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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하늘의 노란 눈

2007.06.15 21:2706.15

  때가 되었다.

  오늘이 그 날이라는 것은 눈을 뜰 때부터 알고 있었다. 햇살이 유난히 환해 보였기 때문이다. 돌벽을 사이에 둔 동료들도 모두 눈치챈 모양이었다. 다들 오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누군가가 죽는다는 사실이 분위기를 무겁게 했다. 남은 것은 이제 누가 죽느냐는 것이다.

  간수가 멀리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감방 전체의 숨이 거칠어졌다. 누가 뜻모를 소리를 웅얼대는게 들렸다. 난 아무렇지 않게 똑바로 앉아 있었지만, 손가락은 허벅지 부근을 신경질적으로 비벼대고 있었다. 쩔그렁 거리는 열쇠 소리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기쁨에 찬 작은 소요가 뒤따랐다. 목숨을 구제받은 자가 지르는 행복한 비명. 간수가 내 앞을 지나가면 나도 그러리라 마음먹었다.

  드디어 발소리가 들렸다. 저게 문 앞을 지나가면 난 며칠의 생명을 보장받게 된다. 어느새 난 오른손 손가락을 물어뜯고 있었다. 명치가 아려오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나가라. 지나가라. 지나가라. 지나가라.

  발소리가 멈췄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뚝'소리라도 나는 것 같았다. 곧이어 자물쇠가 덜그럭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문이 열리고 간수가 발을 내딛는 그 순간, 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무뚝뚝한 표정의 간수 둘이 날 일으켜 세워 손발에 쇠고랑을 채웠다. 남은 한명은 그걸 지켜보면서 간단한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번호? 67145번. 외모? 약간 검은 피부에 좁은 미간. 아래턱에 상처. 좋아. 좋아. 그는 날 한번 바라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안심시킬 의도였다면 완전한 실패였다. 난 그자의 얼굴에서 동정심과 경멸감을 먼저 읽어냈기 때문이다.

  남은 둘은 내 양 팔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사형수 구역을 나서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잠시 저항해 보았지만 곧 포기해 버렸다. 힘을 쓸수가 없었다.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몸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햇살이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그것이 날 우울하게 했다.

  드디어 사형장에 도착했다. 나른하고 미지근한 기운이 주변을 멤돌았다. 죽음의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나를 일렬로 서 있는 돌기둥으로 끌고갔다. 꼭대기와 중간쯤에 쇠고리가 달려있는 두꺼운 기둥들이었다.

  간수들은 아무 말 없이 가장 가까운 기둥에 날 묶기 시작했다. 일단 쇠고랑을 위 아래 쇠고리에 연결하고, 따로 가져온 길고 튼튼한 끈으로 몸통을 둘러멨다. 일을 다 마치자 그들은 날 한번 돌아보더니 서둘러 밑으로 내려갔다.

  위를 올려다보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죽음이 머리 위까지 다가온 것이다. 이미 썰물이 시작되었고, 수면은 돌기둥 꼭대기를 잠식하고 내 정수리로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뜨겁고 건조한 공기에 노출될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가미가 공기를 들이마시자 숨이 턱 막혀왔다. 연한 피부에 덮인 점막이 말라붙어 허옇게 일어섰다.

  그 고통의 순간에 난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것은 커다란 눈과 같았다. 분노로 치켜뜨고 절대 깜빡이지 않으며 죽음의 광선을 내뿜는 노란 눈. 난 이 무자비한 눈과 대항하기에는 너무 약했고, 그 아래서 천천히 말라 죽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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