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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냉장고

2007.05.23 15:5405.23

냉장고


겉은 뜨겁고 속은 차갑다. 네모나고 어두컴컴한 그 속은 까발려졌을 때에야 빛을 밝힌다. 언제나 남모르는 소리로 윙윙대고 언제나 나보다도 높게 우뚝 서 있다. 그래서 그것이 그토록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어릴 적 아무 이유 없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 혹은 달밤의 구석 뒷간이나 혼자 남은 방의 옷장 속과 같은 것을 무서워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냉장고가 그 대상이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나는 냉장고가 그토록 무서웠었다. 적어도 그림일기를 삐뚤빼뚤 쓸 때까지는 냉장고를 무서워했다. 냉장고 손잡이를 잡을 때 불현듯 스치는 서늘함에 나는 그 문을 열지 못하고 손을 떼곤 했다. 그 안에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어두운 방안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무언가가, 내 눈을 응시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집 냉장고는 소리가 컸다. 이상하게도 소리는 모두가 잠든 밤에만 났다. 밤에 잠을 깨면 언제나 고요를 가르는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눈을 뜨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 벌벌 떨어야 했다. 엄마의 팔을 붙잡았지만 엄마는 주술에 걸린 듯 꼼짝하지 않았다. 냉장고는 남몰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짧은 다리로 슬금슬금 기어 다녔다. 이 방 저 방 앞에서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나는 냉장고가 방 안까지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문턱은 냉장고에게 너무 높았다. 냉장고의 소리가 점점 가까이 왔다. 그리고는 어서 밖으로 나오라고 속삭였다. 물론 나는 눈을 꼭 감고 엄마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 다음날이면 냉장고를 버리자고 떼를 쓰곤 했다. 그 때의 난감해 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세상에, 냉장고를 버리자니. 그렇게 떼 쓰는 건 달래기도 참 어려웠을 것이다.


또 냉장고에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명절날이었다. 명절이면 온 일가친척들이 시골 큰집으로 모인다.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작은아버지에 사촌 동생이나 형이 각각 둘 혹은 셋씩 모이면 벽돌과 시멘트로 다시 지은 할아버지의 집이 미어터진다. 방 하나에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주무시고 작은 방에 어머니와 여자들이, 사랑방에는 남자들이 잔다. 그렇게 하고도 넘쳐나는 등짝은 마루로 나가야 했다. 사형제가 똑같이 답답한 것을 싫어하시는 아버지들은, 방에서 밀려난 나는 거실에서 잠을 잤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설이었다.


나는 모두가 잠든 새벽 어슴푸레 눈을 떴다. 벽을 더듬어 오줌을 누고 다시 잠들려는 차, 나를 부르는 어떤 소리에 그 쪽을 돌아보았다. 냉장고, 냉장고였다. 냉장고는 할아버지 집에도 있었다. 냉장고는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 눈을 쳐다보았다. 냉장고는 비웃는 듯 드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냉장고는 우리 식구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 우악스런 입을 벌려 잠자고 있는 우리 중 누군가를 삼킬지도 몰랐다. 나는 아빠를 깨우려 했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버지 사형제는 생김새도 덩치도 코 고는 소리도 비슷해서 어둠속 실루엣만으로는 아버지를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설을 지나는 새벽은 너무나 고요해서 냉장고 소리만이 온 집안을 삼켜버릴 듯했다. 그것을 듣는 사람도 잠에서 깨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 무지막지하고 공포스런 소리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 날, 나는 한 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냉장고에 트라우마라던가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건 마치 거위의 각인과도 같았다. 그저 꼬맹이 시절의 고집일 수도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 가끔 심리학책도 뒤져보며 내가 왜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까 고민해 봤지만 만족할만한 해석을 찾지 못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자람으로써 그것은 극복되어갔다. 아니, 나도 모르는 새 파묻혀 버렸다고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성장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아들임으로 이루어졌다. 냉장고에 대한 기억도 발이 푹푹 쌓일 정도로 내리고 언 다음 다시 그 위를 덮는 눈과 같은 새로운 것들에게 묻혀 버렸다. 나는 자라며 액체와 고체의 분자 구조의 차이에 대해 배웠다. 물이 고체가 되고 기화되어 공기가 된다는 것도 배웠다. 그와 함께 냉매가 단열팽창하며 온도를 떨어뜨리는 원리로 냉장고가 작동된다는 것도 배웠다. 쇠와 플라스틱 덩어리인 냉장고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다. 모터소리도 더 이상 무서울 이유가 없었다. 세상은 언제나,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자랐고 기억은 점점 깊숙이 파묻혔다.






“지금 나가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저녁때 들어올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발바닥을 비벼 뒤꿈치를 구두 속에 집어넣었다.


“얘는 아직도 신 그렇게 신네. 어릴 때부터 누누이 고치라고 했건만.”


나는 편지함의 각종 고지서를 꺼내 어머니께 건넸다.


“계속 집에 있을 거죠?”


어머니는 그것들을 훑어보며 말하셨다.


“요새 전기세가 적게 나오네. 아무래도 안 쓰는 코드를 뽑아 버릇해서 그런 것 같다. 어쩜 이렇게 확 달라질까.”
“그럼, 다녀올게요.”
“잘 다녀와.”


나는 출근을 했다.


나는 지하철 통근을 한다. 오늘 같이 늦지 않았을 때에는 가볍게 걸어갈 수 있게 지하철역이 가깝다. 지하철을 타고도 환승 없이 바로 회사에 갈 수 있어서 출근시간은 만족스러운 편이다. 다만 최근에 작은 신경 쓸 거리가 생겼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고가도로가 있는데 그 밑에 한 정신 나간 거지가 산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까닭에 그곳이 거처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최근 들어 거기에서 자주 출몰한다. 문제는 그가 난데없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 말로는 IMF때부터 나앉아 있다가 어느 날인가 미쳐버렸다는데, 그동안 한 번도 가족과 만난 적이 없고 이제는 호적도 말소되었다고 했다.


사연이야 어쨌든 그는 귀찮은 존재다. 오늘도 검뎅이 얼굴에 흰 눈자위를 부릅뜨고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마 그가 쌓음직한 작은 깡통 무더기를 내가 차고 지나가서 그랬던 것 같은데, 누런 이빨로 집어 삼킬 듯이 달려드는 그 앞에서 나도 모르게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괜히 약 올라서 다른 깡통 탑을 걷어 차주고 재빨리 도망쳤다. 거지는 빽빽거리며 그의 영역을 벗어날 때까지 쫓아왔다. 아침부터 달리느라 와이셔츠에 땀이 찼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지하철에서도 문득 그 거지가 떠올라 실없는 사람처럼 혼자 키득거리기도 했다.


출근할 때와 나란한 철로를 타고 퇴근 했다. 내려서는 아이스크림 한 그릇을 샀다. 거지는 보이지 않았다.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은 냉장고에 들어갔다. 식구가 모두 모이고 한가롭고 평화로운 저녁시간이 지났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조기 축구회에 나가셨다.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아버지가 이미 거쳐 간 상을 비웠다. 햇볕이 들어오는 소파에 드러누워 심심한 아침 쇼프로를 이지저리 돌려 보았다. 어머니는 다시 침대에 누우셨다. 일요일은 말 없는 날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식구에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이었다. 더불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천천히 보낸다. 20년이 넘게 함께 살아오며 터득한 지혜였다. 그렇게 그날 하루를 손에 모래를 쥔 듯이 조금씩 흘려보낸다면 느낌이나마 허둥지둥 살아온 지난 6일을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침에만 잠시 거실을 들여다보고 가는 햇볕도 오래 모으니 꽤나 뜨거웠다. 나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먼지들을 휘저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간단히 아침은 먹었지만, 주전부리를 찾아 부엌을 기웃거렸다. 어제 사온 아이스크림이 떠올라서 냉동실 문을 열었다. 찬장에서 숟가락 하나를 집어 다시 소파에 파묻혔다. TV에서는 일요일이면 꼭 챙겨보는 영화 프로그램이 시작하고 있었다. 완벽했다.


막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려는 차,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어젯밤 분명 반 정도 남겨놓은 아이스크림이 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방안의 어머니께 물었다.


“아버지가 아침에 아이스크림 드시고 갔어요?”
“모르겠다.”


아버지께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시기는 하지만 운동하러 가는 데 먹은 것 치고는 그 양이 너무 많았다. 어머니는 드시지 않았다고 하셨다. 석연치 않았지만 나는 관심을 TV로 돌리고 남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어치웠다. TV프로가 끝나고 아이스크림 컵을 싱크대에 갖다놓았다. 잠시 후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백화점 구경을 나가셨다. 나는 대학 동기들의 호출을 거절하고 심심하게 하루를 보냈다. 부모님은 저녁 무렵에 들어오셨다.


계기는 바로 이 사소한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 작은 일상의 균열을 발견한 것이. 그 작은 의식의 균열에 돋보기를 갖다 댄 꼴이 되었다. 그다지 눈여겨보고 있지는 않았으나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손조차 닿지 않는 냉장고의 깊숙한 곳의 저장물이 어느 새인가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들어가 있었는지 어머니조차 기억하시지 못하는 것들이라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다만 없어진 아이스크림에 잠시 의식을 두었던 나는 그 차이를 눈치 챌 수 있었다. 그것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냉장고 안을 꼼꼼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 결과 심증은 확증으로 굳어졌다. 매일매일 냉장실에서 냉동실에서 음식물이 조금씩 사라졌다. 급기야는 너무 명백하게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고기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어머니도 뭔가 달라진 것을 느끼신 것 같았다.


“두원아. 냉동실에 고기 못 봤니?”


어머니의 물음은 어머니께서 냉장고 정리를 하신다는 가설을 날려버렸다. 나는 얼떨결에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전에 친구 왔을 때 둘이 찌개 해 먹었어요.”
“그래? 그럼 시장 볼 때 사와야겠네.”


나는 마음을 놓았으나 어머니는 다시 물으셨다.


“근데 냉동실이 조금 깨끗해진 것 같다. 네가 정리했니?”
“네? 아, 네. 좀 오래된 건 치웠어요. 좀 좁은 것 같아서.”


다행히 어머니는 이번에도 넘어가셨다. 상식적으로 물건이 이유 없이 사라진다는 가설은 그것을 세운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술 더 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의미 없고 나 혼자만의 닫힌 세계가 떠올랐다. 혹시 냉장고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자기 뱃속의 음식을 탐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음식들이 사라지는 것은 냉장고가 소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음식물을 에너지로 썼다면, 그래서 전기를 적게 먹은 것이라면. 그 정도라면 내 SF적 상식 범위 내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 시커먼 뱃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게 뭐있는가? 스스로도 웃음이 났다. 내가 언제부터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는 귀신이나 괴물 따위를 보지 못했던가. 냉장고가 냉장고로 남게 된 그 언젠가 이후, 세상 많은 것들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그 이후로 처음 느끼게 된 공상이었다.


유년기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두려움의 원천을 지식으로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그것을 조금씩 의심하고 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에는 ‘검증’을 통해 두려움을 씻어낼 수 있었다. 나는 수시로 냉장고 다리 밑의 장판을 조사했다. 끌리거나 짓눌린 흔적은 없는지, 또는 고물상에서 냉장고 컴프레셔를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나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는 몇 번이나 나의 상상을 비웃었다. 대우가 거짓이라면 명제 또한 거짓이다. 냉장고가 음식물을 소화한다면 전력 공급에 문제가 있거나 공급이 끊겨도 자동할 것이다. 나는 손전등을 들어 냉장고 뒷부분을 비추어 보았다. 냉장고 구조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눈으로 확인하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한참을 이리저리 비추던 나는 콘센트에 연결된 코드를 보았다. 그러나 너무 분명하게, 코드의 목 부분 피복이 벗겨져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쥐가 물어뜯었을 수도 있었다. 쥐 따위는 평생 햄스터조차 직접 본 적이 없지만 우리 집이라고 쥐가 살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문제는 냉장고가 충분한 전력을 공급받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구리선이 몇 가닥 끊어진 것이 몹시 위험해 보이기는 했으나 냉장고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괜히 머리가 아파왔다. 더 이상 생각하기 싫었다. 나는 코드를 구실로 냉장고를 내다버리기로 했다.


“냉장고가 너무 오리 되지 않았나요? 뒤에 보니까 코드가 완전히 망가졌더라고요. 위험하겠어요.”
“그래? 엄마도 슬슬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번 기회에 바꿀까?”
“그래요. 냉장고 속 정리도 할 겸.”
“아버지랑 의논해 보고. 정말 오래 썼다, 그지? 두원이 걸음마 할 때부터 있었는데.”
“살 땐 나도 돈 보탤게요. 되도록 빨리 바꿔요. 저거 자칫하다가는 불 날수도 있겠는데요.”


나는 일사천리로 새 냉장고 구입 계획을 진행시켰다. 부모님은 난데없이 새 냉장고에 집착하는 나를 보고 의아해 하셨지만 나는 이야기가 나온 그 주에 오래된 냉장고를 퇴출시키고야 말았다. 냉장고는 스티커가 붙고 뱃속이 비워진 채로 대문 밖에 놓여 졌고 다음날 바로 치워졌다. 새로 온 냉장고는 소리도 작고 저장물이 사라지는 일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안심했다. 전 냉장고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것으로 된 것이다. 더 이상 확인할 길도 필요도 없었다. 어릴 적과 같은 의미 없는 착각이었다고 믿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냉장고는 완전히 내 주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수거된 줄 알았던 냉장고는 고가도로 밑에서 발견되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예의 그 거지가 나타나 으르렁댔다. 그가 버려진 냉장고를 자신의 보금자리로 옮긴 듯 했다. 어떻게 옮겼는지 냉장고는 상처투성이였고 집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 스산해 보였다. 코드를 꼽을 곳도 없을 텐데 가져다가 뭘 할는지는 모르겠다만 이제 냉장고는 그의 소유가 되었다. 이제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어릴 때 기억이야 어쨌든 냉장고는 이제 우리 집에 없다. 나는 의식적으로 고가도로 밑을 지나쳤다. 그늘 밑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냉장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 길을 지났다. 의미 없는 불안감이라고 몇 번을 되뇌면서도 나는 그것에 대한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거지는 자신의 냉장고를 관찰하는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그도 나름대로 자신의 것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요즘 들어 그 곳에 라디오나 고철 같은 잡동사니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아 그곳에 자리 잡은 듯했다. 거지는 아무 문제없이 냉장고를 쓰고 있었고(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곳을 그대로 지나쳤다.


며칠 동안 아무런 징후도 없었고 걱정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지는 언제나 고가도로 밑에 있었다. 언제나 나를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내가 지나다니는 것에 익숙해진 듯했다. 다만 그는 여전히 그의 영역에 발을 디디면 사납게 달려들었다. 민원이나 넣어볼까 생각해 봤지만, 서로가 서로의 영역만 존중해 준다면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냥 그대로 그를 인정하고 사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찌 되었든 냉장고는 나의 집을 떠났고 그 냉장고가 어떤 짓을 하는 지는 전적으로 거지가 떠맡을 일이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나서 나는 고가도로로의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한동안 냉장고를 완전히 잊고 살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그 날에는 고가도로 밑의 거지도, 그의 냉장고도 그저 스쳐가는 길거리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나는 틈틈이 시계를 보며 잰걸음으로 역을 향해 걷는 중이었다. 가급적이면 고가도로 밑으로 걷는 것은 피했으나 그 날은 어쩔 수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지각과 세이브의 경계 위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열차가 금방 온다면, 도중에 선로정리 등으로 멈춰 서지만 않는다면 동료들이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있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테고 그렇지 않는다면 지각일 터였다. 이럴 때에는 불확실한 버스를 타기보다는 나의 다리를 믿었다. 조금 과장해서 나의 속력과 거리와 배차간격과 경험적 시간을 계산하며 움직이고 있으니 조금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조급한 마음도 뒤로 하고 문득 멈춰서고 말았다. 고가도로를 막 벗어나려는 위치였다. 머리위로 지나가는 차들이 내는 소음이 공명하는 다리 밑에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이내 차들 소리에 묻혀버렸으나 나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20년이 넘게 들어온 소리이니. 나는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다시 발을 땠으나 왜 그런지 다리는 뒤를 향했다.


그 곳에서 냉장고는 다시 눈에 푸른 불을 켜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무언가에 이끌린 듯 냉장고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가갈수록 온갖 소음 속에서 희미하게 속삭이던 그 소리는 점차 구체적으로 들려왔다. 그것만의 언어로 중얼거리는 소리, 눈에 보일 것 같이 뚜렷하게 울려 퍼지는 그 소리였다.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것은 어릴 적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귀를 막아도 소리는 점차 증폭되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이 망할 냉장고를 꺼버려야 했다. 그러나 방법을 몰랐다. 애초부터 냉장고에는 전원도 코드도 없었다. 다시금 냉장고 내부의 동력원에 생각이 미쳤다. 문을 열어 보았다. 거지의 것으로 보이는 먹다 남은 빵이나 통조림들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과 칸을 나눈 받침대를 끄집어내 집어 던졌다. 냉장고는 미약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속을 모두 비우고 나서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귀청을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덧입혀졌다.


“야아-!”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노란 눈을 번뜩이는 거지가 각목을 들고 노려보고 있었다. 약간 어긋나있으면서도 그의 눈은 나를 온통 궤 뚫고 있었다. 그 눈, 그것은 냉장고가 틀림없었다. 눈이 마주친 것은 찰나였다. 냉장고는 다짜고짜 각목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나는 간신히 첫 발을 피하고 그 틈을 노려 그에게 온몸으로 부딪혀들었다. 그는 기세에 비해 너무 가벼웠다. 나도 어, 하는 새 함께 고꾸라지고 말았다. 거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들어 일으키고 소리를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놀랄만한 침착성으로 냉장고 문을 철사로 묶고 있었다. 열댓 겹은 되는 철사로 칭칭 감긴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는 녀석은 없을 것이다. 냄새가 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철사로 봉해진 냉장고 안이 가장 수상하겠지. 그것은 조금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뒤처리가 끝나니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지의 체구는 생각보다도 작아서 텅 빈 냉장고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아직 살아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닥에 고인 핏자국 위에 어디서 물 한 동이를 떠다 부으며 이미 늦었다는 말을 덧씌워 지워버렸다. 걱정되는 것은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작은 세계를 눈여겨보지 않을 테니까.


나는 날마다 냉장고를 살펴보았다. 그 뒤로 불빛은 더욱 진해지고 모터는 예전보다 더욱 힘차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이미 수 없이 많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나는 냉장고에 대한 진실을 깨달았다. 냉장고는 울부짖듯이 시끄러웠으나 아무도 그 소리에 관심 가지지 않았다. 지나가다 한번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이 비밀이 언제까지 지켜질지 모른다. 만일 냉장고가 뱃속을 다 비운다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다. 웬만해서는 냉장고 문이 다시 열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녀석은 내 오해와는 달리 착하고 얌전한 녀석이니까.


젠장, 내가 대체 뭘 기르고 있는 거야.
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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