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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가슴 가득, 최고의 선물

2022.07.31 23:4007.31

아침 6시. 나를 깨운 것은 자명종 소리가 아니라 아들놈의 울음소리였다. 그래그래, 쪽쪽이, 아니 아빠 여깄다. 녀석은 내 젖을 문 채로 선잠이 들었다. 나도 잠이 들고… 7시가 되자 딸이 깨어 다른 쪽 젖을 물렸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 아니, 이미 죽은 것 같다.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닌가 싶다. 지난밤만 해도 아들 때문에 깬 게 네 번, 딸 때문에 깬 게 두 번이다. 그래도 딸아이는 젖을 10분 만에 꿀꺽꿀꺽 마시고 금세 잠이 들지만, 내 젖꼭지를 공갈젖꼭지 취급하는 아들 때문에 나는 녀석을 내 가슴에 붙여놓은 채로 불편하게 자야 한다.

아내가 쿨쿨 자는 모습이 늘 얄밉고 부럽다. 하지만 애 낳느라 피곤했을 테니 내버려둬야지. 백일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피곤하다는 게 이해가 안 되지만. 아니, 무슨 이런 불만을! 산후조리를 잘 해야 둘째들도 잘 낳을 테니 하늘같은 아내를 얄미워하면 안 된다. 뭐, 뭐라고? 둘째들? 이 와중에 둘째 갖자고 덤벼드는 아내가 무섭고 원망스럽다. 아이고, 내 팔자….

아냐, 아냐! 애 아빠가 돼가지고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아무튼,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되나 싶다. 양 발목에 아이가 하나씩 매달린 이런 삶을.

하지만 내 새끼들이 이뻐 죽을 것 같은 건 사실이다. 오물오물 젖 빠는 모습이 너무너무, 아니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내 젖이 이 예쁜 아이들을 키우는 양분이 된다니! 신기하고 감사하다. 그래, 너희들만 건강하게 잘 자라준다면 이 아빠가 뭔들 못 하겠니.

다만 유선염만 안 오면 소원이 없을 텐데. 치밀 유방인데다 젖양이 많다 보니 수유를 마치고 돌아서면 젖이 새고 툭하면 젖이 뭉쳐 아프다. 호환마마보다도 무서운 게 유선염 아닌가. 40도를 웃도는 고열. 바늘로 찌르는 듯한 유방통. 해결책은 무조건 수유하거나 유축을 하는 거다. 고인 젖을 빨리 배출시켜야 하니까.

그럼에도 분유수유는 꿈도 꾸지 않는다. 부유(父乳)는 아기에게 완벽한 음식이고 아빠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니까!

물론 나도 철부지 시절에는 분유 먹이면서 편하게 키우자고 생각했다. 동생들에게 젖을 물리며 초췌한 몰골로 앉아 있는 아빠를 보며 왜 저렇게까지 애를 쓰나 싶었으니까. 하지만 아내가 임신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소중한 내 아이들에게 어떻게 소젖을 먹인단 말인가? 사람은 사람 젖을 먹어야지!

그 생각은 부유수유진흥원의 강연회를 다녀온 뒤 더 강해졌다. 막연히 부유가 좋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장점이 그렇게나 많은지 미처 몰랐다. 부유를 먹고 자란 아이들은 건강하고 머리가 좋고 성격도 좋다고 한다. 그래서 부유수유진흥원 강사가 알려주는 가슴 기저부 마사지도 열심히 보고 따라했다.

마사지는 효과가 좋았다. 왜냐면 아내가 출산하기도 전부터 내 젖에서는 젖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가 출산하자, 오렌지만 하던 내 가슴은 멜론만큼 부풀며 본격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다.

하지만 아기들에게 젖을 먹이는 일은 그냥 물린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방향과 각도와 타이밍이 중요했고, 초짜인 내가 혼자 터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아내가 산후조리원에서 몸조리를 하는 동안 나는 부유수유진흥원에서 아기들과 먹고 자며 젖 먹이는 법을 배웠다.

‘부유는 아기에게 가장 완벽한 음식’, ‘아빠가 아이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부유!’, ‘아빠와 아기의 유대감, 부유수유로 쌓아가세요.’ 등등의 캐치프레이즈가 사방을 가득 채운 그곳은 부유수유를 훈련하는 사관학교나 다름없었다.

나는 젖이 일찍 돌았던 데다 초유가 펑펑 나와 동기들의 부러움을 샀었다. 유축하다 보면 부유저장팩이 5분 만에 차 버릴 정도였으니까. 나중엔 우리 애들 먹이고도 꽤나 남아서 부유은행에 기부하기도 했다.

기부는 지금도 하고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아빠라면 누구나 그렇다. 뭔 짓을 해도 젖이 잘 안 나오거나 유두가 함몰돼서 젖 물리는 게 불가능한 남자들이 있으니까. 단지 그런 아빠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애가 분유를 먹어야 한다면 얼마나 불쌍한가? 그래서 우리는 그런 가정을 위해 부유를 기부해야 한다고 배웠다.

부유 기부는 다함께 행복한 사회를 꾸려가기 위해 남자들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에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지 않는가? 옛날 옛적 효자 심청도 아빠를 일찍 여읜 바람에 동네 아저씨들한테서 동냥젖을 얻어먹고 컸다지 않나.

하지만 직접수유의 첫걸음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양 옆구리에 작고 연약한 아기를 하나씩 끼고 앉아 있는 것부터가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데다가, 그 쪼끄만 입이 커다랗게 열리기를 기다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유두를 물려야 되는데, 말이 쉽지 막상 해 보면 잘 안 되고 애는 울어대고 진땀이 흐른다. 유륜까지 깊게 물려야 내 젖꼭지도 안 아프고 애들도 공기를 안 먹는다는데 이론적인 얘기일 뿐, 모든 게 수월치가 않았다. 어떤 남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물릴 수가 없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젖도 잘 안 나오는 걸 보니 자기는 아빠의 자격이 없는 것 같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마다 울어대는 아이들을 데리고 24시간 씨름하다 보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오곤 했지만 아무도 분유를 먹이겠다고 하지 않았다.

우리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이끌어 주신 스승은 부유수유진흥원의 원장님이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로, 가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진 상태였는데 무려 열여덟의 아이들을 먹여서 그리 된 거라고 했다. 원장님은 우리보고 놀라지 말라고 했다. 다들 열에서 열둘 정도는 낳지 않느냐며, 자기가 조금 더 많이 키웠을 뿐이라고. 아내 분이 폐경이 늦게 와서 아이들을 많이 낳으셨고 덕분에 자긴 부유수유의 달인이 된 거라고 했다.

“수유하는 게 많이 힘들죠? 이런 소리 하면 꼰대라고 욕하겠지만, 사실 그거 요즘 남자들이 힘든 걸 모르고 커서 그래요. 나 때는 말이에요. 하루 종일 밭 갈고 김매면서 허리 펼 새 없이 일만 하다 아기 젖 먹일 시간 되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왜냐고요? 애가 젖을 빠는 동안 난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쉴 수가 있었거든요.”

존경스러웠다. 이 힘든 부유수유가 기다려질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고된 삶을 사셨단 말인가? 하지만 ‘밭 맬래? 애 볼래?’ 하고 물으면 밭 맨다고 대답한다는 옛말이 있지 않나? 솔직한 심정으론 나도 그렇다. 월요일이 기다려질 정도다. 주말 내내 애들 젖 먹이는 게 너무 힘드니까. 특히나 내 젖꼭지를 장난감 내지는 수면제 취급하는 아들놈 때문에 미치고 환장… 앗! 내가 이런 불경스런 생각을!

신성한 부유수유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그만큼 체력 소모가 심하다는 거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사무직이라는 거다. 유축할 때 편하니까. 정부 지원으로 회사에 유축실도 잘 돼 있고, 유축기 계의 메르세데스 벤츠라 불리는 메델라 심포니도 여러 대 비치돼 있다. 유축하고 나면 부유를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반은 부유은행으로 보내고 반은 집에 들고 간다. 그럼 우리 부부가 출근한 동안 육아도우미 아저씨가 데워서 아이들한테 먹여준다.

아내는 보험 영업을 하기 때문에 수시로 외근을 나가는데 아마 나랑 입장이 바뀌었으면 외근 스케줄이랑 유축 스케줄이 겹칠 때 여간 곤란한 게 아닐 터였다. 공공장소에 마련된 유축실은 유축기 고장도 잦고 비위생적이니까. 하긴 그래서 영업직을 여자들이 하는지도 모르지.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뭐, 임신 후기부터는 아니라고 볼멘소리를 하긴 하더라만, 그 몇 달만 버티면 애 낳으면서 고생 끝 아닌가? 남자는 부유 먹이느라 잠도 못 자고 영양분이 쭉쭉 빠져나가는데. 내가 이 소리 하면 아내가 ‘여자도 임신하면 잠 잘 못 자고 영양분 빠져나가거든? 회음부도 안 찢어져본 주제에!’ 하고 소리를 꽥 지른다. 그럼 난 찍소리 못 하고 쪼그라들고 만다. 회음부가 찢어져본 적이 없기에. 그러는 당신은 젖꼭지가 찢어져본 적 있냐고 맞서면 어디서 하늘같은 아내한테 말대꾸냐고 주먹이 날아온다.

회사에서 유축과 근무를 반복하다 퇴근해도 퇴근이 아니다. 애들 젖 주러 집으로 출근하는 거다. 고달픈 생활이지만 맞벌이는 필수다. 우리 사장님 정도는 돼야 애만 낳아놓고 유부(乳父)를 들여 편하게 키울 수 있는 거지, 우리 같은 서민들은 그런 생활을 꿈도 못 꾼다.

당장 우리만 해도, 내가 지금 부부관계 할 기력이 없어서 망정이지, 애들 크면서 수유횟수 줄어들면 아내가 본격적으로 덮칠 거다. 그럼 또 쌍둥이들이 태어나겠지. 난 잠도 못 자고 수유하느라 파김치가 될 거고, 내 젖꼭지는 너덜너덜 누더기가 될 거고.

아아, 사장님 남편이 부럽다. 유부한테 애들 맡겨놓고 골프 치러 다닌다지? 우리도 언젠가는 유부를 고용할 수 있을까? 그럼 이 지긋지긋한 젖뭉침과 유선염은 안녕일 텐데.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무겁고 지친 몸으로 출근했다. 탕비실에 갔더니 김 과장이 부유촉진차를 내리고 있었다. 그가 두 잔을 따라 한 잔을 건넸다.

“어제도 잘 못 잤어?”

“네.”

“고생이네. 하긴, 나도 좀 있으면….”

“과장님, 저 진짜 너무 후회돼요. 자꾸 옛날 여친 생각만 나고….”

“벤처 차려서 잘 나간다는 사람?”

“네. 그때 걔가 청혼했을 때 그냥 결혼할걸 그랬어요. 그럼 지금쯤 사장님 사부님처럼 유부 쓰면서 놀고먹고 있을 텐데. 어디 저렴한 유부 없을까요?”

김 과장이 혀를 쯧쯧 찼다. 아차, 나의 실수. 어떻게 애 아빠가 돼가지고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애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얼마나 부성애가 모자라는 인간으로 보일까?

그런데 김 과장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애초에 전제부터가 잘못됐다는 거다. 무슨 전제? 김 과장이 말하기를, 애를 자꾸 낳는 게 문제의 시작이라는 거다. 아니, 이런 망언이 있나? 애를 자꾸자꾸 낳는 게 우리 사회의 미덕이거늘! 누가 우리 얘길 들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둘밖에 없었다.

그때 김 과장이 하는 말이, 우리 사장님은 부자 축에도 못 낀다는 거였다. 진짜 부자들은 오히려 애를 안 낳는다나?

못 낳는 게 아니라 안 낳는 거라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김 과장은 자기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 부장한테 들은 얘기라며, 이 부장은 또 박 상무한테 들었고 박 상무는 우리 사장님한테 들은 얘기라고 했다.

아니 글쎄, 최근에 황천동 근처 청천동으로 이사를 간 사장님이 황천동을 슬슬 돌아다녀봤는데 그 동네는 절간 같더라나? 아기 울음소리가 전혀 안 들리더라고. 황천동이 어딘가? 난다 긴다 한다는 재벌들, 전현직 국회의원들, 고위공무원들, 전직 대통령들이 사는 곳 아닌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저택들과 아름다운 조경과 깨끗한 거리로 소문난, 공기부터가 격이 다르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말이다.

더 이상한 게 뭔지 아냐고 김 과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동네에는 결혼한 사람도 없다는 거였다. 죄다 혼자 사는 여자뿐이라고. 동네가 조용한 게 하도 이상해서 우리 사장님이 시간 날 때마다 그 동네를 서성였는데 어째 그 대궐 같은 집마다 들락거리는 사람이 여자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사람 사는 동네에 아기가 없다니?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정부에서는 왜 그들에게 결혼하라고 하지 않은 걸까? 그들은 정부의 경고장를 받고도 그 엄청난 벌금을 물고 혼자 사는 걸까? 돈과 권력이 넘쳐나니까? 역시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은 이해할 수 없고 발도 디딜 수 없는 세계인가.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삶이 한층 궁금해졌다. 이런 식이 아니면 주워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인터넷에는 우리 같은 서민들 얘기만 올라오지 부유층 얘기는 안 올라오니까. 말 그대로 딴 세상 사람들인 것이다.

갑자기 김 과장이 내 귀를 잡아당겼다.

“아야! 왜 이러세요?”

내 짜증에도 불구하고 김 과장은 태연히 속삭였다.

“제일 이상한 게 뭔지 알아? 사실 나도 궁금해서 가 봤거든. 근데 거기서 누굴 만났는지 알아?”

김 과장은 황천동에서, 작년에 실종된 우리 팀 신입사원 정새롬 씨를 만났다고 했다.

말도 안 돼. 남자 사원들의 우상이었던 그 미모의 정새롬 씨? 3년 전에 내 초등학교 동창 강민경이, 또 재작년에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미인으로 소문난 유나/유노 어머니가 실종됐을 때처럼 경찰들은 아무 단서도 찾지 못 했고, 때문에 수많은 남자 사원들이 정새롬 씨를 그리워하며 피눈물을 흘렸었는데.

“웃긴 건, 자기가 정새롬이 아니라는 거야. 사람 잘못 봤다고. 얼굴도 목소리도 그대론데, 진짜 정새롬 씨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닮은 사람이었겠죠. 그렇게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경찰이 못 찾았을 리가 없잖아요.”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리고 날 알아보는 눈치였어.”

“알아보는데 왜 모른 체를 해요?”

“이유는 딱 하나. 빚을 지고 도망을 간 거야.”

“빚지고 도망간 사람이 황천동에 살아요?”

“그건….”

김 과장은 말문이 막혀 부유촉진차만 홀짝였다. 이 사람,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작년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머리가 깨지더니 그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릴 한다. 그 전까진 아이들이 너무 좋고 아이들한테 젖 먹이는 것보다 보람찬 일은 없을 거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던 사람이 이런 소릴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건 그렇고, 최 대리, 부유수유 언제까지 할 거야?”

정상보다 비정상에 가까운 이 인간에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는 언제 징징댔느냐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세 돌까진 해야죠. 국제보건기구에서 그랬잖아요. 부유는 아빠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보통은 ‘그래, 그래.’ 같은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김 과장은 떨떠름해하는 표정이었다.

“뭐어, 그렇긴 하지만, 둘째들이 일찍 태어나면 넷 다 먹여야 될 수도 있는데?”

“힘들어도 다들 그렇게 살잖아요. 왜요, 과장님은 그만 먹이시려고요?”

“음, 너무 힘들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그런 생각만 자꾸 들어서. 그냥 분유 먹여볼까 하고.”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부유수유가 아무리 힘들어도 분유를 먹이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분유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죄스러운데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분유를 먹이겠다고?

“분유를 왜 먹여요? 부유은행에 신청하면 공짜로 주잖아요.”

“의학적인 이유가 아니라서 안 준다더라고.”

김 과장의 아이들이 불쌍해 보였다. 특히나 태어난 지 2년도 안 된 둘째들이. 부성애가 모자라는 아빠 때문에 그 어린 것들이 분유를 먹어야 하다니. 머리가 나빠지고 잔병치레를 하고 성격도 고약해지겠지? 혹시 김 과장도 분유를 먹고 컸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이상해진 게 설명이 안 된다.

그때, 김 과장의 와이셔츠에 어두운 동그라미 두 개가 퍼져가고 있었다. 젖이 새서 옷이 젖은 것이다. 수유패드를 안 했냐고 물으니 저번에 수유패드에서 나온 화학물질이 신경 쓰여서 안 한다고 했다. 애들이 먹을까 봐 걱정된다고. 흠, 저런 걸 보면 또 부성애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참 헷갈린다.

어쨌든 나도 그 뉴스를 보고 일회용수유패드가 아니라 천 수유패드를 쓰던 참이었다. 그런데 김 과장이 내 가슴을 가리키며 젖이 샌다고 했다. 이런 젠장, 오늘만 도대체 몇 번째야? 또 갈아입어야겠네. 뭔 놈의 젖이 이렇게 콸콸… 아니, 아니, 내 신성한 가슴과 부유를 욕하는 게 절대로 아니다. 빨랫감이 느는 게 싫은 거지.

김 과장과 함께 유축실로 갔다. 그런데 김 과장이 가슴에 깔때기를 하나씩 갖다 대며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닌가.

“젠장, 이럴 때마다 뭔 젖소가 된 것 같다니까. 짜도 짜도 끝이 없어. 이 많은 걸 누가 다 먹으라고.”

본인을 젖소에 비유하다니! 머리가 잘못돼도 정말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뚫어져라 쳐다보자 김 과장이 피식 웃었다.

“왜, 최 대리는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내가 젖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품고 유축한 젖을 우리 아이들에게 먹이기 싫었다. 부정 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사회의 모범시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모범적인 답변을 내놨다.

“전 고맙기만 한 걸요. 젖이 이렇게 잘 나오니 망정이지 안 그랬음 우리 애들 젖동냥 시키느라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애들도 불쌍하고.”

김 과장을 은근히 비난하는 말이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아무거나 잘 먹고 잘 크면 되지, 뭐가 불쌍해. 분유에 영양분이 얼마나 많은데.”

저런 무식한 인간을 봤나. 분유 먹는 애들이 얼마나 잘못 크는지는 널리 알려진 상식인데. 분유 자체가 인간에게 안 맞기도 하지만, 소한테서 젖을 짜내려고 호르몬 주사를 놓질 않나, 비위생적인 축사에다, 돌림병이 자주 도니 항생제를 자꾸 쓰질 않나. 뭣보다도, 해괴한 말을 자꾸 하는 저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누가 보면 내가 김 과장과 같은 부류인 줄 알 것 아닌가. 아무래도 김 과장과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유축실에서는 이 부장과 박 상무도 유축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임원용 유축실을 쓰고 있었다. ‘아랫것’들과 마주 보고 앉은 상태로 가슴을 드러내고 유축하기란 서로 민망한 일일 테니까. 부장이나 상무 정도 되는 자가 과장이나 대리보다 가슴도 작고 젖 양도 적으면 그 얼마나 모양 빠지는 일인가. 풍만한 가슴과 넘치는 젖은 남성성과 부성애의 상징 아니던가.

칸막이가 천장까지 닿아 있었지만 두 사람 말소리가 다 들려왔다. 사장님이 산행을 기획하고 있다는 거였다. 직원 단합을 위해서 이번 토요일에 근처 관악산에 다 같이 가보자고 한다고.

김 과장과 나는 마뜩찮아 하는 눈빛을 나누며 불평불만을 고시랑거렸다. 아니, 사장님이야 남편이랑 유부가 애를 보니까 주말에 심심하고 할 일이 없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몇 시간 간격으로 젖을 물리든가 유축을 하지 않으면 젖이 뭉쳐 난리가 날 텐데. 거기다 아내들은 우리 속도 모르고, 애 아빠가 애 안 보고 어디 가냐고 독박육아 하게 생겼다며 바가지를 긁어댈 것 아닌가? 가장 큰 문제는 등산로에 마련된 유축실이다. 뻔한 거 아닌가? 개나 소나 쓰는 낡아빠진 유축기, 깨끗하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그리고 유축한 부유는 어떻게 들고 다니라고?

하지만 남자 직원들의 불만어린 표정이 사장님한테는 안 보인 모양이었다. 결국 우리는 그 주 토요일, 다 함께 관악산에 오르게 되었다. 나는 산을 오르는 내내, 어린 시절에 태권도 학원 사범님을 따라 남산을 억지로 올라가며 힘들다고 징징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었다. 수시로 유축할 필요도 없었고, 사범님이 유축하는 동안 우린 쉴 수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하필 요 며칠 아들 녀석이 젖 빠는 게 시원찮다 싶더니만 어김없이 한쪽 젖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집에서 챙겨온 유축기와 부속품과 부유저장팩과 보냉팩을 짊어진 채로 산을 오르니 점점 더 아프게 느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축된 부유 양이 늘어나니 배낭 무게가 무거워진 것도 한 몫 했다. 등산 내내 마신 물이 젖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애들 먹일 것만 남겨두고 부유은행에 기부할 건 그냥 버릴까 하다가 다들 잘 챙기기에 눈치가 보여 보냉팩에 도로 집어넣었다.

유축기는 등산로에 비치된 유축기가 못 미더워 들고 온 건데 너무 무거워서 몇 번이나 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 애들한테 그런 오래되고 비위생적인 유축기로 유축한 젖을 먹일 수는 없었다. 성능이 떨어지는 유축기라면 젖뭉침이 더 심해질 지도 모르고.

그런데 막상 등산로 유축실에 들어가 보니 유축기가 메델라 심포니였다. 정부에서 부유수유 장려사업에 돈 깨나 쓴다더니 진짜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위생이 신경 쓰여 집에서 가져온 걸로 유축했다. 유축 스케줄이 돌아온 직원들이 많아서 함께 앉아 유축하며 사장을 흉봤다.

유축이 끝나고 다시 산을 오르는데 육성으로 욕이 나왔다. 유축한 게 뭐가 잘못됐는지 젖이 더 뭉치고 아픈 것이었다. 심지어 오한이 느껴지며 열까지 오르고 있었다. 안 돼! 이 빌어먹을 유선염이 또 오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가능한 빨리 고인 젖을 짜내야 했다.

나는 동료들에게 먼저 가라 이른 뒤 유축실로 도로 달려 들어가 유축 강도를 최대로 높여 젖을 짜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유축하는 사람이 나 혼자였다. 생전 처음 와 보는 험준하고 깊은 산속에서 홀로 유축하는 그 외로움을 도대체 무엇으로 달래야 할까?

아니 그런데 이런 일이? 너무 무리해서 짰는지 유두에 물집이 잡히며 껍질이 까지더니 피가 맺혀 버렸다. 이러면 애들한테 물릴 때 비명 나올 정도로 아픈데. 이걸 어떡하나. 어떡하나.

바보같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병원을 찾아가자는 생각에 유축하던 걸 부랴부랴 정리하고 유축실을 뛰쳐나갔다. 순간 돌부리에 발이 걸리며 대(大)자로 엎어지고, 그 바람에 턱을 심하게 박고 말았다. 뒤통수가 얼얼해지더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눈을 뜬 것은 어느 컴컴한 움막 안이었다. 아주 희미한 조명만이 내부를 밝히고 있었는데 마치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던 집처럼 조악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다. 웬만한 집기들은 자연에서 조달한 재료들로 직접 만든 것 같았고, 사람도 원시인처럼 넝마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살결이 까무잡잡한 남자였다. 아니, 여자였나? 수염을 보면 남자가 분명한데 다 벗어젖힌 웃통에 가슴이 납작하지 않은가! 혹시 유방암에 걸려 절제수술이라도 받은 걸까? 하지만 수술 자국이 없는데?

그는 내가 눈 뜬 것을 보더니 마음이 놓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론가 움직였다. 치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커다란 항아리 안의 허연 액체에 벌겋게 달군 쇠막대 같은 것을 담가 놓아서 그런 것이었다. 물방울이 보글거리고 수증기가 펄펄 올라오며 막대 색깔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남자가 투박한 나무 사발에 여전히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액체를 담아왔다.

“마셔 봐요, 젖몸살에 특효니까.”

“뭔데요?”

“막걸리요, 데운 막걸리. 이거 마신 다음 이불 뒤집어쓰고 한숨 자면서 땀을 쫙 빼면 씻은 듯이 나을 거예요.”

이게 무슨 소리? 젖몸살(유선염)이면 소염진통제랑 항생제를 먹어야지 웬 막걸리? 거기다 술을 마시면 부유에 알코올이 섞여 나오는데 애들한테 어떻게 먹이란 말인가? 무엇보다도 나는 낯선 사람에게서 먹을 것을 대접받고 있다. 그런 건 안 먹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건 유치원생도 안다.

남자는 내 심리를 눈치 챘는지 보란 듯이 사발을 가져가 꿀꺽꿀꺽 소리도 우렁차게 막걸리를 들이켰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자가 무슨 술을 저렇게? 부유수유는 어떻게 하려고? 아 참, 가슴이 없어서 못 하나? 아님, 아직 결혼을 안 한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남자가 조신하질 못 하고….

속으로 혀를 쯧쯧 차는데, 캬아, 소리를 내던 남자가 수염에 묻은 막걸리를 대충 문질러 닦더니 자신이 마시던 사발에 다시 막걸리를 떠 왔다. 보아하니 세수나 양치질을 안 하고 사는 것 같은데 지금 사발을 같이 쓰자는 건가? 남자는 또 한 번 내 심리를 눈치 챘는지 막걸리를 재차 마셔버리고는 새로운 사발에 막걸리를 떠 왔다.

“감사하지만, 부유수유 중이라서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머리가 아찔해지며 주저앉고 말았다. 고열 때문에 현기증이 일어난 것이다.

“어두워서 지금 내려가면 위험해요.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닙니다. 안심해도 돼요.”

우리? 누가 더 있단 말인가? 내 질문에 답하듯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무슨 소쿠리라고 생각한 어느 물건에 아기가 뉘여 있었다. 그때, 저쪽 구석에서 지저분한 거적을 들어 올리며 웬 사람이 일어났다. 여자였다. 아니, 남자였나? 얼굴이 수염 없이 매끈한 걸 보니 여자는 맞는데 가슴이 왜 남자처럼 봉긋할까? 더욱 놀라운 것은 여자가 아이를 안더니 옷을 풀어헤치고 젖을 물리는 것이었다!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여자와 아이를 쳐다보자 남자가 헛기침했다.

“거 너무 빤히 보는 거 아닙니까? 남의 마누라 가슴을.”

그렇다면 저 남자가 남자가 맞고 저 여자가 여자가 맞다는 건데 어떻게 여자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걸까? 그리고 맘에 걸리는 것은 아이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아이는 어떻게 된 걸까? 혹시…? 아아, 가엾게도….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른 체 해야 할지 망설이는 한편 여전히 여자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으니 남자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신기해하는 건 알겠는데 그만 좀 보라고요.”

나는 그제야 시선을 떨구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닌지….”

“꿈 아녜요. 진실이죠.”

“진실?”

남자가 느긋한 동작으로 옆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 다 속고 있는 겁니다.”

“속다니요?”

“젖은 원래 여자가 먹이는 거예요. 당신들은 태어나면서 이상한 시술을 받아서 그렇게 된 거고요.”

남자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원래는 여자가 애만 낳는 게 아니라 젖도 먹이는 거란다. 남자의 가슴은 원래 납작하고 젖꼭지는 장식에 불과하다고. 그런데 우리가 태어난 직후 신생아실에서 여아에게는 유선 발달을 억제하고 남아에게는 유선 발달을 촉진시키는 시술을 해서 이렇게 바뀐 거란다. 아기도 보통은 하나만 낳는데 우리는 그러한 시술 때문에 쌍둥이를 낳게 된 거라고.

“왜죠? 왜 그런 짓을, 아니,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나랑 내 동생은 집에서 태어났거든요. 정부는 우리 같은 애들도 예방 접종하면서 시술을 해 버리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전에 데리고 도망을 쳤어요.”

“왜 그러신 건가요?”

“이것 때문이죠.”

남자가 낡디낡은 그림책을 내밀었다. 제목이… 《효녀 심청》? 효자 심청이 아니라? 제목부터가 낯설었고, 내용도 내가 알던 것과 딴판이었다. 심청이 아들이 아니라 딸인데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세상을 뜬 사람이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다. 그런데 동네 아저씨들이 아니라 아주머니들한테 젖동냥을 해서 청이를 키웠다니? 거기다 연꽃에서 나온 심청에게 반해 청혼한 사람이 왕이 아니라 남왕(男王이)이라고?

“우리 아버지는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셨어요. 그런데 어느 유적을 발굴하다 이상한 책들을 찾아냈죠. 이것처럼요. 책에는 우리가 아는 세상과 다른 세상이 나와 있었고요.”

남자가 또 보여준 책은 동물도감이었다. 그 안에는 코끼리, 호랑이, 너구리같은 멸종된 포유류의 사진이 많았다. 헌데 생물학 시간에 배운 것과 달리,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라고 쓰여 있었다. 남자가 말하길, 과거에 인간들은 소 말고도 돼지나 개, 말 같은 동물들도 키웠지만 어찌된 이유인지 소만 남고 나머지는 사라졌다고 했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수소로 알고 있는 젖소가 실은 암소라는 거였다!

남자의 아버지가 이러한 내용을 발표하자 세상은 그를 정신병자 취급했다. 남자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여자가 애도 낳고 젖도 먹이고 다 하느냐는 거였다.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는 유적 현장에서 출토된 고문헌들에 심취해있었고 정부를 의심하고 있었기에 갓 태어난 아이들을 데리고 지리산의 깊은 계곡으로 도망쳐 버렸다. 산에는 그들처럼 도망 온 사람들, 정부의 감시를 피해 대대로 산에서 살아온 사람이 많았다. 그는 쌍둥이들을 산(山) 사람들과 함께 키웠고, 정부의 시술을 받지 않은 아이들은 고문헌에 묘사된 사람들처럼 컸다.

“정부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래도 확실한 건, 이런 짓을 해서 이득 보는 인간들이 있을 거라는 거죠. 누군지는 의심만 가는 상황이에요. 증거가 없으니까.”

머릿속이 회오리쳤다. 고열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눈앞의 두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시술을 받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그도 잠시, 점차 남자의 말을 믿고 싶어졌다. 아니, 이미 믿고 있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짜증이 솟구치고 있었으니까. 나한테 왜 이따위 물건이 달려 있고 거기서 왜 이따위 물질이 나오는지 분통이 터질 것 같지만 꿋꿋이 참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수유하고 돌아서면 젖이 차오르고, 유축하고 돌아서면 젖이 차오르는 돌젖, 돌젖! 그게 끝이 아니다. 수유와 유축을 조금만 소홀히 하면 유선이 막혀 아프고, 그걸 방치하면 고열을 동반한 염증과 격통! 아내의 출산 이후 나는 항상 이런 상태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부유수유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었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괴롭다는 아우성이 들끓었으나 애 아빠라는 이유로 나 자신을 질책하고 또 질책하며 꾸역꾸역 이 짓을 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 났다. 이게 원래는 아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니. 누가 허락 없이 내 몸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부유수유라는 굴레를 씌워놨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어디서 톱이나 도끼를 구해 와 양 가슴을 다 잘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경을 토로하자 남자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군요. 아까 넘어지면서 머릿속에 칩이 고장 난 걸 겁니다. 당신들이 태어나자마자 정부에서 심은 칩 말이에요. 그게 뇌하수체를 자극해서 옥시토신과 프로락틴 농도를 조절하거든요. 기억중추를 건드려서 기억도 조작하고요.”

“그런 게 가능하다고요?”

내가 놀라자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하죠. 현대 의학으로 안 되는 게 뭐가 있겠어요. 당신들이 가축처럼 순응하게 만든 것부터 해서.”

가축처럼 순응? 불쾌한 표현에 미간이 찡그려졌지만 남자는 청산유수로 떠들 뿐이었다.

“잘 생각해 봐요. 이상하지 않아요? 애를 낳은 건 집사람인데 왜 내 가슴이 변하냐고요. 부자연스럽잖아요. 하지만 여자가 애를 낳고 젖도 먹인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럽죠. 같은 몸이니까. 머리가 가슴에 명령을 내리는 거예요. 뱃속에 있던 애가 나갔다, 젖 먹일 준비를 해라!”

두 눈이, 마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그간 의식하지도 못 하면서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고 느낀 것들에 대해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감탄하느라 ‘집사람’이라는 듣도 보도 못 한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남자의 말이 맞다면 우릴 가축에 비꼰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뒤집어보면 이상한데도 우리는 언제부턴지도 모를 시절부터 그 모든 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온 거니까. 문제는, 누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릴 이렇게 바꾸고 길들인 걸까?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네요. 다들 그래요, 아내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변하는 거라고. 생물시간에도 그렇게 배웠고, 부유수유진흥원 원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사랑?”

남자가 코웃음 쳤다.

“착취와 희생이죠. 사랑은 포장일 뿐이고요.”

나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남편의 냉소에 여자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점이 희한했다. 내 시선을 느낀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흘낏 쳐다봤다.

“계집들은 그저 애 잘 낳고 젖 잘 먹이고 살림 잘 하면 되는 겁니다. 사랑은 무슨 소 뿔 꺾는 소리….”

계, 계집? 김 과장보다도 이상한 사람이 눈앞에 있다! 이를 어쩐다. 먼 옛날 어느 성현이 했다는 것처럼 내 귀를 씻어내고만 싶었다. 부유수유가 신성한 만큼이나, 아이를 낳는 여자도 신성한 존재다. 아내가 왜 아내인가? ‘집안의 해’라는 뜻으로 ‘안해’, 그리고 ‘아내’가 된 것 아닌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 듯, 가정의 구심점은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란 말이다. 내가 저리 말했으면 아내한테 따귀를 얻어맞았겠지만, 눈앞의 남자는 당당하고 여자는 잠잠하기만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를 몰라 쩔쩔 매고 있으니 남자가 다시 사발을 내밀었다.

“자, 이거나 마시고, 잠 좀 잡시다. 어차피 여긴 약도 없고, 밑져야 본전 아녜요? 우리 마누라 젖몸살도 이렇게 다 나았어요.”

여자가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릴없이 나는 사발을 받아들었다.

뜨끈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막걸리는 의외로 맛이 좋았다. 남자는 내가 사발을 비우는 것을 보자 여자가 수유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불을 꺼 버렸다. 피곤해서 자야겠다는 거였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수유를 마치고 아이를 재웠다. 남편을 깨울까 봐 무척이나 조심하는 눈치였다. 그 탓에 나까지 조심스러워졌다. 여자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동병상련이 느껴지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은 술기운이 오르며 흩어지고, 생면부지인 사람들과 함께라는 사실도 잊은 채 잠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무척이나 개운했다. 열도 완전히 내리고 가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신기했다. 진짜 효과가 있었다니. 게다가 아이들 등쌀에 깰 일도 없이 밤새 내리 잔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나는 남자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며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부유수유진흥원장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정부의 끄나풀 같으니! 무엇보다도 나는 스승님이 아내에게 보이는 태도가 맘에 들었다. 여자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어대는 모습에서 진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사내의 모습이다. 우리는 심리적인 거세를 당해온 것이다!

스승님은 이런 내 생각을 대견해 했다.

“이 삭막한 서울에 당신처럼 생각이 트인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난 자연인이라고 해요.”

자 씨 성에 연 자 인 자? 성도 특이했지만 이름은 더 특이했다. 하긴 내가 남의 이름 갖고 뭐라 할 처지는 아니다만.

“전 최고예요.”

“맞아요. 당신은 내가 만난 도시 사람 중 최고예요.”

“아뇨, 제 이름이 최고라고요.”

“오오, 그렇군요. 심지어 이름까지.”

말이 잘 통해서 즐거웠지만 빨리 산을 내려가야 했다. 머릿속의 칩이 고장 나도 금방 단유(斷乳)되진 않을 터였다. 젖이 다시 차오르기 전에 젖 말리는 약을 처방받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절제수술을 받아버리면 더 좋고. 아내가 날 찾고 있을 거라는 걱정보다 그게 먼저였다. 이 빌어먹을 가슴. 다시는 부유수유하나 봐라. 돈이야 얼마가 들든, 부성애가 없다고 욕을 얻어먹든 말든, 애들한테는 분유를 사서 먹이리라 결심했다.

문득 김 과장이 떠올랐다. 아아, 그 사람도 머릿속의 칩이 고장 난 거였나? 그 사고 때문에? 그렇다면 그동안 넷이나 되는 애들을 젖 먹이느라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아왔을까. 올해로 네 돌인 첫째들이 아직도 아빠 젖을 찾는다고 들었다. 매일 먹는 건 아니지만 잊을 만하면 먹고 가고 잊을 만하면 먹고 간다고. 애 보는 게 지긋지긋해서 부부관계를 거부하자 아내가 구청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김 과장의 아내는 셋째들을 임신 중이다.

그건 바로 나의 미래였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미래. 그렇다면 유방절제술뿐만 아니라 고환절제술까지 받아야지. 아예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유방암이나 고환암도 아닌데 어느 의사가 그런 수술을 해 줄까? 골치가 아파오며 깨닫게 됐다. 심리적 거세를 당했다고 분기탱천하던 내가 나 자신을 물리적으로 거세시키려 하는구나!

다시금 화가 났다. 도대체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거지? 원래대로 여자들이 젖을 먹이면 내가 이렇게 개고생할 이유도 없잖아? 밤중수유할 때마다 저 혼자 코골며 자는 아내가 가뜩이나 얄미웠는데 이제는 증오스럽기까지 하다. 어쩜 애를 낳아놓고 그렇게 속 편히 잘 수 있단 말인가? 내친 김에 이혼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금으로 가산을 탕진하든 말든 현재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차라리 쪼들리며 혼자 사는 게 아내와 애들한테 치이며 사는 것보단 나으리라.

하지만 계획은 무참히 저지당하고 말았다. 산을 내려가다 보니 그제야 전화가 터지며 아내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아내는 우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아내의 호통을 예상했던 나는 마음이 짠해지고 말았다. 그러다 수화기에서 쌍둥이들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걸 듣는 순간 가슴이 뻐근해지며 젖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병원으로 곧장 가려던 마음을 접고 집으로 달려갔다. 아내가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맞이했다. 어디 갔었냐고, 걱정 많이 했다고.

우는 사람은 아내뿐만이 아니었다. 쌍둥이들도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내가 없으니 냉장고에 저장된 부유를 데워먹였을 텐데, 평소 수유해 본 적이 없는 아내가 애들을 제대로 먹이질 못 한 게 틀림없었다. 특히나 아빠 젖을 못 물면 잠을 못 자는 아들놈이 피로까지 겹쳐 그런지 악까지 써대며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다 내려놓고 아이들한테 젖부터 물렸다. 아이들은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젖을 빨았다. 심지어, 맨날 깨작대기만 하는 아들 녀석마저.

후회의 물결에 휩쓸리며, 부유수유를 그만두려던 걸 반성했다. 역시 이 애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부유는 아빠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포만감에 행복해하는 얼굴로 잠든 아이들을 보니 가엾고 애틋한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내 어찌 이 소중한 아이들을 두고 그런 못된 생각을 했단 말인가? 소젖을 먹이려 했다니! 아내한테 떠넘기고 도망가려 했다니! 나는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두 아이를 꼭 안은 채 하루 종일 내 품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 * *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은 인간 심리의 최고 전문가라 불릴 만하다. 나의 희생정신은 고작 사흘이 지나고 수면부족과 젖뭉침에 다시금 시달리면서 흐지부지 옅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라는 인간이 타고난 부성애는 딱 여기까지였던가?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긴 하는 건가? 사랑하는데. 진짜 사랑하는데! 그것만은 칩의 농간이 아닌 진짜 내 마음인데! 하지만 부유수유는 왜 이리도 귀찮고 힘들단 말인가.

이혼과 유방절제와 고환절제로 이루어진 부유수유 탈출 세트. 수유할 때마다 느껴지는 흐뭇하고 뿌듯한 감정들,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나는 급기야 김 과장에게 상담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김 과장은 부유수유 스트레스를 토로하던 과거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를 부성애가 말라버린 후레자식 보듯 했다. 어떻게 애 아빠가 돼가지고 분유 먹일 생각을 하냐고, 이기적이라고. 이혼도 아주 이기적인 짓이라고 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까지 인생의 실패자로 만들 거냐며, 정신 제대로 안 차리면 구청에 신고할 거라고도 했다.

소름이 돋았다.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걸까? 아! 그것 때문인가? 김 과장은 지난 토요일에 산행에 오지 않았다. 병원에 머리를 검사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혹시 병원에서 칩을 새로 이식당한 게 아닐까? 그러한 추측은 스승님이 말씀하신 정부의 음모와 자연스레 연결됐다.

인터넷으로 부유수유의 고통에 대해 검색해 봤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요상한 것은 그런 글을 찾아내도 몇 시간 뒤면 삭제돼 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시험 삼아 직접 글을 올려보니 역시나 몇 시간 뒤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누군가가 그런 글을 발견하는 족족 지우는 게 분명했고, 그렇다면 그건 정부임이 틀림없었다.

별안간 사명감이 타올랐다. 아주 활활. 정부가 우리 몸과 마음을 조종하는 게 사실이라면 이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했다. 이대로 옥시토신과 프로락틴의 꼭두각시가 되어 부유수유에 헌신하다 헌신짝 같은 노년을 맞이할 순 없었다.

‘부유수유 신화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다. 카페는 반사회정서를 유발하는 불건전 카페라는 이유로 몇 시간 만에 강제 폐쇄되고 말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회원을 모아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진실을 설파하기보다는 그것이 목적이었다. 나와 같은 사람을 찾아내는 것. 알고 보니 나처럼 머리를 다치는 사고 후에 부유수유에 대한 생각이 바뀐 사람이 꽤 많았다. 다들 ‘저밖에 모르는 미친놈’ 취급받기 싫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부유수유를 하던 중이었다. 우리는 직접 만나기로 하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시간은 평일 낮. 애들이 아프다는 핑계로 회사에 휴가를 낸 다음 아내에게는 아무 말 없이 회사에 출근하는 척 했다. 장소는 우리 스승님의 거처.

움막 밖에 모인 사람은 수십 명이나 됐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웃과 친구를 알음알음으로 꼬드겨서 데려온 것이다. 우리는 나무 밑이나 바위 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스승님의 열변을 들었다.

“예로부터 우리 남자들의 임무는 부유수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뭐냐? 바로 적으로부터 내 땅을 지키고 한 발 더 나아가 영토를 확장하며 권력을 쟁취하는 거였죠. 반면 여자들은 출산과 수유에 특화된 존재입니다. 자궁과 유방의 존재가 그 이유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애를 낳아놓기만 하고 나 몰라라 하며 돌아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모유수유라는 중요한 임무를 남자들한테 떠넘기다니요. 저는 이 음모의 뒤에 여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황천동 주민들이죠. 자산과 권력을 독점하고 남자들을 핍박하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들, 수구꼴통들 말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스승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꽃피었다. 그 뒤에서 스승님의 아내가 그림자처럼 앉아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성함을 한 번 듣긴 했는데 잊어버렸다. 중요한 건 아니었다. 여사님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니까.

“자, 보십시오! 이것이 여자 본연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스승님이 여사님을 가리켰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박수를 치며 감탄과 동의의 말을 쏟아냈다. 여사님의 모습은 신성하고 숭고하기 그지없었다. 여사님은 성인, 아니 성녀(스승님께 새로이 배운 단어였다.) 그 자체였고, 머리 뒤에 둥글고 환한 광휘까지 보이는 듯 했다.

우리는 시청 앞에서 시위를 하기로 모의했다. 진실을 알리고 권리와 권위를 되찾는 것, 그것이 시위의 목적이었다.

다음날 아침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시위의 뜻을 분명히 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상체를 탈의한 채 한 손에는 수유브라를, 다른 손에는 유축기를 든 상태였다. 준비한 구호를 외치는 우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가슴에서는 젖이 흘렀다.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시청으로 출근하는 공무원들과 근처를 지나는 시민들이었다. 우리는 둥글게 모여 수유브라와 유축기를 중앙에 던져 쌓은 다음 불을 붙였다. ‘저, 저, 미친놈들’ 하는 고성과 손가락질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연히 일어서기로 했으니까. 후손들에게 올바른 세상을 물려줘야 했으니까.

그때, 전경들이 들이닥쳤다. 공포탄이 울리고 호루라기 소리가 대기를 찢어발겼다. 거친 곤봉질에 눈두덩과 입술이 터졌지만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부유를 가득 채워온 물총을 꺼내들어 전경들을 향해 쏘았다. 유방 냉찜질 용 얼음 팩으로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저항의 상징일 뿐.

우리는 피투성이 멍투성이가 된 채로 경찰서에 끌려가고 말았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상관없었다. 오늘 우리의 의거가 세상 사람들에게 의심 한 조각만이라도 심어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먼 훗날 우리가 시대를 앞서간 의인으로 기억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머릿속에 새로운 칩을 이식당해 기억을 잃을 경우를 대비해서 미래의 어느 날 우리 자신에게로 음모의 내용을 담은 편지가 발송되도록 우체국에 예약도 해 놓은 상태였다.

눈에서는 눈물을, 코에서는 코피를, (몇 시간이 넘도록 수유도 유축도 못 한 상태라) 가슴에서는 젖을 흘리며 동지들과 동지애를 다지고 있는데 웬 경관이 유치장으로 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면회를 요청한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경관을 따라 면회실로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3년 전에 실종된 초등 동창 강민경이 떡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민경이 사라진 바람에 민경의 남편이 독박육아를 하느라 고생한다는 소문이었다. 아내를 찾는다고 일까지 그만둔 채 애들을 봉고차에 태워 전국을 헤매고 돌아다닌다는데, 어째 이 녀석은 신수가 훤하기만 할까. 고급 정장과 고급 구두, 호사스러운 보석들, 잡티 없이 뽀얀 피부에 고혹적인 빨간 립스틱. 민낯으로도 예쁜 애가 이렇게 꾸며놓으니 여신이 따로 없었다. 거기다 검은 정장 차림의 여자 둘이 녀석의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모습이 엄청난 위압감을 자랑했다. 아니 그런데 잠깐, 한 명은 정새롬 씨고 다른 한 명은 유나/유노 어머니 아닌가?

“정… 새롬 씨? 유나유노 어머니?”

두 여자는 부동의 자세로 묵묵부답이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민경이었다.

“도대체 비결이 뭐지?”

“뭔 소리야? 너야말로 어디서 뭐 하다가,”

“툭하면 머리 다치는 비결 말이야. 재작년엔 자전거 타다 차에 치였고, 작년엔 발코니에서 이불을 털다 떨어지고, 올해는 등산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그걸 어떻게 알아?”

“흠, 그걸 모르는 걸 보면 새로 이식된 칩은 문제가 없는데 자꾸 머리를 다쳐서 칩을 고장 내는 게 문제란 말이지.”

내가 칩을 자꾸 고장 냈다고?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머리가 전후상하좌우로 꽉 막힌 기분이었다. 그때 민경이 말했다.

“오늘 같은 일이 처음이 아니란 거야. 넌 매년 이런 식으로 문제를 만들어. 우린 매번 새로운 칩을 이식했고. 네 덕분에 자연인을 잡은 건 고맙게 생각해. 팔도강산을 들쑤시며 분란을 일으키는 인간이거든. 나머지 자연인은 잘만 잡았는데 그놈은 어쩜 그렇게 미꾸라지 같은지. 그 인간도 그 인간이지만 너도 참 징글징글하다. 네 부유가 맛있어서 살려둔 건데 이젠 성가셔서 안 되겠어.”

뭐, 뭐라고? 꽉 막혔던 머리가 서늘해졌다. 피가 모두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민경이 손짓하자, 유나/유노 어머니가 길고 가느다란 금속 줄을 꺼내들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저걸로 내 목을 졸라 죽일 심산인가?

“미, 민경아. 왜 이래? 우리 친구잖아. 이러지 마, 제발 살려 줘.”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했다. 민경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강렬한 공포에 휩싸인 나는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다.

“민경아, 옛날에 너 깍두기 반찬만 싸 왔을 때 내가 소시지도 나눠주고 그랬잖아. 사람이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안 되지!”

간곡한 호소를 담아 대성통곡했지만 소용없었다. 녀석은 냉랭한 미소만 띨 뿐 눈동자에 미동 하나 없었다. 희대의 사이코패스도 그보다는 동적적일 것이었다. 제기랄, 이왕 죽을 거 이판사판이었다.

“날 죽이면 더 큰 일이 벌어질걸?”

“그게 뭔데?”

“살려준다고 약속하면 알려줄게.”

민경은 목젖이 다 보이도록 깔깔 웃었다. 뭐가 그리도 웃긴 걸까. 정새롬 씨와 유나/유노 어머니도 파안대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 여자의 웃음소리가 면회실에 메아리쳤다. 그 가운데에 홀로 앉은 나는 세상 최고의 머저리가 된 비참한 기분을 맛 봐야 했다.

“너희 인간들은 참 멍청해. 아이고, 배야. 이 맛에 지구를 침공한 거라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지금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그때, 민경이 일어났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어두운 예상과 달리, 민경은 부드러운 손길로 내 턱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뭐지? 갑자기 로맨틱한 분위기가…? 민경의 아리따운 얼굴이 가까워졌다. 관능적인 향수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민경은 커다란 눈망울에 그윽한 눈빛을 띠며 딸기처럼 붉고 투명한 입술을 내밀었다.

웁? 민경이가 키스를? 설마 무슨 영화에서처럼 입에서 입으로 독을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오우, 근데 나쁘지 않다? 솔직히 너무 좋다. 너무 좋아! 에잇, 못 먹어도 고! 움움, 사실 내가 옛날에 민경이를 좀 짝사랑… 우웁! 이게 뭐야? 뭔 놈의 혀가 이렇게!

 

(…)

 

흠, 어디 보자, 이놈 이름이 ‘최고’인 건 알았는데 그런 뜻이? 고스톱 좋아하는 어미가 새끼 이름을 이따위로 지어놨군. ‘못 먹어도 고’라니, 쯧쯧쯧. 아 참,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길 죽이면 더 큰 일이 벌어진다니 그거부터 알아내야지.

뭐야, 진실을 쓴 편지를 미리 부쳤다고? 쳇, 별 거 아니잖아. 그나저나 어떡한다. 귀찮은 놈이긴 한데 부유 맛은 최고라 이거지. 너의 부유는 말 그대로 최고의 선물이란 말이야. 맛있는데 고맙게도 양까지 많잖아. 이것 봐, 지금도 이렇게 가슴 가득 젖이 흐르네. 그럼 일단 살려둘까?

배를 타고 흐르는 부유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봤다. 음, 역시 맛있었다. 이놈 부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은 지금껏 먹어본 아이스크림 중 최고였다.

나는 먼 옛날 지구를 탐사하던 시절, 뇌하수체 선종에 걸려 고프로락틴혈증과 유루증을 앓는 수컷인간의 젖을 맛 본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먹어온 것들을 죄다 쓰레기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아쉬운 것은, 그런 환자가 드물었기에 양껏 먹을 수가 없었다는 점.

하지만 암컷인간의 젖은 입맛에 안 맞더라.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우리 종족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인간을 개량하기로 뜻을 모은 뒤 이 행성에 말뚝을 박고 인간 사육 작업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은 것이다.

이렇게 맛좋은 부유를 원 없이 먹을 수 있다니. 인간들을 세뇌하고 길들이고 문서란 문서는 샅샅이 찾아내 불사른 보람이 있었다. 우리가 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인간들이 그래도 지능이 좀 높은 편이라 나중에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인간과 그들을 먹일 소 이외의 포유류는 모조리 멸종시켜 버렸다. 어렵진 않았다. 탐욕 많고 어리석은 인간들이 가축을 제외한 대부분을 이미 멸종시킨 상태였으니까.

정새롬의 몸을 입은 부하에게 말했다.

“이놈 좀 잠깐 입고 있어.”

“제가요?”

“응, 풀어줄 수도 없고 죽이기도 아깝잖아. 그러니 일단 입고 있어,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지하실에 가둬놓고 유축을 시켜야겠어. 그럼 부유은행에 배달 안 시켜도 되고, 문제 해결.”

“보스 잘 하시는 거 있잖아요, 뒤통수 후려치기.”

“야! 이놈이 머리 깨진 게 벌써 몇 번인데, 어디 잘못돼서 죽으면 어떡하라고?”

“그럼 보스가 계속 입고 계시면 되겠네요.”

내가 째려보자 부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런 힘이 있는 존재이니까. 우리는 키스를 나눴다.

 

(…)

 

이럴 줄 알았다. 최고 이놈, 가슴이 왜 이렇게 무거워? 어우, 축축해. 양말까지 다 젖었네. 이래서 수컷인간은 입기 싫다니까. 아, 몰라. 보스네 집까지만 참으면 되니까.

그사이 강민경이 의식을 되찾아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보스는 재빨리 민경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그러자 이제는 정새롬이 깨어나고 있었다. 보스는 재빨리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정새롬을 기절시켰다. 아, 진짜! 저러면 이따 다시 입었을 때 아픈데 살살 좀 하지!

나는 동료와 함께 정새롬을 꽁꽁 묶은 뒤 차 트렁크에 실었다. 그걸 보니 또 욕이 나왔다. 밧줄에 짓눌린 곳이 얼마나 아플까? 멍 자국은 또 어쩌고? 이렇게 된 거 이 핑계로 입원하고 장기 휴가를 내 달라고 해 봐야 될 것 같았다. 정새롬처럼 예쁜 암컷인간을 찾은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었으니까.

동료와 내가 운전석과 조수석에 올라타자 먼저 뒷좌석에 올라앉아 있던 보스가 신이 나서 외쳤다.

“가자, 황천동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

 

웅, 웅, 웅, 웅. 곱디고운 연노랑의 메델라 심포니가 힘찬 펌프질을 시작한다. 유두에서 젖이 방울방울 흐르더니 가슴에 부착된 깔때기를 거쳐 젖병에 조금씩 고인다. 젖양이 확실히 줄어들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유축해도 고작 10밀리리터에 불과했다. 시위하다시피 식음을 전폐한 결과였다. 들어가는 것이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는 것은 자명한 일. 이대로 가면 나는 굶어 죽거나, 단유가 될 터였다. 어느 쪽이든, 나를 이곳에 가둔 악마에 대한 보복으로 충분한 셈이었다.

강민경, 아니 강민경의 모습을 한 외계인의 집 지하실에 갇힌 지 한 달이 넘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세 시간에 한 번씩 젖을 짤 때도 얌전히 앉아 있었다. 솔직히 편했다. 회사에 안 가도 되고 아이들도 안 봐도 되니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이 짓을 앞으로 평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부터 나는 식음을 전폐했다.

삐걱. 문이 열렸다. 강민경이 내 젖을 마시러 온 것이다. 일주일전까지 강민경은 내 젖을 마시며 흡족해하는 감탄사를 내보내곤 했다. 하지만 어제, 내 가슴에 달린 젖병을 본 민경의 얼굴은 실망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 민경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하다.

“최고, 너 고집 하나는 최고구나.”

“이제 거래할 준비가 됐겠지.”

“글쎄.”

“풀어주기만 하면 매일매일 유축해서 갖다 바치겠다.”

“배신하게 될 걸.”

“그렇지 않아. 맹세해.”

“최고, 난 사실 너한테 고맙다.”

“뭐가?”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방식에는 큰 문제가 있었어. 자발적인 희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지 몰랐던 거야. 자발적인 희생은 그 누구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착취한 쪽도 착취당한 쪽도, 그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하긴 진화란 시행착오를 극복하며 굴러가는 파란만장한 여정이니까. 너희는 다시 한 번 진화할 단계가 되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엇비슷한 얘기를 누가 한 것 같은데. ‘착취와 희생이죠. 사랑은 포장일 뿐이고요.’

“사랑. 중요한 건 사랑이야.”

민경은 내 얼굴을 살며시 쥐고 입을 맞췄다. 갑작스런 키스에 혼이 나간 나는 넋을 잃은 채로 민경을 올려다봤다. 어린 시절 민경을 바라보며 느끼던 풋사랑이 다시금 싹을 틔웠다.

“민경아. 너 내가 소시지 반찬 나눠줄 때도 외계인이었어?”

“아니었으니 17년 후에 수컷인간과 짝짓기하는 멍청한 짓을 했겠지?”

민경은 뜻 모를 웃음을 지어보이며 지하실을 나갔다. 나는 반쯤 열린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잠시 후, 저벅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달달거리며 뭔가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유나유노 어머니(를 입은 외계인)가 들어왔다. 그 뒤로 민경의 다른 부하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이 갖고 들어온 것은 바퀴가 달린 침대였다.

나는 의자에 묶인 몸에서 침대에 묶인 몸으로 바뀌었다. 지하실은 순식간에 환해졌다. 각종 의료 기구들이 척척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나는 두려운 가운데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 하고 기린처럼 목을 빼어 사방을 둘러봤다. 마침내 두건과 마스크를 쓴 의료진들이 들이닥치고 나서야 나에게 닥친 현실이 믿기지 않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의사가 내 아랫배를 만지작거렸다.

“여기, 지방이 두툼하군. 여기가 좋겠어.”

의사 옆의 간호사가 기다란 주사기를 건넸다. 의사는 그것을 받아 방금 전 자신이 어루만졌던 곳에 푹 찔러 넣었다.

“으윽!”

내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의사는 주사 바늘을 빼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어. 느낌이 좋아. 그 다음.”

간호사가 다른 주사기를 건넸다. 의사는 주사기를 받아서 내 관자놀이를 찔렀다. 상상도 못 할 통증에 나는 까무러칠 뻔했다.

“아픈가?”

“당연히 아프지!”

“이상하네. 뇌는 통증을 못 느끼는데.”

“뼈랑 피부는!”

“아차, 마취주사 놓는 걸 깜빡했네.”

“뭐야?”

“상관없이. 다 끝났으니까.”

의료기구와 의료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아내는 오늘도 늦는다. 나는 아이들을 재우려고 책을 읽어주고 있다. 정확히는 햄찌에게 《효자 심청》이라는 전래동화를 읽어주는 중이었다. 모찌는 그 이야기를 싫어하지만 책 읽어주는 사람이 나뿐이라 어쩔 수 없이 누나 옆에 앉아 있다. 한참을 보채다가 내 호통에 풀이 죽은 모습이다. 이럴 때면 아내 민경이가 조금만 일찍 들어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다. 부자식(夫子息)을 먹여 살리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원망하면 안 된다.

아름답고 능력 있는 아내. 밤마다 내 가슴을 애무하며 ‘너는 나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야’라고 속삭이는 말들. 거기다 귀여운 아들딸까지. 나는 정말 복 받은 남자다.

“…심학순은 핏덩이 아들을 업고 동네를 돌아다녔어요. 두 모자를 가엾이 여긴 동네 남인들이 청이에게 젖을 물려주었어요. 청이는 그렇게 동냥젖을 얻어먹고 무럭무럭 자랐어요.”

햄찌는 이야기에 빠져들었지만 모찌는 혼자서 다른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동생이 생겼어요.》라는 책이었다. 모찌는 책의 한 장면을 보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의사가 어느 남자의 배에 주사를 놓는 장면이었다.

“아빠, 아기 가지려면 주사 맞아야 해?”

“응.”

“왜? 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스스로 저런 질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원래 아기는 그렇게 생기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부모교육을 받고, 시험에 통과하면, 정부에서 수정란이 든 주사를 배에 놓아준다. 그것이 내가 아는, 아기를 가지는 방법의 전부다.

“아빠도 잘은 모르지만… 너희도 그렇게 생긴 거야.”

“아빠 뱃속에 있는 하리랑 두리도?”

“응. 맞아.”

“그럼 나도 이렇게 아기 가져?”

“맞아. 지금은 아니고. 다 크면.”

모찌는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리고 입을 삐쭉 내밀었다.

“나 아기 안 가져. 아파. 싫어.”

“조금 아프긴 한데. 아기는 낳아야 해.”

“왜?”

“아기를 낳아야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지.”

“아빠 행복해?”

깜짝 놀랐다. 이것 역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기에. 뭐라고 답해야 할까. 왜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뱃속의 아이들이 발로 찼다. 가슴에서 유즙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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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훈 22.08.06 23:43 댓글

    새로운 글로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성별을 비틀어 서술한 기법으로 현실에서의 모유수유를 짐작하기 더 쉬워진 것 같습니다. 이를 경험하거나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면 나름의 유쾌한 기분이 들 것 같네요.

    제가 짐작하기로는 작가님의 이번 글은 한 편의 부조리극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제가 수유에 대한 고발을 정말 진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핵심어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두 형태의 사랑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프로그래밍 된 사랑입니다. 머릿 속의 칩 때문에 인물들은 정해진 결론에 도달합니다. 부유수유가 사랑이다. 그렇지만 프로그래밍의 방법이 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도 한 방법입니다. 효자 심청을 강조하고, 숫소가 젖을 먹인다고 가르치고, 부유수유센터를 운영합니다. 이 방법은 현실과 꽤나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인물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감정의 끌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최고'는 등산 중 사고로 칩이 고장났습니다. 자연인과 만나면서 부유수유의 부당함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러나 가족과 연락하며 그 생각은 금방 녹아 없어지고 아이들에 대한 애틋한 생각을 합니다. 칩이 없어도 '최고'는 부유수유로써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마음이 진실한 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 사회의 교육은 이미 최고의 마음에 수없는 덧칠을 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소설 속이든 현실이든 우리는 우연한 사건사고로 (사회에서) 정해진 결론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잠시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일탈은 결국 사회에(외계인에) 의해 바로잡힙니다. 버그를 수정한 것처럼요. 버그를 수정한 방법은 결국 사랑입니다. 자신이 왜곡된 사랑을 하는 줄 모르기 때문에 착취와 희생을 당하는 지 모르는 것이지요.

    그렇게 최고는 젖을 물리는 것과 아이를 낳는 역할까지 맡으며 현실 여자의 성역할(단어가 무척 고민되고 조심스럽네요.)을 모두 갖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의 질문을 통해 마무리됩니다.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아이의 질문은 최고에게 무척 날카로워 보입니다.

    좋아하는 주제는 아니지만 분명 잘 쓴 글이라고 느꼈습니다. 주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적어본다면 당장 제가 살기가 팍팍합니다. 복직하고 집은 어떻게 사야하지? 난 일자리라도 있어서 다행인가? 그런데 지금 일자리 전망이 너무 안 좋은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전혀 아닌데? 내가 이 공부를 하고 최저시급 비슷한 월급을 받는다고? 결혼은 10년 안에 할 수 있을까? 안 하는게 맞으려나? 뭐 이런 질문이 스스로 많죠.

    그래서 그냥 좀 살기 힘들어서 주제의식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기는 좀 힘들었습니다. 다만 글의 짜임새있는 완성도와 전개가 마음에 들어서, 재밌어서, 배우고 싶어서 쭉 다 읽었습니다. 댓글까지 쓰려고 3번은 읽었네요. 작가님의 다음 글도 응원합니다.

     

    추신.

    1. 댓글을 작성하면서 웹툰이 떠올랐습니다. 연시68 작가의 '탈진의 시대', '혐오의 시대' 저랑 비슷한 감정선을 갖고 계셔서 기억에 남았어요.(구글링하면 바로 나옵니다.)

    2. 이 작품이 환상문학이어서 좋았어요. SF같은게 아니고 그냥 환상문학이라서요.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저는 그냥 그게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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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사피엔스 22.08.08 15:06 댓글

    꼼꼼히 읽어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정성스런 분석을 남겨주시니 너무너무 감사하네요. 이 글은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것입니다. 출산, 수유, 육아를 하며 세상을 보는 눈이 변하더군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말이 비로소 와 닿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말씀하신 웹툰은 기억해 놨다가 꼭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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