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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생명 조금

2023.04.20 19:5904.20


"내가 왜 여기 있는거죠."

영은 눈앞의 신비스런 존재에게 물어본다.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선을 모으고 쳐다보면 투명하게 보이고 저쪽 반대편 벽이 보였다. 벽이긴 했지만 벽처럼 보일뿐이다.

벽에는 흔히 아마추어 천문학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토성과 토성을 둘러싼 띠가 배경으로 걸려있다. 그러나 그 정밀함이나 크기는 압도적이다. 바로 눈앞에 토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안해. 자네는 죽은거라고 봐야겠지. 그건 내가 한 짓은 아니야. 자네는 사고로 지구에서 죽었고 난 자네가 저쪽으로 가기 전에 잠시 잡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네."

"내가 죽었다고요. 저쪽이라뇨? 그리고 왜 잡아놓았죠?"

"죽었다는 건 의심하지 않는군. 저쪽이라면 소위 저승세계라고 불리는 곳을 말하는거야. 나도 그곳은 몰라. 난 그쪽에 갈 능력도 없고 갈 생각도 없지. 너희 같은 존재는 언젠가 가겠지만 난 갈 수 없는 곳이거든."

영은 자신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눈앞의 존재가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왜 날 잡아놓았죠?"

"좀 이기적인 건데. 난 너무 심심하거든. 말상대가 필요해. 왜 날 심심함을 느끼는 존재로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하여튼 심심해."

"단지 그 이유만으로 날 잡아 놓았나요?"

영은 어이가 없다. 눈앞의 존재는 부끄러워하며 부드러운 빛을 발한다. 얼굴과 몸은 투명한 상태지만.

"여긴 뭐하는 곳인가요.?"

"일종의 감시초소지."

영은 대화에 어려움을 느낀다. 존재가 영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게 느껴진다. 그러나 설명은 답답한 말로만 한다.

"제 생각을 알고 계시잖아요. 그냥 대답을 해주시면......"

"대화란 좋은거야. 아무리 내가 네 생각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네가 말로 하지 않는걸 대답하는 건 내 독백이 될거고. 난 나의 마음을 자네에게 곧장 전달하는게 힘들어. 그러면 네가 저승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거든."

"그럼. 다시 여긴 뭐하는 곳이죠?"

"여긴 일종의 감시초소야. 무얼 감시하는가 하면. 간단해. 지구인을 감시하는 거지. 아니. 생명체로는 지구인을 감시하지. 다른 것도 감시하지만. 지금은 지구인들보다 더 위험한 게 있으니깐."

"뭐가 위험한거죠."

"저 띠."

"저 토성의 띠가 위험하다고요."

"지금 현재는. 앞으로 지구시간으로 일년간은 저 띠가 위험하지."

"어떻게 위험한거죠."

"간단해. 우주의 법칙을 깨뜨리려고 하거든. 토성의 띠는 다른 우주로 달아나려고 하고 있어."

"띠가 달아나요? 그건 생명체가 아니잖아요. 의지가 없는 것들이 왜 달아나죠."

"아. 미안하다. 넌 지구인이지. 마음을 읽고 있으면서도 이러니. 무능한 신의 전형이구나. 생명체는 생명체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잊었네."

영은 어리둥절해 하며 존재를 바라본다.

존재는 손을 든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에게 손을 드는 동작을 보여준다. 사방의 벽과 천장과 바닥은 갑자기 우주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토성의 띠가 있는 면은 변화가 없다.

영의 오른쪽에는 태양과 태양을 돌고 있는 수성이 있다. 적당히 빛이 차단되어 눈이 부시지는 않다. 태양의 흑점이 보였고 코로나가 꿈틀대고 있다.

왼쪽에는 바위 하나가 보인다. 영은 그것이 소행성이라고 짐작한다. 울퉁불퉁한 평범한 바위였고 그 뒤로는 반짝이지 않는 별들이 보인다.

뒤쪽에는, 영이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보이는데, 막 폭발하는 항성즉 초신성이 보인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물질이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실감이 안 난다. 그러나 거의 사실과 가깝다는 걸 영은 직감으로 느낀다. 아직 인간들은 항성이 폭발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수천만킬로미터의 가까운 거리에서는.

바닥에는 은하수가 보인다. 은하는 움직이지 않는다. 영의 시간감각으로 은하는 정지해있다. 영은 지구가 속해있는 은하계로 추측했다.

천장에는 별이 태어나고 있다. 하지만 영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사전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운의 물질이 모여서 별이 만들어진다는 지식이 영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짐작을 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건 거의 사실과 가까운 모습이라네. 적어도 자네가 볼 수 있는 가시광선영역에서는."

"네."

"설명해주지. 우주는 자신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지. 하지만 반대로 우주에서 탈출하거나 파괴하려고 하는 것도 많아. 난 그걸 막는 존재지."

"막는다고요. 어떻게?"

"일종의 토지신이라고 보면 될거야. 난 이 은하에서 반물질로 변하거나 다른 우주로 달아나는 물질이 없나 감시하는 거야. "

"왜요? 우주는 자신이 알아서 하지않나요."

"너희 지구인들은 자신이 알아서 하나? 아니지. 결과는 언제나 끔직했잖아. 물론 그건 자연스런 과정이지. 죽음조차도 자연의 한 부분이니깐. 물질로서 에너지로서 우주를 벗어나는 건 아니지.

우주는 더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어. 언제나 투정을 하고 자신 능력이상으로 일을 벌리고 있지. 생명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행성 몇개에 문제를 일으키지만 무생물인 우주는 한 은하계를 파괴하는 짓을 가끔 하거든.

자네 시간 기준으로는 은하는 움직이지도 않지. 너무나 긴 시간감각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나에게는 생동하는 우주야. 벌써 내가 실수로 다른 우주로 보낸 물질이 500kg이나 되고. 

난 아직 견습신에 불과하니 이 정도는 괜찮야. 제대로 된 신이라면 한 주기동안 1g미만이 되어야 하지. 이제 나도 요령을 알았지만."

"네. 그렇군요. 전 알아야 할 것이 많군요. 가르켜주실건가요."

"알려주지. 가능하다면 신이 하나 늘어나면 좋은거니깐. 아니더라도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는 존재가 있으면 좋으니깐. 다만. 생명체 중심의 사고방식을 버리는데 긴 시간이 필요할거야. 그리고 실제로 막는 방법을 배우는데는 더 시간이 걸리고.
난 심심함을 달랠 수 있지.."

영은 무생명의 우주를 배우기 시작한다.

 

 

// 하이텔 과학소설동호회에 올렸던 글을 제목을 바꾸고 내용을 수정해서 올립니다. 오래전이라 아무도 기억하진 못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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