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오래된 거주민

2022.08.13 14:2208.13

그 존재를 처음 만난 건 신혼여행으로 간 태국의 호텔에서였다. 

5일간의 신혼 여행 내내 나는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남편은 그런 나를 이해해 준 것인지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주었다.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습도에 숨이 막혀왔다. 에어컨을 켜면 조금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에어컨을 오래 켜면 손발이 저려와 하루 종일 켤 수도 없었다. 

곧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어둠 속에서도 안개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둠 속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노려보고 있던 건 남편의 등이었다. 남편은 나에게서 등을 돌려 모로 누워있었고, 나는 남편의 등을 바라보며 분명한 살의를 느꼈다. 저 등을 갈라 속을 파헤치고 싶었다. 습기에 정신이 아득해져오고, 겨우 붙잡고 있는 내 안의 무언가를 놔버리면 이 호텔방은 참혹한 살해범죄의 현장이 될 것 같았다. 일어나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었다. 에어컨 바람이 방 안의 습기를 줄이면서 내 기분도 다시 차분해졌다. 

다 괜찮아질 거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남편은 내가 자기를 죽일 뻔했다는 것도 모르고 내가 자신을 살리려고 침대에서 내려와 에어컨을 켜느라 움직일 때에도 남편은 곤히 자고 있었다.

다시 침대 내 자리에 누웠다.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남편의 얼굴을 마주하면, 더위와 습기 때문에 내가 잠시 느꼈던 살의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에게 보이는 건 등뿐이었다.

내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이 남자가 나와 결혼했을까? 자신할 수 없다. 반 년간 세 번의 짧은 만남이었다.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남편이 나에게 먼저 다가왔고 매번 만나는 곳은 내 아파트였다. 친구들은 남편의 연락을 받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가 나에게 필요로 하는 게 있으면, 기꺼워하는 마음으로 채워주고 싶었다. 한 번 오면 2, 3일 정도 머물다 사라졌다.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 집에서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건 쓸쓸했지만, 그가 벗어놓은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면 허기가 조금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나를 만지고 내 공간에 머물렀던 게 진짜라는 건 그가 남긴 옷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만남 이후 남편이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전화했을 때,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 확고한 태도에 이젠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말을 꺼낼 거라는 느낌이 왔다. 카페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만나자는 게 내 예감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어떤 말도 꺼내기 전에 나의 임신 사실을 알렸다. 

순간 차마 어쩌지 못한 감정들이 남편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라졌다. 처음엔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다음엔 절망감.  날 가장 아프게 한 건 그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남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마른 세수를 했다. 그리고 결심했는지 탁자 위에 있는 내 손을 잡고 결혼하자고 했다. 남편의 친절한 미소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내 곁에 영원히 머물게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고, 마음까지 바라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남편의 매끈한 등 아래에서 지렁이가 움직이면서 동그랗게 뭉쳐 알처럼 보였다. 그것이 남편의 살을 뚫고 나올 것 같더니, 정말 살이 위아래로 벌어지면서 놀랍게도 그 안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는 자리를 제대로 잡으려는지 마구 움직이다가 나를 응시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나는 숨마저 삼킨 채로 멈췄다. 눈꺼풀이 깜빡이듯이 벌어진 살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더니 눈을 둘러싼 살이 웃는 사람의 눈꺼풀처럼 살짝 감긴 채 옆으로 길어졌다. 

으아아아! 그제서야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침대에서 내려와 섰다. 

무슨 일이야? 

내 비명에 남편이 잠이 깨어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로 날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 남편의 눈이 빛났다. 마치 그것처럼!

당신, 등, 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내 등이 뭐 어쨌다고?

남편이 일어나 조명을 켰다. 한 팔을 들어 자신의 등을 보려고 애써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잘 되진 않았다. 

등에 벌레가 붙었었나? 당신 괜찮아?

남편이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등을 보여줘. 

남편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에게서 뒤를 돌아 등을 보여주었다. 새하얀 남편의 등엔 아무것도 없었다. 모델 활동을 위해 얼굴 뿐 아니라 온 몸의 피부를 관리하는 남편의 등은 깨끗했다.

등에 뭐라도 났어?

아니, 깨끗하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은 소파가 있는 데로 걸어가, 거기에 놓여있는 하얀 티를 집어 들었다. 내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에어컨 틀어서 좀 춥네,라고 덧붙이며 윗옷을 입었다. 내가 남편의 등에서 봤던 그건 뭐였을까? 환상이라도 본 것일까?

불 계속 켜둘까? 

남편은 침대에 앉아 협탁 위의 컨트롤러에 손을 올린 채 나를 봤다. 

내가 직접 끌게.

남편이 침대에 다시 누운 걸 확인하고 문 옆에 있는 조명 스위치를 끄고 방을 나왔다. 거실에 나와 방금 경험한 일에 대해 회고하다가 임신으로 컨디션이 안 좋은 데다가 무더위와 습기로 인해 순간 환상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존재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호텔을 바꿔서도 방 안에만 머물면서 신혼여행을 보내다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하기 전날 밤에는 남편만이라도 밖에서 놀다 오라고 했고, 남편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술에 만취한 상태로 들어왔다. 씻지도 않고 바로 곯아떨어진 남편에게선 술 냄새뿐이었다. 이 더위에 씻지도 않고 잠이 들었는데 땀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은 게 이상했지만, 그 뒤로도 묻지 않았다. 이 남자는 어차피 내 사람이니. 우리는 다음 날 한국에 오는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우리의 집으로 돌아왔다. 굳이 말하자면 내 집에 남편이 들어온 거긴 하지만, 남편이 있음으로 우리의 집이 완성된 것이다. 

임신 16주 차에 나는 아이를 잃었다. 배 부위에 있는 장기가 다 뒤틀려 쏟아져내릴 것만 같았는데, 정말 내 다리를 타고 엄청난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앉아있던 소파가 피로 흥건해지고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전화기를 껐을 때 나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바로 119에 전화를 했다. 

내 안에서 나온 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작은 생명체를 두 손위에 얹어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구급 대원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1년이다. 결혼 1년 만에 두 번의 유산, 한 번의 수술로 나는 임신이 어려운 몸이 되었다. 왼쪽의 난관을 제거했고,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몸이 붓는 것 같더니 10kg이나 체중이 늘어나있었다. 몇 시간밖에 자지 못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 혼자 울 때가 많았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이대로 내가 희망 없이 죽을 것만 같았다. 

내가 절망하는 1년 동안 남편은 모델로서 인지도를 높였고 그중 주류 광고를 찍어 유명세를 떨치게 되어, 광고뿐 아니라 드라마 배역 섭외가 들어오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거리를 걸으면 남편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자신의 팔에서 내 손을 떼어놓고 거리를 두었다. 남편은 집에 늦게 들어올 때가 많았고,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오랜만에 남편이 집에 들어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땀을 많이 흘렸다면서 샤워를 하고 있을 때, 식탁 위에 있는 남편의 핸드폰에서 연속해서 소리가 났다. 나는 처음에는 남편의 핸드폰 알림이 시끄러워 끄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지만, 메시지가 탑처럼 쌓여지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들었다. 비번을 눌러 대화창에 쌓여가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중 ‘보고 싶다’는 메시지가 보였다. 그때 남편이 욕실에서 나와 내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들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남편이 날 경멸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남편의 시선이 거북스럽고 짧은 순간 내 자신이 부끄러워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보고 싶대.

뭐?

누구야?

나는 어렵지만 힘을 내어 다시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남편은 자신의 핸드폰에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같이 몇 번 일했던 애야. 화보 찍은 결과물 보고 싶다고 하는 거야.

남편은 옷을 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잠깐 멈춰 나를 흘깃 쳐다봤다.

대체 무슨 생각 한 거야?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은 남편은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고, 우리는 그날 함께 저녁을 먹지 않았다. 

그 뒤로도 함께 저녁을 먹는 건 이례적인 일이 되었다. 주말에도 남편은 일을 핑계로 외출했고, 집에 들어와서도 내가 먼저 침대에 있으면 거실 소파에 한참 누워있다 잠에 취해 침대로 오곤 했다. 내가 늦게까지 다른 방에 있을 때에는 남편이 먼저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먼저 잠든 남편의 등을 바라보며 이런 삶을 위해 내가 이 사람을 붙잡아 결혼했다는 게 후회스러우면서도, 나를 안아주던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졌다. 

남편의 옷을 올려 등에 입을 맞추었다. 남편의 몸이 움찔하더니, 계속되는 내 키스에 잠결에서도 짜증 난다는 듯 소리를 내었다. 금방이라도 흐느껴 울 것 같았다. 그때였다. 남편의 등에서 무언가 꿈틀대더니, 얼굴 같은 것이 튀어났다. 남편과 닮은 얼굴이었다.

남편을 많이 좋아하나 봐.

남편의 등에 나타난 이해 불가능한 현상에 혼란스러운 와중에 남편과 닮은 얼굴에서 나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아님, 남편과 잠자리하는 걸 좋아하는 건가. 

남편의 등에 나타난 얼굴이 구겨지고 다시 만들어지면서 성기 모양으로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남편의 등에 손을 갖다 대었다. 감촉은 두꺼운 등 피부 그대로인데 입체감이 느껴져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감각이 없는 것인지 남편은 아까 내가 키스했을 때와는 다르게 조금도 움찔거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이게 서로 대화하기에는 편하겠지?

다시 남편의 얼굴이 드러났다. 마치 석고를 뜬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데가 있었지만, 남편의 얼굴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 너무 오랜만이다. 미지의 존재가 남편의 몸에 머물고 있는 건가?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지?

그게 중요해? 우리가 어떻게 대화가 가능한지?

남편의 얼굴로 웃음을 흉내 내고 싶은 것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양쪽으로 올렸다. 그 존재는 남편을 흉내 내고 내 생각을 읽고 있다. 나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고. 그것이 뭔지는 몰라도 대화가 가능한 걸로 봐서는 지적인 생명체다. 

남편이 너에게 자주 등을 돌리네. 그래서 네가 날 발견할 수 있었던 거겠지. 

넌 뭐야? 

우리는 너희들 조상의 조상의 조상들보다도 더 오래 지구에 머물렀지. 네가 생각한 것처럼 지적인 생명체가 될 수 있었던 건 내가 인간에게 거주하기 때문이지. 

그럼 개, 돼지한테 머물면?

개, 돼지와 같겠지. 거주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니깐. 

이 모든 것이 내 환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쳐가고 있어서 머릿속에서 분열되어 목소리가 들리고 헛것을 보는 것이다. 나를 속이는 완벽한 촉각까지.

그렇게 따지면 네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그렇지. 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손을 속이고, 눈을 속이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런데 나는 이제 너에게 나타난 이상 네 앞에서는 사라지진 않을 거야. 

내 남편의 등에서 그렇게 계속 산다고?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었다. 내 소리에 남편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바로 하고 누웠다. 남편이 자세를 바꾸면서 그 존재와 함께 남편의 등은 바닥으로 향해, 더 이상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잠든 남편의 목에서 작은 뱀이 움직이듯 꿈틀거리는 게 보이더니, 그 움직임이 쇄골로 왼팔로 손으로 이어져 손가락 끝까지 움직였다. 

나는 남편의 몸 어디에든 갈 수 있어. 전혀 들키지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으면서 살고 있지.

해를 끼치지 않는 게 확실해?

남편이 다시 깰까 봐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을 테지만, 이건 내가 다른 존재와 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편한 방식이다. 

내가 언제부터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난 인간이란 종보다 지구상에 오래 존재했다니깐. 한 번도 죽지 않고 지금까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옮겨 다니면서. 짐승에서 사람으로, 남자에서 남자의 아들로. 거주 대상이 죽을 때까지 거주할 수 있고 거주 대상을 바꿀 수도 있고. 

내 남편은? 난 평생 남편에게서 너를 봐야 하는 거야?

앞으로 남편과 함께 있을 때마다 남편 몸 안에 있는 존재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함께 밥을 먹을 때도, 같은 침대 위에서도. 아, 남편과 관계를 맺을 때마저도.

글쎄, 네가 평생 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지는 나도 모르지. 곧 남편이 너를 떠날 것 같던데. 떠나고 나면, 네가 날 볼 일도 없지 않을까?

그 자리에서 나를 지탱하던 것들이 흔들리고 순식간에 세상의 가장 깊은 곳으로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떠난다고? 

나는 더 이상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남편이 나를 떠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결혼 전부터 있었다. 아이를 잃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지금은 남편을 붙잡아둘 만한 이유가 없다. 

네 남편이 너를 떠나지 않게 해줄 수도 있어.

남편의 몸에 기생하는 그 존재를 남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내 말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이상한 소리나 한다고 내가 미쳤다고 하면서 떠날 게 분명했다. 남편에게 떠날 빌미는 하나도 줘선 안 된다. 지난번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화나게 하는 것도 위험하다. 떠난다는 말을 꺼내기 좋은 분위기로 만들겠지. 그렇다고 남편 등에 사는 그 존재가 말한 대로 죽이는 게 답일까? 만약 이 모든 것이 내 환상이고, 나는 남편을 죽인 살인자가 되고, 남편을 영영 찾지 못한다면, 나는 모든 걸 잃는 셈이다. 그러나 만약 그 존재의 말대로 된다면 적당한 때에 죽은 남편의 몸을 그 존재가 차지하고, 내 곁에 영원히 머문다. 내가 원한다면 그는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감쪽같이 남편으로 살아가줄 수 있다고 해주었다. 잠시 내가 원하는 것이 지금의 남편인지 헷갈린다. 된장찌개에 넣을 감자를 썰다 말고 내가 쥐고 있는 칼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몸이 손상되지 않는 게 좋아.

몸을 손상 시키지 않고 죽이려면 목을 조르는 게 가장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나보다 20cm나 크다. 보통 남자보다 말랐다 하더라도 나보다는 덩치가 크고 힘으로 내가 눌릴 수도 있었다. 잘못하면 내가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 역시 그 방법뿐이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남편을 보다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든다. 창을 통해 쏟아져들어온 빛이 잠든 남편의 얼굴을 감싼다. 

생각보다 쉬웠다. 채소와 과일을 갈아 만든 ABC 주스에, 내가 호르몬 치료를 받으면서 받은 수면유도제를 정량의 4배를 넣었다. 아침 운동 뒤에 별 의심 없이 주스를 마신 남편은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조금 피곤하다고 했다. 

오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가 보다. 스케줄 없으면 침대에서 좀 쉬다 나가는 건 어때?

약속이 하나 있긴 한데…….

남편이 거실 한 쪽으로 가서 핸드폰으로 한참 메시지를 보내고는,

30분 후에도 내가 안 일어나면 좀 깨워줘.

라고 말하며 침대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서 침대 방 문을 열어보니, 남편은 무방비하게도 대자로 뻗어 있었다. 남편의 핸드폰을 들어 내가 아는 비번을 눌렀지만 열리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을 남편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대도 열리지 않아, 남편의 두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더니, 그제야 핸드폰 잠금이 해제되었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보낸 문자는 Q에게 [저녁에 보자]는 것이었고, 그 위의 문자들은 없었다. 다른 문자들도 살펴봤지만, 최근에 내가 핸드폰을 들여다본 이후에 포맷을 한 건지 핸드폰 안이 인간의 교류 매개체가 아닌 것 같았다. 그게 날 더 불안하게 만든다. 숨길 만한 것이 있으니 그런 짓을 했을 테니깐. 

남편의 몸 위에 올라타 앉았다. 살짝 오른쪽 뺨을 때려보았다. 남편에게선 아무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나와.

남편의 얼굴이 울퉁불퉁해지더니, 남편의 두 눈이 떠졌다. 그러나 눈을 뜨고 자고 있는 사람처럼 생동감은 없었다.

준비됐어?

남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그 존재가 남편과 더욱 구분이 되었다. 나에게 전해져오는 목소리는 실제 남편과 대화했을 때 경험하는 것과 달랐다.

정말 내가 남편을 죽이려고만 노력하면, 네가 남편을 차지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너무 걱정 마. 타이밍은 내가 알아서 잘 맞출게. 내가 이 몸을 차지하면 너는 남편과 헤어지지 않고 오래 사는 거야.

나는 떨리는 두 손으로 남편의 목을 감싸고 힘을 주었다.  

더 힘을 주어야지, 그렇게 힘이 없어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엄지에 힘을 실어 누르자 내 몸 아래 있는 남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남편의 눈이 떠서 정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고 나를 원망하는 듯한 눈빛. 나는 놀라 남편의 목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다시 봤을 때, 남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여, 여보…….

남편의 몸에서 내려와 옆에 앉아 남편을 불렀다. 

눈을 감고 있는 남편에게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죽은 건가? 이렇게 쉽게? 남편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 존재가 남편을 차지한다 해도 그것은 남편이 아닌데, 내가 잘못 생각했다.

남편의 턱 아래에 맥이 뛰는지 손가락을 조심히 대보았다.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니 미세하나마 맥박이 느껴졌다. 맥박을 느끼고 안심하자마자 남편의 피부 아래에 꿀렁거리며 지렁이 같은 것이 지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그 존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이야.

소름 돋게도 차가운 목소리였다. 

안돼! 남편을 죽일 수 없어.

그 존재에게 다시 설득당할까봐 다급해져 큰 소리로 말했다. 

흠. 남편이 널 떠날 텐데도 괜찮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남편이 죽는 건 더 싫어. 아니, 내가 죽여야 하는 게 싫어. 

나는 네가 사랑하는 남편의 일부야. 내가 너보다 이 사람을 더 잘 알고 그대로 흉내 내줄 수 있어. 

아냐. 모르겠어, 나도. 이 사람을 지킬 거야.

나는 남편 옆에 누워 남편을 두 팔과 다리로 힘껏 감싸 안았다. 내가 이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생각했더니 조용했다. 나는 남편이 숨을 쉬며 몸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내 배 위로 뱀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놀라 도망가고 싶었지만 손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거기다 알몸이었다. 뱀이 내 살에 닿는 느낌이 미끈거리고 뜨거웠다. 내 배에서 가슴을 타고 올라와 내 목을 타고 다시 가슴을 훑고 다시 배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뱀이 내 몸 위를 지날 때마다 나는 열에 들뜨기 시작했다. 뱀이 내 오른쪽 허벅지를 묵직하게 감고 그다음엔 왼쪽 허벅지를 감았다. 내 몸은 점점 더 구속 당하고, 압도 당하고 있었다. 두려우면서도 뱀의 혀가 내 성기에 닿는 순간 미끈거리고 뜨거운 느낌에 온몸에 전율이 왔다. 

여보.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보니, 내 몸 위에 알몸의 남편이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알몸이 되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남편과 이렇게 몸을 맞댄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남편의 잘 가꾸어진 몸매, 남편의 가슴에 손을 가만히 대보았다. 남편은 내 손을 붙잡고 입으로 키스하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작고 큰 파도 같은 오르가즘을 여러 번 느꼈고, 점점 둘 다 절정에 치닫고 있었다. 남편이 격하게 움직였고, 나도 남편의 움직임에 정신이 혼미해지며 나 자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강렬하게 나를 매혹하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내 몸이 절로 활처럼 뒤로 꺾여가는데, 절정의 순간 남편이 한 손으로는 내 골반을 잡고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나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얼굴과 조각 같은 몸……남편의 배에서 얼굴이 튀어나오려 했다. 

벌써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나는 공포와 오르가즘을 함께 느꼈다. 그 순간 남편에게서 흘러나온 정액이 내 안에 따듯하게 퍼지는 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끝나자 남편이 몸을 떼고 옆으로 누웠다. 나는 남편의 몸에서 그 존재를 찾기 위해 샅샅이 훑어봤다. 

왜 그래. 난 이제 너무 지치는데.

남편의 몸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디로 숨은 거지?

내 몸에서 자꾸 뭘 찾는 거야?

당신의 몸이 이상하게 느껴진 적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치 원래의 남편으로 돌아온 듯한 나에게 무신경한 느낌이었다. 남편은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로 향했다. 남편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남편의 등에서 그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 눈으로 쫓았지만, 없었다.

그 뒤로 남편의 몸에서 그 존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이 사고로 죽은 지 8개월이 되었다. 상대 운전자의 졸음운전이 사고의 원인이었고, 결과는 두 사람의 죽음이었다. 그중 남편의 경우가 가장 끔찍했다. 반대편에서 오던 차가 중앙 차선을 넘어 남편과 동승자가 탄 차를 박살 냈고, 운전자석에 있었던 남편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운전자 쪽으로 차가 심하게 파손됐고, 핸들에 몸이 박힌 남편의 시신을 꺼낼 수가 없어 톱으로 잘라 나눠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남편 옆에 있었던 사람은 남편과 친한 여자 후배로, 사고 당시 차의 전면 유리를 뚫고 나가 차로부터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둘의 마지막은 제주도 해안 도로 위였고, 사망한 여자의 뱃속에는 3개월 된 아기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겐 임신 8개월 만에 낳은 아기가 있다. 

아마도 내가 남편을 죽이는 데에 실패하고 관계를 맺은 날 임신이 되었다. 그 뒤로는 남편이 집을 떠났으니 그날이 확실하다. 남편이 떠난 후 임신을 확인했고, 병원에 가서 아이를 지울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가 내 뱃속에서 움직이며 날 말리는듯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도 말했듯 내 몸 상태에서 임신을 한 것 자체가 매우 희박한 확률이므로 이 아기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머님, 사랑스러운 꼬물이 왔습니다.

꼬물이요?

아직 말씀해주신 아기 이름이 없길래, 꼬물거리는 게 귀여워서 그렇게 불러봤어요. 괜찮죠? 

간호사는 싸개로 몸을 둘둘 싸고 있는 내 아기를 품에 안게 해주었다. 

임신 8개월이 채 안 된, 30주 차에 양수가 터져 아프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병원에 왔지만, 다행히 아기는 3kg으로 건강하게 태어났다. 내 몸은 산산이 다 찢겨졌지만.

아기가 30주 만에 이렇게 건강하게 태어나기도 하나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아이의 때 이른 탄생도 의문투성이다.

태어나준 것에 감사해야죠.

나의 물음에 간호사는 지혜롭게 답했다. 

나는 아기를 안은 채 멍하니 있다가 간호사의 찡긋거리는 눈 신호에 아이에게 젖을 물려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윗옷의 단추를 풀어 가슴을 내놓고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남편을 많이 닮은 것 같아 보이는 아이는 탐욕스럽게 내 젖을 잘도 빨아댔다. 아이를 안고 아이의 감촉을 느끼다 보니, 남편이 너무 그리워진다. 날 싫다고 다른 여자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다니, 나도 참 멍청하다. 그때 젖을 먹고 있는 아이의 머리에서 무언가 기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

끄아아악!

그 존재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비명을 지르며 안고 있는 아이를 품에서 놓쳤다. 간호사가 순발력 있게 아이를 받아내지 않았더라면 아이는 바닥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산모님, 큰일 날 뻔했어요! 괜찮으세요?

간호사는 놀라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내 품에서 자신의 품으로 옮겼다. 

아기가, 정말 내 아기가 맞나요?

방금까지 아기를 안았던 내 두 팔이 허공에 매단 나뭇가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내장이 뒤틀리면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우선 아기를 재우고 올테니, 산모님도 진정하시고 계세요.

간호사는 아기를 안고 사라졌다. 

그 존재가 분명했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내 아기에게로 들어왔던 것이다. 남편도! 

모든 게 그 존재의 계획이었다. 나는 벗어날 수가 없다.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 그 존재는 이제 내 아이의 몸속에서,  그 아이의 아이의 몸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것이고, 죽지 않을 것이다. 

어지러워지더니, 내 몸이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귓가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어둠은 더 나를 강하게 잡아당긴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060 단편 카페 플루이드1 쟁뉴 2022.10.27 0
2059 단편 카페 르상티망2 scholasty 2022.10.18 0
2058 단편 최종악마의 최후 니그라토 2022.10.13 0
2057 단편 CHARACTER1 푸른발 2022.09.30 1
2056 단편 토끼와 가짜 달 거지깽깽이 2022.09.19 0
2055 단편 수박 거지깽깽이 2022.09.19 0
2054 단편 위(胃)의 붕괴 배추13잔 2022.09.17 0
2053 단편 모험은 영원히 헤이나 2022.09.13 0
2052 단편 찬이라고 불린 날들2 김성호 2022.09.12 1
2051 단편 어느 Z의 사랑4 사피엔스 2022.09.07 2
2050 단편 천하에 소용없는 노력과 망한 인생 대혐수 2022.09.03 4
2049 단편 언니 푸른발 2022.08.31 0
2048 단편 목마의 뱃가죽을 가르면 사피엔스 2022.08.29 0
2047 단편 여전히 인간이 되기에는 멀었다 헤이나 2022.08.28 0
2046 단편 네버마인드, 지구2 헤이나 2022.08.28 0
2045 단편 만다린 치킨1 도우너 2022.08.25 0
2044 단편 취소선 둘째5 서애라자도 2022.08.24 1
2043 단편 모의 꿈 김성호 2022.08.17 0
단편 오래된 거주민 반야 2022.08.13 0
2041 단편 가슴 가득, 최고의 선물2 사피엔스 2022.07.31 2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