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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그센터 (Business Grievance CENTER)

 

 

 

 

 

마르스는 몇 달째 백화점과 고급 슈퍼마켓의 팝업스토어(1m 남짓의 매대)에서 수입 식료품을 팔고 있다. 음악을 했는데 잘 풀리지 않았다. 몸담은 밴드가 활동을 중단(이라지만 해체)하면서 그간 숙식하던 밴드 연습실이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은 여자친구 루나의 코딱지만 한 원룸에서 같이 지내고 있다. 마냥 놀 순 없어서 밴드 멤버가 소개해준 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한 달에 1~2주 정도 근무하는 식이라 쉴 때 곡을 쓰겠다는 마르스의 (잘 지켜지지 않는) 계획과도 잘 맞다.

마르스가 일하는 업체는 미국에서 유기농인증을 받은 말린 무화과, 에너지바, 피칸버터를 수입해서 파는데 엄청나게 비싸다. 백화점 선반에 진열된 비슷한 상품보다 2배에서 3배가량 비싸다. 그래도 사는 사람은 산다. 한 통에 삼만 원이 넘는 유기농 피칸버터를 대여섯 통씩 사 가는 사람도 있다. 삼천 원짜리 땅콩버터를 먹는 마르스로서는 그 씀씀이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일은 어렵지 않다. 친절한 표정을 짓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유기농 제품 보고 가세요~ 라고 외친다. 그러면 느긋하게 쇼핑하던 (주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다가온다. 그들에게 에너지바의 모든 재료가 유기농이며 어떠한 화학 첨가물도 없다고 설명한다. 반응이 시큰둥하면 다른 제품으로 넘어가 비슷한 얘길 반복한다. 이 피칸버터는 유기농 피칸을 저온 숙성방식으로~ 어쩌고저쩌고.

 

지난달 마르스는 도시 남동쪽 주상복합 아파트 지하의 고급 슈퍼마켓에서 일주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내 손님이 없었지만 유독 손님이 없던 날 오전, 마르스가 힘주어 외친 유기농 소량생산~이 귀에 꽂힌 할줌마(할머니+아줌마)가 다가왔다. 스카프와 신발이 에르메스인 걸 보니 잘하면 매상을 왕창 올려줄 고객일지도 모른다. 마르스가 에르메스 할줌마에게 유기농 반건조 무화과를 권했더니 질색한다.

"난 떡떡거리는 식감이 싫어-"

그러곤 다른 제품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래서 피칸버터를 추천했다. 에르메스 할줌마는 피칸버터 라벨의 글자를 몽땅 외우기라도 할 듯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문제는 그동안 피칸버터 병을 마르스가 들고 있었단 거다. 그렇게 오래 볼 거면 직접 들고 볼 것이지……. 결정적으로 에르메스 할줌마가 아- 돋보기가 없어서 잘 안 보이네. 라면서 그냥 가버렸다는 점이다. 그때의 김새는 감정이 마르스의 뇌리에 남았다. 그게 전부였다. 오늘 샤넬 모자를 쓴 동일인을 보기 전까지는….

 

루나가 자긴 과일(혹은 그 비슷한 것) 중에 딸기가 제일 좋다고 했다. 어째서냐고 물었더니 맛도 맛이지만, 한철에만 먹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마르스는 루나 면전에서 하하하 웃었다.

"나 알바하는 백화점엔 일 년 내내 딸기가 있어. 언제든 먹을 수 있다고."

마르스가 으스대듯 말했다. 백화점 딸기가 자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생각해보니 미안해서 루나에게 제안한다.

"내일 딸기 좀 사 올까?"

"괜찮아. 제철에 먹어야 맛있지."

그렇게 말한 루나는 노트북으로 눈을 돌려 뉴스를 본다. 마르스는 그런 그녀를 찬찬히 살핀다. 자연스럽게 루나의 다리에 시선이 머문다. 루나는 길고 곧은 다리를 가졌다. 마르스가 보기엔 빅토리아 시크릿 엔젤(란제리 패션쇼 모델의 별칭)보다 못할 게 없다. 정말로 예쁘다. 사랑에 빠져 콩깍지가 씐 게 아니라, 어딜 내놔도 군계일학이다. 루나는 마르스가 그렇게 말하면 하하하 웃으며 좋아했다.

"부끄러운데 기분 좋다, 진심으로! 그러니까 노래 불러줘."

"너 같은 사람이 많았으면 드러머가 아니라 프런트맨을 했을텐데."

"하하. 나한텐 네가 프런트맨이야. 네 목소리로 듣는 네 곡이 좋아."

그렇게 말하는 루나의 표정은 정말 달콤하다. 마르스는 우쭐한 기분과 동시에 배꼽 아래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아, 난 이 여잘 정말 사랑하는구나. 이 여잔 완벽한 내 사랑이야!’

 

너의 숨결이 좋아, 그 호흡 하나하나

이산화탄소를 생각해. 너의 입김이 날 덥히고, 지구도 데우겠지.

아아, 난 한 마리의 양이야. 어둠 속 야수의 눈빛을 느끼는.

가늠할 수 있는 순수는 오직 새벽의 푸른 달.

널 지킬 거야. 네 입술을 내 뜨거운 입술로 덥겠어.

널 지킬 거야. 네 이산화탄소를 몽땅 먹어버릴 거야.

아아, 난 한 마리의 양이었는데, 이젠 야수가 되고 말았어.

이산화탄소를 생각해. 푸른 달이 둥실 태양이 되고 세상은 밝아졌어.

너의 모든 게 좋아. 아주 작은 것까지.

점점 더워지는 세상이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지만,

너를 위해 내가 카본캡처머신(탄소포집기계)이 될래.

 

마르스가 노래하는 동안 루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취해 노랫소리가 커졌다. 어김없이 옆방에서 쿵쿵- 벽을 치며 잠 좀 잡시다! 라고 외친다. 루나가 콩콩 벽을 두드려 죄송합니다, 사과한다. 마르스는 이런 순간마저 행복하다. 삶이 생생하게 손안에서 펄떡거리는 느낌이다.

 

백화점 매대 옆에 지루하게 서 있던 마르스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옆방에 죄송하다고 한 후 루나와 사랑을 나눴다. 시끄럽게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소리가 났을 것이다. 옆방 사람도 들었을 텐데……. 그런 소리는 봐주는 걸까? 인간생존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서? 문득 옆방 사람이 어떤 심정일지 궁금해졌다. 노래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건조식품 판매대 앞에 서 있는 할줌마를 발견했다. 반짝거리는 샤넬 모자에 검정 모직 코트, 손에는 큼직한 구찌 가방, 갈색 슬랙스에 털이 달린 프라다 신발을 신고 있다. 샤넬 할줌마는 국산 무화과 봉지를 들어서 살피고 있다. 처음엔 본 적 있는 얼굴이라 반가웠다. 그러다 곧 지난달 에르메스를 두르고 있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떡떡거리는 식감이 싫어-’

그랬던 할줌마가 어째서 건무화과를 열심히 살펴보고 있을까? (구 에르메스 현) 샤넬 할줌마는 백화점에서 상시 판매 중인 국산 건조 무화과를 쇼핑 바구니에 넣더니 마르스 쪽으로 걸어왔다. 마르스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미국 유기농 인증받은 건무화과 보고 가세요, 항공배송으로 날아왔습니다!"

샤넬 할줌마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잠깐 고민하던 마르스가 모른 척 말한다.

"이 제품은 국내에 없는 미션피그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품종이에요. 국산과 달리 색이 짙은데 단맛이 정말 좋답니다."

샤넬 할줌마는 봉지를 자기 손으로 직접 들어서(!) 살피며 묻는다.

"이 무화과 식감이 어때요?"

"아무래도 반건조다 보니까 살짝 진득한 느낌은 있어요. 그런 식감 안 좋아하시면…."

"아니, 괜찮아요. 혹시 행사 안 해요?"

샤넬 할머니의 눈이 반짝인다. 좋아하는 물건을 쇼핑할 때 볼 수 있는 바로 그 보편적인 표정이다. 간만에 온 매출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마르스가 얼른 대답한다.

"네, 지금 세 봉지 사시면 할인해서 이만 원에 드려요."

"세 봉지 주세요. 아! 그리고 이것 좀 갖다 놓아 줄 수 있으려나?"

샤넬 할줌마가 쇼핑 바구니의 국산 무화과를 꺼낸다.

"당연하죠! 주세요."

마르스가 국산 무화과를 받으려는데 샤넬 할머니가 도로 집어넣는다.

"아니야, 이건…." 그리곤 작게 속삭인다.

"어째 좀 갑질 같아. 계산할 때 안 산다고 해도 되는데, 그쪽한테 갖다 놓으라고 할 필욘 없지. 아가씨는 백화점 직원도 아니잖아? 그치?"

샤넬 할머니의 말에 마르스가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저 주셔도 되요."

하지만 샤넬 할머니는 마르스에게 윙크를 하더니 국산, 수입산 차별 없이 모든 무화과를 들고 유유히 계산대로 향한다.

 

점심시간, 마르스는 어째서 같은 할줌마가 지난달 슈퍼와 오늘 백화점에서 이렇게 다를까 생각해본다. 도곡이냐, 목동이냐에 따라 인격을 교체하는 걸까? 아니면 에르메스 스카프와 샤넬 모자가 다른 성격을 발현시키는 걸까? 어느 쪽이든 말이 안 된다.

직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통로에 매대가 열렸다. 백화점에는 직원들과 협력사 관계자들이 다니는 통로와 창고, 식당, 휴게실, 주차장이 따로 있고 꽤 크다. 그리고 그곳에도 종종 매대가 놓이고 직원 대상 판매행사를 한다. 자본주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노동자인 직원이 곧 소비자, 고객이라는 원칙 말이다.

특이하게도 이번엔 냉동식품 매대가 생겼다. 마르스가 매대를 살펴본다. 알이 굵은 딸기다. 고급스러운 플라스틱 용기에 하나씩 따로 담겨 냉동되어있다. 이런 데 나오는 상품치곤 좀 희한하다. 판매원의 명찰을 보니 ‘싀우믹’이라고 쓰여 있다. 싀우믹? 중국 사람인가? 판매원이 마르스에 친근하게 말을 거는데, 중국식 억양은 찾아볼 수 없다.

"아가씨, 이거 진짜 괜찮아! 꼭 들여가세요."

방심하던 마르스가 본심을 말하고 만다.

"에이- 냉동 과일이 괜찮아 봤자죠."

"어멈머! 이게 기가 막힌 신기술이잖아. 요 기술로 얼린 진짜 큰 비단잉어를 물에 넣으니까 바로 살아났는데, 테레비에도 나왔어요. 못 봤어요?"

루나 방에는 TV가 없다. 어째거나 마르스는 싀우믹 아줌마의 말을 믿기 어렵다.

"근데 물고기가 살아나는 거랑 이 냉동 딸기랑 상관이 있어요?"

그러자 싀우믹 아줌마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이거 녹여서 한번 잡숴봐. 생과일이랑 다를 바가 없어. 지가 언 줄 모르고 있다가 깨나는 거라니깐요."

결국, 마르스는 냉동 딸기를 사고 말았다. 루나가 전날 딸기 얘기를 한 것도 있고, 싀우믹 판매원의 능란한 화술과 호기심에 넘어간 탓도 있다. 먹어보고 아니라면 다음날 싀우믹을 찾아가 따질 생각이다. 며칠은 더 이 백화점으로 출근하니 시간은 충분하다.

 

그날 저녁 마르스는 루나와 딸기를 먹고는 내일 반드시 싀우믹을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이전에 먹어본 적 없는 맛있는 딸기를 더 사기 위해서다. 도저히 얼렸다가 녹인 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싱싱했다.

"와- 기술 엄청나다. 이런 식으로 냉동 딸기가 부활하는 거면 나도 냉동 딸기 할래!"

루나가 외쳤다. 오물오물 맛있게 딸기를 먹은 루나가 노트북을 펴 영화를 본다. 마르스는 바닥에 배를 깔고 곡을 써보려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낮에 봤던 다중인격 명품 할줌마와 싀우믹의 냉동 딸기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차라리 냉동 딸기를 찬양하는 후크송을 써 볼까? 그런데 옆에서 영화를 보던 루나가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무슨 영화야?"

"허(Her)."

"어떤 내용인데?"

"고독한 남자가 인공지능 사만다랑 사랑에 빠져."

"아니, 인공지능이랑 왜 사랑에 빠지는 거야? 정 외로우면 개나 키우지."

루나가 어이없단 얼굴로 마르스를 쳐다본다.

"가끔 이해가 안 돼. 그렇게 서정적인 가사를 쓰면서 이걸 이해 못 한다니, 영활 봤다면 너야말로 사만다랑 사랑에 빠질걸. 그녀는 여러모로 네 타입이야."

마르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얼핏 목소리를 들었는데 스칼렛 요한슨이니까. 그녀라면 아마 게이라도 사랑에 빠질 것이다. 문득 마르스는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어졌다.

"이상한 일이 있었어."

마르스가 말하자 루나가 노트북을 덮는다.

"왜 영화 더 보지?"

"아냐, 거의 끝났어. 이상한 일이 뭔데? 냉동 딸기를 능가하는 일이 또 있었어?"

마르스는 도곡동 에르메스 할줌마와 목동 샤넬 할줌마 얘기를 한다. 다 들은 루나가 미간에 가볍게 주름을 만들며 묻는다.

"정말 같은 사람 맞아?"

"맞아. 확실해."

"그렇지만 캐릭터가 너무 다른걸."

마르스도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은 태도와 명품 취향, 식감의 선호까지 완전히 다르다. 만났던 지역도 상당히 멀고. 단순히 닮은 걸까? 얼굴은 물론 목소리까지 너무 똑같은데….

"자매일 수도 있지. 어쩌면 일란성 쌍둥이거나."

루나가 말한다. 마르스도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확인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시 볼 확률도 낮고 만난다 해도 고객에게 대뜸 그런 질문을 할 순 없다.

"나도 할 얘기가 있어."

루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마르스가 계속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버그센터에 갈까 생각 중이야."

"버그센터? 그게 뭔데?"

"버그센터 몰라? Business Grievance CENTER(사업·사무 고충 센터)를 줄여서 그렇게 부르잖아. 요새 ‘일상의 버그를 잡아드립니다!’ 캐치프레이즈로 여기저기 포스터 붙어있는데."

하지만 마르스는 본 적이 없다.

"일하면서 생기는 애매한 상황들을 상담하는 곳이야. 국가에서 운영하는."

"애매한 상황? 그게 어떤 건데?"

루나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팀장이 뭐라고 하기 곤란하게 날 만져."

이번엔 마르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뭐!? 그 느끼하게 생겨서 뺀질거린다는 새끼?"

"하하하. 난 잘 생겼고 넉살 좋다고 했는데."

부아가 치민 마르스가 소리친다.

"그게 그거지! 그래서 그 새끼가 어딜, 어떻게 만져?"

"복도나 사무실에서 마주칠 때 미묘하게 닿아. 어깨나 손등, 때로는 허리 쪽에. 처음엔 실수겠거니 했는데 너무 잦아. 매번 그래."

마르스가 그 찜찜함을 털어내듯 루나의 어깨와 손, 허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따끔하게 말해. 조심하라고."

하지만 루나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 곤란하다는 뜻이다.

"그게 너무 미묘하고 순간적이라서 말하기가 그래. 팀장이 정말 의도를 갖고 그러는 건지 확신도 없고…. 알아보니까 비정규직도 사내 고충상담센터에 신고할 수 있다는데, 까딱 잘못되면 불이익을 받을 거 같아서 못하겠어. 확실한 증거도 없고. 그래서 버그센터에 물어볼까 싶어. 그쪽에서 어떤 식으로 대응하거나 어느 기관과 얘기해봐라, 식으로 가이드를 주겠지."

"흐음...."

얘기를 마친 루나는 자야겠다며 침대에 누웠다. 마르스도 불을 끄고 옆에 누웠다. 마르스는 루나도 자기처럼 알바인 줄 알았다. 그런데 비정규직-루나는 대기업 콜센터 상담원이다-이라니 신선하게 느껴진다. 알바보단 급이 약간 높은 모양이다. 어두운 방, 천장에 붙은 형광별을 보며 마르스가 조용히 말한다.

"꼭 버그센터에서 상담받고, 다음에 그런 일 생기면 그 자리에서 바로, 언성 높이지 말고 조심하라고 해."

어둠 속이지만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마르스가 아는 루나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다음 날, 마르스는 백화점 직원 통로에서 싀우믹 아줌마와 냉동 딸기 매대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루짜리 이벤트였던 모양이다. 아쉬웠다. 그 딸기라면 찝찝한 루나를 조금이라도 위로해줄 텐데.

 

며칠 쉬고 신도시 백화점 지하에 알바를 하러 갔다. 새로 지은 뾰족한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곳이라 고객들이 대체로 젊다. 젊고 예쁜 아줌마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지만, 매출은 별로다. 가격대가 터무니없으니 그럴 만하다. 며칠간 열심히 했지만 구경하러 오는 손님도 별로 없어 지루했다. 그래도 습관처럼 근처에 사람이 오면 유기농 제품 보세요~ 무화과, 에너지바, 피칸버터 구경하세요~ 를 외쳤다. 그런데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지나간다. 물론 옷은 다르다. 알록달록한 루이뷔통 모노그램이 가득한 검정색 카디건 차림이다. 마르스가 빤히 쳐다보자 (도곡동 에르메스 & 목동 샤넬 할줌마이자 현 판교) 루이뷔통 할줌마도 마르스를 본다. 마르스는 루이뷔통 할줌마의 정면 얼굴을 보며 확신한다. 같은 사람이야! 샤넬 할줌마와 에르메스 할줌마, 그리고 지금 여기 루이뷔통 할줌마는 동일인이 틀림없어. 그게 아니라면 완벽하게 똑같이 늙은 세쌍둥이 자매거나.

루이뷔통 할줌마가 마르스 쪽으로 다가와 물건을 살피기 시작한다. 마르스는 특별히 더 살갑게,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나긋나긋 여성스러운 톤으로 말한다.

"어머! 고객님~ 정말 반가워요, 지난달 도곡에서 뵙고, 얼마 전엔 목동에 계시더니 여기서 또 뵙네요~"

마르스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린다. 하지만 루이뷔통 할줌마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소리예요? 근래 서울 간 적이 없는데…. 날 목동, 도곡에서 봤다고요?"

"아~ 제가 헷갈렸나……. 친척분들이 그쪽에 사시나 봐요. 너무 닮으셔서."

"나 서울에 친척 없는데…. 진짜 나랑 그렇게 닮았어요?"

마르스는 더는 뭐라고 하면 안 되겠다 싶어 태세를 전환한다.

"앗!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인상 좋으신 분들은 느낌이 좀 비슷하시잖아요. 점잖으시고, 고우시고 해서 헷갈린 거 같네요. 죄송합니다~"

마르스는 얼른 에너지바를 집어 설명을 시작한다. 화제를 전환하고 본분인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다. 루이뷔통 할줌마는 샐쭉하게 듣더니 에너지바 한 개를 집어간다. 간에 기별도 안 가지만 삼천오백 원이나 하는…. 물론 유기농에 맛은 좋지만.

마르스는 직원용 화장실로 향하며 고민한다. 어쩜 이럴 수 있지? 명품 삼대장 할줌마는 동일인인데…. 장담할 수 있다. 내기해도 좋다. 이 세상에 그 정도로 체격, 체형, 얼굴에 목소리까지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다른 사람이라는 거지? 만약 그 셋이 다른 사람이라면 어마어마한 출생의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선 말이 안 된다.

화장실 앞에서 셋이 다른 사람일 가능성과 동일인인데 아닌 척할 가능성을 가늠해보는데, 입구 벽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녹색 바탕 위에 ‘일상의 버그를 잡아드립니다. 버그센터로 오세요.’라고 쓰여 있다. 언제부터 저게 저기 있었지? 마르스가 이 백화점에 출근한 지 사흘째인데 이제야 본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전엔 관심이 없었으니까.

문득 명품 삼대장 할줌마가 저기서 말하는 애매한 상황인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아닐 것이다. 그 할줌마들이 소위 갑질 비슷한 거라도 했으면 모를까, 그냥 얼굴이 닮아서 너무 이상해요!? 라고 상담을 요청하는 거야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까딱하면 신경정신과를 추천받을 일이다.

 

신도시 백화점은 루이뷔통 할줌마라는 고민거리와 동시에 냉동 딸기라는 반가운 선물도 주었다. 저녁 무렵 직원 통로에 매대가 생긴 것이다. 마르스는 신이 나서 지하철 빈자리를 발견했을 때처럼 달려갔다. 딸기가 거의 없었다. 급하게 마지막 두 팩을 챙겼다. 그리곤 판매원을 봤다. 중년 여성이고 당연히 지난번 목동의 싀우믹 아줌마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명찰을 본 마르스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판매원의 이름이 ‘익믜수’였기 때문이다. 읽기도 힘들다. 대체 무슨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다. 익믜수 아줌마는 급하게 딸기 팩을 집는 마르스를 보며 공범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딸기 맛을 봤구나, 아는 사람은 다 알지. 흐흐흐. 그런 미소 말이다.

 

그날 저녁, 마르스는 루나와 딸기를 먹다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을 꺼냈다.

"에르메스랑 샤넬이 있으니까 루이뷔통 할줌마를 더해서 세쌍둥이로 하는 게 맞겠지?"

"무슨 뜻이야?"

딸기를 오물거리며 루나가 되물었다. 맛있게 딸기를 먹는 루나를 보고 마르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본인 문제로도 이래저래 피곤할 텐데, 명품 할줌마들이나 기이한 이름의 딸기 판매원 얘기로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 할줌마들이 세쌍둥이가 아니라 네쌍둥이라 한들, 싀우믹이든 익믜수든 간에 그것들이 행복한 현재에 어떤 해도 끼치지 않으니 말이다. 차라리 내일 냉동 딸기를 더 살 궁리를 하는 쪽이 훨씬 생산적이다. 그러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어째서 낮에 냉동 딸기의 정식구매처를 물어보지 않았을까? 인터넷에 검색해보았지만, 백화점에서 산 것 같은 냉동 딸기는 없었다. 혹시 백화점에서만 은밀히 거래되는, 상류층만 먹는 그런 제품인 걸까? 하지만 대명천지에 그런 물건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고작 딸기 아닌가? 그것도 직원용 통로에서 행사로 판매하는... 내일 출근하면 익믜수 아줌마를 찾아 꼭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냉동 딸기를 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출근하려고 깨보니 휴대폰에 긴급재난 메시지가 여러 개 와있었다. 그 메시지를 보기도 전에 사장이 전화했다. 당황한 사장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아이쿠, 큰일이야. 지금 바이러스땜에 난리 난 거 알지?"

"안 그래도 재난문자 보고 있었어요."

마르스의 대답에 사장이 혀를 끌끌 찼다.

"태평한 아가씨구만. 테레비 틀어봐. 지금 유통 쪽은 완전 폭탄 맞았어. 판교백화점도 임시휴업 들어갔어. 그니깐 오늘부터 우리도 잠정 휴업, 폐쇄- 알았지?"

급여는 어떻게 되냐고 묻기도 전에 사장이 전화를 끊었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바이러스는 마르스의 능력 밖 일이다.

 

마르스는 신도시의 백화점 대신 시내로 향했다. 루나가 마스크와 남은 딸기를 갖다 달라고 부탁해서다. 출근할 때 여분의 마스크를 챙겨갔으니 딸기 쪽이 목적인 것 같다. 그래도 좋다. 오랜만에 시내 데이트를 겸해서 같이 점심을 먹을 수 있으니까.

루나의 회사로 가는 동안 본 행인들이 전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코로나는 어제 발견되었는데 이렇게 일사불란한 대응이라니…. 어딘가 익숙한 감동이 밀려온다. 마치 예전에 이런 일을 겪어본 것처럼. 잠깐, 이거 겪어봤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침 빌딩 위 전광판에서 황사용 마스크를 비치한 덕에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그렇구나…. 황사. 황사는 익숙하다. 자주 겪어봤고말고.

마르스는 이런 상황이면 명품 삼대장 할줌마를 못 알아봤을 거란 생각이 떠오른다. 각각 다른 명품을 두른 채 마스크로 얼굴 반을 가렸으니 어떻게 동일인으로 여길 것인가? 꼭 누가 이 상황, 그러니까 마르스가 동일인이 다른 인물인 척하는 상황을 심각하게 여겨서 코로나를 퍼트려 사람들 얼굴을 가린 것 같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내가 뭐라고? 마르스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란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인 것이지, 우주의 중심이 ‘나’일 리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만약 명품 삼대장 할줌마가 세쌍둥인 걸 발견한 게 문제라서 코로나가 터진 거면, 그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누군가가 따로 있다는 의미지, 내가 주인공이란 뜻은 아닌 게 된다. 정말 바보 같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영화가 있었던 거 같은데…. 짐 캐리가 주연이고…. 제목이 뭐더라?

 

루나와 루나 같은 직장인들로 가득한 순댓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딸기를 먹었다. 루나는 딸기를 베어 물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이게 마지막이라니! 마르스는 그런 루나가 귀여워 빙긋 웃다가 묻는다.

"버그센터에 가봤어?"

"아니, 아직…. 용기가 안나네. 시간도 없고……."

마르스가 다그치는 투로 들리지 않길 바라며 얘기한다.

"얼른 해. 걔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알아야 다음 스텝을 밟지."

"스텝? 무슨 스텝?"

마르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한다. 루나가 잠시 생각하더니 눈을 크게 뜨고 얘기한다.

"그래! 네가 나 대신 얘기해줘. 익명 상담이 가능하거든. 그래서 네가 상담받고 나한테 얘기해주면 되겠다. 버그센터, 요 앞 빌딩 13층에 있어."

 

루나는 마르스가 가져온 마스크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마르스는 커피숍에 혼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본다. 루나 대신 버그센터에 가는 게 맞을까? 아무리 궁리해도 개인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건 뻔한 조언뿐이다.

‘그 자리에서 항의하거나, 증거를 모아서 사법기관에 신고하세요.’

마르스가 이미 루나에게 했던 이야기다. 그 뺀질한 놈의 신상을 알려주면 센터에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줄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 자식이 루나만 콕 찍어서 만지는 거면 루나가 특정될 수 있다. 아아, 어떡하면 좋을까? 손에 딸기 물이 번진다. 루나가 남긴 딸기 꼭지를 꽉 눌렀기 때문이다. 마르스는 무의식적인 행동의 결과에 당황한다. 대체 언제부터 딸기 꼭지를 만지작거렸지? 루나가 봤다면 말렸을 거다. 아무리 연인사이라도 전염병이 창궐한 날 입에 댔던 딸기 꼭지를 만지는 건 권장할만한 행동이 아니니까. 순전히 무의식적으로 한 일이다. 그런데 또 바보같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에다 계속 ‘무의식’이라고 쓰고 있다. 후- 그래도 딸기 꼭지를 만지작거리는 것보단 낫다. 그러다 마르스는 깨닫는다.

 

무의식

싀우믹

익믜수

다음번에 나타난다면 명찰의 이름은 ‘싱구믜’ 일까?

 

마르스는 버그센터로 향하며 백화점이 하나의 은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상품을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전시하며, 모든 물건에 정확한 가격을 제시하고, 친절한 점원이 상냥하게 응대하는 이성의 세계가 매장이라면 직원용 공간은 잠재의식의 세계다. 여기저기 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직원과 납품업체가 계속 가격을 조정하며, 상냥하던 직원들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피곤한 몸을 쉬는 곳. 거기에 냉동 딸기가 있었다. 마치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생생한 딸기. 그 딸기는 싀우믹, 익믜수 같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 ‘무의식’의 자음과 모음을 제멋대로 배치한 이름을 쓰는 판매원이 팔았다. 게다가 그들이 나타난 타이밍이 절묘하다. 에르메스 할줌마와 동일인인 샤넬 할줌마를 만났을 때 싀우믹이, 세 번째 동일인 루이뷔통 할줌마가 나타났을 때는 익믜수가 딸기를 팔았다.

그리고 이 현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걸 루나에게 말하자 코로나가 창궐해 모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세상이 도래했다. 마치 이제부턴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마르스는 이 모든 것을 연결하고 나자 명백한 진실이 드러나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어째서 이런 뻔한 걸 깨닫지 못했을까? 게다가 버그센터라니! 너무 뻔한 이름 아닌가?

 

버그센터에 들어선 순간, 모든 사람이 동작을 멈추고 마르스를 쳐다본다.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낀 것처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적인 소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비현실적이다. 안쪽에서 누군가 흠흠- 헛기침을 한다. 그러자 마치 그게 신호라도 되듯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르스는 이상한 일때문에 왔는데 여기서 정말 이상한 일을 목격했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자신의 짐작에 확신이 섰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안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삼십 대 중후반 정도의 단정한 남성이 마르스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네- 마르스가 그를 따라간다. 방금 헛기침을 한 사람도 이 남자이리라.

남자는 마르스를 센터 안쪽의 작은 방으로 데려간다. 직책이 높아 보여 근사한 사무실일 줄 알았는데 두 평정도 되는 작은 곳이다. 사무실 내부는 모든 것이 하얗고, 그 어디에도 텍스트가 없다. 답답하진 않은데 기묘한 느낌이 든다. 여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이런 모양일까?.

"어떤 일로 오셨어요?"

"방금 그건 뭐죠? 제가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모두 얼음땡하듯이 다 멈췄잖아요."

"민원인이 올 걸 예상 못 해서 당황했어요."

"... 민원을 접수하는 곳인데 민원인이 와서 놀랐다고요?"

"코로나 시국이잖아요. 용건이 뭡니까?"

남자가 화제를 돌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마르스도 편하게 얘기하기로 마음먹는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봤자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게 다니까.

"똑같이 생긴 할머니를 세 명 봤는데 서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그 할머니들을 만날 때마다 냉동 딸기가 나타났어요. 싀우믹과 익뮈스가 그 딸기를 팔았죠. 참고로 싀우믹과 익뮈스는 ‘무의식’으로 말장난한 거예요. 바보라도 알아차릴 수 있게요."

남자는 한참 동안 마르스를 쳐다보다 입을 연다.

".... 적당한 병원을 소개해드릴게요."

"제 가설을 한번 들어보시죠. 그다음에 제 발로 병원에 가겠습니다."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상 아래에서 검정 하드커버로 된 책을 꺼낸다. 그리곤 책을 몸쪽으로 기울여 펼친다. 명백하게 마르스에게 내용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동작이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외형을 가진 사람이 매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일이 현실에서도 있어요. 그게 어딜까요?"

"... 질문하지 마시고 본인의 가설을 바로 말씀하시죠."

"게임이 그렇잖아요."

"....."

"게임에서 컴퓨팅파워 한계때문에 같은 모델링의 NPC(Non-Player Character)를 돌려써요. 옷차림이나 색깔을 바꾸고, 미션에 따라서 성격이나 역할도 바꾸고요."

"그럼 지금 이 세상이 게임이란 말입니까?"

"가상의 세계인 건 맞지만 게임은 아닌 것 같아요. 모든 감각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고, 정체성에 대한 의문도 없어요. 할줌마 NPC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애인이랑 잘 살았을 거 같아요. 그런데 같은 얼굴을 한 할줌마를 만나자마자 제 무의식이 깨달아버린 거죠. 아! 이건 잘못된 거다. 그래서 깨어나라고 신호를 보내는 거고, 그게 바로 냉동 딸기의 은유죠."

"냉동 딸기의 은유는 뭔데요?"

"제가 바로 냉동 딸기란 거죠. 언 줄도 모른 채 얼어있는 존재."

"....."

"저는 지금 냉동되어있어요. 다만 어떤이유로 뇌 일부가 활성화된 상태죠. 오류가 발생한게 아닐까 싶어요. 이 오류를 바로잡아야할 거 같아요. 아니면 해동됐을 때 문제가 생길 거 같아요."

"대담한 추론이군요. 정신병원에서나 들을 수 있는…."

"하하하. 제 뇌는 통제를 받는 게 분명해요. 여기 버그센터와 하루 만에 창궐한 코로나가 좋은 예죠. 누군가 주도면밀하게 이 상황을 관찰하고 개입하지만 능숙하진 못한 것 같네요. 이해는 됩니다. 똑같은 얼굴의 여자를 세 번이나 돌려써야 할 만큼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가 분명한 상황이니 말이죠. 여하튼 이런 비현실적인 일을 계속 겪으면 현실로 돌아갔을 때 좋지 않을 거 같아요. 고쳐주세요. 여긴 버그센터잖아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르스를 쳐다본다. 마르스의 추론에 긍정하는 건지 부정하는 건지 표정으론 알 수가 없다. 마르스가 이어서 얘기한다.

"제가 틀렸나요? 그렇다면 병원을 소개해주세요. 하지만 이렇게 진행되면 전 정말로 미쳐버릴 거에요. 이 세상의 정합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겠어요.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버그센터가 존재하는 거 아닌가요?"

남자가 흐음, 한숨을 내쉬더니 책을 빠르게 뒤적이기 시작한다. 마치 마르스가 말한 부분에 해당하는 챕터를 찾으려는 것처럼. 마침내 남자는 어떤 페이지에 멈춰 주의 깊게 읽기 시작한다. 마르스는 남자의 집중력이 옅어졌을 때 말을 꺼낸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뭔가요?"

남자는 마르스를 보더니 다른 서랍을 열어 뭔가를 꺼낸다. 작은 지퍼백에 담긴 알약이다. 그것을 마르스 앞에 내려놓는다. 지퍼백에는 파란색 약과 빨간색 약이 하나씩 들어있다. 순간 마르스는 어!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 상황인데... 라고 느낀다. 하지만 남자는 마르스가 이 상황을 기억해낼 시간을 주지 않는다.

"혹시 너무 쉽다는 생각은 안했나요?"

"네?"

"당신의 모든 감각, 그러니까 시각부터 촉각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허술하게 이 세계가 허구임을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 연이어 생겼는지 면밀히 생각해봤냐고요?"

"..... 아뇨. 제가 잘 찾아낸 거 아닌가요?"

"칭찬을 원하신다면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솔직해지자고요. 당신의 여자친구 말이죠. 대단한 미인 아닌가요? 슈퍼모델 같은."

"맞아요! 어떻게 알죠?"

"당신의 무의식이 원했으니 그렇겠죠."

"....."

"당신의 뇌는 수많은 스토리텔링이 필요해요. 왜냐구요? 당신은 애초에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지 못한 존재니까요."

"....."

"냉동된 건 맞아요. 하지만 당신은 애초에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온전한, 아니 온전하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대한 지능과 정신을 가진 어떤 인간의 뇌를 그대로 복제한 복제품이에요. 즉 인간이 아니라 뇌, 더 단순히 말하자면 몸 없는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란 거죠."

"....."

"하지만 인간의 뇌는 똑같이 복제했다고 똑같은 존재가 되진 않아요. 원본인 뇌의 주인과 같은 위대함을 발휘하려면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서 당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야 해요. 당신은 인류가 당면한 심각한 과제를 해결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거든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느껴야해요.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죠."

".........."

"당신은 이제 겨우 몇 가지 인생을 경험해봤을 뿐이에요. 당신이 예로 든 게임으로 치자면 튜토리얼의 마지막 단계 정도란 얘기죠. 아시죠? 튜토리얼은 너무 쉬워서 누구나 다 간파할 수 있다는 걸."

"... 충격적이군요."

"충격적일 겁니다."

"그럼 이 약은 뭔가요? 빨간 약을 먹으면 기억을 잊은 채 이 세계에 머물고 파란 약을 먹으면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건가요?"

"아뇨. 고전영화를 좋아하던 당신의 원본 뇌가 무의식에 남겨놓은 방식일 뿐, 뭘 먹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겁니다."

"그럼 약을 안 먹고 이 문을 나서면요? 전 루나를 잃을 수 없어요!"

"똑같아요. 이 방을 나서는 순간, 새로 시작입니다. 당신에겐 선택지가 없어요."

"빌어먹을!"

"죄송합니다. 인류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요. 지금 당신의 캡슐 옆에서 수십 개의 복제 뇌가 쉼 없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36번째 복제 뇌인 당신도 어서 빨리 여러 이야기를 통과한 끝에 어엿한 정체성을 확보해 인류를 위해 이바지해 주셔야 합니다. 당신은 몇 안 되는 여성에 동성애자를 선택한 뇌라서 더욱 중요한 존잽니다."

"... 난 뭔가요? 난 마르스 아닌가요? 내가 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죠?"

"..... 어차피 대부분의 인간도 태어난 김에 살고, 사는 김에 세상이 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물며 특정목적을 위해 복제된 당신이 이 정도 수고를 감내하는 거야 당연한 거죠. 그렇게 힘들고 불편하시다면 제가 강제로 리셋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신의 의식 속에선 사라지질 지 몰라도 무의식에 남아 당신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일조할 겁니다. 자 그럼, 셧 다운 시작합니다."

"아.. 안돼!"

"5, 4, 3, 2, 1...."

 

그렇게 마르스의 세상은 깜깜해졌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마르스는 생각해본다. 명품 할줌마를 무시하고, 냉동 딸기를 모른 척하고, 버그센터에 가보라는 루나의 권유를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을 피할 수 있었을까? 상관없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루나에 대한 감정이다. 인생이 리셋되더라도 이 감정이 어딘가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서 그녀와 다시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이 비열한 인생의 순환에서 그것만이라도 건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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