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식욕과 성욕은 사람이 바라는 큰 욕심이고, 죽음은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 예기(禮記)

엄마 밖에 모르는 착한 아들을 찾아주세요.’

이리안은 단골 카페에 들어가기 전, 늙은 여자 한 명을 만났다. 등이 구부정하고 심약해 보이는 여자는 울상을 지으며 사방에 전단지를 돌렸다.

실종 전단지에는 젊은 남자 얼굴과 마지막 CCTV에 찍힌 사진이 있었다. 리안은 전단지를 한참 바라보다, 손에 쥔 채 카페로 들어갔다. 리안은 여기서 일을 할 겸, 점심을 때우려고 베이컨이 가득 들어간 파니니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 자리에 갖다 뒀다.

샌드위치속 베이컨은 하얀 치즈와 먹음직스럽게 어우러져 윤기가 흘렀다. 가나슈 케이크는 꾸덕진 초콜릿으로 점철돼 보기만 해도 끈적끈적하고 달달해 보였다. 리안은 플라스틱 포크와 칼로 샌드위치를 썰고 몇 입 베어 물다 뒷좌석에 오고 가는 이야기 때문에 잠시 식사를 멈췄다.

조용히 해 달라고 하려는 도중, 유튜브 소리가 들렸다. 심야괴담을 이야기하는 예능이었다. 게스트 중 한 명으로 나온 여배우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독감이 유행할 때, 여자애가 감염돼서 죽어 가고 있었어. 부모님은 교회에서 간절히 기도했지. ‘뭐든지 할 테니까, 딸이 어떤 형태가 되든 상관없으니까 딸을 반드시 살려주세요.’ 신이 그 소원을 들어준 걸까? 딸이 죽기 직전에 살아났어 부모님도, 의사들도 ‘기적’이라고 소리쳤지.”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유튜브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부터 리안도 해야 될 일은 안 하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딸은 건강하게 퇴원했어.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어.” 사건의 반전이 발생할 때 전환되는 사운드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딸은 음식을 전혀 못 먹는 거야. 어떤 밥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토해서 굶어 죽을 지경이었어. 부모 입장에서는 애가 타지.”

저런, 어떡해.”

여배우를 둘러싼 MC와 게스트들이 안타까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계속 굶으니까 움직일 수 없잖아. 딸은 병원을 나온 뒤에도 학교를 계속 결석했어. 반 친구 중 하나가 딸을 걱정해서 직접 집을 찾았지. 그런데, 친구는 딸에게 가지 말았어야 했어.”

섬뜩한 음악으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됐다. 누군가는 무서웠는지 다급하게 여배우를 재촉했다. 분명 양손으로 귀를 막는 시늉도 하고 있을 것이다.

친구가 딸에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러 방에 들어갔어. 그리고 어머니가 친구에게 과일 좀 먹으라고 방에 들어간 순간… 친구가 사라졌어.”

쿵!’ 거대한 추가 그대로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경악했다. 리안은 본편이 나온다고 직감했다.

어디 갔는데?”

안 그래도 어머니가 침대에 앉아 머리카락을 귀신처럼 축 늘어뜨린 딸에게 물었어. ’얘, 네 친구 어디 갔어?’라고 묻는데, 이불과 딸의 입가에 피가 묻어 있는 거야.”

설마 딸이 그 친구를 먹은 거야?”

맞아.” 부모가 그리도 염원하던 기적이 저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배경음악도 그에 걸맞게 으스스하게 변했다.

부모는 임시방편으로 병원에서 헌혈하는 피를 사서 딸에게 먹였어. 그런데 딸은 점점 사람고기를 먹고 싶어서 나중에는 엄마의 팔을 물어뜯었어. 결국 좀비처럼 날뛰는 딸을 침대에 묶었지.”

눈에 뵈는 게 점점 없어지네.”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교회에게 부탁했어. 딸이 병에서 벗어나나 싶더니, 사람을 먹으려 달려든다고. 교회는 딸에게 악마가 들렸다고 생각해 구마의식을 시작했어. 신도들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지.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

다급하겠지. 딸이 너무 심각한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여자 게스트 중 한 명이 불안에 덜덜 떠는 소리가 들렸다.

배가 고프면 힘이 빠지잖아. 그런데 이 딸은 먹을 걸 달라고 울부짖다가, 힘이 점점 더 강해지는 거야.”

설마…”

딸은 자신을 묶은 밧줄을 다 뜯어내고 신도 한 명을 잡아먹었어. 뼈까지 통째로.” 충격적이라고 알리는 사운드가 더욱 크게 들렸다. 이제 위기에서 절정으로 갈 때다.

목사와 신부는 이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해 절로 이런 소리가 나왔어. ‘저 년은 사람을 잡아먹는 ‘마녀’다.” 목사와 신부는 신도들과 수갑으로 어린 여자아이를 묶어 마녀를 퇴치하는 의식을 치렀어. 그건 바로…화형이었어.”

미쳐가는 딸과 미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분위기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교회의 행동에 사람들은 온갖 토론을 벌였다.

그 어린애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진짜로 딸을 태워 죽였어? 부모는 어떻게 했어?”

아버지는 불로 태우면 딸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믿었어. 어머니는 아무리 사람을 먹는다 해도 자기 딸은 죽이면 안 된다고 말리면서 울었지. 근데 그걸 듣겠어? 아버지와 신도들은 엄마를 ‘마녀의 하수인’이라면서 딸과 같이 십자가에 묶고 태워 죽였어.” 파국적인 절정 끝자락에 이르러 결말에 다다랐다.

경찰이 어머니의 신고를 받고 왔지만, 때는 늦었지.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구속됐어. 체포된 아버지는 미쳐가면서 마녀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줬지.” 여배우의 이야기가 끝나고 소녀의 아버지로 짐작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남자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이야기를 늘어놨다.

마녀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다른 여자들처럼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차림으로 평범한 집에서 삽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보다 강하며, 사람을 먹는 괴물입니다. 여러분이 잡아 먹히지 않도록 마녀를 구분하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 마녀는 사람을 먹는 대신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평범한 음식은 역겨운 무언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둘째, 그들은 힘이 아주 셉니다. 마녀라고 의심되면 악수라도 한 번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손에 엄청난 힘이 들어가 있을 겁니다.

셋째, 마녀는 눈이 붉게 변합니다. 사람을 먹거나 힘을 쓸 때, 양 눈이 붉어집니다.

넷째, 마녀는 불로불사입니다. 지금 제 딸의 탈을 쓴 괴물이 불 속에서 살아남아 어딘가 떠돌아다닐 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마녀는 악마로부터 선택을 받아 죽기 직전에 살아납니다. 만약 여자 중 누군가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면, 꼭 마녀인지 확인하십시오.

마녀가 아무리 당신들을 친구나 연인으로 현혹해도 절대로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니까요. 여러분이 마녀로부터 반드시 살아남길 바랍니다.”

끝으로 갈수록 남자의 말에 가느다란 떨림이 들어갔다. 이 녹취를 끝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이 유튜브를 주제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눴다.

무슨 뱀파이어 같다. 그럼 뱀파이어는 여자만 있는 거야?”

야, 넌 저런 걸 믿냐? 피만으로 안 된다잖아. 아예 식인종이구먼.”

오늘 실종 전단지 받았는데, 설마 마녀에게 잡아 먹힌 건 아니겠지?”

아니, 왜 저런 걸 믿냐고. 괴담이잖아.” 리안은 이야기를 들은 뒤 글을 쓰기 힘들어, 책을 꺼내 읽으려 했지만 책을 심히 잘못 골랐다.

<카를로스 발마세다 – 식인종의 요리책> 갑자기 리안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출판사 대표에게서 온 문자였다.

너 내일 기자회견 올 거지? 니가 주인공이니까 늦으면 국물도 없는 줄 알아. 넌 맨날 늦잖아.’

머릿속에 복잡한 것들이 한번에 몰려왔다. 리안은 반 정도 남은 샌드위치와 케이크를 남기고 아메리카노를 급하게 들이켠 뒤, 카페를 나갔다.

리안은 집에 들어서자, 붉은 인테리어가 그녀를 환영했다. 그녀는 가방을 바닥에 대강 내려놓고 베란다 구석에 자리잡은 김치냉장고로 갔다. 냉장고에 커다란 용기 하나를 꺼내 탁자에 놓고 뒤적이자 큼지막한 머리 하나가 나왔다. 실종 전단지에 나온 남자였다. 리안은 이 남자를 잡아먹고 머리만 통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다.

어쩌지. 머리카락 때문에 먹기 힘든데…”

리안은 집으로 갖고 온 전단지를 펼쳤다. 전단지에 적힌 문구에 그녀는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엄마 밖에 모르는 착한 아들을 찾아주세요.’

웃기고 앉아있네. 나 이 새끼랑 조건만남으로 만난 건데.”

이 머리까지 마무리 지으면, 사람들은 이 남자를 평생 찾을 수 없다. 잡아먹은 사실도 인간들에게는 그저 도시전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리안은 남자의 머리카락과 두피 지방조직을 전부 벗겨내, 전단지와 함께 소각용 쓰레기통에 버렸다.

저녁은 이거다.” 어떻게 먹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원숭이골 요리가 떠올랐다. 중국과 태국에서는 살아있는 원숭이를 발악하지 못하게 머리를 틀에 고정시키고 망치로 머리를 딱 깨뜨린 다지. 그 다음 윗부분에 있는 원숭이 뼈를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리안은 망치를 갖고 와 식탁에서 남자의 머리를 원숭이골처럼 깨부쉈다. 뼈에 난 커다란 구멍에 뇌가 보였다.

글을 쓰려고 들어갔던 카페 이름이 다시금 떠올랐다. ‘카페 아이아이에’ 아이아이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마녀 키르케가 사는 섬 이름이다. 키르케는 섬에 온 손님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한 뒤, 돼지로 만들어 버린다.

카페는 모든 손님을 돼지로 살찌울 정도로 칼로리 가득한 음식과 디저트, 음료를 대접하겠다는 뜻으로 ‘아이아이에’라는 이름을 붙였다. 리안은 색다르게 해석했다. 키르케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때마다 돼지로 만든 전 손님을 식사로 대접한 뒤, 돼지로 만들어 새 손님에게 대접한다.

리안은 포크와 나이프로 뇌와 생골을 잘게 잘랐다. 포크로 찍은 뇌와 생골을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자, 한쪽 눈이 붉게 빛났다.

 

문소낙은 중식당 주방장으로 점심시간마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직장인들이 식당으로 모여든다. 그의 식당은 유명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산 덕분인지 숨겨진 맛집으로 알려졌다. 식당도 어느 정도 커진 덕에 밑에 주방보조와 종업원 2~3명을 더 부릴 수 있었다.

소낙은 꿔바로우를 만들었다. 꿔바로우는 탕수육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요즘 유행하는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촉촉한 포인트를 잘 살려야 한다. 서양에서 개발한 크로켓과 일본에서 개조한 고로케와 궤를 같이한다 볼 수 있다. 돼지고기 안심을 썰어낸 다음, 튀김옷을 얇게 입힌다. 비계 부위가 있다면 따로 떼어내 쓰레기통에 버린다.

소스도 매우 중요하다. 꿔바로우 소스는 기본적으로 걸쭉하지만, 전분을 넣지 않아 탕수육보다 묽다. 그는 마늘과 생강, 당근을 순서대로 채로 썰고 기름을 두른 팬에 넣어 향을 냈다. 그 다음 식초와 설탕을 넣어 끓이고 튀긴 돼지고기 한 조각을 넣었다.

이제 고기와 소스가 어우러지는지 확인한다. 그는 스스로 고기 맛을 보지 않고 그나마 여유가 있어 보이는 여종업원 한 명을 불러 시식을 부탁했다. 그녀는 천천히 씹어 맛을 보고 그에게 개선할 점을 조언했다.

맛 괜찮아?”

음…소스가 좀 싱거워서 식초와 설탕을 더 넣어야 될 거 같은데요.”

알았어, 고마워.”

소낙은 일이 분주한 탓에 종업원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소스와 튀긴 고기를 버무린 꿔바로우가 완성됐다. 부디 손님들이 만족하기를 바라며 음식을 제공했다. 그런데 손님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저기요. 이거 맛이 왜 이래요? 소스가 너무 달고 시큼한 냄새가 나요.”

나쁜 소리가 나오자, 꿔바로우를 만든 당사자가 손님에게 갔다.

소스가 이상해요?”

아니, 맛집이라 검색되니까 찾아왔는데 고기 맛이 소스에 다 묻혔어요.”

종업원도 접시가 가득 쌓인 쟁반을 옮기다 소낙과 화가 난 손님을 보고 자신 때문에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이 상황에 어쩔 줄 모르다 접시가 쌓인 쟁반을 떨어뜨렸다. 와장창! 웨이트리스는 바닥에 자빠졌다. 소낙은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기침을 심하게 해대는 종업원의 이마에 손을 대자 열이 그대로 닿았다.

너…이거 독감이잖아.”

병균 있는 사람이 일을 한다고요? 맛도 엉망인데, 위생도 엉망이야?” 소낙은 손님에게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돈은 안 받겠습니다. 주의 주겠습니다.”

됐어요. 다시는 안 오면 그만이니까.” 손님은 식당을 박차고 나갔다. 소낙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지고, 눈에는 죄책감과 착잡함이 묻어났다. 이 세상과 사회에서는 기회는 딱 한 번 밖에 없다. 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못하면, 그대로 끝이다. 그저 나쁜 소문이 안 나길 빌 뿐이었다.

아프면 말을 하지, 왜 무리해서 출근해? 일에 차질이 생기잖아!”

요리사들은 주방 이곳저곳을 신경 쓰는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소낙은 종업원을 세차게 꾸짖었다. 이리저리 추궁하니 그녀는 심한 독감을 앓고 있다고 털었다. 그런데 이를 말하지 않은 채 무리해서 일을 강행한 것이다. 아파서 맛을 보기 힘든 건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열이 심할 정도로 아픈 상태에서 일을 하면 자칫하다가 위생 문제로 번질 수 있다. 식중독이 유행할 수 있는 여름에는 특히나 말이다. 게다가 종업원은 몸이 아픈 탓에 균형을 잃어 넘어지고 쟁반을 떨어뜨려 큰 사고를 칠 뻔했다. 그녀는 기침을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소낙도 아픈 사람을 면전에 두고 소리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됐고, 집으로 가.”

하지만 일손이 없으면 힘들…”

여기서 어영부영하는 게 더 힘들어!”

네…” 종업원은 훌쩍이면서 식당을 나갔다. 바쁘게 손님을 맞이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달이 차올랐다. 소낙은 식탁에 앉아 오늘 하루에서 반성할 점을 곰곰이 생각한 뒤, 주방 정리를 했다. 야단을 친 종업원이 눈에 밟혔다.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에 아픈 걸 참아가면서 일한 걸 텐데, 왜 그리도 매섭게 굴었을까? 소낙은 미안했는지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

몸조리 잘해라. 아픈 거나 힘든 거는 무조건 보고하고.’

답변이 금방 왔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소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쉬어라’라는 말로 카톡을 마무리 지었다. 그의 눈 앞에서 망한 꿔바로우가 보였다. 고기를 보자 그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래도 약간의 희망을 기대하고 꿔바로우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그는 고기를 천천히 씹고 독이라도 먹는 것처럼 삼켰다. 얼마 가지 않아,

우욱!” 소낙은 화장실로 달려들어 변기에 토했다. 검지와 중지로 목젖을 세게 눌러 위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웠다. 위에 있는 꿔바로우를 다 꺼내고 그는 주저앉은 채 화장실 벽에 기댔다. 그의 두 눈이 충혈되고 눈물이 흘렀다.

헉, 헉…”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동물을 죽여서 만든 음식’을 입에 넣으면 온몸이 거부했다. 그는 홀로 채식을 했다. 하지만 여러 이유 때문에 고기를 요리하기로 택했다. 고기 요리를 만들면 누군가가 옆에서 대신 시식해줘야 했다.

하…” 소낙은 망연히 하얀 화장실 천장만 바라보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다음 날, 기자들은 카메라 세례를 날리며,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리안의 경사를 축하했다. 그녀의 소설이 해외문학상을 받아 해외에서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에 나타난 그녀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동화 속 백설공주가 현실에 나타난 것 같았다.

숯처럼 검은 웨이브 머리와 눈처럼 하얀 피부, 피처럼 붉은 입술. 뺨은 설탕으로 만든 장미를 연상케 했다. 일부 기자들은 그녀의 미모를 찬양하는, 짧은 찌라시를 올리겠지.

소설임에도 수필처럼 문장이 유려한 게 이리안 작가님의 매력이잖아요. 어떻게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도 생생하게 적으실 수 있나요? 마치 경험담인 것처럼.”

기자 한 명이 뜻하지 않게 정곡을 찔렀다. ‘이 자식 봐라?’ 리안은 잠시 정색하다 웃음을 되찾고 그럴 듯한 답을 내놨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아시나요? 상자 속에서 고양이가 죽은 동시에 살아있다는 물리학 이론이예요. 동시에 비현실적인 상황을 재현한 사고 실험이죠. 열심히 상상하고 쓰는 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다른 질문이 들어왔다. “이 영광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돌리고 싶나요?”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명만이 떠올랐다.

아빠.’ 마음속에 묻어뒀던 아버지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일이 바쁜 탓에 리안에게 책이라는 친구를 소개했다. 책을 많이 읽고 스스로 겪은 경험을 토대로 기록해 지금에 이르렀다.

저는…” 아버지를 언급하려는 순간 목에서 무언가가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그녀가 원하는 답은 나올 수 없었다.

출판사, 친구, 그리고 독자 분들… 저를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이 영광을 돌려야겠죠?”

리안은 ‘하, 정말로 시시한 답이 나왔다’며 속으로 투덜댔다.

 

이리안은 오늘 주말에 저녁 ‘사냥’을 개시했다. 그녀는 들키지 않기 위해 전국 지역 중 하나를 골라 사냥을 한다. 가끔은 해외 여행이라는 핑계를 대 외국인을 먹기도 했다.

이번 장소는 경기도 변두리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조건으로 남자 한 명을 모바일 앱으로 만났다. 이번 사냥감은 30~40대로 보이는 평범한 남자였다. 두 사람은 호텔에 들어가기 전 저녁 식사를 하러 한 중식당으로 들어갔다. 리안은 메뉴판에서 ‘잡채밥’이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주 해주던 식사 중 하나였다. 마치 아버지가 정해준 것처럼 잡채밥을 주문했다.

주문하신 잡채밥과 우동, 이과도주 나왔습니다.” 소낙은 요리를 건네다 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미모에 잠시 멍하니 있다 서둘러 주방으로 돌아갔다.

리안은 잡채밥을 숟가락으로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밥과 잡채를 비벼 먹자, 밥과 당면, 채소와 버섯, 고기 맛이 어우러졌다. 먹자마자, 아버지와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세 끼 식사는 꼭 챙겼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아 요리는 언제나 아버지가 하셨는데, 실력이 상당히 좋았다. 가끔은 남은 잡채로 아버지가 고추기름을 둘러 잡채밥을 요리했다. 고추기름도 고추가루, 다진 마늘과 대파, 식용유로 직접 만들었다. 리안은 아버지와 함께하던 식사시간이 제일 행복하고 특별했다.

맛있어?”

응, 아빠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어. 아빠 밥 많이 먹고 돼지 되면 어떡하지?”

아빠는 리안이가 맛있게만 먹어주면 괜찮아.” 아버지는 잘 웃지 않았지만, 이 때만큼은 옅은 미소를 띄우곤 했다. 옛 추억에 잠겨 그녀의 표정이 울적해졌다.

맛없어? 표정이 별론데?” 남자가 흐름을 깼다.

아앗, 죄송해요. 잠깐 한눈 팔았어요.” 그녀는 애교 가득한 미소로 돌아왔다.

나랑 만나는 건데, 딴 생각을 하면 어떡해?”

남자가 볼을 만지며 거리를 심히 좁히자, 떨떠름했다. ‘모처럼 만난 귀한 사냥감인데, 죽을 때까지는 귀하게 모셔주지.’ 리안은 없는 아양을 서비스로 떨었다.

이 집 맛있지? 취미가 여행이랑 맛있는 음식 찾아보는 거라 해서 내가 찾아봤어.”

네, 맛집 되게 잘 고른 거 같아요~.”

그럼 나중에 여행도 같이 가자. 맛집 탐방도 하고.”

리안은 짜증이 돋았다. 취미가 여행과 맛집 탐방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놈에게 자신의 취향과 특징을 말하기가 싫었다.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취향을 모욕하고 모독하는 것 같았다.

참을 인(忍) 자를 세 번 새겨야 한다. 저 인간을 먹어 치워 모든 고백을 없던 일로 만들면 그만이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자는 리안에게 입을 맞췄다. 이과도주를 마신 탓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리안은 당장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졌지만 참았다. 여름이라 몸이 무더위와 땀으로 진득해서, 씻어야 상쾌하게 섹스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샤워부터 한 다음에 하자고 제안했다. 남자는 금세 납득하고 휘파람을 불며 먼저 샤워했다.

이 때다.’ 리안은 붉은 원피스를 벗어 하얀 나신을 드러냈다. 수건에 클로로포름을 적신 뒤, 샤워실로 살그머니 들어섰다. 남자는 눈치 없게 웃었다.

뭐야, 샤워실에서 하고 싶은 거…어?”

남자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리안은 수건으로 그의 코와 입을 틀어 막았다. 그는 발버둥쳤지만, 여자의 엄청난 힘에 얼마 안 돼 축 늘어졌다.

리안은 에어컨을 틀고, 샤워실에서 남자의 시체를 거꾸로 매달아 쏟아지는 피를 통으로 받았다. 처음에는 피를 제대로 쏟아지게 하는 법을 몰랐다. 실수로 피가 바닥에 흩어지자 아까워 죽을 뻔했다. 피가 튀어 온몸이 붉은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여러 번 하다 보니 금방 익숙해지고 일상이 되었다. 리안은 밧줄로 사냥감을 박쥐처럼 매달고 밑에 통을 뒀다.

에잇.”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목 경동맥 부근을 칼로 푹 찌르자, 피가 수도꼭지처럼 나왔다. 텀블러로 통에 있는 피를 받아 토마토 주스처럼 마시기도 했다. ‘몇 등분으로 토막 낼까? 17등분?’ 리안은 톱과 식칼로 피를 다 빼낸 사냥감을 능숙하게 잘라냈다.

토막 낸 조각들을 미리 준비한 여행가방에 담고, 잠시 쉴 겸 남자의 가방을 뒤적였다. 지갑에는 남자의 결혼식 사진과 반지가 보였다.

미쳤나 봐. 유부남인데 나를 만난 거야?” 리안은 냉소하며 그의 휴대폰도 꺼냈다. 배경화면에는 남자가 어린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다.

아빠.” 또 다시 아버지가 떠올랐다. 잠시 이 배경화면을 멍하니 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아이에게는 당신 같은 사람이 없는 게 이득이야.” 리안은 합리화하며 방을 정리했다. 피가 묻은 곳이나 깜빡한 물건은 없는지 신중히 확인했다. 자기 집도 잘 정리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 때는 어떤 프로 청소부보다도 철저했다.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났다. 리안은 검은 옷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여행가방을 든 채 방을 나섰다. ‘일주일에 한 명, 한 달에 4명, 일 년에 52명’을 속으로 읊으면서.

 

리안은 요즘 들어 꿈을 자주 꾸었다. 아버지와 밥을 먹는 꿈이었다. 달콤한 꿈이었지만, 더 이상 이뤄질 수 없는 꿈이기에 그녀는 그리움에 더더욱 사무쳤다.

아버지가 해준 잡채밥을 한 번 더 먹고 싶었다. 결국 직접 잡채밥을 만들었다. 간장을 너무 많이 넣었는지 너무 짰다. 다시 만들었지만 당면이 눅눅하거나, 조리하는 도중에 타버렸다.

그녀는 차를 타 서울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사냥감과 같이 갔던 식당으로 향했다.

중식당에 들어서자 문 앞에 ‘오늘은 고기가 안 들어갑니다. 죄송합니다’라는 글귀가 먼저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휑한 식당에 검은 조리사복을 입고 하얀 두건을 머리에 두른 훤칠한 남자 한 명만이 있었다. 어제 잡채밥을 줬던 그 남자였다. 그는 혼자 탁상에 앉아 한 손으로 얼굴을 짚은 채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소낙은 그녀를 바로 알아봤다.

어제 오신 손님 아니세요?”

어머,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저런 외모가 눈에 안 띄는 게 이상하지.’ 소낙은 고개를 저절로 끄덕였다.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남자친구 분은 안 오시고?”

남자친구 없는데요.” 리안은 웬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제 같이 오신 분은 남자친구 아닌가요?”

아닌데요.” 리안은 커다란 눈을 차갑게 치켜 떴다. 맹수처럼 사나운 눈빛에 소낙은 지레 겁을 먹었다.

죄송합니다.” 소낙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물과 컵, 메뉴판을 갔다 줬다.

잡채밥 하나 주세요.”

어제도 드셨던 거 같은데.”

맛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한 번 더 왔어요.” 리안은 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괜한 생각을 했나 보다.’ 소낙의 마음속에 있던 섬찟함이 녹아 없어졌다.

오늘 고기 없는데, 괜찮아요?”

새로운 맛이 나겠죠? 주세요.” 리안이 웃자, 소낙도 덩달아 미소가 나왔다. 잡채밥이 완성되고 그녀는 한 숟가락을 들고 후후, 분 다음 입에 쏙 집어넣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고 삼킨 뒤 만족스럽게 웃었다.

맛있어요?”

네, 집밥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 말 재미있게 하지 않아요? 집밥 맛있으면 식당 밥 같다 하고, 식당 밥 맛있으면 집밥 같대요.” 소낙은 편해진 분위기에 농담을 던졌다. 다른 버전으로는 그림을 보면 사진 같고, 사진을 보면 그림 같다고 말하는 게 있겠다.

저는 이거 먹고 옛 추억이 떠오르더라고요.”

만화 <식객>처럼요? 되게 재밌게 봤는데.”

와, 그 만화 되게 오랜만이다. 만화 이야기처럼 아버지가 저에게 잡채밥이나 다른 밥 많이 해 주셨어요. 되게 맛있었는데.”

아버지도 요리사세요?”

아뇨. 의사였어요.”

아…아니시구나. 아버지와 연락하면서 지내세요?”

돌아가셨어요.”

죄송합니다…”

모를 수도 있죠. 몇 번 본 사이도 아닌데.”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소낙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어찌어찌 말을 걸어보지만, 이런 어두운 답이 나오면 대화를 이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안은 오히려 이야기도 식사처럼 정성껏 하려는 그가 마음에 들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의사랑 요리사랑 똑 같이 칼 드는 사주인 거 아세요? 어떤 어머니는 자식이 칼 드는 사주라고 하니까, 엄청 기대한 거예요. ‘칼을 쓰는 사주라니, 우리 아이는 메스를 드는 외과의사가 될 거야!’하면서 공부를 엄청 시켰죠. 근데 커보니까 요리사가 돼서 생선이랑 고기를 칼로 써는 사람이 된 거죠.”

어머니가 되게 실망하셨겠네요.”

칼 드는 사주가 의사랑 요리사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 써는 조폭이나 살인마가 안 된 게 다행이라면 다행 아닐까요?” 살벌한 우스갯소리에 둘 다 공연히 웃었다.

아버지는 바빠도 저와 식사하는 건 꼭 지키셨어요. 저도 아버지와 식사하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어요. 맛있는 걸 먹으면 사랑받는 기분이 들잖아요?”

그녀는 한 책에서 이런 문구를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랑받는 기분은 맛있는 무언가를 먹을 때와 가장 비슷하다고, 사랑받고 싶어서 더 열심히 먹는 거라고. 소낙은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버지께서 손님을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리안은 멈칫했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쓸쓸하게 변했다.

그…치요.” 소낙은 리안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한쪽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렇겠죠? 정말로 저를 사랑하셨겠죠…?”

리안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울음을 어찌어찌 막고 싶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끅끅했지만, 소용없었다.

죄송합니다.” 리안이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스스로를 진정했다. 소낙은 그녀에게 다가가 식탁에 있는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함께 닦아줬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소낙은 마음이 기묘하게 술렁거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꼬리를 살포시 올리며 그녀를 위로했다.

물론이죠. 분명히 사랑하셨을 거예요.”

부드러운 그의 위로에 리안은 울음을 그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낙의 얼굴이 실로 잘생겼다고 느꼈다. 특히 눈이 크고 예뻤다. 검은 눈동자에는 어두운 우수가 들어가 있었다. 리안은 부끄러워 그에게서 시선을 애써 돌렸다. 소낙은 분위기가 많이 풀린 덕에 잘 하지도 못하는 장난이 나왔다.

어어, 웃다 웃으면 엉덩이에 뿔나는데?”

아이참, 이러면 안 되는데. 하하하.”

리안이 눈물범벅인 상태에서 헤실거리자, 소낙도 웃음을 터뜨렸다. 해사하게 웃는 그 커다란 눈이 초승달처럼 접혔다. 그 눈웃음에 기분이 상기됐다.

소낙은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것을 이제야 알고 민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리안도 헛기침을 한 뒤, 급하게 식사를 끝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리안은 그의 옷에 달린 이름표를 봤다.

그 소나기 내릴 때 문소낙인가요?”

맞습니다.”

제 이름은 이리안이에요. 백합의 릴리안(Lilian), ‘이리’와 ‘리리안’을 합쳐서 이리안. 외우기 쉽죠?”

소낙은 그녀가 이름처럼 백합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입은 붉은 투피스도 예쁘지만, 하얀 원피스를 입으면 백합 한 송이처럼 청순하겠다고 그려봤다.

 

리안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 목 매달아 죽은 아버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문소낙이 꿈에 나타났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녀의 붉은 거실에서 그가 소파에 제 집이라는 듯 앉아있었다.

이제 왔어? 한참을 기다렸잖아.” 리안은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분은 좋았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암만 봐도 꿈이네. 왜 당신이 여기서 나타나는 거야?”

소낙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와 입을 맞췄다. 리안의 얼굴이 원숭이 엉덩이 색으로 변했다. 이 붉은 인테리어 속에서도 홍조가 유난히 튀어 보였다. 꿈속의 소낙은 이런 그녀를 도발했다.

이게 꿈이고 말고가 중요해?” 소낙은 그녀와 입술을 포개 더욱 진하게 입을 맞췄다. 또 양손으로 그녀를 안은 채 원피스 지퍼를 은밀하게 내렸다.

자...잠깐!” 그녀의 원피스가 내려가고 검은 속옷만이 남았다. 그의 짙은 호흡이 그녀의 하얀 살을 건드렸다. 리안도 그의 상의를 벗긴 뒤, 양팔로 그를 꽉 껴안고 있었다.

침대로 갈까? 아니야.” 그는 리안을 들어올리더니, 소파에다 강제로 눕혔다. 그는 색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몸에 그림자가 졌다.

여기가 좋겠다.”

이 말을 끝으로, 리안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창피함을 못 이겨 이불로 온 몸을 뒤집어씌웠다. 눈을 뜨지 말 걸 그랬다. 이 달콤한 꿈이 끝까지 못간 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리안은 약속대로 식당을 자주 찾아왔다. 언제부턴가 식당에서 주방장에게 대시하는 예쁜 아가씨가 암암리에 소문났다.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남의 연애 이야기니까.

어, 저 아가씨 또 왔다.”

이제 단골 다 됐네~!”

주방 보조 중 한 명은 소낙을 ‘기만자’라고 놀렸다. 사람들이 잘생긴 축에 속하는 그가 저런 예쁜 아씨와 사귀면 괜찮겠다고 여겼지만, 당사자는 아니었다. 그녀가 올 때마다 마음속에 짐이 하나씩 생기는 것 같았다.

그가 바깥에서 담배를 필 때는 리안도 그가 있는 자리로 담배를 갖고 갔다(리안은 ‘그이도 나도 담배를 펴서 다행이야’라며 신이 났다). 따로 쓰는 라이터가 따로 있지만, 슬그머니 숨기고 입에 담배를 문 채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불 좀 주실래요?” 소낙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다. 라이터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불이 다 떨어졌나 보다.

저기 죄송한데 불이 다 떨어져…”

에잇.” 리안은 그가 입에 문 담배에 그녀의 담배를 키스하듯 맞붙였다. 담배에 불이 붙자 소낙의 얼굴도 불처럼 뜨거워졌다. 리안은 싱글벙글 웃으며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내뱉었다.

이러면 되죠.”

네…”

리안은 밥을 먹으면서도 소낙과 바라봤다. 또 그가 퇴근을 하면 다가가 걸음을 같이 할 때도 있었다. 소낙은 괜한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해 전보다 무뚝뚝하게 대했다. 하지만 여기서 질 그녀가 아니었다.

저랑 데이트하지 않을래요?”

밥 먹고 얘기 좀 했다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소낙 씨가 좋아서 이러는 건데요?”

받아줄 마음 없습니다.” 받아주지 않고 무심하게 돌아서는 그가 얄밉고 얄궂어 못된 말을 던져 도발할 때도 있었다.

딱 봐도 여자랑 제대로 사귄 것 같지가 않은데, 저랑 교제해볼 마음 없어요?”

소낙은 그녀를 쏘아봤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니까. 고기를 못 먹는 그의 체질 때문에 더 이상 여자와 이성으로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 그는 훤칠한 외모에 과묵하지만 친절한 성품 덕에 여자가 오긴 했다. 이성교제도 몇 번 했지만, 끝은 파국을 맞이했다.

연하였던 첫 번째 여자친구에게는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여자친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괜찮아. 나도 이 나이 돼서도 김치를 못 먹어. 어릴 때 급식 먹거나 친척 집에 갈 때 다들 나 김치 먹이려고 안달이었고. 너무 힘들었거든. 오빠도 고기 못 먹으면서 되게 힘들었겠다.”

소낙은 그녀가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배신감이 들었다. 여자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식당에만 들어가, 고기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혼자 다 먹었다. 또 김치를 포함한 싫어하는 반찬은 슬쩍 그 앞에 뒀다. 소낙은 하대 받는 것 같았다.

어느 날에는 친구 커플과 모인 적이 있었다. 여자친구는 하필이면 고깃집에 만나자고 예약했다. 거기서 소낙이 먹을 음식은 거의 없었다. 반찬만 조금 먹은 채 쭈뼛쭈뼛 앉아있을 뿐이었다. 고기를 못 먹는다고 하자 모두가 경악했다. 고기를 맛있게 먹을 줄 알아야 배운 사람 소리 듣는다는 말까지 들었다. 여자친구는 내키지 않아 모임이 끝난 뒤에 그와 크게 싸웠다.

오빠가 거기서 그러면 내가 뭐가 돼?”

몇 번이나 말했잖아? 고기 못 먹는다고. 다른 데 좀 알아보던가, 미리 알려주던가.”

주변에 한우, 횟집, 삼겹살, 치킨. 주변에 고깃집 밖에 없는데 어쩌라고? 오빠 되게 이기적이다.”

이기적? 일방적으로 통보한 너는 뭔데?”

아니, 고기도 못 먹으면 사회생활 할 때는 어떡할 거야? 회식 자리가 고깃집 밖에 없을 텐데. 그러다가 사회부적응자 된다?”

이해한다며? 너도 김치 못 먹는다며?”

나는 반찬을 못 먹는 거고. 오빠는 누구나 다 먹는 걸 못 먹는 거잖아? 완전 다르지.”

이 말다툼을 끝으로 두 사람은 서먹서먹해지고 이내 헤어졌다.

동갑이었던 다른 여자친구에게는 고기를 못 먹는다는 사실을 숨긴 적이 있었다. 데이트 방법은 다양하지 않은가? 미술관을 가거나, 영화를 보는 문화생활이 있다는 게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먹는 게 필수라면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빵 또는 케이크를 먹으면 되었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소낙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비밀은 금방 들통났다.

왜 안 먹어? 너 먹으라고 일부러 많이 만든 건데. 너보다는 못하겠지만, 열심히 만들어봤어. 먹어봐.”

소낙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여자친구가 만든 붉은 닭볶음탕을 바라봤다. 여자친구는 웃으면서 먹어보라고 재촉했다.

어, 맛있겠다… 잘 먹을게…”

소낙은 조린 감자부터 먹었다. 이에 여자친구는 닭고기를 뜯어 그에게 줬다. 그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고 닭고기를 천천히 집어먹었다. 괜찮다, 괜찮다. 어릴 때와는 다르다. 천천히 먹으면 몸이 받아들일 거야. 나는 이제 애가 아니니까. 약했던 그 꼬마가 아니니까.

그는 닭고기를 억지로 집어삼켰다. 괜찮겠다 싶던 순간, 몸은 바로 거부반응을 보였다.

우욱!”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위에 들어간 닭볶음탕을 토해냈다. 빨간 토사물이 바닥을 더럽혔다. 모두 토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친구는 혐오와 경멸이 섞인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건장한 젊은이는 이 때만큼은 큰 잘못을 저질러 어쩔 줄을 모르는 연약한 어린 아이 같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더 이상 여자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또 식당 일을 하면서 사람들은 식사를 해야 마음이 점점 풀어지고 이야기가 튼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와 어울리려면 먹는 습관도 중요했다. 고기를 못 먹는 체질은 점점 콤플렉스로 굳어졌다.

 

오늘도 퇴근하는 도중, 리안이 그를 웃으면서 따라다녔다.

저기 이거 스토킹인 거 아세요?”

스토커는 떳떳하지 않게 따라다니죠. 나는 당당하게 따라다니잖아요.”

받아줄 마음 없습니다.”

거짓말, 당신이 나 좋아하는 거 다 보이는데? 왜 계속 숨기려 들어요?”

소낙은 화를 내려다 정곡을 찔린 듯 그녀 앞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이리안 씨,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리안은 발랄하게 답했다. “중국 사람들 먹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못 먹는 게 없답니다. 책상다리, 비행기 다리 빼면 잘 먹죠.”

저는 고기를 전혀 못 먹습니다.” 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에 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고, 아무리 먹어도 몸이 안 받아들여요. 근데 대부분이 고기를 먹잖아요? 데이트하면 식사 코스는 필수고요. 저랑 사귀면 정말 재미없는 데이트만 이어질 겁니다.”

리안은 그대로 선 채,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터는 게 괴로웠다.

요즘 채식 존중한다지만, 주변 찾아보세요. 채식 식당? 거의 못 찾아요. 돈이 안 되거든요. 있어도 엄청 비쌉니다. 채식한다고 하면? 거부감 보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요즘 사람들은 밥을 같이 먹어야 이야기가 튼다 하죠? 저랑 밥 먹으면 이런저런 얘기, 힘들 거예요.”

소낙은 단호하게 말한 뒤, 작별인사와 같은 안녕을 그녀에게 고했다.

좀 멀쩡한 남자, 이리안 씨와 어울릴 수 있는 남자를 만나서 데이트하는 게 나을 겁니다.” 소낙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를 떠났다.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후회가 점점 밀려왔다.

사실 그도 리안이 식당을 찾아올 때마다 반가웠다. 자신과 다르게 리안은 당돌하고 잔망했다. 그런 그녀가 실로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작가라는 것을 알고 그녀의 책을 사서 읽기도 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 그녀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와 사귀기에는 스스로가 자신 없고 두려웠다. 그녀에게는 은은한 향수 향이 그에게는 더러운 기름 냄새가 났다. 또 이 콤플렉스 때문에 다른 여자친구처럼 나쁜 끝을 보일까 두려웠다. 자격지심이 들었다.

뒤를 힐끔 바라보자, 리안이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서있었다. 그는 그녀를 도외시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는 오늘 혼자 일하는 탓에 고기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간판을 걸었다. 딸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안이었다. 소낙은 어제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는데, 굴하지 않은 그녀를 보고 놀랐다. 그녀는 멀찍이 보이는 갑오징어 한 마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은 고기 음식 안 한다 하지 않았어요?”

새로운 메뉴를 만들려는 겁니다.” 소낙은 머쓱해 머뭇거리다 한숨을 푹 쉬었다.

어머, 뭐예요?”

중국 냉면.” 여름 시즌이라 계절 메뉴 하나쯤은 꼭 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요리를 알아보느라 어쩔 수 없이 새우와 해파리, 갑오징어 같은 해물을 좀 구했다. 이번에 하는 요리는 일종의 실험이며, 고기는 버려도 그만인 실험 재료다.

그럼 그거 주실래요?”

파는 거 아닌데요.”

그는 새로운 요리에 집중했다. 해산물 껍데기를 벗기거나 썰어낸 뒤 끓는 물에 살짝 데친다. 오이와 양상추, 배는 채 썰고 표고버섯은 기둥을 따고 슬라이스로 자른다. 계란은 풀어서 오일 살짝 두른 팬에 얇게 부쳐 지단을 만든다. 표고버섯을 볶고 식히는 동안, 면을 찬물에 헹군다. 지단을 채 썰고, 그릇에 면과 만들어 놓은 고명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간장과 물, 설탕과 땅콩버터, 식초와 두반장을 넣은 소스로 마무리 짓는다.

소낙은 면과 채소만 먹어봤다. 맛은 괜찮았다. 하지만 새우와 갑오징어 같은 고기와는 맛볼 수 없었다. 오기로 한 친구가 맛을 보기로 했지만 도통 오지 않아 휴대폰을 꺼냈다. 집안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지방에 내려갔다는 친구의 카톡이 이제야 눈에 보였다. 리안은 그의 난감함을 빠르게 잡았다.

그거 맛봐야 되는 거 아니예요? 고기 못 드신다면서?”

“…파는 거 아니라니까.”

글과 요리의 공통점이 무언지 알아요? 맛있는 재료를 모아서 맛있게 만들어야 돼요. 또 누군가가 곁에서 맛을 봐야 되죠.”

드셔 보시던가.” 소낙은 결국 한 수 접고 그녀에게 완성한 요리를 갖다 줬다. 리안은 새우와 오징어, 지단과 오이와 면을 한 젓가락 들고 맛을 봤다. 천천히 씹으며 맛을 음미하더니,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맛있다! 고추기름이랑 산초 가루 더 넣으면 더 알싸하고 좋을 거 같은데요?”

고추기름이랑 산초 가루…” 소낙은 맛있다는 반응에 안심하면서, 리안의 음식 계산서에 그녀의 피드백을 빠르게 받아 적었다. 냉면 한 그릇이 순식간이 비었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소스를 혀로 날름 닦은 다음 맹랑하게 웃었다.

앞으로 데이트 식사는 여기서만 해야겠네~!”

소낙은 포기를 모르는 그녀의 고백에 잠시 할 말을 잃다, 너털웃음이 터졌다.

하하…아하하!” 소낙이 두 손 두 발 다 들자, 그녀는 일어나 뒷짐을 진 자세로 도도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이제 좀 받아줄 마음이 있나 보네.”

나랑 있으면 어려운 점 많을 텐데요?”

소낙 씨 같은 사람은…무너뜨리는 재미가 있거든요.” 리안은 그의 귀에 숨을 간드러지게 불어넣었다.

 

소낙이 만드는 음식은 맛이 점점 좋아졌다. 덕분에 손님이 줄을 설 때도 생겼다. 식당을 찾는 일부 단골은 이 사실이 기쁘면서 시원섭섭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음식에 요술이라도 건 거 아닐까?’ 사랑도 요술이라면 요술이 아닐까?

식당에서 리안은 소낙이 주는 음식을 시식할 겸 먹곤 했다. 그녀는 어미새의 먹이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아기 새 같았다. 그의 요리를 먹을 때마다 리안은 사랑스럽게 웃었다. 소낙도 그녀의 미소를 보면 마음이 든든했다. 소낙은 사랑의 힘을 밀고 나가 오글거린다고 거부하던 커플링을 그녀와 맞췄다. 더 나아가 어둡고 사적인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었다.

적색육만 못 먹는 거야?”

애매한데…정확히는 살생해서 얻은 고기를 못 먹는 것 같아.”

소낙은 무정란, 우유나 버터 같은 유제품은 먹을 수 있었다. 다만 치즈를 사다 먹었는데, 몸이 거부해 토한 적이 있었다. 원인을 찾아보니 치즈에 ‘응고제로 레닛’이라는 물질이 들어갔는데, 송아지를 도축해서 만든다고 한다. 성분을 보지 않아도 몸은 이 음식이 동물을 죽여서 만들었는지 귀신 같이 알았다.

요리에는 왜 관심을 가진 거야?”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어. 어머니가 공장 일을, 내가 요리 같은 집안일 담당이 되고. 요리를 하다 보면…한 곳에만 집중이 되니까, 다른 잡념이 사라져. 그게 좋더라.”

아버지는 없는 거야?”

이혼했어. 가정폭력이 있었거든.” 리안은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트라우마 때문에 고기를 못 먹는다는 얘기를 어디서 봤는데, 고기도 아버지 때문에 못 먹는 거야?” 소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아끼던 개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지 물었다고 때려 죽이고 보신탕으로 해먹었어. 개새끼를 이따위로 키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면서 개고기를 먹이고. 그 뒤로는 어떤 고기를 먹어도 몸이 안 받아들이더라. 안에 있는 개가 먹지 말라고 저주하나 봐.”

나쁜 놈, 그런 인간은 아버지도 아니야!” 일주일에 한 번 사람을 도축하고 도살하는 그녀가 사랑하는 이의 개가 도살됐다는 이유로,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의 고백에 귀 기울였다. 소낙은 이를 모른 채 자신을 이리도 알고 공감해주는 그녀를 보면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아버지가 그게 싫다고 목 조르면서 고기를 먹였어. 그걸로 어머니가 이혼 서류 꺼내셨어. 자기가 맞는 건 참을 수 있는데, 내가 맞는 건 참을 수 없다고.”

어머니가 용기를 내셨네.” 어머니를 향한 칭찬에 소낙은 그리움이 묻은 미소를 지었다. 진작 이혼했으면 됐다고 화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드디어 용기를 낸 데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다.

내가 고기 못 먹으니까 처음에는 채소 요리를 많이 했어. 근데 어머니가 채소 요리만으로는 체력이 달리셨어. 어머니 건강 때문에 고기 요리를 했어.” 고기 요리를 하는 이유도 함께 나왔다.

맛은 어머니가 봐줬구나?”

간은 이렇게 하면 좋다. 이렇게 굽거나 삶아야 한다. 이것저것 가르쳐 주시고. 그러면서 이 말은 꼭 안 잊어버리시더라. 아들이 해주니까 더 맛있다고.”

어머니는 지금 살아 계셔?”

돌아가셨어. 췌장암으로.”

어머니가 그래도 행복하게 가셨을 거야. 네가 준 맛있는 음식 드시고.”

글쎄…” 소낙의 눈빛이 침울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난 오히려 어머니에게 미안해. 더 맛있는 거 많이 해드릴 걸. 아무리 해드려도 모자라더라.”

회한이 담긴 그의 말에 리안은 팔짱을 끼고 그의 팔에 얼굴을 비볐다. 강아지 같은 그녀의 위로에 소낙은 잠시 슬픔을 달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소낙은 고기 요리를 계속 만들어왔다. 리안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도 고기 요리를 고수하는 이유가 있어?”

채식은 공급은 비싼데, 수요가 너무 적어. 채소가 고기보다 비쌀 때도 많고. 예전보다는 낫다지만, 지금도 채식보다 육식이나 잡식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고. 작은 식당으로 먹고 살려면 사회가 원하는 대로 맞춰야지.”

리안은 ‘자본주의의 노예’라고 놀렸다. 소낙도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려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래서 맛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는구나?”

그렇지. 근데 다 미각이 달라서 좀 어렵더라.”

앞으로는 내가 다 먹으면 되지. 내가 맛보니까 음식도 더 맛있어졌지? 계속 많~이 먹어줄게!”

리안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소낙은 그녀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졸망졸망해 남몰래 웃었다.

소낙과 다르게 리안은 아버지 얘기를 한 뒤로,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얘기를 안 하는 건 아니다. 소설가 답게 그녀는 수많은 지식을 섭렵하고 엮어 맛깔나게 이야기할 줄 알았다. 소낙은 비밀이 가득한 이야기꾼인 그녀가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처럼 저절로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존재 같았다.

동시에 그녀의 솔직한 이야기를 말하지 않아, 한 사람으로서는 섭섭하고 서운했다. 그녀는 자기 차례가 온다 싶으면 말을 돌리거나 입을 다물었다. 소낙은 그녀가 어떻게 성장하고 지금에 이르렀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깊은 사생활까지 묻는 건 좀 아니다 싶어 언급하지 않았다.

소낙이 드라이브로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주자, 커다랗고 깔끔한 아파트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서울인 데도 엄청 좋은 집에 사네 집도 꽤 커 보이고.’ 소낙은 아파트 층을 세며 감탄했다.

들어가.” 소낙이 거리를 두며 손을 살짝 흔들자, 리안은 살짝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새초롬하게 노려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소낙은 그녀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묻힐 때까지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제 안 보인다 싶을 때 잠시 서있다 돌아가려는 순간, 리안이 그에게 달려들어 양팔로 그를 껴안아 서로의 입술을 포갰다. 소낙도 눈을 감고 그녀를 껴안아 키스를 받아들였다.

바이바이.” 리안은 입술을 떼고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소낙은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 뒤, 차로 돌아갔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즐겁기는 오래간만이었다. 미신이나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밤하늘에 뜬 별들에게 이 행복이 오래 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일상을 함께하면서 둘은 검은 옷과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오늘 영화 데이트에서 소낙은 검은 셔츠와 바지를, 리안은 붉은 와이셔츠에 검은 스커트를 입었다.

너는 보니까 검은 옷 주구장창 입더라.”

무난하니까. 뭐가 묻어도 티가 안 나고. 너야말로 검은색이랑 빨간 옷 많이 입는 구먼.”

피…아니, 뭐가 묻어도 티가 안 나니까. 게다가 예쁘잖아.”

피가 묻어도 티가 안 나니까.’ 리안은 말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두 사람은 로맨스 영화를 한 편 보고 아래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소감을 밝혔다. 리안은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소낙은 볼 만했다는 표정이었다.

요즘 로맨스 영화는 현실적인 게 많긴 하네.”

헤어지고 갈 길 가는 결말이라니, 왜 다들 그런 결말만 만드는 거야? 옛날 ‘너는 내 운명’이나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사랑에 모든 걸 맡기고 던지는 그런 로맨스는 안 돼?”

그 영화들 되게 오랜만에 듣는다. 나 그거 지금도 좋아하는데.”

시련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에 리안은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옛날부터 ‘폭풍의 언덕’과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처럼 세상을 초월하는 사랑 이야기도 좋아했다. 상상 속에서 나올 법한 사랑을 이루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근데…요즘 시대에는 그게 좀 시대착오적이긴 하지.”

시대착오’라는 단어에 리안은 예민해졌다. “시대…착오?”

연애나 결혼에 조건 보는 게 현실이지. 개인주의도 많고. 모든 걸 바치는 사랑이 어려운 시대지.”

너는 그런 사랑이 싫어?”

이게 여자들이 말하는 질문인가, ‘오빠 나 어디가 바뀐 거 같아?’ 같은? 소낙은 시험받는 느낌이 들었다.

싫은 건 아닌데…”

사람들은 정말 이상해. 헤어질 거면서 왜 평생 사랑한다고 말해?” 리안의 목소리가 점점 무섭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 한쪽이 분노로 차올라 붉게 변했다. 라떼가 반쯤 남은 커피 잔에 금이 살짝 갔다.

“그거야 오래 사랑하겠다는 뜻이지.”

“이상해, 이상하다고. 어떻게 사랑이 변해?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어?”

“이리안.”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애초에 하지 마!”

쨍그랑! 커피 잔이 산산조각 났다. 이걸 보고 나서야 리안은 이성을 되찾았다. 붉은 눈도 검게 돌아왔다. 리안의 손에 피가 흘렀다. “괜찮아?” 소낙이 바로 티슈를 몇 장 꺼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직원에게 연고와 밴드를 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문소낙, 너는 왜 로맨스 영화 좋아해?”

“대리만족이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영화 속 주인공이 대신 이루니까.”

“대리만족으로 만족이 돼?” 직원이 연고와 밴드를 주자, 소낙은 그녀의 손에 연고를 발랐다.

“나도 그런 사랑하면 좋지. 현실적이지 않지만.”

왜 현실적이지 않은데?”

너는 그런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되도록 노력할 거야.”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두 사람은 숨소리, 체온까지 느낄 정도로 가까워졌다.

나는 모든 걸 불태우는 사랑을 할 거야. 아까 말한 로맨스 영화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사랑을 할 거라고. 두고 봐.”

소낙은 “열심히 사랑해주면 고맙지”라며 그녀의 손에 밴드를 붙여줬다. 단단한 컵을 깨뜨릴 정도로 강력한 그녀의 힘에 깜짝 놀랐지만 가볍게 넘어갔다.

 

앞으로는 데이트할 때, 밥 대신 케이크나 빵을 먹을까? 나는 좋아하고 너도 편하니까.”

해가 너울너울 질 때, 소낙은 짧은 시간을 여자친구와 식당 근처 카페에서 케이크와 커피를 먹었다. 리안은 녹차라떼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먹고, 소낙은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리안이 먹는 케이크를 살짝 빼앗아 먹었다.

속 안 느글거리냐? 이런 것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

리안은 갑자기 거북한 기운을 느꼈다. 길을 지나는 한 여자와 눈을 스치듯이 마주쳤다. 마녀는 마녀를 알아본다. 리안은 한쪽 눈만, 다른 여자는 양쪽 눈에 핏빛이 스며들고 노을이 간신히 감췄다. 불길한 느낌에 정신이 팔려 소낙이 하는 말이 점점 들리지 않았다.

내 말 듣고 있어? 이리안!” 문소낙이 그녀를 큰 소리로 부르자, 그녀는 경직해 눈을 껌벅거렸다.

미안, 잠시 멍 때렸어. 다시 얘기해 줄래?” 리안은 그이 앞에서 불길함을 애써 부정했다.

영주 여행 한 번 같이 가자고. 친구가 이사를 해서 잠깐만 도와주면 시간 남으니까.”

그래, 좋아! 나 여행 엄청 좋아해!” 리안은 작위적인 말투로 과장되게 끄덕였다.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소낙이 식당으로 돌아가고, 리안은 밤 마실 겸 홀로 자신이 사는 아파트 주변을 걸었다. 사람이 안 보일 법한 으슥한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같은 마녀인 그녀의 이모가 뱀 같이 간사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우리 리안이?”

이모는 마치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다는 것처럼 이 배경에 자연스럽게 눌러앉았다. 리안은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지만, 표정은 구겨졌다. 리안은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다. 혐오했다. 이모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 ‘우리 리안이’였어요?”

이모는 리안의 어머니와 자매처럼 친밀한 사이라 설명했지만, 리안은 믿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억에 없고 이모는 자기가 이모를 미워하는 만큼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이모는 조카를 차례차례 훑어봤다. 리안의 왼손에 낀 커플링과 오른손에 든 케이크 상자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남자친구 생겼구나. 어쩐지 얼굴이 폈더라. 결혼할 거야?”

신경 쓰지 마세요.” 이모가 리안의 뺨을 건드리자, 리안은 바로 그녀의 손을 쳐냈다. 남자친구가 사준 케이크 상자가 날아가 저절로 열렸다. 땅에 부딪힌 케이크는 산산조각 나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케이크랑 커피, 맛있니?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야. 우리에게 케이크는 세제로 젖은 스펀지 같고, 커피 같은 음료수는 화장실 맛이 나거든.”

마녀는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아무리 먹어도 그 맛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녀와 인간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은 마찬가지로 사람을 먹지만, 인간의 음식도 먹을 수 있다.

혼혈은 이래서 편하네. 순혈보다 인간인 척이 가능하니까.”

용건 없으면 돌아가세요.”

인생 선배로서 조언을 하러 온 거야.”

필요 없어요.” 리안은 그녀를 지나쳐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모는 기어코 그녀의 약점을 잡았다.

네 식인 습성, 남자친구에게 조심해. 너희 아버지도 네 식습관 못 이겨서 자살했지?”

리안은 순간 분노를 못 이겨 그녀에게 주먹을 날렸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이모는 벽으로 날아갔다. 벽에 금이 갔지만 이모는 바로 날아와 리안과 맞섰다. 격하게 싸운 끝에 리안이 패배했다. 이모는 그녀의 목을 움켜 잡아 들어올렸다.

리안은 자신의 목을 쥐는 그녀의 팔을 양손으로 세게 잡아 놓으려고 애를 썼다. 발버둥치며 이모를 수도 없이 걷어찼지만 그녀의 몸은 너무나도 강하고 단단했다. 리안은 목이 잡인 채 이모를 증오스럽게 바라봤다.

알지? 마녀는 다른 마녀만 죽일 수 있는 거. 여기서 더 세게 잡으면 목 꺾일걸?”

이모는 손가락을 하나씩 떼 리안을 떨구듯이 놓았다. 리안은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목에는 손바닥 크기만한 시퍼런 멍이 들었다.

너는 그래도 인간이랑 어울릴 수 있는 수단이 있으니까 다행이네. 오래 사랑하길 빌게.” 암만 봐도 비꼬는 말투였다.

질투하는 거예요? 본인은 그러지 못하니까?”

이모의 웃음이 싹 사라졌다. 그녀가 리안의 배를 세게 걷어 찼다. 리안은 여러 번 포물선을 그리다 굴렀다. 그녀는 쓰러진 자리에 빠르게 가 리안의 머리채를 잡았다.

질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마녀와 인간은 사랑하는 방식이 달라. 마녀는 영원히 살아서 그 사랑도 영원할 거라 착각해. 인간은? 수명처럼 사랑도 한계를 보여. 금방 식고 끝나는 순간, 새로운 사랑을 찾지. 마녀의 사랑은 비참하게 끝난다. 네 엄마처럼!”

이모는 같은 마녀이자 친한 동생이 눈물을 흘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때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그 남자는 죽을 때까지 평생 두고 싶다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 하고 싶다고. 이모는 그녀의 사랑을 이상성욕이라며 빈정댔다.

마녀는 불로불사라 백년해로 따위는 불가능하다고.’ 그 남자를 죽여버려 동생을 돌아오게 만들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중한 동생이 이렇게 기쁘게 웃으니, 이 마음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저 잘 살라고 응원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제 버릇 개 못 준다. 남자는 아내가 사람을 먹는 것을 알고 그녀의 가슴을 칼로 찌른 뒤 도망쳤다. 마녀가 인간에게 죽을 리는 없지만, 동생은 실연을 못 이겨 정신이 나갔다. 죽여 달라고 울부짖었다. 하루 종일 비명을 지르거나 넋이 나갔다. 이모는 친동생이나 다름없던 그녀를 목 졸라 죽였다. 동생을 버린 남자를 잡아서 족치고 찢어버리겠다고 사방을 헤맸다.

긴 시간(마녀 입장에서는 찰나지만)이 지나서야 두 사람 사이에 딸이 태어났으며, 남자도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리안은 소중한 동생의 딸이다. 동시에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남자의 딸이다. 이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겠지만, 사랑할 수는 없었다.

충고할게. 겨우 인간 남자 때문에 네 인생을 낭비하지 마. 귀찮은 일만 많아지니까. 다른 마녀들을 조심해. 마녀와 인간이 다른 존재라지만,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 알지?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걸 만만하거나 비슷해 보이는 놈이 누리면…배알 꼬이거든.”

그 놈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해서 내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힘을 키워. 남자친구가 ‘살해’당하지 않게 조심해.” 이모는 그녀의 머리채로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쓰러진 그녀 곁에 날카로운 단도 하나를 던지고, 동화 속 마녀처럼 킬킬거리며 모습을 감췄다.

명심해. 우리는 존재 자체가 인간에게 민폐야.”

리안은 만신창이가 된 채 붉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빌어먹을 년, 언제나 폭력으로 날 가르치려 들지.’ 힘이 필요하다 느껴 베란다로 들어가 김치냉장고에서 피가 든 병을 찾았다. 그런데 냉장고에는 피가 전혀 없었다. 뭐라도 먹을 게 있나 김치냉장고를 샅샅이 뒤졌지만, 사람을 전부 먹고 보관하면서 생긴 비린내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한 동안 사냥하는 걸 잊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조건만남 앱으로 들어가 사냥감을 찾았다. 급하게 잡은 조건만남은 소낙과 가기로 한 여행 날짜와 겹쳤다. 생존이 앞서 그에게 갑자기 일 때문에 스케줄이 바뀌었다는 카톡을 보냈다. 그녀의 한쪽 눈에 붉은 이채가 감돌았다.

 

리안은 오랜만에 아버지 꿈을 꿨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 그녀는 신기한 광경을 봤다. 교문에서는 친구의 아버지가 친구를 보자마자 양팔로 들어올려 볼에 뽀뽀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아빠, 하지 마. 창피하단 말이야.”

우리 딸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렇지!”

그 날은 어버이날이라서 아이들은 색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들고 나왔다. 친구는 아버지에게 직접 만든 카네이션을 선물한 뒤, 양팔로 하트를 그렸다.

아빠, 사랑해.”

아빠도 우리 딸, 사랑해~!”

누군가가 이리도 부럽기는 처음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리안의 가슴을 간질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온화했지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원래라면 집에서 아버지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소리를 빨리 듣고 싶어 아버지가 일하는 병원으로 서둘렀다. 병원에 들어가 까치발로 진료실 창문을 힐끔 들여다봤다. 아버지가 아주머니 한 명을 진찰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환자들에게 친절하단 소문이 자자했다. 금상첨화로 얼굴까지 잘생겨, 일부 여자들은 애아빠인 걸 알면서도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는 딸의 자랑거리였다. 리안은 병원으로 들어가 아버지가 일하는 진료실에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환자 분, 잠시만요.”

아빠.” 리안은 문을 열고 그 틈 사이에 수줍게 들어서자, 아버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아빠 일할 때는 오지 말라니까."

"의사 선생님 딸이예요? 어디 보자. 어머나, 아빠 닮아 갖고 아주 그냥 눈이 크고 이쁘네!" 환자로 온 아주머니는 예쁘장한 여자아이에게 호감과 호기심이 갔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리안입니다."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푹 숙였다. 착한 아이는 인사를 잘해야 하니까. 요조숙녀처럼 보이려고 원피스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사뿐히 들어올렸다. 아주머니는 이 아이가 참으로 기특해 보였다.

"인사도 잘 하네. 나중에 크면 엄청 이쁜 아가씨 되겠다. 아빠 같이 좋은 남자에게 시집가고."

"고맙습니다." 리안이 웃으며 아주머니를 보았다. 사글사글하고 깜찍한 미소에 누구나 풍덩 빠질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의사에게 딸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선생님, 다들 아들아들 한다지만 이런 딸을 둔 것도 복입니다. 복!"

"감사합니다." 의사는 딸을 무표정으로 한참 바라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어딘가 작위적인 미소였다. 곧바로 간호사가 호출돼 들어왔다. 아버지는 딸에게 집에 가라고 보챘지만, 딸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빠와 있고 싶어요.” 딸이 칭얼대자 아버지는 미간을 일그러뜨렸지만, 결국 한 수 접었다.

제 딸인데 일단 밖에서 책 좀 읽으라고 둬요.” 리안은 간호사를 따라 바깥으로 나섰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나서야 아버지가 바깥으로 나와 책을 읽는 리안을 불렀다.

집 가서 저녁 먹자.” 리안은 아버지와 있을 수 있다는 기쁨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리안은 종종걸음을 빨리 해 보폭이 큰 아버지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한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았지만, 아버지는 손을 슬그머니 떨어뜨렸다. 어린 리안은 어쩔 줄 모르다, 비장의 수로 주머니에 카네이션 두 송이를 꺼냈다.

이거 어버이날 선물이예요. 아빠에게 카네이션 달아줘도 돼요?”

그래.” 리안은 아빠의 셔츠에 카네이션을 달았다. 갈 곳 잃은 나머지 카네이션 한 송이는 리안이 자기 옷에 끼웠다. 두 부녀는 무심하게 계속 걸었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없었다. 어린 딸은 참다못해 아버지 앞에 달려들어 양팔을 벌렸다.

안아주세요.”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고 리안이를 들어올렸다. 리안은 친구가 한 것처럼 양팔로 아버지의 목을 감싸 안고 볼에 키스했다.

나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아빠, 사랑해!”

"…그래."

이상하네? 친구 아빠는 '나도 사랑한다'면서 뽀뽀해주던데?’ 여기서 끝낼 이리안이 아니었다. 그녀의 잔망함은 '천성'이니까.

"아빠도 나 사랑해?" 리안은 아빠 앞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아빠도 리안이(또는 우리 딸) 사랑해"라고 하면 그만이다.

"...노력할게." 아버지는 끝내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나쁜 꿈은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있다는 뜻이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리안은 급하게 잡은 조건만남 상대와 술을 좀 먹고 호텔로 들어가기 직전, 소낙을 만났다. 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여기에 왜 온 거야?”

전에 말했잖아. 친구 이사 도와준다고.”

리안은 이제야 영주 여행을 취소한 것을 기억했다. 상대를 영주에서 만난 게 화근이었다. 소낙도 이 사태가 청천벽력 같았다. 약속을 취소한 것도 아쉽지만 급한 일정이 있다고 생각해 이해했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심호흡으로 애써 진정했다. 조건만남 상대는 이도 저도 못하다 발길을 떠나 뜻하지 않게 목숨을 구했다. 그렇게 단 둘이 남았다.

언제부터 이런 짓 했어? 몸 파는 거.”

파는 거 아니야.” 소낙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직장에서 만나 불륜 관계를 맺던 두 사람이 호텔로 들어갔다는 게 들통나면,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많이 한다. 술에 많이 취해서 각자 휴식을 취했다. 일로 얘기할 게 있어서 들어갔다. 리안과는 아직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자친구 아니던가.

그럼 호텔은 왜 가실까? 이상한 변명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리안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왜 말을 안 하려고 들어?” 그가 재촉하자 절벽에 내몰린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내연남이나, 몸 파는 상대가 아니라 도시락이라고 말할까? 그녀는 어제 꾼 악몽과 이모가 말해준 게 떠올랐다. ‘마녀는 존재 자체가 인간에게 민폐다.’ 그녀는 영혼이 나가 실로 어설픈 답을 내놨다.

“…잡아먹으려고.”

뭐라고?”

잡아먹으려고 데려온 거야.”

거짓말은 아니니까.’ 소낙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홍소를 터뜨렸다.

그래, 잡아먹는 거. 틀린 말은 아니네. 서로 그 짓 하는 것도 잡아먹는 거니까.”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그의 말에 리안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그게 아니라…!”

한동안 얘기하지 말자.” 하나밖에 없는 여자친구가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그를 봤다. ‘잘못한 건 넌데, 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소낙은 갑갑한 마음을 안고 즉각 자리를 떠났다. 리안은 석상처럼 굳어진 채 그를 우두커니 바라봤다.

 

고기가 들어간 음식 맛은 다시 동료들에게 부탁했다. 음식이 전보다 못하다는 볼멘 소리가 좀 나왔다. 그 때 문이 열려 리안이 들어왔다. 그녀는 하얀 원피스를 입어 이름처럼 백합 한 송이처럼 청순해 보였다. 리안이 뻔뻔한 척 자리에 앉아도 소낙은 무시했다.

형, 여자친구 분 왔어요. 리안 씨.”

메뉴판 주고 주문받아.” 결국 종업원 한 명이 리안에게 주문을 받았다. 소낙은 잡채밥을 만들어서 종업원을 통해 전했다. 리안은 맛있게 먹는 시늉을 보였지만, 소낙은 그녀를 ‘없는 취급’했다.

리안은 이를 참지 못해 소낙에게 계산이라는 핑계로 들이댔다. 소낙은 돈을 받은 다음, ‘감사합니다’ 한 마디만 남긴 채 바로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가슴이 뻥 뚫린 표정으로 그를 보다 화풀이로 문을 세게 닫으며 나갔다. 사람들이 문을 보며 수군거리자, 소낙은 남몰래 주먹으로 가슴을 때렸다.

소낙이 담배를 피러 나갈 때, 하늘에는 구멍이 뚫렸는지 소나기가 세차게 떨어졌다. 숨막히는 기분을 담배 연기와 빨리 토해내고 싶어 검은 우산을 쓰고 나갔다. 바깥에 나가자 리안이 비를 맞고 있는 게 보였다. 머리카락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녀를 가녀리게 만들었다.

미쳤어?” 소낙은 그녀에게 다급히 우산을 씌웠다. 뒤돌아본 리안의 두 눈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바로 껴안고 흐느꼈다. 커다란 눈망울에 툭툭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녀가 품에 안겨들자, 소낙의 옷도 젖어갔다. 젖어가는 옷처럼 그의 마음도 점점 무거워졌다.

내 사정 말하면 네가 날 싫어할 거야. 아니, 혐오할 거야! 넘어가 줘. 진짜 미안해…”

말해. 솔직하게.” 리안은 망연하게 소낙을 바라보다 바로 입을 맞췄다. “뭐하는 짓이야!” 소낙은 철벽같이 그녀를 밀어냈다. 리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항의했다.

왜 계속 이것저것 알려 드는데?”

사랑하니까 알아야지.”

난 사랑하니까 숨기는 거야.’ 이 말을 토해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어려운 게 있으면 말하던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네가 도울 수 있는 게 아니면?”

뭔지 알아야 판단이라도 할 거 아냐?”

도울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소낙은 답답한 마음에 담뱃갑을 꺼내다 도로 집어넣었다. 검은 우산 속에서 늪에 빠진 것 같은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언제까지 내가 너 맞춰줘야 돼?”

뭐?”

나는 내 이야기 다 털었어. 위로해주니까 고마웠고. 근데 너는 네 이야기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어. 고민 상담도 안 하고 계속 숨기려 드니까, 내가 남자친구가 맞는지 의문부터 든다.”

리안은 이제까지 그에게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로만 보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어긋한 모습은 안 보이고 싶었다. 이게 약점으로 돌아올 줄이야.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비밀을 감추는 데에만 정신을 쏟은 나머지 비수를 꽂고 말았다.

나도 네 얘기 많이 들어주고 맞춰 줬잖아. 고기 못 먹는 거!”

리안은 말을 잘못한 것을 알고 한 손으로 입을 급하게 막았지만 때는 늦었다. 소낙도 자신의 콤플렉스를 들먹인 그녀에게 가슴에 대못이 박힌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마음이 가라앉고, 표정은 건조해졌다.

그래, 나 맞춰주느라 고생 많았네. 그동안 미안했다.”

말실수한 거야. 미안해. 문소낙!” 소낙은 펼친 우산을 그녀에게 떠넘긴 뒤, 바깥으로 도망쳤다. 비를 맞는 그가 실로 애처로웠다. 리안이 따라잡아 그의 팔을 잡았지만 힘없이 놓았다. 두 사람의 꼴은 실로 처연했다.

“…가. 이제 지친다.” 온몸이 젖은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멀어져갔다.

 

밤이 되어 소낙이 다시 바깥으로 가자, 하늘은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구름 한 점도 없었다. 그는 담배를 피며 리안의 말을 곱씹었다. ‘말 못할 사정이 있다. 이걸 알면 나를 혐오할 거다.’ 뭔 사정이길래 이리도 절박하게 말을 했는지 고민됐다.

돈이 없나? 땅값 비싼 서울 중 좋은 아파트에서 지내는데?’ 소낙은 리안의 상황을 추측했다. 호화로운 집 하나 사겠다고 돈을 헤프게 낭비했다면? 사치 때문에 사채를 썼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사채가 끼는 순간, 소낙도 위험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려운 점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 어디까지 내가 도울 수 있을까? 발을 동동 굴렸다.

설마 사람을 죽인 건 아니겠지?’ 소낙이 숨을 크게 들이 쉬어 담배 연기를 토했다. 살인을 저질렀다면, 자수를 권하는 게 맞겠다. 사식이라도 건네면서 여기까지 이르게 된 사연을 들으면 된다…지만, 그는 이런 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속이 탔다.

사랑을 위해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관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그의 눈에 밟혔다.

소낙은 담뱃불이 손가락에 닿는 것을 깜빡해 하마터면 화상을 입을 뻔했다. 허둥지둥 담뱃불을 떨어뜨려 밟고 식당으로 가자,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식탁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여자 한 명이었다. 이리안인가 싶었지만, 실루엣이 달랐다.

영업 끝났습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내일 다시 오세요. 문 닫습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여자는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상황과 질식할 것 같은 통증에 소낙이 여자의 팔을 억지로 당겼지만, 여자의 힘은 소낙보다 강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남은 이성을 부여잡아 곁에 있는 의자 하나를 한 손으로 여자에게 던져 시간을 벌었다.

소낙이 주방으로 달아나자, 여자도 빠르게 따라잡았다. 그는 식칼과 커다란 냄비를 들거나 던져 여자에게 필사적으로 맞섰다. 요리사 그 중에서 중화요리 쪽은 노동 강도가 엄청나다. 소낙 스스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몸을 단련했다. 때문에 강한 사람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아무리 도마나 냄비를 방패 삼아도 찌그러지거나 박살 났다. 소낙은 그녀가 인간처럼 생겼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느꼈다. 식칼도 썼지만 여자는 가볍게 막았다. 싸우고 싸우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소낙은 절박한 마음에 식칼로 그녀의 목을 푹, 찔렀다. 여자의 목에 피가 쏟아지자, 사람을 죽였다는 충격에 칼을 든 손이 떨리고 정신이 까마득했다. 얼마 안 가 그는 경악했다. 여자의 목에 있는 상처는 작아지더니 사라졌다.

여자는 그가 든 식칼을 맨손으로 구부렸다. 기능을 잃은 칼을 던지고 손짓 한 번으로 그를 날려버렸다. 벽에 부딪힌 소낙의 머리에 피가 흘렀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목을 세게 쥐어 들어올렸다. 소낙은 팔을 쓸 힘마저 다 빠졌다. 여자는 속수무책인 그를 보고 조소했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올 법한 말이 나왔다.

잘생겨서 먹기는 아깝다. 보니까 눈이 제일 예쁘네? 눈부터 파먹어야지.”

소낙은 무력감을 느꼈다. 어린 시절 고기를 먹으면 토한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목을 움켜쥐며 고기를 억지로 먹이던 때가 떠올랐다. 그 때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아들을 지켜줬다. 어머니를 보면서 소낙은 강한 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노력해서 많이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지금의 그는 덩치만 큰, 연약하고 어린 아이였다.

도와줘.’

소낙의 목이 찌그러지고 몸에 힘이 빠지는 순간, 누군가가 한 발로 여자를 세게 내리쳤다. 이리안이었다. 그녀는 쓰러진 여자를 발로 짓밟고 유린했다. 여자가 무력해지는 사이에 소낙은 손에서 떨어져 벽에 기댄 채 털썩 쓰러졌다. 리안은 여자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검지와 중지를 단숨에 부러뜨렸다.

아아아아악!” 손가락이 꺾이자 여자는 단말마를 질렀다. 리안의 입꼬리가 간드러지게 올라갔다. 천진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 무구하게 폭력을 즐겼다.

닥쳐. 돼지 멱 따는 소리 나니까.”

이 망할 년이!” 나머지 손가락을 꺾으려던 차, 여자가 주먹을 가격했다. 리안은 얼굴을 맞고 날아가 벽에 부딪혔지만 용수철처럼 일어나 반격했다. 두 사람은 으르렁 대다 서로의 팔을 짐승처럼 문 채 돌고 돌았다. 둘 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마녀라지만, 싸움 앞에서는 추하고 처량했다.

너, 그 카페 근처에서 만난 년이지?” 두 여자는 하나가 되어 바닥을 구르고 또 굴렀다. 힘은 여자가 압도적으로 강했다. 여자는 리안을 깔아뭉갰다. 하지만 여기서 질 이리안이 아니었다.

마녀는 마녀만 죽일 수 있다. 그리고…마녀가 만든 도구로도 죽일 수 있지?”

리안은 품에서 날카로운 단도 하나를 꺼내 그녀의 어깨 부근을 찔렀다. 이모가 그녀에게 준 검이었다. 마녀들은 서열에서 이기려고 인간의 남은 뼈와 주술로 무기를 만들었다. 그걸 다른 마녀나 인간이 어부지리로 얻기도 했다.

인간들은 그 도구를‘마녀의 망치’라 부르더라고?”

이걸로 우세가 뒤집혔다. 리안이 다시 한 번 단도를 몸에 박자,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이 때다 싶어 그녀의 등을 짓밟았다. 그 등 위에 앉아 손가락을 하나씩 꺾고, 손목을 꺾었다. 까드득, 까드득. 하나하나 꺾을 때마다 여자는 소리쳤다. 하도 지른 탓에 나중에는 쉰 소리만 남았다.

내가 네놈들 이기려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알아?”

혼혈은 순혈보다 수가 적고 힘이 약하다. 인간에게는 순혈이나 혼혈이나 똑 같은 식인 마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에, 리안은 어쩔 수 없이 순혈과 어울려야 했다. 마녀와 어울리는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이모라는 놈은 아버지를 증오한다고 그 딸인 자신을 화풀이로 폭행했다.

다른 순혈들도 그녀 같은 혼혈을‘여신에게 선택받지 못한 잡종’이라며 깔보고 따돌렸다(리안은 꼴에 신앙이 있다며 아니꼬웠다). 마녀들을 이겨 먹겠다고, 리안은 독하게 힘을 키웠다. 마녀는 힘에 따라 암묵적인 서열이 있다. 리안은 다른 마녀를 짓밟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모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마녀와 힘을 견줄 수 있게 됐다. 힘이 아닌 ‘지혜’로 말이다.

여자는 마녀 사이에서 리안이 어떤 놈인지 익히 들었다. 직접 싸우기는 힘들다 느껴 그녀의 소중한 사람을 해치는 걸로 방향을 돌렸다. 직접 싸울 때도 생각보다 힘이 약해 우습게 보다 이렇게 봉변을 당했다. 아픔을 못 이겨 그녀의 속마음과 울분이 터져 나왔다.

네 년이야말로…나보다 낫잖아. 평범하게 먹고, 평범하게 인간인 척할 수 있잖아!”

뭐?”순혈은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여자는 인간과 어울리고 싶어 무진장 애를 썼다. 인간의 음식을 겉으로 이해하기 위해 온갖 먹거리 책을 섭렵했다. 인간의 음식을 억지로 먹고 삼키는 법까지 익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마녀라는 것이 들통나 사람들에게 살해당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연인도 친구도 무섭다고 고발하거나 도망쳤다.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왔다. 혼혈은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이거 하나로도 인간과 어울리는데 순혈보다 훨씬 유리해진다.

밥은 약속을 넘어 모든 사람들의 삶을 내포했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며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의지해왔다. 어색한 사이도 밥을 먹으면 한껏 풀렸다. 밥 자체가 일상이고 인생이라 누군가와 헤어질 때도 빈말이라도 ‘밥 한 번 먹자’고 말했다. 이 평범한 일상이 마녀가 인간과 어울리기 힘든 이유였다.

한 번은 자일리톨 껌을 씹었다. 껌 하나를 꺼내자, 위로를 목적으로 한 인생 문구가 들어있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따라하려 하지 말아요.’ 인간들에게 자일리톨 껌은 청량하고 상쾌한 맛이 난다고 한다.

한 입 씹는 순간, 아스팔트 위에 있는 구정물 맛이 났다. 역겨운 맛을 참으며 씹자 타이어 고무 맛으로 변했다. 껌을 가래침처럼 불량하게 뱉었다. 공감할 수 없는 인생 문구도 아스팔트 길에 있는 웅덩이에 버렸다.

씨발, 왜 인간들은, 한국 사람들은 꼭 밥부터 먹자고 지랄일까?”

리안은 여자의 말 한마디에 아버지와 있던 마지막 시간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시뻘건 얼굴로 비틀거렸고 단정했던 옷차림도 어수선했다. 이 와중에도 부엌으로 가 딸과의 식사시간을 기계적으로 지켰다. 냉장고에 남은 반찬들을 꺼내 데운 뒤, 식탁에 놓았다. 두 부녀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아버지는 깨작깨작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어린 리안은 새끼 강아지처럼 떨었다.

환자가 죽었어.” 아버지가 말했다. “심정지가 와서 입원했는데 너무 늦은 거야. 죽은 환자 남편이 내가 죽였다고 난리를 쳤어. 뭐라고 한지 아니? 살린 놈보다 죽인 놈이 더 많은 새끼라고 했어.”

아버지가 이렇게 말이 많기는 처음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처음이었다.

맞는 말이야. 돌이켜보니 살린 놈보다 죽인 놈이 더 많았지.” 아버지는 낄낄거리다 자리를 떴다. 이대로 아버지를 보내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영원히 떠날 것 같았다. “아빠.” 리안은 덜덜 떨면서 아버지를 붙잡았다.

철썩! 아버지가 리안의 뺨을 때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뺨이 얼얼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도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딸을 때린 손을 얼떨떨하게 보다 자리로 돌아갔다.

리안아.” 아버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공허한 표정으로 있다 딸에게 진심을 털었다.

왜 내가 식사시간은 꼭 지켰는지 아니? 밥 먹을 때만큼은, 네가 평범한 딸로 보였어.” 그의 눈에는 죄책감보다 평온함이 비쳤다.

미안하다, 아빠가 약해서.” 다음 날 아버지는 부엌에서 목을 맸다. 어린 꼬마는 아버지를 근처에 둔 채 따뜻한 밥과 식은 반찬을 먹었다. 설거지도 처음 했다. 작은 몸집에 설거지를 하니 물과 거품이 튀었다. 그렇게 세 끼를 혼자서 어설프게 해치웠다. 아버지 자리에 있는 따스한 밥은 서서히 식어갔다. 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처럼 밥을 먹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방에 들어가 잠들기 직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보니 젊은 여인 한 명이 아버지의 시체를 먹고 있었다. 리안은 잽싸게 달려들어 여인을 꽉 잡아당겼다. 아버지를 사이로 둔 두 사람의 줄다리기는 곧 몸싸움으로 번졌다.

뭐야, 이 꼬맹이는? 이거 안 놔!”

먹지 마! 우리 아빠야, 우리 아빠란 말이야!” 리안은 울면서 양팔로 여인의 몸을 부여잡았다. 여인은 어린 꼬마의 엄청난 힘에 놀라다, 양쪽에 붉은 눈을 비추며 화색을 보였다.

어머, 꼬마야. 너도 마녀니?” 리안은 자신의 몸에서 어렴풋이 나는 비린내의 정체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온몸이 피범벅이 됐고 그 주변에는 자신이 먹어 치운 시체의 향연과 환영이 보였다.

리안이 가장 먼저 먹은 사람은 그녀의 집에 놀러 온 초등학교 친구였다. 리안은 친구였던 붉은 무언가를 입에 넣어 씹고 있었다. 아버지는 친구를 사귄 딸이 반가워 케이크와 주스, 사탕을 주러 방에 들어가자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린 식인종에게 살은 케이크, 피는 주스, 뼈는 사탕이었다. 리안은 부엌에서 몰래 과자를 꺼내 먹다가 들통난 표정으로 아버지를 흘깃 바라봤다.

아내와 다르게 리안은 피가 이어진 자식이어서 죽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팔을 베어 피만 먹였다. 피로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그걸로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딸은 자라면 자랄수록 사람고기를 요구했다. 그는 이사와 전근을 반복하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찾아 일주일에 한 번씩 딸에게 바쳤다.

딸을 평범한 사람으로 보려고 머릿속에 식사시간을 알람처럼 입력했지만, 한계에 다다랐다. 딸의 뺨을 세게 친 뒤, 그의 머릿속에는 삼단논법이 지나갔을 것이다. 딸을 때린 아버지는 아버지 자격이 없다. 나는 방금 딸을 때렸다.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 자격이 없다. 아버지 역할에서 해방됐다.

그는 더 이상 부성애라는 신앙을 섬길 수 없었다.

 

리안은 내면에서 당기고 당겨도 버티던 악기의 현이 툭, 하고 끊어진 소리가 들렸다. 망할 이모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누리지 못한 걸 만만한 자가 누리면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안달이다. 당사자가 일상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사는지 모르며, 안다 해도 자기가 더 불행하다고 징징거린다. 더욱이 남의 소중한 사람을 해코지하려 드는 점에서 이미 끝이다.

아버지의 자살을 계기로 리안에게는 영원한 꿈이 생겼다. 그녀의 꿈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사는 것. 방해물은 전부 다 부순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리안은 양손에 단도를 들어 여자의 목을 관통했다. 버둥거리던 머리가 너절하게 무너졌다. 소동이 가라앉자마자 쓰러진 남자친구에게 달려가 숨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껴안았다. 금상첨화로 이번 주는 사냥할 필요가 없겠다. 사냥감이 알아서 찾아와 죽어줬으니까. 리안은 마녀의 시체를 차 트렁크 안에 넣고 병원과 경찰에 신고했다.

소낙은 치료를 받아 살아났고, 리안은 계속해서 병문 안을 하며 소낙을 돌봤다. 식당은 소동 한 번으로 아수라장이 된 탓에 한동안 운영은 쉬고 수리에 집중해야 했다. 두 사람이 경찰에서 잘 모르겠다는 진술만을 남겨 사건은 미제로 끝났다.

두 사람은 다시 좋은 사이를 이어갔다. 리안은 자신의 진실을 말하기를 계속 미뤘다. 소낙도 그녀에게 더 이상 진실을 캐묻지 않았다.

 

소낙은 처음으로 리안의 집에 초대받았다. 인터폰을 누르고 들어간 뒤, 문 앞에 서자마자 그녀가 문을 열어 그를 반겼다. 소낙은 백합 꽃다발을 한 아름 든 채 하얀 옷을 입은 리안에게 안겼다.

뭐하고 있었어?”

방금 출판사에 시놉시스 보냈지.”

또 미스터리야?”

판타지 로맨스. 마녀로 추락한 여신 이야기야. 찾아보니까 마녀는 먼 옛날에 여신이거나 신을 이어주는 존재였대. 러시아에 바바 야가라고 마법으로 사람을 돕지만 동시에 잡아먹는 마녀도 어쩌면 교회가 들어와서 몰락한 여신일 수 있다더라. 모르겠다고? 우리 소낙이 인문학 소양이 부족하네~.”

리안이 소낙의 머리를 강아지 만지듯 쓰다듬자, 소낙은 ‘그거 몰라도 인생 안 망한다’고 대꾸했다. 소낙은 그녀와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로맨스가 좋으면 직접 써 보는 건 어떻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거랑 잘 하는 거는 다르다’며 착잡하게 웃었다. 그런데 로맨스를 쓴다니, 의외였다.

뭐 먹을까? 나 와인이랑 과일 있는데, 갖고 올게. 내가 쓴 글 읽고 재미있는지 확인 좀 해줘.”

리안은 부엌으로 토끼처럼 깡총깡총 달려갔다. 소낙은 거실 탁자 위에 놓인 노트북의 글귀를 살폈다.

옛날 옛날에, 매우 아름답고 강하지만 성미가 까다로운 신이 살고 있었다. 신은 인간이 주는 선물을 좋아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한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사람을 제단에 올려 칼로 심장을 꺼내 불에 태워 신에게 바쳤다.

어느 날, 신은 다시 변덕스러운 성미를 드러냈다. 선물을 바칠 때 그 사랑을 그 진심을 증명할 수 있냐고 시험했다.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신에게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우리가 제단이 되자. 사람을 먹어서 신에게 바치자. 식인으로 사랑을 증명한 사람들을 본 신은 만족감을 보이고, 그들을 사람 먹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들은 강하다. 대신 그 강한 힘을 대가로 사람을 먹어서 제물로 바쳐야 한다.’

소낙이 만든 요리를 먹여준 것처럼, 리안도 자신이 쓴 글을 그에게 보였다. 책을 잘 모르기에 평소대로 읽었다면 아이디어가 참신하거나 재밌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한 대중으로서 그녀의 이야기는 실제로 사람을 끄는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런 식으로 자기 존재를 알아본 건가?’ 열기가 차오를 것 같은 불그스름한 집에 있음에도, 그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시간을 되돌려 두 여자가 아귀다툼을 벌이는 동안, 소낙은 잠시 깨어나 눈을 가늘게 떴다. 소동에 휘말리면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먹는다면 눈부터 먹겠다고.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부럽다고.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그는 ‘그녀가 사람을 먹는 존재다’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심장이 차가운 철창에 갇힌 것 같았다.

잡아먹으려고 만났다.’ 소낙은 이 말이 성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했지, 사람 자체를 씹고 삼킨다는 뜻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이리안이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면, 장난치지 말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

소낙은 수사를 하는 형사처럼 집 주변을 둘러봤다. 베란다로 들어가다 공포에 질려 얼어붙었다. 하얀 김치 냉장고에 피와 비슷한 붉은 액체가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심장소리가 커지고 그의 손과 호흡이 떨렸다. 꼭 동화 ‘푸른 수염’ 같지 않던가? 이 냉장고 안에 머리나 손발이 있을 수도 있다. 문을 열려는 순간…

뭐해?” 리안이 그의 옆에 나타났다. 소낙이 흠칫 놀라 손잡이를 스리슬쩍 놓았다. 그녀가 자신을 오랫동안 직시하자, 옆을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하얀 냉장고에 묻은 붉은 액체만이 눈에 보였다. 리안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쿵쾅, 쿵쾅. 심장이 조이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식은 땀이 흘렀다.

그녀가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병 하나가 쓰러져 붉은 와인을 쏟고 있었다.

어떡해. 와인 쏟아졌어!” 리안이 울상을 지으며 그를 제치고 와인 병을 세웠다. 소낙은 긴장이 확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베란다에는 왜 왔어?”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집 구경도 못 하냐?”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소낙은 아슬아슬하게 받아 쳤다. 리안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와인 병을 봤다. 와인은 반 정도 남아있었다. “이거라도 먹을까? 좀 남았는데. 술 약해?”

얼마 안 가 두 사람은 와인이 든 잔으로 건배한 뒤 쭉 들이켰다. 소낙은 어질어질했지만 리안은 이상할 정도로 멀쩡했다. 그는 물이라도 마시려고 일어섰지만, 바닥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건장한 그를 리안이 가볍게 받쳤다. 그녀의 엄청난 힘이 손에 쥔 내장을 짜부라뜨릴 것 같았다.

괜찮아?”

좀…많이 취했나 봐.” 술을 많이 마신 게 화근이었다. 붉고 선명한 그녀의 집에 그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마음이라도 진정시키려고 자리로 돌아가 담배를 폈다. 리안도 담배를 꺼내 전처럼 그의 담배에 키스하듯 맞붙였다. 야릇한 담배 키스와 안개 같은 담배 연기가 그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주변이 다 붉은색, 붉은색이야.”

내가 붉은색 좋아하니까.”

붉은색, 예쁘지.” 소낙은 ‘정육점 같다’고 말하려는 것을 강제로 삼켰다. 하지만 붉은 인테리어 때문에 그녀의 하얀 옷마저 붉은색으로 보였다. 마치 피를 묻혀 하얀 옷을 붉게 물들인 것 같았다. 리안과 혀를 넣고 체액을 공유하며 입맞췄다. 달콤한 독 같은 키스에 숨이 막혔다.

사실 리안은 멀리 떨어진 작은 집 하나를 얼마 전에 구했다. 남자친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새로운 창고를 준비한 것이다. 처음에만 좀 불편했지, 나중에는 ‘왜 이런 방법을 진작 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편리하고 편안했다. 앞으로 그에게 이 주소를 말할 일은 없을 것이다.

소낙은 의혹만 있을 뿐,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굳이 증거를 찾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 집에 아니, 앞으로도 증거가 영원히 안 나타나기를 절실히, 절박하게 기도했다. 확실히 보는 순간, 인간으로서 선을 넘을 것 같았다.

내가 못 본 거면 아닌 거야.’ 그녀를 껴안으며 그의 큼지막한 눈에 서늘한 광기가 들어섰다. 리안은 천천히 그의 상의를 벗겨 몸을 매만지더니, 뱀파이어처럼 어깨와 목 사이를 키스하고 깨물었다.

잡아먹고 싶어?” 소낙이 장난스레 물었다. 리안은 잠시 정색하다 말괄량이처럼 짓궂게 웃었다.

응, 먹고 싶어.” 소낙도 그녀의 하얀 옷을 벗겼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입 맞춘 채 사랑을 갈구했다.

나는 왜 이 여자를 놓을 수 없는 걸까?’ 어쩌면 리안이 자신과 아버지를 겹쳐본 것처럼, 자신도 그녀를 어머니와 겹쳐보는 걸 수도 있다. 사람은 어차피 섹스하고 싶은 어머니 또는 아버지를 연인이나 배우자로 바란다 하지 않던가? 이게 그 오이디푸스나 엘렉트라 콤플렉스라 하던가. 그녀가 언제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그는 지금도 리안이 사랑스럽고 애틋했다. 그의 마음속에 그녀가 ‘무섭다’ ‘예쁘다’라는 양가적인 감정이 갈팡질팡했다. 붉은 벽지, 붉은 조명, 붉은 침대, 붉은 피어싱, 붉은 그녀. 온통 붉은색, 붉은색이야. 뭐라도 입에 넣고 싶고, 몸과 마음이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린다. 붉은색이 식욕과 성욕을 돋군다고 한다. 다 붉은색 탓이라 하고 모든 몸과 마음을 그녀에게 맡기자. 소낙은 스스로를 세뇌했다.

사랑해.” 두 사람의 숨이 거칠어지고 침대에서 몸을 섞기 시작했다. 요리와 섹스의 공통점은 한 곳에만 집중해 다른 잡념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만큼은 어떤 고민도 할 필요 없이 짐승처럼 본능에만 충실하고 서로를 탐닉하면 된다.

붉은 빛 때문에 두 나신이 마치 서로의 생살을 뜯어먹으며 피로 물드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절정에 다다라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났다. 거사가 끝나자 그는 마약을 한 것처럼 기분이 풀어졌다. 온몸에 땀이 뻘뻘 흘렀다. 그녀가 하도 깨문 탓에 그의 몸에 울혈이 좀 올라왔다.

전에 우리 여행 못 갔잖아. 다른 데 여행 한 번 알아볼까?”

이불속에 리안이 소낙의 팔베개에 누우며 물었다. 마침 소낙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만약, 만약에 증거를 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낙은 여우처럼 웃는 그녀를 양팔로 안고, 쾌감과 괴로움이 섞인 채 미소 지었다.

천천히 생각해 볼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完-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060 단편 카페 플루이드1 쟁뉴 2022.10.27 0
2059 단편 카페 르상티망2 scholasty 2022.10.18 0
2058 단편 최종악마의 최후 니그라토 2022.10.13 0
2057 단편 CHARACTER1 푸른발 2022.09.30 1
2056 단편 토끼와 가짜 달 거지깽깽이 2022.09.19 0
2055 단편 수박 거지깽깽이 2022.09.19 0
2054 단편 위(胃)의 붕괴 배추13잔 2022.09.17 0
2053 단편 모험은 영원히 헤이나 2022.09.13 0
2052 단편 찬이라고 불린 날들2 김성호 2022.09.12 1
2051 단편 어느 Z의 사랑4 사피엔스 2022.09.07 2
2050 단편 천하에 소용없는 노력과 망한 인생 대혐수 2022.09.03 4
2049 단편 언니 푸른발 2022.08.31 0
2048 단편 목마의 뱃가죽을 가르면 사피엔스 2022.08.29 0
2047 단편 여전히 인간이 되기에는 멀었다 헤이나 2022.08.28 0
2046 단편 네버마인드, 지구2 헤이나 2022.08.28 0
2045 단편 만다린 치킨1 도우너 2022.08.25 0
2044 단편 취소선 둘째5 서애라자도 2022.08.24 1
2043 단편 모의 꿈 김성호 2022.08.17 0
2042 단편 오래된 거주민 반야 2022.08.13 0
2041 단편 가슴 가득, 최고의 선물2 사피엔스 2022.07.31 2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