원령이?"

  "교복 명찰에 그렇게 쓰여 있었고, 내가 그렇게 불렀을 때 대답했으니까요."

  "허순진, 허순진……. 우리 관할 구역에서 접수된 사망자 명단에 그런 이름이 있었던가……. 허순진이라……."

  <라이방>은 깨알 같은 잔글씨로 가득한 큼직한 수첩 하나를 트렌치코트 안주머니에서 꺼내어 손끝으로 훌훌 넘겼다. 반행신은 검색 결과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나한테 소화기 들고 덤빈 그 녀석이 정말로 당신 동료입니까? <세이예스>라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고……."

  <라이방>은 뒤적이던 수첩을 덮으며, 자판기표 밀크커피 매니아가 버튼을 잘못 눌러 블랙커피를 뽑고는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할 때 지을 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단, 당신이 다친 건 정말 미안하오."

  "당신이 미안해할 일이 아닙니다. 그 녀석이 당신 동료인 게 맞기는 한 겁니까?"

  "그게,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고……."

  "적어도 현실의 물건인 소화기를 들 수 있었으니, 단순한 혼령은 아닌 거지요?"

  "……."

  <라이방>은 수정점을 치는 마녀가 수정구슬을 빙자하여 그 안에 숨긴 우나즈킨 인형을 들여다보듯이 종이컵 속의 밀크커피를 들여다보다가, 아직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그 커피를 단숨에 홀딱 마셔 버렸다. 그리고는 빈 종이컵을 움켜쥐어 우그러뜨리고는 말했다.

  "그렇소."

  "그럼, 정말로 당신 동료인 겁니까?"

  "그건 아니오."

  <라이방>은 반행신의 발에 꿰인 농구화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상황이 그 신발같이 된 모양이오."

  "뭐라고요?"

  "내 몸이 현세의 물리적 상황에 제약을 받느냐고 물었지요? 나도 내 동료도 저승사자이고, 원칙적으로는 보통 혼령과 똑같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건물 벽 같은 것에 가로막히는 일도 없고, 현실의 물건에 상처를 입지도 않소. 하지만 때로는 그게 불편한 경우도 있소. 일단 현세의 사람이나 사물에 전혀 손을 댈 수 없으니 말이오. 그래서, 비유하자면, 맨발에 신발을 신고 맨손에 장갑을 끼는 것과 같다고 할까? 현세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거요. 지금 당신 눈에 보이는 이것도 껍질이오."

  <라이방>은 자기 볼을 양쪽으로 쭈욱 잡아늘였다.

  "제작단가도 비싸고 관리도 어렵고 적응기간도 필요하고 흠집 나면 수리하기 까다롭기 때문에, 저승사자 중에서도 특별훈련을 거쳐 선발된 경우에만 껍질을 가지고 있소. 물론 한 번 껍질을 만들고 나면 착탈은 자유롭소. 나올 때는 껍질을 쓰고 나오지만 임무 수행 중 껍질의 제약 ― 이걸 쓴 상태에서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이오 ― 이 영 불편하다 싶으면 벗을 수 있소. 물론 빈 껍질은 잘못해서 상하거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잘 보관해 두어야 하지만 말이오."

  <라이방>의 말을 들으며 반행신은, 지하철역이나 기차역 근처에 죽 드러누워 넉넉히 며칠쯤은 돌아눕지도 않는 노숙자 중 한두 명은 출장 나온 저승사자의 껍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세이예스>는 나와 함께 껍질 사용을 허가받은 저승사자 중의 하나요. 그러니까 소화기가 아니라 쇠파이프든 뭐든 현실의 물건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소."

  "그러면, 아까 그 녀석이 그 <세이예스>라는 당신의 동료가 맞다는 겁니까?"

  "그게 이상하단 말이오."

  <라이방>은 머리를 북북 긁었다.

  "모습은 <세이예스>가, 아니 <세이예스>의 껍질이 맞았소.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놈은 <세이예스>가 아니었소. 어떻게 설명을 못 하겠는데, 당신이 날 알아봤던 것처럼, 수백 명이 똑같이 어울려 있어도 우린 그냥 턱 보면 구분을 해요. 저건 사람이다, 저건 귀신이다, 저건 저승사자다, 저건 껍질을 쓴 저승사자다, 하고 말이오. 그런데 아까 그 놈은, 생긴 건 분명히 <세이예스>이고 힘을 쓰는 것을 봐도 <세이예스>인데, 아무래도 진짜 <세이예스>라는 생각이 안 든단 말이오."

  "…… 그러니까, 지금, <세이예스>라는 당신 동료가 쫓던 강도질 전과만 16범짜리 귀신이 <세이예스>의 껍질을 쓰고 나한테 덤볐다, 고 말하는 겁니까?"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구려. <불가능한 것을 차례로 제외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아무리 터무니없더라도 진실이다>고 말한 사람, 누구였소? 셜록 홈즈?"

  "오귀스트 뒤팽이 먼저입니다."

  <라이방>은 냉큼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과연, 그렇다고 하면 반행신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부분이 의심스러웠다.

  "혼령이 그렇게 쉽게 저승사자의 껍질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당연히 안 되지. 우리끼리도 다른 저승사자의 껍질에는 함부로 못 들어가는데."

  "그렇다면 그 녀석은 어떻게 <세이예스>의 껍질에 들어갔다는 겁니까?"

  <라이방>은 수첩을 탁 덮었다.

  "나도 그걸 모르겠소."

  "……."

  "……."

  "……."

  "……."

  반행신은 다 식은 커피를 홀짝 들이마셔 꿀꺽 삼키고는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으로 던져넣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보기만 해도 <위풍당당 행진곡>(에두아르트 엘가)이 5.1 서라운드 스피커로 울려퍼질 듯이 웅장한 걸음걸이로 바닥재 위에 농구화의 쩌억쩌억 소리를 울리며 병원 현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어딜 가는 거요?"

  <라이방>이 쫓아왔으나 반행신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 지하철역으로 갑니다."

  "거긴 왜?"

  "<세이예스>든 <세이예스>의 껍질을 쓴 흉악범 귀신이든, 찾아야죠. 그대로 놓칠 수야 있습니까?"

  "살풀이나 부적술이나 다른 제압술도 모른다면서? 무슨 수로 찾겠다는 거요?"

  "무슨 수로든지요."

  "찾을 수 있다 한들, 찾아서 뭘 어쩌려고? 덩치는 백곰 같은 양반이 째째하기는! 소화기에 한 대 맞았, 아니, 스쳤다고 그걸 또 직접 앙갚음하겠다는 거요?"

  "내 문제만이 아닙니다."

  "아니라?"

  "그놈이 뭐가 됐든, 그놈은 지금 허순진을 데리고 있습니다."

  "…… 아, 농구화 주인애 말이오?"

  "나한테 덤빈 녀석이 <세이예스>든 <세이예스>의 껍질이든 강도전과 16범 귀신이든 그건 상관할 바 아니지만, 허순진의 농구화에 대해서는 내가 의뢰를 받았습니다. 허순진이 왜 그 지하철역의 지박령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허순진이 그 역에서 애꿎은 사람을 해친 건 그놈 때문이에요. 죽고 나서 지은 죄도 저승에 가면 같이 정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허순진은 녀석한테서 풀어 줘야지요."

  "……."

  걸음을 서둘러 반행신의 넓은 보폭을 따라잡은 <라이방>이 말했다.

  "괴기탐정, 한 가지 물읍시다."

  "뭡니까?"

  "당신, 정말로 이 노릇 왜 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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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 뇌운 >




  "퇴마술은 모른다더니 이것들은 다 뭐요?"

  "난들 뭐 올가미도 없이 개백정 노릇을 한답니까?"

  <라이방>과 함께 사무실에 도착한 반행신은 철제 캐비닛을 열어젖히고 이것저것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십자가와 마늘꾸러미와 말뚝과 망치와 고려은단 넣은 비비탄을 쏠 수 있도록 튜닝한 가스 충전식 모델건을 기본으로, 벽조목 12지신 열쇠고리부터 시작하여 스캔 후 B3 크기로 확대출력한 만원짜리 지폐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부적과 주물이 나왔다. 라면박스 두 개 분량은 넉넉할 정도의 온갖 물건을 책상 위에 쌓아 놓은 반행신은 <라이방>을 돌아보았다.

  "이 중에서 쓸만한 것들 좀 골라 주시죠."

  "어떻게 쓸만한 것으로?"

  "어떻게든, 효력이 있는 것 위주로요. 알맹이가 무엇이 됐든 <세이예스>의 껍질이라면 그놈이 날 때린 것처럼 나도 그놈을 때릴 수 있겠지만 귀신이라면 그냥은 어렵겠지요."

  "이런 것들이 있으면서 왜 빈손으로 농구화만 신고 갔소?"

  "어지간하면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여튼 배짱 좋은 양반일세. 하지만 물건 보는 눈은 영 꽝이로군. 당신, 이것들 알고 산 거요, 모르고 산 거요? 언젠가 쓸 생각으로 모은 것이라면 일찌감치 갖다 버리쇼. 이건 뭐야? 벽조목? 압축한 각목에 물들여 놓고는 벽조목이라네."

  "……."

  <라이방>은 그림인지 글자인지 괴물의 올챙이적 초상화인지 모를 새빨간 반점이 가득한 부적 한 장을 집어들었다.

  "이 부적은 샀소, 얻었소?"

  "얻었습니다."

  "무슨 부적으로 알고 얻었소?"

  "…… 귀신을 죽일 수 있는 부적이라던데요."

  "여기 뭐라고 썼는지 읽어 줄까요? <파테르 노스테르 퀴 에스 인 코엘리스, 상크티피케투르 노멘 투움(Pater noster qui es in coelis, sanctificetur nomen tuum;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주기도문이오. 라틴어 알파벳을 영어 필기체로 잔뜩 날려 쓴 것을 좌우 바꾸고 상하로 뒤집었군. 그나마도 오자투성이네. 아무리 가짜라지만 최소한 글자는 똑바로 쓰고 팔 것이지. 게다가 이 뻘건 색은 주사(朱沙)나 닭피도 아니고 포스터칼라일세, 이거. 이게 귀신을 죽이는 부적이라고 했소? 이걸로 귀신이 죽는다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죽는 거요."

  "……."

  반행신은 의뢰비를 반으로 깎는 조건으로 그 자칭 살귀부(殺鬼符)를 준 <이문동의 푸른 뇌운(雷雲), 지성과 미모의 청순가련 처녀보살>을 떠올렸다. 자기가 기르다 버린 개가 유기견 신세로 떠돌다가 트럭에 깔려 죽어 귀신이 되어서 그래도 주인이 그립다고 돌아오자 처리해 달랍시고 반행신을 부르고는 끝내 착한 척 <죽이려면 이걸로 죽일 수 있지만 그러면 불쌍하잖아요, 오빠가 잘 좀 달래서 좋은 곳으로 보내 주세요> 하면서 마스카라 잔뜩 바른 속눈썹 아래로 눈물까지 글썽거렸던 여자였다. 지금도 이문동에서 <푸른 뇌운>으로 연애사 전문 점집을 경영하고 있을 그녀를, 반행신은 조용히 고객 블랙리스트에 올려 놓았다.

  "혹세무민도 정도가 있지, 아무튼 이 따위 놈들 때문에 선량한 진짜까지 욕을 먹는다니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게 길 그리섬의 말이었소?"

  "토마스 그레샴입니다."

  "토마스 그레샴……. (메모한다) 정말이지, 아무리 사기칠 게 없기로서니 이런 걸로 사기치는 놈들, 죽은 후에 할렐루야 지옥에서 피눈물 뽑아도 때는 이미 늦으리."

  <라이방>은 책상 위에 쌓인 것들을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며 혀를 찼다. 반행신은 그 <할렐루야 지옥>이라는 것이 뭔지 궁금해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 그러니까, 쓸만한 게 하나도 없는 겁니까?"

  "대(對) 귀신용으로는 없소."

  "……."

  "괴기탐정 노릇도 참 어렵겠소."

  "……."

  반행신은 책상 서랍을 열고 가죽 장갑 한 켤레를 꺼내 점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갑시다."

  "흐음, 솔직하게 말해 보시오."

  <라이방>은 색소 짙은 선글라스의 유리알 너머로 반행신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 귀신 볼 수 있소?"

  "……."




  어제의 막차가 떠난 지는 벌써 세 시간이 넘었고, 오늘의 첫차가 들어오기까지도 그 정도로 남았다. 적막 속에서 가끔 오래된 형광등의 파삭파삭 소리만 들리는 계단을 내려가며, <라이방>은 감탄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말투로 중얼거렸다.

  "귀머거리 음악가 얘기는 들었어도 귀신을 못 보는 괴기탐정 얘기는 또 처음일세. 허허."

  "……."

  "신들리지 않고 무당 노릇을 한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귀신을 못 보면서 괴기탐정 노릇을 한다는 건 또 몰랐네, 정말."

  "……."

  "색맹인 화가가 있다는 얘기는 그러고 보니 들은 것 같은데……."

  "…… 그만 좀 해요! 별 것 아닌 핸디캡인데!"

  반행신이 그 특유의 썩은 목소리를 더욱 썩히며 버럭거리자 <라이방>은 찔끔 입을 다물었다.

  플랫폼의 구석진 벤치 앞에는 여전히 스포츠 신문 ― 치골 의상의 여가수 사진이 실린 ― 이 구겨진 채 뒹굴고 있었다.

  "어디 있을까요?"

  "누가 말이오?"

  "허순진하고, 껍질이든 알맹이든 <세이예스>라는 당신 동료지 누구긴 누굽니까?"

  "그걸 난들 알겠소?"

  "명색이 저승사자라면서 도망다니는 귀신을 찾아내지도 못해요?"

  "귀신들이 뭐 GPS라도 달고 다니는 줄 아시오? 아무튼 TV가 애들 다 망친다니까."

  "그러면, 저승사자가 귀신 하나 잡으러 지상까지 나와서는, 닥치고 발로 뛰는 거예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러면, 아닌 줄 알았소? 옛날 방법이 제일 확실한 방법이오. <닥치고 발로 뛴다>."

  반행신은 역습의 꼬투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라이방>도 꼬리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렇더라도 인간인 반행신에게 <저승사자라면서 이뭐병~> 하는 식의 시선을 받자 <라이방>은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본부~! 본부~! 본부~!"

  그 때 <라이방>의 트렌치코트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라이방> 자신의 목소리로 착신음을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아, 잠시. <라이방>, 전화 받았습니다…."

  <라이방>은 뒤돌아서서 전화를 받았다. 반행신은 왠지 한심한 기분이 들어,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음산한 플랫폼 안을 휘둘러보았다.

  "……!"

  건너편 플랫폼의 기둥 뒤에서 잠시 나타났다 희뜩 사라지는 무엇이 눈에 들어왔다. 반행신은 전화를 받고 있는 <라이방>을 내버려둔 채 선로로 뛰어내렸다.

  "그래, 내가 말했던 게……. 괴기탐정! 뭐 하는 거요?"

  "잠시 거기서 기다려요!"

  반행신은 선로를 건너 반대편 플랫폼으로 기어올라갔다. 방금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것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이 플랫폼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행신은 기둥 뒤, 자판기 옆,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너머 등 쉽게 눈에 띄지 않는 후미진 곳을 차례차례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플랫폼을 거의 끝에서 끝까지 훑은 반행신은, 어지간한 러시아워에도 승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 도착했다.

  당초 이 공간의 용도는 비상시를 대비한 방독면과 구급대 등을 보관하는 곳이었는데, 너무 외떨어진 곳이라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방치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개방된 공간이고, 조금만 걸어들어와 기둥 너머로 시선을 던지면 찾을 수 있는 장소인데,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내버려져 있었을까?

  반행신은 그 공간의 안쪽 벽에 얌전히 기대어 놓여 있는 가방을 보았다.

  퇴색한 캔버스 천 위로 아무도 손대지 않은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허순진의 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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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 누구 >




  반행신은 애처로운 심정으로 그 먼지 앉은 가방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자신이 신고 있는 <진짜 나이키, 그것도 에어조던 1, 게다가 검빨, 강백호가 신은 것과 똑같은 모델>의 농구화 옆에 맨발 두 개가 와서 섰을 때 반행신은 놀라지 않았다.

  "아저씨."

  "…… 안녕."

  "다친 건요?"

  "…… 별 것 아니다."

  "…… 화났어요?"

  "아니."

  "나를 잡아 가려고 온 거죠?"

  "……."

  "내가 다른 사람을 사고 나게 만들었으니까…… 해쳤으니까……?"

  "…… 아니."

  반행신은 몹시 풀이 죽은 허순진을 돌아보았다.

  "그건 저승사자가 하는 일이고, 난 아니다."

  "그래도, 같이 왔잖아요."

  "같이 다닌다고 같은 일을 하는 건 아니지. 그 저승사자가 온 건 내 머리에 이 상처를 (반행신은 붕대를 감은 이마를 가리켰다) 낸 녀석을 잡기 위해서고, 내가 온 건 네가 왜 이 역에 머무르면서 이 농구화를 신은 사람을 사고 나게 만들었는지 알기 위해서다."

  "……."

  가방을 멘 허순진의 어깨가 한층 더 처졌다. 반행신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허순진."

  "예."

  "이 역에서 죽었니?"

  "…… 예."




  <라이방>은 통화중이었다.

  "…… 희한하게 죽은 애로군. 날짜 확실하지? (메모) …… 그래, 그 건은 됐다. 아마 녀석 짓이겠지. …… 글쎄다. 당사자 만나면 확인해 보기로 하고. 아, <세이예스>의 소재는 그쪽에서도 아직 파악불명이냐? …… 난들 알아? 껍질 안에 GPS라도 박아 놓으라고 그래라. …… 그래, <시체실> ― 껍질의 개발·보수·보관 담당국 ― 에 알아봤냐? …… 메모 준비됐다, 읊어 봐."




  반행신은 허순진과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가방을 들여다보았다.

  "죽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

  "내 시체를 봤거든요."

  "……."

  "왜 그렇게 됐는지가 기억이 안 나요."

  "……."

  "보통 때처럼 학교 끝나고, 야자까지 다 하고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분명히 가방 메고, 신발 신고 역에 들어왔는데, 그 다음을 모르겠어요. 정신차려 보니 선로 위에 내 시체가 있더라고요. 가방도 없고, 신발도 없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데요. 내가, 맨발인 채 가방도 없이 플랫폼에 서 있다가 지하철 들어오니까 그냥 뛰어내렸다고요. 난 그런 기억 없는데."

  "네 가방은 저기 있어."

  "알아요. 저기서 치우고 싶은데 만질 수가 없어요. 치워 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치워 줄까?"

  "그런데 신발은, 왜 걔하고 아저씨가 신고 온 거예요?"

  "걔는 중고로 샀다던데."

  "내가 신고 여기 들어왔다가 없어진 신발인데…… 어떻게요?"

  "……."

  허순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 아저씨."

  "왜?"

  "난 왜 죽은 거예요?"




  <라이방>은 여전히 통화중이었다.

  "아니, 그런 것 말고, 껍질의 기본성능 따위를 누가 몰라서 묻는대? …… 호환성 말이다, 호. 환. 성. …… 그래, 사용승인코드 있고, 잠금장치 있고, 개인 인식 코드 있고…… 뭐? …… 상관 없어? 정말?"




  "…… 잉, 잉……."

  "……."

  허순진은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었고, 반행신은 쭈그리고 앉은 채 말이 없었다.




  <라이방>은 여전히 통화중이었다.

  "…… 야, 그 정도면 치명적인 결함 아니냐? 리콜 대상 아냐? …… 아니, 그런 게 왜 매뉴얼에 안 실려 있는 거야? 그 정도면, 정말로 껍질에 GPS부터 박아야지! …… 예산? 에라이, 그런 건 <시체실>에서 알아서 해야지!"




  허순진이 사라지자, 반행신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점퍼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가죽장갑을 꺼내 한 짝씩 끼면서 반행신은 뒤를 돌아보았다.

  <세이예스>라고 <라이방>이 불렀던 저승사자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저승사자의 '껍질'이 험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

  잠시 반행신을 노려보던 <세이예스>의 껍질이 말했다.

  "그냥 곱게 목이나 부러져 죽지, 뭐 하러 남을 이렇게 귀찮게 만드냐?"

  반행신은 그 말을 그대로 되받았다.

  "그냥 곱게 지옥이나 가지, 뭐 하러 애꿎은 애를 잡았냐?"

  <세이예스>의 껍질은 씩 웃었다.

  "그 머저리 애새끼가 불었구만."

  "애꿎은 애를 홀려서 죽이고는 저승도 못 가게 붙잡아 놓고, 신발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까지 죽이게 만드는 건 뭐 하자는 플레이냐? 지옥 아랫목에서 따땃하게 구워지고 싶으냐?"

  "너도 곧 같은 신세가 될 거다."

  "그 전에, 한 가지 묻자."

  "뭐냐?"

  "귀신이 사람을 죽이면 레벨업한다는 건 어디서 들은 얘기냐?"

  "이 몸을 나한테 뺏긴 녀석한테서. 됐냐?"

  "하나 더 묻자."

  "이번엔 뭐냐?"

  "그게 사실이냐?"

  "그 와중에 거짓말했다가는 나한테 두 번 죽지. 이젠 죽을 준비 됐냐?"

  "하나만 더 묻자."

  "이걸로 끝이다."

  반행신은 잡아당기던 가죽 장갑의 손목을 놓고, 주먹을 한 차례 쥐었다가 폈다.

  "누구냐, 넌?"




  "<시체실> 녀석들, 껍질에 그런 문제가 있었으면 진작에 말을 했어야지."

  <라이방>은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어디로 가 버린 거야?"

  <라이방>이 플랫폼 안을 휘둘러보는데, 모기만한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며 불렀다.

  "…… 아저씨, 저, 저기……, 저기요……, 아저씨……."

  그 목소리만큼이나 벌벌 떠는 허순진이 그 곳에 있었다.

  "…… 아저씨, 저, 저, 저……, 저승사자 맞죠……?"

  "자진납세냐?"

  "…… 그, 그러니까, 아, 아저씨 친구…… 어, 어디 있는지 제가 아, 알거든요?"
황당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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