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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육식동물들

2023.04.27 22:5804.27

그는 차 안에 남아 주변을 살폈다. 특별히 보이는 건 없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새소리와 시냇물 소리,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이곳은 그 어디보다 안전한 곳이었다. 누군가 잠복해 있을 리 없었다. 습관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직업병이었다. 아마 회사 동료들도 이런 식의 경계를 쉬지 않고 할 것이다.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장시간 운전을 해서 허리며 다리가 뻐근했다. 그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며 산 정상과 계곡을 살폈다. 당연하게도 특별히 눈에 띠는 건 없었다.

트렁크를 열고 짐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가방에는 책 몇 권이 들어 있었고 이곳에 오기 전 들렀던 시내의 마트에서 산 먹을거리가 들어 있었다. 계곡이 조금만 컸어도 낚시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들를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지점도 있었다.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한 곳이었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 낚시를 하기 좋았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싫어했다. 파도 소리가 거칠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그보다 무질서한 걸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산과 계곡이 좋았다. 오두막이 좋았다. 이곳의 냄새―풀냄새와 흙냄새, 물 냄새가 뒤엉킨 전원의 냄새가 좋았다. 모든 게 조화로웠다.

오두막으로 향했다. 지은 지 적어도 삼사십 년은 되었을 법한 모양새의 오두막이었다. 외벽엔 곰팡이가 피었으며 한쪽 지붕이 조금 내려앉았다. 처마 끝에서 인접한 나무까지 거미줄이 해먹처럼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관과는 다르게 현관문은 카드키로 열 수 있게끔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회사 카드를 꺼내 접촉시켰다. 또르르 소리와 함께 잠금이 해제되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옆 스위치를 올렸다. 전등이 켜지면서 오두막의 내부가 드러났다. 회사에서 몇몇 지점들의 시설과 인테리어를 업그레이드했다. 그게 삼 개월 전 완료되었다. 그 후로 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크게 바뀐 건 없었다. 기존에는 우드 계열의 세련되면서 따듯한 인테리어였었다. 거기에 몇몇 가구가 바뀌었을 뿐이다. 이를테면 현관 옆 나무 신발장이 스테인리스로 바뀐 것 정도? 별로 내키는 변화는 아니었다. 그는 쇠의 질감과 거기서 전해지는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불만을 가질 만큼 이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보름 남짓의 ‘휴게시간’은 그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 시간을 갖기 위해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계곡에 발을 담근 채 책을 읽고, 밤이 되면 무료하게 티브이 채널을 돌리며 꾸벅꾸벅 조는 시간을 위해. 사실 이 스테인리스 신발장은 그냥 신발장이 아니었다. 컴퓨터가 내장되어 있었다. 오두막을 향해 다가오는 특별한 물체 혹은 생명체를 감지해냈다. 예전에는 신발장 위에, 그러니까 현관문 옆에 커다란 모니터가 달려 있었다. 열여섯 개로 분할된 화면에는 오두막 주변에 심어 놓은 씨씨티브이가 송출하는 영상이 떠 있었다.

짐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티브이나 틀어 놓을까 하고 탁상 위에 놓인 리모컨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내려놓았다. 그는 고요를 원했다. 평정을 원했다. 티브이를 틀어 봤자 지방선거 뉴스만 요란하게 나오겠지. 그걸 안 볼 수 있을까.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지지율, 뜨거운 유세 활동, 그래서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M시의 뉴스를 안 볼 수 있을까. 애써 외면할 수 있을까. 그는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원했다. 일을 끝내고 ‘휴게시간’이 되면 모처럼 머리를 식히며 들고 온 책을 읽는 그런 패턴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도착했어?”

치타였다.

“응. 왜?”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딴 데 안 셌고 앞으로 딴 데 세지도 않을 거야.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냥. 회사 쪽 소식 좀 전해줄까? 궁금할 거 아냐.”

치타는 가장 가까운 회사 동료였다. 물론 일반적인 회사가 아닌 만큼 일반적으로 가장 가까운 회사 동료 같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장 가까운 회사 동료여서 개인적으로 연락도 주고받았다. 그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대표와 치타뿐이었다.

“뭔데.”

“정해진 건 아니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너 미남으로 다시 태어날 것 같아.”

아무래도 역시.

“이참에 코도 좀 높이고 눈도 좀 더 키워야겠네.”

그가 말했다.

“나쁘지 않겠네. 거기에 특별 수당도 따로 챙겨 준다나. 붓기 빠지는 동안 신나게 놀면 될 거야. 당분간 해외에 머물러도 되고. 대표님이 넌지시 말하는 걸 들었는데, 해외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고.”

“해외에도 지점이 있나?”

“거 참 지점 되게 좋아해.”

치타가 혀를 찼다.

“좋으니까 좋지.”

“아무튼 곧 공식적으로 명령이 내려질 것 같아.”

이번엔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습관이었는데, 그만 말하고 싶을 때 이쯤 하면 됐겠지 싶을 때 쩝 하고 소리를 냈다. 그는 치타의 입속을 떠올렸다. 꽤 부드러웠지.

그들은 입사 동기였다. 신고식을 치르고 며칠 뒤였다. 치타가 남자화장실까지 그를 쫓아와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뭐 하는 거야. 그가 묻자 치타는 눈짓으로 아래를 툭툭 치더니 바지를 내리라고 했다. 뭔 개 같은……. 그가 한숨을 쉬자 치타가 방아쇠를 걸었다. 그가 할 수 없이 바지를 내렸다. 치타는 팬티까지 내리라고 했다. 결국 팬티까지 내렸다. 치타는 느릿하게 허리를 수그리며 총구를 심장 쪽에 박아 두고 그의 성기를 핥았다. 순식간에 그의 성기가 곧추섰다. 치타는 꽤나 능숙하게 그의 것을 빨고 핥고 깨물었다. 긴장감, 기묘한 상황에서 오는 자극, 그래서 빨리 끝났다. 치타는 입 안 가득 그의 것을 받아내더니 화장실 바닥에 타악 하고 뱉었다. 그제야 총구를 내렸다. 뭐 하는 짓이야. 그가 묻자 치타가 말했다. 나 레즈비언인데, 내가 이렇게 된 게 열 살 때부터였나. 사촌 오빠가 지 거시기를 내 입에다가 넣잖아. 그래서 남자 거시기가 그렇게 싫어졌는데 내가 기분이 너무 안 좋을 땐 이 짓을 해. 미안하게 됐어. 요즘 내가 다이어트를 해서 기분이 오락가락하거든. 방금 전에 정말 미칠 것 같았어.

우리는 알아야 해. 이보다 더 역겨운 게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걱정 마.”

그가 전화를 끊었다.

그 이후 치타가 다이어트 때문에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일은 없었다. 어쨌든 그 때문에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그가 유일하게 농담을 건네는 사람이 치타였다. 네 여친도 다이어트 하면 그렇게 풀어?

그러나 요즘은 농담을 주고받는 일이 없었다. 그 일, 그러니까 그 의뢰를 받은 이후로. 그는 마음의 여유를 잃었다. 괴로웠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 쪽으로 향했다. 가방 지퍼를 열었다. 책을 열 권 정도 챙겨 왔다. 그중에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제 1권』을 집어 들었다. 소파로 다시 돌아와 반쯤 누운 채 책을 펼쳤다.

 

밤이 깊었다. 한기가 오두막의 두터운 외벽을 뚫었다. 이제 여름도 지났다. 카디건을 챙겨 오지 않은 걸 떠올렸다. 무릎 위에 펼쳐진 책이 엎어진 채 놓여 있었다. 그는 책을 접어 탁상 위에 올려 두었다. 총 세 권으로 나뉜 책이었고 한 권당 사오백 페이지가 되었다. 이야기는 느리게 흘러갔다. 그래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는 이렇게 잠드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지 몰랐다. 잠들기 위해.

불면은 직업병이었다. 밤마다 공포에 사로잡히는 건 아니었지만―그 단계는 이미 삼 년 전에 뗐다― 이상한 위기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몇 번을 확인하고 누운 건데도 침대 아래서 갑자기 누군가 뛰쳐나와 식칼로 그의 목을 그을 것 같았다. 그런 환상에 젖어 있다 보면 새벽 네 시가 되었다.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제압하고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그런 환상은 겪지 않았다. 그건 늘 의문이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고 냉장고 앞에서 차가운 물을 마시면서 그는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웃기지도 않네.

그에게 희생된 누군가의 가족 혹은 연인이, 친구가 혹은 지인이 그의 목을 노린다고 치자. 과연 그의 목을 딸 수 있을까. 그보다 숙련된 킬러는 이 나라에서 찾기 어려웠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그보다 총을 더 잘 쏘는 명사수가 있을지언정 그보다 사람을 더 잘 죽일 순 없을 터였다. 그보다 칼을 더 잘 쓰더라도 칼로 배때기를 쑤시는 건 그가 훨씬 잘할 터였다. 약을 쓰든 사고사로 위장을 시키든 어쩌든 그가 더 잘했다. 혹여 그보다 숙련된 킬러라고 한들, 과연 그렇게 몰상식하게 그의 목을 노릴까. 침대 밑에 숨어서?

웃기지도 않아.

차가운 물을 한 잔 더 마신 후 그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잠시 선잠에 들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씻고 정장을 입고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차를 몰고 도시의 도로를 달린다.

그가 ‘휴게시간’을 그리 좋아하는 건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이렇게 책을 읽다 까무룩 잠이 들어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직장인들처럼 출근하기를 싫어했다. 그런 부분에선 일반적이었다. 그는 오늘부터 ‘휴게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책을 읽고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 배고프면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면서, 그러면서 잠들고 깨기를 반복할 것이다.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선―회사가 제공하는 지점에선 그 이상한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의 침대 밑에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의 목을 노리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 이 오두막에 있으면 더욱 그랬다. 커다란 벌레의 까맣고 딱딱한 외피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치타 같은 경우 ‘휴게시간’에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다녔다. 굳이 대표와 말다툼을 벌이면서까지. 사람 많은 관광지를 찾아다녔다. 알고 보니 정말 죽어라 놀았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잠이 잘 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레즈비언이어서 그런 건가.

배가 고팠다. 깜빡하고 풀어 놓지 않은 짐 가방이 떠올랐다. 소고기며 야채 등 냉장고에 넣어 두어야 할 것들이 좀 있었다. 그는 냉장고에 그것들을 채워 넣고 싱크대 선반에서 냄비를 찾았다.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먹을 생각이었다.

회사의 방침이었다. 일을 끝낸 후 은신하는 시간을 갖는 것. 그러면서 재충전도 하는 것. 누군가를 죽이고 나면 손에 뭐가 좀 묻으니까, 그거 좀 털어 내는 시간을 갖는 것. 사실 그럴 게 있나 싶기도 했다. 뭐 털어 내고 자시고 할 게 생기지 않았다. 단지 직업이니까. 어쨌든 이곳과 같은 지점이 이 나라에 스무 군데 정도 되었다. 깔끔하게, 철저한 보안 하에 관리되고 있었다. 늘 궁금했다. 대표는 의뢰인과 면담을 할 때 목숨 값으로 얼마를 부를까. 얼마를 부르고 얼마를 기꺼이 지불하기에 스무 군데나 되는 별장을 갖고 있으며, 도심 한가운데에 번쩍번쩍한 십이 층짜리 빌딩을 갖고 있을까.

라면을 먹으면서 그는 소주 한 병을 깠다. 핸드폰을 보니 문자 메시지가 두 통 와 있었다. 한 통은 대표에게서 온 메시지였고 나머지 한 통은 치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대표는 잘 도착했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는 그렇다고 답신을 보냈다. 치타에게서 온 메시지는 조금 의아스러운 것이었다.

거시기.

그는 굳이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한 달 전이 그리운 건지 몰랐다. 사나흘에 한 번씩 되도 않는 음담패설을 주고받던 그때가. 라면은 물을 조금 넣었는지 다소 짰다. 소주는 달았다. 그리고 그는 한 달 전 찾아온 의뢰인의 타깃이었다.

라면을 다 먹었다. 소주도 다 마셨다. 그는 빈 냄비에 침을 탁 뱉었다. 왜 뱉었는지 모르겠지만 뱉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소파로 돌아가 책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티브이를 켰다. 가장 지루한 방송을 찾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최대한 뉴스 채널에는 머물지 않으려 하며. 기어코 찾아낸 방송은 골프 채널이었다. 그는 골프에 관해서 문외한이었다. 골프는 축구나 농구처럼 역동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눈요기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멋없는 복장을 한 중년들이 막대기를 휘두를 뿐이었다. 작은 공이 푸른 잔디밭을 가로지르고, 그뿐이었다. 그는 탁상 위에 두 다리를 걸쳐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꽤 유명할 테지만 그로서는 전혀 모르는 백인 남자가 꽈배기처럼 허리를 꼬며 골프채를 휘둘렀다. 하얀 골프공이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말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듯 푸르디푸른 잔디밭 어딘가에 꽂혔다. 벌써부터 졸리려 하는군. 그는 생각했다. 이 년 전이었던가. 딱 한 번 골프장에 가서 골프란 걸 해봤다. 사실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얼굴만 비추면 되는 줄 알았다.

어이, 여기야. K그룹의 총수는 생각보다 체격이 왜소했다. 몸에서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났다. 땀 냄새인 것 같았다. 좋은 걸 많이 먹어도 몸뚱이 냄새는 어쩌지 못하나 보군. 총수는 눈 코 입이 바투 몰려 있었고 그래서 인상이 좋지 못했다. 어쩐지 퍼그를 연상케 하는 인상이었다. 성격 못된 퍼그 같았다. 숨소리는 일정치 못했고 그래서 조급한 느낌을 주었다. 별거 없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표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가 사람 좋게 웃었다. 허리를 수그리며 총수가 건넨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덕분에 사업이 잘 되어가. 참 고마워. 총수가 끌끌거리며 웃다가 이거 마저 치고 얘기하지, 라고 말하며 대표를 물렀다. 대표가 절도 있게 물러났다. 총수가 골프채를 휘둘렀다. 뭘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자세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총수가 골프채를 캐디에게 던지듯이 건네고는 대표와 그 뒤에 서 있는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자네가 이거지? 총수가 그에게 총 모양을 한 손을 겨누었다. 그러고는 빵야빵야. 대표가 난감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사 안전이 최우선인 대표였다. 골프장에는 그들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대표는 총수 뒤편에 서 있는 젊은 캐디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쪽으로 꺾어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한번 보고 싶었어. 그 새끼를 조져 버린 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과는 다르네. 평범하게 생겼어. 으으. 무서워.

골프장 이곳저곳을 돌면서 총수와 대표는 끊임없이 얘기를 나눴다. 그가 잘 모르는 얘기들뿐이었다. 증시며 현 정권에 따른 부동산 정책 등.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이렇게 불려 나와 불만스러웠다. 일주일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다. 청탁 한 건을 맡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타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국가대표팀 코치였는데 의뢰인이 원하는 방식은 사고사였다. 매스컴에 노출된 인물이 아니었기에 아주 복잡하게 시나리오를 짤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인물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어이 자네, 이리 와서 한번 쳐봐. 느닷없이 총수가 그에게 손짓했다. 그는 당황했다. 그리고 대표를 바라보았다. 대표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골프채 잡을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잠깐 얼굴만 비추면 돼. 우리 회사 쪽에 꽤 도움이 될 연줄이야. 라이언 네가 좀 힘 써주라. 무표정하게 있지만 말고 가끔씩 웃어도 주고 말야. 대표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서 억지로 웃으며 따라다녔었다. 어서 잡아봐. 한번 실력 좀 보자고. 총수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재촉했다. 그는 할 수없이 캐디에게 골프채를 건네받았다. 잔디밭에 놓인 하얗고 작은 공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골프채를 휘둘렀다. 꽤나 어려웠다. 공을 치는 것 자체가. 그는 두어 번 헛스윙을 날렸다. 총수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골프채로 사람이나 패지, 씨발 공을 못 치네.

그는 건달이 아니었다. 사람이나 패고 다니는 뭐 그런 불량배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는 평범했다. 그 자신의 얼굴처럼. 그는 교양을 갖춘 그리고 더욱 갖추기를 원하는 대도시의 시민이었다. 붓고 있는 적금이 세 가지나 되었다. 결혼은 못하겠지만, 남들처럼 좋은 아파트를 얼마간 대출받아 구매하는 그런 평범한 미래를 그렸다. 그는 철저히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했다. 내일이라곤 전혀 생각도 못하는 그런 건달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단지 조금 특별한 일을 할 뿐이었다.

졸리지도 않고 재미만 없었다. 채널을 돌렸다. 결국 뉴스 채널을 틀었다. 마침 M시에 관한 지방선거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엎치락덮치락하는 지지율과 후보자가 오늘 쏟아낸 말들 따위가 화제가 되어 보도되고 있었다. M시는 그가 살고 있고 회사가 위치해 있는 대도시 바로 옆에 인접해 있었다. 정치적으로 꽤 주요한 도시였고 그 도시를 통과하면 대도시의 시장까지 넘볼 수 있었다. 그리고 대도시의 시장까지 통과하면 대통령 자리도 능히 넘볼 수 있었다. 여당과 그 여당이 배출한 대통령의 지지율이 여전히 높았다. 야당 쪽에서는 분열과 갈등만을 되풀이했고 그러는 와중에 여당에게 완전히 밀리는 추세였다. 그러던 중 야당 쪽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기를 끌고 화제를 끄는 인재가 나왔다.

M시의 시장 후보에 오른 S는 불평등을 말했고 균형과 기회에 대해서 말했다. 오늘은 이런 말을 했단다. P후보자님 말처럼 대수술을 한다고 칩시다. 그 다음엔 재활 치료해야 합니다. 근데 그렇게 해서 건강이 완벽하게 되돌아올까요. 우리는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부작용 있을 수 있어요. 우리 사회, 병들고 썩었지만 수술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병 낫게 하고 썩은 살 되돌릴 수 있습니다. 수술까지 필요 없는데 굳이 수술실까지 끌고 가는 거, 그거 의료 사고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이때야말로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뜯어고치고 뭐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 바로 그겁니다.

가벼운 네거티브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네거티브를 하지 않지도 않았다. 교묘하게 상대 후보의 약점과 치부를 드러냈다. S의 방식은 날카로웠다. 숙련되어 있었다. 별일 아닌 사생활에 불과하지만 S의 입을 거치면 커다란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S는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냈고 상대 후보로부터 지지율을 빼앗아 왔다.

S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타깃으로 삼았다. S는 킬러를 고용해 킬러인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 식탁 쪽으로 향했다. 가방 안쪽 깊숙한 곳에 손을 밀어 넣었다. 차근차근 가져온 장비들을 끄집어냈다. P99와 최근 구입한 단도, 투명한 액체가 든 엄지손가락만 한 유리 용기. 그것들을 식탁 위에 일렬로 내려놓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휴게시간’은 보름 동안이었다.

 

-

 

오두막에서 사흘을 보냈다. 한낮에는 햇살이 좋았고 따듯했다. 그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 계곡물에 두 발을 담근 채 책을 읽었다. 그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제 2권』을 읽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꽤 재밌어졌다. ‘악마, 이반 표도로비치의 악몽’ 파트를 읽고 있었는데, 섬망증에 걸린 이반의 환각인지 실제 악마인지 알 수 없었으나 갑자기 나타난 그 중년의 신사가 썩 마음에 들었다. 신사는 달변가였다. 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으나 그렇다고 말 자체를 싫어하지 않았다. 재밌게 이야기를 푸는 사람이 내심 부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든 신사의 말 중에 특히나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1000조 킬로미터를 걸어가는 형벌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걸 다 걸어야 그제야 천국의 문이 열렸다.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있었다.

‘악마, 이반 표도로비치의 악몽’ 파트를 마저 다 읽고 그는 책장을 덮었다. 어둠 속에서 1000조 킬로미터를 걸으면, 그러면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 사람도 그러면 될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생각이―정확하게 말하자면 느낌인데, 그러니까 죄의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수없이 사람을 죽였다. 독살하기도 했고 차로 들이박고 사고사로 위장하기도 했다. 조금 더 거친 작업을 해야 할 때는 칼로 배때기를 쑤시거나 미간이나 관자놀이에다 총알을 박아 넣기도 했다. 제법 죽였다. 그러나 그것은 죄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합법적인 죄였다. 살인이 아닌, 프로젝트였다.

문득 떠올라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인터넷을 켜고 그가 마무리한 최근 의뢰를 검색했다. 검사 하나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풋내기 검사였는데 빌어먹을 정의감에 불타서 골치를 아프게 한다고 했다. 여기저기 들쑤시는데 봉투는 받지 않으니 정말이지 빌어먹을 정의감이 아닐 수 없다고. 매스컴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복잡한 시나리오를 짤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무슨 낌새를 차린 건지 아니면 촉이 좋은 건지 풋내기 검사는 지나치게 조심성 있게 행동했고 무엇이든 경계했다.

완벽하게 작업할 필요는 없어. 의뢰인 쪽에서도 어느 정도는 힘 써 준다고 했으니까. 근데 라이언 자네, 그 문제 때문에 실력 발휘 못하는 건 아니지? 스트레스 푼다고 생각하고 조금 과감하게 밀어붙여봐. 대표가 그렇게 말하고는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몇 번을 얘기했는데, 대표는 자꾸 그렇게 담배를 물려주었다.

올드한 시나리오를 택했다. 화끈한 의뢰인의 경우 이런 올드한 시나리오를 좋아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위장이었다. 이를테면 자살로 위장한다든가 교통사고 등의 사고사로 위장한다든가 하는. 생각보다 이걸 선호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몇몇 과격한 부류는 총을 쓰기를 원했다. 금액이 몇 배로 뛰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생각보다 총을 쓰는 일이 많았다. 칼을 쓰는 일도 많았는데 그건 그가 제일 싫어하는 시나리오였다. 몸에 피를 묻혀야 했고 그래서 찝찝했다. 안전상의 문제야 총보다는 훨씬 낫지만 기분이 구렸다.

비 오는 날, 그는 풋내기 검사의 배때기를 어느 골목길에서 쑤셨다. 한두 번만 쑤셔야 된다는 걸 알았지만 어쩐 일인지 참을 수 없어 두 번인가 세 번 더 쑤셨다. 발끝에서 찌르르 전기가 일었다. 그는 간신히 칼을 거둬들이고 검사의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챙겼다.

그는 그 검사의 숨결을 떠올려보았다. 검사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 그의 양어깨를 움켜쥔 채 그의 오른쪽 뺨에 거칠게 숨을 뱉었다. 숨은 뜨거웠다. 달콤한 향이 조금 맡아졌다. 빗속에서 숨결은 빠르게 부서졌다. 눈을 마주쳤던가. 그렇더라도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사는 짤막했다. 검사가 무식하게 살해당한 사건치고는 우스울 정도로 짤막했다. 이미 유력 용의자가 붙잡혔다. 회사와 의뢰인 측에서 협의 하에 고른 용의자일 터였다. 그저 그런, 깡패 새끼. 이미 범행을 시인했다. 늘 궁금한 건데 저런 새끼는 어떻게 포섭하는 걸까. 대표는 저런 사업도 하는 걸까. 회사의 육식동물을 대신해 잡혀 들어갈, 먹잇감이 될 초식동물을 사육하는 사업을.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힘깨나 쓰는 혹은 돈깨나 쓰는 의뢰인을 주로 맡게 되면서 이런저런 시설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더 좋은 상품을 생산하려면 공장을 늘리고 장비를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계곡물에서 발을 뺐다. 오랜 시간 차가운 계곡물에 담그고 있었던지라 발목 아래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기지개를 폈다. 점심때가 되었다. 구질구질한 생각은 그만두어야 할 때였다. 아침에 미리 재워 둔 스테이크를 구울까 싶었다.

그런데 S는 의뢰를 맡기면서 일말의 죄의식이라든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소설 속 신사는 이런 말을 한다. 옛날 저승에는 별의별 고문법이 다 있었는데 요즘은 도덕적인 것들이 점점 더 많이 생겨나선 ‘양심의 가책’과 같은 헛소리뿐이라고. 누가 이득을 보겠는가. 득을 본 건 오로지 양심 없는 자들뿐이라고. 원래 양심이 없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낄 리가 없지 않느냐고. 그들 대신 여전히 양심과 명예를 지키는 점잖은 사람들이 고생만 한다고.

S에겐 어떤 고문이 들어맞을까. 어떻게 해야 고통스러워할까.

그는 고문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죽이기 전에, 고통을 주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1000조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형벌을 주고 싶었다. 물론 고문은 그의 방법이 아니었다. 그는 킬러―우습게도 S는 그가 킬러가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였다. 그러나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밤이 되었다. 그는 준비가 마쳤다.

시나리오를 짜보았다. 시뮬레이션도 돌려보았다. 탁월한 가능성을 가진 시나리오가 몇 가지 나왔다. 가장 훌륭한 건 약을 쓰는 것이었다. S의 사무소까지 침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S의 집에 침입할 생각이었다. 일단 그자가 사는 데를 둘러보고 싶었다. 그리고 사용감이 썩 있는 컵에다 약을 묻혀 놓는다. S는 오른손잡이였다. S는 혼자 살았다. 간단한 일이었다. 그가 소지한 약은 몸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대략 반나절이면 사라졌다.

다른 방법도 있었다. P후보 지지자의 범행으로 위장해 사고를 내는 것이었다. P후보의 열렬 지지자 정도야 수두룩하니 구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 지지자는 트럭을 몰 것이다. 농약이 좋겠다. 공식적으로는 자살이다. S를 덮치기 전에 미리 목숨을 끊어 놓아야 할 테니 여러 가지 복잡한 트릭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 정도 수고는 충분히 할만 했다.

그 외에도 두어 가지 썩 괜찮은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방법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S의 머리통을 부수고 싶었다. 그냥, 어느 적당한 빌딩 옥상으로 올라가 저격할 것이다. 트렁크 밑 공간에 M-24가 있었다. 애초에 그는 이렇게 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래서 굳이 챙겨 왔는지 몰랐다.

그는 눈을 감고 떠올렸다. 옥상에 올라, M-24를 빠르게 조립한다. 한 발이면 충분하다. 조준경에 오른쪽 눈을 가져다댄다. S는 화려하게 그리고 믿음직스럽게 웃으며 유세를 하고 있다. 뉴스를 보니 S의 지지율이 근소하게 P후보를 앞지르기 시작했단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조금 더 격차를 벌렸을 테다. S는 즐거울 것이다. 머리통이 박살나기 전까지는. 방아쇠를 당기고, M-24의 반동이 가라앉기도 전에 S의 머리통은 박살난다. 피와 뇌수가 튀고 산산이 깨진 머리뼈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다. S는 시민과 나누고 있는 악수를 멈추지 않는다. 꽉 잡은 손에 힘이 살짝 풀리지만 여전히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든다. 삼 초 정도 걸릴까. 아니면 이 초 정도 걸릴까. 몸이 기운다. 추악한 몸이 기운다. 그리고 그 몸이 바닥에 닿는다. S는 저승에서 무슨 형벌을 받게 될까. 어둠 속에서 1000조 킬로미터가 되는 길을 걷게 될까. 머리 없는 몸으로, 비척비척 걸으며.

이렇게 죽여도 되는 걸까. 납치할 수는 없을까. 여전히 S를 고문하고 싶었다. 때리고 싶었다. 손가락을 끊어뜨리고 싶었다. 무릎을 박살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S의 입에서 그가 듣고 싶은 말이 나올 때까지 S의 신체를 하나씩하나씩 잘라 낼 수도 있었다.

아니다. 그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살인마가 아니었다. 단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할 뿐이지, 미치광이 살인마처럼 살인을 즐기고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평범한 인상에 말수가 적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독서를 즐기는 킬러일 뿐이다.

M-24를 쓰자. 그는 결정을 내렸다.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통해 S의 일정을 검색했다. 당장 내일이 적당할 것 같았다. M시 번화가로 나와 거리에서 유세 활동을 할 예정이었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제법 오를 만한 빌딩이 많았다. 오늘밤 출발하면 새벽에 M시에 도착한다. 오전 동안 조사를 마치면 되었다.

몸에서 수면욕이 싹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언제든 어떻게든 충분히 편안하게 자고 싶다는 욕구, 그리고 압박감. 그게 사라졌다. 침대 밑에서 그를 노리는 킬러가 퇴치 주문을 들은 망령처럼 스르륵 먼지만 날리며 사라졌다. 의뢰의 막바지에 이를 때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말똥해진다. 그저 하나만 본다. 맹수가 먹잇감을 노리듯.

이건 웃기네.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과 칼과 유리 용기를 챙기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치타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거시기.

그가 고개를 절레 저으며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장비들을 챙겼다.

현관 옆 신발장을 열었다. 신발장 안쪽 키보드에 코드를 입력했다. 미리 알아 둔 코드였다. 기술자는 상당한 금액을 원했다. 그래서 적금 하나를 깨야 했다. 아무튼 이제 그는 여기에 얌전히 있는 셈이 되었다. 신발장을 닫고 오두막을 나섰다. 차에 타 내비게이션에 M시를 입력했다. 새벽 세 시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 뒤 기억은 어렴풋하다. 산을 내려가는 비포장도로를 빠져나오자마자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길바닥에 무언가 장치를 깔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차가 도로를 벗어났다. 묵직한 충격과 함께 에어백이 터졌다. 아니, 터지지 않았던가. 핸들에 머리를 박았지 싶기도 했다. 어쨌든 의식은 있었다. 곧 끊어질 실처럼. 그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박았다는 사실을 인지했는데 머리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게 힘들었다. 운전석 쪽 문이 열렸다. 그의 목에 전기가 튀었다. 전기. 그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오두막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팔은 뒤로 꺾인 채 나무 의자 등받이에 묶여 있었다. 두 다리는 의자 다리에 묶여 있었다. 포박은 단단했다. 그는 주변을 살폈다. 짧은 단발에 입꼬리가 두드러지도록 축 쳐지고 턱이 네모난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여자의 입술은 붉었다. 익숙한 검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두통이 심했지만 견딜 만했다.

“여긴 웬일이야.”

그가 물었다.

“얌전히 있었어야지. 라이언, 이제 나도 어쩔 수 없어.”

치타가 고개를 저었다. 치타는 슬퍼보였다.

“계속 잠복해 있었어?”

“맞아.”

치타가 느리게 끄덕였다.

“저 신발장 불량이군.”

“그런가봐.”

물론 불량은 아닐 것이다. 치타를 감지하지 못한 건 그러도록 미리 조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날 죽일 거야?”

“아마 그래야 할 거야. 죽기 싫으면 불구가 되어야 해. 죽는 게 나을 거야.”

치타는 미안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치타가 리모컨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티브이 화면이 켜지면서 익숙한 공간,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은 잠자코 그를 바라만 보았다.

“대표님, 왜죠?”

대표가 마른세수를 했다. 동작은 느렸고 그래서 사뭇 진지해보였다. 손을 떼자 얼굴이 다시금 드러나 보였다. 안 그래도 짙은 눈썹이 더욱 짙어 보일 만큼 대표의 표정은 심각했다.

“시장님과 함께할 일이 많거든. 사업이란 게 그래, 라이언.”

스피커에서 대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장님?”

“곧 시장님이 되시지.”

S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애초에 저를 죽일 생각이었습니까?”

그가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반반이었어. 시장님과 앞으로 쭉, 오래오래 쭉 갈 예정이거든. 언제까지 사람 죽이는 짓만 해야 하나. 새롭고 더 좋은, 그러니까 합법적인 사업도 해봐야지. 그런데 자네를 살려둔 채 자네와 함께 가면, 이거 좀 곤란하잖아. 당장이야 얌전히 있는다지만 언제 회까닥 돌아서 시장님을 죽이려 들지 모르지. 그러니까 안전을 위해서라면 자네가 사라져줘야 했었네. 근데, 그래도 우리 식구잖아 자네는. 내 닉네임이 뭔지 알지. 울프야 울프. 리더 울프는 말이야. 항상 선봉에 서며 식구를 보호해. 추운 겨울에는 식구를 먹일 식량을 구해 혼자서 눈 덮인 산을 떠돌아. 몸을 사리는 법도 없고 먼저 자기 먹을 걸 챙기는 법도 없어.”

“그럼 대표님 당신은 리더가 아니군요.”

한순간 뒷머리가 심하게 욱신거렸지만 신음은 내지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미안하지만 자네 하나만 식구가 아냐. 우리 회사, 자네를 빼고도 식구가 열둘이야.”

대표가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아마 창밖을 보고 있겠지. 그는 떠올렸다. 회사 회의실에서 보는 바깥 풍경을. 빌딩들이 반딧불처럼 빛나고 있고 대로변에는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강에선 화려한 조명을 단 유람선이 느리게 떠다닐지도 몰랐다.

“그래서 저를 죽일 겁니까?”

그가 물었다.

“그럴 거네. 대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려고 했나. 어쩌면 자네는 살 수 있었어. 이 나라에서는 살기 어렵겠지만 다른 나라 어딘가에서, 그래 햇볕 좋은 해변 같은 데서 칵테일이나 쪽쪽 빨면서 살 수도 있었어. 야자수가 수놓아진 셔츠를 입고 말이야. 그럴 생각도 있었어. 정말이야 이건.”

대표도 치타처럼 슬퍼보였다.

“아뇨. 제가 얌전히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날 죽였을 거예요. 그런데 저를 죽이면 당신 식구들이 예전처럼 당신을 믿고 따를까요.”

그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어쩌면 그랬겠지. 난 널 죽였을 거야. 어쨌든, 오 년 간의 자네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네. 이 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네. 이게 예의지. 우리끼리는 그냥 죽고 죽이면 안 되니까. 진심으로 고맙네. 회사는 앞으로 더욱 번창할 거고 난 자네를 잊지 않겠어. 그리고 말이야. 공식적으로 자네는 퇴사한 거야. 해외 어디 좋은 데에서, 해변에서 칵테일이나 쪽쪽 빨면서 남은 생을 보내는 거야.”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티브이 화면이 검게 변하면서 통신이 끊겼다.

치타는 라이언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넌 자기 식구를 죽이는 리더 밑에 남겠다 이거야?”

그가 물었다.

“그렇게 됐어.”

“나를 죽이고 회사로 복귀하면 대표가 네 머리통에 한 방 갈길지 어떻게 알아?”

치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치타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대표가 무엇을 약속했지?”

그가 물었다.

“퇴사. 난 앞으로 조용히 살 거야.”

“그것 때문에 친구를 죽이나?”

“우린 친구가 아니야. 그저 회사 동료일 뿐이지. 이미 끝났어. 고통 없이 끝내줄게.”

치타가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치타의 손은 뜨거웠고 그래서 가라앉던 두통이 다시금 커졌다.

“그런데, 거시기는 뭐야?”

그는 한 가지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아직 기회는 있었다.

“우리만의 암호였잖아. 회사 쪽에서, 그러니까 내부에서 어떤 위협이 있을 때 서로에게 경고해주기로 한 거. 까먹지 말았어야지. 어쩌면, 그래 어쩌면 살 수 있었잖아. 알아차리고 얌전히 있었어야지.”

“맞아. 그랬지. 그거 그 뜻이었어. 치타 넌 믿지 않았어, 회사도 대표도. 근데 이제 믿는 거야?”

치타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입맛을 쩝, 쩝 다셨다. 치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에게 기회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아직 있을지 몰랐다.

라이언은 잠자코 그녀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고통 없이 끝내줄게.”

이윽고 치타가 투명한 액체가 든 주사기를 들고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하지.”

그가 또렷하게 발음하며 말했다.

“뭔데?”

치타가 그의 턱을 치켜들고 목의 혈관을 찾았다.

“우리 입사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말이야. 기억나지. 네가 기분 안 좋을 때 하는 거.”

“그걸 해달라고? 지금?”

치타가 놀라며 물었다.

“그래, 그거. 내가 지금 기분이 굉장히 안 좋거든. 너도 기분 안 좋을 거 아냐.”

포박은 단단했지만 어쩌면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붉게 칠한 치타의 입술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만약 이게 성공한다면, 그는 회사로 복귀할 것이다. 깔끔하게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S를 이 오두막으로 데려올 것이다. 죽이기 전에 고통을 줄 것이다.

그는 이곳이 좋았다. 산과 계곡과 풀냄새, 흙냄새, 물 냄새.

모든 것을 끝내고 나면 책을 마저 읽고 깊게 잠들 것이다.

세계가 조화롭게 숨 쉬는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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