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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무덤지기

2007.06.21 17:5306.21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오는게 아니었다.

  "야, 서봐."

  "왜 또?!"

  "너 그 영감탱이가 한 말을 다 믿는거냐? 정말 여기에 무덤이 있다고 믿어?"

  "그래서 산 주변을 다 돌아다니면서 캐물었잖아. 그러느라고 보름이나 걸렸어, 알아? 너의 그 의심병 때문에 보름을 더 보내기는 싫다. 그러니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녀석은 다시 정글도로 무성한 양치류를 툭툭 쳐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놈은 지치지도 않나!' 기분이 점점 더 나빠졌다. 눅눅하고 근질거리는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땀은 마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안개가 들러붙어 옷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녹색 천지였다. 녹색 잎사귀, 녹색 줄기, 녹색 덩굴. 그 속에는 작고 꼬물거리는 생물들이 안보이는 곳에 숨어서 바글거리고 있을 터였다. '그들 눈에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 거대하고 냄새나는 고깃덩어리? 내가 죽어 널부러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만찬을 즐기겠지?'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아무 생각없이 후려치자, 뭔가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바닥을 보니 엄지 손가락 만한 벌레가 문드러져 노랗고 끈적한 진액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원래 무엇이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터져 있었다. 난 욕지기를 느끼며 어느 양치류의 그루터기에 손을 문질렀다. 전혀 깔끔해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벌레의 내장과 체액이 손바닥을 통해 몸에 스며드는 기분마저 들었다.

  난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아, 씨발. 진짜 이 길 맞아? 여기 더 있다간 미칠거 같다고. 넌 둔해서 모르겠지만......"

  놈이 돌아보았다. '어라, 웃고 있잖아.' 땀을 줄줄 흘리고 마치 물에 빠졌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뺨에 찰싹 붙이고 있었지만, 놈의 두 눈만은 유리구슬처럼 반짝거렸다. 녀석은 '난 방금 왕으로 추대되었소.'라고 외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이 길이 맞냐고? 물론이지! 자, 봐! 네 눈앞에 있는 이게 그 무덤이 아니면 대체 뭐겠냐?"

  녀석이 옆으로 비키자 작은 분지가 드러났다. 나는 우리가 막 작은 절벽의 끝에 다다른 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분지도 역시 녹색나무와 양치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딱 한가지 다른게 있었다. 중앙에 우뚝 솟은 오각형 피라미드. 매일 내리는 스콜이 표면을 갉아먹고 느리고 강인한 덩굴이 틈새를 벌려 놓았지만, 주변의 어떤 나무보다 높이 쌓아올린 거대한 바위들은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다. 전설대로라면 2천년, 기록에 따르면 628년이나 된 장대한 유적이었다.

  "뭐? 둔해? 둔하긴 누가 둔하다는거야? 내가 말 했지? 분명히 여기 있을거라고 했잖아. 어디 계속 말해 보시지 그래? 이 길이 맞냐고? 내 말은 죽어도 못믿겠다고? 하하하하."

  '그래, 그래. 네가 이겼다.' 하지만 그게 뭔 대수란 말인가. 이제 우리는 저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황금과 보물을 가지고 나오기만 하면 된다. 비록 절벽에서 어떻게 내려갈지는 고민을 좀 해봐야 겠지만, 높이가 200미터는 족히 넘는 피라미드가 걸어서 도망가기라도 하랴?

  "아냐! 이제 믿어! 무조건 믿지! 네 말은 진리요, 빛이니!"

  "그걸 이제 알았냐, 이 자식아!"

  우리는 절벽 위에서 서로를 얼싸안고 원없이 웃어댔다.

  ******

  비시스토돌은 높은 나뭇가지에 배를 깔고 뱀처럼 엎드린 채 두 이방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깡마르고 헐벗은 몸이었지만 축축한 정글에선 누구보다도 재빨리 움직인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이방인들은 이제 '무덤'으로 곧장 걸어가고 있었다. 이미 신호는 보내두었다. 조금 있으면 '사냥꾼'들이 자리를 잡을 것이고, 덫과 독침이 주어진 역할을 다 할 것이다. 오늘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진입로를 감시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번에 그가 활약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가장 신선하고 귀중한 부분은 오로지 사냥꾼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비시스토돌이 이방인들을 추적하는 동안 식욕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뒤쫓는 동안 그의 시선은 줄곳 이방인들의 뒤통수에 꽂혀 있었다. 그 탓에 몇번이나 존재를 들킬뻔 했지만 타고난 본능을 떨쳐내기는 무척 힘들었다. 그리고 이번 제물은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것이었다.

  비시스토돌은 전혀 생각도 못해 본 사실이겠지만, 그의 종족은 오래 전에 계획되고 만들어진 방식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 정글에 살면서 오각형 피라미드를 세웠던 왕과 귀족들은 영혼의 존재와 육신의 부활을 믿고 있었다. 무덤의 붕괴와 도굴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전자는 영혼이 들어설 그릇을 파괴하고, 후자는 부활한 존재를 거렁뱅이로 만들기 때문이다. 충분히 튼튼하게 짓는다면 무덤의 붕괴는 막을 수 있었다. 문제는 저주받을 도굴꾼이었다.

  그래서 왕과 귀족들은 정글로 사람을 보내 붉은 털이 난 원숭이를 잡아왔다. 그들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고 피를 뽑고 뇌를 잘라내느라 수십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발로 서서 물건을 쥘 수 있는 원숭이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그 원숭이는 말도 할 줄 알았고 자기들끼리 뭉쳐 집단을 만들기도 했다.

  왕과 귀족들은 만족했다. 왕국이 필연적인 쇠퇴에 휩쓸려 결국 그들이 어둡고 공허한 곳으로 잠시 여행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말하는 원숭이들은 정글로 돌려보내졌다. 왕과 귀족들이 이들에게 내린 명령은 단 하나였다. '가서 정복하고 번창하라!' 오히려 원숭이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하지만 원숭이들은 선물의 대가로 한가지를 잃어야 했다. 실로 작은 것, 눈으로 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작은 결핍이 창조자들이 비시스토돌의 종족을 완벽한 감시자로 선택한 이유였다.

  왕과 귀족들은 붉은 원숭이에게서 작은 분자구조 하나만을 제거했다. 영장류의 뇌와 척수에서 만들어지고, 부족함이 감지되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호르몬을.

  종족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는 식욕으로 발현됐다. 정글로 흩어진 인간들은 곧 전멸했다. 몇 세대가 흐르자 주기적인 원숭이 사냥이 신성한 의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정글에 서식하는 영장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모두가 턱없이 적은 호르몬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시스토돌의 조상들은 영장류가 공급하는 호르몬의 한도 안에서 자연스럽게 개체수를 조절해 나갔다. 수많은 부족들이 생겨나 짧게 번성하다가 자멸했다. 그들은 호르몬 결핍으로 인한 폭력적인 자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나갔다.

  어느날 인간들이 다시 정글에 발을 디뎠을 때, 거대한 뇌에 흘러넘치는 호르몬은 그들에게 축복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인간 사냥에 적응해 나갔다. 정교한 도구를 만들고, 숨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조직의 중요성도 깨달았다.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졌다. 정글에 들어선 어떤 인간도 살아서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들은 실로 효과적인 감시자였다. 바로 이것이 왕과 귀족들이 의도한 바였다.

  비시스토돌과 그의 종족은 창조자들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찍힌 낙인이 그들을 옭아메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더라도 그들은 왕과 귀족들의 썩어 문드러진 유해를 지키는 감시자로 남을 것이다.

  비시스토돌은 분지를 바라보았다. 웃고 떠드는 이방인들 너머로 오각형 피라미드가 망토 같은 짙은 그림자를 질질 끌고 있었다. 그림자 밑에서 그의 동족들이 낙엽 사이의 괄태충처럼 조용히 움직이며 축제의 첫걸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분자구조의 결핍이 이끌어내고 식욕과 관습으로 표현되며 결국 창조물의 한계를 재확인하는, 오래되고 끔찍한 축제였다.

  그들은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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