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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Flower Princess

2007.10.08 16:5910.08





물에 잠긴 나는 둥근 유리관 속에 담겨있다. 흐늘흐늘하게 물결을 타고 음울하게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마치 해초처럼, 그렇게. 창백하고 새하얀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왜 나는 뼈가 보일 정도로 투명해지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세상은 온통 흐리고 뿌옇다. 손에 와 닿는 것이라고는 단단한 유리벽 뿐, 밀어도 사라지지 않는 귀찮은 것이다. 문득 피곤해져 다시 눈을 감았다. 촛불이 꺼졌다.  


눈을 떴다. 마주친 것은 푸른 눈을 가진 인간의 사내, 기묘하고 차가운 시선. 마냥 뿌옇던 시야가 맑개 개여 선명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제 자리를 벗어나 흔들리며 나를 둘러싸고 돌고 있다. 모든 것은 춤을 춘다.

세상의 불이 꺼졌다.


그 남자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다. 다소 꺼림칙한 시선이다. 그는 내가 눈을 뜰 때면 늘상 유리관 앞에 있다. 안경 너머 냉엄한 그의 푸른 눈이 지금은 조금 마음에 든다. 하얀 가운이 잘 어울린다. 남자의 눈에 비치는 나는 어떤 모습?

"아직도 싯(SEED)이군."

중얼거리던 남자는 몸을 돌렸다.
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돌아선 그의 등을 보던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시데"

가끔 영문 모를 말을 자신에게 늘어놓던 남자는 나를 보며 말했다. 대부분의 때와 같이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지만 그것은 나를 향해 전해지는 말이다. 남자의 푸른 눈에 내가 비쳤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이미 유리벽 앞으로 몸을 당겨 있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시데. 그 말에 속박되기라도 한 기분이다.

언뜻 채워져 있던 내 체취가 배어있던 편안한 배양액이 역겨운 냄새가 나는 물로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한 유리관, 확대된 시험관 속은 낯설기도 어려운 좁은 공간이건만 어딘가 어색했다.


문득 깨어난 나는 눈을 돌려 남자를 찾는다. 그는 없다. 짜증스레 유리 벽을 밀었지만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이마를 대고 눈을 돌려 이 지긋지긋한 유리관 밖을 내다본다. 온통 하얗고 깨끗한, 하나 드문드문 용도를 알 수 없는 괴상한 것들이 자리잡은 이 곳에는 아마도 내가 담겨 있는 유리관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 되는 거대한 시험관의 확대체들이 흐릿하게 눈을 사로잡았다. 그 안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유리벽 두 겹을 넘어서. 덩굴이 몸을 휘감은 여자는 눈을 감은 채다. 여자의 몸에 감긴 덩굴 군데군데에서는 화려하고 붉은 꽃이 만개했다. 그 꽃은 휘감긴 여자의 긴 머리와 같은 빛을 띄고 있다. 깜빡, 그녀의 눈꺼풀이 떨리는 것을 본 것 같다.

감긴 눈커풀이 밀려 올라가고, 가끔 그랬듯 눈이 마주친 그녀와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남자는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로 나를 빤히 지켜본다. 사실 나는 그 시선이 싫지 않다.


"그녀는 로지야."

그가 말하는 것이 꽃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나는 어느새 성숙해 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했다. 로지. 나는 시데. 하지만 나는 당신의 이름이 궁금해.


"최근에는 깨어있는 시간이 늘었군. 곧 수면기에 들어설 조짐인가?"

넌 워낙에 희귀한 케이스라 말이야, 짐작이 어렵군. 그가 말했다. 나는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한다. 남자는 무엇인가를 적느라 나에게 눈을 뗀 채다. 나는 붉은 꽃의 로지와 눈을 마주치고 흐릿하게 웃었다. 당신은 내 이름을 알고 있어?


최근 몸이 뜨겁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유리벽에 바짝 다가선 상태로 지내는 채다. 벽에 손을 올린 채로 내내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 로지가 기쁜 눈을 하고 있다고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내 몸이 뜨겁고 그녀의 눈이 뜨겁다. 맞닿은 시선이 타오르는 듯 뜨거워 나는 눈을 돌리고 가쁜 숨을 삼겼다. 남자는 여태 오지 않는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 줄까? 나는 벽 너머 그에게 물었다.

그의 피부는 희었지만 나처럼 창백하지는 않다. 아름다운 것은 당신의 눈동자. 깊게 가라앉아 얼어버린 듯한 저 파란 눈을 나는 사랑한다. 내 눈은 어떤 색일까.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한참이나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뻗어 유리관을 두드린다. 힘없는 손짓이었지만 그는 놀랐다. 몇 번 더 두드리자 남자는 심각한 얼굴이 된다. 나는 벽을 두드리던 손을 슬며시 거두었다.

눈을 떴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어쩐지 기분이 상해 고개를 돌려 로지를 본다. 여전히 붉은 꽃과 덩굴에 감긴 그녀는 살짝 눈을 접으며 웃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웃음이다. 그리고 아주 마음에 든다.


가라앉아 바닥에 웅크리고 내려앉자 물결이 일렁인다. 덕택에 제 멋대로 흐늘거리는 차인 내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눈 앞으로 다가오기에 벌레라도 잡듯 손으로 날쌔게 채어 잡았다. 물결이 조금 빠르다. 색이 이상했다. 색이 빠져버리기라도 한 듯 기묘한, 흐릿하게 별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모아 쥐었다. 절반 가까이 색이 빠져 있다. 나는 이유를 모른다.


머리 색이 완전히 빠져 어딘가 뿌연 하얀 색이 되었다. 하지만 물결에 일렁이며 별을 뿌린 듯 기이하게 빛이 난다. 그가 놀란 눈으로 보는 것이 좋아 내내 유리관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는 열심히 무언가를 쓴다.


손에 초록빛 무언가가 돋아났다. 간지럽기도 하거니와 어쩐지 아파서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었다. 로지는 여전히 웃는다.

조금 창백한 웃음. 남자는 다시 무언가를 적는다. 눈을 감았으나 그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최근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사소하지만 큰 차이. 모두 남자의 잘못이다.


로지. 로지의 덩굴이 갈색으로 변하고 더욱 가늘어졌다. 그녀의 꽃들은 반 이상이 시들었다. 로지의 미소는 하루하루 창백해져간다. 발목을 감은 덩굴 몇 개는 이미 끊어져 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늘었지만 눈을 뜨는 순간 그 뜨거운 빛에 나는 넋을 잃는다.


손등에 돋은 것이 부쩍 자랐다. 남자가 여덟 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이 이것은 손가락 두 마디만큼 , 혹은 조금 더 자라있다. 다른 쪽 손등에도 무언가 돋아났다. 만지작거리니 간지러워 손을 대지 않았다. 잡아 당겨 뽑고 싶지만 아파서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최근 내 앞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었다. 몸은 축축 늘어져 움직이는 것이 괴롭다.


나는 흐린 눈을 들어 말끄러미 허공을 응시한다. 로지는… 그녀는 어디 있는 걸까.  밤새 그녀의 수조는 비어 있다. 안을 채우고 이따금 옅은 미동에 이어져 연한 파동으로 고요하게 흐느끼던 물결까지 깨끗이.


그가 왔다. 나는 아래로 가라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사라진 붉은 로지와 그러했듯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눈썹을 추켜 올릴 뿐 다시 펜을 놀린다. 나는 무릎을 굽힌다. 무관심은 달갑지 않다. 나는 유리벽에 몸을 부딫히고, 남자는 눈을 들어 나를 본다. 퉁, 둔탁한 진동이다.

〈실험경과 63일차〉

위로 떠오른 나는 당연하듯 그 유려한 필체로 적어나가는 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다시 내게 말을 걸어 줘. 나는 속삭이며 유리벽에 손을 얹었다. 그가 뒤돌아선 뒤, 나는 깊이 가라앉는다. 피곤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다.


빈 유리관에 물이 채워졌다. 조금 길게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이미 모든 것은 끝나 있다. 한때 로지가 있던 수조에는 이제 다른 것이 담겼다. 그것은, 샛노란 머리카락을 흩트린 채로. 손등이 다시금 욱신거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가 오면 나는 물 위를 배회하며 검게 부유하다 바닥으로 가라앉아 눈을 맞추고 하얗게 웃는다.

나는 알 수가 없어. 욱신거리는 손등을 꾹 누르며 나는 생각한다. 흉하게 일그러진 손은 여태 얼얼하고, 욱신거리는 아픔을 달래려 나는 깊은 상념속으로 가라앉는다.

몇 시간이고 흐르는 물결과 우울을 껴안고 웅크려 있다. 그는 적는다. 언제나 내게 그는 적는 모습이라 눈을 감으면 역시나 적고 있다. 사실 그가 없어도 나는 그를 보고 있다. 지금 그러하듯.


꿈과 현실의 몽롱한 경계 안에서 나는 노란 두 번째 로지를 반쯤 잠든 채로 지켜보았다. 손으로 두드리는 것이 여의치 않았는지 두 번째 로지는 몸을 힘껏 벽에 부딫히기 시작하고, 그것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굳건하다. 지독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나는 머리에 손을 올린다.

아찔한 눈 앞이 흐려지고, 부연 눈 앞에서 핏발 선 파란 눈동자를 내려감기는 눈커풀이 삼키는 것을 보며 나는 잠이 든다.


노란 머리칼. 눈이 흐리멍덩하게 비어 마냥 허공을 응시하며 이따금씩 히죽 웃는다. 차라리 징그럽기까지 한 웃음, 나는 잘게 몸서리를 치고 눈을 돌린다.흰 벽에 뚫린 아주 작은 네모난 구멍은 이다금 기묘한 매끄러운 광택을 내며 반짝인다. 그 안은 푸른 물로 가득 차 있다. 시리도록 푸른 그것을 보며 나는 무료함을 잊고, 사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 채.

그렇게 나는, 시들어 가고 있어.


손등을 찢고 자란 것에 조그마한 봉오리가 맺혔다. 기묘한 향기가 물 속에서 퍼져 코를 찌른다. 잠의 냄새다.

나는 불현듯 시든 영원의 꽃을 예감한다. 로지, 나는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어. 하얀 옷의 남자.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 안녕, 나는 시데야. 당신이 지어준 이름이지.

이 약 냄새 지독한 물 속에서 나간다면, 나는 말라 죽는 걸까? 내 웃음은 차라리 텅 비어 있다.


여러 단어들이 가라앉은 시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듯 축 처진 채로 안개처럼 부얘진 머릿속을 두서없이 비집고 나온다. 기이하게 뒤틀린 손등의 푸른 채로 시들 줄기. 이것은 내 체엑을 빨고 있나. 혹은 붉은 살점에 뿌리를 박고 탐욕스럽게 삼키고 있나? 마찬가지로, 몸은 푸르게 질린다. 팔에 툭 솟은 핏줄이 청록빛으로 일그러지며 창백한 팔 위로 도드라진다. 나는 수조에 몸을 기댄다.

노란 머리의 여자와 나는 동시에 히죽 웃는다. 그녀와 나의 미소는 이제서야 닮아 있다.

창문으로 흐리게 쏟아지는 빛에 그녀는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나는 여전히 몸을 껴안은 채로 백치와도 같은 웃음을 웃었다.


터진 봉오리를 비집고 나온 것은 물에 녹아날 듯 하늘거리며 애처롭게 짓는 꽃의 미소. 희고 손톱보다도 작은 꽃을 껴안고 흐린 안개가 흐느끼듯 웃었다.


축축한 미소. 그러나 나는 메말라 있다. 뼈는 골수까지 빨아먹혀 텅 비었다. 피 한방울 없이 바짝 짜내어진 몸 속을 가득 채운 것은 푸른 빛 도는 물 한 움큼. 팔과 등허리에 이끼가 낀다. 꽉 쥐어 짜면 물고기가 물을 뱉듯 몸 안을 돌던 얼마간의 물을 울컥 토해낼 것이다. 어디에 분노하고 어디에 절망해야 하는지 나는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렇건데, 물 속에 잠긴 나는 텅 빈 채로 끝없이 공허하다. 빈 몸 속으로 갈 곳 잃은 물만이 끝없이 빨려들어 고인 채로 썩어간다.

물 속의 나는 끝없이 울고 있다.





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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