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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눅눅하다

2007.06.19 23:1306.19





        <눅눅하다>




  타바콜란트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1년 내내 눅눅하게 끼는 안개도, 그로 인해 국민들이 아이부터 어른까지 달고 사는 관절염도, 불안정한 지맥도, 걸핏하면 여기저기에서 뿜어나오는 섭씨 100℃짜리 온천이나 이글거리는 마그마도 아니었다. 타바콜란트의 주요 생산품이자 최대 수출품인 10대 니코를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처치했으면 좋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철천지 원수는 바로 타바콜란트의 중앙에 있는 개스 산에 살고 있는 독룡이자 드래곤들의 왕 스모, 일명 <스모 킹>이었다.

  대륙 제일의 독룡인 스모 킹은 개스 산꼭대기의 드래곤 레어에 버티고 있으면서 매년 타바콜란트의 사람들로부터 10명의 여자와 10명의 남자, 100마리의 소와 100마리의 돼지로 이루어진 산 제물을 받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그러면서도 스모 킹은 걸핏하면 레어에서 기어나와 타바콜란트의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독브레스를 뿜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가축을 잡아가고는 레어로 돌아가는 대가로 더 많은 제물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스모 킹에게 달라는 대로 제물을 바쳐야 했다.

  악독한 스모 킹을 죽이기 위해, 타바콜란트의 사람들은 10대 니코를 팔아 번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벌써 수백 년에 걸쳐 온 대륙에서 유능한 드래곤 슬레이어를 찾았고, 그들의 현상금에 눈이 멀어서든 악룡을 퇴치하겠다는 정의감에서든 지나가다 들렀든 간에 나타난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막대한 보수와 명예의 약속을 받고는 개스 산의 드래곤 레어를 향해 보무당당하게 돌격했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망나니로 소문난 말보로 산의 붉은 화룡 레드를 물리치고 단숨에 온 대륙에 이름을 날린 드래곤 슬레이어 라이테르 지포조차도, 개스 산의 독룡 스모 킹에게는 당해내지 못했다.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번뜩이는 검을 높이 들고 돌진하는 드래곤 슬레이어 라이테르 지포를 본 독룡 스모 킹은 왼쪽 입가를 15도 치켜들고 오른쪽 콧구멍을 지그시 찌그러뜨려 단 한 방의 독브레스를 뿜었고, 드래곤 슬레이어 라이테르 지포는 그 독브레스를 맡자마자 사지를 버둥거리고 목을 움켜잡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목격자의 증언인즉 지포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씨…… 씨발 놈…… 이 좀 닦아……!"

  최고의 드래곤 슬레이어였던 라이테르 지포마저 쓰러진 지금, 이제 악독한 스모 킹을 죽일 수 있는 용사는 대륙에 남아 있지 않았다. 타바콜란트의 사람들은 쓰러져 울부짖었고, 대륙의 모든 사람들은 언제 닥쳐올지 모를 스모 킹의 위협 앞에 몸서리쳤다.

  그들을 구원한 것은, 어느 날 마른 하늘에서 나타난 영웅이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 영웅이 처음부터 영웅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영웅 이전의 영웅은 하늘에서 개스 산의 드래곤 레어로 떨어졌고, 대륙 최고의 악룡이자 용 중의 용이었던 독룡 스모 킹은 그 영웅의 발에서 벗겨진 신발짝에 머리를 맞고 뇌진탕으로 죽었다. 영웅 이전의 영웅은 그렇게 죽은 스모 킹의 5천 년 묵은 드래곤 하트를 빼먹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 단숨에 대륙을 평정했다.




  "억울합니다!"

  "네 죄도 많은데 뭘 그러냐."

  "아무리 죄가 많더라도 그렇게 죽는 건 너무합니다!"

  죽어 저승에 간 스모 킹은 염라대왕 앞에 엎드려 열흘 밤낮을 울며 빌었다.

  "거 참 시끄러운 녀석이로구나."

  마침내 스모 킹의 울음소리에 단단히 짜증이 난 염라대왕은 홧김에 판결을 내렸다.

  "정 그렇게 억울하다면, 어디 내세에는 네가 그 녀석이 되고 그 녀석이 네가 되어 보아라."

  그리하여 스모 킹은 환생했다.




  "꼰대, 뭘 야리슈? 담배나 한 갑 사다 주고 야리슈."

  스모 킹의 환생인 대한민국의 중딩 김수모는 으슥한 골목길에서 풀린 눈으로 담배를 뻑뻑 피우며, 담배 연기 너머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한 어른을 향해 걸찍한 가래침을 뱉었다.

  그 어른이 말했다.

  "네 애비다."

  언젠가 고딩이 되어 한강에 뛰어들어 이계로 진입하여 5천 년 묵은 독룡의 머리 위로 떨어질 날을 꿈꾸며, 스모 킹 아니 김수모는 아버지에게 녹신하게 얻어터졌다.
황당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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