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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곱다

2007.05.28 11:1105.28





        <곱다>





  프랑스 대혁명 때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단 스타킹 한 짝은 망꽁드레 백작 가문에서 대대로 귀중히 간직해 내려오는 가보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단 스타킹이 망꽁드레 백작 가문의 소유가 된 까닭은 다음과 같다.

  혁명이 있기 한참 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가면무도회에서 측근들과 함께 하룻밤 내내 지치도록 춤을 추고 돌아오다가, 간밤에 내린 소나기로 질퍽해진 길에 그만 마차 바퀴가 빠졌다.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망꽁드레 백작의 선조가 그 모습을 보았고, 마차에서 내리는 왕비의 아름다운 발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물구덩이 위에 망토를 벗어 까는 기사도적 희생 정신을 발휘했다. 그러나, 영국의 월터 롤리 경이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앞에서 했다고 전해지는 선례에 비해서는 그 망토를 짠 천의 발이 너무 곱고 너무 얇았던 탓에, 끝내 왕비는 굽 높은 구두 속까지 흙탕물을 질퍽거리면서 끌어낸 마차에 올라야 했다. 망연하니 서 있는 망꽁드레 백작에게 흙탕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씌우며 왕비의 마차는 출발했다. 쓸모없이 물투성이 흙투성이가 된 망토를 하릴없이 주워들던 망꽁드레 백작은 왕비의 마차가 떠난 자리에 둘둘 뭉쳐져서 떨어져 있는, 왕비가 방금 벗어서 창 밖으로 집어던진 흙탕물투성이의 비단 스타킹 한 짝을 보았다. 망꽁드레 백작은 그 비단 스타킹을 경건하게 주워들어, 손수건으로 잘 싸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조상이 드워프에게 사사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한 프랑스 최고의 금세공 장인을 불러서, 은으로 만들고 금으로 도금하여 보석으로 테를 두르고 수정 뚜껑을 단단히 박은 성물함을 만들어서 그 비단 스타킹을 간직했다.

  망꽁드레 백작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유전적 질환 중 여자의 발[足]에 대한 페티쉬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다.

  어쨌든 그리하여 망꽁드레 백작은 이렇게 얻게 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비단 스타킹 한 짝을 자신의 수집품 중에서도 으뜸가는 보물로 여겨, 결코 남의 눈에 노출시키지 않고 고이고이 간직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로베스피에르로 대표되는 자코뱅당의 독재로 왕과 왕비와 숱한 구귀족들의 목이 날아가고 랑뜨냑 후작 같은 구귀족의 대표들은 앙시앵 레짐을 위해 싸우고 그러다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 이번에는 자코뱅파의 목이 숱하게 날아가고 나폴레옹이 즉위하여 제국을 건설했다가 러시아의 동장군에게 감히 도전하는 바람에 그 제국이 무너지고 영국 수상 피트를 중심으로 한 대동맹이 왕정을 복고시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나폴레옹이 재집권하여 프랑스의 신문들이 칼은 펜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몸으로 증명하던 중에 그만 백일천하로 워털루에서 깨빡치고 이리 꿈틀 저리 뒹굴하는 와중에 암굴 속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복수의 칼을 갈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참으로 용하고 용하고 또 용하여 세 번 용하게도 이리 파도타고 저리 파도타며 목숨을 끝내 부지하는 데 성공한 망꽁드레 백작 집안에서는 또한 용하고 용하고 또 용하여 세 번 용하게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비단 스타킹 한 짝을 담은 성물 상자를 끝내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스에는 트로이 전쟁의 미녀 헬레네의 왼쪽 유방 모양을 본떠 만든 황금 술잔이 있다고 하고, 근세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방을 본떠 만든 술잔이 바로 샴페인 글라스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샴페인 글라스의 모양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다. 동양에서도 미녀 양귀비가 마외역에서 목을 매어 죽은 후 어느 노파가 어떤 인연으로인지 그 신발 한 짝을 어떻게 얻어 가졌는데 사람들이 그 신발을 보는 것으로 얼마, 그 신발에 술을 따라 마시는 것으로 또 얼마를 앞다투어 내느라고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타킹으로도 그 비슷한 장사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망꽁드레 백작 집안에서는 첫째로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호사가들이 치르는 구경값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둘째로 여성의 발 페티쉬를 유전적으로 징하게도 물려받아 온 사람들인지라 문제의 성물 상자를 결코 내놓지 않았다.

  그 상자에 눈독을 들인 사람이 바로 루팡 6세 곰팡이었다.




  "세상의 보물이여, 다 내 주머니로 오라. 내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이 들으시면 포복절도하실 소리를 지껄이면서 곰팡은 상자를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 훔쳐낸 후에는 스타킹은 스타킹대로 따로 보관하고 상자는 상자만으로도 중값 나갈 골동품이니 상자대로 따로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었다. 물론 망꽁드레 백작 집안에서도 문제의 상자를 지키기 위해 갖가지 대책을 세워 놓았지만, 6대조 할아버지의 온갖 지혜를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물려받은 곰팡에게 그까짓 경비장치 정도는 씹다 버린 껌에 불과했다.

  순찰조의 눈을 속이고, 감시 카메라를 먹통으로 만들고, 천연루비 일곱 개라는 엄청난 밑천을 들여 감지기의 적외선을 휘어 버리고, 가짜 지문을 뜨고, 목소리를 변조시키고, 바닥의 압력 감지 장치마저 미션 임파서블의 재주를 부리며 모두 피하고, 망꽁드레 백작 집안 대대로 모아들인 것이 집안 유산으로 쌓이고 쌓여 이멜다 여사마저 가뿐히 능가하게 된 여성용 구두 컬렉션을 곁눈질하며, 드디어 곰팡은 문제의 장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비단 스타킹 한 짝이 들어 있는 성물 상자가 보관된 곳에 도착했다. 문제의 상자는 겪어온 기나긴 세월과 그 동안의 역사적 사회적 내적외적 풍파에도 아랑곳없이 금은보석과 수정의 영롱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인디애나 존스라도 피해갈 수 없는 함정을 모두 벗어난 것을 스스로 축하하며, 곰팡은 경건하게 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상자 안에서 수백 년을 묵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발냄새가 사린 이상의 독가스가 되어 올라와서 곰팡의 정신을 마비시켰다.




  방독면을 쓰고 들어온 경비원들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진 곰팡을 끌어내어 찬물을 뒤집어씌우고 진한 커피 한 잔을 먹인 후 경찰에 넘겼다.




  망꽁드레 백작 집안 사람들은 여성의 발에 대한 페티쉬와 함께, 중증의 축농증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황당무계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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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늬비 07.07.02 14:48 댓글 수정 삭제
    이거 죽이네요 ㄲㄲㄲ 글빨도 엄청나시고
  • No Profile
    황당무계 07.07.07 13:17 댓글 수정 삭제
    쓸데없는 말장난만 늘어놓았다고 모처의 모님께 실컷 꾸중만 들었던 글입니다.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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