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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농구화 (1)

2007.04.23 00:2004.23




        < 1 - 농구화 >




  괴기탐정 반행신의 농구화 이름은 <항공모함>이다. 물론 농구화의 크기가 항공모함급이기도 하지만,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에는 사연이 있다.

  반행신이 은붕어 신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이다.




  반행신은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 에스컬레이터가 수리중이었기에 반행신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그 길고 가파른 계단을 저마다 올라가거나 내려가고 있었다. 반행신은 문득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가방을 짊어지고 귀에는 MP3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꽂은 채 계단을 내려가는 말라깽이 여드름바가지 고등학생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 학생이 내 눈에 들어왔을까, 하고 반행신이 생각하는 순간에 그 학생의 발이 땅에 붙은 듯 멈추었는데 머리는 그대로 진행했다. 반행신은 학생을 향해 몸을 날렸고, 세 계단 아래에서 그 책가방을 움켜잡고 주저앉았다. 반행신의 몸무게가 그 학생의 2.5배 정도는 너끈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둘 다 굴러떨어질 뻔했다.

  "아, 아저씨, 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반행신은 학생의 인사를 듣는 대신 그 학생이 신고 있는, 발에 맞지 않게 커다란 농구화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학생의 발이 멈추는 순간에 반행신은 그 양쪽 농구화 끈이 서로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 농구화의 끈은 감쪽같이 원상복구되어 있었다. 애초에 함께 묶인 적이 없었다는 듯이.

  "…… 저, 아저씨?"

  "그 농구화, 어디서 구했어?"

  "…… 친구한테 샀는데요……?"

  "……."

  반행신은 학생을 일으켜 세우고,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이 신발 때문에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리로 연락해."

  "…… 네?"

  뜬금없는 말에, 그리고 명함에 찍힌 <괴기탐정> 네 글자에 얼이 빠진 듯 학생은 멍하니 반행신을 쳐다보다가 그 명함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반행신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사흘 후였다.




  학생은 발목에 깁스를 하고 정형외과 병실에 누워 있었다. 반행신이 나타나자 학생은 침대 밑에서 종이 쇼핑백에 넣은 것을 꺼냈다.

  "아저씨, 이거 가져가세요."

  그것은 문제의 그 커다란 농구화였다.

  "이 재수없는 신발, 아저씨 드릴게요. 제발 가져가세요."

  "발목은 어떻게 된 거야?"

  "그 역에서요, 지하철에 끼었어요. 문 열린 걸 보고 타려는데……."

  "발이 안 움직였지? 잘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줄에 묶인 것처럼 발만 멈췄지?"

  "어, 어떻게 아세요? 우와, 역시 괴기탐정이구나! 그럼 아저씨는 귀신도 봐요? 흡혈귀랑 싸우고 그래요? 사다코도 잡아요? 주문 외고 악마 내쫓고 하는 거예요?"

  학생은 자기 발목 부러진 것은 상관없이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TV가 애들 다 망친다니까, 하는 한탄을 한숨에 섞어 날려보내며 반행신은 종이백을 열고 농구화를 꺼냈다.

  새것은 아니지만 진짜 나이키였다. 어찌나 큰지 사이즈가 거의 항공모함급이었다. 학생의 깁스하지 않은 쪽 맨발을 힐끗 쳐다본 반행신은, 저 발에 이런 신발을 신었으니 문제가 있든 없든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농구화를 친구한테 샀다고?"

  "예. 친구 아는 선배가 중고 거래 쪽으로 빠싹하거든요."

  "발에도 안 맞는데?"

  "그런 건 상관없어요. 진짜 나이키잖아요! 게다가 에어조던 1! 그것도 검빨! 강백호가 신은 거하고 똑같은 모델이라구요!"

  애들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없다니까. 반행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농구화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반행신의 진지한 표정에 학생도 입을 다물고, 동물원에서 나무늘보를 구경하는 초등학생 같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퇴원하고 학교로 돌아가면 "나 진짜 탐정 봤다! 그것도 괴기탐정! 귀신도 보고 흡혈귀랑 싸우고 사다코도 잡는대!" 하고 친구들에게 떠들어대리라.

  농구화에서는 아무런 기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재연 검증>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반행신은 농구화를 도로 종이백에 집어넣고 일어났다.

  "벌써 가세요?"

  "조사를 해 봐야겠다."

  "그 재수없는 신발, 이제 나하고는 상관 없는 거죠?"

  "아마도."

  "정말이죠?"

  "아마."

  "아 참, 아저씨! 가기 전에요!"

  학생은 깁스한 발목을 반행신 쪽으로 내밀었다.

  "여기 사인 좀 해 주세요!"

  "사인?"

  "예! <김재환에게>라고 써 주시고요, <괴기탐정>이라는 말도 꼭 넣어 주세요!"

  정말이지 애들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없다니까.




  사무실 계단에서 반행신은 구두를 벗고 문제의 <진짜 나이키, 에어조던 1, 그것도 검빨, 강백호가 신은 것과 똑같은 모델>의 농구화로 갈아신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반행신의 큰 발이 편안하게 들어간다는 점에서 일단 시작은 좋았다. 반행신은 그 농구화를 신고, 가파르고 미끄럽기가 인수봉 B코스에 버금갈 만한 옥상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행신은 다시 내려왔다.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반행신은 계단턱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문제는 농구화만이 아닌지도 몰랐다.

  "…… 장소인가?"




  막차 시간이 가까운 지하철역은 한산했다. 반행신은 운행 중인 에스컬레이터를 버리고, 문제의 <진짜 나이키, 에어조던 1, 그것도 검빨, 강백호가 신은 것과 똑같은 모델>의 농구화를 신은 채 계단을 주의깊게 걸어내려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행신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행신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슬슬 다리가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반행신은 플랫폼에 선 채 지하철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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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 농성 >




  플랫폼은 한산했다. 반행신 이외에는 야근과 잔업에 시달려 거의 좀비 상태가 된 회사원 두 명, 야간자율학습 또는 학원 야간반 강의를 듣고 돌아가느라 마찬가지로 거의 좀비 상태가 된 채 MP3 플레이어의 이어폰으로 세상과 자신을 완전히 차단한 고등학생 한 명, 그리고 구석진 벤치에 앉아서 치골 의상의 여가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스포츠 신문에 코를 박고 있는 신입 노숙자 타입의 트렌치코트 남자 한 명뿐이었다.

  어떤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벨 소리와 함께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열차가 들어옵니다.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이 역은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가 넓으므로, 승객 여러분께서는 타고 내리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두 명의 회사원 좀비와 한 명의 고등학생 좀비가 전동차로 들어갔고, 반행신도 암암리에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출입문을 닫겠습니다.>

  어쩐지 스스로가 한심해진 반행신의 코 앞에서 압축공기의 치익 소리를 내며 전동차 문이 닫혔다.

  신입 노숙자 타입의 트렌치코트 남자가 여전히 스포츠 신문에 코를 박은 채 구석진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 전동차의 창문 밖으로 지나갔다.




  첫 술에 배부르랴?




  다음날도 첫차 시간에 맞춰, 문제의 <진짜 나이키, 에어조던 1, 게다가 검빨, 강백호가 신은 것과 똑같은 모델>의 농구화를 신고 반행신은 그 지하철역으로 나갔다.

  한 군데쯤 부러지거나 금이 갈 것을 각오하고 이번에는 계단을 뛰어내려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플랫폼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는데, 어제의 그 구석진 벤치에 어제의 그 신입 노숙자 타입의 트렌치코트 남자가 오늘자 스포츠 신문 ― 여전히 치골 의상의 여가수 사진이 크게 실려 있는 ― 에 코를 박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열차가 곧 들어옵니다…….>

  내릴 사람들이 나오기도 전에 마구 가운데로 비비고 들어가며 타는 만행까지 저질러 보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구(舊)한국인을 보았나, 폰카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릴까 보다, 하는 무언의 비난으로 가득한 시선이 넓은 등짝에 따끔따끔 꽂히는 것을 느끼며 반행신은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닫히는 문 너머로 쳐다보니, 신입 노숙자 타입의 트렌치코트 남자는 여전히 스포츠 신문에 코를 박은 채 구석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전동차가 세 역을 지나는 동안 반행신은 김재환이라는 그 고등학생을 만났을 때의 기억을 샅샅이 검색했고, 넷째 역에 도달하기 직전 <그 전과 그 날에는 그 역에서 그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반행신은 넷째 역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일착으로 뛰어내렸고, 그 역으로 되돌아갔다.




  그 신입 노숙자 타입의 트렌치코트 남자는 아직도 스포츠 신문에 코를 박은 채 구석진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반행신은 무료배포하는 일간지 한 부를 집어들고 그 옆에 가서 앉았다. 문제의 <진짜 나이키, 에어조던 1, 그것도 검빨, 강백호가 신은 것과 똑같은 모델>의 농구화를 슬쩍 그 남자의 신문 아래로 내밀어 보았지만 반응은 없었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신입 노숙자 타입의 트렌치코트 남자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고, 반행신은 참을 수 있는 한 참다가 화장실에도 다녀오고 다른 사람이 보고 버린 신문을 주워다 샅샅이 읽고 전동차가 들어오면 일어나서 플랫폼을 왔다갔다하며 스트레칭을 하고 배꼽시계 울리는 소리를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면 구내 매점에서 사 온 빵 봉지를 뜯고 우유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셨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반행신도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러시아워가 몇 차례 지나가고, 플랫폼의 벽시계에서 짧은 바늘이 한 바퀴하고도 반쯤을 더 돌아갔다. 막차 시간이 가까워지자 플랫폼은 텅 비었고, 사람이라고는 구석진 벤치에 나란히 앉아 신입 노숙자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반행신과 트렌치코트 남자 둘뿐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람'은 반행신 하나뿐이었다.

  플랫폼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으흠."

  반행신의 헛기침 소리가 그 침묵 속에서, 시멘트 벽에 젖은 걸레를 집어던진 듯한 소리로 퍼져나갔다. 반행신은 철로 건너편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꽤 오래 농성하는군요."

  하루 온종일 페이지 한 장 넘어가지 않은 채 펼쳐져 있던 스포츠 신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말이오?"

  반행신은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대답했다.

  "첫째로는 이 농구화의 양쪽 끈을 묶고 싶어 안달하고 있을 녀석이고, 둘째로는 그 녀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당신이지요. 저승사자 씨."

  "으흐흐흥."

  스포츠 신문 너머에서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그 스포츠 신문이 접혀 치워졌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스타일의 <라이방>을 쓴 얼굴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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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 농익다 >




  "당신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군."

  저승사자가 말했다.

  팬더 눈가의 반점만한 크기의, 색소가 짙은 <라이방>의 유리알 너머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반행신을 꼼꼼히 뜯어본 저승사자는 덧붙였다.

  "그 <녀석>이 당신의 그 농구화 끈을 묶으려고 안달하고 있다고?"

  "이 농구화는, 실제로 그 <녀석>에게 당했던 사람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왜 안 나타나는데?"

  "나도 그게 궁금한데 말입니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요. 언제부터 여기 있었습니까?"

  "어제 저녁부터."

  "이 역에서, 이 농구화를 신은 고등학생이 전동차와 플랫폼 사이에 끼어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 때 있었어요?"

  "아니. 그 다음에 왔소."

  "과연."

  반행신은 결론을 내렸다.

  "과연 뭐가?"

  "목소리를 낮춰요. 그 <녀석>이, 당신이 자기를 잡으러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

  저승사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그래서, 숨어서 안 나오고 있다, 그 말인가?"

  "그렇죠."

  "말인즉 그럴듯한데,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르지요."

  "어쨌든 그렇다면, 이렇게 죽치고 앉아 있는 건 소용없는 일이었다는 결론이로군."

  저승사자는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갑시다."

  "어디로요?"

  "어디로든. 좀 편한 곳으로."

  저승사자는 스포츠 신문을 미련없이 내던졌다.

  "일단 이곳을 나가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의.논.이나 해 봅시다. 그 <녀석>이 당신의 그 농구화를 따라다니지만 나 때문에 지금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면, 잠시 자리를 비워도 애꿎은 사람이 희생되지는 않을 거 아니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제의였고, 반행신은 받아들였다.




  "왜 하필이면 찜질방입니까?"

  반행신은 둘러쓴 수건을 양쪽으로 꼬아 양머리를 만들며 말했다. 트렌치코트는 벗었으면서도 <라이방>은 여전히 쓰고 있는 저승사자는 맥반석 달걀을 꾸역꾸역 주워먹으며 대답했다.

  "만 이틀을 꼬박 부동자세로 앉아 있어 보시오. 당신 팔다린들 어디 안 저리나."

  "현세의 물리적 요소에 제약을 받습니까? 그 몸이?"

  "그럼 내가 뭐 날아다니거나 벽을 뚫고 지나가거나 칼에 찔려도 멀쩡한 줄 알았소? 아무튼 TV가 애들 다 망친다니까."

  그래서야 귀신을 상대로 저승사자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나, 하는 말을 반행신은 맥반석 달걀과 함께 꿀꺽 삼키고 얼음식혜를 마셨다.




  찜질방 바닥에 케로로 중사 굴러다니듯 구르며 팔다리 허리 등짝 뱃가죽 엉덩이를 농익은 복숭아마냥 시뻘겋게 물러지도록 지지고, 맥반석 달걀 한 접시와 매참 김밥 두 줄과 얼음식혜 한 그릇을 깨끗이 먹어치운 다음에야, 저승사자는 앉음새를 고치고 <라이방>을 이카리 겐도 식으로 번뜩였다.

  "저승사자 ID 3-574-R-A-NIKO-L, 통칭 <라이방>이오. 편한 대로 부르시오."

  "괴기탐정 반행신입니다."

  "어디까지 알고 있소?"

  "문제의 농구화와 지하철 역에 동시에 관련된 무언가가 사람을 해치려 하고, 당신은 그 때문에 저승에서 파견되었다는 것까지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당신은 알지요?"

  "미안하지만 아직 자세히는 모르오."

  저승사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이 아는 것이나 우리가 아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소. 오히려 <농구화>가 개입되어 있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는 당신이 더 많이 알고 있소. 죽어서 저승으로 와야 될 혼 하나가 오지 않고 현세에 눌러앉아 있는데, 그 녀석을 잡으러 파견된 저승사자가 행방불명되었소. 연락이 끊어지기 직전에 있었던 장소가 그 지하철역이오. 그래서 내가 그 지하철역에 잠복하고 있었던 거요. 그런데 지하철역뿐 아니라 <농구화>라니, 그건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농구화요?"

  "<진짜 나이키, 그것도 에어조던 1, 게다가 검빨, 강백호가 신은 것과 똑같은 모델>이라는군요."

  "그게 무슨 소리요?"

  "나도 모릅니다. 농구화를 내게 준 학생이 한 얘기예요. 그 학생은 농구화를, 자기 친구의 선배로부터 중고로 샀답니다. 그 선배가 중고 농구화를 거래한다는군요. 그 학생은 그 농구화를 신고 그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다가 굴러떨어질 뻔했습니다. 그 순간에 농구화 양쪽 끈이 서로 묶여 있는 것을 제가 봤지요. 사흘 후 그 학생은 그 농구화를 신고 그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타다가,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에 끼어 발목이 부러졌습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구려."

  "운이 좋았지요. 학생은 그 농구화를 내게 넘겼고, 그래서 농구화에 붙은 사연을 알아내려고 난 그 지하철역에 갔던 겁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신었을 때는 농구화 끈을 묶어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승강장에 끼게 만들었던 그 <무엇>인지 <녀석>인지가, 문제의 농구화를 당신이 신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구려. 내가 있었기 때문에 나한테 들킬까봐 말이오."

  "당신이 없는 다른 지하철역이나 지하철역 바깥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그 <무엇>인지 <녀석>인지는 지하철역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가 자기 잡으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두려워한다는 것인데, 흐음……."

  저승사자는 상체를 건들건들 흔들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소. 내 동료가 이미 그 녀석을 잡으러 왔다가 행방불명되었단 말이오. 그런데 실종된 장소가 그 지하철역이기는 해도 그 녀석은 지박령이 아니오. 이동이 자유로운 녀석이오. 하지만 당신 말을 들어 보면, 상대는 그 지하철역에 얽매이는 지박령이란 말이오. 게다가 농구화의 끈을 묶어서 사람을 넘어뜨려 죽이거나 다치게 한다? 그런 일은, 그 농구화에 엄청난 애착을 갖는 원령이 아니면 불가능하오. 그런데 우리 쪽 자료에는 농구화 따윈 들어 있지 않소."

  "그 <녀석>은 뭘 하다 죽은 혼입니까?"

  "큰 것만 헤아려서, 강도 15회 강간 4회 퍽치기 6회인데 16회째 강도질 후 달아나다가 뺑소니차에 치어 죽은 녀석이오."

  "…… 그런 녀석의 혼이 대로를 활보한단 말입니까?"

  "제 명이 되어 죽은 사람이라면 우리 측에서 데리러 가니까 문제가 없지만, 갑자기 죽는 사람은 우리도 사건 접수 후에야 출동하니까 대책이 없소. 마침 순찰 돌던 저승사자에게 제때 발견되면 다행이고, 조금 늦더라도 죽은 자리 근처에 얌전히 머물러 있으면 상관없지만, 발 달린 혼이 어딘들 못 돌아다니겠소? 저승 가기 싫다거나 이승에 무슨 미련이 있다거나 등등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정말 골치아프오.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잡아야 하거든."

  저승사자의 말을 들으며 반행신은 <귀신에게는 발이 없다>라는 평소의 생각을 수정했다.

  "아니, 어쩌면……."

  저승사자는 건들건들 흔들던 상체를 딱 멈췄다.

  "내가 찾는 녀석과 당신이 찾는 녀석이 다른 거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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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 농치다 >




  반행신은 발 아래를 주의하며 천천히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그는 혼자였고, 그의 발에는 현실의 물건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집착이 강한 원령이자 지박령이 노리고 있는 <진짜 나이키, 그것도 에어조던 1, 게다가 검빨, 강백호가 신은 것과 똑같은 모델>의 농구화가 신겨 있었다. 지금이라면 이 농구화의 양쪽 끈이 서로 묶여 그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들 이상할 것이 없었다.

  반행신은 무사히 플랫폼에 도착했다.




  저승사자가 말했다.

  "설령 내가 찾는 녀석과 당신이 찾는 녀석이 다르다 해도, 난 저승사자요. 죽은 혼은 저승으로 와야 하고. 내가 잡으러 온 녀석이 아니라 해도 그 지하철역에 또다른 영혼, 그것도 현세의 물건에 집착한 나머지 사람을 다치게 할 정도의 힘까지 쓸 수 있는 원령이 있다면, 그것도 저승사자로서 간과할 수 없지. 일단, 내가 잠시 자리를 피할 테니 당신은 그 <진짜 나이키>인지 뭔지 하는 농구화를 이용해서 그 지박령을 끌어내 처리하시오."

  "처리라고요?"

  "처리하는 법은 알고 있을 거요. 살풀이라든가, 부적이라든가……."

  "그런 건 모릅니다."

  저승사자는 반행신을 쳐다보았다.

  "…… 괴기탐정이라면서?"

  "난 퇴마사가 아니에요. 조사해서 찾아내는 게 내 전문이지요."

  "…… 처리하는 법도 모르면서 귀신을 찾아낸단 말이오? 아니, 애초에, 귀신을 찾아내기는 어떻게 찾아내는 거요?"

  "불러냅니다. 이번 사건처럼, 농구화에 집착하며 지하철역에 머무르는 귀신이라면 내가 직접 농구화를 신고 지하철역으로 찾아가는 거죠. 업계 용어로는 <재연 검증>이라고 하는데……."

  "스스로 미끼가 되어 낚시질을 한단 말이오?"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군요."

  "귀신이 보이기는 하는 거요? 하기야 나를 알아본 것을 보면 보이기는 보이는 모양인데."

  "그런 귀신들은 모습을 나타내 주니까, 볼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 그래서 녀석들이 나타나면, 그 때는 어떻게 하는 거요?"

  "일단 대화부터 하지요."

  "대화?"

  "예."

  "농치는 데도 한도가 있지. 고작 인간의 말 몇 마디에, 저승을 거부할 정도의 귀신들이 순순히 승복한다는 거요?"

  "가급적, 그러기를 바라지요."

  "흉악한 녀석이 나타나면 어쩌려는 거요?"

  "그 때는 싸우지요."

  저승사자는 무릎을 먼지 털듯 탁탁 두드렸다.

  "이런 답답한 양반을 봤나. 그 전에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소? 그 농구화 같은 경우, 그걸 신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당신이 귀신을 제압하기 전에 귀신에게 당해 굴러떨어져서 목이라도 부러지면 어쩌려는 거요?"

  "난 몸 튼튼한 것 하나는 알아 줍니다."

  "……."

  저승사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중얼거렸다.

  "…… 하기야 당신 덩치를 보아하니 귀신한테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겠소만."

  "……."

  "……."

  한동안 반행신을 가만히 쳐다보던 저승사자가 말했다.

  "한 가지 물어 봐도 되겠소?"

  "뭡니까?"

  "난 저승사자라서 이 일을 하고 있소만, 당신은 왜 이 노릇을 하는 거요?"




  막차가 이미 떠난 플랫폼은 부자연스럽게 환한 조명 속에서 쥐죽은 듯이 고요했고, 터널을 따라 썰렁한 바람이 불었다. 사람이라고는 반행신뿐이었다. <진짜 나이키, 그것도 에어조던 1, 게다가 검빨, 강백호가 신은 것과 똑같은 모델>의 농구화가 내는 발소리가 쩌억, 쩌억, 쩌억, 하고 잘 달궈진 맥반석 돌판 위에 황소개구리를 패대기치는 듯한 분위기로 퍼져나갔다.

  만 이틀 밤낮을 꼬박 저승사자가 농성하고 있던 벤치에 반행신은 혼자 앉았다. 저승사자가 들고 있다가 버린 스포츠 신문 ― 치골 의상의 여가수 사진이 실린 ― 이 구겨져서 발치에 뒹굴고 있었다. 반행신은 그 신문을 주워들고 읽기 시작했다.

  프로야구 정규 리그전 결과, 연예인의 믿거나말거나 스캔들, 일기예보, 연재 만화, 영화 광고, 성형수술 광고, 전면으로 때린 신형 핸드폰 광고를 거쳐 경마 소식으로 넘어갈 때쯤, 반행신은 펼쳐들고 있는 신문 아래쪽으로 두 개의 맨발이 나타난 것을 깨달았다.

  손질이라고는 뒤꿈치 각질을 벗기는 것조차 한 적이 없지만, 무좀 자국도 없고 발톱과 발가락 모양도 그다지 일그러지지 않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성장하며 평범하게 학교를 다닌 고등학생의 발이었다. 단이 뜯어진 교복 바지의 바짓가랑이에서 기어나온 그 맨발은 플랫폼의 차가운 바닥 위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열 개의 발가락을 옹송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맨발이 그렇게 오그라든 것은 바닥이 차갑다거나 단단하다거나 지저분하다거나 거칠다거나 등의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단지 맨발이기 때문이었다. 꼭 신어야 하는 신발을 신지 못한.

  신발이 개인 아이덴티티의 상징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이윤기였던가?

  우는 듯, 투정부리는 듯, 징징거리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그거 내 신발이거든요?"

  반행신은 신문을 내렸다.

  반행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여드름 돋아난 볼 위로 졸보기 뿔테 안경을 쓰고 교복에 가방까지 멘 학생이었다. 교복 가슴에 <허순진>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황당무계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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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우혁 07.04.24 15:29 댓글 수정 삭제
    다시 활동의 폭을 넓히시는 겁니까? +ㅅ+
    세상이 풍성해지겠군요! 맛있게 읽겠습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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