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

평범한 날의 오후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 나는 두 아이와 함께 첫째의 유치원 앞 놀이터에 서 있었다. 그네를 밀어달라고 떼쓰는 첫째와 미끄럼틀을 태워달라고 우는 둘째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몸을 둘로 쪼개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에 파트타임 직을 지원한 어느 회사의 인사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와 이것저것 묻기까지 했다.

그러저러한 멀티태스킹을 저녁나절까지 반복해서 해치운 뒤, 마침내 아이 둘을 재우고 침대에 누워 넷(Net)에 접속했다. 지원서를 낸 다른 회사로부터 메일이 와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이럴 수가, 나를 기다린 것은 다름 아닌 외할머니의 임종 소식이었다.

할머니는 노환이 심해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오늘 카르파티아 대학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가 임종을 맞이하셨다고 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애들 보랴 살림 하랴 취직 준비 하랴 바쁠 텐데 시간 날 때 천천히 와, 라고 했다. 신종 독감이 유행 중이니 안 오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라고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첫 손주라는 이유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내가 잠이나 자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코를 고는 남편을 흔들어 깨우고는, 레지드론(Residrone, 주거용 드론)의 구동과 가족의 일정을 관리하는 인공지능 룰루에게 카르파티아 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가 달라고 지시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들이 꿈나라를 유랑하고 우리가 졸음을 참으며 앉아 있는 레지드론은 달의 주거용 저궤도를 서서히 벗어나 월면을 향해 내려갔다. 마침내 레지드론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지나고, 수 만개의 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선 비의 바다에 다다라, 지구까지 닿을 듯 꼿꼿이 서 있는 마천루와,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수백만 드론들과, 그것들이 빚어내는 복잡한 교통의 흐름에 합류했다. 전 과정이 매끄러웠다. 위성 전체의 교통을 책임지는 인공지능 트래픽이 드론들의 위치와 행선지를 정확히 파악해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로 안내하는 것이다.

마침 늦은 시각이어서, 병원 빌딩 측면에 비죽비죽 튀어나온 도킹 포트는 빈자리가 많았고 레지드론 급의 드론을 위한 공간은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도킹이 끝나자 우리는 룰루에게 둘째가 깨면 알려달라고 했고, 정박료가 너무 비싸서 드론이 근처를 맴돌도록 떠나보냈다.

외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러 가는 길에도 내 머릿속은 그렇게 자식 걱정 돈 걱정으로 가득했다. 내가 보낸 지원서를 인사 담당자가 확인했는지를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그는 내 메일을 확인했다. 답장을 보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원망스러워지더니 새삼 조급해졌다. 드론 할부금 갚을 날은 다가오는데 언제 다시 취업할 수 있을지 요원했다. 직장에서 잘리기 전에는 평생 드론에 실려 둥둥 떠다닐까 봐 걱정되더니 이제는 그마저도 힘들어질까 봐 무서워졌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빈소를 차지한 사람은 우리 부모님, 큰 이모 내외, 작은 이모 내외와 네 명의 사촌 동생들이 다였다.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에 파견 나가 있는 내 남동생과 낮 동안 바빴던 나를 빼면 할머니의 직계 자손이 전부 와 있었던 것이다. 명색이 맏손주인 내가 가장 늦다니.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어색하게 목례했다.

엄마는 피곤한데 내일 오지, 하면서도 반가워했다. 그때 깨달았다. 엄마 아빠를 보는 게 거의 두 달 만이라는 것을. 이모와 이모부들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는데, 다들 주름과 흰머리가 꽤나 는 것을 보니 최소 1년은 못 본 모양이었다. 사촌동생들은 큰 녀석부터 차례로 사회초년생,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이었는데, 볼 때마다 쑥쑥 커 있어서 놀랍더니 오늘도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 큰 사촌동생은 얼굴이 핼쑥해서 늙어 보이기까지 했다.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만 입력하면 금세 만날 수 있는데, 룰루한테 이름만 대면 영상전화를 걸어줄 텐데, 왜 우리는 서로를 외면했을까. 우리가 정말 피붙이가 맞나. 어른들 농담대로 정말 배달용 드론이 하나씩 던져주고 간 게 아닐까.

할머니는 왜 갑자기 돌아가신 거예요? 담당의가 몇 달은 더 사실 거라 했잖아요.”

나는 의사한테 직접 들은 것처럼 말했다. 실은 할머니 문병을 한 번도 못 갔는데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반년이 넘도록 고만고만한 상태였다. 주말마다 다음 주말에 가 봐야지, 하다가 이렇게 돼 버린 것이다.

할머니를 데려간 것은 신종 독감이었다. 열이 갑자기 올랐는데 손 쓸 새도 없이 의식을 잃으셨다고 한다. 그래도 많이 안 아프고 가셔서 다행이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셨지, 하는 이모들의 말에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한이 없으셨을 거야. 마지막까지 웃는 인상이셨어.”

감사하게도, 엄마가 할머니의 임종을 지킨 것이다. 할머니의 선한 미소가 그려져 나는 안도했다.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 했다는 죄책감이 조금은 덜해지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맘이 아픈 것은 집에 가고 싶으시다던 소망을 결국 돌아가셔서야 이루게 됐다는 점이었다. 평소 할머니는 자신의 유골을 할아버지 때처럼 마당에 뿌려 달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달에 몇 안 남은 단독주거용 돔에서 홀로 사셨고, 내부 마당과 옥상에는 할머니가 어릴 적에 달로 이주해 올 때 지구에서 가져온 야생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할머니를 마당에 뿌리면 생전에 소원하신 대로 나비가 되어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다. 아니, 잠깐 근데.

할머니 뿌려도 되는 거예요? 땅 팔아야 되잖아요.”

그렇지, 하며 이구동성으로 터지는 울적한 목소리들. 상속세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공시지가의 50%에 달하는데 그걸 내려면 우리가 가진 걸 전부 내다 팔아도 모자란다. 그러니 땅을 팔 수밖에. 부의 독점과 대물림을 막기 위해, 달 연방 건립 초창기에 마련된 조치인데 제 구실을 톡톡히 하는 것 같다. 적어도 우리 같은 서민들한테는.

도심 한복판의 금싸라기 땅인 외가를 노리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알박기를 한다고 욕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제 그 땅을 차지하려고 몰려들 터였다. 복합 쇼핑몰 도킹 포트에 다닥다닥 매달린 드론들과, 빈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바투 붙어 서성대는 드론들처럼!

몰아치는 현실감 속에서 조용히 절규했다. 할머니만 돌아가신 게 아니야. 할머니의 집도 사라지는 거야! 우리 모두의 추억이 두텁게 쌓여 있는 그 집이! 다들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사촌동생들만 빼고.

녀석들은 일하고, 채팅하고, 공부하고, 게임하느라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하긴 너희가 할머니 댁에 몇 번이나 가 봤겠니. 녀석들과 달리, 나와 남동생은 어릴 적에 할머니 댁에서 살았던 과거가 있었다. 할머니 댁 주변의 단독주거용 돔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 자리에 초고층 복합 빌딩들이 들어선 후이자, 레지드론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손을 아무리 뻗어 봐도 닿지 않는 아련한 한때였다.

 

(이후 생략)

 

※ 밀리의 서재에서 전자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가제 : 달나라에 꽃비가) 계약에 따라 글을 내려야 해서 비공개로 전환할까 하다가 댓글과 리뷰 주신 분들이 계셔서 도입부만 남겨 놓기로 결정했습니다. 관심 감사드립니다.

 
댓글 2
  • No Profile
    정상훈 22.05.28 22:35 댓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인연이 얽히는 아름다운 모습이라던지, 달을 통해서 암울한 모습을 그려내신 것, 반전을 통한 극 전개, 깔끔한 결말까지 매력적이었습니다. 부럽습니다.

  • 정상훈님께
    No Profile
    글쓴이 사피엔스 22.05.28 23:51 댓글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올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두 분의 사랑은 소설 같지 않았지만요. ㅎㅎㅎ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이 곧 처분될 예정이라 복잡한 심경에 빠져 있다 쓴 작품이에요. 감상평 읽으니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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