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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하얀색

2023.04.20 15:1304.20

  그건 아마도 하얀색이리라.

  축축하고 흐물거리는 흙 속을 헤매이다 발 끝에 채이는 나무뿌리를 잡아당겨 들어 올렸을 때 뽑혀 나오는 썩은 가지는 분명 하얀색이리라.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백골의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반사광만을 따라 나아가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커다란 표본은 분명 하얀색이리라.

  표본의 아래, 위, 가슴을 온통 묶고 있는 금속 사슬 장신구는 세월의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낡고 부식되어 이윽고 떨어져 나갈 때에도 분명 하얀색이리라.

  이 땅을 파내고 또 파내어 이윽고 지상에 건립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더 이상 밤의 어둠을 밝힐 빛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이곳에 있는 작은 조약돌 하나는 분명 하얀색이리라.

  세상에 가득한 무덤과 박물관에서 사라진 것들에 대한 의미 깊은 장송곡이 더 이상 듣는 이가 없음에도 끝없이 우주를 향해 연주되고 있을 때 그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작은 별빛 하나는 역시 하얀색이리라.

  이윽고 이 땅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고 지상에서 지하로, 지하에서 지상으로 세상이 교차하며 무너진 콘크리트가 마술처럼 모습을 바꾸고 물렁거리는 흙이 단단해지기 시작할 때 그 모든 것은 하얀색이리라.

  아름다운 향기를 뿌리는 소녀와 보석같이 새까만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 긴 세월을 뒤로하고 마침내 다시 만났을 때 서로를 마주 잡은 두 손은 늘 그랬던 대로 하얀색이리라.

  그리하여 세상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고 땅에 있는 표본이 대륙으로 융기하여 거대한 석상의 모습으로 한 쌍의 인간을 내려다볼 때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얀색이리라.

  반짝이는 보석이 세월에 갈려 모래로 변하고 곤충의 사체가 부패하여 보물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산이, 바다가, 바람이, 별이, 나무가 입을 모아 노래하며 시간을 보낼 때에도 그것을 담은 한 폭의 도화지는 여전히 하얀색이리라.

  뇌가 모두 흐물흐물해져 녹아내리고 의식과 한 줌의 바람을 더 이상 구분 짓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유기물이 스스로를 희생하며 무기물에게 바치는 모든 것은 하얀색이리라.

  삼삼오오 모여 번창하는 생명들과 이윽고 등장하는 지배자 사이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새로운 사원 앞에서 그들이 모여 기도할 때 그 앞에 놓인 꽃은 흔하디 흔한 잡초와 같은 하얀색이리라.

  지도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생명의 견문은 넓어지며 전에 없던 세상과 모험에 대해 신비한 희망이 샘솟을 때 그들의 앞을 이전과 다름없이 가로막고 있는 바다에서 몰아치는 파도는 여전히 하얀색이리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번창하고 번성하여 모험의 시대가 저물고 도둑과 살인자, 기만자와 선동가가 다시 한번 곳곳에서 등장하여 서로를 모략하고 함정에 빠뜨리며 배신하고 배신당하기를 반복한 끝에 나란히 대지에 눕게 되었을 때에도 그들의 손은 변함없이 하얀색이리라.

  광물을 파내고 보석을 나르며 힘쓰는 자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늘을 향한 첨탑과 대지를 향한 갱도가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듯이 한 날 한 시에 동시에 무너져 내렸을 때에도 그 잔해는 반짝이는 하얀색이리라.

  땅이 진동하고 화염이 솟구쳐 오르며 혼비백산하는 생명들 위로 죽음의 재가 뿌려질 때에도 그보다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구름은 하얀색일 것이며 마구잡이로 쌓인 잔해와 쓰레기들 중에서 유일하게 반짝이고 있는 것은 하얀색이리라.

  어둠이 내려오고 역병이 창궐하며 망상과 의심이 날아다니는 파리처럼 재빠르게 세상에 퍼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서서 새로운 발자국을 기억 속에 남기는 이들의 마지막 뒷모습은 눈부신 하얀색이리라.

  모든 것이 부족하고 허망하여 만족과 욕심이란 단어가 서로를 향해 힘을 겨눌 때 생명의 물결은 세상을 휩쓸고 그들이 마주하는 곳마다 피가 흩뿌려져 끈적한 대지가 몸서리를 쳤을 때에도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은 모두 하얀색이리라.

  시간이 지나 빼앗긴 것들이 치유되고 잃었던 풍족함이 다시 되살아나 반짝이는 별빛은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하고 어둠은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며 푸른 것은 더 이상 푸르지 않게 되었으나 바람에 흩날리는 책들은 그대로 하얀색이리라.

  하늘이 번쩍이며 사라진 빛과 새로 등장한 빛에 대해 열띤 토론을 이어갈 때 거미줄처럼 얽힌 마천루가 숲을 채우고 빽빽하고 조밀한 것이 그렇지 못한 것들을 지탱하며 흡수하기 시작하여도 그 발아래 깔린 것들은 마지막까지 하얀색이리라.

  쇠퇴와 쇠락이 다시금 이곳에 강림하고 하나 둘 썩어 문드러지는 것들과 마모되어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들만이 남아 근근이 삶을 창조해 나갈 때에도 그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포자는 하얀색이리라.

  포자에서 태어난 온갖 버섯과 균류가 득실거리며 짧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빛을 잃은 자들은 예전에 어둠이 그랬듯 그림자 속에 숨어 시간을 보내며 오래된 옛 사원을 찾아 이제는 사라진 신께 기도를 올릴 때에도 그들의 앞에 놓인 대리석 제단은 여전히 하얀색이리라.

  이윽고 시간이 되어 다시 한번 그때가 돌아오고 늙고 지친 몸을 이끌어 문드러진 땅 속을 파고들기 시작할 때 그곳에서 떨어지는 생명의 진액은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하얀색을 보여주리라.

  그리하여 결국 이곳에 도달하여 마지막 시구를 입에 담고 축복과 저주를 번갈아 입에 담으며 낯선 표본 앞에,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 그 표본 앞에 다시 섰을 때에도 내 안에 담긴 하얀 것은 모조리 그대로-

 

  하얀색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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