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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가츠카레와 벚꽃

2022.03.28 14:5703.28


가츠카레와 벚꽃

 

 

  ― 가츠카레 먹고 싶다.
  희지는 자기도 모르게 파란 하늘에 대고 소리 내어 말했다. 먼 강바람이 슬렁 불어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 안은 텁텁했다. 방금 나온 치과에서 사용한 구강청결제가 빠르게 점막을 쓸어간 모양이다.
  편의점에서 생수를 하나 사 마시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음식점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옷가게나 카페뿐인 골목. 이 앞으로는 공원이 있을 뿐이다. 희지는 망설이면서 팔찌를 빙빙 돌렸다.
  어떻게 하지... 소중한 반차를 어디에 있을지 모를 음식점 찾는 데 쓴다는 건 아니 될 일이야. 스마트폰으로 맛집을 검색해도 이 근처에는 가츠카레는커녕 카레집도 나오지 않는다. 흠... 하는 수 없지.
  희지는 좀 걸으면서 더 빨리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어쨌든 개쓰레기요일에 양심도 없이 받은 반차다. 그리고 봄이다. 만끽하지 않으면 내일 팀장님 얼굴도 당당하게 마주보기 힘들 것 같다.
  미세먼지도 황사도 없는 봄 하늘은 고양이의 자진애교만큼 소중하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앞 공원에도 벚꽃이 한 그루 있었던 것 같은데. 희지는 전생처럼 아득한 작년 봄의 기억을 가까스로 떠올리곤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별로 크지도 않은, 뭐 특별히 볼 것도 없는 작은 공원이다. 조그만 연못에는 탁한 물을 쩝쩝대고 마시는 잉어 몇 마리, 이름 모를 시인의 문학비, 그네 하나, 미끄럼틀 하나, 벤치 두 개, 화장실뿐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만드는 왕벚나무가 있었다. 꽤 오래된 고목에는 한 번도 가지치기를 한 적 없는 것처럼 무성한 가지에 봄이니 마땅히 선사해준다는 태도로 만개한 벚꽃이 있었다. 아직 땅에는 꽃잎이 많지 않을 걸 보니 정말 딱 좋은 타이밍인 듯했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벚꽃을 멍하니 올려다보니 이 벚나무가 자기 소유처럼 느껴졌다. 이게 불멍, 물멍 다음으로 힐링되는 꽃멍인가... 
  ― 언니, 나랑 그네 타자.
  응? 돌아본 그곳엔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대체 몇 살일까. 그나저나 언니? 둘러봐도 이 작은 공원엔 아이와 희지, 둘뿐이었다. 나... 말하는 건가? 나... 말하는 거지? 희지는 팔찌의 비즈알을 무작위로 만지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금방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희지는 아이에게 익숙하지 않다.
  ― 그래, 그네 타자.
  아이는 희지가 미는 대로 밀릴 때마다 꺄르륵 웃었다. 대체 이렇게 정직하고 무해한 웃음을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더라. 처음에는 어색했던 낯선 아이와의 이상한 놀이가 점점 자신을 어린 시절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면 이런 기분일까. 아이의 등을 살짝 살짝 밀 때마다 흔들리는 팔찌가 손목에서 출렁거렸다. 아이는 벚꽃 가지 끝에 붙은 꽃무리에 닿을랑 말랑 오르내리며 벚꽃보다 더 해사하게 웃었다.
  ― 혜진아, 이제 집에 가야지.
  그 순간 아이는 아이고양이처럼 폴짝 뛰어내려 희지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뛰어가버렸다. 아이의 손을 잡은 남자만 이쪽으로 목례했다. 희지도 아까부터 웃는 얼굴을 굳히지도 못한 채 어설프게 답인사했다.
  빈 그네는 진자운동을 계속했다. 희지는 그네를 잡았다. 그네를 잡은 팔에는 그가 준 팔찌가 덜렁거렸다. 희지의 팔목에는 너무 컸다. 그래도 꾸역꾸역 차다가 습관이 되어서 헤어진 후에도 그냥 차고 다니던 팔찌다. 희지는 그 팔찌를 벗어 아이의 머리가 닿지 못했던 벚꽃 가지에 걸었다. 먼 강바람이 불어 희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좀 찾아보지 뭐. 어딘가엔 가츠카레 파는 데가 있을 거야.
  놀이터를 나서며 희지는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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